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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바냐 2:1-3 / 힘과 방향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바냐

스바냐 2:1-3 / 힘과 방향

정인순 2023. 3. 16. 13:07

음성 동영상 Youtube

 

힘과 방향

 

이근호
2023년 3월 15일                

 

본문: 스바냐 2:1-3

(2: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2)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세상의 모든 날이 마감이 되었을 때, 아무리 시간이 더 진척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확정된 조치만 적용될 뿐입니다. 그 조치라는 것은 분노와 진노로 꽉 채워지는 날들입니다.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습니다. 다른 경우의 수는 더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작용되기 위해 그동안 인간의 역사는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태도는 한결같았습니다. 즉 더 시간 끌어봤자 ‘수치를 모르는 존재’라는 점에서 달라질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인간들이란 그것으로 이미 굳어진 채로 마지막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는 있을 겁니다.

“당신은 왜 수치를 모릅니까?” 그런데 이와같은 질의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아해할 겁니다. “아니, 수치를 원하는 자가 누구 있어요? 수치를 모면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라고 답변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이게 바로 인류의 역사입니다. 역사란 연출입니다. 각자 본인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 자처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살아온 자기 인생이 수치스럽게 않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쳐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시도가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 앞에서 인간들이 속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원하는 자아상을 굳히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씁니다.

그 모습은 본인이 본인을 보기에 수치스럽게 보이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상이 벌써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악마와 결탁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합당한 조치는 진노요 분노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은 이런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끄러움을 스스로 알아서 조치하는 바로 그 노력이 실은 악마(죄)에게 속았기에 어떻게 든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속지 않으려는 시도로 이어져 온 겁니다. 로마서 7:11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규례, 곧 계명이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에게 속아넘어가고 있음을 지적해주는 겁니다. 인간이 죄에게 속는 이유는, 치마를 만들어 자기에게 입히는 시도처럼, 매사 자신의 부끄러움을 자기 방식으로 가리는 시도를 멈출 수가 없는 그런 존재로 변해버린 겁니다.

이런 경우의 예가 예수님의 12제자들로부터 보이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치마로서 작용할 줄 알고 3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곁을 떠나지 않았노라고 자부했습니다. 물론 성령받기 전의 12제자의 모습입니다.

즉 그들은 외부 세계에서 그만 속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겁니다. 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세상 권세에 의해 체포되고 맥없이 되어 버리고 난 뒤, 베드로에게 권세쪽에서 주목할 때, 베드로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다짐을 하면서 배신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동안 기존 권세의 영향력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임이 드러난 겁니다. 성령이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은 그저 단독으로 사람이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 곧 악마의 힘에 굴복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오시기까지 모든 인간은 어느 누구 할 것이 없이 악마의 통제를 받는 처지에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 즉 겸손하면 혹시 하나님의 분노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경우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진정 겸손할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규례대로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당하신 오직 한 분만이 천국에 합격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은 합격률이 0%입니다. 그런데 그 택함 받은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하나님의 저주에서 면제될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는 자신을 자기의 주인공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렇듯 11제자가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주인공이 따로 계십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38)

이 여인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죄인으로 보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본인이 또한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그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 여인은 자기가 그동안 자기 역사를 이루기 위해 모아놓은 향유를 더는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드립니다. 사랑으로 인해 그 여인 인생의 주인공은 본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인 것을 그 여인은 알았던 겁니다. 무서운 세상 권세보다 더 큰 강함으로 작용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던 겁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규례의 완성을 선물을 받았다는 뜻이고 모든 규례의 완성은 사랑이요 죄사함입니다. 따라서 겸손해서 성령 받은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성령을 받아 ‘겸손’이라 규례를 사랑으로 받은 성도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악마가 다스리는 힘의 세기에 대해서 성도들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상 밖의 성령이 올 때, 성도는 ‘실성한 웃음’만 지을 뿐입니다. 힘없음으로 수치를 느끼는 세상 사람들이 비해 성령받은 성도들은 사랑이 누구로부터 오는지 그 방향성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 2:12)

이로서 스바냐 2:1-3 말씀이 늘 내부에게 울렁거리는 ‘말씀 완성’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역사마저 제자리에 멈처 서 있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죄사함으로 인해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6강-스바냐 2장 1-3절(힘과 방향)2303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바냐 2장 1-3절까지입니다.

