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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바냐 1:7-10 / 문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바냐

스바냐 1:7-10 / 문

정인순 2023. 2. 22. 22:41

음성             동영상

문 

 

이근호
2023년 2월 22일           

 

본문: 스바냐 1:7-10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1: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1:9)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제이구역에서는 부르짖은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 자신이 이 지상에 오셔서 자신의 언약을 홀로 집행하시는 날입니다. 일체 그 어떤 외부의 도움이 필요없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에 협조할 수 없는 존재인가요?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언약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즉 방해하는 자들을 제쳐내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거민들은 통곡하고, 벌받고, 고통에 부르짖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날에 일어날 일이 예루살렘에 먼저 일어난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때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은 다윗에게 주셨고, 다윗은 그 언약을 예언자의 입장에서 노래와 찬양 가사로 실어서 여과없이 나타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께서 지상의 인간 세상을 상대로 침노하고 침략하는 내용의 내용을 사무엘하 22:7-11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이 예언의 하나님의 단호함과 엄중함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그냥 인간 세상은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 무시무시하게 사정하게 덮쳐지는 바가 예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나라는 무심한 일상의 삶에 푹젖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저 일상의 패턴처럼 움직이는 나날이 왜 하나님의 저주를 유발하는 일인지를 도통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모방하듯이 살아가는 이 인간 세상은 한가롭고 평화롭기만 합니다. 결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금된 상태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감금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애초에 알아야 될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행복을 구가할 생존의 터전인 줄로 알았습니다.

언약의 실현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사람이 인간에게 멸망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보다 그들의 생존문제가 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주저없이 이 인간 세상에서 들이닥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시 24:7-10)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추진하실 일을 알려왔습니다. 다윗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왕이 친히 자기 백성을 만나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그 장소는 시온성, 곧 예루살렘성입니다. 그 예루살렘에서 만나면서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문으로 들어오십니다. 이때 예루살렘성의 문들은 높이 들어 들어오시는 왕을 부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왕은 그냥 곱게 방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시면서 들어오십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은 이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비-언약적 인식, 곧 우상과 악마의 사고방식에 푹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이스라엘보다 더 잘 살고 강한 나라들이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들을 부러워했던 겁니다.

그 강대국들의 종교문화를 흠모했던 겁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문턱을 뛰어넘어서’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5:5에는 블레셋인들의 신은 다곤 신이 여호와의 궤앞에서 엎드려서 문턱을 덮고 있기에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문턱을 밟지 않고 뛰어넘는 문화에 동화된 자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받기에 합당한 도성이 된 겁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만나겠다고 하셨는데 그 예루살렘을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쟁에 능하신 영광의 왕이 전쟁에 승리했을 때 획득된 도성이 예루살렘입니다. 그 도성의 특징은 문들 통해서 말해집니다.

요한계시록 3:7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천국문은 분명 있지만 다윗 언약을 이루기 위해 오신 그분이 친히 문이 되기에 인간쪽으로 그 문에 들어가겠다는 나서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는 천국 열쇠를 가진 이스라엘의 왕에 의해서 뽑힌 자들에게 문을 소개할 영광스러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28-29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 세계에서 찾아갈 수 있는 천국의 문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시도하고 노력하는 모든 것을 도리어 악마의 강력한 감금 위세를 대면하게 될 뿐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장에 보면, 12지파의 진영들이 경계선이 되고 그 안의 공간에게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동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주변을 하나님의 백성이 사방으로 세 지파씩 분배되어 지키는 형국입니다. 에스겔 48장에서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구조 안에 ‘여호와의 삼마’ 즉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가 성립합니다.(겔 48:30-35) 인간은 문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가 빠져 나간 그 길목을 이스라엘의 지파가 지목할 뿐입니다. 즉 “우리는 문이 아닙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여호와날을 완성시키는 그 하나님의 절차에 참여되어 철저하게 자신이 마땅히 망해야 함을 인정하는 바로 그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피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도리어 찬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강-스바냐 1장 7-10절(문)230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1장 7-10절까지입니다.

