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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바냐 1:11-13 / 모조품 / 230301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바냐

스바냐 1:11-13 / 모조품 / 230301

정인순 2023. 3. 1. 21:24

음성 동영상 Youtube

모조품

 

이근호
2023년 3월 1일                

 

본문 말씀: 스바냐 1:11-13

(1:11)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1:12)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1: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민족이 특이한 점은, 저들만이 직접 참 하나님을 만난 민족이라는 겁니다. 참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부정적으로 적대적 관계가 심화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을 몰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물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다녔고 양식없는 곳으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이는 자기 안위와 생존을 책임지는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섬길 용의가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실망시키는 여정이었습니다. 이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조건말고 인간이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제거하라”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10번 씩이나 원망했습니다.(민 14:22)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반가워해야 되고 놀라워해야 되는 것은, 참된 하나님의 속마음이 제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들이 창작해낸 그런 가짜 하나님, 엉터리 하나님말고 진짜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감격하고 놀라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가 예언한 그 앞으로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낱낱이 찾아내어 그들이 스스로 거주하려는 거주지와 생산수단, 생존수단을 모조리 다 파괴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를 지켜내는 방도를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에도 자신의 가치는 그대로 지켜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무엇이 옳은 지, 무엇을 그른지를 궁금해야하고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알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인들이 그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성만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이 인간세계 속으로 섞여 들어왔을 때, 인간들은 예수님을 이러저리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옳고/그름과 복/저주를 본인이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실은 인간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대상입니다. 저주를 새삼 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저주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저주 속에서 살다가 지옥이라는 영원히 저주의 세계로 빠져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코스는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이런 존재가 감히 성경을 해석해서 자신의 힘으로 저주에서 복으로 자기 신세를 바꾸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은 자기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죽었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말입니다. 아담부터 인간은 벌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아무리 많은 후손을 낳아도 낳는 쪽쪽 죽음으로, 저주로 내달리는 자들만 생산될 뿐입니다.

뱀에서 뱀이 나올 뿐입니다. 이런 자들이 성경을 보면서 나름대로 화와 복을 논합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오면 복이 되고, 자기에게 손실이 오면 화, 곧 저주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 판단 자체가 자율적입니다. 복과 저주는 인간이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리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분이 인간 세상에 오셨지만, 인간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 인간세계에도 보탬이 안 되는 적대적 인물로 간주해서 조치를 내려서 그분을 죽였습니다. 바로 이 조치가 화/복을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인간에게 더는 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부활을 보면서, ‘자신이 죽고 자신이 되살아 나는 것’을 부활로 여깁니다.

실은 부활이란 예수님이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부활과도 상관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계에서 ‘나’란 세상이, 심지어 하나님께서 뭐라도 해도 가장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놔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저주 조치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4) 즉 하나님께서 그냥 인간들이 행하는 자율성대로 내어 버려두는 것이 곧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겁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바는,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추방시키고 멸망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아니하면 결코 복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참된 하나님의 이러한 조치로 인해 모든 인간이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이 아니라 모조품에 불과함을 나타내 보이신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에 충족한 상태로 함께 하는 겁니다. 그 조건이란 인간이 자기에게서 떠나는 겁니다. 진리란 자신을 떠날 때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누가복음 1:41-42에 보면,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 속에서 마치 임신되듯이 들어오시지 않으면, 인간과 그동안 함께 악마는 필히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적대시하게 마련입니다.( 마 8:29) 성도가 복음을 말하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나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모조품은 괜찮은 결과만 챙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참 하나님은 일은 그 과정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고난에 주목케 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특출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이 들어오고 난 뒤에는 평범함을 압니다. 인간은 자신이 뭔가 의미있는 자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시면 성도는 충분히 자신이 무의미함을 기꺼이 받아드립니다.

