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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박국 2:18-20 / 패는 하나님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하박국

하박국 2:18-20 / 패는 하나님

정인순 2022. 12. 29. 13:48

음성 동영상 Youtube

 

패는 하나님 

 

이근호
2022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하박국 2:18-20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2:19)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인간 세상에서 내세우는 신은 모조리 우상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이미 악마로부터 농락당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 본인이 관리하거나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신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 끼리는 ‘무엇이 바른 신이고 무엇이 거짓 신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우상인 것과 참된 신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야 판단해줄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거저 공감되어 묶어진 인간들만의 세계를 선호합니다. 그 안에서 힘을 한데 모아 이상적(理想的)인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따라서 어느 신이 옳은 신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해 있는 단체에서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이는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나타나셔야 비로소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이 우상인 것으로 밝혀집니다. 십계명에서 제일 된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근거는 출애굽기 20:2에 나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즉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오게 됨으로서 비로소 참된 신과 거짓된 신이 이 세상에 구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속해 있는 애굽의 신이 왜 우상인지를 그들의 집단에서 벗어나면서 발견하게 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상은 나무나 돌로 만들었기에 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들이 만든 신들은 순전히 인간쪽에서 일방적으로 신에게 말하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마치 사람이 혼자 상대없이 탁구나 테니스를 치면 본인에게서 나간 공을 되돌려 받는 식으로 반복해서 시합합니다.

이는 곧 인간 내부에 말하는 상대가 들어 있고, 그 상대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외부에 마련한 것이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상의 본질을 알려면, 인간은 스스로 누구하고 이여기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 게신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니까 세상 모든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대자연 속에 인간들은 자연이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악마의 사주를 받아 지칭 신처럼 살고픈 인간의 마음과 자연 현실 사이에 갭이 생겨버린 겁니다.

매사가 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연을 통해서 매일같이 억울하게 매맞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착하고 선하고 반듯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아서 나름대로 이만하면 행복할 자격있다고 자부하고 싶은데 이런 착한 나를 누군가 사정없이 패고 있는 겁니다.

어느 누군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울화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그것은 현실 돌아가는 것과 자신의 기대의 불일치로 인한 겁니다. 따라서 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뇌가 터질 지경이지요. 미쳐버리기 전에 타인을 향하여 울분을 퍼붓는데 이것이 범죄입니다.

이 분풀이를 순화해서 스포츠로 풀면 이것이 바로 ‘게임하는 세상상’입니다. 정치를 지켜보는 것도 양패로 나뉘어서 벌리는 게임에 승부를 걸어보는 겁니다. 이도저도 시원찮으면 만만하게 자기 자신이겠지요.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면서 화를 자기에게 풉니다. 그것도 성에 안 차면 자살해버립니다.

교회와서 신을 찾는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 사회가 인정한 우상을 사용하므로서 대외적으로 (교회 내에서) 신앙심 좋다는 인정받는 것으로 자신의 내부 울분을 다소 달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와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울분을 신을 상대로 해서 일방적으로 자기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즉 “착하기 그지없는 나를 왜 그리 못잡아 먹어서 괴롭히십니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전 앞에서 잠잠할지어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잠잠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전에서 실시되는 심판을 감을 잡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즉 인간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성전 가치 앞에서 무가치하다는 겁니다.

성전은 끊임없이 이 세상을 향하 심판을 쏟아내는 곳입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비멜렉이라 족장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고 싶어했을 때, 그 종족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떨어졌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언약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족장이 사람을 잘못 건드린 대가입니다.

이처럼 성전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하는 곳입니다. 신약에서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양은 사람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마저 빈 무덤 남기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내력에는 인간의 거침없는 하나님에 대한 울분을 홀로 다 받아내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따라서 우상이 아닌 참된 신은 예수님 뿐입니다. 이제는 그분마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인간들 논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분의 보좌에서 뿌려대는 심판으로 인하여 자욱한 연기가 여기저기서 피어오릅니다. 요한계시록 5장과 6장에 걸쳐 일곱인을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전이 보일 때마다 재앙이 이 세상을 향하여 쏟아집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서 일곱 나팔이 시작됩니다. 일곱은 개시용이요, 일곱 나팔은 경고성 재앙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일곱 대접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심판성이 전면적으로 다 적용된다는 겁니다. 그 끝이 일곱 대접이며 거기서 지옥문이 열립니다.

