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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박국 3:3-9 / 쌍둥이 원리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하박국

하박국 3:3-9 / 쌍둥이 원리

정인순 2023. 1. 11. 22:48

음성    동영상

쌍둥이 원리

 

이근호
2023년 1월 11일                      

 

본문 말씀: 하박국 3:3-9

(3: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3:4)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3:5)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

(3:6)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3:7)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3:8)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3:9)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옛날 이스라엘이 밟아왔던 그 역사적 의미있는 장소로 하박국의 예언이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바란’라는 장소는 신명기 33:2에서는, 주께서 친히 나서서 일하실 내용을 압축해 놓은 곳입니다.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불의 심판으로 동반하는 율법과 더불어입니다. 율법에는 저주와 축복의 요소가 쌍둥이처럼 붙어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그 자체를 위하여 생겨난 나라가 이방민족과 전쟁을 벌리기 위해 존재하고 활동했습니다. 그런 의미를 지닌 장소가 오늘 본문에서 ‘구산의 장막’과 ‘미디안의 땅의 휘장’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했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전쟁 의지의 구체적 발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전쟁을 벌리시려고 하는 걸까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요? 아닙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선악지식’에 대한 본질을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선과 악의 지식이 인간 내부에 온전치 못한 모순된 상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선악 지식의 참된 내용은 결코 인간과 악마에게 더는 머물게 하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선악 지식은 하나님 것이니까 하나님께로 온전히 완성하시려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된 방식으로 선악지식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율법, 즉 불의 심판을 동반하는 율법을 보내신 겁니다.

율법은 저주의 효과와 축복의 효과, 둘 다를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복이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가 됩니다. 따라서 율법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저주도 남기고 복도 생산하려고 합니다. 즉 둘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1)이심을 드러내시려는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아들입니다.

즉 선악지식의 모순없는 완전한 모습은 인간의 레벨에서는 성립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는 성사되어야 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예수님, 즉 하나님만이 아들이라면 그 어떤 인간도 온전한 선악모습을 해결할 수가 없기에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아야 하는 ‘저주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둘로 만들어서 그 둘을 놓고 하나는 ‘아들의 어머니’ 하나는 ‘종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있는 ‘아들’ 놓을 어머니는 없고 ‘종의 자식’만 낳는 어머니만 쌍둥이처럼 한 집에 살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는 이 인간 세상이 전부 율법의 저주의 대상이 되는 저주의 종들만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원리가 아브라함의 자식이 이삭에게 그대로 옮겨집니다.

이삭에게는 아내가 둘이 아니라 자식이 둘이 됩니다. 그들은 둘 다 자신들의 저주받을 종의 자식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약속의 장자’만을 가질 수 있다고 여겼고(야곱), 형 에서는 이미 ‘가졌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형 에서는 장자문제에 대해서 모든 것이 종결된 상황이라고 여겼지만 야곱은 미흡함을 갖고서 장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언젠가는 형의 종의 위치에 있는 자신이 형을 종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장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 미흡으로 인한 자기 처지에 무서워한다는 그 자체가 종의 해당되는 모습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이 되는데 미흡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무서움’이 발생됩니다. 즉 무서움의 종이 된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판단과 결정에 세상에 나가서 무참하게 짓밟힐까봐 무서워하는 본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은 자체적으로 그 무서움을 해소하기 위해 온전함을 고대하는데 바로 이 논리가 엉터리입니다. 온전치 못한 것들을 모아놓고 거기서 온전한 것이 수립된다고 헛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렇듯 인간 그 어느 누구도 무서움의 종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의 대상자는 일단 종으로 출발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장자라고 여겼지만 창세기 32장 얍복강가에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에게 얻어맞아 죽습니다. 진짜 아들에게 얻어맞는 것이 복이 되어서 진짜 아버지의 장자가 되고 난 뒤에는, 자신이 장자되려고 시도한 모든 것이 무서움의 종노릇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 원리는 누가복음 15:21에도 나옵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 집나간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유산을 타내어 세상에 나가니 자신의 ‘세상의 종’었음을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아들에게 줄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세상의 종일 뿐임을 아는 자를 제대로 된 아들이 되는 원리를 주시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큰 아들이 ‘아들로서의 자기 잃어버림’이 없으니 복에게 제외는 대상입니다.