인간은 자신이 유별난 존재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렇고 그런 존재에 불과함을 너무나도 고마워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것을 감사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화에서 복으로 바뀔 때에 필히 주님과 고난을 같이 함을 기꺼이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강-스바냐 1장 11-13절(모조품)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1장 11-13절까지입니다.

스바냐 1:11-13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구약성경 이스라엘 민족의 특징은 유일하게 하나님이 직접 다루었던 민족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이 직접 관여했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사는 땅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산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성사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불가능한 일인데 하나님은 그 일을 해내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홍해, 그리고 요단강 건너서 막강한 이방 민족의 군대를 쳐부수고, 기어이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과의 만남의 장소로서 성전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솔로몬이 성전 드릴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광야에서 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자 온 게 아닙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비게이션도 그런 내비게이션이 없습니다. 딱딱 지정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고 가는데 그 가는 길이 지도상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가짐을 조절하는 길이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할 때 하필이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갔고 하필이면 양식을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이끄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함께 있을 뿐이에요. 참 이게 보통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거지요. 하나님이 함께 있음, 그 조건만 달랑 하나 있고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여지는 완전히 초토와 됩니다. 다 잘라내 버려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먹을 게 없고 마실 게 없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다니시는데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죽음 속으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죽음 속으로 데려가면서 당연히 인간들은 불평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원망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모세를 통해서, 너희가 지금 먹을 게 없고 마실 게 없다고 네가 지금 염려하고 걱정하는데 문제는 너희들이 그 경우에라도 나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자, 말씀 다시 해보겠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민족이에요,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다른 민족은 그냥 상상한 우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가짜지요.

유일하게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함께 있으면서 어떤 식으로 함께 있느냐? “네가 스스로 살 수 없고 죽을 경우에라도 함께 있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민족이 될 때 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다 제공하고 좋은 것 다 주면서 너는 나랑 같이 살자, 가 아니라 반드시 무엇을 거쳐야 되느냐? 함께 있는 하나님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망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세워 놓고 원망하지 말라는 조건을 인간에게 요청하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좋게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부정적인 요소가 들어와서 이렇게 엮인 거예요. 부정적인 요소.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일체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왜?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생존하고 존재에 필요한 것들만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주지 아니함으로……”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우리 입에서 함께 있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오직 원망과 불평 외에는 아무것도 나에게서 나올 게 없다.” 에요.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은 뭐냐 하면, “네 속에 있는 것을 내가 강제로 끄집어낼 거야.”라는 작업이 되는 환경 쪽으로 이끌어가신 거예요. “하나님이 줬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것 다 삭제, “그것 다 빼. 그것은 다 가짜니까.”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민수기에 보면 백성들이 10번이나 하나님을 배반하거든요.(민 1:22) “이럴 것 같으면 하나님 믿지 않겠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우리는 하나님 말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그것도 열 번씩이나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난 소기의 그 취지를 드디어 완성시키는 거예요.

“나는 이런 하나님을 절대로 믿지 않겠습니다, 라는 그러한 고백이 나올 때 네가 바로 제대로 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줄 알아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벌이신 일에 우리는 곱게 참여되는 경우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벌이신 일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조작해서 믿는 것 말고 예배당 세워놓고 하나님, 하나님, 비는 것, 그것 말고 진짜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 우리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 제대로 된 하나님 만난 줄 알아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을 유일하게 같이 경험했던 그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이 이제는 멸망의 때를 맞이했습니다. 멸망 때를 맞이하면서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 스바냐 선지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어지는 조치는, 여기 12절에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있는 그 인간들을 낱낱이 찾아서 그들에게 뭘 하느냐?

그들에게 하나 예외 없이 벌을 내리시는데요. 13절에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건축하는 거요, 주거용이지요. 그다음에 포도원에 심는 것, 그것은 생계용이지요. 그리고 돈 모으는 것, 미래를 대비하는 용도지요.

