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가 4:1-2 / 건드려 주심 본문
건드려 주심
이근호
2022년 3월 30일
본문 말씀: 미가 4:1-2
(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4: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오늘 본문에 의하면, ‘마지막 때’, 그리고 ‘여호와의 전’, ‘이방(민족)’ ‘야곱의 하나님’, ‘예루살렘’ ‘(하나님)의 도’ 이 모든 개념들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개념들은 ‘마지막 때(말일)’에 되어야 다 드러날 일입니다. 왜 미리 알려주지 않을까요? 그것은 마지막 때에 모든 원칙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일관성이 있으며 일체 인간들의 예상을 빗겨갑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범주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간의 범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연스러움은 기본적으로 사는 것과 죽은 것으로 경계지어집니다. 즉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입니다. 따라서 이왕 사는데 조용하고 무탈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들이 산과 들에서 마음껏 뛰어놉니다. 결코 어린아이들은 깊은 기독교 교리나 하나님의 존재를 탐구하지 않습니다. 마냥 즐겁고 신나고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때 되면 배고프고 엄마가 맛있게 음식에 고마워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어른이라고 다를까요?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성으로 편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기분전환하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지루하지 않는 인생이고 싶어합니다. 이런 본성에 압박이 되는 사상이나 논리가 주입되면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여기에 기독교 교리 같은 것은 억지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항상 내부적으로 배타적 태도를 안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말해서 “제발 그냥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주세요. 정신적으로 압력주지 말고요! 나 이대로 살다가 그냥 죽을래요”가 됩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기껏 아는 인생 범주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인간들은 자신의 범주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범주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로 이미 결정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즉 인간의 범주는 결코 영생을 얻는 나무 실과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영생이 없는 곳에서 영원히 저주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운명의 영원성은 ‘영원히 영생이 없는 삶’이라는 점에서 슬프고 저주스러운 영원성입니다. 이 원칙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바뀌지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란 이 저주스러운 영원성이 확정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이 요한복음 3:36에 나와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창세기 3:22에 나오는 저주의 원칙이 요한복음 3:36에서 최종적으로 확인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이방인들도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란 그냥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그 범위가 전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저 자기 편한 대로 살면서 가끔은 기분 전환하면서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 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특정한 산을 향하여 질주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이방인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도대체 마지막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 힌트는 시편 68:17-18에 나옵니다. 시온산이 특화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주님께서 높은 곳’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 사람들, 그리고 패역한 자들도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거하신다는 겁니다. 분명히 모든 인간들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인하여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일관된 원칙이 수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왠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있는 것일까요? 그 근거는 오늘 본문 ‘야곱의 하나님’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32:12에 보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라는 존재는 할아버지 되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의해서 나타난 인물입니다. 아브람의 자식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식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내 사라가 있는데 이 아내는 태가 죽은 자입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롬 4:19) 아브라함은 여전히 생식능력이 갖고 있었지만 아내 사라는 자궁이 죽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 자궁을 죽었다는 것은 이미 죽은 아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어준 이름은 ‘아브라함’, ‘많은 이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이의 아비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생겨난 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그 사람이 ‘이삭’입니다. 이처럼 육으로 ‘죽은 자’에서 새로 생겨난 자식인 겁니다. 그 원칙이 야곱 언약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이 이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는 기존의 저주받아야 될 원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영생을 받은 자가 나오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자가 하늘에게 땅에 내려와 ‘생명나무와 선악과 원칙’을 살리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에서 선물을 주면 될 겁니다. 에베소서 4:8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 선물이 곧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한복음 3:36의 원칙도 그대로 살아나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원칙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본인이 구원이나 영생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나 영생의 작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하여 누구나 편하고 자기만의 만족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하는 기존의 인간 본성을 성령님을 가만두지 않고 건드리게 됩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현상으로서 선물을 주신 분을 찾아나서도록 주님이 건드려주십니다. 선물이란 나의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의 것이 아님’을 드러내면서 작용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기존의 인간 연대에 대해서 냉정하게 대처하면서 주님이 오셔서 완성하신 그 영생의 산으로 질주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나를 위한 인생이 성립되지 않음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2강-미가 4장 1-2절(건드려주심)2203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4장 1-2절까지입니다.
