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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박국 2:15-17 / 연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하박국

하박국 2:15-17 / 연결

정인순 2022. 12. 22. 13:00

음성 동영상 Youtube

연결 

 

이근호
2022년 12월 21일                 

 

본문 말씀: 하박국 2:15-17

(2:15)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2:16)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2:17) 대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하여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도 와해됩니다. 무너집니다. 문제는 무너지면서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죄성이 인간의 정신까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에게 있었던 그 틀어진 관계를 죄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은 이유도 모르는채 근원적인 자아수치에 시달리게 됩니다.

인간의 육신에 수치스러운 부분이 있고 옷의 역사란 바로 그곳을 가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가짜 인간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옷으로 자신을 가리기까지 하면서 인간으로 행세하고 싶어합니다.

‘수치를 품은 목숨’, 이 목숨 자체가 인간에게 슬픔과 허무감을 줍니다. 하지만 그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수치스러움과 더불어 기어이 간직하고자 합니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치를 덮기 위해 세상적인 즐거움에 찾습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만들거리가 늘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쟁을 벌리는 것은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요 이 과정에서 적들의 목숨에서 나오는 피를 원하게 됩니다. 즉 자기 내부의 수치를 덮는 방식이 힘을 내놓고 벌라는 게임으로서의 전쟁이며  거기서 나오는 것이 피를 담은 술잔입니다. 자신을 승리자로 여기는 기분에 한껏 취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자기 내부의 수치를 해소하고 싶은 겁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인간들에게 다 퍼져있습니다. 힘과 힘이 부딪치면서 맹목적으로, 이유도 없이 무조건 대결하고 투쟁하는 이유는 자기 내부에서 수치가 분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알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할례언약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할례언약을 허락한 곳은 이스라엘 민족 뿐입니다. 할례 언약이란 기존의 인간들이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손댈 수 없는 치명적인 조건을 하나님께서 근원적으로 주목하고 계시다는 반증입니다. 조상 아담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물러받아야 될 요소는 죄로 인한 수치심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 수치심을 인위적으로 덮기 위해서 세상에서 극도의 정신적 쾌락을 안겨다 줄 것을 기대하면서 모든 말과 행동과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예 근원적으로 인간의 죄를 없애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는 인간들이 허망함과 수치심과 패배자로 살까봐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목숨과 할례 언약을 교체시키는 겁니다. 더는 자기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뭘하려고 하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취지가 여호수아 5장에서 요단강 건너고 난 뒤에 일어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수 5:2-3)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강으로 몰아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요단강 건널 쯤에 의도적으로 요단강 일대에 홍수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 어떤 인간도 ‘약속의 땅’에 들어올 합당한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들은 약속의 땅의 입장에서 볼 때, 죽은 자’라는 겁니다. 목숨을 갖고 있어봤자 소용없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면 그런 목숨을 도리어 화근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일단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요단강을 건너 오게 하십니다. 그래놓고, 어째서 그 죽음의 강을 건너는 조건이 갖추어졌는지를 할례를 통해서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하체로부터 시작해서 창세기 9장에서 노아의 하체는 축복받을 자손과 저주 받을 자손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창 9:23)

그리고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체에 표징을 갖는 새로운 백성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게끔 하십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0-11)

즉 할례란, ‘더는 내 목숨이 내 안에서 없다’가 됩니다. 오늘 하박국 본문은 이 할례언약이 없는 것이 ‘수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더러움이 제거된 표징이 없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시달리면서 그 원인을 할례언약을 통해서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이방민족들입니다.

