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박국 2:9-11 / 말씀과 공유 본문
말씀과 공유
이근호
2022년 12월 7일
본문 말씀: 하박국 2:9-11
(2: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2:10) 네가 여러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2: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일어나는 그 어느 것하나 놓치지 않으십니다. 집담의 돌이나 들보를 통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벨이 가인으로부터 얻어맞고 난 뒤, 땅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원리와 같습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땅은 자연입니다. 인간들은 같은 인간들 끼리 우열을 논하지만 땅이나 하늘이나 별이나 해같은 자연에 대해서 감히 도전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은 자연을 돌파하지 못합니다. 자연을 이겨낼 염두도 내지 않습니다. 자연이 보여주는 변덕스러움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연에게 고개숙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신(神)’입니다. 자연을 달래보자는 식입니다. 인간들은 자연 너머 계신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저 자연의 변화로 나타난 가공할 만한 질서에 대해서 제물을 바쳐 재앙을 완화시키는 데 급급합니다. 인간들을 너무 괴롭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이런 데서 비롯된 겁니다. 신을 위함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들 자신의 안전과 번영과 보존을 위한 방어적 조치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일단 수세에 몰리면 방어태세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자기 보존에 자신감이 붙으면 만만한 같은 인간의 것을 빼앗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공격에 나섭니다.
그것은 주변 세계를 자신 위주로 평정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 나라의 잔혹함도 이런 의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대자연에는 굴복하지만 같은 인간들에게는 잔인함의 극을 보여서 자신의 힘의 위대함을 각인시키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세계만큼은 자신의 나라 뜻대로 질서잡히고 그 최고의 자리에 바벨론 민족을 두겠다는 겁니다.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바가 국가적 단위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국가 자체가 한 개인처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나는 이 땅에서는 신이다’를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 없는 세계의 위력’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현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없는 상태’를 위력적이고 적극적으로 드러내는데 이 땅의 세계를 활용하시는 겁니다.
말씀없이 그냥 말씀없이 조용히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없음의 결과’를 혹독하게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내시는 겁니다. 전쟁이란 곧 인간 세계는 그 어떤 식으로 상호 공유되는 바가 없음을 보이는 현상입니다. ‘더불어 한 마음으로 산다’가 아니라 ‘오직 나만 산다’가 전쟁의 명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 있는 위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정을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나라를 이 지상에 만들었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무례하게도 바벨론 민족은 이 이스라엘을 겁 없이 건드린 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의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신약성경에 최종 마무리 되어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1:22-24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엄격한 공의로움과 자비, 이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이 속성을 말씀에 담아 이스라엘에게 심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가차없이 바벨론 제국의 엄한 군대에 붙여서 혹독하게 심판받게 하신 겁니다. 즉 이것은 이스라엘의 ‘죽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속성 가운데는 자비도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마땅히 찍혀 버림받아야 될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 속성 적용차원에서 원가치가 다시 접붙임을 받는 겁니다. 여기서 원가지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을 그대로 물러받고 완성시킨 그 유일한 ‘가지’되시는 분을 말합니다. 즉 자연 너머 계시는 분이 자연 세계 속으로 진입하시면서 아버지의 속성을 완전히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이요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취지는 곧 ‘저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바’되어 버리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부활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더불어 한 몸이 되셨습니다. 원가지이신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백성이 바로 이 원가지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에 국한 겁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을 가치있는 자가 아닙니다. 율법이 제시한 공의로움과 거룩함에 의하면 도리어 마땅히 찍혀버려져야 될 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바는 이런 원칙 안에서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그대로 담아 그 하나님의 작업 안에 참여되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속성과의 공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공유된 자들은 새롭게 접붙이게 되는 자들과 ‘속성’을 함께 한다는 점에 공유된 지체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할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미치도록 허무함을 느끼게 하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성도 본인을 기쁘게 할만한 것이 없음을 알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도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이 주는 위력’으로 작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를 기쁘게’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찍혀버림을 받는 것에서 접붙임 당함’의 조치를 반복적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느끼게 됩니다. 즉 항상 ‘처음 자리’, 곧 ‘죽음의 자리’로 후딱 돌아가도록 하나님께 조치를 취해주십니다.