스바냐 2:1-3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찌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선지자의 이 예언은 더 이상 시간이 진척되지 않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더 이상 흘러가지 않는, 드디어 역사가 도달해야 될 그 시점에 다 도달해서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먼저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분노라는 것은 마지막 때 결국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은 이게 전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그날이, 역사, 시간이 제자리 뛰기하는 그 시점이 됩니다.

역사가 더 이상 진척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을만한 것은 다 탈탈 털어서 찾아봤는데 그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은 이미 처음부터 지금껏 달라진 게 없이 진노와 분노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극명하게 이 마지막 때 완벽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인간에게 어떤 기대를 하나님은 하시지를 않습니다. 아무 기대를 하시지를 않아요. 만약에 우리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 보일 수 있다고 여기면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가능성이나 자기 자신이 이 정도로 될만한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진노와 하나님의 분노의 날, 그 날에 대해서 거역할 겁니다.

“하나님, 좀 더 지켜보고 상황 봐서 때리시든지 해야지 일방적으로 그날, 그날은 진노의 날, 분노의 날로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리면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가능성,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대해서, 그 결정에 대해서 반발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한테 어떤 기대를 갖고 있고, 자기의 가능성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그 정당성이 참 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3절에 겸손한 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겸손한 자가 ‘아, 하나님의 진노, 분노,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라고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여기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다는 말이 ‘역시 나는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규례 안에 일관된 하나님의 진행하는 원칙이 들어 있는데 그 원칙은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는 피할 수 없다’는 내용이 하나님의 규례 안에 애초부터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겸손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날이 마땅하고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규례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에게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그 사람의 뜻이 일치가 됩니다. 일치가 되면서 하나님의 분노를 흔쾌히 받을 수 있는 이유가 2장 1절에 나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할 때 이 규례를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어요. 수치스러운 존재.

수치 안 스러우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고 몸부림쳐도 아, 이 세상 안에서는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나는 이렇게 살아도 수치스럽고 저렇게 살아도 수치스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나님의 이미 결정 난 분노와 진노의 정당성을 공유할 수가 있습니다. ‘주여, 때리옵소서.’ 이게 겸손한 자에요.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 가능성이 있고 자기 기대가 누구나 있는데 그냥 하나님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고개 숙이고 ‘때려주옵소서.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하는, ‘어떻게 세상에 그런 인간이 있을 수 있느냐? 그런 인간은 아마 없을걸?’이라고 생각될 겁니다. 맞습니다. 그런 인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겸손한 자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그런 인간이 없다는 그 인간의 모델, 표준적인 인간, ‘우리가 어떻게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어떻게 우리가 수치스러워도 뭔가 잘한 것은 있겠지.’라고 하는 그 인간에서, ‘맞습니다. 우리는 잘한 것이 없습니다. 수치스러운 것이 맞습니다. 그 수치에 대해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는 합당한 조치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바뀌는 그 과정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시기를 둘로 나눠요. 첫째는 뭐냐 하면, 성령을 받지 않았던 시기, 그다음에 두 번째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성령 없던 제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달라진 그 모습은 오늘날 예수님 이후의 모든 성도들이 똑같은 절차를 밟아서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첫 출발점, 시발점, 성령이 없을 때 제자들 면면을 제대로 우리가 파악을 해야 돼요. 그러면 제자들이 성령을 안 받았을 때 그들은 어떤 태도를 나타냈는가? 그들은 이 세상에서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모든 시도를 다 했던 사람입니다.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본색을 몰라서 그래요. 창세기 3장 7절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변화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여기서 그들의 몸이 벗었습니다. 벗었으면 그냥 벗은 채로 오케이,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될 텐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면, 선악에 대해서 그 평가나 판단자로서 누가 주인공이 되느냐 하면, 본인을 평가하는 주인공으로 본인이 나서버린 거예요. 주님이 평가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본인을 평가해버리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평가하면서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면, ‘벗었다는 이것은 선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악한 것이야. 뭔가 조치를 취해야 돼. 벗었다는 것은 선이 아니기에 나의 나 됨에 부끄러움을 제공하는, 수치를 제공하는 모습이야.’ 이렇게 자기가 판단하고, 그러면 가만있을 수가 없잖아요. 무슨 조치를 하잖아요.