약속의 땅은 거룩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이란 일체 죄가 없는 자를 말합니다. 죄가 없는 아담의 자손은 없는 형편에서 ‘죄없음’이란 곧 하나님의 언약조치를 당하여 죄가 사라진 자를 말합니다. 죄가 있는 세상은 어떻게 되어도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대의 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죄가 처리된 민족, 이스라엘’을 동반케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할례언약의 취지와 관련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일입니다. 할례 언약이란 이방민족과 비교시켜서 ‘분류하고 하늘과 연결하게 한’ 언약입니다. 마치 아이들 동화에 등장하는 ‘연결’과 관련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즉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게 성공인가 아니면 하늘과 연결이 되어 떠나게 된 것이 성공이냐 하는 겁니다. 오는 세대, 즉 미래의 세대에 속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일찍감치 이 세대에 등장되도록 하신 겁니다. 폭력과 권력들을 동원해서 치열하게 시합을 벌리는 이 세상살이에서 기어이 자신을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자신의 내부 수치를 세상 성공으로 덮어보려는 할례없는 자들의 수치를 선지자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은 자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온 은혜, 하늘의 은혜로 남은 자가 그 한 부류요, 또 다른 부류는 이러한 은혜에 대해서 완강하게 자신 인생을 본인이 이끌고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부류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5-7) 하늘과 연결된 자의 복이 이런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이 땅에서 처참하고 비참하게 산다 할지라도 죄사함받은 자가 진정 자유자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강-하박국 2장 15-17절(연결)2212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2장 15-17절까지입니다.

하박국 2:15-17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대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 하여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오늘 본문 내용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거기 들어 있어요. 어떤 것이 난해하냐 하면, 이방사람들이, 보통 인간들이 행동을 할 때에 항상 옷을 입고 행동하지요. 옷을 입는다는 것, 창세기 3장에 보면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옷까지 만들지는 않았어요. 옷을 만드는 그 대목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가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옷을 만들었다는 말은 자기에게 하자가 발생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에게 애로사항이 발생된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수치가 올라왔고 그 때부터 그걸 덮기 위해서 인간들은 아담부터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옷 지어서 스스로 자기가 지은 옷을 입는 것을 용납하시고 인정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만든 인간 아니면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걸 인간으로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옷을 입고 나도 인간이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도 아닌 게 인간행세를 할 때 뭘 가지고 그 정체를 폭로시키느냐?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하체와 관련해서 비교되는 수치성을 비교되는 하체성, 인간의 생식기가 있는 그 부분에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언약이 새겨진 하체를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새롭게 제시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은 하체를 감추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언약에서 제시한 특수한 민족들의 하체는 그 하체에 새겨진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을 도리어 강조하는 방법으로 대조를 시켰던 겁니다. 그게 할례입니다. 할례가 있는 민족과 할례 없는 민족을 구분지음으로써 한쪽은 할례에 대해서 ‘할례? 그게 뭐야? 우리하고 상관없어’라는 인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를 품고 살아가게 되고요, 할례를 받은 민족은 인간에게 아담으로부터 내려왔던 그 수치가 하나님의 할례언약으로 인하여 깨끗하게 제거되었음을 알려주는 민족,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는 겁니다. 차별화시키는 거지요.

그러면 인간들이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 정상이라 여기고, 그리고 그것이 수치 때문에 옷을 입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결국 인간들의 모든 터져 나오는 행위와 말, 태도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자신의 수치를 어떤 식으로도 덮어 보려는 그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규정을 해주시는 거예요.

인간은 애써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던 그 때 그 시절에서 조금도 인간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 때 그 인간,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부끄러워서 치마를 해 입어서 스스로 자기를 가려야 했던 그 인간성, 가짜, 그 가짜 인간, 철저하게 가짜를 가짜라고 규정할 수 있는 새로운 규정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써 대비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민족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6절에 보면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너는 할례 안했잖아.” 다른 말로 쉽게 말해서 “네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던 너의 더러움은 제거되지 않은 상태야.”라고 고발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겁니다.

