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가 3:9-12 / 영적 치매 본문
영적 치매
이근호
2022년 3월 23일
본문 말씀: 미가 3:9-12
(3: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3: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3: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3: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의미 있게 만드신 이유는, 거기서 인간들의 최종 모습을 규정짓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신들이 그 끝 모습을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멈출 수 없는 본능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최종 도달지점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 최종 지점을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정해놓으시고 그 도시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시려고 합니다.
마치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홈통을 통해서 아랫 쪽 지면으로 흘러가도록 유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절대악과 절대선의 만남의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비참하게 되셔서 떠나버립니다. 그러면 그동안 인간이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 덕택이었는데 그 은혜가 철수하게 되면 인간도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그것이 12절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자신의 운명이 이렇게 될 줄을 모릅니다. 더구나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줄로 모릅니다. 그냥 인간들이 원하는 바는 11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육신만 평안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육신은 평안함을 왜 좋게 보느냐 하며는, 그 육신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육신을 통해서 ‘자아’라는 것을 형성시킵니다. ‘자아’라는 말은 ‘나’라는 뜻입니다.
‘나’는 이기성을 띠고 있습니다. 모든 게 이기주의적입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정신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하나마 나름대로 자신을 절대자이고 싶어합니다. 신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분통을 떠트리는 이유는 육신이 자기 마음 먹은대로 잘 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 불만과 이 분노는 절대신이 될 수 없다는 좌절감의 폭로입니다.
자아는 육신을 원하는대로 다루고 보호하기 위해 조직을 꾀합니다. 조직이란 곧 사회를 말합니다. 조직을 자아의 신체화로 이해하는 겁니다. 제 2의 자아처럼 여깁니다. 조직에는 기본적으로 가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및 종교단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 곧 회사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국가가 있습니다.
이 조직들 속에 들어와서는 자아는 그 조직 뒤에 숨기면서 조직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렇게 해서 제발 이 자아에 재앙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체를 따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신체는 인간 자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실 곳이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신체적 피들이 흘려집니다. 신체는 인간들이 자아성을 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신체 자체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관여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9:6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그런데 인간들은 이 신체를 통해서 자아, 곧 선악 지식을 알아 자칭 신처럼 행세하고 싶어하는 자아가 아무런 재앙도 없이 평안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질문, 당신은 주님과 어떻게 연락을 취합니까? 여기에 대해서 그 사람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연락하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면 그만이니까요”
둘째 질문, 당신은 예루살렘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그 사람은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나는 그저 여기서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면 그만이니까요”
셋째 질문은, “당신은 당신을 누구인지 어떻게 압니까?” 여기에 대해서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삽니다. 그저 평안하게 이대로 살면 최고입니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 치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자아의 평온함에 맞추는 그 삶의 방식 이외에 일체 아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 자신은 그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았으면 특별히 죄 지은 것도 없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멈추지 않는 질주 본능은 예루살렘은 살육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내 가정이 지켜주고 내 교회가 지켜주고 내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그 생각으로 인하여 자신을 지켜주는 조직과 사회 속에서 예루살렘은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보내어 필연적 결론나게 되는 예루살렘의 비극을 미리 이스라엘에게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23:26-28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들 중의 여러 여인들은 예수님의 형편을 동정해서 울면서 따라옵니다. 하지만 주님은 반대로 그들의 운명을 알려줍니다. “너희들은 너희에게 닥칠 슬픈 운명을 모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그 조직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의식 자체가 예루살렘의 운명을 파멸로 이끕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도 모르고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께서 잘 안 도와준다고 은밀하게 미워합니다. 이처럼 자아중심의 불만은 심리적으로 내면화되고 이것이 사회성으로 나타나, 두령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마구 거침없이 잇속을 채우도록 하게 만든 겁니다.
선지나는 그 두꺼운 조직 자체를 뜯어냅니다. 그러면 그 안에 소복히 보호를 바라는 이기적인 자아들이 노출됩니다. 그들은 결코 두령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로 인해 피해자가 아니라 주님에게 분노하는 가해자들입니다. 구원은 일체 없습니다. 이 사실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조직화된 사회 뒤에 숨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강-미가 3장 9-12절(영적 치매)2203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3장 9-12절까지입니다.
