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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가 4:3-5 / 포획된 죽음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미가

미가 4:3-5 / 포획된 죽음

정인순 2022. 4. 7. 10:18

음성 동영상 Youtube

포획된 죽음 

 

이근호
2022년 4월 6일                  

 

본문 말씀: 미가 4:3-5

(4:3)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4:5)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나라의 전쟁은 소유성을 지키기 위한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늙은 죽음 이전에 엄연히 산 상태에서 체험되는 ‘죽음체험’입니다. 이는 그만큼 살아있다는 단지 이유만으로 끈질기게 죽음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결국 죽음이 지배하에 놓여 있는 바가 현실입니다.

인생이란 마치 빚쟁이에서 채무 쫓기듯이 죽음에 추적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혼신을 힘을 다해서 죽음이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공포 속에서는 신으로부터 배려를 받기 위한 선한 일을 도모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면 복을 받아 약간은 죽음으로부터 거리를 떨어져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가져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나름대로 신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즉 나의 것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 신을 찾는 겁니다. 인간들이 나의 것을 간직하려고 하는 것은 죽음에 대비해서 보다 넉넉한 힘들을 비축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는 죽음이 주는 공포를 해소하려고 합니다.

신을 소지해서 그것으로 죽음으로부터 내빼는데 유리하게 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의식으로 인해 인간 세계는 치열한 생존전쟁터입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의 말씀에 의하면 특정 지역에서는 이미 전쟁이 마감되었다는 겁니다. 끝났다는 겁니다. 죽음(사망)에 대한 전쟁을 하나님의 승리로 종결되었다는 겁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여기서 사망은 전쟁을 벌리는 맞상대자가 됩니다. 이미 사망은 예수님의 부활로 패배자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망 자체를 패배자로 만드시는 취지는, 사망이 이 인간세계에 초래한 것이 ‘죄’ 때문인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래서 그 죄를 용서하시는 그 구역 안에서는 더는 사망이 죄용서받은 자를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 예가 민수기 21:5-8에 나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 대목에서 우선 ‘죄’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각자 속에서 발산되는지를 보게 합니다. 사람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하나님에 대해서 가차없이 원망이 터져나옵니다. “당신이 뭔데 나를 죽게 하느냐?”는 겁니다. 바로 이런 원망이 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원망한 자들, 곧 죄인들을 죽게 만듭니다. 이게 필연적 절차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와 죽음과 상관관계를 이념이나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몸소 삶에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불뱀’의 등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뱀’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물체’로 딱딱하게 굳어진 단 하나의 뱀입니다. 그 뱀은 놋뱀입니다. 그런데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파 죽어가도 도로 살아납니다.

그것은 그동안 죄와 원망으로 인해 죽어가는 그 죽음을 이 놋뱀으로 포획하고 체포했기 때문입니다. 즉 “너희들을 죽게 하는 그 사망은 이 용서의 놋뱀 안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더는 너희들에 사망이 작렬하거나 공포를 주는 상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놋뱀 안에서 사망과의 전쟁은 이 종결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자기 힘으로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어 마땅하기에 그들은 사망을 상대로 그 어떤 투쟁으로서 승리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을 물어죽은 그 숱한 불뱀도 단 하나의 놋뱀으로 포획된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는 여기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 18:4에 보면, 그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놋뱀을 우상화했습니다. 즉 소유화한 겁니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란 ‘나를 위한 신’으로 신을 이해한 겁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 32:8)

즉 우상은 소유자를 성립시킵니다. 신은 그 신을 소유한 자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어서 그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를 위한 전쟁’을 성사시키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을 우상시하고 소유화한 인물이 사울왕입니다. 이 우상성을 지적하면서 등장된 자는 소년 다윗입니다. 이 소년 다윗으로 인하여 비로소 ‘시온’을 역사 위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도(道)가 흘러나오는 바로 그 시온에서는 전쟁이 마감되어서, 죽음을 이긴 부활의 능력이 쏟아집니다. 다윗에게 있어 시온은 사망에 대한 진정한 승리의 최종적 증거가 담기게 됩니다. 다윗은 시온성에서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르게 되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사망을 이기기는커녕 도리어 사망에 져서 죽어 마땅함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통보에 의하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창조 원리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빛도 만드시고 어두움도 만드시는 겁니다.(사 45: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 51:17-19)

