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박국 3:19 / 사슴 본문
사슴
이근호
2023년 2월 1일
본문 말씀: 하박국 3:19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전체 절차와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세상 심판 속에 있을 때, 감당하기 힘든 공포에 휩싸였지만 결국 선지자는 생기발랄한 사슴으로 자신을 묘사하기에 이릅니다. 선지자 자신의 이러한 변화는 곧 모든 성도들의 변화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찬양하고 있습니다. 찬양이란 하나님의 일이 일체 다 마무리 지워졌을 때, 주저없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하나 착오없이, 미진한 것 하나 남김없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다 이루어졌을 때, 그 속시원함이 가만 있을 수가 없겠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다 끝났을 때나 나올 결실이 바로 활기 넘치는 사슴입니다.(시 18:33-34)
사슴 안에 하나님의 말씀 완성이 힘으로 들어있습니다. 인간들의 개인들의 솜씨에 의한 결실이 아니기에 ‘사슴’이라는 동물 표현이 적절합니다. 동물은 피동적이니까요. 외부에서 움직일 때, 개인의 역량일 수 없는 의존적 경향을 드러내면서 표현됩니다. 이런 사슴이라는 결과물을 낼 때까지 하나님께서 엄청한 파괴를 가지고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돌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합 3:5-12)
이러한 심판의 힘 앞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힘으로 살아남을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의 자기 역량으로 자기만의 현실을 꾸려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한 현실은 모조리 하나님의 엄중함 말씀의 심판 앞에서 다 저주대상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이런 심판으로 인해 세상을 ‘끝’납니다.
따라서 ‘끝’을 모르고, 혹은 ‘끝’에 도달하지 않은채 주장하는 모든 주장은 다 거짓입니다. 선지자 하바국은 하나님의 의해서 그 말씀의 심판 속으로 인도받았습니다. 그래서는 그는 ‘끝’을 압니다. 인간들이 생각한 ‘현실’이란 이 세상에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모조리 ‘말씀의 세계’일 뿐입니다.
이 ‘말씀’의 세계에서 인간의 ‘자기 존재’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10장-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암몬 군대에 의해서 위태로울 때, 이스라엘의 군사 지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싸움이 사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적 차원의 싸움을 하는 겁니다. 개인이 잘되고, 사는 전쟁이 아닙니다.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사는 그런 전쟁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전쟁 지도자로 추천받은 인물인 입다는 이번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입신 영달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최고 통치자로 인정해준다는 장로들과의 거래에 의해서 그 전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입다는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이 암몬의 군사 위협에서 벗어나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일도 마감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과연 입다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군대가 적을 이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데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인하여 자기에게 영광이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 경우를 사정봐주지 않고 무너뜨리는 일까지가 되어서 이번 암몬 전쟁에서의 하나님의 일은 마무리되는 겁니다. 승리에 도취된 채 집으로 돌아간 입다는 가장 먼저 무남독녀 딸이 자신을 반깁니다. 이것을 보고 입다는 기급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전쟁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준다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제일 먼저 자기를 반드는 것을 희생제물을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한 적이 있었던 겁니다. (삿 11:31)
입다에게 있어 전쟁의 승리는 가장 큰 낭패를 맞이하는 순간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즉 하나님의 승리가 자신의 승리가 되는 것이 자신이 가장 지키고 싶었던 소중한 것을 잃게 되었던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일을 마감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구원이란, ‘구원 안 된 나’→‘구원된 나’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주님의 기능자’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힘이 듬뿍 담긴 활발하게 다니는 사슴이 되려면, 필히 그 와중에서 말씀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공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이미 죽은 자에게는 더는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지혜나 힘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넣어주신 주님의 힘만 나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멈추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뛰어다니는 사슴’인 겁니다. 이것은 모든 말씀이 완성될 때나 이 세상을 등장하는 겁니다. 따라서 세상의 끝까지 선지자를 이끄는 것은 ‘말씀의 연속성’입니다.
