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박국 3:16-18 / 저주받은 선지자 본문
저주받은 선지자
이근호
2023년 1월 25일
본문 말씀: 하박국 3:16-18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뭘까요? 주님께서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것은 ‘나’ 자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나’를 건드리시는 겁니다. 갈대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이스라엘 들판에 있는 모든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감람나무와 양과 소를 없애버립니다.
이것은 한 강대국와 약소국 간의 전쟁을 할 때에, 강대국은 살벌하게 약소 국가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짓밟아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선지자 자신의 내부에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로 인해 전혀 예상 못하는 동요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향한 저주가 선지자 개인을 향한 저주로 전환되었다는 점입니다.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고 선지자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선지자의 내면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예언이 되어버린 겁니다.
선지자는 신앙인 중에서 그 당시 대표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늘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기에 어지간한 변동이 있어도 눈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단호하고 곧은 믿음의 소지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흔들입니다. 많이 흔들리고 끔찍한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것은 여태껏 그가 경험하지 못한 저주의 무게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하박국을 극단까지 밀어붙이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인간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죽음의 본질에 다가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신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인 죽음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가 경험하는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저주가 밀어닥치면서 경험되는 죽음입니다. 곧 선지자는 그 어떤 경우라도 버틸 수 있는 주체 자체마저 상실케 하는 저주의 죽음이 찾아든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집단적 저주라고 여긴 그 갈대아 군대의 침범을 가지고 선지자 개인의 저주스러운 죽음에 의미가 응집되도록 하신 겁니까?
하나님의 예언이나 계시나 어느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인를 겨냥한 예언으로 집중케 하는 겁니까?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보여질 말씀 성취 단계에서 메시야 자신이 전하는 그 말씀에 의해서 본인이 저주받는 절차를 필히 겪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의 권세에서 빠져 나올 때, 그들은 아무런 자질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은 채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빠져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혜택이 자신들에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지하고 못하고 하나님의 혜택을 즐기기에 급급한 겁니다.
신명기 6:10-13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 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모든 말씀을 온전히 다 지켰을 때에만 주어지는 수준의 복을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에게 무조건 주신 겁니다. 그들은 어떤 더러운 존재인지도 알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래놓고 하나님께서는 그 복들을 하나 둘씩 철거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은 원래 율법의 어느 것 하나 지킬만한 역량이 없음이 들추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인간도 복을 받을 위인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서 이스라엘을 본보기로 삼아, 왜 인간은 율법에 의한 복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밝혀내십니다. 이 원칙이 하박국 선지자까지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박국 선지자에 적용되어 성립된 이 하박국 예언은 장차 메시야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즉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자없이, 죄없이 하나님의 일을 잘 수행해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주체에 저주가 임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것을 미리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 이 저주의 잔이 자기에게 찾아들지 않기를 아버지에게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예수님은 저주 안으로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하며는, 말씀 안에서 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있기 때문에 ‘말씀 완성’은 곧 ‘온전한 저주의 완성’도 포함되는 겁니다.
저주란 자신의 주체 자체를 제거하여 시신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본인들의 마땅히 저주받을 시신(시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인간의 인생사란 시신이 시신을 질질 끌고 자진해서 화장터로 데려가는 여정입니다. 죽은 것을 억지로 부러 살려보려고 하다가 결국 말씀의 저주받아 죽은 것이 인생입니다.
말씀도 못 지키는 인간에게 복이란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무화과 나무에 열매에 없어야 되고 포도나무도 그러하고 무화과 나무도 그러하고 양과 소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의 주체 자체를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생각도 못한 ‘우연’입니다. 우연은 ‘우발’과 다릅니다.