즉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십자가를 소지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을 포획하시고 전쟁을 마감하신 그 분이 가신 길을 쳐다 보므로서 더는 자기 전쟁이나 ‘자기 것’을 지켜서 사망의 공포를 이기려고 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시온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시온산에서 도로 내려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3강-미가 4장 3-5절(포획된 죽음)2204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4장 3-5절까지입니다.

미가 4:3-5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여기 여호와의 산이 있고, 그 여호와의 산에는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가, 오늘 본문 미가 4장 2절에 보면 그가 하나님이지요, 하나님께서 그 도(道), 진리, 길,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온산으로 몰려가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이방인 가운데도 있고 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시온산에서 나오는 그 도, 그 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는 전쟁 준비할 필요 없고, 전쟁 연습할 필요 없고, 전쟁을 예비해서 무기를 만들 필요도 없다, 라고 되어 있어요. 5절에. 그것은 하나님의 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것도 승리로 마감되었습니다. 전쟁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굳이 전쟁을 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도 안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를 모르는 사람은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긴장 가운데서 전쟁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바로 그런 예가 되겠습니다. 전쟁한다고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고 고생들을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시온에서 나오는 그 도 안에는 전쟁이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더는 전쟁 안 해도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세계에서 이 전쟁이라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살아 있으면서 죽을 수 있다는 그 실증성,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그 실제성, 그것은 바로 전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도가 없다는 말은 끊임없이 그동안 인간들이 민족과 민족들이 서로 칼과 창이 부딪히면서 전쟁을 해 오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그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나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 아니고 삶 속에서 죽음이 우세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작동중이라는 것을 평소에 있는 삶 속에서도 그것이 느껴지는 겁니다.

사람이 왜 돈을 버느냐? 돈 없으면 죽기 때문에 그래요. 숨 끊어지는 것도 죽음이지만 숨 끊어지기 전에 일단 배가 고파요. 배가 고프고 그리고 날씨가 추운데 돈이 없어서 옷이 얇으면 몸이 으스스 춥습니다. 추우면 감기 걸리지요. 그런데 돈이 있어야 약을 사먹는데 돈이 없어 약을 못 사면 아파서 밥맛 떨어지고 그래서 돈 없으면 그냥 죽지요.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표면에 불과하고 그 깊숙한 두께 있는 그 바탕에 죽음이 깔려있기 때문에 사람은 죽음에 쫓겨서 부지런히 돈 벌어서 살아야 되는 거예요. 뒤에서는 죽음이 덮칠 듯이 따라오고 앞에서는 인간이 그 죽음이 무서워서, 공포가 무서워서 식겁하면서 자기 앞을 향하여 정신없이 내딛고 있는 그러한 양상, 그게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은 미완료된 것이고 뭔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어요. 미진한 거예요. 공포가 각사람마다 막 발산되고 있어요. 표출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가한 오후 시간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면 커피 마시는 그 순간에도 그 양쪽 사람 앞에 죽음이 뿜어내는 공포가 서로 발산되면서 커피 마시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죽음이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죽음에 쫓기는, 죽음이 추적자가 되고 죽음에 일찍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내빼고 있는 도망자 신세로써 사람들이 그냥 분주하게 움직이는 겁니다.