이 세상에 할례언약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할례가 전부지요. 유일하지요. 다른 민족들이 믿는 신은 할례하고 상관이 없어요. 이 말은, 이방민족, 이스라엘 빼놓고 다른 민족들이 믿는 그들의 신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정성을 다하면 복주는 신이에요. 옛날 우리 연세 많은 할머니들, 어려울 때 또는 추석이나 정월 초하루, 구정 때는 부엌에서 빌잖아요. 빌 때 그들이 할례를 생각합니까? 전혀 그런 감각 없어요. 그냥 깨끗한 물 떠놓고 내 정성을 받아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옛날 할머니들, 조선시대 할머니들이 내 정성 받아달라고 할 때 그 할머니들이 본인이 자기가 믿는 신, 조물주 앞에 자기는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자꾸 전제를 하느냐 하면, 내가 나를 볼 때 착하디착하게 보잖아요. 착하디착하게 보는 착한 그 자기로부터 신에게 나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할례라는 그런 통로가 없어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말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왜 이렇게 근심이 많고 걱정이 많으냐?” 그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들이 자기들이 각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을 살잖아요. 인생을 살면서 항상 초조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행복 가운데서도 불행해질까봐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왜 생겼느냐를 그들은 전혀 이유도 모르고, 그때그때 급조해서 어려우면 더 쾌락적이고 즐거운 일 찾아서 그냥 덮는데 급급해요. 덮는데 급급한 거예요. 근원적이고 근원적인 원인, 내가 왜 우울증 걸리고, 내가 왜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 서글퍼지고 허무 하냐, 근원적인 그 이유를 전혀 몰라요. 내가 왜 이렇게 불행의식을 갖고 살아가는지?

그것은 자기 속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더러움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할례 받지 않아서 그래요. 조상부터 대대로 물려오는 그 더러움이 그게 그대로 자기 것화(化) 되어 있어요. 자기 것으로 전환되어서 ‘더러운 것도 내 것이다.’ 하는 식으로, 더러운 것도 껴안는 식으로 더러움과 더불어서 평생을 같이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괴로우면 맨날 홀짝홀짝 소주나 먹고, 담배나 피우고, 마약이나 하고, 골프나 치면서 어떤 즐거움에 빠져서 자기 괴로움을 덮으려고 하는데 괴로움이 왜 나오는가? 괴로움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세상 살기, 이방인들이 할례모르는 자들의 세상 살기에 그들에게 있는 즐거움, 그 즐거움의 극치, 극한은 뭐냐? 그것이 바로 힘, 권력게임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본인도 수치스러움이 있으면서도 자기가 수치 있다는 것을 모르고 15절에 보면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남에게 힘의 게임에서 안 밀리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이 폭력성향, 피를 봐야 속이 시원한 이 폭력 성향. 얼마 전에도 제가 그런 설교를 해 드렸어요. 인간이 피를 보고 즐거워하는 이 폭력성향을 순화하고 완화한 것이 스포츠고 월드컵이라는 거예요. 권투고, 씨름이고, 요새 는 또 팔씨름까지 나왔어요. 바둑도 그렇고요.

계속 게임을 해요. 심지어 유치원 애들부터 컴퓨터 게임을 해요. 그 폭력성을 현실화 할 때는 너무 부담이 크기 때문에 순화해서 자기가 패자가 아니고 승자가 되는 그 쾌감, 그 쾌감이 어릴 때는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그게 가장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현실화된 것이 뭐냐? 정치게임입니다. 파워게임이지요.

국내정치 게임하다가 그것을 더 크게 벌리면 해외에 군사력 동원해서 전쟁하는 거예요. 피를 흘리는 것, 이것이 옛날 고대사회는 노골적이었어요. 컴퓨터 게임이 없어서 그랬는가, 더 노골적이라서 왕의 왕 됨을 두고 백성들이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왕이고 그리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당신이 전쟁에 나가봐라. 전쟁에 나가서 승리해봐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영웅으로 치하하고 존경해줄게. 당신이 게임의 위대한 최고, 우리가 원하는 힘의 놀이마당에서 가장 뛰어난 최고의 힘을 가진 장수다. 어벤저스다. 어벤저스로 내가 인정해줄게.’

그러니까 전쟁을 위해서 왕은 늘 궁리하면서 그걸 누구한테 전파하는가? 이웃나라에게 그걸 전파한 거예요. 상대방 포로의 피를 마시고 거기에 취해버리는 겁니다. 자기피를 마시고 취하는 게 아니고 ‘나는 승자고 너는 나에게 루저(loser), 패자가 되었다는데서 오는 그 짜릿함, 술잔에 담듯이 그걸 마시는 그 즐거움으로, 극한으로 치닫는 거예요. 모든 게임은.