그 조치가 뭐냐 하면, 바로 치마를 만들어서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는 짓을 했습니다. 이건 정상이 아니지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지요. 그렇게 해서 인간이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벌써 자기의 수치를 안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당해도 쌉니다.

왜? 하나님이 만들었던 정상적인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그 인간을 원하지 변질된 인간을 원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변질된 그 인간이 그냥 변질되었다, 이렇게 있는 게 아니고 변질이 된 것을 마치 변질이 아닌 것처럼 뭔가 자기한테 처방을 내리고 조치를 취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조치를 취하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 독단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에 가지를 못하고 뭔가 누가 조종하는 식으로, 누구를 닮은 모습으로 조치를 취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기 전에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에게 많은 것을 귀동냥으로 들었고, 예수님 통해서 여러 실습을 했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받았고, 온갖 것 다 했어요. 열두 제자 모두가.

하지만 그들이, 베드로가 예수님 딱 체포되고 난 뒤에 보니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는 그 지식 자체가 자기들의 수치를 가리는 일종의 치마 역할밖에 안 되었던 거예요.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예수 덕분에 내 수치심을 가려서 나로 멀쩡한 존재, 수치를 모르는 정상적인 존재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체, 제자들이 어떤 형편이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자기한테 실현시켜요. 목자를 치니 양이 다 달아난다.(막 14:27)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노골적으로 저주까지 하면서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라고 누구 앞에서 그렇게 했느냐 하면 바로 권력 앞에서 권세 앞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인간들이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좀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그것이 뭐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무슨 안에 들어 있느냐 하면, 이 세상 이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이 자기의 수치를 가리는 역할을 하면서 자꾸 연출을 하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연출하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라는 것은 뭐냐? 인간이 자기가 주인공인 양 여겨서 주인공인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연극하고 연기하고 연출해서 나온 그 결과물이 바로 역사라는 겁니다. 역사, 교회 역사, 가정의 역사, 국가의 역사, 전부 다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거예요. 어떤 목적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살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한테 가하는, 보태는 연출을 한 겁니다. 누가? 열두 제자들이. 어떤 경우에? 성령을 받지 않은 경우에.

그런데 연출하는 그 장소가 무슨 장소냐? 권세가 있는 세상 권력이 지켜보는 자리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아는 사실이지만 인간이 성령 받기 전에 홀로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이 세상 권세 속에 있었어요. 그걸 악령과의 동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성령과 동거하지 않으면 악령과 동거하는데 그 악령이 이 세상의 신입니다. 이 세상 권력으로서 모든 인간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그 권력 앞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온갖 연출을 다 해온 거예요. 성령 받기 전에는.

권력과 함께 권력을 의식해서 이 세상 권력 보기에 자기 모습이 그럴싸하게 보인다는 이 모습이 악령이 시키는 일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지요. 베드로가 자기 입으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장모의 병을 낫게 한 분이에요. 베드로가 얼마나 자기를 자신했던지 내가, 우리말로 하면 “내가 예수님 배반하면 성을 갈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거예요. 자신만만했던 겁니다.

