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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가 3:1-4 / 불공평한 재판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미가

미가 3:1-4 / 불공평한 재판

정인순 2022. 3. 9. 23:00

음성 동영상 Youtube

 

불공평한 재판


2022년 3월 9일                

 

본문 말씀: 미가 3:1-4

(3: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3: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3)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3:4)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나라 자체가 정육점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은 단순히 선지자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강한 자, 가진 자들이 상대적으로 없는 자, 약한 자를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고 먹어치우고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데 몰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 두령과 지도자들은 ’야곱‘에 속하고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나라로 삼으시는 그 취지와 무관한 게 아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뜻이 표준적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집어넣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에 의할 것 같으면 강하고 부하다고 해서 타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가져올 권리가 없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 22:25-27)

즉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자가 아예 없다‘가 아닙니다.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아무리 어렵고 가난한 자가 발생되더라도 그런 타인의 어려움을 이용해서 자신의 재산과 힘을 증식시키는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께서 가만두고 보지 않고 징벌한다는 원칙이 이스라엘과 함께 합니다.

이러한 이러한 율법적 교훈은 교육과 지식으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위반으로 통해서 현실화됩니다. 처음 이스라엘이 생기고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주어질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이 율법에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에는 가혹한 처벌이 위반시에는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레 26:14-17)

즉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율법을 제시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이런 벌칙이 가해지는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일단 뭔가 갖게 되면 더 줄어들게 하기는 보다는 더 확장하려는 본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 우선 과제가 아니라 일단 자신의 힘을 키워보자는 식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이스라엘 토지에 재앙이나 전염병이나 흉년이나 기근이 들이닥쳐서 제대로 소산물을 내지 못하면서 사회적 경제 불균형은 더욱 심화됩니다. 타인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갖고자 하는 토지나 가옥이나 부동산을 더욱 많이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생각하는 것이 여유있는 자들의 노림수가 됩니다.

가진 자들은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없는 자들은 더욱 없게 되어서 가진 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렇듯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과연 이런 판국에 이스라엘의 두령이나 지도자들은 모범적인 삶으로 돌아서서 다시 이스라엘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런 이스라엘 내의 불균형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나리‘는 있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모세 언약인 율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들은 제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이방나라의 방식으로 선호했고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통치를 원치 않았습니다. (삼상 8장)

하나님께서 여기서 새로운 언약을 준비하시고 이스라엘에 내려주시는데 그것은 특정한 인물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백성들의 율법 준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왕의 율법 준수여부로 종결됩니다. 지도자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기존의 이스라엘은 몽땅 잊어야 한다는 차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특정 왕을 자신의 아들로 간주하시고 세우시는 이유는 (삼하 7:14) ’백성을 위한 왕‘이 아니라 ’없는 이스라엘을 새로 만들기 위한 ‘위한 왕으로 세워놓기 위함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잠 25:2-3)

즉 왕을 먼저 세우고 없는 백성은 나중에 모집하시는 방식을 채택하시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미가 당시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나라가 있다‘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매일같이 소멸합니다. 늘 만들어진 과거 속에서 우리는 연속적으로 죽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시 39:5) 지난 날, 사진첩에 있는 그 젊은 나는 현재에 없습니다. 죽은 겁니다. 없어지는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한 아들을 통해서 왕으로 삼으신 것은, 진정한 겸손은 이 세상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화되는 그 통로에 위치한 왕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근접한 데서 보여줍니다. 다윗의 고백이 바로 이런 겁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2-15)

이런 표준에 비쳐볼 때 이 세상의 모든 구석에서 교만과 교만으로 가득합니다. 가진 자나 없는 자나 ’있음에서 있음으로‘, ’삶에서 삶‘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나귀 타고 나타나신 최종적 이스라엘 왕에 의하면 그분은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란, 몸이라는 껍질 안에 십자가 자신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아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세상 이스라엘은 교만한 자를 하늘의 법정에 피고인으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덫이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가난에 처하든지 부에 처하든지 모두 주님의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9강-미가 3장 1-4절(불공평한 재판)2203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3장 1-4절까지입니다.