제가 옛날 다니던 중학교 고등학교, 사대부중, 부고가 있을 때 운동장을 같이 썼어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보면 운동장은 하나인데 중학생 고등학생 합해서 6년의 연차학생들이 공놀이 한다고 다 나와요. 축구공도 한 두 개가 아니고, 이게 어느 팀 공인지, 농구하고 배구하고 핸드볼 하고, 전부다 거기서 공놀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공놀이 하는 가운데서 할례의 공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할례의공, 그런 이름 들어보지도 못했지요. 방금 제가 처음 이야기한 건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삶을 공놀이로 본 거예요. 수치를 어떻게 해소하느냐? 그냥 계속 게임을 만들어서 그 게임 속에 탐닉하는 거예요. 빠져가는 거예요. 뭐든지, 심지어 미스코리아도 마찬가지고요, 계속 경쟁으로 빠져 들어가서 각자의 그 아름다움의 공놀이하는 것이 미스코리아대회에요. 근육 자랑하는 것은 무슨 미스터대회인가 하는 것도 있고, 그다음에 올림픽게임, 월드컵게임, 그런 것을 자꾸 개발하고 만들어서 자기 내에 있는 수치스러움과 세상 삶의 근심과 걱정을 그 쪽에다 그냥 잊어버리게 하는 거예요.

심지어 기업가가 시도하는 것도, 얼추 한 2백억 벌었으면 좀 벌었잖아요. 그러면 이제 그만 둬야 되는데 2백억은 모자라요. 이건 뭐 남의 기업체를 사냥해서 순양제철, 순양건설, 순양전자, 큰 아들은 전자 맡고, 또 너는 백화점 경영하고, 재벌 자체가 그냥 멈출 줄을 몰라요. 왜? 인간의 수치는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교인 여섯 명이면 교회 되잖아요. 그런데 교인 여섯 명은 안 돼. 여섯 명에서 60명, 60명에서 600명, 600명에서 6000명, 계속 키워야 돼요. 목사고, 장로고, 전도사고, 집사고, 전부 다 그리로 돌진해야 돼요. 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욕망이 꽉 차있기 때문에.

인간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자신이 원인도 모르는 그 수치와 슬픔과 허무를, 새로운 즐거움과 쾌락을 개발해서 거기에 몰입함으로써 그때그때마다 잊어버리는 식으로 하는 것, 그걸 오늘 본문은 “너 술 취했다. 너 정신 나갔어. 술 취했어. 그런데 그렇게 술 취하면서 네가 왜 그런 전쟁게임에 몰입하는지 너 모르겠지? 너 모르지? 알려줄까?” 그 다음에 “새로운 백성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 나와! 그리고 너희들 할례 행해!” 바로 할례행한 그 언약과 할례 없는 자를 극한 대조시킵니다. 비교시키는 거예요. “이제 네가 이유를 알겠나?”

인간이 저질러서 발생된 더러움, 하나님께서는 그 더러움을 천국에 안 받아줍니다. 그 더러움은 계속 대대로 물려줘요.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왜? 대대로 물려받았고 또 자식 낳으면 자식에게 대대로 물려줘요. 중간에 주께서 끊을 필요가 있습니다. 끊어주는 것, 그걸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이라, 할례를 표징이라 했어요.

창세기 17장 9-11절에 그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이 제안해서 만들지 본인의 착함으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요소가, 표징이 들어가고 거룩한 그 표징은 뭐냐? 딱 보고 “어? 네 더러움은 언제 없어졌네?” 없어진 거예요. 할례, 끊음으로써 없어진 거예요. 인간의 조상 아담이 저질렀던 그 더러움이 없어졌으니까 뭐도 없어졌는가? 그 수치가 일어나는 대목도 같이 없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적인 게임에 거기에 같이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권력게임에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언약이고요.

창세기 3장부터 하체 나오거든요. 인간이 범죄하고 나서 하체 나오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하체가 창세기 9장 23절에 나옵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의 하체로 인하여 축복과 저주가 구분돼요.