이 말씀의 세계는 인간들의 자기 역량과 능력과 애씀과 노력에 의해서 생겨지는 그런 현실의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현실상을 용납하지 않고 모조리 심판하시는 근거를 가진 ‘율법완성의 세계’입니다. 세상 끝에,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성령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한 면적에 함께 들어있는 자들입니다. 이들 면적에는 주님의 주시는 힘이 모두 동질적입니다. F=ma의 공식에 따라 개인적인 힘(m)은 골고루 차별없이 주어지는 가속도(a)의 성질에 의해서 ‘곱하기 ×’, 즉 사적 단선적 인생이 아니라 면적의 확장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즉 모든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대표로 하여 그 예수님의 존재의 확장 속에서 놓여 사는 기능자들입니다. 모두 동일한 새노래를 부를 줄 아는 자들입니다.(계 5: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을 거부해주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하박국
16강-하박국 3장 19절(사슴)2302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3장 19절까지입니다.
하박국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3장 1절에 보면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이렇게 되어 있고 2절부터는 다 들여쓰기를 해서 기록되어 있지요. 그게 19절 끝까지 계속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노래라는 뜻입니다. 노래의 가사입니다. ‘시기오놋’이라는 장단에 맞춰서 성가대장이 반복해서 부르는 노래에 실린 선지자의 계시다. 그 선지자의 계시를 노래 풍으로 만들었고 그 가사가 하박국 3장입니다.
그러면 이 노래라 하는 것은, 모든 일이 마감되었을 때 더 이상 일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 최종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 지어지고 다 완성이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노래입니다. 그걸 찬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찬양의 분위기는 이렇습니다. “드디어 끝났군요. 드디어 마감되었군요.” 이걸 우리나라 부사어로 한다면 ‘finally, 마침내’ “마침내, 완료를 하셨네요.”
줄곧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약속대로, 말씀대로 해왔던 것이 이렇게 마무리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진 것에 대해서 찬미 드립니다. 그 찬미가 노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노래 가사에 보면 그동안 하나님께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있고 어떤 과정들이 있는데 그 절차와 과정 같은 이것이 하박국 3장에 줄곧 이어져 왔습니다.
하박국 3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을 심판했다는 거예요. 이 세상을 말씀대로 심판한 겁니다. 그 심판하는 그것이 전율을 일으키고, 작은 산들이 엎어지고, 불덩이가 나오고, 5, 6, 7, 8절 계속 나오지요.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합 3:5-10)
환난을 당하고요,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땅이 흔들리고, 바다가 소리 지르고, 그게 찬양, 노래 가사에 이런 것들이 다 실립니다. 하나의 절차를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리고 3장 16절에도 선지자의 뼈에 썩은 것이 들어오고, 내 몸이 떨리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그 심판의 힘에 의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선지자의 사적인, 개인적인 감정도 거기에 같이 기록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절차를 지나서, 거쳐서 뭐가 나오는가? 19절에 사슴이 톡 튀어나왔어요. 사슴이, 사람이 아니고 사슴이 나온 거예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여기 사슴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마무리 지은 모든 일의 결과에 의해서 발생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의 사슴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김 사슴, 최 사슴, 박 사슴, 이렇게 사슴으로 모든 일이 마감이 된다는 거예요.
사슴이 여기에 왜 튀어나오는가? 사슴이 여기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사적인 존재성은 날아가 버리고요, 사슴 자체를 뿜어나오는 활력적 힘의 구현물로, 구현체로, 그러니까 껍데기는 사슴인데 피부 벗겨서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안은 하나님의 말씀 완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힘이 그 안에 다 집결되어 있고 모아져 있는 거예요.
축구공이나 탁구공도 마찬가지인데요, 여러분이 그 공을 보세요. 겉모습은 가죽이거나 실로도 되어 있고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지만 그 안은 대부분은 뭘로 채워져 있느냐 하면, 공기로, 꽉 찬 공기로 되어있잖아요. 성도가 뭐냐? 성도는 ‘나는 이렇다’ 이건 껍질에 불과한 겁니다. 껍질에 불과하고 안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힘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항상 통통 뛰지요. 성도의 특징은 그 안에서 작용하는 그 주님의 말씀 완성에서 오는 힘 때문에 성도의 기능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멈추지를 않아요. 멈추지를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인생, 내 삶을 내 맘대로 진두지휘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거예요.