미가 4:1-2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시온산이 등장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산들이 있는데 이런 산 저런 산보다도 여기 시온산이 특화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부각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여호와가 찾아오셨던 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성사된 그 성전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 산은, 시온산은 어떤 산이냐?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게 되면 과연 여호와를 만날 수가 있느냐? 예.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면 만나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여호와의 산에 그 누구도 함부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갈 때는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이 야곱의 ‘하나님의 전’이라 해서 야곱의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자들만 그 산에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야곱의 하나님, 야곱이 나중에 국가가 되면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에는 이스라엘 사람만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기 2절에 보면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원래 여호와의 산은 이방인들은 올라가지 못하고 그냥 이스라엘만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그런 높은 산인데 어떻게 이방인이 여기에 끼어들 수가 있는가? 우리가 이점을 알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그 이유부터 아셔야 됩니다. 원래 인간의 범주, 인간의 조건 같은 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확정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선악을 아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설정한 범주에요. 범위입니다. 선악을 알았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22절 계속 보면 하나님께서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그러니까 생명나무 먹고 영생하는 것,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차단시킵니다. 말려서 생명나무의 영생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들을 어떻게 하느냐?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선악을 아는 상태에서 영원히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합니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영원히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는 그 원칙의 영원성에 인간은 매이게 되어 있어요. 그게 인간의 범위입니다. 범주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인간의 범주는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 살다가 그다음에 죽고, 그게 인간이 눈으로 확인될 수 있는 범위의 전부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무엇까지는 모르느냐 하면, 자기가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데 그 존재하게 되는 것이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저주받는 그것이 인간의 확정된 범주, 범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뭐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고 그게 전부고,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이방인들, 야곱의 하나님을, 여호와를 모르는, 야곱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한계점은 바로 그겁니다.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이잖아.’
그래서 오늘 본문을 알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방인들의 의식과 사고방식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다 어렸을 때부터 죽 크잖아요. 두 살도 있고 여섯 살도 있고 다 자라나는데 여러분이 어릴 때를 생각해 보세요. 어릴 때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 세상을 욕심내서 이 세상 좋은 세상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라고 하면 그냥 좋은 세상 되는 게 아니겠어요?
어릴 때 촌에서 놀던 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때는 학원도 없잖아요. 뒷산에 올라갑니다. 뒷산에 올라가면 봄철에 여러 가지 풀도 자라나고 친구들과 오후 내내 뒷산에서 놀게 되면 저녁쯤 되면 저 산밑 자기 집에서 냄새가 올라와요. 연기가 일어나면서. 수제비 끓이는 냄새.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가게 되면 ‘저녁 먹을 때쯤 되었다.’
실컷 산과 들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하면서 뛰어놀다가 저 밑에서 엄마가 “야~! 저녁 먹으로 와라.” 하면 시커멓게 된 옷 채로 내려와서 손 씻고 저녁 먹지요.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사는 게 그렇게 살면 행복하지 않습니까? 제가 계속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수제비 너무 먹어서 배 아프면 “할머니 손은 약~손……” 해가지고 배 쓰다듬어 주면 낫기도 하고요. 그래서 또 잘 안 나으면 엄마가 손 따주면 낫기도 하고, 그래도 안 나으면 읍내에 가서, 부채표를 확인을 해야 돼요, 부채표 가 있는 활명수를 사가지고 먹으면 직방 그만 낫지요.
그냥 조용하게, 평화롭게 내가 할 수 있는 역량대로, 내 식대로 살면 그게 사는 것이고 그게 행복이지 않습니까? 굳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어요? 제가 막 따집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교리가 멀쩡한 사람까지 정신병자 만드는 것 아니에요? 멀쩡한 사람까지 교리라는 게 천국 지옥 이런 이야기, 행함이냐 믿음이냐, 로마서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 다 몰라도 그냥 세월 따라 흘러가는 것 따라 그냥 살면 그게 좋은 세상이고,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죽을 때까지 그냥 사는 거지요, 뭐 제발 좀 조용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면 안 돼요?