‘우발’도 역시 예상 못한 일을 두고 말하지만, 그로 인해 기존의 질서가 다 무너져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기존 질서를 관장하고 추스르는 주체 자체가 굳이 소실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한 때 예상밖의 우발적인 사태로 잠시 흔들릴 수는 있었지만 강한 의지의 소유자인 주체는 그 역경을 강하게 이겨내면서 더 질적으로 발전한 모습으로 재복원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연이란 아예 주체 자체를 시체로 만들어, 다시 ‘나’ 자체가 재기하는 바가 없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에게 찾아온 저주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저주스러운 계시를 선지자에게 집중할까요?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받으신 저주가 결국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구현하는 필연적 절차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즉 저주로 시작한 오늘 본문이 끝에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하박국이 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선지자는 말씀이 보여주는 절차와 과정에 끌려들어가서 하나의 구원 노선을 형성한 겁니다. 저주로 들어갔다가 기쁨으로 빠져나오는 절차 말입니다. 마땅하 저주받을 자가 마땅히 복 받을 자로 간주해주시는 ‘말씀 성취 자체의 혜택’을 오늘날 성령받은 성도들은 누리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축복과 저주를 다 품고 있는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서 경험으로 고백케 하는 혜택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5강-하박국 3장 16-18절(저주받은 선지자)230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3장 16-18절까지입니다.
하박국 3:16-18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 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6절이 없이, 그러니까 “내 창자가 흔들렸고 ……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다 그 이야기가 없이 그냥 17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을 가지고 ‘내 주체의 복음’이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6절이 없다면, 16절을 끊어버리고 17절부터 18절, 방금 읽었던 말씀을 봐버리면 이것은 아주 비장한 각오, 자기의 결심을 내세운 게 돼요. 아주 자기에게 자기가 다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신앙적으로 강렬해야 되고 강해야 돼.’라는 그런 자기의 대단함, 미래에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 것으로 강하게 기대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희망을 쏟는 겁니다. 희망을 갖는 거예요. ‘선지자도 되는데, 선지자도 이렇게 신앙적으로 대단한 존재가 된다면 나도 같은 인간인데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느냐?’ 이 본문이 심지어 애들 노래하는 가스펠송에 나와 있어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그럴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겠다.’
그런데 이 말씀의 문제점은 방금 이야기한 그 비장한 각오, ‘야~, 신앙은 이게 신앙이지. 어려워도 그 어려운 가운데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이게 진짜 신앙인의 모습이지.’라고 그냥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16절과 관련되어 버리면 이것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닙니다. 지금 16절의 이 일 같은 본문은 지금 선지자가 어디에서 어디로 들어가고 있어요. 어디로 들어가고 있느냐?
16절 다시 보게 되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그다음에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이 대목,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다. 하나님이 일으킨, 하나님이 벌이시는 그 일이 어디 속에 들어오는가? 지금 선지자 속에 들어와요.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세상은 이렇게 환난이고 지금 갈대아 사람이 쳐들어왔다. 이럴 때 ‘아, 우리 이스라엘 나라는 망하는 게 아닌가? 아, 이렇게 망하는구나.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지.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래, 우린 각오해야지. 하지만 이 어려운 가운데서 나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처신을 하면 좋을까? 그것은 바로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다 할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면 돼.’라고 나서는 것, 그것 자기 조작입니다.
이것은 지금 전혀 신앙이 아니에요. 이것은 신앙적으로 어떤 목표 같은 게 생겨버린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뭐가 등장하겠습니까? 오기가 바짝 올라가지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오기는 비례해서 더 강화되지요. 오기가 더 증가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는가? 지금 하박국이 어떤 자기의 신앙적인 결단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가 감당을 못합니다. 본인이 감당을 못해요. 16절에 ‘내가’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리고 16절 끝에 ‘내 몸’이 나오지요. “내 처소에 썩은 것이 들어”오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 치는데 왜 선지자가 벌벌 떨고 있어요? 그 용감한 선지자, 믿음 있는 선지자,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믿음을 보일 선지자가 왜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집중이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집중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망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그 당시 갈대아의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의 포도나무고, 무화과 나무고, 밭의 소출, 감람나무, 양도 소도 다 몰살당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바벨론 나라에 완전히 망하고 그들은 다 포로 잡혀 갑니다.