내 인생인데 왜 내가 나에게 지시하거나 하는 명령권이 날아갔는가? 그게 하나님의 말씀 심판이 율법적 작용을 해서 그래요. 율법적 작용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심판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16절에서 선지자가 벌벌 떨었잖아요. 그런데 그 선지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그런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시편 18편 32-34절에 보게 되면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슴이라는 말은, 통통 뛴다. 뭘로? 그 안에 여호와가 행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힘이 꽉 들어차면 그게 바로 사슴이에요. 문방구에서 파는, 또는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사슴, 고무로 만든 사슴인형이라고 보면 돼요. 튜브처럼 훅 바람을 불면 쭈그러져 있던 사슴이 탱탱한 사슴으로 나올 때 성도입니다. 그게 성도에요. 바깥은 그냥 고무인데 바람을 집어넣으니까 ‘어? 사슴이네.’ 그리고 이 사슴은 그 안에 들어있는 바람의 작용, 기능 때문에 가만 있지를 못하고 뭐든지 해요. 하여튼 뭐든지 한다고요.
그런데 이 사슴의 특징은 뭐냐? 사적인 자기 계획 같은 이것은 용납이 안 돼요. 엄두가 안 납니다. 2, 30대 청년, 요새는 40대도 마찬가지고 50대도 마찬가지예요, 한국 땅을 사는 현대 남성들의 고민거리가 뭐냐? 70대 중반 되어서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이제 고민도 없지요. ‘당구나 좀 잘 칠까’ 그런 고민이나 할까 별 고민도 없는데 지금 한참 애 고등학교 다니고 대학 다니고 하는 사오십대, 혹은 60대의 고민이 뭐냐?
‘내가 이 직장 그만두면, 직장 그만두면 뭐 할 건데?’ 직장 그만두면 뭐할건데요? 대학 등록금도 들어가야 되고, 결혼 자금도 있어야 되고, 또 본인 노후자금도 있어야 되는데, 지금 내가 나이 50대 되어서 열심히 청춘 바쳤던 그 직장 그만둬버리면 나는? 그러면 이 연봉 보장해주는 다른 직장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디에 들어가도 처음부터 신입사원으로 들어가야 되는데요. 신입사원 들어가려면 기술도 다시 배워야 돼요. 그러면 고민이 뭐냐? 지금껏 내가 나름대로 직장에서 열심히 살았어요. 안 놀고 그 직장에 충성 봉사 다 하고 직장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그런 일념으로 했는데 직장이 어디 내 맘대로 됩니까?
회사 자금이 달리고 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인력자원부터 잘라내고 인건비부터 낮춰야 되니까요. “회사에서 직원 한 반쯤 내보내면 인수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사장입장에서는, 주주입장에서는 가만 있을 수가 없지요. “인력조정 계획안 내놓으세요.” 대번에 요구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월급 제일 많은 사람부터 알아서 나가야지요. 애가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그런 것은 상관없고 나가야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이 제일 고민하는 것은 직장 그만두고 하루종일 도서관에 가서 책보면 어디 월급 나옵니까? 그러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앞으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내 인생이 사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그런데 하박국한테 물어보자. “하박국, 너는 어떻게 살아?” 이렇게 물으면 하박국은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와서 나를 죽여버렸어.”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그 입놀림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라, 인간아.” 그냥 죽여버렸어요.
죽이고, 그 죽음의, 그 심판의 힘이 나를 죽여버리고, 사적인 개인적인 사정의 나를 죽인 그 힘이 나로 하여금 통통 뛰는 공기 가득 찬, 하나님의 힘으로 가득 찬 하나의 사슴으로 만들어내는 이 솜씨, 이게 말씀이 작품입니다. 이게 바로 하박국에서 찬미하고 있는,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이 노래는 요한계시록 5장 9절에 보면요, 이 노래를 무슨 노래라고 하느냐 하면, ‘새노래’라고 해요, 새노래. 새노래는 죽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노래에요. 요한계시록 5장 9절에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여기서도 이게 노래기 때문에 글자를 들여쓰기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이렇게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과 말씀의 완성이 피입니다. 그 피가 들어오니까 들어오는 순간 생명의 피,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그 생명이 들어오는 순간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설계하는 내 인생 없습니다. 왜? 사적인 나는 돌아가셨으니까요. 하나님의 율법의 심판을 얻어맞아서, 된 통으로 맞아서 죽고 말았어요.