자기는 권력과 상관없이 자기 일에 대해서는 본인이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던 거예요. 그걸 믿었던 겁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의 믿음을,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내가 힘을 가할 수 있는 자율과 자유가 내게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그 당시 지켜보고 있는 세상 권력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심지어 어린 소녀 하나가 고발해 들어왔잖아요. “아저씨, 아저씨! 내가 아는데! 저 체포된 예수와 한패인 것을 내가 봤는데!” 하는 순간 본인 말고 다른 더 힘센 권력이 내 수치를 없애기 위해서 조종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원했던 바지요. 자신의 한계를 알게 만든 겁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7장 11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다시 읽습니다. 이게 너무 어려운 말이거든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계명, 오늘 본문에서는 규례, 여호와의 규례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는 계명으로 되어 있어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라고 되어 있어요. 나를 속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 받기 전에 열두 제자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자기가 구원되는 줄로 알았어요. 속지 않으려고. 왜냐? 속아버리면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니까, 속아버리면 내가 자율성이 없는 사람이 되니까요. 누구한테 농락당하고 누구한테 휘둘리는 사람 되니까 그게 내 자율권에 부합되지 않는 거예요.

나는 목적이 있는데 어떤 목적이 있는가? 내 자유를 사용해서 어떤 누구 앞에서도 수치스러운 존재가 안 되는 것, 이것은 내가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그게 마귀한테 옴팍 속아버린 사실이라는 거예요. 속아 넘어가야 하는데, 그래야 구원받는데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한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내가 목숨을 버릴지라도 주님 따르겠습니다.” 이 말의 바탕에는 뭐냐, ‘세상 어떤 유혹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을 버리라는 그렇게 속는 것에는 제가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나 자신이 어떤 경우라도 속아 넘어가는, 악마한테 속아 넘어가고 죄에 속아 넘어가는 그런 수치스러운 존재는 내가 거부하겠습니다.’라고 자신만만했던 것이 누구냐? 베드로였고 열두 제자였어요.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 거예요. 하나님의 규례를 몰라도 너무 몰랐어요. 하나님의 계명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주님의 계명 하나 말씀 하나하나가 무슨 뜻이 있는지를 그렇게 듣고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듣고도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파악하지 못했어요. 그 말씀이 자기의 수치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말씀을 듣고 배우면 자기는 안 속아 넘어가는지 알아요.

그러나 주님이 주신 모든 계명은 제발 네가 현재 결탁되어 있는 권력에 네가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그게! 속지 않으려는 그 사실이 결국 그게 속고 있는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 모습이. 어렵지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령 받고 난 뒤에 열두 제자가 변한 것은 그거였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공이 결코 아니다. 내가 나의 주인공이 결코 아니에요.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아직도 내 인생, 내 역사 생각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악마에게 속고 있습니다. 속고 있기 때문에 속은 줄도 모르고 있지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이게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는 그렇게 배워놓고도 여전히 자기가 자기 주인공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딱 오니까 요한복음 21장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언하지요. ‘베드로야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하는 것은 너의 뜻대로 원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띠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도록 내가 몰아넣을 것이다.’

이게 기쁘지 아니하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8, 19) 네가 생각하는 네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네가 치마를 입어서 네 수치를 가릴 하등의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베드로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니까요.

본인이 주인공이 안 된 상황이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7장 37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죄인인 여자가 있습니다. 죄인인 여자가 있는데 바리새인도 알아요. 이 여자가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 창녀라고 보는 거예요. 온 동네 사람이 이 여자가 안 좋은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것이니까.