그런데 초점이 그게 아니고 이러한 바벨론의 공격이 하박국이라는 개인에게 집중적으로 절망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 갈대아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그 소식이 우리 생각 같으면……, 아까도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방송이 원활하지 못했던 관계로 되풀이 합니다.
바벨론이 쳐들어 왔지만 ‘그래,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거기서 망하면 되지. 하지만 그까짓 거 무화과나무니 소니 양이니 그런 것 없어도 괜찮아. 나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뻐하면 돼.’라고 마음 정리를 하면 되는데 오늘 본문은 그게 아니에요. 그것은 어지간한 오기 있으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 척하는 사람들 다 해내요.
지금 그게 아니고 하나님은 하박국 속에서 그 하나님의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의 환난이 하박국을 시체로 만드는 거예요. 죽은 자로 만드는 겁니다. 여기 보면 ‘내 창자가 흔들렸다’는 말은 ‘나’라는 그 주체가 있던 내 마음의 자리, 자아가 있던 내 마음의 자리가, 내가, 그 ‘나’가 여기서 완전히 사라지는 거예요. 내 자아가 죽는 겁니다. 시체 되는 거예요.
인간의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눈에 보이는 사람이 숨 끊어지는 죽음이 있고, 또 하나의 죽음, 언약적인, 성경적인, 복음적인 죽음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된 통으로 맞아서 멀쩡하게 몸은 살아 있는데 하나님의 저주가 들어오는 것, 이게 언약적인 죽음입니다. 언약적인 죽음, 하박국은 그 죽음을 맞이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박국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선지자가 그냥 ‘나는 망했다. 하지만 믿음 있는 선지자니까 버티면 된다.’ 이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 본인보고 왜 절망에 이르게 하고, 숨끊어지는 죽음 말고 인간 자체, 선지자 그 ‘나’ 자체를 이렇게 죽이는 이유가 뭐냐? 하박국 선지자하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죽음과 연계시키고자 하는 거예요.
쉽게 해도 안 되는 것 어렵게 그냥 가겠습니다. 우연이라는 것, 성경에서 우연이라는 것은 보통 예상 밖의 것을 우연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우연은 뭘 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이 세상의 구조, 질서, 이 자체에서 무슨 예상 밖의 일이 터져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 내가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렇다면 예상 못 한 일을 새롭게 알았으니까 그것을 기존의 구조에 새로운 정보로서 넣어가지고 이것을 재복원하면 된다. 아, 환난이 왔구나. 그렇다면 환란이 없던 나보다 그 환난까지 받아들여서 다시 질서를 리셋(reset) 하는 거예요. 초기화시켜서 다시 만들어버리면 그다음부터 어지간한 환난이 와도 버텨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코로나 백신 맞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독감 주사 맞는 것도 마찬가지고, 대상포진 주사 그런 것도 다 같은 겁니다. 그런 것이 왔을 때 나를 죽이는 게 아니에요.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나를 더 강화하기 위해서, 어떤 병균이 와도 버티기 위해서 면역을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더 연단하듯이 줬을 때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그걸 우연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걸 우발이라고 해요, 우발.
우발적인 사고, 예를 들어차 운전을 하는데 토끼가 튀어나왔다. 운전하는 사람이 깜짝 놀라지요. 이것은 운전하는 사람이 예상 못한 우발적인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차에 토끼가 와서 받치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내 차를 폐기처분 합니까? 그런 일은 없지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데 차를 몰고 가는 중에 위에서 돌이 떨어져서 차에 탄 나도 죽이고 차도 박살 냈다. 그걸 가지고 우연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연의 특징은, 우발은 내가 버티고 있으면서 더 강화시키는 것은 우발이고, 나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것은 우연이에요. 어렵지요. 우연이나 우발이나 우리는 같이 사용하는데 우발적인 것은 ‘아이고, 깜짝 놀랐잖아. 앞으로 정신 차려야 되겠네.’ 이것은 우발이고, 우연이라 하는 것은 주체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보고 힘내라, 잘해라, 그게 아니고 “내 아들 예수야, 내가 너를 계속 살게 할 테니 너는 뜻대로 잘해.” 이게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십자가에서 아예 죽여버리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그것도 저주해서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 안에 저주가 들어오는 겁니다.
