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가 4:6-8 / 바뀐인생 본문
바뀐인생
이근호
2022년 4월 13일
본문 말씀: 미가 4:6-8
(4: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한 자를 모아
(4:7)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4:8)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시작과 끝을 맞추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이 일을 저지할 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도 나름대로 일을 꾸미고 그 일이 만족스럽게 마무리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일과 인간들이 시도하는 일이 충돌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혹한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몸은 망가지고 살던 땅에서는 쫓겨납니다. 그리고 갖은 고초를 남의 나라에서 겪습니다. 문제가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과연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서 ‘자애로운 사랑’을 찾을 수가 있을까요? 로마서 9:27에서 분명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는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라 다리를 절게 됩니다.(창 32:11) 이는 야곱의 사적인 기대나 목적은 하나님에 의해서 거절될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근원적으로 바뀌어져야 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은 백성’은 그 전에 필히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기대나 희망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의 시작과 끝을 맞추어 나가시는 일에 저해되는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는 자’라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합당한 조치라는 겁니다. 말라기 1:8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것, 병든 제물은 하나님께서 더럽다고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즉 제물의 입장에서 얼마나 양이 많고 비싼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나 아니면 못받을 만한 제물인가가 중요한 겁니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인간이 있는 반면에 받지 못할 인간이 있는 겁니다.
저는 자, 병든자, 환란받는 자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서 못받은 존재임을 알려주시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요소가 가미됩니다. 그것은 바로 ‘남은 자’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방나라의 노예로 팔려나가야 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목숨’이라는게 있습니다. ‘숨’이지요. ‘호흡’이지요. 이 목숨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목숨을 부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악마가 시키는대로 욕심들을 덕지덕지 붙이게 됩니다. 마치 생선 뼈에 살점들이 붙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2:2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즉 인간들은 호흡하는 바로 그 점을 최후의 보루로 여기고 그것은 지켜내기 위해 인생 동안 매진하합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든지 약해진다든지 신체를 다치게 되면 졸지에 사는 것이 서글프지는 겁니다.
한심스럽게 자아를 보게 됩니다. “인간아, 왜 사냐?”는 식이지요. 목숨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에 악착같이 지켜내어야 하겠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인생살이가 구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존재함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사적인 정의감이 가동됩니다. 즉 “나는 잘못이 없는데 모든 것은 남탓이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에 복수심이 작렬합니다. 즉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에 갇혀 있으면서 그 안에 삶을 도모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 수시로 실패로 끝납니다. 이 실패에 분노하고 격분하면서 그 책임을 무를 외부인을 겨냥하게 됩니다. 내가 성공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정의로움으로 여기면서 사적 복수심을 멈출 수가 없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받지 않는 겁니까? 왜 남은자로 바뀌어서 받으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인간의 목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판이 목숨에서 생명으로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목숨생활하지만 우리 주님은 생명생활하십니다. 목숨과 생명은 다릅니다. 도대체 생명은 무엇입니까?
시편 113:5-9에 보면 생명이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생명이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목숨을 말합니다. 이 목숨에는 악마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과 끝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이 생명이 하시는 일은 다음과 같이 소개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문제는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생활보다 목숨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멀쩡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목숨의 가치를 지키려고 합니다. 이는 엘리야 선지자도 오해한 바입니다. 사람들이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 오자 엘리야는 도망치면서 자신만 ‘남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말을 수정하십니다.
‘은혜로 남은 자가 7000명이나 있다’는 겁니다.(롬 11:4) 스스로 자기 목숨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그런 자에게 생명을 증거하는 자로 바뀐다는 것은 곧 말씀으로 채워지는 인생으로 바꿨다는 말입니다. 어떤 말씀일까요? 로마서 10:2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생명은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걸치는 겁니다. 빛이 아니라 빛을 담은 등경이 되는 겁니다.(마 5:15)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진정 여분의 남은자의 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아주신 자만 받아주심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강-미가 4장 6-8절(바뀐 인생)2204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4장 6-8절까지입니다.
미가 4:6-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이 일을, 방금 읽은 이 일을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꾸준하게 하나님께서 차질없이 빈틈없이 추진하고 지금도 그렇게 진행이 잘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한마디로 말해서 ‘알파요 오메가’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알파(Α)’라 하는 것은 시작이고 ‘오메가(Ω)’라 하는 것은 끝입니다.
주님께서는 시작과 끝을 이렇게 맞춰서 일하십니다. 딱 맞춰서 일해요.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끝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시작과 끝, 그 가운데서 뭘 시작했으며 뭘 끝냈는가? 그것이 오늘 본문 6절에서 8절까지 집약되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떤 자로 만드는가? 6, 7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은 이제 바닥이 났다는 그런 뜻입니다. 누가 봐도 저 사람한테는 뭔가 빠져 있다, 자력으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뚜렷하게 누가 봐도 그게 드러납니다.
그 저는 자한테 물어보지요. “누가 당신 인생을 망치게 했습니까?” 그러면 남은자가 된 사람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왜 야박하게 당신 인생을 완전히 조져놓고 망쳤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알파와 오메가로 가는 그 노선이 나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답변하는 거예요.
시작하신 분이 마지막 마무리하는 그 노선이 나를 통과해버린 거예요. 마치 꼬치 요리처럼, 닭고기, 채소, 오이, 이런 것들의 그 중앙을 관통시키잖아요. 소고기, 소시지 관통하듯이 주님께서 날카로운 쇠꼬챙이 가지고 알파와 오메가의 그 노선이 나를 뚫고 지나가는 겁니다.