로마서 8:15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갇혀 자기 밖으로 나갈 줄을 모릅니다. 아들되기를 원하지만 자신도 자기가 미흡한 줄을 압니다. 그래서 치매 걸린 할머니 모양, 스스로 무서움을 차단하려고 시도한 온갖 세상 쓰레기는 다 끌어모아 그 안에 갇혀 있습니다.

밖에서 택배가 선물로 왔다고 소리가 들립니다. 그 영생의 선물은 직접 문열고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도는 그동안 자신의 것으로 둘러싸인 그 쓰레기 성(城)에서 문을 엽니다. 이때 집 안에 있던 온갖 잡종 쓰레기 비로소 문밖으로 쓰레기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즉 닫힌 자신의 문을 열고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자신 자체가 저주의 종으로 살아왔음을 알 때, 비로소 성도는 주님의 자신의 작업에 자신이 합류되었음을 압니다.

즉 아들의 일에 합류된 자가 참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처럼 성도, 곧 야곱은 저주받은 에서보다 먼저 주님의 십자가로 자아가 심판받은 자를 뜻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을 떠나서 주님의 일에 참여된 것을 영광으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하림

13강-하박국 3장 3-9절(쌍둥이 원리)230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3장 3-9절까지입니다.

하박국 3:3-9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 밑에서 나오도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여기에 사람은 사라지고 주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등장되는 것을 지금 하박국 선지자가 예고하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등장하신 그 지역이, 그 전에 누가 살던 지역이고 누가 겪었던 일들이 벌어졌던 장소에요.

여기 3절에 나오는 데만, 바란 산, 그리고 7절에 나오는 구산의 장막, 미디안 땅의 휘장, 이것은 지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현상적으로 활동했고 역사를 경험했고 만들어갔던 그 이스라엘 삶의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하박국을 보면서 이스라엘 이제 망합니다. 이스라엘 망했으니까 이스라엘이 지나간 모든 일들도 같이 사라지느냐,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설칠 때에 이스라엘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제는 소멸 되고 사라져버리면 이것은 마치 커텐을 젖히니까 그 배후에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해서 벌였던 일, 이제부터 이 마지막 때에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전쟁에 주께서 뛰어들어서 지난 이스라엘의 실패의 자국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성공작으로 하나 둘 다 바꾸어 나가시는 그 일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이 거쳐 갔던 그 장소들,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건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거예요. 자기 사건으로 받아들여서 지난날 이스라엘이 거쳤던 그 방식 그대로 내가 그대로 밟아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현장을 하나님 자신 중심으로 재현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바란, 데만, 구산, 미디안, 여기서 과거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 장소가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가 맞닥뜨려서 전쟁했던 장소에요. 전쟁한 장소입니다, 이 장소가.

특히 신명기 33장 2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원래 이름인 이스라엘이 홍해 건너서 세일 산을 거쳐서 바란 산에 도달했다, 이것이 구약 민수기, 신명기, 출애굽기에 보면 나오거든요. 이건 이스라엘의 옛날 흔적이에요. 그들이 지나온 겁니다.

그런데 지나오니 뭐합니까. 그렇게 지나온 이스라엘이 실패했는데요. 그럼 과연 이스라엘이 실패했는가?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나올 때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에 의해서 그들은 움직였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움직였는데 그때는 이스라엘을 앞장세웠다 이 말이죠. 이제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상태에서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때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그 일을 지금 제대로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시겠다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제대로 끝장내는 전쟁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럼 그 전쟁은 누구를 상대로 하는가? 여기 보면 신명기 33장 2절에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했어요. 일어날 때는 그냥 구경하려고 일어나신 게 아니고 전쟁하시려고 본격적으로 손 좀 보자, 하는 식으로 일어나시는 거예요. 그게 세일 산에서요.