‘지독한 허무’에서 ‘하나님 기쁨’으로 전환되는 경우를 반복적으로 겪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 안에는 예수님의 속성, 엄위와 자비가 늘 살아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공유된 환경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예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즐거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8강-하박국 2장 9-11절(말씀과 공유)2212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2장 9-11절까지입니다.
하박국 2:9-11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네가 여러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집이라는 것은 사물이지요, 물체지요. 담도 돌도 물체입니다. 그런데 이 사물, ‘집과 담과 돌이 원한을 품고 있는 듯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다.’ 이런 표현이 하박국에 있다는 이것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그 아벨이 가인에게 맞아죽고 땅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땅위에 사는 인간들은, 땅 자체를 그들은 자연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연에 대해서 그들은 무생물로 여기지요.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고 인간 외에는 없다. 그래서 인간 외에는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인간만의 세계가 일단은 자연에 대해서 신(神)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절대자 노릇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는 그 절대자끼리의 최종다툼과 힘겨루기만 남아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도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바벨론이 자행했던, 그들이 저질렀던 악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그 선지자 하박국이 미리 예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전쟁인데요. 전쟁은 한마디로 말해서 동질적인 그러한 환경이 되지를 못했을 때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전쟁을 왜 하는가? 이질적인 것들이 있을 때 정리정돈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지금은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고등학교 때 학교 힘자랑하려고 오는 애들이 있거든요. 일진회 그런 것. 맨날 걔들은 걸핏하면 전학 온 애들 중에서 힘깨나 쓰는 애들보고 옥상으로 올라오래요.
옥상에 뭐 숨겨놓은 것 있어요? 좋은 것 숨겨놨는지 맨날 옥상으로 오래요. 학교 야외 화장실 뒤쪽으로 오라고 하고. 자꾸 전쟁을 선포하는 거예요. 그들이 전쟁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정리정돈, 질서의 정리정돈을 하겠다는 겁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전쟁을 하는 것도 자기 영토 남쪽을 러시아의 영향력으로 완전히 정돈을 시키려고 하기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전쟁이라 하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을 나의 동질성 속으로 강제 편입시키는 방법이 전쟁입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그들이 말로만 내가,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내가 그리고 내가 속한 나라가 신과 같은 존재임을 맛보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현재 힘을 가진 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힘이 없는 자도 은근히 그걸 노리고 있어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일단은 수비하고요, 그 다음에 수비가 좀 되면 공격하는, 수비하고 그 다음에 공격하는 이런 성향을 모든 인간존재는 다 타고 났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누가 이야기해주지 않더라도 신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자들이에요. 이 인간들이! 그런데 기가 죽는 그런 상황도 인간들에게 있어요. 자칭 신이지만 기가 팍 죽는 것은 뭐냐 하면, 대자연을 보면서 대자연의 모든 질서에 대해서 인간은 야코죽습니다.
어느 인간이 해보고 “해 나와! 한판 붙자.” 이런 인간이 어디 있어요? “너 달 나와! 너 손 좀 봐야 되겠어.” 그러지 않잖아요. 바람에 돌아가는 풍차보고 “야! 너 나와 한판 붙자.” 하는 그것은 돈키호테 소설속의 미치광이나 하는 짓이지요. 정상인 같으면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간들은 자연에 대해서는 일단 고개를 숙이고 제사 드리지요. 그저 가뭄 잘 지나가고 제때 비오고, 비비 틀려서 올라가는 그런 늙은 고목나무 있으면 거기다 또 한상 차려줘서 ‘우리 마을 사람들 무탈하게 잘 지내게 해달라’고 제일 연장자가 흰 한복 두루마리 입고, 그날만큼은 목욕도 하고 이발소에도 가고 해서 제사 드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감당되지 않는 것은 일단 수비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공격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고대 사람들은, 이 세상 질서가 감당이 안 되는데 이 자연, 번개치고 하는 이런 것이 감당이 안 되는데 “번개야! 나와라. 한판 붙자.” 하다가 번개 맞으면 자기만 손해잖아요. 그래서 옛날에 번개의 신, 폭풍의 신, 그걸 바알신이라 하는 겁니다. 농사지어서 유지되는 인간세계에서 번개치고, 가뭄 들고, 폭풍이 일어나고, 자연신의 유난떠는 종잡을 수 없는 그 성깔, 성질 거기서 일단은 달래고 보자는 겁니다.