‘그런 사조나 사상 그런 것 좀 강요하지 말고, 새로운 사상 그런 것 좀 주입하지 말고 그냥 좀 내버려 둬.’ 어떻게 살든 기독교고 하나님이고 예수 그런 이야기 하지 말고 그냥 사는 대로 조용하게 살면 되잖아요. 욕심 안 부리고. 부딪히는 대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가 되어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지. 왜 안 믿는 사람 이방인 편을 드는가?’라고 하는데 ‘그 이방인들이 그냥 조용하게 살고 평화롭게 좋은 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먹기 달렸고 내가 좋은 세상이라고 하면 좋은 세상이지 뭐 교회가 왜 필요하고 하나님이 왜 필요한가, 그 말이지요.’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녀도 여러분 마음속에 그것이 하나의 맨틀처럼, 물 밑에 잠겨 있는 빙산의 80퍼센트 이상의 생각은 바로 그것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그냥 내 편한 대로 살고 조용하게 살고 ‘이게 나는 좋아. 나는 이게 행복해. 교리고 사상이고 하나님이고 다 싫어.’ 그러면서도 교회는 나오기는 왜 나오느냐? 그것은 뭐 기분전환이지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그냥 매 순간 기분전환 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기분이에요, 그냥. 인간 사는 게 기분이라고요.
새로운 산뜻한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본능이에요. 어릴 때 알지요. 장난감 사주면 좋다고 뛰고 “고마워요!” 하게 되고, 인형 사주면 말 잘 듣고 그렇지요. 이게 왜냐하면 기분전환이니까. 기분이 아주 산뜻해지잖아요.
직장생활 하다가 좀 짜증 나면 돈 모아서 괌이라든지 가고 싶은 거예요. 괌이라는 그것도 좋기는 좋지만 비행기 탈 때 캐리어 끄는 이 맛, 예, 그리고 기내식 음식 먹는 그 맛. 2, 30대 사람들이 그거 왜 합니까? 기분전환인 거예요. 인간은 기분전환 외에 더 큰 진리는 없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기분전환 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미가, 언제 봤다고 미가에요? ‘미가, 요한복음, 이 성경 이딴 것 좀 보라고 강요하지 말고 그냥 나를 내버려두면 좋지 않겠는가? 내 기분 따라 살게 그냥 내버려 둬. 조용하게 좀 살도록 내버려 둬.’ 그러한 본심, 본능이 한순간도 우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살면 되잖아요.
제가 이 이야기 드리는 것은요, 신앙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아무리 빡세게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된다, 그래서 나중에 죽어서 천국은 가야지, 라고 악을 쓰고 발악발악 말씀대로 바르게 산다고 할지라도 역시 밑에서 당기는 것은, 땡기는 것은 도로 우리의 본 자리,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냥 조용하게 살도록 날 좀 내버려 두세요. 나는 나 편안하고 온화하고 소박하고 아늑하고 목가적으로 사는 것, 이게 딱 내 스타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내 인생 윽박 안 질렀으면 좋겠다.’ 그 마음이 50년 60년 교회 다녀도 우리 속에서 소멸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의 하나님이 정한 범주는 인간 맘대로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어요. 미가를 했다고 미가를 알고, 아모스를 했다고 아모스를 알겠어요? 아모스, 미가, 기억하기도 싫어. 기억하기도 싫어요. 본심 자체가 나는 나의 기분으로 사는 것이 본심이기 때문에 이 본심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범벅으로 해서 이걸 아무리 주입시킨다고 그게 달라질까요? 우수수, 하고 다 떨어져 나가요.