일곱인과 일곱나팔과 일곱 대접은 서로 물려있는데 그것은 이 심판의 이유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창에 찔렸기 때문이라고 요한계시록 1:7에 나옵니다. 따라서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압니다. 이런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근거는 요한복음 5:24에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즉 예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주의 일이니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의 주장을 내놓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강-하박국 2장 18-20절(패는 하나님)2212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2장 18-20절까지입니다.

하박국 2:18-20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 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 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우상이라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이방민족, 이스라엘 외 모든 이방민족들이 신봉하는 신을 우상이라고 이렇게 규정을 했습니다. 20절에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신다.” 여호와, 참된 신은 그 성전에 계신다 했으니까 성전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고 그들이 인정한 신, 그 신은 이스라엘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께서 만약 이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은 전부다 우상이 되겠습니다. 따라서 전체가 우상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믿는 신 가운데 어느 것이 참된 신이냐, 아니냐를 골라낼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이 인간에게는 애초에 없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참된 신이고 이것은 거짓신이야, 라고 인간에게 그걸 판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판별은 여호와가 계시는 그 성전이 출몰할 경우에만 그것이 우상이다, 참된 신이다, 판정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이 타인에게 “네가 믿는 신은 거짓이야.”라고 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어느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호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간은 그냥 우상 외에는 다른 신이 없어요. 우상만 섬기는 그런 존재들이었지요.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등장하셔서 나타난 그 이스라엘, 이스라엘에게 제일 먼저 준 지시가 뭐냐 하면, 신을 구별하라는 겁니다. 그게 십계명에 나와요. 십계명 제일 첫 번째 계명이 뭐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진짜 신이 이제야 등장했다 그 말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 2절을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신, 애굽 사람들이 다 공감하고 있던 신을 그들은 애굽에서 경험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여호와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여호와께서 단체에게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애굽에서 거기서 탈출시킬 때 비로소 그들이 알았던, 애굽의 사람들이 믿었던, 그들이 느꼈던 신이 이게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붙잡아서 끄집어내주지 아니하면 참된 하나님을 몰랐던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뭐냐? 거짓된 신으로부터 참된 신의 품속으로 데려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절에 갔다가 교회 오는 게 구원이 아니고. 그러니 구원이 되려면 ‘나는 아무것도 안 믿었는데 이제 하나님 믿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나는 거짓된 신을 믿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알고 보니 나는 거짓된 신을 믿고 있었구나.’를 이젠 제대로 뒤돌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 말이에요.

애굽의 신이 거짓되다는 말은 이렇게 보시면 수월합니다. 모든 인간들이 공감하는 신, 모든 인간이 거부감 없이 다 고개 끄덕이면서 ‘그거 맞아. 그게 신이지.’라고 다 의견일치를 봤던 신, 우상입니다. 그게 우상이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박국을 통해서 우상에게 시비를 거는데 이렇게 시비를 걸어요. “그 나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말 못하는 돌이 어떻게 말을 하겠느냐?”라고 시비 걸었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신은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말을 거는 신이에요. 인간은 말을 하고 돌멩이, 나무는 듣기만 하는 거예요. 테니스공이나 탁구공을 벽에다 치면 내가 던진 속도와 힘만큼 공이 튕겨져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만약에 교도소에 갇혔다. 독방에 있다. 그런데 탁구가 치고 싶다. 어떻게 칩니까? 혼자 치지요. 혼자 주고받고, 혼자 주고받고 스쿼시라는 운동 있잖아요. 혼자 치고, 그 공을 또 혼자 받는 거예요.

우상은 뭐냐 하면, 내가 말하고 내가 응답하는 게 우상이에요. 오늘날 교회의 신이 우상이에요. 자기가 기도하고 응답도 없어요, 그냥. 뭐 할 말 없으면 기도 안하면 되고, 답답하면 기도하면 되고. 신이 돌 같다, 신이 나무 같다, 그 말은 신이 병신 같다 그 말이에요. 바보 등신 같다 그 말입니다.