지금 하박국 안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박국은 죄가 없어요. 믿음 좋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준비된 그 저주가 이스라엘 백성만 치는 게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만 없애는 게 아니에요. 소를 없애는 게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 그 자체인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저주해서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선지자의 소실, 소멸이에요.
이것은 우발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연입니다. 다시 재복원할 수있는 가능성 자체를 전혀 차단시켜 버리는 거예요. 오늘 대여섯 번 이야기하는데 또 합니다. 이 본문 말씀을 보고 ‘그래, 살다 보면 신앙인도 어려움이 오지. 무화과나무 열매가 바람에 떨어질 수도 있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수도 있지만 신앙은 뭐야? 그렇게 소나 보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무화과 나무 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거야. 나는 이런 인간으로 재탄생하고 다시 태어나야 해.’
이것은 지금 이 본문하고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이것은 종교적인 오기입니다. 자기의 각오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 뜻은 뭐냐? ‘하박국, 좀 없어져 줄래?’ 그거예요. “제가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고 하박국 선지자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려서 환난을 대처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갈대아의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 여기 16절에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그러니까 이것은 믿음 좋은 선지자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처음이고, 여기서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시체였구나.’ ‘내가 시체가 되는구나.’가 아닙니다, ‘나중에 늙으면 내가 무덤에 가겠지.’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정확한 말씀에 의하면 최종적인 말씀에 의하면 ‘내가 벌써 시신이었구나.’
하박국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내용은 이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시신을 질질 끌고 자기를 화장터로 끌고 가는 고된 인생사, 그것밖에 없어요. 본인이 시신이면서도 시신이 시신을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방향은 정해져 있어요. 하나님의 저주가 있는 곳으로 계속해서 열심히 일하면서, 시체를 보고 더 살려보겠다고 애를 쓰면서 가는데 그 가는 방향이 주님의 저주가 기다리는 곳으로 모든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하박국 선지자가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으로 그 당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겨낸다. 이겨낸다는 것은 오만이고 교만이에요. 우리는 이 상황을 내가 이겨낼 필요 없어요. 이겨내서 뭐하겠다는 거예요? 이겨내면 자기 과시가 되는데요. 자기 믿음 좋다는 것, ‘하나님이 연단했구나.’ 이런 것 가지고 자기 과시할 것이 뻔하다는 말이지요. 기어이 이기리라. 그것은 박세리가 했고요. 기어이 끝내 이기리라, 끝내 이기리라, 고 하는 그 주인공이 없어져요. 끝내 이길 주인공이.
주께서는 ‘제발 그런 것을 좀 산정하지 말고 그걸 내세우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겨냈습니다.” 그런 소리,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영웅이지요.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보람찬, 아주 장한, 대견스러운 내 인생아!’ 이것은 자기 찬미입니다. 자기찬양이에요. 그건 신앙하고 아무 관계 없는 가짜 신앙입니다.
그러면 장차 오실 예수님과 연관해서 이런 말씀을 해야 되는데 왜 이런 이야기가 있어야 되는가? 신명기 6장 10-12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뭘 보여주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다 지켰을 때 어떤 혜택이 주어지고, 어떤 모델적인 삶이 주어지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미리 보여줬어요. “네가 잘하면……” 잘 들으셔야 돼요. “네가 잘하면 이 땅에서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잘 자라게 해줄 게. 네가 잘하면 애굽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끄집어낼 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한 것도 없어요. 그냥, 그냥 일방적으로 주님에게 애굽에서 끌려나온 거예요. 끌려 나와서 어디에 심었느냐 하면, 그냥 포도원이 잘돼요. 그냥 외양간에 소가 많아요. 그냥 감람나무가 잘 자라요. 그냥 무화과나무가 잘 자라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역시 우리가 하나님 믿기 잘했구나.’ 지금 이렇게 오산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맛보기로 보여주고 깎아내는 거예요. 그게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참 어렵지요. 그 약속의 땅의 특징이 말씀을 완벽하게 완전한 최고수준, 하나님 뜻에 합당한 수준이 될 때 무화과나무 열매가 맺히고 포도나무 열매가 맺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뭐 했습니까? 자기들이 그 땅에서 뭘 한 거예요? 그냥 공짜로 들어간 거예요, 공짜로.