미가 3:9-12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여기 나오는 이 말씀, 선지자의 말씀은 얼른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을 꾸중하는 말씀처럼 그렇게 들릴 것입니다. 이게 꾸중하는 말씀이 아니고 필연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필히 너희들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언급하는 겁니다.
미가 선지자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내는 이러한 죄, 11절에 나오지요,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이 말은 이러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 그 세상은 필연적으로 이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보다 특별히 더 나쁘다, 가 아니라 누구나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인간 속에는 멈추지 못하는 멈출 수 없는 그 본능 같은 게 있는데요, 인간들은 그 자신의 본능이 나쁘다는 생각을 절대로 인간은 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는 질주하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절제할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그 본성은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니다, 그냥 터져 나오는 대로 그렇게 살 뿐이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 하시는 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 그 끝을 미리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대로 해! 해보라고!” 해 보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10절의 결과가 나옵니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 그러한 결과가 나옵니다. 이 과정은 필연적입니다. 피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선지자의 이야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의도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자기의 본성대로 본능대로 모든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의 성질과 속성을 어디에다 한군데로 모으는 겁니다. 비가 오게 되면 지붕의 홈통을 통해서 물이 내려오지요. 그러면 지붕 위의 물이 홈통을 통해서 아래쪽 땅 있는 쪽으로 모이잖아요.
인간들이 하고 있는 모든 본성의 속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준비했느냐? 예루살렘을 준비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해보라고, 다 해보면 거기서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하는 모든 행동이 결국은 예루살렘을 피로 장식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주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합해서 “우리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고 시온을 피로 아주 물들여 버리자” “그래, 그렇게 하자.” 이렇게 의논을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의논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예루살렘하고 원수진 것도 아닌데. 그냥 자연스럽게 살게 되면 예루살렘은 모든 죄악이 유입되게 되어 있고 그 예루살렘, 같은 말로 시온이에요, 시온은 피로 폭력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미가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가 무척 고마운 이야기에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내 행동이 어떤 모습인지 몰랐는데 우리가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면 그것이 예루살렘을 폭력으로 물들이는 그러한 결과를 낳는 그 행위를 우리는 주체할 수 없이 매일같이 매일같이 그걸 터뜨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그 본성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미리,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한다는 이 최종적인 결론을 가지고 미리 마중을 나가요. 마중을 나갑니다. 마중을 나가게 되면 뭘 만나게 되느냐 하면, 11절을 만나게 돼요. 11절 끝부분에 보게 되면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한다, 와 만나게 돼요.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인간은 자기의 멈추지 않는 본능대로 살게 되면 그 결과가 예루살렘을 피로 폭력의 현장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폭력의 현장이라는 그 피로 건축한 시온으로부터 거꾸로 마중을 나가서 그 원인을 추적해 보게 되면 그 원인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재앙은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야. 무시무시한 그러한 어려운 일이 우리에게 닥칠 일은 없어. 우리는 착하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기본이 점잖은 사람들이니까 복을 받으면 받았지 저주받을 일은 없어. 설마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설마 하나님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재앙은 나에게는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쪽과 만나게 되어 있어요. 거꾸로 추적해 들어가게 되면.
이 말을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머물러 사는 가정주부, 애들 다 키우고 나이 한 50대 후반이 된 가정주부를 예로 듭시다. 그 가정주부에게 제가 질문을 한번 던져 보는 거예요. “당신은 주님과 어떻게 연락을 취합니까?” 이렇게 질문을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이렇게 답변할 거에요. “나는 누구하고 연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또 질문하지요. “당신은 예루살렘과 어떤 사이입니까, 어떤 관계입니까?” 물으면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묻지요.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 가정주부가 하는 말이 “나는 나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나 이대로 좋습니다.”
왜냐하면 11절에 의하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애 잘 키워놨겠다. 편안하게 남편 밥 해주고 보내버리고 자기는 하루 종일 놀면 되니까 아무 재앙이 임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어떤 현상인지를 제가 다른 예를 들어서 한번 비교해 드릴 테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보통 치매 환자에 대해서 보건소에서 검사하러 와요. 이 사람이 가짜인지 진짜 치매 환자인지, 치매 3급이 되는지 검사할 때 점검하는 방법이 대략 이렇습니다. “조사해보니 아드님이 계신데 요새 아드님 어떻게 지냅니까?” 그러면 치매 환자는 “나 아들 모릅니다.” “그러면 할머니! 여기 3이 있는데 3 + 5= 얼마입니까?” “모릅니다.”