물론 죽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생존에 게을리 해버리면 배에서 꼬르륵, 해서 어린애들도 엄마 밥 줘, 소시지 줘, 이런 식으로, 어린애지만 죽음이라는 것에 쫓기고 있다는 그 두려움이 애들 속에서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그 나름의 어떤 대책 같은 것을 마련하는데 그것은 엉터리 대책이지요. 그 대책이 뭐냐 하면, 아마 신이 있다면, 하나님이 있다면 착한 사람은 좀 더 오래 살 거야, 이런 식으로 해서 죽음에 쫓기는 나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있으니까 그저 착하게착하게, 바르게 살고 주위로부터 좋은 사람이다, 하는 그런 소리 듣고 그것으로 서로 위로받으려고 하는데 그냥 그것은 기껏 위로고요, 죽음은 그런 눈치코치 인간성 일체 봐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말이에요. 죽음을 이미 체포했다는 이야기에요. 죽음을 포획한 거예요. 성경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얼마나 평소에 ‘사는 게 이기는가, 죽음이 이기는가?’ 한순간도 이런 사망의 공포와 공격을 안 받는 순간이 없지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합니다. “죽음아, 우리 게임 끝났잖아. 더이상 나에게 협박 못 해. 나 죽어도 살게 되어 있어. 그런 존재야 내가!”

참……, 성경이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시온산에 하나님의 도가 있는데 그 도는 뭐냐 하면, 그 도에 도달하지 않는 사람은, 시온산에 도달하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죽음의 자리에 그냥 있다는 것으로 들통나게 되어 있어요. 도(道)라 하는 것은 어떤 학원 강사한테 어떤 잔소리, 지식 하나 얻는 게 아니고, 그 시온산이 더이상 죽음이 따라오지 못하는 유일한 장소가 시온의 도예요.

왜 죽음이 따라오지 못하느냐? 그 시온은 죽음의 도를 체포했기 때문에 그래요.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망아, 해서 마치 사망을 뭐로 대하느냐 하면, 사망을 마치 권투선수가 상대방 선수 대하듯이 하는 거예요. “야야 사망! 이리와. 너 나한테 졌잖아. 졌잖아! 부활에게 사망이 졌잖아. 부활이 사망을 이겼잖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망을 이긴 자가 어떤 자냐 하면, 여기에 오징어 게임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게임 할 때 한 여덟 사람 있으면 의자를 일곱 개 놔요.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부르면서 “앉으세요!” 하면 사람은 여덟 사람인데 의자는 일곱 개예요. 엉덩이 들이대면서 막 서로 앉으려고 하지요. 그래 봤자 한 사람은 앉을 의자가 없습니다. 짝을 찾지 못한 거예요. 짝을 찾지 못하면 땡, 탈락이에요.

주님께서 사망을 포획하고 사망을 포획한 그분이 스스로 우리의 남편이 되셔서 자기의 신부 짝을 찾으면 그렇게 짝을 찾은 사람만 남고 나머지기는 다 탈락이에요. 그렇게 해서 개수를 헤아리는 방법이 양자물리학에 나와요. 전자 숫자를 어떻게 세느냐 하면, 이온화시켜서 짝을 만들게 해서 짝을 만들지 않은 나머지는 탈락이 되는데 탈락 되는 그 숫자만 계산해서 전자가 몇 개라는 것을 계산하는 방법이거든요. 일종의 오징어 게임이지요.

그래서 일곱 명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의자 하나 다시 빼버려요. 그러면 또 하나 탈락 나오겠지요. 짝이 없이 홀로 있는 것을 다 탈락하고 나면 남는 사람은 홀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짝을 바라보고, 짝을 감사하고, 짝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부활의 주님과 짝이 된 사람, 부활의 주님의 색시가 된 사람, 신부가 된 사람만이 더는 죽음이 그 사람한테는 이길 수가 없어요. 남편이 대단한 남편이거든요. 남편이 대단한 남편이에요.