AD 16세기까지 있었던 마야문명 같은 경우에는 아예 사람을 피라미드 위에서 잡았습니다. 특히 축제일에는, 아, 이런 이야기를 해서 되겠습니까마는, 하여튼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요, 사람들을 피라미드 위에서 잡는데 사람을 너무 많이 잡으면서 그 흐르는 피를 몸에 바르면 자기 병이 낫는다는 그러한 행위들을 특히 축제일에는 했어요. 그래서 사람제물의 숫자가 모자라잖아요. 그것 때문에 전쟁한 거예요. 아즈텍 문화도 그렇고, 전쟁을 해서 포로 잡아서 바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수비도 되고 자기가 자기 것을 절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고 자기절대화에 인간은 양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대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는 기가죽지만 정작 그렇게 해서 대자연 그 배후에 어떤 신이 있다는 겁니다. 신이 있는데 신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요, 다만 신의 액션, 변덕스러움, 그것은 자기들이 경험했기 때문에 인간이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달래는 방법을 사용한 겁니다.
사무엘상 5, 6장 봐도 다곤 신을 섬기던, 여호와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 이질적인 것, 여호와의 궤가 들어오고 난 뒤에 감당이 안 되니까, 대자연을 통해서 재앙이 오니까 대자연의 재앙을 들이닥치게 하는 그 신, 갑작스럽게 자기 마을 다섯 고을에 자연을 통해서 재앙을 일으킨 그 신, 언약궤의 신을 달래기 위해서 나름대로 금 쥐, 금 독종, 금으로 독종이나 쥐를 만들어서 젖 먹는 소에 실어서 벧세메스로 이동시키는 그 방법, 그게 달래는 방법이지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인간들의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뭐냐? 딱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말씀 없음의 위력을, 그들은 처절한 그 위력을 허망함과 함께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말씀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세계를 아주 심난하게 전쟁터로 몰아넣는 지를 인간세계는 혹독하게 체험하고 있어요. 어디서? 하박국에서.
이스라엘도 말씀을 버렸지요. 여호와를 버렸으니까 마찬가지인 거예요. 같이 혹독한 전쟁의 잔혹함에 휘말리는 겁니다. 인정사정없이. 자기가 자기 하나 멀쩡하게 절대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잔인하게 상대방을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땅에 말씀 없음의 위력이라는 거예요.
그 말씀이 없는 상태가 뭐냐? 창세기 3장에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말씀이 없는 세계로 추방되고 말았던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이고 그게 바로 카타르 월드컵 축구장입니다. 죽어라고 싸우잖아요, 죽어라고! 부상당해서도 마스크 쓰고 죽어라고, 공 한 개 놓고 서로 공 빼앗아서 상대방 골문에 집어넣는다고 하잖아요.
이것은 현대인들이 고안한 거예요. 옛날에는 직접적으로 창 들고 활 들고 싸워야 했는데 인간의 그 전쟁본능을 순화하기 위해서, 완화시키기 위해서 스포츠를 만든 거예요. 옛날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된 아테네 경기장에서 스포츠화 시킨 겁니다. 스포츠화라는 것은 뭐냐 하면, 축소된 전쟁터입니다.
그 결과는 뻔해요. 나는 승리자고 너는 루저, 패배자라는 그것만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열화 시키는 거예요. 축구서열, “꿇어! 너는 6대 1, 너는 5대 1짜리밖에 안 돼, 꿇어!” “졌다. 우리는 너에게 게임이 안 된다. 졌다.” 축구의 서열화가 자기 자존감의 서열화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축구를 모르는 사람 같으면요, 촌에 사는, 진짜 축구를 전혀 본적도 없는 강원도 깊은 산골의 할머니나 할아버지 같으면요, 축구장에 가서 젊은이들이 머리 깨지도록 헤딩하고 피나게 싸우는 것 보면요, 문방구에 가서 축구공 몇 개 필요한가, 22개 필요하거든요, 22개 확 운동장에 풀어버립니다. “각자 놀아, 각자!”