지금 이게 인간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지요. 이러한 것을 일체 허락하지 않는 인간이 인간의 방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서 한번 살아볼까?’라는 생각, ‘내 미래를 근사하게 한번 개척해볼까?’라는 그 사고방식을 일체 허락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 그 하나님 만났거든 그걸 다행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왜? 이스라엘은 망하면서 ‘우리가 여기서 건질 것은 뭐냐?’ 진짜 하나님을 마주 대했다는 놀라운 체험이에요, 진짜 하나님. 가짜 하나님 말고. 인간이 자기 생계에 필요해서 부르짖는 그 하나님 말고요, 진짜 하나님, 진짜 하나님은 우리가 살 수 있는 그 근거지 그 바닥을 아주 거덜 내시는 분이에요.

거덜 내시는 이유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 빼놓고는 나머지는 다 삭제시킵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다.’ 빼놓고 다 삭제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느냐, 내가 얼마나 장래가 잘되느냐, 그 조건이라면 이것은 진짜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인간은 무엇이 진실이냐, 무엇이 거짓이냐, 라고 우리가 물을 수 있지요. “하나님,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옳은 길입니까? 내가 그릇된 길은 버리고 옳은 길만 알면 그 옳은 길로 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라고 우리가 하나님께 이야기하지요. 보통 기도할 때 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하는 거예요. “지금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가 나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네가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에게 잘 보일 생각만 충만하지 하나님께 적대적으로 살 의사가 없음을 우리는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내속에 어딜 봐서 하나님께 대들 마음이 있겠느냐?’ 그것은 가짜 하나님 만나서 그래요. 내가 상상한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와 적대적이에요.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지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당시 여호와 믿는 그 사회 속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살해당한 것이었습니다. 자, 예수님이 왜 사람들에게 죽었을까?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는가? 출발점을 그것부터 시작해야 돼요.

왜?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니까,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니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것도 하늘에 계신 여호와를 믿는다는 그 작자들이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죽인 이유가 뭐냐? 예수님이 착한 일을 적게 했습니까? 기적을 안 일으켰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인간들에게 적대적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원하는 것, 요구하는 것 일체 거절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땅에 있어서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이것보다 더 적대적인 발언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어떤 이야기도 너희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왜? 너희들은 땅에서 나서 땅에서 죽지만 나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너희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그것만큼 단절시키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을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돼요. ‘말씀을 측정하는 그 판단기준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 이런 뜻이에요. 주님에게서 나오는 그 말씀, 오늘 본문의 성경말씀부터 해서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해석력은 인간에게는 일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가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작업을 하신 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죽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숨을 안 쉰다든지, 혈압이 가파르다든지, 심장이 정지된 상태다, 그걸 죽은 것으로 보지 않아요.

성경에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끊어진 상태를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와요. “나가라. 하나님 있는 곳에서 나가라.” 이 관계 끊어진 것을 가지고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23, 24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렇게 관계 끊어진 것을 따라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아담의 족속들은 태어나면서 죽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 태어나고 결국은 늙어 죽고 그런 겁니다. 산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약 때부터 죽은 자가 사는 방식, 죽은 자가 사는 방식을 계속 실시해 왔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노아 같은 경우지요. 노아 같은 경우에는 “너 죽어 있는 것 내가 살려줄게.” 이게 아니라 “노아야, 네가 어딘가 그 안에 들어가라. 그러면 살 것이다.” 노아가 들어가는 그곳을 언약이라 합니다. 약속이라 하지요. 노아 때는 그 언약이 무슨 모습이냐? 방주 모습이었습니다. “네가 방주 안에 들어가라. 그러면 산다.”

그러면 아브라함 때는? “네가 아브라함에게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산다.” 이삭 때는 이삭 속에 들어가고, 야곱 때는 야곱 속에 들어가고, 모세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면 살고, 기생 라합 같이, 다윗 때는 다윗의 백성이 되면 살고, 마지막에 신약에 와서 새 언약은 내 살과 내 피를 마셔야 살고.