미가 3:1-4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찌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미가 선지자가 보기에 이스라엘 형편이 정육점을 운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도살하는 자들이 우글거리는 그러한 형편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은 힘을 마음껏 부리는 자들이고, 그들의 먹잇감이 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런 구조로써 이스라엘 나라가 현재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가 선지자만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런 형편에 있는 것을 어느 나라로 보느냐? 여기 미가 3장 1절에 보면, “야곱의 두령들”, ‘야곱’이라고 되어 있고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이스라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택한 민족, 택한 나라, 이 세상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가 도살자들이 설쳐대는 정육점처럼 그렇게 되고 그런 판국으로 이미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뭐냐 하면, 4절에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찌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찌라도 응답지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고 떠나버렸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떠나버리면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하고 똑같이 되지요. 그렇게 되면 이방 나라의 정치적 상황은 힘이 없으면 무조건 강력한 힘이 있는 나라에 의해서 짓밟히게 되어 있고 능욕당하고 멸시당하게 되어 있는 그 살벌한 게임의 판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야곱이고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 판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줬지만 이제는 그 이스라엘마저 이방 나라와 진배없는 그런 상태에 돌입했기 때문에 ‘너희들 마음대로 이방 나라하고 똑같이 한번 해봐라. 너희들이 얼마나 미약하고 얼마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어느 누구의 밥이 되고 먹잇감이 되는지 너희들은 몸소 그것을 체험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교훈이 고통이 동반되지 않는 모든 교훈이라면 이것은 비현실적이지요. 교훈이라는 것은 고통을 받을 때 진가가 나는 법입니다. ‘아, 이게 진리가 진리답구나.’ 하는 것은 그것을 위반했을 때 이게 등장해서 느껴지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말로는 천 번 만 번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직접 그것을 따먹게 하심으로써 “선악과 따먹지 말라. 그러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러한 저주스러운 삶의 형편이 인류 전체를 통해서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신 말씀은 그냥 농담이 아니고,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진짜 택한 민족, 택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을 들으라는 것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느 정도로 위반상태, 그걸 지키지 못한 상태, 그 말씀과 떨어져 있고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우리 주변에 주어지는 삶의 고통을 통해서 연결시켜 보는 겁니다. 관련지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기능이란 걸 바로 오늘 본문이 제대로 이야기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의 원하는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강자가 약자를 마음대로 살육하는 그 도살장 같은 그러한 광경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대로 보여진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 현실을 만들어가는 핵심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시 한번 모든 인류에게 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본문 보면서 ‘잘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 두령과 이스라엘 치리자들이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통령 잘 찍고 잘 뽑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이제는 우리가 희망찬 미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통 사람들은 나오기 마련인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특징을 모르는 이방나라적 사고방식입니다.

이방나라적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교훈이 뭐냐 하면, 지도자라는 것은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지도자는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된다. 사람들은 이걸 정의라고 하고 이걸 공정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이방 나라, 지옥 갈 이방 나라는 저희끼리 그걸 진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도자라는 것은 백성의 모범이 되는 자들이 아니고 본인이 백성의 종이 되는 자들입니다. 백성의 종이 되는 것, 역삼각형, 역삼각형이에요. 올라갈수록 백성의 종이 되는 것.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위에서 내려오는데 그 내려오는 통로가 지도자를 통해서 내려옵니다.

그러면 이 지도자의 위치가 어떠냐 하면, 계시가 내려오는 그 계시 통로의 목이 되는 그 지점에 있기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취지가, 더 농도가 짙어지는 그 부분에서 지도자를 통해서 구체화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특별한 뜻이 됩니다. 계시 통로가 어디로부터 어디로 내려오는지, 계시 통로를 구체화하는 것.

예를 들면 민주주의 같으면, 모든 인간들은 직접 하나님과 관계가 있기때문에 누굴 통해서 계시가 온다는 그 자체가 우리는 좀 이해가 안 되잖아요.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너만 하나님 아나? 나도 하나님 안다.’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 통로를 언약이라는 그것을 통해서 고정화시켜 놓았어요.

잠언서 25장 2, 3절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면 왕에게 일어나는 변동상황을 유념해 보세요.’ 이런 뜻이에요. 왕을 하나님과 가장 근접한 인물로써 언약적으로 세워놓고 왕이 행동을 어떻게 할 때마다 왕이 하나님께 된 통으로 당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큰 복을 받든지, 그것을 유념해서 백성들은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계시가 집약적으로 농도짙게 오는 그 자리에, 그 통과하는 자리에 왕이 딱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백성은 좀 잘못해도 봐줄 수가 있지만 왕이 좀 비틀어지게 되면 가차 없이 하나님께서는 왕을 때려버립니다. 왜? 감추었던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 왕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구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언약이라 이렇게 해요. 다윗언약.

다윗언약 전에는 무슨 언약이 있었느냐 하면, 모세언약이 있었어요. 모세언약은 왕이 없습니다. 왕이 없고 모든 백성에게 율법,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다 제공되는 거예요. 이것은 왕뿐 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율법대로 살아야 돼요. 이스라엘 전부가 율법대로 살 책무가 있던 그것이 모세의 율법, 모세 언약 이후에 다윗언약이 되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한 사람에게 다 짊어지워 버려요. 한 사람에게, 왕에게 다 짊어지우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징후냐 하면, 장차 하나님이 인간적인 왕으로 오실 징후를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직접 사람 될 게. 왕으로, 너희들의 왕으로 사람될 게.” 그러면 율법대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율법 언약 말고 차후에 다윗언약에서 왕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그러한 체제, 그러한 조건을 하나님이 따로 줬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다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실패해버리면 이스라엘은 소멸 돼요. 없어져요. 그러면 하늘나라도 없는 거예요. 뭐 백성이 있어야지 백성도 없는 하늘나라가 무슨 나라겠습니까?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율법대로 살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가운데서 그걸 대표자로 세우는 거예요.