문제는 거기서 각자 놀아버리면 승자와 패자가 서열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아무것도 애쓴 보람이 없는 거예요. 질서가 정리정돈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겁니다. 방금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것을 비공유(非共有)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인간과 인간세계에서는 공유될 수 없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세상이 되게 되면 이러한 잔인함이 넘쳐나는 세계로 거기에 하루도 쉬지 않고 직장이든 가정이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질서 서열화와 질서잡기의 투쟁에 놓이게 됩니다.
참 걱정됩니다. 군대 가는 분. 이미 세상에서 너 어느 학교 출신이야,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느그 아부지 한 달 생활비 얼마나 버는데, 이걸로 이 세상은 질서화 되어 있어요. 질서화 되어 있다고요. IQ 얼마인데, 이런 것으로. 그런데 군대 가면 머리 다 깎고 가는 거예요. “너 군에 온지 며칠 됐어? 제대 며칠 남았어?” 이걸로 지금까지의 기준과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가지고 이것은 조폭도 아니고 완전히 서열화 되어버려요.
군대 가는 사람 기 팍 죽이게 생겼네요. 그쪽 서열화 오야붕들, 시간이 만들어준 오야붕들 있잖아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데, 사회에 나가면 아무것도 아닌데 먼저 군대에 왔다는 짬밥이라는 되도 않는 그걸로 서열화 시키는 거예요. 이게 군대지만 군대를 갔다 와서 철이 난다는 것은 바로 세상이 딱 그 식이라는 거예요. 어디에 가도 오야붕들이 있고 꿇어, 하는 그것이 계속 들려오는 겁니다.
개인화를 인정하지 않고 조직화 시키고요, 조직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퇴출시키고요. 공무원도 마찬가지고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모든 조직사회가,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다 인간세상은 투쟁의 현장들이에요. 약육강식,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고 홉스라는 사람이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면 이 비공유화된, 공유될 수 없고 차별화된 것을 인간의 힘으로 강제로 공유하면서 여기서 잔인함과 잔혹함, 폭력, 인간성말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인간들이 거기에 대한 자기의 행함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느냐? 신에게 비는 거지요. 큰 자에게는 그냥 고개 숙이고, 빌고, 뇌물 바치면 되고, 작은 자, 자기보다 약한 자는 밟으면 되고. 이게 우리가 사는 인간세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난주에도 했지만, 그들이 건드리는 민족가운데서 말씀이 주어진 나라를 건드려 버린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말씀이 없는 세계의 현실화라면 말씀이 있는 자를 그들이 자기의 성질을 주체 못해서 건드려 버린 겁니다.
역대하 15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바 되었나니” 말씀에 의하면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세계, 하나님의 생명나무를 떠나버린 인간세계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말씀이 없이 그들에게 비공유적으로 서로 서로 잘난 체하고 피차 물어뜯고 피차 공격하는 그런 시대, 지옥 같은 시대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다니엘 2장 43절에 보면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아요. 하나님 보시기에 소꿉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기죽는 대자연의 변화, 인간은 자연한테 지거든요.
그런데 자연은 누구한테 지느냐? 살아계신 진짜 하나님한테 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자연까지만 오고 그 자연 너머에 있는 진짜 하나님까지는 이르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께서 특수한 나라를 만들었는데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그 나라에 하나님의 말씀,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본심을, 본뜻을 들춰 낸 겁니다.
그 본뜻이 뭐냐? 성경이고, 그 성경에 보니까 이 세상나라 이방나라는 서로 피차 물고 뜯고 난리도 아니라 그 말이지요. 잠언서 16장 5절에 봐도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들을, 생명나무 버리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평생 태어나서 단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하고 ‘누가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그 다음에 ‘나는 누굴 공격해서 빼앗아야 내가 먹고 사느냐?’ 그러한 불안정을 한시도 멈추지 않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 인간들에게 준 징벌, 그 자체가 징벌이 되는 거예요.