이것은 하나의 예입니다. 실제가 아니고 예인데요. 회사의 식품과에 근무하는 아가씨가 그 회사 직원입니다. 남들은 ‘음, 그저 대리 정도, 과장 밑에 있구나.’ 하지만 만약에 그 아가씨의 남편이 그 회사의 사장님이라면, 그것도 사내맞선 본 사장님이라면 누가 그 아가씨에 대해서 함부로 할 수 있겠어요? 남편이 사장님인데. 그 아가씨의 특징이 뭐냐? 더는 전쟁이 없어요. 죽음과의 전쟁은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문제는 과연 이게 하나의 위로조, 그러니까 그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성경이 그냥 위로조로 뭐 그냥 좋은 소리 해주려고 그런 거냐, 아니면 진짜로 부활에 의해서, 생명에 의해서 죽음이 포획되었다는 그런 일이 실제로 있는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성경 보면서 ‘나 성경으로 위로받고 싶어. 뭐 좋은 소리 없는가?’ 이것은 언제든지 자기가 원해서 찾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조작해서 위로받는 것밖에 안 되니까요. 실제로 이 현실 세계가 진짜로 죽음이라는 것, 사망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일에 체포되어서 포획되었느냐 그 말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온 동네 돌아다니는 그 못된 흉악범이 있었다. 겁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유능한 형사가 그 살인자를 체포해서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집어넣으면 더 이상 활동 못 하지요. 지금 그 범인이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살인범이 오면 어떡하나?’ 하고 벌벌 떤다는 이것은 실제성을 완전히 놓친 거예요. 실제로 그게 잡혀 있는가, 하는 거예요. 실제로 사망이 잡혀 있는가?

이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성경 민수기 21장 9절에 나옵니다. 민수기 21장 9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사망이 올 수밖에 없었던 인간에게 사망이 왔던 그 원인부터 제공하고 그 사망을 어떻게 체포했는지, 형사가 범인 잡듯이 “이제 잡았어!” 하고 잡듯이 어떤 식으로 잡았는가가 나옵니다.

민수기 21장 5절에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그 원망의 내용이 뭐냐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자, 아까 제가 말씀드렸는데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다 이것은 뭐냐? 죽음에 쫓기고 있다는 뜻이지요.

민수기 21장 6절에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다.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많은 백성이 죽었다.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나버리면 죽음이 활개 친다. 이렇게 돼요. 죽음이 활개 친다. 못된 살인자가 돌아다닌다. 즉 죽음이 체포되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했어요. 놋뱀을 만드니까 놋뱀 안에 죽음이 포획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그 죽음은 어디 안에 갇히게 되었느냐 하면, 놋뱀 안에 갇혀 있게 된 겁니다.

놋뱀은 딱딱한 거예요. 안에 갇히면 죽음이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놋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놋뱀 쳐다보는 사람에게 아픈 사람도 낫게 하고 그 쳐다보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멈추게 돼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그렇게 몸이 아픈데, 뭐 우황청심환 먹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놋뱀을 만든 거예요. 불뱀은 살아 있지만 놋뱀은 굳어져 있어요. 사물성을 갖고 있으니까. 딱딱한 사물체, 물체니까, 고정되어 있으니까 완료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뱀 모습이냐? 뱀이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이 왔거든요.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은, 너희들이 죽는 이유가 하나님을 원망했던 죄 때문에, 죄가 원인이 되어서 인간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죄 용서하는 혜택이 주어진다면 그 혜택이 주어졌다는 그것이 그냥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어떤 실재성, 어떤 눈에 보이는 실재성을 가지려면 그 죽음을 포획한 어떤 사물체, 어떤 물체성을 갖고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놋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누구든지 몸이 아파도 다 살았어요. 이 놋뱀이 신약에 오게 되면 그것은 사물성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어떤 분으로 인격화되어 버립니다. 그게 요한복음 3장 14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하늘로 사라졌다는, 분명히 이 땅에 사신 분인데 그분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더 이상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린 거예요. 이 실제 역사성, 실재성, 실증성, 이것이 바로 놋뱀의 실재성과 같은 맥락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위로해주려고 “당신이 예수 믿으면 죽음이 오지 않습니다.” 이게 아니라. 우리는 증거 없이는 안 믿잖아요, 증거 없이는.