그다음에 “자, 여기 비행기 있고 자동차 있고 개 있고 사람이 있는데 자, 보셨지요? 이제 덮습니다. 방금 할머니 뭘 보셨습니까?” “나 아무것도 안 봤습니다.” 치매 환자입니다. 3급 나옵니다. 아까 그 평범한 아주머니, 영적 치매입니다. 치매 환자예요.
그리고 건강보험공단에서 나온 그 사람이 판정하기를 치매 환자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치매 걸린 할머니가 “나 이대로 너무 좋아요, 편안하게 아무 모자란 것 없습니다, 잘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운동 다니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 11절에 의하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은, 영적 치매 환자들은 그들의 살아가는 그 방식이 오직 나만 재앙이 안 임하고 편하면 그게 오케이라는 것, 그 삶의 방식, 그 삶의 방식이 멈출 수 없는 본능이며 그것이 뭘 유발했느냐 하면, 그것이 예루살렘을 피로, 폭력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영적 치매 환자들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나만 편하면 되지. 아까 질문 다시 일깨워 드릴까요? “당신은 주님과 평소에 어떻게 연락합니까?” “연락 안 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 있습니까?” “나 해외여행 안 가는데요? 예루살렘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내 몸 편하면 되지 내가 꼭 누군지 알아야 됩니까? 그거 안다고 해서 돈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살래요.” 그렇게 나오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한쪽은 예루살렘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폭력의 현장이 되어 있는데 한쪽은 아무 문제 없대요. 신이 있다면 재앙이 떨어지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살고 있대요. 이 두 개가 어떻게 매치가 되어서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이 사고방식이 어떻게 예루살렘이 뭐가 되느냐 하면, 12절에 나오지요,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어떻게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황폐한 저주받은 그러한 동네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 내막을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황무지가 되고 예루살렘이 무더기가 되는 것은 예루살렘을 통해서 인간 세상의 현주소, 현 상황을 설명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떠나버린 세상은 인간도 살 수 없다. 인간이 편안하게 살고자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될 때나 가능한 일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철수해 버리면 그곳은 너희가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여기 미가 3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하나님이 응답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영적 치매 환자들은 응답하든 안 하든 “지금 나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그게 아쉽지 않아요. 하나님이 응답 안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나 대로 살게요.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냥 혼자 사세요. 나는 땅에서 혼자 살게.” 이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냐 하는 것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단 하나의 삶의 방식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의 삶의 방식이 뭐냐? 나 편하면 세상 편하고 좋다는 것, 그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은 몰라요. 그러니 이게 멈출 수 없는 본능이니까 본능상 인간들은 어떻게 이게 작동이 되느냐 하면, 그냥 나만 편하자, 나만 편하자, 나만 조용하게 살면 돼, 그렇게 되다 보면 인간이 어떤 교만에 빠지느냐 하면, 자기가 편하게 사는 데 무슨 문제가 생기잖아요,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 써야 된다든지, 이렇게 되면 자기를 피해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피가 가득하고 예루살렘에 죄악이 관영해서 예루살렘이 폭력의 현장이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이 폭력의 현장이 되게 만든 모든 인간들은 피해자가 아니고 도리어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아, 너희들 중에 피해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너희들은 모두 다 하나님이 계시는 그 예루살렘을 폭력으로 얼룩지게 한 가해자들이다.”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 11절에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이렇게 나오니까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쉽게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해요. ‘아, 이건 두령이 나쁜 두령이고 제사장이 나쁜 제사장이고 선지자가 돈을 위해서 하는 나쁜 선지자구나. 그러면 좋은 선지자, 좋은 두령, 좋은 제사장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본인들이 이런 두령과 이런 제사장과 이런 선지자를 선호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지금 이 상황은요, 이것은 인간에게 필연적이에요. 이게 바꾸어질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나에게 임하지 않으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 라고 마음먹는 순간 우리 주변에는 모조리 두령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오직 삯을 위하여, 돈을 위하여, 뇌물을 위해서 하는 그런 사람들 천지가 돼요. 이런 연관성이 있다고요, 연관성이.