하박국 1:7-10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제 이 구역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약속대로 언약대로 지상에 펼치는 그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이 남긴 약속의 실현과 만나는 그런 날이기 때문에 여기에 그 하나님의 만나는 것에 방해되었던, 가렸던 것들, 쉽게 말하면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을 치우는 날, 그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우리가 구경한다든지, 관람한다든지, 하나님이 어떻게 멋있게 우리를 찾아오는지 그렇게 기다릴 수 있는 그러한 형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하고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인간을 배제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이 최종완성이 되는 여호와의 날의 일이, 곧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끼리 일했다는 것을 온전하게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협의하거나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피해서 오는가? 피해서 오지는 않아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저돌적으로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인간입니다. 이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일을 할 그때 당해야 될, 처참하게 당해야 될 그자들을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이방인들,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처벌하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오늘 본문에 7절부터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 왔다는 점을 들춰내면서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일은 스스로 완성시켜 나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심에 대해서 자기 백성들이 우호적으로 좋게 그날을 맞이해야 될텐 데 오늘 본문 7절에 나오지요,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다음에 8절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여기 벌한다는 이야기 나오지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이, 그들이 방해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될 그 자리에 기거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지정해준 예루살렘에 살면서 하나님이 실시하는 언약과는 전혀 반대로 하나님의 언약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자들을 그냥 하나님께서는 벌하신다 그 말입니다.

벌하기 때문에 10절에 보니까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통곡 소리가 들리는 거지요. “제 이 구역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고요.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하는 그 날이 7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어문(漁門)이라는 것은 고기의 문이거든요. 이게 대체 무슨 문이며 2구역이라는 것, 두 번째 구역이라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것은 여호와의 날이, ‘여호와께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한다’를 보여주는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곡소리 나는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예루살렘, 어문이라는 것, 왜 고기의 문이냐? 이게 예루살렘사람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아 왔을 때 그걸 흥정하고 거래하고 유통할 때 문 열어주는 그 문이 어문입니다. 제2 구역, 두 번째 구역이라는 그것이 열왕기하 22장 14절에, 두 번째 구역, 예루살렘의 둘째 구역에 거했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두 번째 구역이라는 것도 역시 예루살렘 북서쪽의 한 지역인데 오늘 스바냐 1장 11절에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막데스 거민은 바로 그 주변에 있는 종족들,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고 가나안 원주민들과 장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성문을 열어놨다는 말이지요. 그쪽에 거주하는 거민들이 막데스 거민들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고기가 왕래하는 문, 그리고 장사하기 위해서 번잡한 시장터 같은 문,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을 보여줘야 될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지 않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간의 삶에 치중한 그러한 공간이 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기는 행복하게 사는 우리 동네다.’라고 생각한다면 평소에 그들이 애곡하는 소리라든지 부르짖는다든지 그런 경우를 그들은 생각을 안 했을 거예요. 그 예루살렘에 살면서.

서로 장사하고 거래하고, 그래서 이문 남으면 하하하 웃고, ‘야~,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여기에 모든 정신이 치중하는 거예요. 여호와의 날은 까마득하게 모르지요. ‘이 예루살렘은 우리가 살기 위한 터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잘 살라고 이 예루살렘 지역을 줬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인간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일을 하는 동네라는 생각은, 그 당시 주민들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8절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라고 했는데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그들이 다른 이방 민족과 거래하면서 그들의 종교에 호기심을 갖고 나도 그들처럼 같이 이방 종교를 한번 재미 삼아, 또는 흥미롭다는 뜻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따분한 여호와 종교 말고 색다른 문화적 차원의 이방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예루살렘 거민 가운데서 많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우상 섬겼다, 그렇게 되지요.

그래서 우상 섬기는 사람의 특징이 나와요. 특징이 뭐냐? 9절에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날에 문턱을 뛰어넘는다 이 문턱을 뛰어넘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방 종교, 그리고 그 종교의 문화에 빠진 사람들의 관행 같은 게 있어요. 그것은 절대로 성전 문턱은 무의식중에도 밟지 말아라, 하는 것이 있어요.

왜 그러냐? 사무엘상 5장 5절에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다곤신이라는 블레셋 신이 있었거든요.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에서 노획물로 얻었다.’고 해서 의기양양하게 가지고 왔는데 그건 그냥 상자지요.

그냥 상자인데 여호와를 이겼다는 기념물로 그 언약궤를 다곤신상 앞에 가져다 놓았어요. 사람들은 예상하기를, 그다음 날 가보면 다곤신상은 멀쩡하게 그리고 언약궤는 초조하게, 인간적으로 말해서 벌벌 떨면서 다곤신상한테 꼼짝 못 하고 기죽어 있는 느낌을 받아야 될 텐데 다음 날 보니 다곤신상이 엉망진창이 되었어요.