세일이 뭐냐 하면 에돔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에요.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의 나라가 에돔입니다. 야곱의 나라는 이스라엘이 되고요. 그 형 에서의 나라는 에돔이 되는 겁니다. 그 에돔의 거주지가 세일 산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언약대로 하신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처음에 갖추어놓은 언약의 구조가 있어요. 그 언약의 구조로 리브가 안에 쌍둥이를 잉태합니다. 그럼 리브가가 쌍둥이로, 그러니까 큰 애 낳고 한 2년 뒤에 둘째 낳고 이게 아니라, 동반해서 동시에 같이 배에서 해산되도록 쌍둥이성(性)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해서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러면 이 쌍둥이를 하나님께서는 왜 잉태치 못하는 리브가에게 자식이 없는 리브가에게, 리브가는 이삭의 부인입니다, 그 이삭의 부인에게 갑자기 둘씩이나 쌍둥이를 낳게 하는가? 그것은 리브가가 해산하는 원리가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원칙을 그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원칙으로 언약이 구조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잘 들으셔야 돼요. 복잡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설명하기가 곤란하니까 그냥 막 나갑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둘 있어요. 원래는 아내가 하나인데 사라가 아기를 못 낳으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낳기 위해서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라, 남자는 아기를 못 낳잖아요, 남자는 하나인데 아기를 낳는 여자를 동시대에 둘, 쌍둥이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두 여자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어요.

그런데 왜 그럼 두 여자를 허락하느냐? 2를 통해서 진짜배기 순정의 1을 뽑아내기 위해서 먼저 2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 2인데 그 2가 뭐냐 하면, 아들이 문제가 아니고 엄마가 문제에요, 그 중 하나인 하갈은 여종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정식 아내가 아니에요. 여종이에요. 종이에요.

그러면 하갈에게서 나온 아들은 종에서 나온 아들입니다. 종에서 나오니까 아들이 될 수 없고 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 종이 아들인 것처럼 그렇게 보이죠.

하갈에 의해서 종은 아들이 될 수 없는데 아들을 낳게 하고 그 뒤에 쌍둥이처럼 같이 있는 두 여인 가운데 본처인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사라가 낳은 아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이라 해요. 아들.

그러면 원래 순서가 아들이 먼저 나고 종은 아들을 위해서 있어야 되는 이것이 시간적으로 맞는 이야기인데 의도적으로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종의 아들부터 먼저 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모든 인간은 누구 누구의 종이 되었다는 겁니다.

누구 누구의 종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들을 찾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아들이 없어요. 종의 자식들밖에 없습니다. 그 점을 강조하는 거예요.

그럼 종의 자식들밖에 없으면 종의 자식의 특징이 뭐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기를 종의 자식은 율법의 저주를 받을 대상이라는 거죠. 율법은 자체적으로 그 안에 저주가 있는데 대상 없이 저주가 있으면 곤란하겠죠. ‘누구는 저주받는다’라는 저주받을 어떤 대상체가 나타나야 율법이 품고 있는 그 저주 기능이 실효적이죠. 실제적이 되는 거예요.

어떤 미친 사람이 “너 나한테 맞아볼래?” 산에서 고함지르면 지나가다 본 사람이 “당신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야? 여기 아무도 없는데 ‘너 나한테 맞아볼래’라고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야?” 정신병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율법에서 말하기를 “내 말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는다”할 때 우리가 율법 찾아가서 “율법 당신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무도 저주받을 사람 없는데 누구보고 이야기해?” 이렇게 되면 곤란하거든요.

율법은 저주받을 대상이 율법과 짝을 지어서 필히 등장한다는 것을 이미 전제로 해서 율법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 율법의 등장은 저주받는 자와 연결시키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거예요.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자신이 저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식 못했어요. 그러나 율법이 옴으로써 아, 우리는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저주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걸 깨달은 거예요. 인간이 태어난 것은 저주받기 위해서 이 땅에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있는 겁니다.

그래야 창세기 3장에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정녕 죽으리라”가 계속해서 유효한 원칙으로 진리로서 인간 세상 끝날까지 이어져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선악과는 선악의 지식은 하나님만 알아야 되지, 인간은 몰라야 돼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선과 악이 쌍둥이처럼 붙어있다는 것을 인간으로서는 감당 못합니다. 어떻게 한 몸에 선이 있고 악이 있습니까? 선과 악이 어떻게 그게 같이 공존할 수 있어요? 악이면 악이고 선이면 선이죠. 그러니까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감당이 될 문제이지, 인간들은 감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만들려면 일단 그 인간에게 선과 악이라는 모순적인, 함께 있을 수 없는 선과 악의 껍질을 벗겨내야 돼요. 선악 껍질을 벗겨내버려야 돼요. 더 이상 선악이라는 모순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벗겨내는 거예요.