그래서 무엇 무엇을 해야 산다는 것은, 너는 지금 죽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끊어진 상태에서 기도, 전도, 헌금, 예배, 찬송, 뭐 어떤 것을 해도 그것은 끊어진 거예요. 왜냐하면 예배참석, 선교, 전도, 기도, 헌금, 이 모든 것, 찬양, 이 모든 것은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는 것을 안 받아요. 왜? 죽은 자의 것을 왜 받습니까? 죽은 자에게서는 죽은 자 밖에는 안 나오는데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인간은 죽었습니다. 그 죽는 이유가 뭐냐? 죽는 것은 이미 저주받았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미 저주잖아요. 저주받은 자에게서 나올 것은 헌금이라는 저주, 기도라는 저주, 예배참석이라는 저주, 성경 공부하는 저주, 설교하는 저주, 선교하는 저주, 전도하는 저주, 모든 것이 저주라는 이름의 봉사, 저주를 품은 봉사밖에 안 나와요. 저주를 품은 찬양밖에 안 나온다고요. 모든 것이.

그런데 방금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곧 무엇을 아느냐 하면, 내가 하는 일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일을 해도 그게 저주가 되게 하시는 주님의 판단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판단을 알거든요. 인간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고, 인간은 죽은 상태고 인간이 내보이는 것은 저주받아 죽어야 될 증거들만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 그렇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산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유일하게 만나서 오늘 본문 같은 이런 심판을 내리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심판받았다. 그래서 우린 손해 봤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는 엉망 되었다.’ 이렇게 슬퍼할 게 아니라 오히려 복인 줄 알고 기뻐해야 돼요. 왜? 진단을 아니까. 내가 나에게 내리는 진단 말고 직접 진짜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또는 예수님을 통해서 내린, 진단하시는 진짜 하나님의 진단을 접수했다는 이것이 바로 복이 되는 거예요.

몰랐던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내가 죽어도 상관없고 망해도 상관없어요. 왜? 진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계기와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망하면서 감사하는 거지요. ‘아, 진짜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그래서, 광야 때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원망을 열 번이나 했던 이유를 그래서 아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이 요구하는 것을 일체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 이걸 안다는 것 이게 얼마나 큰 복이냐,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이냐? 이게 복이잖아요, 이게! 지금 나만 복인가?

오늘 본문에 보면 12절에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도 내리지 아니하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누가? 멸망하는 예루살렘 거민들이 그 주장을 한 거예요. 따라서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느냐 하면,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복과 저주는 그 복이 그 저주고 그 저주가 그 저주다 그 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복도 저주고 그들이 말하는 저주도 저주가 된다는 거지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본인을 위해서 성경에 있는 복과 저주를 끌어 당겼던 본인 주장이기에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거기에 담아봤자 그 자체가 저주다 그 말이지요. 복과 저주는, 그 판단 그 기준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이것은 다 무효입니다. 안 받습니다.

인간의 복과 저주는 어떤 기준에서 나오는가? 내 생존에 유리하면 복이고 내 생존에 인생 사는데 좀 힘들면 그걸 저주 또는 화라고 판단을 해요. 누가? 인간이, 내가 그러니까 자기 기준을 포기 못했잖아요. 내 기준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진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을 계속 쥐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저주인가? 신약에 와야 그 내막이 풀립니다. 일단 뭐가 저주인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장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뭐가 저주냐? 네 맘대로 하세요. 이게 저주입니다.

이걸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자율성’이라 했는데 “그냥 네 맘대로 하세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너에게 간섭 안할게.” 이게 “버려두사”에요. “네 맘대로 해, 네 맘대로.” 이게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관계가 끊어져 있고 죽은 존재기 때문에 죽은 존재가 죽은 존재 값을 하는 거예요.

그 죽은 존재에게 예수님의 바른 진단이 오게 되면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누구나 동일하게 이야기하는 게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러분도 많이 듣고 저도 많이 들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지금껏 들어오셨고요, 앞으로 여러분이 세상 하직할 때까지 계속해서 불신자한테, 복음 모르는 사람한테 이 이야기 들을 거예요. 이거 엄청 듣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만약에, 실제가 아니고 만약에, 예를 들어서 저에게 상담을 한다고 칩시다.