공짜로 그 땅에 들어오니까 이게 잘되거든요. 잘되니까 그 공로를 ‘역시 우리가 참 믿음이 좋았기에 복이 온다’고, 이 무화과나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최고수준, 최고등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등급을 유지도 못 하고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는 자기 자신의 역량과 엮는 거예요. 다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오해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된 것은 다 조상 탓,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히브리인들이 뭐가 잘나서 그 당시 최고의 강대국 애굽, 그 막강한 군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뭔가, 뭔가, 우리가 저 막강한 바로의 군대를 이길 수 없는데 거기서 나왔다면 뭔가 자기에 대해서 생각해 볼 줄 알아야 돼요. ‘역시 우리 훌륭하구나.’ 지금 이런 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요.
왜 그런 쪽으로 가면 안 되는지 다시 생각해야 돼요. ‘아, 나라는 수준, 나라는 존재를 내가지금 전혀 모르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최고로 말씀을 다 지킨 자에게만 돌아가는 그러한 복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저한테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뭐가 잘못됐습니까?’라고 반문해야 돼요. ‘주님, 제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런 복을 주십니까?’ 이렇게 나와야 돼요.
‘제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응답을 안 해줍니까?’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제가 지금 뭐가 잘못되었기에 사람을 패도 어떻게 돈으로 패고, 사람을 패도 어떻게 출세로 패고, 사람을 패도 소로 패고, 무화과 나무로 패고, 어울리지도 않는 권세와 성공 그것으로 왜 저에게 주십니까?’
주님의 뜻은 뭐냐? 그 복으로 네가 좀 맞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저주로 맞는 게 아니고, 복으로 맞는 거예요. 복으로 얻어맞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기능자입니다. 말씀의 운반체에요.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말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인간이 만날 때 인간은 그 말씀에서 얼마나 크게 오해하고 있는가를 시범조로, 샘플로, 본보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채택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대 위에 있는 일종의 연극배우예요. 연극배우입니다. 복을 받을 가치도 없는 자에게 복을 주고, 그다음에 그 복을 하나님께서 다 무너뜨립니다. 무너뜨릴 때 다시 옛날의 그 자리에서 ‘역시 나는 복을 받을 자격이 못 돼.’ 이 정도가 아니라 어디까지 벗겨내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복을 주고 벗겨낼 때는 복이 오기 전에 내가 벗겨내는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더 극한으로 벗겨낼 수가 있어요.
좀 지저분한 예를 들 수밖에 없어요. 다리에 털 날 때 그게 보기 싫다고 자기가 뽑으려 치면 아프고 짜증 나고, 굵은 것은 남겨두고 가는 것만 뽑아내고, 이렇게 되거든요. 그걸 옆에서 보던 하나님께서 “아이고, 내가 답답하다. 파스 가져와라.” 파스를 붙여버립니다. 털 난데 파스 붙이면 붙인 그 표면은 하얗게 되어서 밖에서 보면 털이 하나도 없어요.