벗겨내려면 순서가 필요합니다. 어떤 순서가 필요하냐 하면 일단은 저주부터 시작해야 돼요. 왜냐하면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죽는 데에는 이유가 있잖아요. 죄지었으니까 죽죠. 벌 받을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서 죽어야 돼요.

그다음에, 그럼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율법에 보면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또. 복을 받는다는 말은 율법에 의해서 복 받을 대상도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하니까 율법은 자체적으로 율법 안에 쌍둥이처럼 저주와 축복이 둘 다 다 들어있단 말이죠. 이것은 인간을, 본인이 나는 내 마음이 하나다, 이러면 해결이 안돼요. 내 마음도 율법에 맞추어서 저주의 요소와 축복의 요소 둘 다가 품어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 태어나야 돼요. 야곱의 후손들이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언약은 하갈 요소와 사라 요소, 쌍둥이 같이 붙어있는 두 여인을 다 필요로 해요.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을 닮았겠죠. 아브라함에게 두 쌍둥이처럼 붙어있는 그 종과 그리고 아들. 이삭은 아들이에요, 이스마엘은 아들이 아니고 종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 하거든요.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 보면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 하갈이죠. 그리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죠. “내어 쫒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자유라 하는 것은 앞에 ‘저주로부터 벗어난 자’가 생략되어 있어요. 저주로부터 벗어난 자를 자유라 해요. 저주로부터 벗어난 자. 이것이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던 언약적 요소라면 그 요소가 그대로 이삭에게 대물림됩니다. 그럼 이삭의 부인이 하나에요, 둘이 아니고 하나란 말이죠. 하나인데 이번에는 자식이 쌍둥이로 나와요. 에서와 그리고 야곱.

그러면 에서와 야곱 둘 다 일단 출발이 육신이기 때문에 둘 다 종에 해당됩니다. 아들은 없어요. 둘 다 종에 해당돼요. 둘 다 종에 해당되기 때문에, 종에 해당되면서 하나님께 같이 저주받을 종인데 하나님은 야곱을 어떻게 다루고 하나님은 에서를 어떻게 다루는가, 추가적인 언약의 원칙에 준해서 그 둘을 어떻게 다루는가? 성경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하나님은 그 쌍둥이를 달리 다루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일단 그 둘은 같을 수가 없어요. 왜?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웠으니까. 질이 달라요.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화합되지 못합니다. 언제나 결별해야 되고 갈라서야 돼요.

무슨 싸움이냐? 아들 싸움이에요. 누가 아버지의 진짜배기 아들이냐로 싸움하는 겁니다. 일단 형 에서는 자기가 이미 아버지의 장자로 확정되었다고 느긋합니다. 자기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장자니까요. 뭐 동생이 팥죽으로 꼬셔도 팥죽만 챙기고 이건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먼저 태어났으니까요.

그런데 야곱은 생각이 달랐어요. 야곱에게는 ‘나는 아들이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형 에서는 ‘나는 아들이다’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형 에서는 내가 육적으로 맏이 된 것으로 그게 아버지의 장자로 축복권을 받는 것으로 종결된 걸로 본 거고, 둘째 아들 야곱은 미흡함을 갖고 있어요. 미흡함을. ‘나는 지금 아버지의 장자가 되지 못한다.’

장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둘째 아들은 장자의 노예처럼 살았었어야 해요. 그래서 야곱은 노리는 게 있었습니다. 저 장자를 언젠가는 내가 뺏고야 말겠다, 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장자에 대해서 계속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고 큰 아들 에서는 ‘뭐 끝났는데. 장자? 이젠 더 이상 문제삼지 마. 내가 장자야. 끝!’ 내가 장자야, 끝났어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거짓말을 하게 만들어서 야곱이 노리는 장자를 야곱이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자, 아들이 가짜였습니다. 야곱 자기가 기껏 생각하는 아들이 그건 하나님이 준비한 아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에게는 뭐가 있느냐? 자기가 종이라는 의식 없이 그냥 아들만 가지면 아들 되겠다는 그 자체가 야곱에게는 근원적으로 근본적으로 그 미흡함이 종의 의식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야곱이 깨닫게 돼요. ‘내가 맏이가 되지 못하고 축복권을 갖고 있지 못하구나.’ 라는 생각이 미흡함이거든요. 그 미흡함 자체가 종이에요. 그 미완료 자체가.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이 그 종결된 최종 완성지점이 에서한테는 나타나지 않고 야곱에게 나타납니다. 야곱은 종의 의식을 가지고, 아들이라 여겼던 그 아들이 실제로는 아들이 아니고 종의 입장에서 기껏 종의 범위를 못 벗어난 가짜 아들인 것을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선 계시합니다.