인생의 무슨 일 있으면 성경이고 뭐고, 출애굽기고 뭐고 다 기억나지 않아요. 날 좀 조용하게 놔두라, 하는 그 본성만 완전히 발산될 뿐이지요. 그런데 왜 이 성경에 ‘마지막 때에 높은 시온산에 달려 나오는 그런 사람들’이 있느냐? 이 사람들이 이방인인데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게 이방인들의 공통점입니다.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건데 이 사람들이 시온산을 향하여 막 달려옵니다. 평소에 등산이 기분전환에 괜찮아서 등산하러 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성경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조용하게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자기 기분대로 사는 것, 이것은 애부터 90 넘은, 백살 된 노인까지 이것은 변함이 없어요.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자신의 기대와 자기 요구대로 살지 못하도록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인생 자체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내 뜻인데 내 뜻대로 내 소망대로 안되게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어디로 몰고 가느냐? 그들의 한계 끝까지 가요. 그 한계가 뭐냐? 너희에게는 생명이, 영생이 없다는 그 끝까지 가게 하시는데 그 끝까지 가게 하는 그 시기를 오늘 본문 4장 1절에서 “말일에” 끝에, 끝날에, 라는 말을 해요.
끝날에 어떤 기준이 있는가? 그 기준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의 말씀을 드리기 전에 제가 설교 초반에 했던 이야기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본능은 기분전환 하는 식으로 하루하루 그냥 조용하게 살고 싶은 것이 기본인데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확정 짓는 기준이 요한복음 3장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은 마지막 때 터트리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요거 화끈하게 등장시킵니다. 방금 읽었던 요한복음 3장 36절은 뭐냐? 인간의 범주, 인간의 범위 내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이스라엘도 영생에 못 들어오고 이방인들도 영생에 못 들어옵니다. 왜? 그것이 우리가 아까 보았던 창세기 3장 22절의 원칙이 그 원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다시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합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선악을 아는 자는 생명, 영생의 나라에 올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셨지요?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한 번 더 해도 괜찮아요. 선악을 아는 자는 영생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영생의 나라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저주받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 3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주님에게서 무슨 지시, 주님의 일방적인 지시가 있었는데 그 지시에 대해서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고 거기에 반발하고 그 지시에 따르지 않는 자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 이 진노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꿔야 확실히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증오의 대상, 미움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밉다.’는 말은 ‘하나님이 미워! 미워!’ 이게 미운 게 아니고요, ‘하나님, 나와! 당신 나와 싸우자.’ 이게 아니라 ‘나 좀 가만 놔둬. 나 조용하게 살래. 그냥 촌에서 조용하게 살래.’ 흙에 살리라, 있잖아요. 흙에 살리라. 부모한테 효도하고 흙에 살리라. ‘나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딴 거 관심도 없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욕심 없이 그냥 하던 대로 살다 죽을래, 그만! 나보고 뭐 그런 교리 같은 것 좀 강요하지 말고 내비 둬.’
물론 교회 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무슨 재미난 일이 있나 싶어서 그냥 구경삼아, 기분전환 삼아 한번 댕겨보는 그 정도, 그러니까 나한테 너무 윽박지르지 말고 무리하게 요구하지 말라. 그걸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마지막 때 다 들통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면, 이스라엘도 못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영생의 나라에 못 들어가요. 언제? 마지막 때가 되면 ‘아, 이스라엘은 단 한 명도 천국에 못 가는구나.’ 그게 들통나는 날이 바로 마지막 때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릴까요? 그 이유는 아들을 믿는 자가 아직 발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마지막 때 나타나는 마지막 기준에 적합한 자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영생의 나라 생명나무열매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 따먹을 수 없다는 이것이 창세기 3장 22절에 너는 따먹을 수 없다, 라는 그 원칙과 합치되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원칙은 항상 일관성이 있어요.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천국 못 오고 어느 누구도 영생이 없다. 그 원칙 그냥 밀어붙이는 거지요, 그냥.