나를 죽이고 주의 사람으로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작전, 전략, 말씀의 일관성 속에 이게 포함되어 있어요. 말씀의 절차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하박국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죽였는데 하나님이 나를 말씀으로 죽였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였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영생을 얻은 거예요.
이게 구약 하박국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도 나와 있어요. 에베소서 5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예수님에게 있었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서 예수님은 빈무덤에 가셨고, 사흘 만에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켰습니다.
이게 어디까지나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인 줄 알았는데 그 예수님이 모든 성도의 맏아들이 됩니다. 맏아들이라 하는 것은 대표자라는 뜻이에요. 맏아들. 맏아들에게 일어나는 상황은 그다음에 양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맏아들이에요. 로마서 8장 29, 30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맏아들 된다는 것은, 모든 우리의 새로운 본질이 예수님 그분으로 온전하게 충족된 거예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상황이 똑같이 일어난다 그 말이지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는 예수님이 부활되고, 그다음에 먼저 죽은 자고, 그다음에 우리차례라,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살전 4:16).
그러니 이것은 “어이, 김 부장! 내일부로 사표 내세요.” 지금 이 문제와 전혀 관계없는 거예요. “김 부장, 사표 내세요.” ‘아, 지금 우리 애가 고등학교 다니는데요? 앞으로 뭐 먹고 사노? 요새는 경비직도 경쟁이 세다는데.’ 어디 들어갈 데가 없어요. 하도 모든 게 세 가지고. 커피 전문점도 시장에서 과포화 상태라는데 뭘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김 부장을 죽은 자로 봐버려요. 왜냐하면 천국은 개인적 자격으로 갈 수가 없어요. 개인은 예수님만 개인이고 나머지는 예수님의 반복된 적용에 의해서만 예수님이 앞장선, 그러니까 예수님이 볼펜 심 같고 그 안에 있는 잉크가 바로 성도입니다. 심에서 안 막히면,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이 나오면 같이 죽 내려가면서 심으로 빠져나오면서 예수님을 통과해서 글씨가 써지는 거지요.
볼펜의 그 끝을 통해서 잉크가 스며 나오듯이 예수님과 한 몸이에요. 여럿이라도 한 몸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요. 대표기 때문에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집단이라 하는 것은 이미 “김 과장, 사표 내!” 하면 ‘아이고, 나 이제 뭐 먹고 살고?’ 이때는 소속감이 없어요. 내 문제는 내가 사적으로 해결해야 되니까.
그런데 천국에는 소속으로 가요. 내 문제가 따로 허용이 안 돼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대표자가 되어서 우리는 예수님에 속한 하나의 가족관계, 가족, 패밀리, 가족이 되어서 들어가는 겁니다, 천국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천국 갈 때까지는 우리는 직장 뭐하다 갑니까?”
죽은 인간이 뭘 해요? 죽었다는 말은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 5:14)는 이 말씀이 매일같이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가운데서 일어나라” 내일 되면 또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 늘 잠자는 자 되게 하시고, 사적으로 멀쩡하게 살아 있고 ‘내 가정은 내가 월급 받아서 키운다’는 나,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이루심에 의해서 그 말씀으로 우리를 죽여버리고 죽은 우리를 살려낼 때 내 뜻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 일어나! 이 게으름뱅이 일어나!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는 이 말씀으로 그 하루하루 일할 것을, 활동력을, 활성력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 시대에서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냥 쉽게 안일하게 넘어가기 쉬운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구원이 뭐냐? ‘내가 구원받고 싶다. 하나님, 저 구원받고 싶어요.’ ‘그래, 내가 구원해줄 게.’ 이런 것은 구약에도 없고 신약에도 없는 거예요. 이것은 전통적으로 세상에 있는 교회가 조작해 낸 거예요. 이것 거짓말입니다.