그럼 진짜 아들은 누구냐?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아들에게 얻어맞습니다. 주님한테 얻어맞죠. 아들에게 얻어맞을 때 비로소 야곱은 아들이, 태어난 나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사실에 비로소 눈을 뜨게 돼요. 나에게는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들이 와서 ‘너는 종에 불과해. 너는 저주받아야 돼.’라고 지적할 때 비로소 그 때림을 당하면서 아들에 눈을 번쩍 뜨게 되는 거예요.

말이 어렵지만 사실은 이 말씀 드리면 쉽습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드리면 쉬워요.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탕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버지여, 아버지 상속 미리 당겨서 저한테 주시면 제가 독립하겠습니다.” 할 때 아버지가 흔쾌히 허락을 해요.

왜 둘째 아들이 아버지 회사를 당겨서 독립하겠다는데 아버지가 왜 허락하느냐 하면, 지금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재산가지고 도시에 나가서 세상에 나가서 허랑방탕하면서 아들이 느낀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내가 세상의 종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의 종이었으니까 끌리는 거예요. 아버지한테 이끌리지 않아요. 자기 본성, 세상이 나를 당길 때 같이 당겨지는 본성을 둘째 아들은 참을 수가 없어요. 마치 마약을 못 끊듯이 세상에 대한 영광을, 출세욕을 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가서 그 돈 다 날렸을 때 그때 아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아들 됨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해요. 나는 종에 불과하지, 아들 됨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누가복음 15장 19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제가 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세상의 종이었더랬습니다, 라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이게 바로 아버지가 기대했던 거예요. 아버지는 일단 아들이 아들이 아니라, 종이라는 그 저주받아야 마땅함을 아는 자가 아버지의 사랑에 긍휼에 덧입혀서 비로소 아들이 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에게 줄 게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 아들 됨이에요, 아들 됨.

아버지가 아들 됨을 주지 아니하면 절대로 아들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 챙길 때 자기가 아들인 줄 착각한 거예요. 첫 아들은 그런 경험이 없어요. 종 되었다가 아들 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첫째 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적으로 배제된 거예요.

가출해서 ‘내가 아들이 아니었구나’를 깨닫는 자, 언약적인 요소가 그대로 이어져가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 됨의 언약이 그 자국을 남기고 함께 움직이고 있는 대상은 바로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 오기를 기다렸죠. 그리고 둘째 아들은 자기 집에 돌아올 때 자기를 위해서 소를 잡고 자기 손가락에 가락지 끼우고 잔치 벌인다는 요소는 자기한테 전혀 없습니다. 왜? 자기는 그런 대우받을 자격이 안됨을 알고 왔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으면 하늘나라 가서 부귀영화 누린다, 이런 것은 진짜 예수 믿는 사람한테는 1도 없어요. 0도 없어요. 제가 천국의 복을 누릴 잽이 못됩니다, 라는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게 되면 그땐 안 죽고 영생 얻고 아, 신난다, 어디 그런 꼼수를 노립니까?

아들은 집에 들어올 때 자기 자신을 통째로 잃어버렸어요. 그럼 그전에 아들은 뭐냐? 미흡함을 느끼고 결핍을 느꼈던 겁니다.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은 내가 되고 싶은 그런 내가 되려는 이상적인 모델이 따로 자꾸 발생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병적이에요. 이건 고질병입니다.

인간들이 뭐 되고자 하는 이상적인 모델, 목표가 있거든요. 그 목표는 어떻게 구성하는가? 결함, 결핍이 있는 내가 끄집어낸 나의 목표에요. 이거 모순 아닙니까? 온전치 못한 내 아이디어와 내 생각에서 나는 이렇게 되겠다는 이 자체가 어떻게 온전한 목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모순이라는 겁니다. 이건 말도 안되는 거예요. 이건 논리적으로 그 자체에 결함이 있는 거예요.

수련회에서 강의할 때도 했지만 ‘진화론은 진리다’ 이게 거짓말이에요. 왜? 진화되었다는 자체가 온전치 못한 것을 전제로 하거든요. 진화가 뭡니까? 온전치 못한데 갈수록 온전해진다는 뜻이거든요.