예수님도 이 여자가 어떻게 사는 가를 다 알아요. 바리새인도 알아요. 그런데 그 여자가 37, 38절에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향유를 부었다고 되어 있어요. 향유를 부은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이 향유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겁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이렇게 울면서 옥합을 가져와서 향유를 부은 여자의 차이점이 뭐냐? 바리새인은 본인이 죄인인 것을 몰라요. 그런데 이 여인은 첫째,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두 번째, 이 여자가 뭘 아느냐 하면, 남들이 나를 죄인이라 하는 것을 여자가 알아요. 세 번째, 이 여자가 뭘 아느냐? 그것은 누가복음 7장 47절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여자가 알게 된 세 번째 것은, 본인이 사랑을 예수님한테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이거 충격 아닙니까! 1번, 2번, 3번, 이런 식으로 하니까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첫 번째, 이 여자는 본인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아요. 두 번째, 이 여자는 남들이 자기를 죄인이라 하는 것을 압니다. 세 번째, 이 여자가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세 번째, 자기는 남들이 모르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받은 그 사랑이 어떤 비난과 어떤 정죄보다 더 큰 거예요.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의 수치를 벗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자기의 죄인 됨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 나 죄인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받았다. 너희 사랑받았어? 너희가 사랑을 알아?’ 성령 받은 열두 제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 그 전과 후가 이렇게 달라진 거예요.

성령 받기 전의 열두 제자는 자기가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탐구하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왔을 때 그 여인은 자기 소유, 자기가 주인이었던 자기 향유를 자기가 주인이 아님을 알고 그걸 줄줄 부어 버립니다. 이미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에요.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주인공은 이미 바뀌었어요. 누구로? 나에게 사랑을 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무슨 공포심이 있어요? 무슨 두려움이 있어요? 사람이 분노와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기대를 거는 자만, 버티는 자만 분노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뭘 해도 나를 잊어버리는 사람, 뭘 해도 이건 주님의 사랑으로 알고 있는 사람, 이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궁금한 것은, 성령 받은 사람,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 나에게 사랑을 주신 분,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의 그릇으로서 내가 있다, 주님이 여기 이 자리에 계신다, 라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다섯 자로 대답하겠습니다. ‘실성한 웃음’ 그냥 허허, 웃지요. 왜냐? 예상을 못 했거든요. 인간은 평소에 나를 어떻게 볼까 싶어서 늘 예상해요. 남들 보기에 내가 괜찮은 존재인 것으로 꾸며요. 연출이지요, 연기와 연출. 그래서 자기가 자신한테 치마 입히는 거예요.

그런데 ‘앞으로 5년 뒤에, 10년 뒤에 내가 뭐가 될까? 5년 전에, 내가 지난 여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걸 다 잊어버린 사람은 그냥 실성한 웃음이지요, 허허, 웃습니다. ‘이게 웬 상황이 이런 상황이 다 있습니까? 주여, 저 예상 못 했습니다. 주님, 저한테 왜 그래요?’ 이게 문자로 보낸다면 “ㅎㅎ” 보내는 거예요. 웃으면서 ‘주님, 저한테 왜 그래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성경에 진짜 그런 사람 있습니까?” 있어요. 베드로는 그당시에 예수님을 잡았던 권력자들이 자기를 잡으려고 한다는 것, 수배 때렸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모닥불 쬐다가 밀고자 하나에게 걸려서 거기서 대번에 예수님 배신했잖아요. 이게 권력에 대한 의식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1940년도니까요, 불과 약 80년 전 일제시대때입니다. 저는 ‘일제강점기’라는 단어 굉장히 싫어해요. ‘일제시대’가 얼마나 좋아요? 일제시대때 교회 예배드리는데 일본 순사가 입회했습니다. 일본 순사가 입회해서 순서부터 제일 먼저 여호와께 찬양하기 전에 일본 천황 만세, 덴노헤이까 반자이, 일본 천황 만세부터 하는지를 일본 순사가 지켜보고 있었어요.

지금 그 상황에서 오늘 수요예배 드린다고 합시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드려야 됩니까?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덴노헤이까 반자이!” 하고 드립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난 뒤의 베드로 또는 막달라 마리아, 또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스데반 집사였어요, 스데반 집사.