그게 모든 인간이 원하는 신이에요. 똑똑해도 인간이 똑똑해야지 신이 똑똑하면 안돼요.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선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독립선언 아시지요? 안중근, 자작나무 밑에서 형제들과 함께 단지(斷指),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흘리면서 일제의 압박에서 독립하는 것, <영웅>이라는 영화 첫 장면에 그게 나와요. 눈밭에서. 단지, 손가락 끊어서 피 줄줄 흘리는 장면, “대한독립만세” 걸어놓고. 오직 독립을 위해서 살겠다는 거예요. 왜 안중근 의사가 독립하려고 하는 겁니까? 일제가 조선 사람을 때리니까 참다못해 분노가 일어나서 독립운동 나서는 겁니다.

성전이 없이 신을 믿어버리면 신은 인간의 자기 내부에 울분, 분노, 울화통, 이것을 벽보고 탁구 치듯이 계속 쏟아놓는 거예요. 세상이요, 굉장히 간단해요. 얼마나 간단한지 제가 공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이 세상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놨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속으로 아니면 아니라고 하고, 그렇다면 그렇다고 하세요.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그를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인간이 독립선언해서 마귀하고 결탁해서 거기서 나왔지요. 세상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놓았는데 인간은 예수님을 위하여 만든 세계에 같이 끼어들어 살려 하니까 이게 울화통이 터지는 거예요.

자기의 원, 소원은 배후에서 악마가 사주하고 있고 자기는 행복 하고 싶은데 세상 자체가 예수님위주에요. 행복 하고 싶은 나 위주가 아니고. 그래서 껄끄러운 거예요.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돼요. 자꾸 누가 나를 패는 것 같아. 그런 것 못 느낍니까? 여러분, 하루하루 삶을 보세요. 누가 여러분을 쥐어 패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못 느끼십니까? 나이 들면 관절도 패요. 허리, 어깨, 무릎……, 다 팹니다. 손가락도 패요. 손가락도 잘 안 움직여요. 자꾸 패요. 하나님께서 때린다니까요.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청춘이라서가 아니라 패서 아름다워요. 청춘이 아픈 것은 누가 때려서 아픈 거예요. 세상만사가! 여러분 TV에 나오는 범죄자들을 보세요. 범죄자들이 왜 범죄 하냐 하면, 아프니까 범죄 하는 거예요.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범죄를 저지르는 거예요. 울분이, 분노가 있어가지고.

그래서 분노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애완견 하나 키우듯이, 집에 열대화초 키우듯이 신을 키워야 돼요. 신을 키워가지고 그냥 신에게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니야! 11번 틀어줘.” 이런 것처럼 인공지능 하나 세워놓고 계속 묻는 것처럼, 신을 키워서 그래서 분노를 쏟아내야 되는데 신을 안 믿어버리면 결국은 만만한 것이 자기의 신체에요. 자살하는 겁니다.

자기 분을 풀 데가 없어서 마지막 만만한 게 자기거든요. 자기를 죽일 정도로 울화통 터지는 거예요. 물론 자기 죽이기 전에 남을 때리지요. 사기치고 때리고, 그게 범죄잖아요. 그것도 성이 안차니까 스스로 자살하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 자살하기 전에 교회 오게 되면 교회 와서 만만한 게 신이니까 신보고 기도하면서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울화통 터뜨리는 거예요. “신은 왜 자꾸 매일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저를 팹니까?”

참~, 옛날 군대 하루도 쉬지 않고 맞았어요. 왜 고참들이 술 먹고 후임을 때리느냐 하면, 그 군대가 고참들에게 자기 인생이 아니거든요. 자기가 원하는 삶의 환경이 아니니까 울화통이 터질게 아닙니까? 그 울화통을 누구한테 풉니까? 전라도 고참은 경상도후임, 경상도 고참은 전라도후임, 내무반의 정권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치는 거지요.