지도자는 나빠서 가해자고 나는 거기에 대해서 억울한 피해자다. 이 세상에 피해자는 없습니다. 피해자가 있다면 예수님만이 피해자지 다른 사람은 가해자가 돼요.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 반드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만들어야 되고, 시온은 피범벅이 되는 그런 코스를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야 시온이 피로써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오늘날 우리는 마중을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안 되자, 가 아니라 이미 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켜서 그 기정사실이 도리어 거꾸로 뚜벅뚜벅 걸어서 ‘우리가 어떤 삶의 방식을 고수했기에 필연적인 그러한 처참한 결과가 나왔는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버린 결과가 나왔는가’를 거꾸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 결과가 뭐냐? 그냥 편안하게 살면 최고다. 바로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거예요. 나만 편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결과는 12절에 아까 말씀드렸지요. 예루살렘은 완전히 황폐하게 되는 겁니다. 이 원칙은 창세기 3장 17절에 그 원칙이 계속 유효하다는 뜻이에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떠나온 인간에게 기다리는 것은 저주와 고생과 그리고 처벌과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피해자 코스프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조리 전부 다 오신 하나님마저 떠나보낸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는 거꾸로, 이미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 것을 거꾸로 마중 나오듯이, 우리에게 이미 확정된 결론을 가지고 원인 규명하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유가 뭐냐?
여기 10절에 보면 힌트가 나옵니다. 시온을 피로, 라고 되어 있어요. 시온을 피로. 피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의 육신에서 나옵니다. 이제부터 좀 어려워요. 피는 인간의 육신에서 나와요. 육신이 찢어지고 파편화될 때 피가 나오는 겁니다. 실제로 13세기에서 15세기 그 기간 동안에 있었던 현재 멕시코 자리에 아즈텍문명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 아즈텍 문명에는 피라미드가 굉장히 많았는데 그 피라미드 높이는 큰 것은 63미터, 해의 피라미드, 태양신을 섬기는 겁니다. 태양신을 섬기는데 그들의 신화에 보면, 첫 번째 태양 사라지고, 두 번째 태양, 세 번째 태양, 네 번째 태양, 태양이 밧데리같이 자꾸 닳아져서 자꾸 없어진다는 거예요. 지금 자기 시대는 뭐냐? 다섯 번째 태양인데 이 태양이 빛을 잃어버리면 나라가 망하잖아요.
망하지 않기 위해서 태양신이 원하는 것은 뭐냐? 인간의 피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 피라미드를 왜 세웠느냐 하면, 피라미드를 계단을 넣어서 63 미터 높이로 세워야 높은 거기서 사람을 죽이는데 그냥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고 피를 내는 게 목적이에요. 태양신은 피를 원하니까. 왜? 색깔이 태양도 빨갛고 인간 가운데서 같은 색깔을 태양이 요구하고 있거든요.
인간 가운데 빨간 것은 뭡니까? 피밖에 없잖아요. 피를 거기서 내는 겁니다. 인간을 조사해보니까 피 중에서 가장 피가 많은 것이 심장 부분이라는 것을 그들이 발견해서 인간의 옆구리를 째서 동그랗게 생긴 심장을 도려내는 그림들이 아즈텍 문명 발굴에서 나왔어요. 사람을 그냥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고 심장을 꺼내서 피를 짜내는 게 목적이에요. 그것도 매일 짜내야 오늘의 태양은 뜨니까요.
피라미드 새로 신장 개업 할 때는 무려 일 년에 6만 명을 죽였다는 통계도 나와요. 심지어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는지 거기에는 감옥도 따로 필요 없답니다. 감옥도 갈 것 없어요. 피라미드 위에 올려서 심장 꺼내고 피만 짜내요. 숲속에 피 그냥 바치면 되는데 왜 피라미드를 세웠는가? 피라미드 위에서 피를 내게 되면 그 피가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위쪽에서 계단을 따라 흘러 내려오잖아요. 그럴 때 밑에 있는 백성들은 그 피를 온몸에 발라야 돼요. 그래야 태양의 기운이 자기 몸과 합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것은 자아성으로 인간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 더 나가느냐 하면, 인간의 신체성까지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게 좀 어렵지요. 인간 ‘나’가 여기 있다, 가 아니라 지금 아즈텍 문명에서는요, 나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내 선에서 멈추지를 않아요. 내 안에는 붉은 태양이 원하는 붉은 액체가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태양신이거든요. 신과 내가 합일을 하려면 태양은 하늘에 떠 있는 신이고 나는 내 안에 태양과 같은 색깔의 피가 있으니까 그게 내 안에 작은 신으로서 연락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아에서 더 깊숙이 나가서 자아 되기 이전의 더 원래적 원형, 그것은 인간의 육체입니다. 육신이에요. 그걸 인신 공양이라 하는데 인간을 거기에 바치는 겁니다.