왜? 파스의 하얀 표면이 털을 다 가렸기 때문에 털이 하나도 안 보이지요. 시력이 0.2쯤 되는 사람은 “야~, 어제만 해도 다리에 털이 많았는데 털이 하나도 없네.” 시력이 0.1, 0.2니까 분간도 못 해요. 이게 진짜 사람의 다리인지, 파스를 붙인 것인지 분간도 안 되는 사람이 “야! 너 오늘 보니 털이 없다.” “털 없지? 내가 처리했어.”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 “파스 떼라.” 분명히 파스 미리 붙여놓고는……, 제가 지저분한 예라고 미리 말씀드렸지요. 파스를 붙여놓고 그걸 강제로 우두둑 떼는 거예요. 아프지요. 죽을 만큼 아프지요. 내가 털 하나하나 뽑는 것보다 파스 가지고 뜯어내 버리니까 진짜 ‘나’라는 자체가, 자아라는 자체가 주님의 떼는 저주에 붙여져서 나 자체가 완전히 다 뜯겨나가 버리지요.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그냥 그 자체가 시체로 태어난 거예요. 그냥 시신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극한으로 이렇게 몰아붙이는가? 선지자를 왜 이렇게 몰아붙이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몰아붙이는 것하고 똑같은 이치를 구약 때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잘해보려고 하실 때 예수님 스스로 잘해보려고 하는 그 한계가 어디서 드러나느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똑같은 기도를 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게 뭐냐? 그때는 ‘아버지’라 했지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 잔을 내가 안 마시고 넘어가서 주의 일을 하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한번.
또 기도합니다. “이 저주의 잔을 안 마시고 주의 일을 완성할 수는 없겠습니까?” 두 번. 아직도 주님께서 마음의 각오가 없어요. 세 번째 “주여, 감당하겠습니다. 이 저주를 받겠습니다. 제가 죽겠나이다.” 그 죽음은 목숨 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저주를 흠뻑 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나 주어지는 그 무서운 저주를 죄 없는 예수님이 흠뻑 다 받는 거예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그럴 때 예수님은 죽어버렸어요. 아버지에 의해서 죽어버렸습니다. 죽은 예수님, 그것도 그냥 죽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은 예수님,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말씀처럼 저주받아 죽은 예수님의 표본, 본보기, 본문에서는 그게 하박국 선지자예요. 창자가 떨리고, 썩은 것이 들어오고, 이게 개인에게 오는 거예요. ‘나’, 계속 ‘나’예요.
지금 선지자는 팔짱 끼고 ‘이스라엘 백성이 내 말 안 듣다가 하나님께 벌 받아라. 그래, 마땅하지. 그래야 내가 선지자답지.’ 이게 아니라 지금 그 저주의 기운, 이스라엘도 물론 망하지만 그런 집단적인 것들, 집에 화재가 나고, 밭을 빼앗기고, 소가 죽고, 그런 것 말고 사적인, 개인적인 의식, 개인의 내부, 주관적인 내부까지 저주가 쳐들어오는 것은, 이게 선지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박국 선지자기 때문에 그걸 감당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18절에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이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Raiders of the Lost Ark, 1981)에 법궤가 나옵니다. 성궤, 모세가 만들었다는 법궤가 나와요. 솔로몬이 숨겨놨다고 하면서 독일군이 지도를 가지고 찾아 나섭니다. 주인공이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 1942~)지요.
법궤를 드디어 발견했어요. 그 영화를 보면서 말씀에 대해서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어요. 독일군이 법궤를 먼저 차지하려고 하지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보물이니까요.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냥 상자에요. 금박 입힌 그냥 상자입니다. 영화 이야기를 먼저 하면, 그 상자를 만지고 그 뚜껑을 여는 순간 거기서 무서운 영이 나옵니다. 인디아나 존스는 저 뒤쪽에 있었고요.
독일군이 그 법궤를 먼저 찾아내서 그 뚜껑을 열었을 때 거기서 죽음의 사자, 무서운 죽음의 사자가 주변에 깔려 있는 독일군을 그 현장에서 완전히 해골로 만들어 버려요. 살갗이 다 뜯겨나가면서 선 채로 몇 초 만에 다 해골로 변해버려요.