다곤신상이 파삭 완전히 엎어져서 깨져 있어요. 깨졌는데 깨진 그 지점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모든 것을 굴복하듯이 다 깨져 버린 거예요. 사무엘상 5장 3, 4절에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아……,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시고 안식 후 3일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에 갔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일상생활의 연장으로서 예수님 무덤을 방문했어요. ‘시신이 잘 계신가, 무덤은 안전하게 있는가?’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무심코 진행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입니다.

일상의 삶이 이게 저주를 유발하는 그러한 계기라는 생각을 막달라 마리아뿐만 아니고 여기 사무엘상 5장에 나오는 일상생활하는 블레셋 사람들도 상상을 못 했지요. 이런 뜻이에요. 우리가 평소에 아침에 일어나서 일상생활하잖아요. 밥도 먹고, 조깅도 하고, 직장에 나가고, 저녁에 퇴근하고, 우리가 그냥 도무지 이것은 죄랄게 없는 것, ‘전혀 이것은 죄가 아니야. 우리의 일상이야.’라고 하는 그것이, 그 일상의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저주를 계속해서 물어다 주고 가져다주는 그러한 순간순간인 것을 우리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설교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몰라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도 없어요. 애 군대 간 것은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나는 우리는 우리 일에 관심이 있어요. 거기에 몰두하고 매진하고, 내가 내일에 매진하는 그것을 하나님 여호와의 날에 저주받을 것이라는 것을 누가 그걸 상상하겠습니까? 누가 그걸 짐작했겠어요?

내가 내 일에 열중하는데,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착실하고 당연한 일이고 훌륭한 자세로서 자기 일생에 몰두한다고 자부하지 ‘나는 매일같이 저주받을 짓만 골라서 해.’ 이러한 해석, 이러한 자기 이해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안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특수하게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일상의 생활이 저주받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만 여호와의 날에 알려준 거예요. 장사한다, 고기 잡았다, 요즘도 예루살렘은 시장터가 되었지만 거기서 물물교환하고, 필요한 것 얻고, 필요한 것 팔고, 그게 뭐,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요?

노아 당시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게 왜 저주받을 짓입니까? 뭐 하나님에 대해서 데모를 하고 교회 유리창을 깨고 그런 것 아니에요. 일상생활, 자기를 위한 일상생활을 했다니까요. 일상생활, 그것도 아주 부지런하게 착실하게, 자기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자기 건강 챙기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날을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장소에요. 그 맞닥뜨리는 장소가, 일상생활했다고, 그리고 무심코 장난삼아 이방인의 옷을 입고 이방 종교의 문화에 호기심으로 한번 참석했다고 해서 “문턱을 네가 그냥 안 밟고 넘어? 이것은 이방 민족에서 배운 문화잖아. 에이, 저주받아라, 벌 받아라!” 이게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멸망이 확정되었다는 뜻이에요. 멸망이 확정된 세상에서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이 하루하루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멸망이 확정되었는데 예루살렘은 그 이유를 알아요. 그 이유를 알지만 우리 이방인들은 몰라요.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이게 뭐가 나쁜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목숨 붙어 있어서 목숨값 한다고 열심히 사는데.’

그러면 예루살렘은 안다는데 예루살렘사람들은 뭘 알아야 되는가?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만들 때, 거기에 자기 백성을 기거하게 할 때 너희들은 여호와의 날이 떨어지는 그 날에 탈출할 수 있는 어떤 탈출문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접했던 민족이 예루살렘 거민입니다. 무심코 평범하게 사는 이것이 감금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 이것을 바로 스바냐 선지자, 선지자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금상태에 있는 거예요.

제가 어떤 영화 보니 이런 대목이 나와요. 상당히 흥미로워서 제가 인용을 합니다. 엄마하고 애 둘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마약을 하는 나쁜 남자가 와서 여자를 그 집 지하실에 가두고 세 겹이나 널빤지로 못을 박아서 감금시켜 놨습니다. 애는 그 밖에 있고요. 그 나쁜 남자는 그 집 애가 2층에 있다는 것은 모르고 여자만 그렇게 한 거예요. 그 할머니가 맛있는 잼을 만들어서 유명해지니까 돈 있다는 소문 듣고 돈 뺏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지하실에 여자를 가둔 남자는 마약에 취해서 어디론가 또 갔어요. 그때 2층에 있던 다섯 살 먹은 애가 내려와서 엄마를 찾으니까 지하실에서 얇은 판데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요. “엄마 여기 있어! 여기서 나갈 수 있도록 뭐든지 찾아서 줘.” 이렇게 하니까 다섯 살 먹은 애가 뭘 주느냐? 나무꼬챙이를 줘요. 그다음에 숟가락을 준다고요.