그 알파와 오메가 그 노선이 바로 생명 노선이고 생명 노선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생명 노선이 없다면 무슨 노선이 있는가? 목숨노선이 있어요. 목숨하고 생명하고 다릅니다. 인간은, 자기가 목숨이 붙어 있다 하는데 이걸 흔히 보통 이야기할 때 숨이 붙어 있다, 목숨이니까 숨이 붙어 있는 상태, 숨이 붙어 있으니까 인간들은 이 숨 붙어 있는 이 몸 거기다가, 숨에다가 자아를, 자기가 기대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덕지덕지 붙여버려요.
붙여서 이걸 뭐로 만드느냐 하면, 나, self지요, 자아, 나로 이렇게 만들었어요. 주님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라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하나님이 주신 목숨에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다 발라내 버립니다.
갈치조림 아시지요. 갈치조림 할 때 생선 뼈까지 먹지는 않습니다. 살점을 발라서 먹습니다. 그러면 뭐만 남느냐 하면, 앙상한 뼈만 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노선이 오게 되면, 생명의 노선, 쇠꼬챙이가 통과하게 되면 그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 자아라는 그러한 환상은 다 발라져 버리고 무엇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느냐 하면, ‘내가 왜 숨이 붙어 있지?’ 숨이라는 것이 내가 붙어 있게 한 게 아니고 이것은 그저 신기함, ‘내가 왜 숨이 붙어 있지? 어디서 왔지? 이 숨 쉬는 게 어디서 왔지?’ 그걸 객관적으로 직면, 똑바로 바라보는 경우를 당하게 하십니다.
그게 어떤 경우냐 하면, 저는 경우, 아픈 경우, 여기 나오지요, 환난 받는 경우, 쫓겨난 경우, 그런 경우입니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일단 서럽습니다. 몸이 아프면 서럽고요, 그리고 자기 인생을 보면 서글프고 한심스러워요. 자기 몸이 아프면 ‘아유, 인간아! 왜 사냐.’ 아프면 그냥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아프게 되면 그 산다는 것이 구질구질하고 다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정말 악착같이 살아야지, 하는 것보다도 그냥 살기가 싫은 거예요. 그냥 살기가 싫은 거예요. ‘집구석 꼬라지 하고는!’ 모든 게 자기 몸이 아프면 만사가 더 살고 싶지 않아요. 살기가 싫은 겁니다. 그런데 살기가 싫더라도 하나님께서 목숨이라는 것, 숨이라는 것을 붙여 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이게 안 맞으니까 더욱더 서글프고 힘들고 괴로운 겁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인생이 어디에 달려 있느냐 하면, 호흡에 달려 있다는 거예요. 호흡이라는, 숨이라는 그 뼉다구에 거창한 인생, 자기의 모든 인생을 그 뼈에다 자기 중량을 다 실어놓은 거예요.
다 실어놓으니까 어떤 때는 자기가 잘됐다고 좋아할 때가 있고 조금 실패하면 낙담해서 난 못 살겠다, 하는 경우도 있지요. 하나님께서 뼈, 숨이라는 것을 집어넣고 거기에 덕지덕지 악마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환상과 욕심과 탐욕으로 덕지덕지 갖다 붙여 놓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어요.
그렇게 나타난 현상이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한도에 갇히게 만듭니다. 자기 한도 또는 자기 한계에 갇히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좀 어려운데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살면서 내가 이것까지는 알고 있다, 하고 스스로 자기 한도를 딱 정해요. 내가 이것까지는 안다, 이것까지는 알고 또는 이것까지는 가졌다, 여기까지 알고 있다, 이만큼 알고 있다, 더 모르는 것은 없고 이게 전부다, 라고 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의 삶을 도모하게 됩니다.
도모하게 되는데, 이게 내가 아는 것의 전부라 했는데, 거기서 안정적 삶을 도모하는데 여기에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고 사건이 벌어져 버리면 거기서 인간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인생 실패다, 이렇게 결론짓는 겁니다. ‘내 인생 실패다.’ 이렇게 하게 되면 목숨은 붙어 있고, 숨은 붙어 있고 그 뼈는 있는데 자기 인생은 실패가 된 거예요.
여기서 인간의 뼈에 붙어 있는, 목숨에 붙어 있는 악마적인 품성, 탐욕이지요, 욕심, 욕심이 뭘 시도하느냐 하면, 복수를 시도합니다. 이 복수(復讐), 내가 인생 실패한 것을 성공으로 만회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그걸 저는 복수라고 표현하는데 세상에서는 이걸 복수로 표현하지 않고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이걸 정의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정의로움.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정의로움을 찾아요. 내가 내 원대로 잘 살 수 있으면 이것은 정의가 실현된 거고요, 내 뜻대로 안 되면 이것은 정의가, 의로움이 실패로 끝나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기어이 버티고 살아서 나로 하여금 내 정의가 실패로 끝난 것에 대해서 복수심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길게 할 것 없이 간단히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 평생 어떻게 사는가? 복수하는 심보로 살아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모든 탓은 남 탓이고요, 잘된 것은 다 내 탓이고. 모든 것은 남 탓이에요. 그 복수를 제때제때 하지 아니하면, 그 복수를 풀지 아니하면 사람은 속이, 속이 상해서 살 수가 없어요.
그 속이 상한 것을 풀어내는 것이 뭐냐 하면, 프로야구, 손흥민,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그런 거예요. 야구에서 보통 주자가 달리다가 공이 먼저 오게 되면 그걸 ‘아웃’이라 하잖아요. 아웃이라 하는데 영어로 ‘out’ 데 이걸 우리말로 하면 ‘죽이라’입니다. “죽여버려!”