성령 받기 전 모든 인간, 여기서 성령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은 악령과 함께 있다는 뜻이고 악령이 함께 있다는 뜻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이에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인간도 규례대로 겸손하게 살아서 여호와 앞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 이 규례대로 다 했어요.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한 사람만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한 분의 영이 뭐냐?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구원받을 확률이 몇 퍼센트냐? 0%에요. 0%가 된 상태에서 성령이 와버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 합격이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열심히 공부한 것, 그것 아무 소용없어요. 자기 자신조차 안 속아 넘어가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 앞에 속아 넘어가야 되는데 멀쩡한 인간 되기 위해서 안 속아 넘어가려고 애쓰다 보니까 그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아, 속았구나’ 이게 되어야 되는데 내가 이게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거든요. 구원의 당사자가 본인이라고 여기고 내가 판단을 하겠다는 거예요, 판단을! 스데반 집사는 그런 게 없어요. 날아오는 돌을 그대로 다 받았어요. 왜?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요. 사람이 속지 않으려고 하니까 늘 자기를 점검하려고 합니다. 그 점검하는 태도, 그러니까 성령이 올 리가 있습니까!

안동에 눈이 잘 안 오거든요. 안동에 잘 눈이 안 오는데 어떤 때 눈이 와요. 눈이 와서 발목에서 무릎까지 차일 때 누굴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모양이에요. 안동역 앞에서. 점검하는 거예요. 눈 오는 날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한 시간인데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점검을 하는데 두 가지 경우밖에 없어요. ‘안 오는 것인지 못 오는 것인지?’

<안동역에서> 진 성이 부르지요. 그다음 가사가 “오지 않는 사람아~” 나를 위해서 성령이 올 리가 없지요. 그것은 하나의 치마니까, 내 위신을 채워줄 치마이고, 그리고 내 역사를 포기 못 하게 만드는 채로 성령이 올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성령은 뭐냐? 예수님께 선택받은, 그래서 그 예수님의 영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배급제입니다. 배급제라는 말은,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혹시’라고 되어 있어요. 스바냐 2장 3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이 ‘혹시’라는 말을 한 이유가 구약이기 때문에. 구약은 계명적이에요. 뭘 하면 뭐가 되는 계명의 구조 안에 구약이 있어요. 계명의 구조 안에. 구약적 계명에 의하면 ‘겸손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분노의 날에……’, 이 분노의 날이라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고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해요.

그런데 ‘혹시’, 혹시 겸손하게 되면, 구원받지 못하지만 ‘혹시 겸손하게 되면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숨겨줄 수는 있지 않겠느냐?’

요 구절에 해당 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스바냐 2장 3절에 있는 이 말씀의 최종완성상태가 그 사람에게 배급되었다, 하나님께서 배급 준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완성된 상태에서 이것을 우리한테 배급을 줘버리면 ‘하나님께서 분노의 날에 우리를 빼내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가 돼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2장 1절에, 수치를 아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스바냐 2장 1-3절이 우리 안에서 완성태가 되는 거예요, 완성상태가! 이렇게 될 때 그러면 그 다음 문제요.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되어 있거든요. 항상 구약에서는 ‘하라. 그러면 해줄 게’가 돼요. 십계명도 그렇고, 구약 틀에서는 그래요.

그러나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배급제입니다. 그 배급제가 로마서 12장 3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보면 “생각하라” 나누어주시는, 나누어주시는 쪽이 하나님 쪽이고요, 나누어 받는 쪽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게 은혜에요. 이게 선물입니다. 선물로 와 버려요. 뭐가? 스바냐 2장 1-3절이 선물로 와 버려요.

선물로 오니까 스바냐 2장 1-3절이 이 안에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 버리니까 이 성도, 성령 받은 성도의 태도가 뭐냐? 이 세상을 볼 때 이미 모든 시간은 제자리 뛰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지금 작렬하고 있는 이 세상이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전혀 부럽지를 않은 거예요. 수치 안 당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사람이 전혀 부럽지를 않아요. 그리고 누가 반가우냐? 아까 이야기한 막달라 마리아가 반가운 거예요. ‘오! 저 여자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네!’ 오, 내가 받은 사랑, 그 사랑이 죄용서입니다. 저 여자는 누가 봐도 죄인이에요. 그런데 사랑을 받았네요.