“죽어도 살래요.” “아니,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을 대보세요. 죽어도 산다는 것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있어서 죽은 내가 부활에 이릅니까? 영생에 이릅니까? 제시해 주세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들이 제시한 것이 뭐냐 하면,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 인자가 옛날에 모세가 놋뱀 들 때 사람들이 그 놋뱀 쳐다볼 때 죽어가던 사람이 죽지 않았어요.

그것은 뭐냐? 죄 알려주고 내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합니다, 를 아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지 않는 결정적 증거로서 놋뱀이 있는 것처럼, 그 놋뱀 안에 죽음이 포획된 것처럼 예수님의 몸이라는 그 놋뱀 안에는 하나님의 죽어도 살 수 있는 용서하는 죄사함이 인격화로 구체화된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나를 믿으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를 쳐다보라, 이 예수님 가신 곳을 놋뱀 쳐다보듯이 ‘주님 저쪽으로 가셨지요?’ 이렇게 주님 가신 방향을 쳐다보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 비록 집안에 돈 없고 그래서 약 살 돈도 없고 하더라도 약 살 돈 없어서, 돈 없어서 굶어 죽을 수는 있지만 그래서 흔히 말해서 굶어 죽었다, 병들어 죽었다, 는 되지만 그런 일이 실제적으로 있지만 그가 죽을 때 공포스러웠다, 는 아니에요. 죽음에 쫓겼다, 가 아니에요. 이미 죽음에 승리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나왔을 때에 대조적입니다. 아주 극한 대조적이에요. 거지 나사로가 죽었어요. 죽었는데 거지 나사로의 죽음이 거지 나사로의 본질을 다 말해주는 게 아니고 그것은 껍질만, 껍데기만 보여준 겁니다. 거지 나사로의 본질은요 죽음을 이긴 자에요. 죽음을 이긴 자 정도가 아니라 죽음으로써 “나 이런 사람이었지롱!” 하고 제대로 보여주는, 본격적으로 자기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자가 거지 나사로예요.

그러니까 죽음을 이긴 자가 잠시 동안 거지 역할을 맡은 겁니다. 물론 개런티 받아요. 하나의 탤런트로서 역할이니까. 늘 거지 아니잖아요. 거지 역할 하고 주께 영생의 상 받아서는, 혼자 살지는 않지요, 주님과 더불어 낙원에서 사는 겁니다.

그냥 좋은 소리 아니에요. 실제상황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비유를 했지만 실제, 그 비유는 실제 그런 일들의 다반사를 주님께서 대변해 대표적으로 보여준 겁니다. 누구나 그렇게 성도는, 예수님과 짝을 이룬자는 누구나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온에서, 왜 그 도가 이러한 죽음을 포획한 도가 왜 하필이면 시온산에서 그게 나오는가? 그 이유는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 원래 이스라엘 나라는 만든 취지가 뭐냐 하면, 이게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도 보여주지만 ‘이스라엘이 멸망 당했다’도, 그것도 보여주려고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창조의 원리가 이사야 45장에 보면 거기 나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죽음도 경험하고, 그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도 경험하듯이 이스라엘도 ‘이래서 인간은 망하고 죽는다’도 보여주고 ‘이래서 인간은 그 망함에서 구원도 보여준다’ 그 양쪽을 이스라엘이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그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된 택한 민족이 왜 망했는가? 망한 이유는 우상 때문에 망했습니다. 우상 때문에 망했어요. 자 이제부터 좀 약간 복잡할 수가 있는데 길게는 하지 않고 짧게 어려운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살려주심이 물체화되었다 했지요. 놋뱀이 물체화되었지요. 그런데 열왕기하 18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이야기인데요.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이 말은, 모세 때 분명히 쳐다보면 어느 누구도, 아픈 사람도, 원망했던 죄지은 사람도 살 수 있는 그 신기한 물건 그 놋뱀이 그 후에 사물성, 물체성 때문에 그게 사람들의 우상이 되고 말았어요. 제가 아까 요한복음 3장 이야기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가, 어떤 신기한 물체가 있으면 그 물체를 내가 소유함으로써 소유된 내가 그 물체로 인하여 이익을 본다는 것, 내가 더 이상 죽음에 쫓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 그것을 사람들은 당연시 여겼어요.