많이 가졌다고 전쟁에서 빼주고 그런 것 없습니다.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많이 가졌더라도 그들은 불안불안한 겁니다. 이혼했다고 665억이나 줘야 될 정도로, 그들에게는 푼돈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항상 요란합니다. 뭐 안정된 자리 없습니다. 수비하고 공격하고, 공격하고 좀 쉬었다고 또 공격하고, 공격 좀 했다 싶으면 또 수비에 급급하고.
스가랴 14장 13, 14절에도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싸움이 쉬지 않는 삶, 이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요동치고 있어요. 편히 쉴 곳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말씀이 없는 그런 세상의 혹독함이라면 그러면 말씀이 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말씀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 이것은 구약을 먼저 보기 보다는 신약을 먼저 보는 게 더 이해가 빠릅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11장 22-24절까지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이것은 ‘성경 안’입니다. 성경 안이니까 하나님이 주체로서, 말씀의 주체로서 또는 상황 만드는 주인공으로서 선도적으로 먼저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라고 되어 있어요.
자,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시작될 때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 두 가지 요소가, 하나님 본인이 갖고 있던 속성을 말씀 안에 그대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 속성이 뭐냐? 엄위하심, 잔인하심, 무서움, 아주 혹독한 무서움이고 또 하나는 자비하심이이에요.
혹독한 무서움은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찍어내 버리는 거예요. 찍어버리는 것, “나가!” 하고 버리는 거예요. 제거해버리는 것. 도끼 가지고 나뭇가지를 딱 치면 나뭇가지가 뚝 끊어져서 툭, 하고 본 나무에서 떨어져 분리 되잖아요. 떨어져 나가잖아요. 버림받잖아요. 그 버림받으심, 그 속성, 그 버림받는 일이 말씀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신명기나 여러 가지 율법에 보면 ‘네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않으면 너는 나한테 버림을 받고 찍히리라, 추방되리라, 저주받으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고, 나의 저주가 너희에게 퍼부어질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하심이고 거룩하심이고 무서움이지요. 하나님의 무서움, 엄위하심, 엄격한 그 엄위하심, 그 찍어내실 때 하나님의 뜻은 뭐냐?
너는 왜 나를 기쁘시기 못하느냐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을 기쁘게 하는데 온 신경과 정신을 거기에 다 몰입하고 몰두했어요. 모든 힘과 정욕을 내가 어떻게 기쁘고 행복하게 인생 사느냐,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기쁘게 하느냐에 전력을 다한 겁니다.
문제는 그런 일을 하면서 뭘 놓쳐버렸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 가 날아가 버렸어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생뚱맞은 겁니다. “내 기쁨 챙길 시간도 없는데 뭐 남까지 챙기느냐?”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줬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 기쁨에 도취되어서, 어느 인간도 자기 기쁨에서 이탈해서 하나님 기쁨에 전력할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겁니다.
마땅히 찍어버리고 찍혀 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게 하나님의 엄위하심입니다. 그 엄위하심에 현재 우상을 섬겼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추동시킨, 하나님께서 몰아세우신, 일부러 거기에 덮치라고 주께서 다루었던 그 바벨론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찍혀 나가지요. 그것은 율법대로입니다. 언약대로입니다.
내 말을 어기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혹독한 무서움을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겁니다. 바벨론이 얼마나 무섭게 때리느냐, 그것보다도 이스라엘이 마땅히 그 잔인함을 옴팍 그들이 경험해야 돼요. “저 바벨론이 나빠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이 없는 세계는 힘이 있는 자가 최고에요.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해요. 말씀의 세계에서는 이스라엘이 그런 이방나라한테 된통 당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말씀에 위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찍혔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주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예요.
오늘날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느냐? 지독하게 허망하게 허무를 느끼게 만들어요. 허무해서 미쳐버릴 정도로, 허무해서 미쳐버릴 정도. 이게 성도가 하나님에 의해서 경험하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너무 허무해요. 본인을 포함해서 모든 이 세상일이 다 허무해요.