설교 이걸로 끝낼까요? 그럴 수 없지요. 왜냐하면 마지막 때 여기에 시온산, 하나님의 성전이 시온산에 주어지고 거기에 막 올라가고 달려가는 이방 민족, 물론 이스라엘도 달려가고요, 2절에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이런 자가 생긴다고 분명히 미가 4장 1절과 2절에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미가 4장 1절과 2절에 나와 있는 것은, 이것은 어떤 현상이냐? 이게 마지막 때 나타난 현상이에요.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창세기 3장 22절, 요한복음 3장 36절 의 그 절대적인, 마지막 때 드러나는 그 기준 때문에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때 아무도 구원받지 못함을 분명히 명시하고, 그렇게 분명히 해놓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영생을 얻을 자가, 희한하게도 분명히 아무도 없어야 되는데 그런 자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아무도 없다는 데서, 아무도 없다는 데서 우리 자신은 이스라엘이 되었든 이방인이 되었든 우리는 구원받을 권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 그러면 이 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시편 68편 17, 18절에 보면 그 내막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누군가, 마지막 때 누군가가 와요. 오게 되면 그분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영생을 얻을 자 없음이, 마지막 때 확정된 기준이 확실하게 이렇게 증명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그분이 왔다가 올라가게 되면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라서 영생을 얻을 자가 마지막 때 생겨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그분이 올라가셨다는 것, 9절에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음을 분명히 해주시고 홀로 하늘에 올라가셔서 예수님이 하신 그 공로와 공적에 의해서 선물을 받게 되는데 그 선물이 뭐냐? 성령으로 선물을 받게 돼요. 성령으로 선물을 받게 되면 그 선물을 받은 자들은 선물 주신 분에 의해서 딸려 올라가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딸려 올라가는 방식이 되게 되면 그 올라가는 사람들은 ‘어,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잘 들으셔야 돼요.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구원 안에 구원을 이루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가 구원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더 분명히 해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선물을 주셨다는 그 말씀을 이루는 일에 참여된 자가 되는 겁니다. 구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요, 주께서 주신 선물이 이게 현실이다, 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에 동원된 사람으로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마음속에 뭐가 있느냐? 똑같아요, 불신자하고 똑같습니다. 교리고 뭐고 교리 때문에 온전한 사람도 진짜 이상하게 다 되어버렸어, 교리고 그런 것 나에게 가르칠 생각하지 마, 나는 내 식대로 살래, 그냥 조용하게 촌에서 살든지 도시에서 한 120평짜리 아파트 작은 데서 살래, 차는 한 네 대 정도로 그냥 살래, 하고 싶어도 주님의 하신 일이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건드려 버려요.
“나랑 같이 가자.” “좀! 나는 그런 교리 같은 것은 싫다니까! 미가가 누군지 모르겠고 나는 마태도 싫고, 싫어.” “좀 가야 되겠다. 같이 갈 데가 있어. 가자.” 그 사람은 그때부터 본인이 원하는 대로 될 수가 없어요. 건드리니까, 선물을 주셨으니까요. 가만있는데 인형 주고, 가만있는데 장난감……, 그러니까 선물이라는 이것은 내가 행한 게 없다는 거예요.
그냥 일방적으로 주니까 항상 선물이 그때부터는 내 것이 되는 게 아니에요. 선물은 내 안에 들어오면 이런 고백이 됩니다. ‘내 것이 아닌데 왜 있지? 내 것이 아닌데 왜 이게 내 안에 들어와 있지?’ 여기서부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가 드디어 내 안에서 분명해집니다.
나는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우리 주인님이 나로 하여금 내가 조용하게 살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께서 주신 그 선물이 도무지 갈 수 없고 아무도 갈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분명하고 확정적인데 그 확정적인 그 영생의 나라, 누가 달라 했습니까, 생명나무 열매를 우리에게 따먹게 해서 전에는 저주의 영원성에 있었는데 지금은 생명의 영원함, 그야말로 영생, 생명의 축복의 영원함, 그것을 우리 안에 작동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해당자, 누구한테 주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이 창세기 32장에 나옵니다. 왜 여기서 창세기 32장을 찾아야 되느냐 하면, 오늘 본문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거든요. 야곱의 하나님, 이 말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야곱 개인용으로 주지 않는 약속이 있어요. 그걸 야곱의 언약이라 합니다.