그게 우상이거든요. 우상화된 그것을 섬긴다는 것은 본인 자체가 우상적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시편115편 4, 5절에 보면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인간들이 신으로 나아갈 때 은과 금, 어떤 눈에 보이는 물체성,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우상이다’라고 하고 싶은 그 자세가 하나님께서는 그게 바로 우상섬김이라고 보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고 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신을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는 신을 내가 소유함으로써 그 신을 소유한 내가 살 수 있다, 라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던 그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시편 115편 8절에 보면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인간 자체가 곧 우상이다, 그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곧 우상이다. 예레미야 10장 3절부터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읽겠습니다. 5절까지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8절에 보면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라.” ‘우상의 도’에요. 아까 우리가 처음에 시작할 때 ‘시온의 도’지요. 지금은 우상의 도입니다. 그러면 우상의 도 때문에,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그 말이지요.

인간들이 우상을 섬기게 되면 이것은 소유가 되고요. 그러면 인간들이 그동안 벌였던 모든 이방인들의 그 전쟁이라 하는 것은 여전히 내 안에 내가 결사적으로 지킬 내것이 있다는 그걸 두고 전쟁하는 거예요.

자,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이 죽음에 쫓기는 것은, 이것은 인간은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죽음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죽음에서 도망하는 방법이 뭐냐? 내 것을 많이 가지는 거예요. 내 것을 많이 가지는데 나한테 도움 되는 것은 다 긁어모아요.

그래서 긁어모은 게 나를 위하여 신을 섬기는 것, 그 신을 섬기는 그게 우상인데 그 우상 중에 하나가 아까 이야기한 열왕기하 18장 4절, 하나님께서 신기하게 어떤 물체를 줬는데 그게 놋뱀이었고 그 놋뱀이 이렇게 효과를 보니까 ‘그 놋뱀을 섬기게 되면 그때 광야에서 있었던 효과가 동일하게 나한테 주어져서 나는 더 이상 죽음에 쫓기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말을 이렇게 길게 했는데요,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니까 나는 구원받는다.’ 이게 인간의 우상숭배다, 그 말이에요. 여호와를 우상 숭배하듯이 그렇게 섬기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게 그게 바로 인간이 지옥 갈 이유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되니까, 하나님을 소유하고, 예수를 소유하고, 십자가를 소유하고.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에요, 그게!

자, 문제를 던진 것이 뭐냐? 죽음을 포획한 그 도가 하필 왜 시온산에서 나왔느냐? 그걸 지금 설명 드리는 겁니다. 왜 시온산이냐? 그 시온산은, 사울왕과 다윗왕의 전쟁중에서 다윗이 승리했다는 그 증거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바로 시온산입니다.

그러면 사울왕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사울왕은 이스라엘을 우상화시킨 장본인이 사울왕입니다. 이스라엘 자체를,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나라라고 간주해서 그런 식으로 나라를 통치했던 왕이 사울왕이에요.

사울 왕은 왜 그렇게 우상화되었느냐? 나라 자체를 소유화시켰고 사울왕 때 모든 백성들도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화했어요. 내 것 만들었다 그 말이지요. 사람들이 금이나 은이나 어떤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그 우상 특징은 뭐냐? 내 품에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놋뱀의 경우를 제가 말씀드리면, 놋뱀의 경우는 이미 그들이 죽어 마땅한 자에요. 놋뱀의 혜택을 입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뭔가 가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죽는 자리가 내게 합당한 자리라고 이미 하나님 앞에 된 통으로 당했던 자들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튀어나왔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죽어야 돼. 왜? 죄지은 자는 죽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사망이라 하는 것은 죄지은 자에게 결과적으로 사망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놋뱀의 등장은요, 예상한 게 아니고 놀라운 거였습니다.