구원은 나라는 존재가 천당 가는 존재 되는 게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은 뭐냐? 존재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기능으로 하나의 힘의 뭉치가 되어 가는 것이 구원이에요. 존재에서 기능으로 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죽어서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것은 성경에는 아예 그 내용이 없어요. 구원이란, ‘구원 안 된 나’→‘구원된 나’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주님의 기능자’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은근히 노리지요. 절대적인 것이 자기 자신이니까 자기가 죽어서 좋은데 가야 자기가 맘에 만족하니 그런 의도가 있는데 그 의도가, 구약 사사기 내용에 보면 그게 교체가 되는 겁니다.
사사기 10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많이 섬겼어요 암몬이라는 이방민족이 쳐들어옵니다. 이방신들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가만두지 않고 약속대로 징벌을 하시는 겁니다. 말씀이 살아 있으니 징벌을 하는 거지요. 그럴 때 장로들이 하나님께 나가서 구하는 대목이 10장 1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나만 살려주옵소서, 그게 아니고 집단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집단화되는 겁니다, 집단. 집단구원이에요. 이스라엘은 집단구원이에요. 그런데 이 집단구원에 대해서 이 취지를 모르고 개인적인 욕심과 개인적인 명예회복 또는 위신을 찾고 자기의 체면을 세우려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바로 사사기 11장 1절에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입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라서 상당히 천대받았어요. 장로들도 굉장히 무시했습니다. 무시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이 암몬에 포위된 입장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입다 만한 장수가 없었어요. 입다 이 사람이 조폭 출신이에요. 조폭 출신이 되어서 평이 좋지를 않아요.
그런데 나라가 위기에 빠지니까 조폭 출신이라는 것 묻지 않고 ‘제발 힘 좀 쓰는 너희들 패 좀 모으고 백성들도 설득해서 군사 모아서 암몬에게서 좀 살려달라.’고 장로들이 대표단 꾸려서 입다를 찾아왔습니다. 입다를 찾아왔을 때 입다가 내는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뭐냐? 6절에 보면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그렇게 하니까 입다가 하는 말이 사사기 11장 7절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이제 튕기는 거예요. 그래서 조건이 뭐냐? 그 조건이 11절에 나옵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내가 전쟁에 참여해서 승리를 이끌어 내겠습니다.” 조건은 뭐냐? “나를 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확실하게 못 박듯이 인정해주는 조건 하에 가겠습니다.” 지금 장로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단체로서 움직인다고 보는데 입다는 이러한 분위기도 감지 못하고 이번 전쟁을 통해서 자기의 입지, 자기의 개인적인 영달 그리고 이름 내는 것에 있었어요.
그랬던 입다가 승리를 했어요. 승리했으니 얼마나 의기양양한지 ‘봐, 나 이정도야’ 했겠지요. 했는데 그걸 하나님께서 일거에 묵사발 만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입다가 객기를 부리면서 “하나님이여, 도와주셔서 내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돌아올 때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을 내가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사사기 11장 30, 31절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돼지나, 돼지는 좀 아니겠다만, 양이나 나오고 그럴 줄 알았겠지요. 세상에 시집도 안 간, 그것도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가 춤을 추면서 나옵니다. 입다가 사적인 개인영달을 추구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성사시키고 자기는 사적인 명예를 얻고 이익을 얻겠다는 바로 그러한 시도가 도리어 자기 목숨보다 더 아끼고 아꼈던 자식 딸을 제물로 바치는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거예요.
그래서 입다가 말리니까 입다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아버지 약속대로 나에게 행하소서. 하나님의 일은 전쟁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사적인 이득을 취한 아버지의 이익마저도 완전히 작살 내는 데까지 이르러야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다 딸이 아버지에게 ‘나 죽는 것 말리지 마’ 그렇게 당부한 취지입니다.