성경에도 그런 상담이 많지만, “목사님, 우리 형이 아버지 유산을 균등하게 나눠야 되는데 형이 좋은 땅 가져가놓고 나머지 별스럽지 않은 땅 줘놓고는 내 땅값이 오르니까 이제 와서 ”땅 바꾸자. 내가 맏이잖아. 동생들아, 값이 많이 오른 네 땅과 내 땅 바꾸자.“ 이런 식으로 할 때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럴 때 아까 했지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적대적이라고요. “이 어리석은 자야, 내가 너희들 생계나 생존문제 해결하려고 찾아 온줄 아느냐? 나는 너희들을 이미 죽었다고 여기고 그 죽은 자를 하나님 방식대로, 하나님 방식대로 살리기 위해서 왔는데 너희는 너희가 죽었다고 생각 안하고 살아 있는 것 좀 더 윤택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나를, 이 예수를 이용한다.”

그 사람에게 만약에 제가 그렇게 구박을 한다면 “형제간 땅 문제에 내가 왜 성경적으로 조언을 해야 됩니까?” 하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예수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대로 진짜 자기 본색이 탁 튀어나오는 거예요. 본색이!

“목사님, 내 아들이 군대 가는데 애가 몸이 아파서 전방에 가면 고생할 것 같은데 후방으로 빠지려면 얼마나 기도를 해야 되고, 어떤 기도를 해야 되고, 어떻게 봉사해야 우리 아들 편안하게 군대생활 하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이미 죽은 애 전방에 가서 죽으나 후방에 가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쪽에서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까?” “예,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 예수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들켰어, 들켰어! 진짜 정말 당신 마음속에 교회 나와서 예수 믿어도 예수와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그 때 티가 확 나버린 거예요. “티나?” “확 나.” 티가 확 나버린 거예요.

저도 많이 듣지만 여러분도 수천차례 많이 들을 거예요. 앞으로 살아가시면서. 인간은 자기와 상관있어요, 자기 자신과. 외손자 외손녀하고 집에 와서 저희끼리 놀다가 심심하니까 TV옆에 놓인 ‘지니’라는 인공지능이 있으니까 지니와 대화를 합니다. 질문 네 개를 던졌는데 지니의 그 답변을 제가 적어봤어요.

외손녀가 “지니야, 사랑해.” 하니까 지니가 하는 말이 “좋은 말 해줘서 고마워요.” 그 다음에 “지니야, 같이 춤추고 같이 놀자.” 인공지능 지니가 하는 말이 “선약이 있습니다.” 외손녀가 “지니야, 내 이름은 뭐고 내 동생 이름은 뭐뭐다.” 하니까 지니가 하는 말이 “예, 잘 알고 있겠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네 번째에요. 우리 외손녀가 결정적인 질문을 했어요. “내가 누구지?” 이렇게 물었어요. 외손녀가 방금 자기 이름을 알려줬으니까, 그렇게 해야 친구가 되니까, 그래서 “내가 누구지?” 이렇게 하니까 인공지능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이 뭐라고 해도 가장 소중한 존재에요.”

지니는, 인공지능은 주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기와 상관있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인공지능을 누가 만들었는가? 인간이 만들었어요. 그 인간들이 교회 옵니다. 인간들이 교회 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게 종교에요. 그게 교회고. 지옥가지요. 교회 와서 지옥가지요. 자기 자신을 죽이지를 못하는 거예요.

계속 어느 것이 나에게 손해가 되는 그런 화냐, 어느 것이 나한테 이익이 되는 복이냐, 이걸 잊을 수가 없어요. 그걸 잊지 않고 그걸 기억하면서 그거 하나 그 결실 맺기 위해서 교회 와서 간절하게 하나님이 시키는 것, 목사가 시키는 것 다해요. 나한테 이익이 오고 손해가 되지 않는 쪽으로 인생을 몰아넣기 위해서.