바칠 때 피 흘리면 밑에서 열광합니다. 방탄소년단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리도 아니지요. 서로 다투고 온몸에 피를 적시고자……, 찬송가 가사에도 비슷한 게 있는데 계단 따라 피가 내려오니까요, 완전히 미친 듯이 하지요. 그러면 그 수급, 제물의 수급은 어디서 하는가? 그 나라 가운데 뛰어난 전사들, 역시 전사들의 피는 안에 활력소가 있어 가지고 태양신이 기쁘게 받거든요, 그리고 죄수들, 그렇게 하는데 이게 정기적으로 드리는 것도 있지만 태양신의 기분을 살펴야 돼요.
가뭄이 든다, 또 기근이 온다, 또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서 불안하다, 이럴 때는 태양신이 지금 조금 기분 나쁜 때에요. 그럴 때는 ‘아, 먹잇감을 많이 원하는구나.’ 해서 많이 바치고 그래서 자기 안에서 피가 모자라면 다른 민족하고 전쟁해서 포로를 잡아다 그 후에 피라미드 단에 바치고 그렇게 한 거예요.
여러분 생각에는 참 미개하고 무지막지하다고 했는데 여러분,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행복했어요. 이게 멈추지 않는 질주본능이에요. 이게 자아성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참혹한 진짜 살벌한 그런 종교, 참 추접고 더럽다고 욕하지 마세요. 그 인간도 아담 속의 인간이고요, 오늘날 21세기 우리도 같은 아담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아담은,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인신 공양 아닌 그렇게 더러운 태양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할 수 있느냐? 제가 한 문장을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문장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목사님이 코로나 걸려서 새벽기도 안 나왔습니다.” 하는 문장. 못 들었으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오늘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 코로나 걸려서 새벽기도 당분간 못 나온답니다.” 이 문장.
지금 그 문장, 그 대화를 하는 사람은 뭘 감추느냐 하면, 자신의 육신을 어디에 감추느냐 하면, 인간의 자아에다가 감춰버렸어요. 자, 하나님은 시온의 피라고 했어요. 자아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너희들은 자아를 바친다고 보지 않고 너희들의 피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사야 1장 15절에, 좀 정신을 집중해 주세요, 이게 어려운 대목이니까,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이 피라는 말 들으면요, 우리는 이렇게 오해합니다. “아, ‘나’라는 이 자아 속에 피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자아라는 것은 없어요. 성경은 우리를 자아라고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자아라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반칙을 쓴 거예요. 창세기 9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주님께서 보는 것은 육신적 차원에서 인간을 대합니다. 육신적 차원에서.
피가 흐르는 이 육신 말입니다. 이 육신을 내 것이라고 자아, 에고, 나라고 하지 마시고요, 그냥 육신이에요. 이 육체는 나가 아니에요. 그냥 육신이라니까요. 그걸 뒤늦게 이성적으로 나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나라고 할 때는요, 육신과 나의 차이점은 육신은 그냥 있을 뿐인데 나는 그 육신을 내가 이기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이기성, 나만을 위해서 나의 신적인 절대성을 위해서, 악마적 속성을 위해서 육신을 내 것으로 잡는 통합적인 그러한 이미지가 나예요.
우리는 육신이지 나가 아닙니다. 주께서는 피를 보는 거예요. 우리 속의 피를 보지 나를 보는 게 아니에요. 더 확실한 것은 이사야 1장 1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주님께서 생각한 것은 죄에다가 색깔을 입혀버려요. 그런데 그 색깔이 어떤 색깔이냐 하면, 자아 색깔 입히는 게 아니고 육신에 관한 색깔을 입혀 버립니다. 그게 피의 색깔이에요. 주홍 색깔. 인간의 육신 자체가 자아가 잘못된 게 아니고 육신 자체가 악마와 결탁되어 있다는 겁니다. 악마의 노리개라는 거예요. 육신 자체가.