구원은 뭐냐? 나에게서 집단으로 이동하면서 내가 소실되는 게 하나님의 구원이에요. 내 일은 없고 하나님의 일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의 특징은 뭐냐? ‘제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마라. 네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 이게 주의 일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죽은 자로 만들고 하나님의 통통 뛰는 사슴 안에 있는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 임해야 그것이 바로 성도요, 구원받은 백성의 삶의 모습인 거예요. 강제로 퇴직당해서 갈 데 없을 때 ‘앞으로 뭐 해서 사나? 우리 식구 나만 바라보고 사는 내 식구, 고등학생, 그 밑에 중학교 딸내미, 내가 퇴직했으니 그 애들은 거지꼴이 되었는데 이제 어떻게 사나?’ 본인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그런 일마저 지금껏 고등학생 중학생 딸내미까지 되돌아보면 다 주께서 주의 일로 키워왔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는 것, 그 가정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다시 정리해 드립니다. 구원이란 나의 구원이 날아가 버리고 주님의 기능인으로 변화되는 것, 그게 구원입니다. 주의 사람으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마세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거 참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되면 입다같이 되어버려요. ‘내가 하나님 일을 했으니까 나에게 돌아오는 부스러기 뭐가 있느냐?’ 이런 것 생각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봐서 힘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을 덮어버리는 게 힘이에요. 힘의 공식은 F=ma입니다. ‘질량 × 가속도’ 뉴턴( Isaac Newton, 1642-1727)의 힘의 공식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것은 ‘곱하기’에요. 질량, 개인적인 역량(m) × 가속도(a), 가속도는 외부에서 오지요.
가만있는 나를 밀어버린다든지 끌어당긴다든지, 잡아 당기든지 미는 그 가속도에 개인적 역량, 거기에 ‘곱하기’가 들어가요, 곱하기. 곱하기는 뭐냐 하면, 선(線)으로 되어 있던 인생을 면적으로 넓히는 것을 곱하기라 해요. 나누기는 서로 비교하는 게 나누기고요, 곱하기는 이쪽 선과 이쪽 선, 서로 다른 선으로 죽죽 가면서 그것을 완전히 면적으로 덮어버리는 게 곱하기에요.
직사각형 면적 내는 공식, ‘가로 곱하기 세로’ 하잖아요. 5m(가로)×3m(세로)=15m². 이 곱하기라 하는 것은 선으로, 내 인생을 하나의 가는 선으로 보던 것을 면적으로 보면 그 면적 전체가 동질의 힘이 작동하고 작용하는 것, 그렇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곱하기로 말미암아 개인은 날아가 버리고 집단이 되어버리지요, 집단.
물론 집단의 대표자는 누구냐? 예수님이지요. 성도는 힘 덩어리에요. 성도는 힘 덩어리입니다. 성도는 안에 힘이 있어요. 그런데 그 힘은, 오늘 하박국을 통해서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우리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하박국 보기 전에 이사야 35장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35장 1, 2절에 보면 노래가 나와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자, 노래가 뭐냐? 모든 일이 마무리 지어진 거예요. 끝 지점 또는 끝 언저리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게 노래에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35장 1, 2절. 여기에 노래가 나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노래는 기뻐하는 거지요. 기쁜데 왜 기쁘냐? 모든 것이 끝 지점에 오니까 기쁜 거예요. 자, 쉽게 가겠습니다. 서글픈 이야기지만 가상해 봅시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 제대했다 칩시다. 그런데 직장이 없다. 직장이 없어서 할 일이 없으니까 도시 근방 높은 산에 올라간 거예요. 할 일 없으니 등산한 거지요.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도시의 정경이 보이겠지요. 또 시골 촌에 있던 사람이 취직하겠다고 서울에 가잖아요. 그래서 서울 남산이나 관악산이나 높은 산에 올라가 본다고요.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집들이 무수하게 많지요. 그 정경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은 나로부터 출발해요. 그런데 어둑어둑 석양이 지고 노을이 지고 밤이 되면 그 많은 집들의 불빛이 반짝반짝 하잖아요.