신은 만만합니다. 어느 정도로 만만하냐? 돌로도 내가 만들었고, 나무로도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만만한 거예요. 그리고 그 신은 모든 애굽사람들, 모든 인간들이 공감하는 신이에요. 그래서 그 신만이 모든 인간이 공감한다는 것은 인간집단의 결속력, 공감력, 공동체에서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자기 속에 자기 뜻대로 삶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휴~, 약간이나마, 같은 신을 믿는 것 때문에 약간이나마 호흡이 가능하고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천주교 집안에 시집가서 같이 어울려서 천주교 성당 다니면 약간은 숨을 쉴 수 있어요. 기독교 집안에 시집와서 안 믿던 여자가 같이 교회 가면 시부모로부터 “야, 너 신앙 좋다. 세상에나, 신앙도 없다가 믿는 집안에 시집와서 복 받았다.”라고 인정받는 순간 그 공동체 내에서 휴~, 이렇게 몰래 자기만의 에어포켓, 약간이나마, 잠시나마 호흡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가 있어요.

그런데 시집을 갔더니 그 집이 불도가 심해서 불이 붙을 정도에요. 이쪽은 교회 다니고 있고. 그 집단의 공감대에 참여하지 못할 때, 그 조직의 일원이 되지 못할 때 거기에 시집갔거나 장가든 사람들, 옛날 같으면 특히 시집온 여자들, 자기의 분노를 풀 수 있는 여지가 그 시집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맨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고 그저 냇가에 가서 빨래하면서 죽어라고 방망이로 내려치지요. 빨래 끝나고 보면 구멍 다 났어요.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이, 죽으라고 쳐버리니까. 인간은 하루도 분노 없이 지나가는 법이 없어요. 뭔가 해소해야 되고 풀어야 돼요. 게임을 하든지 스포츠, 밤새 손 흥민이 하는 축구를 보든지 풀어야 돼요.

그러면 왜 이 분노는 일어나는가? 왜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 돌로 신을 만들어놓고 ‘신은 가만있어. 내가 말할 거야.’ 계속 끊임없이 분노의 말을 받아주는 신을 왜 만드는가? 그것은 성전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전은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하나님의 성전은 UFO(identified flying object)인데요.

비행접시인데 그 비행접시의 특징이, 바깥 외계에서 지구로 왔기 때문에 출입구가 위쪽에 있지 않고 아래쪽에 있어요. 외계인, 골룸 닮아서 빼빼마르고 머리만 크고 배만 볼록 튀어나온 외계인이 비행접시에서 내릴 때 뚜껑 열고 내려오지 않아요. 올라갔다 내려오게 되면 능률적이지 않아요. 구멍을 뚫어서 밑바닥에서 바로, 공수부대가 헬리콥터에서 내려오듯이 바로 수직으로 내려오도록 출입구가 되어 있습니다. SF영화에서 그래요. 실제로 외계인이라는 것은 없고요.

그러면 밑구멍이 빠지듯이 거기서 뭐가 오느냐?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까 아담의 후손을 땅으로 쫓아내버리고 생명나무와 함께 있는 분이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추방된 인간을 향하여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심판을 쏟아낸 거예요. 심판을 쏟아냈는데 인간들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그저 매일같이 하루하루 삶이 자기 맘대로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늘 얻어맞는 거예요. 계속 얻어맞는 거예요. 위에서는 때리지, 누가 때리는지는 모르지, 그러니까 신을 하나 자기들이 각자 만드는데 이것은 누구 아이디어도 아니에요, 모든 인간들이 그 집단 그 시대의 집단 공동체가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전통적으로, 대대로 아버지의 우상을 아들이 우상 섬기고요. 라반이 섬기던 드라빔을 딸 라헬이 훔쳐가고요. 창세기에 나오잖아요(창 31:19).

하여튼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아이디어는 전부 다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안 받는 거예요. 심판이 내려오는 것은, 이것은 진짜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와 함께 블레셋 아비멜렉 족장이 있는 곳에 갔을 때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너무 예뻐서 혹시 누가 해칠까 싶어 거짓말 했지요. 누이동생이라고.