그렇게 해서라도 내 인생이 성공하지 못 한데서 온 그 괴로움, 그 서글픔을 좀 달래고 싶은 겁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어떤 영화도 있지만 인간은 제때제때 복수하지 않으면 사는 것을 스스로 불행이라 여기고 패배라고, 실패했다고 여기는 겁니다. 복수가 제때제때 안되면.
그래서 내 복수를 내가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이게 좋은 방법이 아니고 나쁜 방법이지요, 그 방법 중 하나가 도박하는 거예요. 강원랜드 가서 도박하는 겁니다. 내 선택과 내 결정이 이게 나에게 성공적으로 주어질 때 거기서 시원한 복수의 감을 느낍니다. 거기서 도박해서 돈 따는 것.
그런데 강원랜드까지 가기가 너무 멀다든지 또 도박할 돈이 없다든지 할 때는 어디로 가느냐? 교회 금요철야기도회에 가면 돼요. 그것도 일종의 복수심이에요. 거기서 쭈여~, 찾으면서 복수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뭐하십니까. 이 나의 원통함과 원함을 어찌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시편 막 거론하면서 복수에 나서는 겁니다.
왜 복수하느냐? 어줍잖게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신의 흉내를 내요. 자, 하나님은 뭐냐? 알파요 오메가, 본인이 시작한 것을 차질없이 본인의 목적대로 이루어질 때 가장 하나님이, 신이 신답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사적으로 자기가 시작한 일이 자기 뜻대로 깔끔하게 마감될 때 내가 신처럼 살았다는 흐뭇함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이거 뭐 망가진 거지요. 저는 이것을 가지고, 목숨에 붙어 있는 탐욕, 이것을 저는 ‘목숨 생활’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목숨 생활. 목숨에 죽고, 숨에 주고 숨에 사는 생활, 자기 목숨 지키고 혹 못 지키면 보복과 복수에 열을 내는 그러한 긴 한평생.
그런 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한평생 동안 뭐 달라진 것 없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달라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구원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한평생 하나님께서 인생을 허락한 것은 도중에 바뀌라는 이야기에요 뭔가 바뀌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어디에서 어디로 바뀌어지는가? 사적인 나의 알파와 오메가에서 주님의 공적인 알파 오메가 노선으로 바뀌는 것, 이것은 목숨 생활이 아니고 목숨 생활에서 시작했다가 무슨 생활하느냐? 생명 생활하는 거예요. 생명 생활.
목숨과 생명이 다릅니다. 목숨은 끝날 거예요. 소모용, 소모품입니다. 소모품에다가 덕지덕지 내 욕심과 탐욕을 붙여가지고 그게 뜻대로 안 되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화를 내고 있어요. 자기한테 화를 내는 것은 또 타인에게 화를 내지요. 죄가 딴 것 있겠습니까?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 그게 죄지요, 뭐겠어요? “네 인생이 뭔데?” “내 인생 내 인생이지.” “아니야. 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뼈, 숨 쉬는 것에다가 악마의 심보 그게 덕지덕지 붙은 게 인생”이에요 그게 인생입니다.
문제는 왜 바뀌어져야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받지 않습니다. 왜 바뀌어져야 되는가? 말라기에 보면 1장 8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받아주겠느냐 그 말이지요. 여기 저는 것, 병든 것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받지 않는 이유가, 인간이 생명 생활할 줄 모르고 목숨 생활 하는 거예요. 더럽고 추접스러워서 저는 것 병든 것에 해당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호흡에다가 악마적인 품성과 자질과 탐욕과 악마적인 의도, 목적, 기대, 희망, 이런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으니까 주께서 안 받아요. 받지를 않습니다.
내 인생이 얼마나 평탄하냐, 편하냐, 행복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받으시는 인생이냐, 안 인생이냐, 그것이 중요하지요. 혼자서 ‘나는 무탈하게 평생을 조용하게 살았다.’ 이것은 하나님하고 무슨 관계 있습니까? 하나님 안 받습니다. 더러워서 안 받아요. 호흡이 있는 것은요, 안 받습니다.
목숨 붙어 있는 자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게 뭐냐?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은근히 기대해요. 거듭난다는 성경 말씀이 있으니까 ‘내가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목숨 다시 태어나봐야 그 목숨 안 받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다시 태어난 기쁨이 아니고 부활의 기쁨이에요.
부활이라는 것은 목숨이 다시 연장되는 걸 부활이라 하지 않습니다. 목숨 없어지고 생명으로 바뀐 게 그게 부활의 기쁨이에요.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우리 인생이 바뀌어져야 돼요. 주께서 바뀌어지는 자만 받습니다. 안 바뀌면 안 받습니다. 네가 얼마나 부자인가, 잘 사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직업이 안정되냐를 묻는 게 아니라 네가 어디서 어디로 바뀌어졌는가, 그걸 물어요.
내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를 주께서 안 받습니다. 더러워서 안 받아요. 왜냐하면 이미 주님의 알파요 오메가가 따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적으로 내가 의도한 것을 목적으로 이루는 것은, 그것은 세상 교육 학교에서나 그런 것을 가르치지 하나님께서는 그걸 더럽다고 받지를 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치고 어떤 인간이든 나름대로 이미 마귀로부터 호흡은 있지, 숨은 쉬지, 이 숨은 내가 만든 것 아니거든요. 그런데 숨 쉬는 그 위에다가 마귀의 생각, 자아라는 self, 또는 ego, 이런 자아라는 생각이 하나님이 주신 숨에 그게 붙어 있으니 이거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받지요.