20대 후반의 백수가 느끼는 감정은 뭐냐? ‘세상에 아파트가 이렇게 많고 집들이 많은데 어떻게 내 잠잘 자리 하나가 없냐?’ 모든 출발을 내 시선에서 하는 거예요, 내 시선에서. ‘나 지금 어디 가서 뭘 하면 월 50만 원짜리 고시원이라도 들어가나? 어떻게 해?’ 이력서 내 봐도 안 되고 고민되겠지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 성경에서 하박국에 의하면 이것이 거짓이에요. 왜 거짓이냐? 끝 지점을 말할 수 없거든 모조리 그 앞에 있는 것은 다 거짓이에요. 마지막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뱉는 고민거리, 걱정거리, 염려, 다 거짓말입니다. 전체를 볼 줄 모르니까.
오늘 하박국 끝내면서, 오늘로 하박국은 끝났어요, 10년 뒤에 또 할지 모르겠지만, 하박국을 끝내면서 하박국은 이사야 35장 말씀처럼 지금 노래하고 있어요. 가락에 맞춰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기뻐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왜요? 끝을 아니까요. 끝을 아니까. 이사야 35장 3-6절을 보면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사슴같이 뛸 것이며, 여기에 의태어 하나 집어넣으면 ‘통통’ 뛸 것이며. 통통 뛰는 거예요.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백수 되어서 저 도시 변두리 높은 산에 갈 수는 있어요. 가더라도 서글프게 백수라고 하지 말고 ‘오늘도 주께서 통통 뛰는 힘주셔서 오늘은 도시 근방 남산에 운동하라고 가게 하시는구나. 오늘 일과는 남산 올라가서 시가지 내려다보는 것’ 이렇게 통통 뛰면 되잖아요.
그걸 가지고 신세 한탄하고 ‘나 어디서 무엇이 될까?’ 일할 게 없으면 굶어 죽으면 돼요. 그것도 통통 뛰면서. 이미 죽은 자니까. 참, 말은 쉽다. 이미 죽은 자니까 굶어 죽으면 돼요. ‘네 수명은 여기까지. 굶어 죽는 여기까지. 굶어 죽을 때까지 네가 사슴같이 통통 뛰는 주의 힘으로 죽어라.’ 이렇게 되겠지요.
오늘 하박국 3장 19절에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도시 근방 높은 산에 하나의 통통 뛰는 사슴으로 주께서 힘주시는 것으로 신세타령 하지 말고 ‘주께서 제가 이 도시를 바라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가 나오면 되잖아요.
여러분,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감사가 날아가 버렸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해버리면요, 입다처럼 자기 위신과 체면부터 먼저 챙기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남에게 안 꿀리고, 남에게 안 지고……, 자꾸 자기 생각한다고요.
그러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에 의해서 마땅히 그것은 죽어 마땅한 생각이지요. 네가 지금 출세, 성공, 대기업 취직, 아니라 뭘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천국 사람이 아닌 거예요. 주님께서는 모든 말씀이 이뤄질 때 그때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천국 백성이 되고 난 뒤에 산에 올라가든, 백수가 되든, 굶어 죽든 그것은 큰 문제 거리가 안 되고 고민거리가 안 돼요. 왜? 죽을 때도 왕성하게 죽으니까, 통통 뛰는 힘이 있으니까요. 이게 내 힘이 아니고 동질이라니까요. 집단 속에 똑같이 주어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백수가 된 거예요. 부활의 능력으로 백수가 된 거예요. 제대를 무사히 했고요. 이 동질의 힘이 찬양의 힘입니다.
요한계시록 아까 본 그 대목, 나만 부르는 노래가 아니에요. 다 같이 함께 부르는, 그것도 마지막 때 부를 수 있는 노래, 그게 새노래에요. 감사하고 기쁨의 새노래가 오지요. 자, 하박국은 그러면 이 마지막 언저리까지 그리고 찬미할 때까지 어떻게 어떤 경로로 왔는가?
하박국 3장에도 나오지만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을 따라서 가면 끝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율법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가면 그 끝이 나오는데 그 끝에 우리는 살 가치 없는 죄인 중에 괴수라 나타납니다. 그게 우리 존재의 끝이에요.