그래서 어떤 성령 받은 성도님 중에 저에게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목사님, 복음 알고 연속극이 재미가 없어요. 옛날에는 연속극 보는 재미로 살았는데 이제는 재미가 너무 없어요.” 왜 재미없다고 합니까? 허무해요. 아무리 재밌는 것을 봐도 허무해요. 세상에 재밌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걸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이 세상과 함께 우리가 찍혀버린바 되었다는 것을 체험시키는 겁니다. 말씀이 생각나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인간은 한없이 깊은 허무에 빠집니다. 세상도 사라지고 나도 곧 죽을 것이고, 진짜 말씀 쪽으로 관심이 안돌아가면요,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아니하면 인간이 몸부림 맘부림 치고, 골프치고, 온갖 것, 남 재미있다는 것 다 해봤자 자꾸 허무만, 허무만 짙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릴 때 들었던 그 노래 가사, 어릴 때 저에게 굉장히 인상 깊었던 노래가 있어요. 권 혜경씨가 불렀던 노래, 그 사람 이미 죽었습니다만 <산장의 여인> 그 첫 가사부터 사람을 미치게 해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아……, 꼭 경상북도 봉화 같아요. 대구가다 봉화에 딱 내리면요, 조용~해요. 그냥 조용~해요. 아무 소리가 안 들려요. 얼마나 적막한지요. 그러니까 타인이 없으면 인간이 죽은 거예요.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날 때부터 타인이, 내안에 타인이 들어와 있어요. 남이 내 안에 들어와 있거든요.
그래서 내안에 들어온 그 타인과 유사한 자를 친구로 또는 나의 호감 가는 사람을 자꾸 끌어 모으는데, 내 안에 들어 있던 그 타인과 같은 사람이 하나 둘 죽거나 떠나고 사라지게 되면 사람은 사실은 죽은 겁니다. 그걸 우울증이라 해요. 내 속에 있는 타인과 똑같은 타인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우울에 빠집니다.
그러면 말씀의 세계에서는 뭐냐? 하박국이 우울에 빠졌습니까? 하박국은 지금 자기의 존재이유가 있어요. 허무하지 않는 게 자기의 존재이유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그 현장성에 내가 동참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잘 들으셔야 돼요.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원리원칙에 놀아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찍어버리면 찍어버리세요.’ 그거 기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에 무슨 하나님의 속성이 있는가? 하나님의 자비가 있어서 자비의 특징은 뭐냐? 접붙임을 당하는 거예요.
이게 놀라운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접붙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버림받고 난 뒤에 아버지로부터 찍힌바 되었어요, 저주받았어요, 십자가에서. 십자가는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하겠다는 것이 십자가사건이에요. 그런데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접붙임을 받은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하나가 되신 겁니다. 잠시 떨어졌다 하나가 되신 거예요. 그게 접붙임이에요.
그게 레고조각이 한 조각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언약의 이스라엘은 뭐냐? 그 레고조각을 딱딱 끼우는 그 구조 있지요, 형태, 형태에 맞춰서 찍힌바 되었다, 접붙였다, 찍힌바 되었다, 접붙였다, 찍힌바 되었다, 접붙였다……, 그걸 계속 갖다 붙이면 전체적인 하나의 형태, 커다란 하나의 몸과 지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11장에서는 “온 이스라엘”이라고 해요. 자, 온 이스라엘은, 원래 온 이스라엘은 한분밖에 없어요. 야곱은 한분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야곱이에요. 언약의 주인공이라는 뜻이에요. 언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그걸 야곱 때는 야곱모습으로, 이삭 때는 이삭 모습으로,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 모습으로 나타났고, 요셉 때는 요셉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신약에서 최종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약관계자의 자리에 계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님이 갖고 있는 속성은 예수님의 행함으로 등장하는 게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께 버림받았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아서 아버지와 하나 됨을 완성하는 겁니다. 요게 원형적인 레고조각이에요. 그 조각은 말씀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 조각의 기능이 반복해서 이루어질 때 그게 딱딱 붙어가는 거예요. 완전히 레고조각들의 모임, 그걸 가지고 네 자로 레고랜드라 합니다.