그래서 여기 창세기 32장 31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야곱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생명을 얻었다고 하지만 사실 몸은 절어요. 몸은 이미 망쳤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차 사고 나서, 교통사고 나서 몸이 절었으면 ‘아이고, 내 인생 조졌다. 내 인생 이렇게 사니 뭐하나.’ 이렇게 하겠는데 야곱은 자기 몸이 망치고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라는 것에 눈이 떠서 자기 몸 절고 아프고 이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이제 자기를 위한 자기라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용납을 안 하는 그러한 제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야곱은 하나님과 충돌했어요. 운석이라는 게 지구에 있는데 운석이 지구에 만약에 충돌했다면 그것은 지구 속에 운석의 요소가 파고 들어온 거지요.
그러면 인간 속에 주님이 찾아와서 박살내 버리면 그동안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그 목숨, 그 목숨보다 생명이 더 소중한 게 돼요. 생명이 더 소중해요. 이게 바뀐 거예요. 내 목숨보다 소중한 부활의 생명이 내 목숨 있는 곳까지 파고 들어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내 목숨 때 예상도 못한 남은 겁니다. 여분의 것이에요. 이것은 새로운 겁니다. 생각도 못한 거예요.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예를 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로마서 11장 3, 4절에 보면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여기 남았다, ‘남은 자’가 나오잖아요.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 여기 또 ‘남은 자’가 나오지요.
그러니까 엘리야가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정치집단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자, 죽는다는 말이 뭐냐 하면, 그쪽에서 내 목숨을 빼앗아가는 거예요. 생명을 뺏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 다시 하겠습니다. 미가 4장 6절에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절룩절룩 절게 만들고, 쫓겨나게 만들고, 환난받게 하고 죽게 하신 것,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냐?
그게 바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내 인생이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렇게 했다. 내가! 내가 너하고 충돌한 거야. 운석이 지구하고 충돌하듯이 부활의 주님께서 없어져야 될 목숨 가지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 목숨을 주님의 생명으로 박살 내기 위해서 내가 너한테 충돌했다. 됐냐!”
“누가 내 인생을 이렇게 비리비리하게 만들었습니까? 살 의욕도 없게 만들고 서글프게 만들고 한심스럽게 만들었습니까?” 주께서 “내가 그렇게 했다.” “왜요?” “너 나름대로 네 인생, 알파요 오메가 있잖아. 그거 작살내야지. 내 인생의 시작과 끝이 있으니까 꼬챙이로 한번 뚫어봐? 뚫어서 관통해 봐?”
엘리야는 이걸 몰랐습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자기 목숨을 뺏으러 오니까 자기는 도망쳐서 이 숨 쉬는 것, 그것도 자기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주신 것, 이 숨 쉬는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도망치면서 “하나님이여, 저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는 말이 “너만 남은 것이 아니야. 나에게 무릎 꿇게 한,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 7천 명을 남겨두었다.” 이렇게 하시면서 “나의 생명으로 남은 자는 인간의 행위로 되지 않는다.”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무릎꿇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로마서 11장 5절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은혜가 은혜되지 못한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생명이 생명 되게 드러나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내가 네 목숨을 작살 내고 빼앗아가는 식으로 내가 너에게 찾아오지 아니하면 너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 남은 자가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남은 자 되게 하기 위해서 기존의 남은 자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그 행함을 주님께서는 충돌시켜서 묵사발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멀쩡하고 자기 인생 잘 풀리면 자기가 뭐 잘난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는 자, 아픈 자, 망친 자, 환난 받는 자, 심지어 가족들을 다 몰살시키는 그런 일을 이방 나라를 통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남은 자 건지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남은 자.
그러면 그 저는 자, 훼방 받는 자, 아픈 자, 이렇게 망쳐버리면 그러면 내 인생 내 목숨은 무슨 재미로 사나, 이렇게 서러워 할거예요. 로마서 9장 13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나님께서 얍복강 가에서 야곱에게 찾아와 야곱으로 하여금 남성의 힘이 주저앉게 만들었어요. 절룩절룩 절면서, 옛날 팔팔했던 야곱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아이고, 왜 사나?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할 정도로 자기 처지가 비관스럽고 서글프기 짝이 없지요.
그런데 로마서 9장 13절에 보면 내가 야곱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게 사랑이라고요. 내 인생이 나한테 어떤 기대를 주지 않는 인생으로 먼저 구겨지는 것, 종이 구겨지듯 구겨지는 이게 사랑이에요. 이게 남은 자에요.
사랑의 기쁨, 어떤 사람이 사랑의 기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은 없어도 가슴은 젖어버리고 두려움에 떨리는 것은 사랑의 기쁨인가요~” <사랑의 미로> 2절 가사입니다. 두려움에 떨리는 것은 사랑의 기쁨인가요.
자, 오늘 설교에서 핵심 부분에 들어갑니다. 왜 이렇게 내 인생이 처참하게 기대할 게 요만큼도 없고 목숨도 간당간당하게 만드는 그게 왜 사랑이고 왜 은혜냐? 그게 시편 113편 5절에서 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이런 하나님은 없다.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이 높은 곳에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낮은 곳에 오셨어요. 스스로 낮은 곳에 오셨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높아지지 못해서 환장한 인간, 악마는 인간에게 높이 되어야 성공이라고, 그게 복수고 정의로움이라고 이렇게 가르치면서 높아지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방향은 악마가 추진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도리어 “올라오지 마, 올라오지 마!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인간의 마음은 교만하니까 그 교만한 것을 쳐버리는 거예요. 마치 갈치조림에서 내가 목숨 위에 걸치고 있던 나의 자랑거리나 교만을 다 하나하나 발라내듯이, 오늘 설교제목을 ‘갈치조림’이라 할까, 하나하나 다 발라내듯이, 심지어 발라내고 다 발라내서 깔끔하게 되고 보니까 목숨 이게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이 목숨 부지하려고 살았는데 이 목숨이 나의 소유로 되지를 않아요. 나는 목숨에 그냥 걸쳐 있는 거지요. 목숨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목숨에 그냥 걸쳐 있는 거예요.