‘어? 죽어 마땅한데 주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를 살려주지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창조의 원리에 보면 하나님은 어두움도 만드셨지만 빛도 만드시고, 환난도 만드셨지만 구원도 만드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망도 만들었지만 부활도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창조한 창조가 그대로 영원히 살아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 영생을 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야지 내가, 죽어 마땅한 내가 안 죽고 얌체같이 살아서 내가 영원히 살아 있으면 나의 우상의 나라, 내가 우상화된 우상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하는 겁니다.

사울왕은 나라를 왕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소유성을 극대화 시키는, 자기나라라는 것을 극대화 시키는 짓을 하는데 완전히 그 판을 엎어버리는 식으로 사건화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누구냐? 다윗이었습니다. 그것도 소년 다윗.

사울왕이 가진 것으로 골리앗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벌벌벌벌, 떨고 있었어요. 죽음의 공포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소년 다윗이 등장해서 그 이스라엘 전체가 감히 죽음의 공포에 질려서 이기지를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은 돌멩이 하나로 그 골리앗을 죽여버렸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전쟁을 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없어요. 천국 가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홀로 전쟁해서 그 사망을 포획해 버렸어요. 내가 십자가 져서 내가 십자가 진 공로로 구원받는 그런 것은 이단입니다. 그런 경우는 없어요. 그런 경우는 사기에요. 마귀의 달콤함입니다.

내가 십자가 져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십자가 져서 그 혜택을 우리가 입는 거예요.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그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과 짝을 이뤄야 돼요. 놋뱀을 쳐다보듯이,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고 사망을 포획한 체포일을 주께서 끝냈습니다.’ 끝내리라. 다 끝내버렸습니다. 끝낸 그분과 짝을 이루면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더 이상 우리의 적이 될 수가 없어요.

이 전쟁은요, 나의 적이 아니에요. 나의 소유를 지키기 위한 나의 적이 아니고 이 미 끝나버린 주님의 전쟁이에요. 나의 전쟁이 아니고 주님의 전쟁이에요. 어떤 교회가 개척교회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교인들 이 핑계 저 핑계로 다 빠져버리고 교인 빠지면 뭐 헌금 안 나오지요. 돈이 안 나오잖아요.

그 목사가 새벽 기도하면서 “주께서 목사 되라고 했잖아요. 주께서 개척교회 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진짜 나타나시면 뭐라고 응답하겠습니까? “이 전쟁이 너의 전쟁이냐, 나의 전쟁이냐?” 그러면 목사가 배운 것은 있어 가지고 “이것은 나의 전쟁이 아니라 주의 전쟁입니다.” “내 전쟁은 끝났어, 인간아! 네가 왜 새삼스럽게 걱정하고 염려하느냐!” “교인들 안 오면 저는 굶어죽고요……” “이미 나는 사망을 이겼잖아.”

굶어 죽든, 데쳐 먹든, 찢어먹든, 어떻게 죽든, 우크라이나 들어가서 폭탄 맞아 죽든, 가평 계곡에 떠밀려서 죽든, 코로나 걸려 죽든 간에 그것은 내가 떨어버리지 못한 내 몸을 주께서 알아서 떨어버려 주시는 주님의 뒤치다꺼리였습니다, 뒤치다꺼리! 알아서 떨어내 주시는 치다꺼리에요.