이 말은 뒤늦게 우리가 조작한 자아가 인간의 육신에서 뿜어나오는 육신적인 본능을 인간의 자아가 통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악을 아는 자아가 나의 육신적인 죄를 통제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육신대로, 육신의 본능대로 충동대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육신이 편안하니까 ‘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 이게 우리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자아가 편하면 되니까. 자아는 왜 편한가? 육신이 안 아프고 건강하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또 난리지요. 아프면 아프다고 난리하는 것은 육신이 아픈 게 아니고 자아가 못마땅해서 자아가 절대적인 신이 될 수 없다는 그 좌절감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불만과 반항기를 뿜어내는 거예요.
이 육신은 누구꺼냐? 하나님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육신과 상대하는데 중간에 자아가 끼어들어서 내 몸인데 왜 내 몸을 이렇게 힘들게 아프게 하십니까, 라고 중간에 있지도 않은 자아가 튀어나와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거예요. 그것은 마귀지요. 그런데 이 자아가……, 자, 여기서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에요, 자아가 내 육신인데 내 맘대로 안되는 거예요. 몸 아프면 불편한 거예요. 어깨 아프고 감기 들리면 골치 아픈 거예요.
그리고 이 자아는 자칭 선악 아는 지식이 있어 가지고 자기가 신도 아니면서 신의 흉내를 내는 겁니다. 물론 본인은 알지요. 내가 절대적인 신이 될 수 없어서 늘 거기에 대해서 뾰로통 화내고 있다는 것. 인간은 항상 화내고 있어요. 자기가 절대적인 신으로 행세할 수 없다는 그 결핍으로 인하여 매사 분노하고 있습니다. 한번도 분노 안 할 때가 없어요. 바둑 둘 때도 이렇게 조용하게 두면 되는데 팍 놓는다고요. 축구 경기장에서 “잘한다!” 하면 될 것을 “죽여라! 죽여라!” 완전히 살인현장이에요.
대선 투표할 때도 마찬가지고 “그 인간 조져버려!” 뭐 이런 것. 입에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뭔가 불만이 가득해요. 그게 육신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데서 오는 심리적인 내면화가 나중에 뭐로 변하느냐? 사회적 현상으로 번지는 거예요. 그게 조직화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한 문장 다시 이야기할게요. “오늘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 코로나 걸려서 새벽기도 안 나왔습니다.” 이게 왜 예루살렘을 피로 범벅을 만드느냐 하면, 조직 뒤에 인간이 숨어버립니다. 내가 아쉬운 것, 육신의 미흡한 것, 육신이 내 맘대로 안되는 이것을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서 그걸 ‘조직의 신체화’라고 하는데요, 또는 ‘사회의 신체화’ 같은 말인데 조직이 개인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만족스럽게 달성해 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 조직에 어떤 것이 있는가? 지난주에 했는데 오늘도 손가락 한 번 꼽아볼까요? 시키는대로 할 사람 아무도 없지만, 첫째, 가정입니다. 가정이라는 조직 가정에 자아를 숨겨버려요. 그 다음에, 가정 다음에 교회. 나는 부족하지만 교회가 어떤 튼튼한 교회 조직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 코로나 걸려서 새벽기도 안 나왔다는 그런 대화가 나오는 거예요.
목사 새벽기도 안 나오면 지옥 갑니까? 왜 교회에 관심을 둡니까? 내가 그 교회 안에 숨어들어가고 싶기 때문에, 미흡한 나를 교회라는 건전하고 거룩한 조직이 미흡한 나를 가려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래요. 그다음의 조직이 직장, 그다음에 국가, 뭐 다지요. 가정, 교회, 직장, 그리고 국가, 이 안에 인간의 자아는 희망과 포부를 품고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그 조직 뒤에 숨는 거예요. 내가 내 육신의 미흡함을 그 조직이 알아서 해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 아즈텍 문명에서 피를 바칠 때 그 백성들이 미치고 좋아서 환장하고 날뛰는 것 봤지요. 이게 뭐냐 하면, 그 조직 자체가 내 신체를 대신한 나의 새로운 사회적 신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번에 대선을 통해서 알 수 있잖아요. 이재명하고 언제 아는 사이라고? 윤석열하고 연락, 연락은 받았다만 “투표일입니다……” 어쩌고 연락은 받았다만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 아니에요.