아비멜렉이 보고 그 여자가 예쁘니까 자기 아내로 삼겠다고 했는데 그 아비멜렉 족장 집안 전체에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심판유발자에요. 트러블메이커 에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들어있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우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언약이 나중에 아브라함을 지나서 구체화 되는 게 뭐냐 하면, 성전이에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심판 가운데서 건져낸 내 백성 네가 왜 건드려?” 이래서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의 근거가 점점 더 확실해지고 명확해지고 구체화 됩니다. “내 백성 건드리면 너희 다 죽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건드리면 다 죽는다 이 말입니다.

아까 한 것 다시 해 봅시다. 우상의 특징은 뭐냐? 인간 쪽에서 인간 자기가 신을 만들었으니까 인간 쪽에서 말을 해요. 우상은 말도 못해요. 그냥 듣기만하고 인간 쪽에서 말을 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박국 2장 20절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잠잠할찌니라.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은 신이 아니고 너희들 쪽에서, 인간 쪽에서 입을 다물어야 된다. 왜? 너희는 지금 심판받고 있기 때문에.

시편 76편 8절에 보면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땅이 잠잠할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주께서 심판을 베풀 때라는 겁니다. 심판을 베풀 때. 이것은 스가랴에도 나옵니다. 2장 13절에 봐도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성소가 재판하는 곳이에요. 판사가 판결하는 곳, 판결만 하는 게 아니에요. 판결하고 거기에 적절한 조치, 합당한 조치를, 실제적인 저주와 심판을 행사하는 그곳 바로 UFO 비행접시 밑 빠진 것, 거기서 심판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취지를 다시 한 번 간결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주 간결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전 앞에서 잠잠 하라.’ 했으니까, 성전의 가치 앞에서 그것은 무가치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이 세상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가만있지를 못해요. 뭐든지 해야 돼요.

저녁에는 콩나물 요리를 하든지, 아침 되면 운동을 가든지 뭘 해도 좋아요. 주부가 요리를 하고, 남편이 운동을 하고, 안 그러면 직장에서 일을 하고, 스포츠 선수는 운동을 하고, 어떤 것도 좋은데 그게 전부다 잠잠할 대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의미 없다는 겁니다. 무가치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들이, 네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일거리도 아니고 그것은 신경 쓸 경우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뭐 일 같아야지요. 군대 가는 것, 그거 뭐 아무것도 아니지요. 잠잠할찌어다, 하니까요.

보통 권투시합 할 때 코치가 있잖아요. 코치가 신경 써서 보는데 선수가 게임을 잘 풀어나가지를 못하고 상대방에서 얻어맞고 밀리고 하더라는 말이지요. 1회전 끝나는 공 땡 울렸어요. 다급해진 코치가 수건으로 바람 막 불어주면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지금 푸트워크가 안 돼. 발놀림이 좀 빨라야 되고, 상체는 좀 가만있지 말고 흔들어주라고! 오른쪽 왼쪽 흔들어서 펀치를 피하라고. 그리고 가드는 왜 내려? 가드 올려.” 이렇게 해서 땡! 공이 울려서 2회전이 되었어요. 이 선수가 또 맘에 안 드네요. 코치가 링 밖에서 “맞지 마! 맞지 마! 맞지 마!” 그래서 결국 맞다가 KO패 당했습니다.

코치가 와서는 “말 참 되게 안 듣는다. 내가 맞지 말라 했잖아.” 이게 말이 됩니까? 어디 맞고 싶어서 맞았습니까? 어디 안 뛰고 싶어서 안 뜁니까? 가드 내리고 싶어서 내려요? 실력이 모자라는데요. 그러니까 그 선수는 코치가 무슨 말을 해도 그 앞에서 잠잠할 뿐이에요. 왜? 모든 것이, 그 선수는 얻어맞아서 KO당하는 것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이미 성전에서 심판이 개시되었다는 거예요. 심판이 개시된 입장에서 인간들은 뭘 하든 간에 매일같이 얻어맞습니다. 얻어맞으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가만있지 않잖아요. 마귀와 함께 있어서. 내가 뭐 어째서 날 때리느냐고 계속 분노를 터뜨리는데 그것이 사회적 범죄가 되고, 교회 오면 하나님께 기도가 되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 책임지라고 항의하고, 그것도 저것도 안 되면 오 은영 박사 찾아갔다가 결국 이도 저도 다 안 되면 도저히 인생 못살겠다고 자기가 스스로 목숨 끊어버리는 거예요.