애가 뭐 아무거나 주는 거예요. 단단한 거, 금속으로 된 것을 달라고 해도 애가 숟가락 이런 거나 주는 겁니다. 숟가락으로 파서 언제 빠져나갑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초록색 크레파스도 줘요. 엄마가 화가 나서 “이래가지고 엄마 여기서 탈출할 수 있겠어?” 고함을 지르니까 꾸중 들은 애가 또 밖에서 앵, 하고 우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알게 된 것은, 인간이 여호와의 날에 다 멸망 받습니다, 멸망 받는 데 감금된 이 인간 상태에서, 과연 이 지루하고 무심코 진행되는 그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저주의 이 감금상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어요. 없습니다.

지금 스바냐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는 이유가, 너희는 옴팍 감금되어 있고 갇혀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여호와는 오직 여호와만 상대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상대하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정 짓고, 여기에 전부 다 통곡과 애곡과 벌 받을 일만 남아 있는 그 인간들, 예루살렘이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최초로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일상이 우리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심코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전혀, 이것은 여호와의 날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는 태도가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봤으니까 이제는 여호와의 날은 어떻게 해서 인간을 저주하고 멸망하고 심판하는 그날일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이제 조금씩, 숟가락도 아니고 초록색 크레파스도 아니에요, 이게 열립니다. 드디어 탈출구가 드디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지요.

탈출구가 들어온다는 말은 그 전제로 우리는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수긍하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루살렘이라는 그 특정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그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을 모티브로, 주제로 해서 스바냐가 미리 예언을 한 거예요. “너희들 다 죽었어.” 그 예언을 진지하게 이게 현실 그대로인 것을 우리가 수용을 할 수 있는 그 근거를 성경에 가득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알려줬어요.

그중 하나 요한계시록 3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연 다, 닫는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 세상은 닫힌 문 안에 감금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열쇠라는 단어가 등장하거든요. 열쇠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이유는, 다윗의 열쇠 없으면 네가 그곳에서 못 빠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못 빠져 나오는 그곳이 어디냐? 바로 여호와의 날에 저주받을 곳이지요. 우리는 본의 아니게 저주받는 곳에서 태어났고, 평생 저주받을 짓만 하다가 결국은 저주로 끝날 운명을 지니고 이 땅에 살아왔음을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하나님 여호와의 날의 징후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간파하고 파악할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예언의 용도잖아요. 스바냐 예언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잖아요. 예루살렘에 일어난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너희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왜 하필이면 예루살렘인가? 하필이면 예루살렘, 그것도 어문이고 그것도 둘째 구역이고, 어쨌든 그 전체가 예루살렘 성문이거든요. 왜 예루살렘이냐? 그 이유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24편에 보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게 다윗의 시(詩)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약속을 했어요. 그 약속이 다윗 속에 들어와서 다윗이 지금 성신으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예언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거기서 누굴 만나는가?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기 때문에 왕은 누구를 만나게 되는가? 왕은 자기 백성을 만나는 용도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시온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만들었으면 그냥 들어오시면 될 것 아니냐? 그냥 들어오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떻게 오느냐?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만남, 왕과 백성의 만남,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신다. 세 번째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는 장소로 예루살렘을 지정하셨다. 네 번째,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만나는데 그냥 곱게 만나시는 게 아니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다. 다섯 번째,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은 무슨 뜻이냐? 예루살렘이 예루살렘 백성들이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적들이 파묻혀 있고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다는 거예요.

스스로 예루살렘 자체가 이방인의 의식, 마귀의 생각이지요, 악마의 생각이지요. 악마라 하는 것, 우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마귀의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약속했습니다, 다윗에게. “내 백성에게 왕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나 만나겠다. 만나서 함께 예루살렘에 살면 그게 천국이다.” 약속을 했어요, 다윗에게.