그리고 창세기 17장에 아브라함의 하체로 인하여 거룩한 민족과 거룩하지 않은 민족으로 더러운 민족으로 구분되어 버립니다. 10, 11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인간은 똑같이 더러워요. 더러운 육신을 아담에게서 물려받았습니다. 더러운 육신을 물려받았지만 뭔가 그 더러운 육신과 더불어서 그 더러움을 제거하는 장치도 같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간세계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 나라, 다른 모든 나라에게 전쟁승자의 기쁨을 전파해서 ‘너도 우리처럼 전쟁의 기쁨을 즐기려면 너도 전쟁에 나서라.’ 전쟁에 나서야, 게임을 해야 뭐 재미가 있을게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의 하체의 더러움에서 거기서 다른 나라의 포로들의 피를 흘려야 군사들의 피로 먹고 마심으로 그 수치를 그때그때 급조하듯이 해소하는 이 서글픈 인생, 아무 대안도 없고, 낙도 없고, 해답도 없는 인생, 그게 바로 이방민족의 서글픈 형편입니다. 모습입니다.

그들은 게임에서 승리했다고 16절에 보면, 그걸 두고 영광이래요. 그러나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하박국은 “그건 영광이 아니야 수치야.”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너 영광스럽지? 수치야. 이겼다고 해서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느냐?” 그게 바로 근원적으로 올라오는 인간들의 수치를 그냥 억지로 덮으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몸에 있는 표징, 할례의 표징에 대해서 그들은 할례는 행했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 뜻을 아는 계기를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면서 알려줍니다. 여호수아 5장 3-9절에 보면, 이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리가 좋아서 안게 아니고 요단강을 건너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여호수아 5장 그 내용이 길지만 짧게 5절부터 보면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라고 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전에 7절에 보면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할례 없는 자는 그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 말을 간편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약속의 땅은 할례 받으면 들어갈 수 있는 땅이에요. 더 나아가면 할례의 의미를 살려주는 땅, 할례 받은 그 취지를 확연하게 드러내 주는 세계, 약속의 땅 천국입니다. 천국은 “너 죄 많았잖아. 그리고 네가 손도 못 대는 죄가 있었잖아. 그런데 너 그 죄 지금 있냐, 없냐?” “없나이다.” “거봐!” 그 있던 죄를 없애주는 분이 너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나 착합니다.”라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에요. 내 운명에 대해서, 내 팔자에 대해서 “제가 어찌할 수 없나이다.”라는 것을 충실하게 느끼고 그걸 인정해주는 자가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교회 와서 봉사 좀 한다고 가는 동네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것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가 있어요. 요단강을 건널 때 이미 요단강에 홍수가 났는데 그 말은 어떤 인간도 홍수 난 그 물을 차고 들어와서 건널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 건널 시점에 급조해서 홍수를 일으켰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중에서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올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너희 현 조건으로서는 없다. 내가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너희들에게 알려주마. 일단 요단강은 건너자.”

약속은 땅은 아니고 요단강 건너고 난 뒤에 약속의 땅에 가잖아요. “일단 요단강은 건너자. 그 다음에 네가 약속의 땅의 조건인 요단강은 건넜지? 건넜으니까, 죽음의 홍수를 통과 못하니까, (통과 못하면 다 죽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조건마저 뚫었던 그 조건이 뭐냐?” 이 말은 “너는 지금 너를 죽이는 조건아래 지배당하고 압사당하고 있다. 너는 그 죽음의 조건을 벗어날 수가 없어.” 그게 요단강의 홍수에요.

그런데 일단 건넜으니 신기하잖아요. 그 신기함을 어디와 연결시키느냐? 바로 할례와 연결시킵니다. 죽어야 되는데 할례 때문에 산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되는데 죄가 없어지니까 산자가 되는 겁니다. 죽었다는 말은, 할례 없는 상태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뭐냐?

게임을 계속하는 거예요. 권력의 게임, 정치의 게임, 모든 파워게임, 컴퓨터 게임, 무조건 자기에게 오는 그 허망함과 이 세상에서 알 수 없는 그 갈증을 느끼는 것을 그때그때마다 누굴 붙잡고 이김으로써 하나의 쾌락을 끌어 모으고 수집하듯이 겨우겨우 하루 버티고 또 하루 버티는 그런 삶입니다.