왜 가만있는데 때리느냐 이 말이지요. 왜 가만있는데 때리느냐. “왜 가만있는데 심판하십니까?”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들이, 이스라엘에 나타난 여호와 빼놓고 모든 인간들이 신을 똑같이 생각해요. 그것은 뭐냐? 조리돌림, 그러니까 신을 갖고 노는 거예요. 신을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인간이 신보다 더 낫다는 사실, 신이 만든 이 세상에서 내가 그래도 버젓하게 살아야 될 이유가 있다, 라는 그것을 신을 향하여 계속해서 강변하는 거예요. 그걸 주지시키는 거예요. ‘신아, 좀 정신 좀 차려라. 나는 이 땅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야. 나는 아는데 왜 너는 몰라?’라고 신에게 한수 가르치는 것, 교회 와서 인간들이 신에게 하는 일이 그 일이에요.

그래서 교인들이 말씀 들으면요, 기뻐하는 게 아니고 분노를 갖고 있어요.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돌이나 나무를 가지고 깎아서 신을 만드는 이유는 인간자체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내부적인 타인, 타자성이라 하는데 그 타인,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다가 내 안에 있는 타인을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서 밖에 세워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혼자 타인이 되고 혼자 내가 되어서 주고받던 이야기를 교회 와서 신 앞에서 기도라는 이름으로 그 행동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신은 없지요. 왜? 신을 버렸으니까. 신이 없는 이유가, 내가 나로 살겠다고 독립한 이상 신은 없어요. 신이라고 인간 쪽에서 만든 신은 있는데 그것은 내 독립성을 훼손하는 게 아니고, 내 가치와 의미를 훼손하는 게 아니고 내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돋보이게 해주기 위해서 보조역할로 만든 신이에요. 그게 삼위일체든, 예수가 되었든, 하나님이든 그 명칭 같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만의 자존감을 어떤 경우라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나를 때리느냐? 잘못은 당신한테 있다.’ 그러니 신은 모르겠어요, 신은 모르겠고, 모르겠는데 자기 인생은 괴롭고. 그러면 신을 직접 만나야 되지 않습니까? 구약에서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생제물로서 자기를 드러냈어요.

이번 겨울수련회 때 요한복음 합니다. 수련회 광고를 미리 해드리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이 어떤 모습이냐? 모양이 없어요. 요한복음의 하나님이 모양이 있습니까? 없어요. 사람으로 나타났지만 그 사람마저 사라졌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뭔가 하나님이 보여야 멱살을 쥐든지 따지든지 “내 인생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잖아요. 인간이 가장 힘든 게 뭐냐? 죽는다는 공포에요. 멀쩡한 내가 왜 죽어야 돼요? 그래서 나쁜 짓을 했을 때 극약적인 판결이 뭐냐? 사형이잖아요. 그만큼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자기가 죽는 것을 제일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 지은 죄와 가장 무서워하는 것과의 균형 맞추기 위해서 사형을 언도한다 그 말이지요.

사형을 언도한다는 말은, 그 사형, 죽음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내 내부에 이미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니까 살려고 하는 거예요. 뭔가 쫓기고 있으니까. “나를 왜 죽입니까?” 하고 따져야 되는데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사람으로 오셨는데 사람으로 오니까 요한복음에서 인간들은 더 만만한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으로 왔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인간보다 위대해서 뭐 좀 이렇게 말을 걸어도 말을 걸만한 고위층, 귀족 등의 모습이어야 되는데 이건 뭐 자기보다 더 변변치 못한, 시답지 않은, 별 볼일 없는 모습으로 와서 본인이 신이래요. 흥! 칫! 뽕! 이에요. 진짜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23절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언약대로 아버지께서 예수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분노가 폭발해서 나왔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신은 뭐냐? 분노의 아이콘이에요. 분노의 아이콘. 화딱지 나면 신탁 받으러 가는 거예요. “신이여, 무슨 뜻입니까?”