누가복음의 7장 그 대목을 하면서 제가 시간상 빠트렸습니다만, 그 대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7장 41, 42절에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여자에게 준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무슨 사랑?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이 세상에 어떤 권력의 강도보다 센 거예요. 그걸 스데반 집사가 보여준 겁니다. 돌 맞은 스데반 집사가 보여준 거예요. ‘욕해라. 그래, 욕해라.’ “아이고, 부끄러워라!” ‘그래, 부끄럽다고 이야기해. 나에게는 사랑이 있어. 나에게는 사랑이 있다고!’

첫째, 내가 욕을 얻어먹어도 마땅한 존재임을 아는 것.
두 번째, 남들이 나를 부끄러운 존재로 여김을 아는 것.
세 번째, 그래도 그걸 실성한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면 사랑받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것을 또 궁금해하실 거예요. 지금 궁금한지 아닌지 모르지만 궁금해하실 겁니다. 아니 궁금해야 돼요. 거기에 대한 예가 누가복음 2장 12절에 나옵니다. 천사가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에게 밤중에 나타났다는 그 대목이에요.

11, 12절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다음 15-17절에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힘을 키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뭐냐? 방향이 어딘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힘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이에요. 주님이 어디에서 어디로 하늘나라에 간 것을 압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난 아기 예수, 힘이 큰소리치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약하디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 약한 아기 예수를 찾는 그 목자도 그 시대에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었어요. 약한 학생이었습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막달라 마리아 그거 무슨 힘이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시의원 나갔습니까? 국회의원 나갔어요? 아니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역사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요. 언제 죽을지, 언제까지 살지, 그것도 자기한테 관심이 없어요.

이 세상은 이미 심판 속에 있는 세상, 심판 속에서 스바냐 2장 1-3절 그 말씀이 세상에 내 안에 완성상태로 들어왔다는 이 사실, 말씀이, 내 안에 스바냐 2장 1-3절이 있다는 이것, 하나님께서 이 심판 날에 면제해준다는 그 내용이 그 안에 쑥 들어왔는데 자기 뜻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그냥 일방적으로 들어와 버린 거예요.

길 걷다 보면 스바냐가 울렁울렁, 꿀렁꿀렁, 벌떡벌떡 막 뛰어요. 이 안에서. ‘마지막 때에 네가 사랑을 받았구나. 네가 죄사함을 받았구나.’ 그렇다면 그 사람이 사는 목적은 뭐냐? ‘주님이여, 이게 사랑입니까? 이게 감사입니까?’ 그런 쪽이지요. ‘이게 주께서 주신 사랑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감당하겠나이다.’ 그렇게 되지요.

남들이 나를 얼마나 대단한 존재로 보냐, 내가 남들 보기에 얼마나 부러우냐, 아이고! 그런 연출 같은 것은요, 내가 역사에 길이 남을 길이 남아서 뭐할 건데? 시간은 이미 제자리 뛰기 하고 있는데! 이미 진노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요. 저주에요, 저주. 그 저주받은 세상에서 성공한들 그게 저주지 뭐겠어요.

세상에 겸손한 줄 모르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겸손의 영을 받아서……, 겸손이 ‘부족합니다.’ 그게 겸손의 영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것보다 더 큰 겸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하루하루가 주의 주신 선물이며 이 마지막 때 값없이 용서받았다는 그런 막달라 마리아 같은 그런 기쁨으로, 세상에 어떤 권세와 세력과 모든 시선과 따가운 눈총을 주님의 사랑으로, 실성한 웃음으로 웃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옵소서. 내가 얼마나 큰 성과를 낼 수 있는가? 이제는 그러한 악마적인 발상과 헤어지게 해주시고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영원히 주인공 됨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