약속을 했는데 왜 전쟁이 필요한가, 그 말입니다. 왜 전쟁이? 이것은 거기에 갇혀 있는 백성들은 오직 일당백, 왕의 전쟁의 솜씨와 능력 없이는 자기가 감금되어있는 적들에 포위 되어 있는 이 세상 악마의 힘,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제가 방금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분의 일상의 이야기입니까? 물가가 얼마나 오르고, 전셋값이 요새 얼마고, 지금 그 이야기에요?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게 되고, 지금 그 이야기입니까? 아니지요. 채솟값 올랐다, 뭐 그런 이야기, 6월부터 70세 이상 공짜로 버스 탄다, 그런 이야기 아니잖아요. 우리가 들으면 알아듣는 이야기 아니잖아요.

이것은 진짜 감금되었음을 인정하는 그리고 우리의 왕이 따로 있고 왕과 만나야 될 운명인 것을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해서 언약을 약속을 고대하는 사람에게, 참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진지한 이야기에요. 이게 이 진지한 이야기가 매일같이 패턴처럼 움직이는 평범한 삶에 의해서 이게 얼마나 자주자주 잊히고 관심의 대상이 안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뭐 남들처럼 월급 받고 살고 연금 받아 살면 그만이지.’ 이런 식이에요. 그래놓고는 ‘이 정도면 뭐 잘 살았다.’ 잘 살았지. 운동해서 몸무게도 좀 빠져서 건강하니까 잘 살았겠지요. 남들처럼 살면 잘 사는 것으로, 사람 대우받으면 잘 사는 것으로 여기잖아요. 그거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악마가 노렸던 겁니다. 악마는 뭘 노리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왕과 못 만나게 하는 게 악마라고 아까 기도할 때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여호와 만나고 하나님 만나는 그런 것은 죽을 때나 신경 써. 지금은 신경 쓰지 마. 지금은 돈 벌 때야.’ 지금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아까 제가 포위당했다 했지요. 포위만 당하면 괜찮은데 그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이방 종교, 이방 문화가 예루살렘주민들까지 다 확산되었어요. 마치 코로나처럼 다 확산되었어요. 마스크 써도 소용없어요. 전부 다 마음가짐에 ‘우리 예루살렘도 저 옆 나라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옆에 있는 나라를 잘 살게 만들고 강대국 만들었어요.

예루살렘은 자기 왕 하나님의 약속만 기다려야 돼요. 마치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듯이 이스라엘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하늘에서의 그날을 기다려야 될 텐데 그들은 그게 아니고 ‘우리 옆 나라 미국처럼 잘살았으면 좋겠다. 다른 강대국처럼 우리도 군사력이 크면 좋겠다. 우리도 남북통일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관심사가 약속을 완전히 도외시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여기 “문들아 들릴찌어다.”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의 문을 없애버립니다. 어문이고, 둘째 문이고, 셋째 문이고 간에 문들, 예루살렘을 완전히 불바다 만들어요.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불바다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 이게 뭐냐? 예루살렘에 하늘로 가는 문이 없습니다. 왕이 오면 머리를 들어야 될, 그 문이 있어야 될 예루살렘 자체가 여호와의 날에 저주받아서 문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다윗언약의 성취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예루살렘 성전 자체를 불바다 만들어버리는 그분이 바로 문이 돼요.

이게 에스겔 48장에 나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그분이 문을 닫으면 닫히고 열면 열려요. 이 말은 더이상 하나님의 다윗언약에 관한 모든 내용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오신 그분에게 다 일임해 버렸어요. 왜? 지상에 있는 다윗 후손들, 왕들은 이방화 되었기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돌볼 목자라든지 왕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준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이사야 22장에도 나와요.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이사야 22장 보고 또 한군데 더 찾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사야 22장 12절에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그날에, 다윗에게 약속한 내용이 성취되는 그 날에. 어디에 성취되는가? 유다 집에, 예루살렘 거민에게 성취된다는 겁니다. 그날에 통곡합니다.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22절에 보면 새로운 예루살렘이 주어지는데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보통 이렇게 문이 있으면 인간은 ‘어? 문이네.’ 하고 ‘저 문 열면 감금된 상태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문이 있으면 우리가 그 문 쪽으로 가서 들어가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이 말은, 인간이 찾아서 ‘어? 저 문이네.’라고 이야기하고 “저 문으로 들어가자.”라고 할 수 있는 문 자체가 없애버렸어요. 문이 없는 거예요.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야~,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니 천국 가자. 아, 저쪽에 문 있네. 가자. 문 열고 나가자.’라는 것을 그 다윗의 열쇠 되시는 분이 용납을 안 해요. 허락을 안 해요. “이 저주받을 것들이 어디서 천당 가려고 누가 맘대로 와?” 그렇게 문을 닫아버리는 겁니다.