개한테 물이 뿌려지면 개가 물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흡수한 게 아니지요. 개가 부르르 몸을 떨면 옆 사람이야 누가 있든 말든 물 다 튕기지요. 목숨은 하나님 겁니다. 인간의 목숨은 이미 폐기처분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님 십자가로서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폐기처분, 인간의 목숨은 이제 더러워서 안 받아요. 하나님이 그걸 깨끗한 제물로 받지를 않아요.
예수님의 목숨만, 생명만 받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목숨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경우가 생겨야 그것이 바로 천국 백성이지 그게 바뀐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천국 백성입니까? 목숨 생활에서 생명 생활로 방금 했던 시편 113편의 말씀을 마태복음 11장 4절과 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보고 말하기를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하니까 4,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여기 리스트, 이 항목에 나오는 사람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뽑아볼게요. 1번, 소경, 두 번째 앉은뱅이, 세 번째 문둥이, 네 번째 귀머거리, 다섯 번째 죽은 자, 여섯 번째 가난한 자, 그것도 찌질이 가난한 자, 이 사람들 공통점은 뭐냐? 목숨 뼉다구가 하얗게 드러나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목숨 빼놓고는 내가 거기서 걸칠 어떤 것 하나도 다 날아가 버린 사람들이에요.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목숨, 바로 딱 그 모습이에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때 예수님의 목숨을 없앴다고 생각했지요. 여러분, 이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목숨에는 생명이 붙지를 않아요. 목숨이 있으면 생명이 붙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이 귀하기 때문에 생명 귀한지를 몰라요.
자기 목숨에 아등바등하는 사람한테는 한 50년 교회 다니면서 복음 들어도 붙었다 하면 뚝 떨어지고, 붙었다 하면 뚝 떨어지고. 왜? 목숨 원판 자체가 이게 부실한 거예요. 부실한 겁니다. 우리 교회 밑에 가게 있지요. 그 가게 보세요. 타일 다 떨어졌어요. 기술자 아닌 자가 타일을 발라 놔서 중력에 의해서 다 떨어졌어요. 비 오면 비 맞아서 우두둑 다 떨어지고 쏟아졌어요.
타일은 기술자에게 맡겨야 되지요. 잘 아시는 분 혹시 있습니까? 타일은 기술자에게 맡겨야 돼요. 평생 교회 다니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뭐 선교 헌금 기도 다 했는데 이게 다 내 목숨을 어떻게 천국까지 이어볼까, 하는 자기의 알파와 오메가, 자기의 종교적인 목적을 아주 결사적으로 악착같이 쥐고 있는 거예요.
이미 망가져 버린 것, 그 종교란 것, 그 신앙이 욕심인 줄도 모르고 교회 나와서 기도해서 뭘 얻겠다는 게 이게 욕심이에요. 복수심이고. 인생을 만회해보려는 하나의 몸부림이거든요. 감사도 없고 은혜도 없고, 악착같이 믿었습니다, 자기 행함만 있는데 그 행함이 이게 시멘트가 시원찮은 시멘트에요. 목숨에다 붙이기는 하는데 이게 붙어 있지를 않고 우두둑 떨어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설교하신 모든 설교 내용이 인간에게 붙지를 못하고 우수수 다 떨어지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열두 제자도 뭐 듣기는 들었는데 우수수 다 떨어지는 거예요. 참, 기도할 때 얼마나 기도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그저 아름답게 아름답게 공부도 잘하고, 씩씩하게 크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하는데 까불기는 온통 까불지요. 기도 자체도 탐욕이에요. 기도 자체도 욕심이에요. 자기 자랑거리고.
왜 말라기에서 저는 것, 병든 것, 그런 제물 갖고 오지 말라고 한 이유 아시겠지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안 받습니다. 평생을, 60, 70, 80, 살아도 안 받는 인생 뭐 때문에 살아갑니까? 노인연금 받으려고 살아가요?
로마서 12장에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보통 교회에서 오후 예배까지 참석하는 사람은 수백 번 들었던 말씀일 거예요. 이 본문이. 로마서 12장 1, 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거 헌신예배 단골 본문이거든요. 헌신예배, 오후에 하는 헌신예배. 여기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는데 산 제물은 목숨에 아직도 연연해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호흡이 있는 것, 숨이 있는 것, 그거 의지하지 말고, 네 호흡에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생명에 종속되어야 돼요. 포함되어야 돼요.
참, 이 말씀이 어렵다는 것을 저도 동감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이 말씀의 차이점, 목숨 생활과 생명 생활의 차이점을 아시게 될 거예요. 마태복음 5장 15절에 보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과연 인간이 빛이냐, 아니면 빛 됨이냐? 인간이 빛이냐, 아니면 등경이냐, 곧 빛을 품은 등경이냐? 인간이 빛을 소유했느냐, 아니면 빛을 걸쳤느냐? 그 차이점이에요. 우리 안에 생명이 있으면 우리의 목숨이든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행함은 그 생명을 생명 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등경 같은 거예요. 걸쳐 있는 거예요.