레고조각들이 딱딱 지남철에 자석이 붙듯이 하나하나 붙는 거예요. 자석 하나에 다른 자석이 조각자석, 조각자석이 붙는 거예요. 자석이 붙고 또 하나의 자석을 당기면 붙고, 하는 거예요. 붙을 때 그 전체 이스라엘은 뭐냐? 자비하심, 인자하심의 덩어리에요. 인자하심의 덩어리.
인자하심이라는 것은, 우리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찍힌바 되고, 저주받고, 이 땅에서 죽고, 나 살고 너 죽자, 뭐 이런 투쟁의 장에서 평생토록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싸움질밖에 할 수 없는 그런 버려진 전쟁터에서 살 수밖에 없음을 그들은 이미 체험했지요. 이스라엘과 성도들이. 그렇게 체험했는데 그런 상태에서 하나씩 갖다 붙는 거예요.
자, 이 말을 아주 쉽게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죽음 자리로 후딱 다시 되돌아가야 돼요. 처음 자리로. 처음 자리가 뭐냐? 찍힌바 된 자리입니다. 왜 처음 자리로 와야 되는가? ‘찍힌바 되었다’ 와 인자가 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도 이 땅에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아담의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그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지요. 그래서 성도도 살아가면서 방어와 공격을 반복합니다. 방어할 때는 이런 태도에요. ‘날 좀 건드리지 마라. 네가 뭔데 나를 자꾸 힘들게 하느냐?’ 그러면 안 건드려요. 안 건드리면 ‘나 정말 너무 외로워서 못살겠어서 누가 말이라도 걸어줬으면 좋겠다.’ 하는 거예요.
우짜라꼬! 말 걸면 짜증나고, 안 찾으면 외롭고. 꼭 70넘은 노인네들 같아요. 그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내가 나와, 내 속 내 마음의 나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그 기성세대의 명령이, 그 타인의 명령이, 욕구가 같이 섞여 있거든요.
그러면 나는 분열되어 있는 거예요. 타인의 명령을 구성해가지고 거기에 맞췄다고 우기는 나, 그리고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그 이후에 살아가면서 계속 주어지는 그 부모와 그들의 요구사항,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요구, 그걸 무시해서 도망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남들의 요구를 들어줄 때 우리는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때문에 그래요. 인정받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도요, 자연에 속한 것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인간도 자연이거든요. 자연 너머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들을 생각도 안하고, 모르겠고, 들려오지도 않고!
어제 강남강의 끝나고 가는데 어떤 분이 물어요. “목사님은 언제 하나님이 목사님을 덮쳤습니까?” 분명히 제가 강의할 때 했거든요. 원, 투, 쓰리……, 라고. 주님의 시간 안에서는 ‘언제’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성립하지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습니다. “창세전에 했습니다.”
언제 했습니까, 라는 것은 내가 안 죽은 상태가 돼요. 내가 없어진 상태가 되어야 될 텐데 내가 없어지는 게 처음 자리거든요. 처음 자리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찍혀 버린바 되었으면 나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 자리에서는 내가 없어진 거라니까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는데 거기서 찍어버리면 없는 거예요.
찍어버려 놓고 그걸 사랑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접붙임, 원래 없는데 본가지에 없는 다른 가지로 와서 접붙임, 접붙여 줄 때 본가지에 합류하는 거예요. 나의 고유의 것, 나의 것은 거기서 용납이 안 돼요. 나의 고유의 것은 추방돼야 마땅한 본성이지요.
지금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 본성, 내 본성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내 본성은 취급도 안합니다. 주님의 본성, 주님의 본성이 뭐냐? 주님의 본성은 이 땅에서 주님이 체험한 거예요. 내가 버림받았는데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았다. 그 두 가지 본성이에요.