교회가 만든 가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거기에 매진하고 나중에 와서 기껏 하는 게 ‘열심히 섬겼습니다. 바르게 섬겼습니다.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남은 못가도 나는 천국 갑니다.’ 여러분이 그거 아셔야 돼요. 이스라엘의 놀라운 점은, 그들이 천국에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민족이라는 사실이에요.

이 경험이요, 오늘날 우리에게 뭘 이야기해주는 겁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결별된 유일한 민족이고, 약속의 땅에 성전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그들이 하나님과 이별했던 유일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이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게 구약성경이에요.

“약속의 땅에서 나가라.” 스바냐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예요. “어디서 감히 너 같은 것이 약속의 땅 내가 있는 곳에서 살아? 나가!” 이거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속 저주로 굳힌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무슨 이야기를 안했느냐 하면, 그런 저주로 굳힐 수밖에 없는 그것밖에 못하고,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 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그런 인간을 천국 백성으로 만드는가?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드리고 싶어요.

인간은 자기 위주니까 자기를 못 떠납니다. 모든 복과 화를 본인이 결정해요, 본인이. 왜? 자기가 가장 소중하니까요. 아까 인공지능, 재미있는 것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내가 누굴까?” 하고 물었어요. “지니야, 내가 누구야?” “세상이 뭐라고 해도 가장 소중한 존재에요.” 아이고, 섬뜩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말을 대변해주고 있어요.

그러면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건져내는데 성공하느냐? 일단 인간이 하는 일은 죽었던 자를 살리는 일은 못해요. 이미 존재하는 것에 복을 더 추가해서 받는 것은 인간이 해내려고 하지만 ‘내가 죽었다고 치고’는 안 돼요. ‘죽을 뻔 했다’는 것은 되는데 완전히 죽어서 죽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죽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는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사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 종교라는 것이 완전히 사기극입니다. 안되는데 자꾸 된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부터 약 3천 년 전, BC 800년경에 트로이전쟁이 있었어요.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 트로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스파르타라는 지역이 있는데요. 지중해 남쪽 그리스에 스파르타 지역이 있는데 그 지역에 메넬라오스라는 왕이 있어요.

그 왕의 부인이 헬레나인데 그녀가 아주 미인이었어요. 헬레나의 미모가 소문이 나서 많은 남자가 청혼을 했었습니다. 번호표를 주니까 99장이 나갔어요. 99대 1. 누가 당첨 되었는가? ‘솔로’ 그 프로그램하고 똑같아요. 여자 하나를 두고 남자 99명이 “나는 당신을 선택하겠습니다.” 이래서 달려든 거예요.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가 당첨이 되었어요. 그 때 어떤 조건이 있었습니다. 청혼할 때 99명의 후보감은 일단 우리 중 누구 하나 당첨이 되면 나머지 98명은 당첨된 사람을 시기하지 말고 기꺼이 포기하고 그 당첨된 사람에게 협조한다는 조건하에 청혼을 한 거예요. 메넬라오스 왕이 당첨되니까 다른 사람은 다 협조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헬레나는 너무나 예쁘기 때문에 이미 유부녀가 되었지만 트로이 나라의 왕자가 그녀를 빼앗아갔어요. 그러자 내 마누라 내놓아라, 하는 전쟁이 트로이 전쟁입니다. 거기에 98명의 다른 부족의 왕들이 협조해서 전쟁을 벌인 거예요. 그 전쟁에서 유명한 것이, 목마로 위장해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그리스 진영의 해변가에 세워두었던 목마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하니 그걸 믿고 성안으로 들였다가 목마 안에 매복했던 오디세우스와 용맹한 군인들이 나와서 그 날 밤에 성문을 안에서 열어서 성이 함락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그게 트로이목마라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고, 메넬라오스가 트로이전쟁에서 이기고 바로 본국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고 지중해로 여행을 하는데 파로스라는 섬에 도착을 합니다. 헬레나는 이미 본국에 있어요. 그런데 헬레나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메넬라오스 왕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이시여, 내가 진짜 헬레나입니다. 본국에 있는 그 헬레나는 모조품이고 가짜입니다.”