제가 하나의 문장을 말씀드릴 테니까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주를 믿는 식으로 주를 안 믿는 사람’ 이거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주를 믿는 식으로. 그러니까 ‘나는 믿을 것은 주님밖에 없어.’라고 하는 사람은 주께서 안 받아요. 왜? 내가 살 것은 주님밖에 없다고 여기는 자체가 그게 주님을 안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반대로 주를 믿지 않는 방식으로 주님을 믿는 자, 이게 뭔 뜻이냐? ‘내 소원에 대해서 주께서 이루어준다는 것은 내가 미치면 미쳤지 절대로 안 믿는다.’ 주님은 절대로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믿는 그 방식을 믿는 사람이 신자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쪽에서 주님 믿어야지. 그래서 주님 믿고 천국 가야지.’ 하는 자들은 뭘 모르냐 하면,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수단과 목적과 기대를 배제하고 도리어 통곡으로 만든다는 이 예루살렘에 벌어진,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된 이 사건을 그들은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다윗 언약의 실현에 있어서 하나님의 다윗언약이라고 어겼던 그 예루살렘과 그 이스라엘이 대폭발하고 다 무너지고 없어지는 절차가 필수적이다, 그 말입니다. 그게 필수적이에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방식으로 주님을 믿어야 돼요. 주님은 절대로 내 뜻대로 안 해준다는 것, 나 구원받고 싶은데 나 구원받고 싶다는 그 뜻을 일체 주께서 배제한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일하는 주님을 믿어야 돼요. 진짜 그 믿음이 겨자씨보다 더 큰 믿음이에요. 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배제당했기 때문에.

고마운 사실은, 예루살렘이 주께 고마워해야 될 것은 예루살렘이 멸망한다고 섭섭해하지 말고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평범한 생활 하면서 왕창 다 무너진 그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그 예루살렘에 친히 왕께서, 하나님의 다윗언약을 이루시는 왕께서, 천국을 이루겠다고 오신 왕께서 그쪽을 방문했다는 이 사실에 감사해야 돼요.

이걸 두드려 패든지, 나를 아주 나무라든지, 심판하든지, 어쨌든 찾아오셨다는 것,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천국의 열쇠 작업을 실시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분이 열면 닫을 자 없다. 아니까 이게 얼마나 감사해요?

아까 시편 25편에서 전쟁에 능한 자라 했지요. 우리가 세상의 물이 묻은 악마의 마음을 우리 식으로 헤쳐 나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 악마의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능하신 분, 그분이 우리 대신 왕이 되셔서 그 마귀를 다 물리쳐 주거든요. 인간이 속아 넘어갔던 그 속아 넘어감에 주님이 유일하게 안 속아 넘어가요.

옛날 제가 초등학교 때인가, 중학교 때인가, 홍콩 영화가 굉장히 유행을 했어요. 왕위(王羽·왕우, 1944-2022)라는 배우의 영화인데 그게 우리나라에 한 20편 이상 나왔어요. 칼싸움 잘~하거든요. 이 사람 영화가 기억에 남는 게 왕우가 꼭 데려가야 될 자기 가족인지 누군지 있었어요. 이 날쌘 검객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계단 높이 올라가는 거기에 적들이 와서 왕우를 잡으려고 한 거예요.

왕우는 단독으로 일당백이에요. 혼자서 칼을 휘두를 때마다 풀잎처럼 다 베어버리거든요. 어릴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그거 비슷한 이야기가 마동석 영화에요. 뺨따귀 때릴 때 그 깡패들 한방에 다 날아가잖아요. “비켜, 이 인간들!” 하고 목적을 이루듯이 그 악마를 인간이 못 이겨요.