거기서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그런 무서운 영이 나와서 그렇게 다 뜯겨나가고 난 뒤에 다시 뒤늦게 온 그 주인공이 그 법궤를 볼 때 그 법궤는 하나의 나무상자에 그치는 거예요. 영화입니다, 영화. 그저 나무상자에 불과해요. 왜? 그 신빨이 나 빠져나갔으니까. 좀 비슷한 영화가 ‘로마’라는 영화가 있어요. 로마 지역에 하수구 보수하는 인부들이 뭘 발견했느냐 하면 중세때 프레스코화가 온 사방에 걸려 있는 세계 최고의 명작들이 걸려 있는 공간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연락을 해서 고고학 관계자들이 우르르 왔어요. 미켈란젤로니 그 당대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순간 그 공간이 갑자기 무너져요. 왜 무너지느냐 하면, 외부인이 그 현장이 들어가지 않는 조건하에 그 명화는 유지가 되어 있었는데 외부에서 그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그 외부인 앞에서 명화는 완전히 흙덩어리로 다 무너져 내립니다.
자,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는가 하면, 우리의 주체가 살아 있고 ‘하나님, 제가 구원받으려면 뭘 하면 됩니까? 제가 천국 가려면 뭘 하면 됩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이 되고 믿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말씀을, 살아 있는 내가 보다 훌륭한 신앙인, 천국 가는 신앙인 되기 위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이것은 진짜 말씀이 품고 있는 그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에요. 전혀 관계없이 내가 그 말씀을 구경하는 것이고, 관찰하는 것이고, 지키려는 것이고 그 말씀은 내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객관화 되어 있어요. 오늘 하박국 말씀처럼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 주관화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를 봅시다. 오늘 하박국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하박국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론 그것도 인간이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환난이 온다는 것을 제가 미리 알고 믿음을 단단히 해서 심지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이런 각오를 단단히 하면서 ‘하나님, 조치하세요. 저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저건 망해도 돼, 하나님의 뜻이 망하는 것이라면 제가 충분히 감당하겠습니다. 자, 하나님 일하세요.’ 이런 경우는 이것은 말씀이 하박국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요, 객관화되는 거예요. ‘내가 지켜보겠어. 관찰해보겠어. 주께서 어떻게 하는지 내가 보고 내 믿음이 그 정도 견딜만한 믿음이 된다고 자부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복이 있다고 했지요. 그리고 뭐도 있는가? 복만 있는 게 아니고 저주가 있거든요. 말씀이 품고 있는 저주가 말씀 안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 속에, 법궤 속에 있는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는 것처럼 선지자를 향하여 돌진해서 말씀 자체의 저주가 선지자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는 뭘 통과하느냐?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이 있는 말씀 속을 관통하고 지금 통과하는 체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무슨 말씀을 지킵니까? 뭘 지켜요? “여러분, 저것은 법궤입니다. 뚜껑 열면 큰일 나요. 우리 다 죽습니다. 잘 봤지요? 자, 다음 고대유물 보러 갑시다.”
지금 그게 아니고! “여러분, 창세기 내용은 이렇습니다. 잘 들으셨지요? 잘 공부했지요? 그 다음 출애굽기 공부합시다. 잘 들었지요? 이건 민수기, 신명기, 오늘 한 것은 하박국이고, 그 다음에 로마서가 여기 있습니다. 잘 들었지요?” 지금 이것은 박물관 관람하는 거예요. 말씀 자체가 갖고 있는 것, 뭘 갖고 있는가?
말씀 자체가 마지막 심판의 능력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심판 안 받으려고, 말씀을 지켜서 심판 대신 구원받으려고 말씀을 보잖아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임의대로 나 잘되기 위해서 말씀을 대상화 시킨 거예요. 그것은 말씀 속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찾아온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보면 서예가들 글씨 써놓은 것 있지요. 동양화 그림도 있고요. 동양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립니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제사 지낼 때 10폭짜리 동양화 그려진 병풍을 쳤어요. 졸지에 거룩한 공간이 되는 겁니다. 제사장의 공간. 저는 어릴 때 심심해서 동양화 그림 속을 봐요. 이발소에도 그런 그림 많이 있어요. 그림에 보니 허연 노인이 갓 쓰고 강가 정자에 있는데 아무리 봐도 그 정자까지 가는 도로가 보이지를 않아요. 길이 없는데 거기 앉아 있어요. 나룻배 타고 갔는가 나룻배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야, 좋다. 유유자적하고 진짜 신선놀음이구나.’ 하지만 내가 보는 그림이에요. 내가 그 속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림이에요. 우리가 보는 것은 그냥 말씀이고 ‘이렇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는구나. 믿자, 믿자. 무화가 나무에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 애가 성적이 내려갈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라. 나는 이 말씀을 믿을거야, 믿을거야, 믿습니다.’