그런 삶을 일거에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은, 이미 내가 내 힘으로 살고자, 내 힘으로 수치를 없애고자 하는 그 세대로부터 이미 나는 넘어 갔다, 넘어간 세대, 스스로 내 목숨 부지하려고 하는 그 세대에서 넘어간 세대에요. 그러니까 할례하고 우리 목숨하고 하나님께서 바꿔준 거예요. 부품을 바꾼 거예요. 수치가 일어나는 곳을 주께서는 할례로 잘라버린 겁니다.

암세포 자르듯이 잘라버린 거예요.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성립됩니다. “이 땅에 남는 게 성공입니까, 떠나는 게 성공입니까?” 떠나는 게 성공이에요. 떠나는 게 성공입니다. 자, 여기서 떠나는 경우가 성공인 경우를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유념할 것은, ‘연결’ 오는 세대, 미래세대와 연결고리, 미래의 요소가 미리 와서 연결되는 것이 이게 진정한 승자구나, 이게 바로 구원이구나, 알 수가 있지요.

그 한 가지 예가 뭐냐 하면, 바로 <성냥팔이 소녀>입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할머니, 엄마, 아빠하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맨날 술만 먹고 있었어요. 하여간 식구는 네 식구죠. 그런데 소녀가 다섯 살 때 엄마가 죽습니다. 엄마가 죽자 할머니 손에서 크는데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술만 먹고 들어와요.

돈은 누가 버느냐? 나이도 얼마 안 된 애한테 성냥 팔아 오라고 쫒아냅니다. 할머니마저 죽고 난 뒤에는 할머니가 쓰던 나막신까지 없어져서 맨발로 추운 겨울에 성냥 팔러나갑니다. 12월 31일 저녁이었지요. “성냥 사세요! 성냥사세요!” 하고 성냥팔이 합니다.

그런데 화사한 난로가 있고, 까르르 웃으면서 유복해 보이는 가정에서 불빛이 비춰 나오는데 소녀는 추워서 발발 떨면서 그 앞에 서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부터 죽 연말연시잖아요. 칠면조 고기가 보이는데 그게 먹고 싶은 거예요. 칠면조 고기, 맛있는 과자, 케익 이런 게요. 케익, 알지요 케익? 그게 먹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성냥 한 개비를 탁 켰더니만 불이 환하게 켜진 그 속에서 자기가 그렇게 먹고 싶은 케익도 보이고 칠면조 고기도 보였다는 말이지요.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런데 성냥불이 사그라지면서 다 타버렸어요. 이번에는 보니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거예요. 또 성냥 한 개비를 켜니까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여서 그걸 안고 싶었는데 또 불이 꺼지면서 크리스마스트리의 환상도 날아갔어요.

그 때 유성이 떨어지면서 죽었던 할머니가 하는 말이 “유성이 떨어지면 누가 죽는 날이란다.”하는 소식을 들었어요. 세 번째로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남은 성냥에 다 불을 붙였어요. 남은 성냥 다 탈 때까지 할머니를 보면서 기쁜 가운데서 너무 행복했어요.

다음날 아침 눈이 덮인 가운데 소녀 하나가 죽어 있었어요. 그게 덴마크동화 안데르센이 지은 <성냥팔이 소녀>입니다. 사람들은 그 애가 불쌍하고, 가련하고, 측은하고, ‘아이고, 저렇게 서글픈 인생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는 연결되었습니다. 연결, 할머니가 간 세계와 연결되었어요. 연결된 자가 그게 하나님의 언약의 취지였던 겁니다.