야곱은 오해해서 자기 개인용으로 이해했던 거예요. 마치 선물 받았는데 선물이 이제부터 내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인 것처럼 야곱은 하나님이 언약을 주니까 자기를 위한 언약인 줄 알았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32장 12절에 보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선물, 영생의 선물을 줄 대상자가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언약에 해당 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그들에게만 하나님이 영생의 혜택을 주겠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본인이 애쓰고 노력해서, 촌에서 농사해서 얻은 게 아니기 때문에 출처를 알아요. 출
처가 뭐냐 하면, 야곱의 하나님, 내가 그걸 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어디를 찾아가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다루었느냐, 거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야곱을 사적으로 다루는 그 방식이 오늘날 우리에게 선물을 준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다루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야곱을 이제 찾아가지요. 야곱을 찾아가는데 야곱을 찾아갈 때 야곱이 돌을 베개로 뱄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전, 벧엘이 되는 겁니다. 야곱이 돌 베개를 배었던 그 야곱의 전, 그 야곱의 전에 누가 오느냐? 좀 어렵더라도 짧은 시간에 제가 그 원칙을 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8절에 보면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야곱의 할아버지가 있어요. 그 야곱의 할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이름이 아브람인데 ‘아브람’은 그냥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요. 이것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 많은 무리의 아버지인데 그 당시에 아브라함에게는 아내가 이미 태가 죽어서 애가 한 명도 없어요. 나이가 이미 늙었어요. 우리는 그냥 사라가 나이 늙었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사라가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 4장에 사라의 태가 죽었어요. 여자의 임무는 자궁에 있습니다. 자궁이 죽었으면 그 여인은 쓸모없어요. 자궁이 죽었으면 그 여인은 죽은 자에요. 아직, 아브라함은 아직까지 생식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 하갈을 통해서는 이스마엘을 낳았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에서는 어떤 언약적 요소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육적으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한 명도 없어요.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모든 인간은 선악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위주로 살기 때문에 한 명도 없어요. 그래서 생명이, 영생이 없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생명의 반대말이 뭐지요? 죽음이지요. 그래서 생명이 없으니까 인간은 마땅히 죽은 거예요.
혼자서 촌에서 ‘나 건드리지 마. 조용하게 살래.’ 백날 해도 그는 진정한 저주와 진정한 영생의 범주까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살다가 죽으면 그것이 인생의 범위인 줄 알아요.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범위를 더 넓혀버리거든요. 넓혀버리니까 인간은 살다 죽는 게 다가 아니라 인간은 영원히 저주받는 자 되어야 되고, 영원히 저주받는 것은 영원히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그러한 범위, 생명 범위 바깥 영원한 저주의 범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간들이 알 수가 없었지요.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줘가지고 사래가 죽어야, 곧 태가 죽었으니까 단 한 명도 영생 얻을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오니까 그 죽은 여자가 드디어 거기서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나고 그 이삭에 언약 줘가지고 야곱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의 전을 향하여,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고 그 산에 올라가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어떤 인물이 있고요, 그 인물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율법으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 민족이라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 믿음, 기쁜 소식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인물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서 없는 데서 생겨났고, 이미 죽으심이 확정된 가운데서 그분이 산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 8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등장하면 되지요. 아브라함 자손은 이 땅에 와서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이로써 어떤 인간도 다 죽었고 어떤 인간도 복 받거나 영생 얻을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확정되었지요. 그런데 그분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참, 사흘 만에 부활을 함으로써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서 선물을 주시는 거예요. 그 선물이 뭐냐? 성령입니다.
선물 주는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하는 겁니다. 죽은 나에게 죽지 않으신 예수님의 영이 찾아오는 게 성령세례입니다. 진도 더 나가려고 하니 자꾸 어려워하는 느낌이 들지만 할 수 없지요. 언제까지 더 살겠습니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전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6, 17절에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되어 있거든요.