지금 이것은 자기 각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 신앙적인 결심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자기 오기를 지금 발산하는 거예요. 왜? 안 죽으려고, 시체 안되려고, 저주 안 받으려고.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저주를 피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었습니까? 그냥 말씀 지키고 살면 되잖아요. 왜 그 기도가 있었던 거예요? 저주가 자기에게 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저주가 죄 없는 자기에게 저주가 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야 돼요. 그래야 대신 죽으심이 되니까. 지금 하박국에게 일어난 일, 하박국이 시체가 되고 저주 속에 있는 것, 이것이 성령을 통해서 말씀이 그대로 우리들 속에, 이 말씀에 대한 완성으로 우리 안에 성령으로 주십니다.
주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내가 살아도 시체고, 죽어도 시체고, 하나님의 복 받을 자격 전혀 없음을 우리는 기쁨으로 알게 됩니다. 내 안에 나 대신 저주받으신 분, 나 대신 저주받은 하박국, 하박국은 온전한 메시아는 아니니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저주받은 하박국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내다보는 것처럼 우리 신약에는 저주받은 그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삼스럽게 이 말씀을 지킬 필요 없어요.
아니 말씀을 지킨다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어와 버립니다. 말씀을 다 이루었다, 가 우리 안에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 버리면 그다음에 18절에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 전에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 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이렇게 해놓고 17절 띄우고 18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즐겁다, 기뻐한다, 하는 것은 16절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하박국으로 하여금 두렵고 발발발 떨게, 그런 공포가 없어요, 이것은 하박국이 생전 처음 겪은 공포에요.
그 공포를 경유해서 뭐로 빠져나오는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기쁨으로 빠져나오는 이 코스는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코스고, 그다음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우리가 이 코스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우리가 뭘 지켰습니까? 전혀 아무것도 지킬 필요 없고요,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 하박국 말씀이 통째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지키는 것이 아니고 겪게 하지요. 지키는 게 아니고 체험케 하지요. 지키는 것이 아니고 경험케 하지요. 내가 시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경험케 하고, 따라서 우리가 그동안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우리의 양,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 하박국은 뭘 통과하느냐?
무화과 없는 곳으로 통과하고, 포도나무가 전혀 없는 곳으로 통과하고, 감람나무가 없는 곳으로 통과하고, 양이 없는 곳으로 통과하고, 소가 없는 곳으로 통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지자 속에 계속해서, 계속해서 선지자로 하여금 너는 복을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주께서 친히 체험케 하시면서 어디로 빠져나오는가?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그곳으로 빠져나옵니다. 이게 하나의 완성된 성도의 삶으로서 딱 곽이 짜인 거예요.
성도는 이렇게 된다. 완전히 구성된 거예요. 지키는 게 아니고 매일같이 이런 체험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야 돼요. ‘하나님이여, 왜 저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와 복으로 저를 패십니까? 왜 때리십니까? 매일같이 주께서 복으로 패시는데 제가 복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주께서도 알고 저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자꾸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까? 왜 무화과나무가 있고 왜 포도나무가 있습니까?’
이것은 포도나무가 있음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코스 자체, 구원의 하나님이가신 코스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동참시킨 그 기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말씀 지켜서 나한테 이익이 되려는 그러한 큰 오산 속에 있었다면 주여, 그것이 잘못인 것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십자가 없이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너무나 악마적이고 불신앙적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뭘 했는지를 주와 함께 살면서 늘 체험하고 반복해서 경험하는 저희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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