자기가 진짜인데 왜 그러면 당신이 그 모조품과 결혼하게 되었느냐? “너무 내가 미모가 뛰어나서 이집트 왕이 나를 10년 동안이나 ‘진품이 아깝다’ 해서 따로 모셔놓고 가짜 헬레나로 하여금 그리스의 여러 왕들을 경쟁붙이는 방식으로 결혼하게 한 겁니다. 진짜는 나입니다.”라고 한 거예요.

이거 솔로몬 재판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솔로몬 재판의 취지가 뭐냐? 둘 다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애를 둘로 잘라서 어느 누구의 애도 되지 않게 하는 그것이 솔로몬의 지혜였습니다. 그 때 메넬라오스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헬레나를 위한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고통 받고 고난 받은 이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헬레나’라는 것만 이야기했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다는 그것은 전혀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겪은 고난만 믿습니다.” 하고 외치니까 배를 타고 있던 그 가짜 헬레나가 뾰로롱, 하고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는 그런 전설이 있었습니다. 충청남도 서산의 전설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그런 전설이 있어요.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나타났을 때에 사람들이 이모저모 예수님을 살폈습니다. 왜 살폈느냐? 자기가 판단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살피는 근거가 뭐냐? 나를 천국 보내줄 사람인지 아닌지를, 저 사람은 나를 천국에 보내 줄 관상인가, 저 사람은 메시아 될 관상인가, 이런 것처럼 나를, 지금 살아 있는 나를, 멋지고 건전한 나를, 훌륭하기 짝이 없는 나를, 성실하게 이 땅의 삶을 살고 있고, 남 앞에 칭찬받고 있고, 남 앞에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이 괜찮은 나를 천국까지 데려갈 사람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판단을 한 거예요.

그러면 누가 모조품이냐?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이 모조품 가짜 메시아라고 죽였거든요,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어요. 이로써 누가 모조품이냐? 인간들이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모조리 다 가짜였어요. 모조리 다 모조품이었습니다. 모조품이 여호와 섬겼고 모조품이 메시아 기다렸던 거지요.

자신의 건전함, 자신의 우수함, 매일같이 우수함과 건전함을 자기에게 누적을 시키고 적금 붓듯이 계속 쌓는 거예요. 이왕 훌륭한 것 더 훌륭하게, 이왕 착한 것 더 착하게, ‘하나님, 이정도 착하면 넣어주겠지요? 하나님, 이정도 완벽하면 하나님이 상급 주겠지요? 이정도 열심히 충성하면 하나님이 부활시켜주겠지요?’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 인간들 생각에 성경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들은 성경을 보면서 이렇게 합니다. 내가 죽고 내가 사는 게 부활이라는 거예요. 성경에 그런 것 없습니다. 내가 죽고 내가 사는 게 부활이 아니에요. 주님이 죽고 주님이 사는 것을 부활이라 합니다. 거기서 나를, 여러분 자신을 빼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나는 죽고, 그 다음에 죽고, 그 다음에 죽고, 그 다음에 죽고, 우리는 지옥 가서 죽고.’ 그게 우리한테 딱 맞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해당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인간이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해서 천국백성 만드느냐? 그 이야기를 말씀드린다 했지요. 이제 그 이야기 할 차례입니다.