다윈의 진화론은 그게 아닙니다. 다윈은 그런 발전적인 진화론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세상은 다 다양하게 여러 가지로 변한다고 이야기했지, 좋은 쪽으로 변한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날 진화론은 뭐냐 하면 보다 더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특히 천문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우주는 목적이 뭐냐? 우주를 통째로 알게 된, 진화되고 또 진화된 이러한 오늘날 인간이 출현하는 것을 목표로 우주는 점점 더 온전하게 되어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진화론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말 자체가 얼마나 말이 안됩니까? 어떻게 온전치 못한 것 속에서 온전함이 나옵니까? 안되죠. 온전치 못한 생각을 끌어모으면 그게 온전해집니까? 집에 가서 생각해보세요. 이게 거짓말이거든요.

‘온전치 못한 것 가져와. 온전치 못한 것, 너도 가져와. 어? 모아놓으니까 온전하네.’ 이게 진화론이거든요. 처음에 인간은 구부정하게 걸었다. 구부정하게, 크로마뇽인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구부정하다가 지금은 펴졌으니까 편 게 온전하다는 거예요. 구부정한 것에 비해서 펴졌으니까 이게 진화되었다는 거예요.

옛날 신라의 수도, 경주죠. 경주에서 최고층 건물이 몇 층이었습니까? 기껏해야 8층이에요, 황룡사. 엘리베이터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경주에 보면 삼십 몇층 아파트 있잖아요, 안 가봤지만. 그럼 발전된 거예요? 인간은 발전됐다고 보는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그걸 다 부수는 거예요. 옛날에 온전한 이스라엘, 야곱의 후손들이 에서를 작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주받은 자를 저주받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전쟁을 그대로 주님께서는 밀어붙입니다.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하박국 3장 7절에 보면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구산이 뭐냐 하면 사사기 3장에 보면 메소포타미아 왕의 이름이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거예요. 사사기 3장 8절에 보면 나옵니다.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하나님께서 구원자 옷니엘을 보내어서 이 구산 리사다임을 완전히 쳐버렸어요.

온전한 분과 함께 있는, 여호와 이스라엘이죠, 온전한 이스라엘이 온전하지도 못하면서 결핍을 갖고 있으면서 결핍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 메소포타미아를 그냥 쳐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저주받을 자를 저주받게 하고 그 승리를 이스라엘 몫으로 돌림으로서 ‘이스라엘은 복 받을 만하다’라고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쌍둥이처럼 붙여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선과 악이 어떻게 벗겨지느냐 하면 선은 야곱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완성이 되어버리고 악은 야곱과 쌍둥이했던 에서로 말미암아 완전한 완성이 돼요. 로마서 9장에 보면 창세 전부터 정해놓은 거예요. 창세 전부터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롬 9:11-13). 이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언약이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거기에 펼쳐진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걸 몰랐죠. 로마서 9장에 와서 사도 바울이 그때 최종적으로 계시를 받으니까 쌍둥이로 붙어있는 선과 악의, 진짜 선의 실체와 진짜 악의 실체를 미리 그 요소를 쌍둥이처럼 짝지어서 이스라엘 속에 심어 넣었다 이 말이죠.

그때 이스라엘 속에 심어 넣었잖아요. 지금 오늘날 우리 마음 속에다 심어넣는 거예요. 그게 바로 탕자의 비유였던 겁니다. 둘째 아들이 자기가 아들이 아니면서도 아들이라 우기면서 유산 따내가지고 세상에 나갈 때 자신이 세상의 노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 노예의 특징이 뭐냐?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님, 성도 안에서 우리의 저주받은 요소, 종의 요소가 있다는 말인데 종의 요소가 뭡니까?” 그건 바로 두려움이에요. 무서워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종의 영입니다. 마귀죠.

인간은 왜 무서워하느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지 못할까봐 무서워하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지 못할 때, 내가 되고 싶은 이상 모델에 내가 도달하지 못할까봐 무서워하는 거예요. 이게 아까 말한 결핍을 느끼면서 결핍 자체가 무서움을 유발하는 겁니다.