빛은 새로운 낯선 거예요. 이게 남은 거예요. 여분의 것. 우리가 생각 못한. 우리는 뭐냐 하면, 그 껍데기에요. 마땅히 우리는 저는 자요, 마땅히 아픈 자요, 마땅히 환난 받아야 될 더러운 것이에요. 그 더러운 것을 빛의 재료로 사용해 주시는 그 빛 되심, 그것이 아까 마태복음 11장에 나오는 저는 자, 문둥병자, 앉은뱅이를 낫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했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소경이 훌륭하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절름발이가 훌륭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주님이 함께 빛으로 있으면 소경이 눈을 떴다 했을 때, 정말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눈을 떴어요, 하지만 그 눈뜬 것이 눈 뜬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목숨을 소지하려 했는데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는 목숨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목숨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목숨을 내가 부지하려고, 소지하려고 하니까 이게 인생이 사달 난 거예요. 이게 무모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이게.
목숨이 내 것이 아니면 나머지도 내 것이 아니에요. 나라는 자체가 없어요. 나라는 자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이 땅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계시면서도 스스로 낮아지셔서, 아까 말씀드린 시편 113편의 말씀처럼 스스로 낮추는 거예요, 스스로 스스로 낮추셔서 7절에 있는 대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주님이 우리와 더불어 함께 하셔서 우리의 진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럽고 한심스러운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더 이상 우리에게 인생 성공했니, 실패했니, 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뭐가 중요하냐? 하나님께서 받으시느냐 하나님께서 안 받으시느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사랑을 실시한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끝으로 로마서 9장과 10장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9장 27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아까 미가에서 나온 그 남은 자가 신약에 오게 되면, 이것은 이방인들이, 이방인들이 남은자로서 등장하게 돼요. 이스라엘 숫자가 바다의 모래같을찌라도 다는 남은자가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목숨 생활에서 생명 생활로 바뀌는 것, 어떤 원칙에 의해서 그들이 목숨 생활로 생명생활로 바뀌는가?
인생은 뭐 어떻게든 바뀌어야 돼요. 교회 몇 개월 다녔나, 몇 년 다녔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뭐로 바뀌었느냐? 참 중요한 문제지요. “목사님, 제가 어디에서 어떻게 바뀌라는 소리에요? 도대체 어떻게 바뀌라는 말입니까?”
그게 로마서 10장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바뀐 사람입니다. 이런 고백 안 되는 사람은 안 바뀐 사람이에요.
‘내가 노력해서 예수님 찾았다.’ 이러면 안 바뀐 거예요. 그것은 자기 목숨에 대한 미련 때문인 거예요. 목숨 생활에서 생명 생활로 바뀌는 것은 뭐냐? 내가 구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찾아왔고 내가 찾지도 않았는데 오셨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게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이사야 65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거지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신학박사가 되고 뭐 교수가 되고 목사가 되어서, 개척교회 시작해서 60년을 목회를 했다면 “목사님은 어떻게 해서 천국 가게 되었습니까?” 만일 어떤 새 교인이 그렇게 물었다면 “뭐 꼭 그걸 묻습니까? 제가 행한 것을 보세요. 제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사 이렇게 수천 명 모아놓은 것 눈에 안 보이십니까?”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요, “나는 구원이란 것을 몰라요. 내가 구원한다 해도 그것은 나의 사적인 복수심이고 나의 정의, 나의 잘남, 내 정당성을 위해서 그렇게 해보는 것이고, 정말 내가 고백할 것은 나는 주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목숨을 부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찾을 수 없는 분이다, 그 말입니다. 찾아도 어디에도 없으신 분이 주님이에요. 아무리 찾아도 우리 가는 데는 없어요. 없는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분으로 함께 계신 분, 그분께서 늘 찾으심으로서 비로소 나는 주님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게 이사야 말씀이라면 이사야 말씀으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자개농 있지요, 자개농. 그 자개농에 자개 붙이듯이 말씀으로 홈 파서 그 빈자리에 자개 집어넣고 또 홈 파서 자개 집어넣고, 그래서 콩기름으로 광을 내고, 그렇게 반짝반짝 자개농을 만들 듯이 온 말씀으로만, 온 표면이 전부 다 말씀으로, 주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씀을 이렇게 생명의 말씀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남은 자에게 지금 하시는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목숨 연연하면서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서럽게 여겼던, 자기한테 위로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던 저희들, 바로 이것이 생명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사오니 주의 말씀이 찾아와서, 찾지도 않은 분이 찾아냄을 당해주시는 그 은혜를, 이제는 그것만 자랑할 수 있고 그것만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 공은주
수요설교 요약(바뀐 인생 : 220413)
수요설교하면서 미처 설명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나를 배신하라.’하는 거예요. 나를 배반하라. 요 대목을 어제 말씀드렸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후딱 지나갔지요. 나를 배신해야 되는 것은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그 목적에 목적을 내가 의도한 목적 쪽으로 가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나를 배신하라, 이 말은 이 목적을 겨냥해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배신감을 안겨주는 식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에요. 주님께서 인간에게 배신감을 안겨주는 식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나 저사람 모른다. 그렇게 했지요. 정식으로 예수님 앞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안했지만, 쉽게 말하면 이런 거지요. “우리 서로 모르는 사이로 갑시다.” “우리 서로 몰랐던 사이로 여기서 찢어집시다.” 그런 내용이지요. 가룟유다는 본격적으로 화가 나가지고 예수님을 상대로 보복을 했고, 은 삼십 냥에 보복을 했어요. 돈이라도 챙겨야지. 이리 했고.