그러니 우리 존재에 대해서 기대하지 맙시다. 백수 되었다고 서글퍼 하지 말고, 취직했다고 좋아하지 말고, 어쨌든 간에 우리 존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로 봅니다. 그렇게 끝이 되고, 그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게 뭐냐? 성령을 주시는데 요한복음 3장 33, 34절에 보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십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아들 사이가 말씀의 관계기 때문에 성령을 한량없이 오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잠자는 자여 깨어라, 할 때 이미 그 깨어난 대상, 물론 나 혼자 깨어나는 게 아니지요, 사적인 게 아니니까, 똑같은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니까 그 집단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에서 오는 성령을, 그 힘을, 통통 뛰는 주님의 기능을 한량없이 계속해서 제공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뭘 하든지 어떻게 살든지 늘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주님에 대한 찬미가 나오는 겁니다. 그 찬미의 내용은 이거예요. ‘주여, 제가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하셨습니다.’ 가 찬미의 내용이에요. 직장에 가든 집에 가든 방 청소를 해도 ‘내 힘이 아니고 주님의 힘입니다. 주에게서 나오는 힘으로 청소하라 해서 했습니다.’ 하는 게 늘 뒤돌아보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그게 아니지요. “오늘 청소도 말고 그냥 잡시다. 디(힘들다) 죽겠다. 발도 씻지 말고” “어딜 발도 안 씻고 이불 속에 들어와? 발 씻고 와!” “아, 짜증 난다.” 하더라도 나중에 발 씻고 샤워하고 서 보면 ‘야, 이것조차도 통통 뛰는 주님의 살아 있음의 기능이 나로 하여금 씻게 하셨구나. 감사하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니 뭐가 현실이냐? 말씀 속이 현실이고 뭐가 거짓이냐? 말씀 바깥의 세계, 내가 할 수 있는, 내 힘으로 내 인생 꾸려보려 하는 이것이 다 거짓된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그런 태도 자체가 주님의 거룩하신, 엄중하신 말씀 앞에 죽은 자로 규정되었는데 본인은 죽은 자인 줄 모르고 자꾸 내가 살아야 고등학교 애 공부시키고……, 자꾸 살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말씀 바깥에 나오니까.
서울의 그 많은 집들, 아파트들 전부 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말씀 세계에서 보면 다 죽은 거예요. 죽은 세계에서 아파트 하나 당첨되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말씀에 당첨되어야지 아파트 당첨되어서 됩니까? 아파트 당첨 싫다는 말은 아닙니다. 절대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관리비 좀 나와서 그렇지 보통 재산 아니잖아요.
어쨌든 간에 아파트가 되든 단독주택이든, 빌라든 빌라왕이 되든 간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 것조차도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 주의 원함이 있었고, 내가 바랬던 것이 아니라 주께서 바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그냥 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냥 주신 거지요.
그런 존재가 뭐라고요? 인간이라고요? 아니 인간은 없어요. 뭐라고요? 사슴, 영어로 deer, 사슴 잡는 사냥꾼을 ‘deer hunter’라 하지요. deer에요, 사슴이에요. 그 사슴의 특징은 항상 빨라요. 그 힘을 멈출 수 없어요. 뽑혀 나오는 주님의 기능 때문에 항상 빠릅니다. 빠르다는 말이 그저 성질이 급해서 빨리 걷는다든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의 힘이 멈추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 슬프고 외로울 때도 절대로 쫄지 않고 달려라 하늬, 항상 달릴 준비 딱 되어 있는 것, 반바지 입고 머리띠 한 하늬처럼 항상 주께서 주는 마지막 환경이거든요. 이미 모든 것은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주시는 성령께서 한량없이, 하나님의 증인되라고, 주의 힘으로 사는 특이한 새로운 천국 백성, 네 인생 마감하면서 세상에 널리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는 겁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뒤돌아보면 다 주님께서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는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사슴입니다.” 그리고 이 사슴은 세상 어느 도시의 뒷산보다, 관악산보다 앞산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요. 그래서 “사슴 같게 하사 나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옵소서.” 주님의 시선입니다. 제대해서 백수의 시선 아니고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 안목을 가지고 우리의 마지막 여생을 주께서 힘 주시는 한 주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어떻게 우리가 살 자격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죽어야 되고, 마땅히 진즉에 소실 되도 할 말 없는 저희들, 주님께서 주가 되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주님의 생명 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계속 주께서 살려주시는 그 힘에 부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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