인간이 천국에 못가는 것은 죄 때문에 못가는 거예요, 죄. 얼굴이 뭐 어떻고, 월급이 적어서 못가는 게 아니고, 월급 많다고 천당가는 게 아니고 연결이 없어요. 연결이 없으니까 인간은 재벌이 되어서 재벌 집 막내아들 되어서 이 땅에서 호강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기본적인 자기의 승자로 말미암아 수치를 가리려는 근원적인 인간의 죄악 된 악마의 욕망에 지금 휘둘린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대로 술 취한 겁니다. 욕망이라는 술에 취해버린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요. 레바논 지역의 삼림을 다 훼손해서 짐승들이 먹을 것도 없어서 짐승들까지 화나게 만들었다고 했어요. 17절에 보면 짐승들을 두렵게 했다는 거예요. “대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 하여” 싹쓸이를 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피를 흘린 거예요.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 기존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수치로 와해되는……, 그러니 인간세계는 어떻게 되어도 와해돼요 무너져요. 무너지는 것을 기어이 그걸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뭐냐? 요한복음 11장 50절에, 예수님의 피를 바쳐서 로마로부터 안정적인 보호를 받고자 그 당시 정치적 조치를 대제사장 가야바가 취했어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어요. 떠나기 싫어요. 이 말은, 인간의 목숨은요, 아담에서 물려받은 목숨은 갖고 있는 것이 화근이에요, 이 목숨은! 목숨과 뭔가 바꿀게 있어야 되는데 이 목숨 가지고 계속 쥐고 있으면서 공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축구공, 배구공, 월드컵, 그래놓고 맨날 아직도 배고프다고 하고 있어요. 4강 들어가도 배고프다고. 갈증이지요. 우리의 목숨 갖고 있어봐야 이 목숨 가지고 할 게 없어요. 우리 목숨은. 그걸 누가 아시는가? 주님이 아십니다.

또 하나의 예가 뭐냐 하면, 어떤 나무꾼이 있었어요. 맘씨 착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저기서 “사슴 살려요! 사슴 살려요!” 하면서 뛰어 온 거예요. 보니까 사슴 뒤에서 사냥꾼이 막 쫓아온 거예요. 그래서 맘 착한 나무꾼이 나무 해놓은 그곳에 사슴을 숨겨줬어요. 사슴 사냥꾼이 와서는 “이리로 오는 사슴 못 봤습니까?” “저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하듯이 보내버렸어요.

사슴이 나와서는 “아저씨, 너무 고마워요. 아저씨 결혼 안했지요? 제가 좋은 데로 데려다 줄게요.” 그 나무꾼을 데리고 어떤 연못에 갔는데 그 연못은 가끔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하는 곳이었어요. 당연히 날개옷을 벗어놓았겠지요. 세 명의 선녀가 목욕을 하면서 옷 세벌을 나란히 연못가에 놓았어요. 사슴이 알려줍니다. “옷을 감춰 놓으면 선녀는 날지를 못합니다.”

날지 못하면 중력을 이길 수가 없잖아요. 선녀가 하늘로 못가면 결혼을 할 수 있는데 단 조건이 있어요. “애 셋 낳을 때까지는 절대로 옷의 비밀을 말해주면 안됩니다.” 마음씨 착한 게 결국 문제가 되겠지요. 선녀는 목욕하고 났는데 자기 옷이 없어졌네요. 나머지 둘은 중력을 이겨 가면서 하늘로 올라갔고 어쩔 수 없이 남은 선녀가 그 나무꾼과 결혼을 한 거예요.

나무꾼과 애 둘 낳으면서 잘 살았어요. 딸 둘 낳았는데 하루는 선녀가 내 옷 좀 보고 싶다고 한 거예요. 나중에, 나중에 보여준다 했는데도 계속 옷이 보고 싶다고 졸랐어요. 또 마음씨 착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보여줬지요. “한번 입어보면 안 돼?” 했어요. 안 된다 해도 계속 입어보자 하니 “그러면 한번 입어보고 후딱 벗어라.” 했는데 입자마자 갑자기 애 둘 데리고 중력을 이기면서 하늘로 가버렸어요. 애 둘 다 데리고 아내가 가출한 겁니다. 애 둘 데리고!

그래서 낙담을 하면서 그저 나무나 하고 있는데 또 사슴이 와서는 “아저씨, 내 말 좀 듣지.” 그리고 이야기해줍니다. 선녀들이 물 길러 연못에 두레박을 내린다는 거예요. 그 두레박이 내려올 때 그걸 올라타면 된다. 이게 바로 연결입니다, 연결. 중국의 연길 말고 연결.

두레박이 내려와서 ‘이 때다!’ 하고 올라가니까 세상에 하늘나라에 자기 마누라하고 애 둘 다 있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행복하게 살았대요. 박수! 이게 연결이에요, 연결. 하나님께서는 이 세대에, 목숨 부지하는 이 세대에 오는 세계는 나의 목숨이 필요치 않아요. 아무 필요가 없어요. 이미 버릴 목숨이에요.