다른 제자들은 끌려갔는데 여기서 더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기 전에 내가 발을 빼야겠다. 발 빼기. 저 사람하고 너무 엮여버리면 나중에 그 중력에 의해서 끌려가는 중력에 의해서 발을 빼기가 힘든 시점에 올 수도 있거든요. 그전에 내가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동안 이성적 사고가 있을 동안은 저분과 이제는 바이 바이 해야겠다.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의 최측근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 동고동락을 같이 한 사람들, 주님의 대선에 도움을 준 사람들 했는데 왜 배신했느냐, 내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냥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 안에 내가 목적한 바가 있을 수가 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일방적 해석을 덧입힌 거예요. 뒤집어씌운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자체가 누구냐 보다도 그 예수님에다가 자기 의미를 쏘아가지고 그 의미가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나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을까를 노리면서 최측근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동안이나 그렇게 추종을 한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이것이 하나의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증거물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에 왜 죽었느냐에 대한 증거물로서 제자들이 거기에 등장하게 되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누구한테 옵니까? 제자들에게 찾아오지요. 그럼 제자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사도행전1장8절. 니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했잖아요.
자, 그 증인이 어떤 증인일까요? “내가 발 빼기를 했습니다.” 를 원 없이 증거 하는 거예요. 아주 신바람 났어.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오해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내가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는 그 뜻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마음껏 증거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성령이 하는 일은 성령의 객관적인 사역은 뭐라고 했습니까? 주관적인 거 말고. 주관적인 것은 기쁨, 감사 이런 거지만. 객관적인 것은 책망하는 것. 책망. 무엇에 대한 책망이냐 하면 우리들의 모든 판단에 대해서 책망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판단. 인간의 판단에 대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떠나버리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와서 판단을 책망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끝부분에 사람들을 놔두고 예수님 홀로 떠나지요. 홀로 떠났어요. 제자들도 동반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홀로 가셨잖아요.
홀로 가시면서 뭐가 남겨지느냐, 비로소 길이라는 것이 생겨요. Way.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홀로 가시면서 이게 발생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그런 이야기했지요. 주님께서 가신 길 제발 혼자 가도록 좀 놔두라고요. 우리가 같이 끼어들지 말고. 주님 저도 가겠습니다. 이런 소리했다가 찜빵 받은 사람있지요. 베드로. 니는 내 가는 길에 동반할 수 없다. 그냥 가. 그냥 가라고.
그러한 슬픈 그러한 장면은 사무엘상에도 그게 나와요. 흔히 말하는 옛날 한국영화에 <미워도 다시 한 번>그런데도 나오고요. 남자가 성공하고 난 뒤에 여자가 계속 따라오니까 남자가 나는 구닥다리 같은 니하고는 상대 안한다. 쉽게 말해서 여자가 다방레지해가지고 돈벌어가지고 남편 고시공부시켜가지고 판사 만들어놓으니까 판사 사법고시 하고 나니까 남자가 부잣집에서 중매가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선봐가지고 부잣집 여자와 할 때 그 여자가 자기 때문에 자기가 뒷바라지해서 됐으니까 계속 따라 붙일 게 아니겠어요. 그러면 남자가 휙~ 휙~ 저리가! 저리가! 하고 보내지요.
베드로가 예수님 하신 일에 협조했다고 따라오니까, 저리가! 저리가! 니 따라오지 못해. 그때 한국영화 그런데 서는 결정적인 여자 쪽에서 준비한 결정타가 있습니다. 이리 맨몸으로 가면 저리가! 가 되는데 뒤로 싹 둘러요. 그러면 뒤에 뭐가 있는가 하면 포대기에 아가 있는 거예요. 애를 탁하니까. 애는 어떻게 할 건데? 그 때는 남자가 나서는 게 아니고, 남자가 결혼해야 될 부잣집 얼굴 크고 퉁퉁한 그런 부잣집 장모님 될 사람이 와가지고 다방에 앉아서 조용하게 봉투하나 쓱 내밀지요. 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까지다. 더 이상 침범하게 되면 깡패 동원시킬 테니까 니가 알아서 기라. 이 돈가지고 남대문시장 점포하나 옷가게 점포하나 해가지고 니 아하고 먹고 떨어져라.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수요설교하다가 웬 영화이야기를...
그리하고 난 뒤에는 여자는 한을 품었지요. 잘먹고 잘사는가 한 번 보자. 나중에 남자가 여자 만나고 난 뒤에 또 문제있어가지고 그제야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뭐 이렇게 살게 되는 부잣집 다 버리고 옷가게 하는 여자하고 잘살았다는 이야기 The end. 미워도 다시 한 번 이런 거. 이런 식으로.
주님께서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예수임을 추방했기 때문에 추방된 자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 다니고 해도 그건 지가 갇혀있는 폐쇄된 공간, 풍선 안에 들어있는 것과 똑같지요. 교회라는 게 있어가지고 온갖 것 시키는 대로 다 해보지만 튕겨져 나가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내가 나중에 구원받게 되는 존재. 내가 나중에 축복받는 존재. 자기가 자기를 이렇게 자기 이상형을 본인이 구상을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납니다. 그런 노력을 유대인들이 다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그래서 그 길이 없는데 여기서 성령이 와요. 뭘 따라서? 길 따라서. 길 따라 오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았다가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목적이 나를 이용했다, 로 바뀌어요. 주님의 목적이 나를 이용했다, 로 바뀌어버려요. 왜냐하면 방향이 바뀌니까. 내 쪽에서 가면 주님도 나의 목적이 되지만 주님 쪽에서 오면 내가 하나의 목적이 되니까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생명이요, 내가 곧 진리가 되는 거예요. 성령이 와야 길은 주님 쪽에서 만들었지.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는 한 길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이 오게 되면 누가 배신해야 되는가, 전에는 내가 예수님을 배신했는데 이제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나를 배신해야 돼요. 이 못돼 먹은 것! 나만 쓰레기인가!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배신해야 돼요. 내가 아는 것, 내가 믿는 것, 내가 희망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헌신하는 것, 전부 다 이건 깡그리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것과 주님 가신 길을 홀로 가시게 하라. 우리가 동승을 못한다. 그리고 몇 가지 더 말씀을 드리면 불신자에게는 지옥, 저주가 기다리고 있는데, 불신자인 것을 아는 자에게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가는 백성들도 이 땅에서 불신자고 지옥 가는 것도 불신자인데 천국 가는 자는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를 의인되게 하셨던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그러한 진정한 고백은 성령이 옴으로 그렇게 발생될 때, 이미 주님 앞에 잠식당한 존재가 돼요. 주님 앞에 포획 당한 존재.