자꾸 뒤에 숨는 거예요. 나이 서른 넘어서 백수면서도 우리 아버지 재벌이다, 그것 자랑하는 겁니다. 아버지 빽믿고 고급 차 타고 돌아다니는 것 가정이 조직인 거예요. 조직화 뒤에. 사는 게, 사는 방식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나한테 아무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라도 흔쾌히 그 조직에 가입하겠습니다, 이런 사는 방식, 사는 스타일, 딱 이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조직,아 나를 살려라.’ 그게 조직폭력배잖아요, 조직폭력배. 모든 조직은 조직폭력배와 동일해요. 교회도 가정도 모든 게 다 그래요.
아버지 때문에 인생 조져놨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너는 왜 인생이 안 망해야 되는데? 이미 오늘 본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필연적입니다. 필연적으로 가해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해자들이에요. 이것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범주에서 거기서 빠져나갈 위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훌륭한 목사님으로 잘 돌아가게 되면 나는 덩달아 구원받는다.’ 이런 생각, 이런 생각에 대해서 주님은 그 조직을 뜯어버립니다. “뒤에 마귀 너 나와! 조직 뒤에 숨은 너 나와!” 그 뜯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11절에 나옵니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외치는 것은 뭐냐?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두령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전부 다 조직과 관련된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이 사람을 원했던 겁니까? 바로 인간의 자아들이 원한 거예요. 내가 원했던 겁니다. 그들 바꾼다고 이 인간 세상이 망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의 특징은 어떠한 구원의 말씀도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에요. 인간에게 어떤 구원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 인간은 피로 예루살렘, 저 구원의 도성 예루살렘마저 시온 마저 폭력으로 범벅이 되었다는 그 최종적 결정으로 인하여 어느 누구도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 확정된 겁니다.
예루살렘에 대해서 누가복음 23장 26절부터 나옵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지금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는데 구레네 사람보고 대신 지게 했다는 이 사건이 어디서 일어나는 사건인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에요. 이게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의 마지막 장면이에요. 예루살렘의 취지를 드러낼 수 있는 최종장면이 이 장면이에요. 그 뒤의 예루살렘은 의미 없어요.
그 뒤에 27절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이것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어요.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예루살렘의 딸들아. 미가에서 필히 멸망하고 폭력으로 얼룩지게 될 죄악으로 가득 찰 그 예루살렘의 그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곧 “왜 너 자신을 모르느냐? 너희들이 운다고 해서 예수님과 같이 피해자 노릇 하려고? 안돼. 너희들은 모두 가해자야.” 모두 가해자에요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이상 모든 인간은 가해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한패가 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왜? 아즈텍 문명처럼 이 조직에 환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가정이라는 조직, 내 가정이라는 조직에 환장했고 교회라는 조직, 그것 없이는 지옥 가는 줄 알고 있는 환장한 조직, 사람들, 교인들, 성도가 아니지요, 교인들이지요, 그리고 직장, 국가, 없으면 자기가 편안하게 못산다고 오직 거기에만 모든 것을 힘주어서 태극기를 향하여 가슴에 손 얹고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인간들, 조직 뒤에 숨는 자들, 그들이 지금 우리가 볼 때 추접고 더러운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아즈텍 문명의 그 후예들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열왕기하 16장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이게 아하스왕때입니다. 16장 10, 11절에 보면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그 단에서 그들은 15절에 보면, “아하스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모든 국민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앗수르 단위에, 앗수르 제단, 앗수르 제단의 사회화에요. 사회는 개인의 자아들이 조직화 된 것이 사회입니다.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고” 다른 제물의 피를 거기다 다 쏟아붓는 거예요.
그런데 이 왕이 이런 짓 할 때 그 백성들은 다 좋아했어요. 왜? 무슨 짓을 해도 나라만 튼튼하기만 하면 나는 그 안에서 나의 재앙 없이 나의 안위는 보장받는다, 내 자아는 보장받는다. 육신을 편안한 자아로, 절대 신을 흉내 내는 자아로 감추는데 급급한 이 타고난 본능, 이것은 십자가 앞에서 모조리 다 제거가 되고요, 예루살렘은 그걸 들춰내는 집결된 최후의 장소가 되고, 거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서, 우주선 타고 십자가로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구원은 없습니다. 이 구원이 없다는 것, 이게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어설픈 피해자의식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나만 잘되고 편안하면 된다는 그 생각 자체가 결국 우리는 조직을 요청하게 만들었다는 필연적 코스를 밟아가는 집단적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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