급행 1번 따면 의자 뒤에 광고 있잖아요. 여러분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상하게 시름시름 아플 때 그리고 혼인이 잘 되지 않을 때, 또 취직이 안 된다, 집 이사할 때 좋은날 보기, 그리고 시가에서 고부간에 갈등이 있을 때 아무걱정 하지 말고 다른 종교인도환영합니다.” 이래가지고 전화번호 적어놨어요.

거기 나오는 열 몇 가지 사례가 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우수한 사람이고 나는 이런 취급 이런 대우 받을 필요 없는 괜찮은 사람인데 세상이 나를 힘들게 했다는 거예요. 힘들게 했으니 거기에 어떤 거리가 있을 것이고, 그 거리는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뭐 술 먹고 달래고, 담배 피워도 이게 사라지지 않아요. 그걸 어디에 푸느냐? 만만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향하여 풀라 그 말입니다. “때려라! 너희들 속에 있는 악마적 폭력을 내가 받아줄게. 내가!”

그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길이에요. 어린양의 길입니다. 얻어맞는 신, 진짜 하나님이에요. 얻어맞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은 때려서 보내버렸어요. “꺼져! 가라!” 보내버렸어요. 교회 와서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지를, 여러분이 내가 누군지를 한번 파악을 해야 돼요. 성경말씀 앞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사도바울이.

악마가 뭐냐 하면, 십자가 없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거예요. 흔히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 아무 말 안하고 인간이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는. 원래 상담의 기초는 들어주는데 있어요. ‘너 풀어, 풀어, 풀어. 내가 다 들어줄게.’ 나중에 해답 같은 것 조금 이야기해주고 ‘네 속에 담긴 그 한 맺힌 것 말로 풀지 않으면 네가 미쳐버려. 그러니까 내가 다 들어줄게.’

사랑의 하나님, 그런 것을 교회에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백프로 우상입니다. 요즘 갑자기 백프로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요. 백프로 우상이에요. 완전히 피투성이, 얻어맞아서 피투성이 된 거예요. 맬 깁슨(Mel Gibson)이 나왔던 영화, 고난 받는 그리스도(The Passion of the Christ, 2017), 십자가의 고난의 그리스도, 완전히 눈탱이가 밤탱이 되도록 얻어맞았어요. “평소에 네가 나를 이렇게 괴롭혔잖아.”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얻어맞고 그 다음에는 그냥 가버렸어요. 인간들은 그냥 손 털고 ‘아, 잘 보냈다.’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 그분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거든요. 진짜 하나님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봐요. 함께, 함께 있음의 아이콘으로 온다고요.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게 함께 있다는 거예요. 한쪽은 맞으라고 보냈고, 한쪽은 얻어맞아서 다시 아버지께로 합류되는 그 아이콘, 그의 패밀리, 가족, 그게 하나님 가족이에요. 거기에 이제 성도가 합류합니다.

그러면 그 함께 있는 것이 뭐냐? 성전이라 해요, 성전. 성전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함께 사시는 동네가 성전이에요. 그 성전에 의해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 가지 단계의 징벌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일곱인, 또 하나는 일곱 나팔, 나머지 하나는 일곱 대접. UFO의 성전에서 밑으로 빠지면서, 성전이 열리면서 일곱인, 성전이 열리면서 일곱 나팔, 성전이 열리면서 일곱 대접.

그런데 세상은 그 하늘의 성전은 성도에게만 느껴지고, 안보이고 이 세상에는 자꾸 얻어맞는 것, 기온이 몬태나 주는 영하 50도, 자꾸 얻어맞는 거예요. 코로나 바이러스, 자꾸 얻어맞아요. 어떤 때는 가뭄, 어떤 때는 홍수, 어떤 때는 한파, 어떤 때는 기온이 56도까지 올라가고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데는 그렇게 올라가고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집에서 콩나물 다듬고 있는데 영하 50도? 도대체 이게 살라는 말인지 죽으라는 말인지.