이거 언제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아메바. 아메바에 함몰당하는 거예요.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이렇게 함몰당하는 거예요. 큰 비누 방울 안에 작은 비누 방울이 흡수 통합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그걸 껴안아 주시면 우리는 그걸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전에는 내 안에 예수님을 강제로 끌어당기고자 했는데 이제는 주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 편지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예수 안에 있다는 거예요. 예수 안에.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주일 설교에서 예수 안에 있는 것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때라고 해요. 때. 때는 콤팩트 압축되어 있으니까. 시간과 때는 반대가 되는 돼요. 시간은 흘러가는 거지만 때는 이미 고정된 거예요.
그 때에서 다른 우리가 아는 시간 말고 주님의 때로 다시 귀환시키는 돌아가야 될 그러한 주님의 고유시간 안에 우리의 인생이 성도의 인생이 놓여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어떤 과거 일이나 지금의 일이나 어떤 일이라도 주께서 필요해서 발생된 사태라고 해서 그 모든 의미가 고정된 주님의 십자가 때로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주일날 설교에도 시간 관계상 하지 않은 중요한 일이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재림이라는 것도 역사가 아니고 시간이 흘러가면 재림하는 게 아니고 그건 유대인적 사고방식이고요. 재림이 뭐가 되느냐 하면 때가 돼요. 재림되기 전에 먼저 재림의 의미가 재림에게 끌려가는 식으로 우리 마음에 오실 분을 고대하게 만듭니다.
나는 아닙니다. 주께서 오셔야 됩니다. 재림도 때고, 주님도 때고. 그 때가 아까 방금 이야기한 예수 안에서는 이미 우리는 주께서 하시지 우리가 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웃사랑이라는 것도 내가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사랑을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하면 안돼요. 이게 바로 거짓선지자들입니다. 거짓선지자.
이웃사랑을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해버리면 여기에 뭐가 필요하지요? 돈이 자금이 필요해요. 이건 회사에요. 그러면 성경에서 이웃사랑은 뭐냐 하면 그냥 우연한 마주침입니다. 우연한 마주침.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우연히 만났네. 나이트클럽에서. 나를 보고 미안해하네. 나는 안아주었지. 다독여 줬다 이 말이에요. 모든 것이 우연히 만나는 거예요. 계획적으로 저 사람 사랑해야지. 그건 안돼요. 그냥 우연히 만남에. 우연히 만나기 때문에 어떤 실적 같은 건 기대하지 마세요.
내가 저만큼 해줬기 때문에 나한테 어떤 보상이 와야 된다. 그런 것은 조직화된 회사에서나 하지. 이웃사랑은 그런 거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새로 직장을 바꿔가지고 강도 만난사람 도와주기 주식회사 만들었습니까. 그런 거 없잖아요. 그냥 우연히 만난 거예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
그래서 이웃사랑이 우연히 마주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내가 사랑해줬으니까 사랑 받은 사람은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다. 이게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나게 함으로서 내 속에 갈등을 유발시켜서 갈등 속에서 그 사람을 도와주는 식으로 주께서 작전을 진행해 나갑니다.
그러면 도움 받은 사람도 죄인 되고, 도와준 사람도 죄인 되니 오직 주에 대한 영광으로 감사밖에 되지를 않지요. 마르다 누이동생 마리아가 모든 향수를 그동안 모아놨던 향수를 예수님 발 앞에 뿌릴 때 자기가 지금 의로운 일을 했다고 보지를 않아요. 그냥 우연히 그게 울컥 올라 와서 한 거예요.
그 행위에 대해서 해석은 마리아 본인이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저 마리아의 행동은 내 죽음 장례식을 빛내기 위해서 했다. 그건 본인 마리아한테는 생뚱맞는 이야기에요. 내가 언제 했습니까? 그렇잖아요. 마태복음25장에 보면 후반부에 나오지요. 니가 나한테 먹을 걸 주었구나! 막상 먹을 걸 준 그 소자는 제가 언제 했습니까? 네가 나한테 입을 것을 주었구나! 제가 한 적 없는데요. 내가 옥에 있을 때도 니가 돌아봤다. 내가 한 적 없는데요. 이러면서 천국가는 거예요.
내가 한 적이 없는데. 왜? 의미와 해석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라는 것은 콤팩트 압축시키면 우리가 태어난 것부터가 이게 내 의도가 아니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고.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도 만나고자 노력한 것이 아니라 우연하게 모든 나의 인생 전체를 앞으로 살게 될 그 나와 있는 인생까지 전부를 다 끌어모아서 그 시골장터에서 뻥튀기 하는 거예요. 눌러버리듯이. 콤팩트. 납작하게 된 그렇게 우리 인생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인생의 굴곡은 주 안에 있는 하나의 무늬, 무늬가 되지요. 무늬가 있어야 인생이 또 재미가 있지요. 사직서 내고 또 일하러 나가고. 아슬아슬하고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어서 이게 인생의 무늬지요. 고요하게 되면 권태롭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난 수요일날 주님의 홀로 가신 길에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천국가게 해주시는 주님의 성령의 찾아오심. 거기서 우리는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천국 가는데 감사하는 것. 이게 수요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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