총각들이 마음에 드는 아가씨보고 프로포즈할 때, 여자들은 몰라요. 남자들은 평생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순간입니다. 막 벌벌 떨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이 사십 되어도 여자한테 프로포즈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솔로>에 나오는데, 그런 프로가 있어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나의 판단과 결정이 당신으로 인하여 짓밟힐 때에 내가 그걸 감당 못할까봐 그게 무서운 거예요.

나는 마음 먹고 정신 바짝 차리고 고백을 했는데 여자 쪽에서 하는 말이 “나는 그냥 남자친구로 생각했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꾸 들이대면 저 부담돼요. 그러면 오늘부로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모든 관계 끊고, 뭐 메시지 보내던 거 전화 걸던 거 다 끊고, 이참에 우리 헤어집시다.” 이럴 때 인간은 무참하게…… 평생에 처음으로 자기는 순수를 다해서 고백했는데, 그 고백을 여자가 차가운 겨울철 아스팔트에다가 하이힐 뾰족한 걸로 지근지근 밟아 문대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남자들은.

여자들은 그걸 몰라요. “당신 나랑 사귈 때 당신이 뭐라 했어요? ‘나는 남자기 때문에 남자는 베짱, 여자는 절개. 나는 뭐 이렇게 결정되면 쿨하게 깨끗하게 정리하는 사람이다’라고 당신 입으로 해놓고 내가 이렇게 당신하고 헤어진다고 하니까 당신은 왜 길길이 뛰고 난리냐? 그동안 나를 속였어?”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 남자가 사랑의 이면에 있는 엄청난 모독감을 느끼는 거예요. 요새 동네 목욕탕 얼마 합니까? 8500원, 8000원 정도 합니까? 너는 나에게 목욕감을 주었어. 65세 이상은 5000원.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너는 뭐 잘났는데? 그때부터 쫀쫀하게 되지도 않는 복수를 합니다. 우리 어제 먹었던 30만원 갚아내라. 그럼 여자는 줄게, 하고는 30원 보내버리고.

차라리 군에 가라 하면 쉬워요. 내 결정 아니니까. 그러나 군 제대하고 난 뒤에 여자 사귀었는데 자기는 벌써 일주일 전부터 잠을 못 잘 정도로 ‘어떻게 하면 되는가? 까이기 전에 먼저 깔까?’ 온갖 생각을 다하고 있죠.

주님께서는 아버지 이삭에게 두 쌍둥이에게 둘 다 장자권을 줘놓고 그걸 빼앗는 식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너는 육이다. 너는 아들이 아니야. 진짜 아들은 따로 있어. 따로 있음을 드러내는 먼저 매 맞은 자가 야곱이고 그래서 구원받은 거예요, 얍복 강가에서.

그럼 에서는 언제 저주받는가? 야곱에게 당하는 게 아닙니다. 장차 야곱을 앞장세웠던 그 이스라엘, 예수님한테, 주의 진짜 아들에게 저주받을 자들은 저주받는 전쟁을 본격적으로 당해가지고 그들은 이 땅에서 불 심판 받는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 6장 2절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6장 2절 보기 전에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8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전차)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요단강을 처리 못하고 자체적으로 홍해를 처리 못했어요. 왜냐? 인간이 무슨 바다의 물을 퍼냅니까? 안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앞장세우되 그 배후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하나님이 직접 그 안에 동행을 했단 말이죠. 동행을 했거든요.

그래서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보고 바다가 갈라진 게 아니에요. 숲속의 짐승들이 여우보고 고개 숙인 게 아닙니다. 여우 뒤에 사자보고 고개 숙였는데 여우는 저보고 고개 숙였다고 생각한 거예요. 소방차 앞에 달리는 티코는 자기보고 차들이 비켜주는 게 아니에요. 저 따라오는 소방차보고 길을 열어주죠.