우리가 못 벗는 우리의 껍데기는 압축해서 털어주시고 알맹이는 주님의 색시가 되어서, 신부가 되어서 회사 사장님과 결혼해서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미가 4장 4절에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이 없어요. 전쟁이 없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낙원 안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 낙원이 이사야 51장 2-6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너무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다. 3절부터 보겠습니다. 51장 3절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찬양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그리고 6절에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주께서 그걸 다 이뤄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왜 시온이냐? 다윗이 사울한테 쫓겼어요. 사울은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자체가 자기 소유가 있는 것, 그 소유가 있어야 나는 이 죽음에서 이길 수 있다, 고 얼마나 자기한테 자기 것에 집착해요. 너무 집착해서 나중에 여자무당까지 찾아가요. 사무엘 불러내라고.

내 것, 내 것 없으면 나는 못산다. 내 것 없으면 못 산다. 꼭 치매 걸린 노인네 같아요. 우리 집 쌀 떨어지면 나는 못산다. 내 것 없이는 못산다. 이 소유성은 누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이 정신병자라는 것을 확인해줍니다. 내 것 없이는 못산다.

제가 어제 강남 가는데 누구한테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주 극한직업을 갖고 계시는 분이 있어요. 어떤 극한직업이냐 하면, 암 걸려서 집을 산 사람이 있어요. 보험금을 몇억을 받아서 보험법이 개정되기 전의 일이라 그렇게 되었는데 그다음에 그 사람이 얼마 전에 자전거 타다가 차에 받혔는데 3백만 원 받았답니다.

그래서 내가 듣다가 ‘야 참, 직업도 극한직업이 있다. 자기 몸 다쳐가면서 그렇게 사는구나.’ 보상금 왜 줍니까? 인간세계에서는 돈이 곧 생명이기 때문에. 내 것이 있다는 것이 내가 우상화되는 거예요. 그것이 만약에 무너진다면 우리는 공포에 휩쓸립니다. 내 것, 나는 망하면 안 된다는 것.

거지 나사로가 아니에요. 인간은 꼭 사울왕 같아요. 그 사울 왕에 쫓겼던 다윗은 거지꼴이 따로 없어요. 완전히 거지에요. 자기 것이 없어요. 그냥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아, 내가 널 인도한다.” 그때 나온 것이 시편 23편 아닙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얼마나 부족했으면요, 얼마나 자기 것이 변변한 것이 없었으면 어떻게 여호와만이 나의 목자로 쳐다보고 있었겠어요? 그 다윗이 비로소 차지한 성이 뭐냐? 시온성입니다. 사무엘하 5장 7절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 다윗성은……, 시편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드디어 그 시온산에서 다윗은 자기가 상한 심령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다윗성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우리아 신하의 부인을 건드렸고, 그때 나단 선지자가 등장해서 지적질했고요, 지적질하자마자 금방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그것도 죽을 죄인입니다.”

죽을 죄인인데, 비로소 내가 죽어 마땅한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거든요,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우리아를 내 죄 대신, 죽어야 될 나를 우리아가 대신 죽게 하시는 이것이 이 시온산에서 일어날 주께서 주신 하나님의 도가 되고, 이게 진리가 되고, 십자가의 능력이 되고, 나로 하여금 사망을 포획한 하나님의 진리로 삼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 진리성이 뭐냐? 시편 51편 18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거기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용서하심만 있는 시온성, 그 시온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전쟁을 끝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공포는 없어요. 이미 우리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내 전쟁이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이미 끝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경할 것은 시온산에 갔다가 내려가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 것이 아까워서 ‘이제는 십자가 내가 다 안다. 십자가 내가 다 알고 용서 다 아니까 그래도 나는 내 것으로 나 살래. 그게 내 속성에 맞아.’ 그렇게 시온산에 갔다가 도로 내려가는 사람 있어요. 그 내려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여러분이 쳐다보는 그 즐거움만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일이 있는데 우리는 주께서 하신 일은 관심 두지 아니하고 자꾸 무작정 내 가진 것만 지키려고 하는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병자같은 나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이제는 말씀을 통해서 그게 바로 죽을 죄인인 것을, 우상숭배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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