그 두 가지 본성이 완성된 천국 백성의 본성이라면 우리는 그 두 가지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같은 레고 조각 연결시키듯이 같이 연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뭐냐? 나는 이미 죽은 자 일 경우에만 그게 기뻐요.
왜냐? 하나님에게서 찍힌바 되고 접붙인바 되었다는 것, 그것이 나의 생각을 억누르고 주님의 하신 그 기능이 내가 있든 없든 그걸 덮쳐버릴 때,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만 감사할 때 그 때 내 생각 안 나지요. ‘주께서 하셨구나.’ 내 생각 나와 버리면 내 기쁨 챙기기 때문에 안 되지요. 주님이 기뻐하는 것은 ‘아, 주께서 하신 것,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 그게 기쁨이라면 저도 기뻐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가만 있어보자. 이런 기쁨을 내가 천구백 몇 년도에 얻었더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또 내 생각 되거든요. 매일같이 우리는 그것이 본래의 자리, 죽음의 자리로 와버리면 돼요. 우울증이고 그런 것 세상걱정 할 필요 없어요. ‘손 흥민이 다음 월드컵에서 또 뛰나 마나?’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세상걱정 할 필요 없어요.
주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가 기뻐하는 것, ‘나는 축구 좋아하는데 손 흥민이 또 뛰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기뻐하잖아요, 내가. 그래서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삶이 감사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또 마찬가지에요.
자고 일어나면 또 세상 속에서 나만의 기쁨을 또 추구합니다. 방어는 방어대로 하고요. “너 지금 일 안하고 뭐하고 있나? 뭐 듣고 있나?” “아닙니다.” 방어하는 거예요. 방어는 방어대로 하고 또 공격을 것은 공격하고. 방어할 때 우리는 세상의 허무함을 느끼면서 다시 주의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다 헛되게 사라진다는 거예요. “사랑은 가고 추억은 남는 것.” 사랑조차 가고 추억만 남는다.
박인환이 지은 시, <세월이 가면>에 이런 게 있어요.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 인희가 불렀던 노래도 박인환 시에서 나온 거예요.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우리가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전쟁터에 타자의 음성이 들립니다. “군대에 와!” 갑자기 “너 예비군 훈련 들어와!” 나는 지금 나의 고독을 즐기고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을 생각하는데 방위병이 요새는 방위병이라고 하지 않지요, “예비군훈련 들어오세요.” 왜 세상은 나를 가만두지 않느냐, 나는 내 기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데 나를 왜 힘들게 하느냐, 하면 “아저씨, 무슨 나에게 이야기할 것 있어요?” “아니. 없어, 없어.”
사람은, 이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요, 내 인생도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을 죽어야 되지요. 본인이 본인을 죽인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에요. 말씀 안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힘들다, 힘들다, 하는 것은 아직도 본인이 수비 자세를 취하고 전쟁터에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그걸 보고 뭐라고 하는가? “너 지금 소꿉놀이 할래?” 이 세상은 공유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속성과 공유된 사람들, 예수님도 고생했잖아요, 이 땅에서 직사하게 했지요. 우리가 뭔데, 예수님도 고생했는데 이 땅에서 호강하고 내 기쁨으로 살려고 합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생하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이 뭔지가 우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 내 기쁨이 아니고. 왜?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자연세계 바라보고 세상 바라보면서 그걸로 인생 정리정돈하려 하지 말고, 자연세계를 넘어서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 그 찾아오신 분과 공유된 삶, 그 공유된 삶한테는 그저 하나님의 피조물은 창조주를 기쁘시게 하는 그걸로 그 기쁨, 아버지의 기쁨, 예수님이 기쁨이 곧 내 기쁨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어떻게 가능하냐? 내가 찍힌바 되었다는 그 자인 것을 기쁘게, 가장 기쁘게 그걸 받아들이세요. 찍힌바 되어 버림받고 저주받는 것이,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 하나 못 지킨 입장에서 그것은 마땅한 겁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주님의 자비에 속한 온 백성속의 한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내 중심으로 공유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하신 일, 말씀의 활동성 속에 주님과 함께 공유되는 바가 있음을 하나님도 기쁘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기쁨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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