주께서는 그 버릴 목숨을 미래세계에 뭘 로 바꾸어서 오는 세계의 사람으로 소속케 했느냐 하면, 미리 할례언약이 마중을 나옵니다. 할례언약이 마중을 나와서 여기에 할례 받은 민족,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이 지상에 있는 민족 안에 이스라엘민족을 발생시켰어요. 할례 받은 민족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게 로마서 9장에 나와요. 로마서 9장과 11장에 나오는데 두 종류의 남은 자가 나와요. 로마서 9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남은 자만 구원한다 해놓고 11장에 보면 남은 자가 어떻게 남은 자냐 하면, 5절에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것은 은혜로 택했다. 하늘의 외부적인 요소의 연결로 인하여, 연결이라는 선물로 인하여 선택받았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이 세상 게임은 아무 의미 없다.’ 에요. 아무 의미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남하고 게임할 이유 없다. 게임을 안 해도 된다. 문제 해결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자기 때문에.

그러면 그 은혜 안에 뭐가 들어 있었는가? 할례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바뀌어요. 세례로 바뀌면서 그 세례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으로 스스로 할례를 받은 거예요. 예수님의 육적 할례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세례가 할례의 완성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이에요.

왜냐하면 모든 죄를 깔끔하게 죄 있음에서 이제 죄 없다, 가 되니까. 그것은 바로 두레박이에요, 두레박. 그것은 할머니의 환상이 보이는 마지막 몰빵한 성냥개비에요. 떠나버린 성냥팔이 소녀, 떠나버린 나무꾼, 지상에 남은 자만 쪼다 된 거예요. 바보된 거예요. 지상에 남아서 재벌 된 자만 바보 되고 지상에 남아서 벤츠타고 골프나 치는 인간들이 바보등신들이에요. 권력 게임하는 사람들, 정치게임 하는 사람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요. 결국 나중에 치매 걸리고 요양병원에 가서 없어질 그 목숨, 그 명줄, 그것에 연연해서 그저 아쉬움에 정화수 떠놓고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빕니다.’ 교회 와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줄 때 이게 은혜에요. “너 죽은 자야.” 이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걱정을 왜 네가 사서 하냐? 걱정할 자격이 너한테는 없어. 너는 내거야. 네 목숨 내가 가져간다.” 이 말이 뭐냐? 네 육적인, 혈육적인 목숨을 유지하는 그 대목이 표징이 되는 거예요. 네가 잘려진 거예요. 남성의 생식기가 잘려진 거예요. 단절이에요, 단절, 이 세상과의 단절.

이 말은, 곧 오는 세상, 예수님과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쪽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저쪽이 단절되고, 주님이 단절된 모습으로 왔기 때문에 이쪽에서는 예수님 십자가로 인하여 끊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로마서 11장 7절에 보니까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남은 자는 그냥 버림받았다 해도 되는데 완악해졌다. 뭐냐 하면, “내 목숨,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합니다. 하나님, 나의 순수함, 내 순수함,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너 순수하지 않아. 너 가짜야.” “나 진짜 인간입니다.” “너 가짜라니까!” “진짜 인간답게 살겠습니다.” “고집부리지 마. 완악해.” 완악한 거예요.

완악이라는 말은 애굽의 바로 왕을 모세가 지칭할 때 완악이라 했어요. “우리는 여호와 섬긴다.” 애굽 왕은 “가지 마라.” 하나님께서 그 애굽 왕의 마음을 뭐라고 하느냐? 완악하다는 거예요. 분류시키는 것. 할례는 뭐냐? 분류시켜서 연결점 드러내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 할례가 주님의 성령을 받는 성령세례라고 골로새서 2장에 나와 있지요.

그거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할례를 받았으니, 연결되었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남은 세월동안 인생 가운데서 육신 가지고 할게 뭐냐? 우리는 이 죄사함에 대해서 즐기고 감사하면서 우리가 어디서 빠져나왔는가를,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 할례 없는 사람들, 성령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차이점을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세상 게임을 안 해도 승자가 된 것, 주께 영원히 모든 일에 감사하는 남은 인생 그리고 남은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엄연히 있는데 우리는 주께서 하는 일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느냐만 천착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