그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옵니다. 성전이 조금씩 열릴 때 마다 일곱 가지의 포트폴리오, 아주 다채로운 일곱 색깔 무지개, 각종 징벌은 다 내려와요. 다 오는데 일곱인, 요한계시록 5장, 6장에 나오는 일곱 인이라 하는 것은 개시용입니다. 드디어 개시한다. 8장부터 나오는 일곱 나팔은 경고용입니다. 미진한, 아직 남아 있는 것이고, 16장부터 나오는 일곱 대접은 완전히 작살내는 마무리, 전부 다 퍼붓는 거예요. 대접이니까 그냥 퍼붓는 겁니다.

나팔은 빰빠밤~! 경고용, 파주상공에 드론 뜬 것, 경고, 그리고 이제 핵폭탄이 서울에 떨어지는 이것은 일곱 대접. 김정은 여동생이 하는 그것은 일곱인, 그래서 개시성과 경고성과 적용성, 이렇게 되는데 일곱인 지나고 다음에 일곱 나팔,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일곱인, 그 일곱 번째인 안에 뭐가 귀속되어 있는가? 일곱 나팔이 들어 있고 일곱 나팔, 나팔 1, 나팔 2, 나팔 3, 마지막에 일곱째 나팔 안을 깨보니 거기에 일곱 대접이 들어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심판이 대접부터 해서 나팔로 귀속되니까 일곱 인으로 해서 최초의 심판하는 이유가 뭐냐를 알려주는 그 방향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심판하면서 이 심판은, 우리가 심판받는 이유는 바로 요한계시록1장 7절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분이 이 세상에 와서 찔렸기 때문에 그렇다. 참 뒤끝 치고는 대단한 뒤끝이지요. “하나님을 너희들이 죽였으니까 더 이상 너희들이 지옥가도 할 말 없지?”

일곱 대접 마지막에 보면 지옥, 유황불이 나와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은 뭐냐? 성도든 성도 아니든 얻어맞는 세월이 인생입니다. 늘 얻어맞아요. 하루도 쉬지 않고 하나님이 팹니다. 패는데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요한계시록12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요한계시록에 인간의 분노가, 악마가 하늘을 향하여 외치는 분노, 그리고 그 분노에 대항해서 그 악마에 퍼붓는 하나님의 재앙, 다채로운 재앙, 그 현장에 포그(fog)가 있습니다. 자욱한 안개가 있어요. 연기, 요한계시록에 연기가 있어요. 우리가 매일같이 뽑아내는 그 분노가 얼마나 많으면 우리 주위에 아우라같이 하나님을 향한 분노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재앙도 맞서서 연기처럼 때려버리고.

그래서 그럴 경우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한테 전화통 붙들고 두 시간씩 하면서 약간은 숨을 쉬어요. 죽어가면서도 이 땅에서 에어포켓, 약간 숨을 쉬는 공간, 그러니까 ‘우리하고 생각이 같지? 같아, 같아. 나 나쁜 것 없잖아. 너도 나쁜 것 없어. 너도, 너도 훌륭하지.’ 이렇게 서로 같은 공감대를 가지면서 격려하면서 힘든 인생을, 행복을 추구하면서 이 불행을 억지로 이겨내자고 서로 격려하는 것으로 그들은 약간은 숨 쉬는 공간을 스스로 마련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이 험한 것을 이겨내는가?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어차피 우리가 아담의 족속이라서 맞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 세상에 심각한 문제, 의미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고, 맨날 뭘 해도 이미 확정된 거예요.

하나님의 성전에서 ‘야곱은 건지고 에서는 버린다.’는 것, 이미 확정된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요한복음 5장에 나왔으니 거기 보시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 말씀 뒤에 이게 있어요. (그러나 고생은 직사하게 해야 돼.) 있는데 지금 고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 달 수입이 2천 5백 가지고 얼마나 살기가 힘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차 네 대 굴리는데 그것 네 대 굴린다고 얼마나, 차도 고장 나고 신경 쓰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집 세 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50채 빌라? 갖지 마세요. 그것은 사기꾼이고.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에 비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어떻게? 바로 진짜 성전, 진짜 하나님은 매 맞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이게 복된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께서 시작한 일, 인간은 터무니없이 독립선언 했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든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하든지 그 나라 의를 추구할 수 있는, 바라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