이것이 아모스 9장 11, 12절에 나오는 선지자의 예언이에요.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선지자의 예언을 베드로, 여기서는 시므온으로 되어 있는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방인들이 올라오는 것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특별배려로, 혜택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신비로운 현상이다, 라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야고보가 오케이, 동의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도행전 15장 15절부터 18절의 이야기입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다윗의 장막의 퇴락, 다윗의 장막이 뭐냐 하면, 바로 시온이에요. 그게 시온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미가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단어들, 개념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요. 시온산 이야기해야 되고, 그다음에 아브라함의 언약 이야기했고, 그다음에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야곱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씨가 많다고 이야기했고, 그다음에 야곱의 하나님의 전이 있고, 하나님의 야곱의 전이니까 그게 벧엘이고,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데 시온에 대해서 끝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마감하겠습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여기 살렘왕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합니다. 시온산을 이야기해요. 이 시온산에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는 거예요. 너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뭔가 새로운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아무도 갈 수 없어요. 이 원칙은 분명히 해야 돼요. 아무도 선악을 아는 자는 생명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 모든 인간은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다 드러나는 그 끝날이 되게 되면 누군가가 외로이 홀로 이 땅에 찾아와요.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찾으실 때 과연 아무도 인간은 영생 얻을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어요. 왜? 예수님을 십자가로 못 박아 죽였으니까.
그런데 그분이 죽고 그리고 인간들은 각자 자기 편한 대로 자기 기분전환 하면서 하루하루 재미나는 일 찾아서 평범하게 살면 이게 인간 사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사는데 그분이 독특하게, 그분은 독특하게 죽었다가 부활하고 말았어요. 여기서 인간은 사달 난 겁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그냥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들로 한결같은 우리에게 도저히 그렇게 평범하게 살지 않도록 우리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제는 내가 원치 않더라도 내 맘대로 못살도록 그렇게 몰아세웁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자가 어디로 질주하느냐? 산으로 기어……, 기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산으로 달려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계신 그 시온산을 향하여 이제 달려가게 된 거지요.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게 된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건드려줘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거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이것은 세뇌한 것도 아니고, 누구의 사상을 집어넣은 것도 아니라, 교리를 집어넣은 것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그 사람을 그렇게 건드린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뭐냐? 킬러입니다. 킬러는 절대로 이 세상과 협상하거나 타협하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에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에게 지시합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이게 뭐냐 하면, 냉정하고 냉혹한 킬러의 심성이지요. 그런데 사울왕이 진멸하기를 원치 아니했지요. 사무엘상 15장 14절에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그들을 내가 분명히 진멸하라 했는데 왜 살려두느냐.
제가 설교 끝으로 이 말씀 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 정말 성령이 왔습니까? 정말 성령이 여러분을 건드렸습니까? 그러면 좀 냉혹하고 냉정한 마인드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킬러, 킬러 있잖아요. 레옹, 사정없습니다. 진짜 세상 사람들이 “네가 성령 받으면 네 애미 애비도 없나?” 이럴 정도로 아주 이것은 내일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레옹이라는 그 킬러도요, 아이와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 인생이라는 게 없어요. 내가 신앙을 소유하네. 아니라니까요. 주께서 자꾸 건드려주니까, 우리는 흙에 살고 싶어요, 정말, 정말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은 우리 자신이 주에게 총 맞아야 되고, 진멸의 대상이 된 이게 바로 우리의 본성인 것을, 이제는 기쁨과 감사함과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내가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달라졌지?’ 본인도 화들짝 놀랄 정도로 늘 놀라면서 나중에 주님을 직접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 작은 것 하나 지킨다고 얼마나 긴장하고, 얼마나 조바심을 내고 아슬아슬하게 ‘행여나 우리 욕하고 우리 집안 누가 해칠까’ 싶어서 늘 불안에 떨던 저희들, 그러나 성령 오셔서 다 이루었고 영생이 있음을 알려주시니 이제는 홀가분하고 냉정하게 주님의 절대적 기준을 증거 하면서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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