누가복음 1장 42절에 보면 거기에 복이 나옵니다. 인간들이 판정하는 화와 복이 아닙니다. 복은, ‘뭐가 복이고 뭐가 저주냐’ 하는 것은 내가 판정내린 게 아니에요. 어떤 분이 판정내려요. 어떤 분이, 주님이, 하나님이 판정내리는 겁니다. 누가복음 1장 42절 보겠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복’ 두 번 나오지요. 복이 나옵니다. 성령 받은 엘리사벳, 마리아 사촌이지요. 그 엘리사벳이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보고 ‘너도 복되고 네 안의 아이도 복되다.’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이 단독으로 존재하게 되면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복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야 돼요. 아기 예수님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하나의 임산부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복된 것이 아니고 복이 안에 들어 있으니까 저절로 내가 복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복된 분과 함께 같은, 신체는 하나인데 두 인격체가 같이 들어 있지요. 두 인격체가. 1인데 2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코스가 어느 코스냐? 좁은 길이에요. 가시는 코스가 죄를 대신 안고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추가해서 복이 뭐냐에 대해서 추가할 수가 있어요. 복이 뭐냐? 첫 번째는, 예수님을 임신하는 것이 복이다. 그 다음에 또 복이 뭐냐?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복이다. 세 번째 복이 뭐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복이다. 복이 뭐냐? 나를 죽였던 그분이 부활함으로써 같이 부활되는 게 복이다. 이게 복이에요.

아들이 없는 것은 저주고 아들이 있는 것은 복이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관계가 끊어진 자를, 하나님께서 그걸 보시고 자기 아들을 관계 끊어진 자 속에 들어오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관계가 이어지게 만들어서, 그걸 새언약이라 해요, 내 살과 내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그렇게 이어지게 해서 더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일체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안에 그리스도만 원하는 것, 이게 복된 상태입니다. 뭐 얼굴들 보니 전혀 안 믿는 것 같아요.

그러면 쉬운 것 할게요. 지난 화요일 오후 2시, 미장원에 가서 이발을 했습니다. 오후 2시입니다. 따스한 오후시간에 미장원에 앉아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요, 그리고 아무것도 할 것도 없어요. 미용사가 다 해주니까 그냥 앉아 있는데 날씨는 그냥 좋고요,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들어와서 따뜻하고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내가 아무것도 생각 안 해도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또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고. 이발하는데 7분 걸렸습니다. 머리 깎는데 7분 걸렸어요. 머리 감는데는 5분 걸리고, 돈 내는데 2분 걸려서 총 15분 걸렸습니다.

아무것도 안한다는 것, 그것은 진리란, 복이란, 내가 나를 떠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거예요. 내가 나를 떠날 때. 특출한 내가 평범한 내가 되고, 의미 있다고 여긴 내가 무의미에 불과하고, 유별나다고 여겼던 내가 그냥 미장원에 앉아 있는 머리 긴 아저씨, 뭐 그냥 그렇고 그런 존재.

예를 들어서 내가 미장원에 앉아서 “아줌마,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요?” 이렇게 되면 그것은 호사가 아니에요. 내가 괴로워요. 그런데 그분은 내가 누군지 몰라도 괜찮고 나는 알려주기도 싫어요. 왜? 그냥 그렇고 그런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냥 머리카락만 길게 있을 뿐이고, 그분에게 내 머리를 다 맡길 뿐이고. 세상에~, 짧은 순간이지만 저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정말 행복을 느꼈어요.

그런데 끝나자마자 또 부리나케 집에 걸어가야 돼요. 힘들게. ‘아, 사는 게 힘들구나. 사는 게, 사는 게, 인생이 형벌이고 사는 게 아프구나.’ 그렇다면 소원은 뭐냐? ‘주여, 아무것도 할 게 없도록 죽여주옵소서. 그런데 주와 함께, 주와 함께 이미 죽어 있음을 날마다 깨닫는 호사를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그렇게 해줄 때 그게 복된 상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뭐래도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고, 누가 뭐래도 특출할 것 없고, 누가 뭐래도 비범하지 않고, 누가 뭐래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냥 죽은 자로부터 죽은 자로 태어난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신 이게 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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