이스라엘은 그걸 몰랐던 거예요. 왜 내가 안되느냐? 너도 저주받을 종이거든요. 다만 언약이 선악체계를 해결하시는, 아들은 없는데 종을 통해서 아들을 뽑아내고자 하는 그 원칙이 이스라엘 속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서 이스라엘을 뽑아내고 장자 속에서 장자를 뽑는 하나님의 그 원칙이 신약에 와서 드디어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하박국 3장 9절을 보면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하나님께서 화살을 쏜다, 이 땅을 향하여. 말 타시고 화살 쏘고, 그게 옛날에는 전쟁하는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이었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 2절에 보면 그게 나와요.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 때 하실 일을 이스라엘은 구약 때 폼 잡은 거예요. 이스라엘은 폼 잡았다 이 말이죠. 마치 장자는 예수님이 장자인데 야곱은 자기가 장자 되려고 거짓말해서 형의 장자권을 뺏었다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왜 야곱을 구원합니까? 야곱은 종에서 아들 됨의 경과가 있으니까요. 그 경로가 야곱에게는 있고, 에서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에서는 버림받은 겁니다. 누구든지 아들 될 자격 없고 아들 될 권한 없습니다. 하지만 종이었는데 아들 되는 그 경과는 예수님이 오실 때 바로 그것을 알게 되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결핍 때문에 인간은 내가 원하는 내가 안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다? 무조건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두려움을 유발하는 그 악한 영, 자기를 종으로 여기는 그 종의 영인 악마의 종입니다. 악마의 노예입니다. 벌벌 떨죠. 무서워하죠.

그 무서움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안 무서워하려고 온갖 것을 다 끌어모았어요, 자기 집구석에다가, 자기 아파트에다가. 그러니까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정신적으로 우울증 걸린 할머니들, 치매 걸린 할머니들이 동네방네 쓰레기들 다 모아가지고 자기 몸도 누일 공간 없을 정도로 그 쓰레기와 함께 있어요.

그 쓰레기보고 “할머니, 쓰레기입니다.”하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내가 친히, 내가 골라서 모은 귀한 것들이니까 하나라도 버리지 마라.” 이렇게 해요. 구청에서 와서 동네 주민들이 냄새난다고 한다 해도 안돼요. 그래서 구청에서 할 수 없이 할머니 들어내고 트럭 동원해가지고 쓰레기를 다 들어내죠.

그처럼 우리 마음은 닫힌 마음이에요. 무서워서 닫아놓는 거예요, 무서워서. 혹시 누가 내 문을 열면 쓰레기가 와르르 쏟아질까봐 무서워서 감당이 안되니까 그냥 문을 닫아놓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런 묘책을 쓰십니다. 딩동~ 벨이 울려요. 그러면 우리는 벌벌 떨어요. 매일같이 벌벌 떠니까요. 내가 원하는 내가 못될까봐 벌벌 떨어요. “밖에 누구십니까?” 지금 연기하고 있어요. “택배 왔습니다.” “택배 왔으면 밖에 그냥 놔두세요.” “아닙니다. 택배를 직접 전달하랍니다.” 그래서 문을 열었어요. 택배 물건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택배 물건은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닫힌 문을 여는 그 자체가 선물이에요. 그래야 우리 속에 있는 그동안 나를 지킨다고 여겼던 그 쓰레기들이 우르르 쏟아져서 ‘나는 무서워서 쓰레기와 함께 살았구나. 이 쓸데없는 인생, 평생 쓰잘데기 없는 세월을 보냈구나.’

예수님이 문을 여는 거예요.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아들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가 아들이에요.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지금 아버지가 탕자에게 줄 게 있습니다. 그건 뭐냐? 아들의 마음 문을 여는 거예요. 자기가 종에 불과하고 무서워했다는 것, 독립해서 살려고 하다가 그것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종이 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 문을 열어줘야 알아요. 이제는 너의 것으로 살지 마라. 그것은 마귀가 너에게 두려움을 더욱 더 증강시키는 겁니다.

문을 열었다는 것은 “이제는 나는 쓰레기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를 인정하는 거예요. 주께서 그 쓰레기 다 치워주시는데요. 예수님께서 대리 죽으시고 대리 속죄하셔서 구원한다는 말은 우리를 구원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갖고 있던 언약의 속성, 예수님의 창자와 내장이 그냥 그대로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것이 그대로 쏟아져 나올 때, 예수님이 주께서 주에게 하신 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 안에 주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 주께서 자기 자신이 죽음으로써 스스로 주가 되셨다는 그 경로가 우리 안에 우리 쓰레기 대신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예언된, 진짜 진짜 참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조그만 일이 있더라도 눈만 뜨면 무서워하고 심지어 꿈속에서도 무서워하는 이게 우리의 천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빠져나올 대책도 없고 빠져나오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하지만 이제는 무서워하는 노예의 영이 아니라 무서워할 필요 없는 저주가 없는 아들의 음성을 듣고 아들이 될 수 있는 이러한 축복을 받은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