인간은 자존심이 있거든요. 꼴에 자존심도 있고, 꼴에 자기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고. 마귀가 인간의 지혜를 이깁니다.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못 이기는데 능하신 주께서, 검술에 능하신 주님, 뺨따귀에 능하신 주님, 마동석이, 주께서 “마귀 이리 나와! 너 이름 뭐야?” “까불인데요?” “이게 어디서 까불어!” 까불이 한다고 얻어맞고요. 친히 자기 백성을 찾아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들어와서 담을 타 넘고 집주인이 꼼짝 마라, 그렇게 있는 자기 가구를,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거기 묶여 있는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 식으로 “나는 이 땅에 성령으로 와서 악령을 이겼다.” 이렇게 이야기하셨지요. 이게 여호와의 날이에요.

자,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일을 하는 날, 모든 인간의 힘은 배제하는 것. 그런데 왜 주께서는 우리를 배제하는가? 이미 우리는 감금상태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와서 뭐 헌금하고 뭘 하고 하는 것은 마치 완전히 감금되어 있는 지하실에서 초록색 크레파스 가지고 탈출해 보려고 하는 것과 같은데, 숟가락 가지고 어느 세월에 성화하고 어느 세월에 경건해서 이 세상을 빠져나올 수 있겠어요? 바리새인은 율법적으로 율법을 다 지켰는데 그래서 빠져나왔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이지요.

문이 없습니다. 에스겔 48장에 보면 문이 없는데 거기에 처음으로 문이 생겨요. 틈이 생겨요. 그 틈으로 주님부터 먼저 감금된 이 악마의 세계로부터 탈출했습니다. 탈출하는데 열두 지파가 사각형을 이뤄요. 사각형 대열을 이룹니다. 남쪽, 북쪽, 동쪽, 서쪽에 세 지파씩 딱딱 배치를 해요. 이 배치하는 것이 민수기 2장에 최초로 나옵니다.

그 배치가 되면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문에 있어요. 그 경계선에 동쪽, 남쪽, 서쪽, 그 경계선에. 안은 비어 있어요. 안은 왜 비어 있는가? 레위 지파, 아론 지파가 거기에 희생양의 피를 모셔놓습니다. 예수님은 악마로부터 빠져나올 때 피 흘려서 그 악마가 지배하는 장소에서 빠져나왔어요. 빠져나올 그때 빠져나옴이, 없던 문이 처음으로 생긴 문이 뭐냐?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써 피 흘린 예수님이 빠져나간 그 문이 없던 문인데 생겨버린 다윗의 열쇠가 되는 겁니다. 천국 문이 되는 거예요.

그 열두지파, 민수기에 나오는 것, 단, 납달리, 아셀, 북쪽에 있죠. 잇사갈, 유다, 스불론은 동쪽에 있습니다. 시므온, 루우벤, 갓은 남쪽에 있고,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는 서쪽에 있고, 이런 배치가 있거든요. 문 자체가 열두지파에요, 문자체가. 열두지파는 경계선 자체에 있지 안의 내용에 들어 있는 게 아니에요.

내용은 오직 옴팍 예수님 십자가 피흘림 만이 안에 들어 있어요. 왜? 그 피 흘림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그래서 에스겔 48장에 보면 똑같은 구조로서 열두지파의 문이 거기에 배정되어 있어요. 48장 31-35절에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동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서편도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그냥 문이에요. 여기 서 있는 이들은 “문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곧 “자기들은 문이 아니고 담장인데 담장 사이의 문은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희생양께서 이렇게 빠져나갔습니다.”를 이렇게 소개하는 그 소개기능자가 바로 오늘날 새예루살렘의 열두지파의 배정 배치입니다. 열두 제자의 배치, 열두 사도의 배치,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열두 문입니다. 12-14절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우리는 “저희는 문이 아니에요. 주님이 문이십니다. 주님이 피 흘려서 이렇게 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여호와 삼마’ 에스겔 마지막에 여호와는 여기 있다, 그게 ‘여호와 삼마’ 이게 바로 천국 이 땅에 온 천국 구조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일상생활하면서 우리가 이러한 위치를 배정받은 채로 하나의 천국 문을, “여기 있습니다”, 십자가 천국 문을 소개하는 일상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악마로부터 감금된 사실조차 모르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면 주께서 천당 보내줄 줄 알았던 이 어설픈 생각, 주여, 이제는 여호와의 날을 생각하게 하시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 대신 다 죄값을 치렀던 그것이 빠져나오는 유일한 문인 것을 이제는 감격함으로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