그게 뭐냐? 왕입니다. 그 왕에게 이스라엘의 운명을 맡기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왕에게 뭐라고 하느냐? “이제부터는 내가 친히 네 아버지가 될 게. 너는 내 아들이다.” 그래서 왕만 아들이고 나머지는 아들 아니에요. 왕이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아들 사이는 가족관계가 되면서 특화,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식으로 앞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가장 짙게 나타나는 그 자리가 왕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뭐 주기도문 지키고 십계명 지키고 그래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에 나오는 다윗언약적 방식이 아니에요. 이미 우리 개개인은요, 이미 버린 몸이에요. 율법에 의해서 안 된다는 사실이 이미 확연하게 드러난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를 주목해야 되는가? 다윗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주목해 줄 때, 주목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왕을 세웠다는 것은, 숨어 있는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통해서 하나님 자기 뜻을 유일하게 드러내는 특화된 자리로써 왕을 지정했다, 그 점을 백성들은 반겨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무능력자니까. 말씀을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는 무능력자로 이미 율법에 의해서 정리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저나 여러분이나 여러분 자신에게 희망 걸지 마세요. 이거 소용없습니다. 희망 걸지 마세요. 그러면 이제 다윗이 하나님을 어떻게 봤느냐? 그게 일단은 우리가 주목해 봐야 되는데 그게 역대상 29장 12절에서 15절에 나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이게 우리가 주목해야 될, 가장 근접하게 하나님의 뜻을 제공받은자 그게 다윗이에요. 이 다윗의 고백이 역대상에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이것은 다윗의 그때의 개인적인 사견이 아니라 앞으로 이런 기준에 의해서 최종적인 하늘나라 왕국이 완성이 된다, 완결이 된다는 하나님의 계시 차원에서 하는 고백이에요. 이 원리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원리원칙이 뭐 였던가요? 방금 우리가 보았듯이 세상의 모든 것 하나 주님께서 다 주신 것이라는 거예요. 모든 것 하나도. 그러니까 부한 자가 부하다가 자랑질하지 말고 가난한 자가 가난하다고 절망하지 말고 우울해하거나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가난하게 하신 것도 부하게 하신 것도 이것은 다 주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고 주님의 손에서 다 받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주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부한 자의 특징은 뭐냐? 부한 자의 특징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가난한 자의 특징은 원래부터 내 것이 아무것도 없네요, 하고 고백하는 것. 둘 다 결과적으로 마찬가지 입장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15절에, 조상들처럼 우리는 주 앞에서 다름없이 나그네와 같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이 말은 늘 만들어지는 과거 속에서 우리는 연속적으로 죽는다는 겁니다. 늘 만들어지는 과거 속에서 우리는 계속 죽어 나가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이 지난날 사진을 한번 꺼내보세요. 사진에 나와 있는 그 인물들 가운데 지금의 나가 있는지? 없어요. 19세 때, 20세 때, 아직 20세 안 됐구나, 그러면 열다섯 살 때 혹은 열세 살 때 사진 속에 있는 나 어디 있습니까?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늘 우리를 토막 내서 매일 우리를 죽게 만드는 그 작동을, 작용을 시간을 주셔서 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머무름이 없다. 우리는 나그네 같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조상들도 그렇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단출하게 줄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시편 39편 5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결국은 10년 살면 10년 전은 다 날아가고, 70년째 살면 69년 다 날아가고, 백 년 살면 99년 364일은 다 날아간 거예요. 이미 없는 거예요. 계속 없음만 질질질질, 흔적만 남기면서 세상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제의 나를 찾는다는 이것은 죽은 자를 찾는 겁니다. 어제의 나는 없어요. 앞에서 당기는 것도 죽음이고 뒤에서 미는 것도 죽음이고.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되어야 되는가?

그것은 왕을 먼저 만드실 때 율법을 줘 가지고 모든 인간은 율법대로 못 지키면 율법의 규칙대로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려요. 죽은 자로서는 하나님의 백성 될 자격이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왕을 주셔 가지고 백성 있고 왕 있는 것이 아니고, 왕부터 만들어놓고 그 왕의 속성을 그대로 분양받고 분배받으면 거기서 새로운 백성이 나오는 거예요. 새로운 백성이. 그 방식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무슨 언약? 그걸 다윗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모세 언약으로 조지고, 다 죽여버리고 모든 인간은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마땅히 저주받고 지옥 가야 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만들어놓으시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자신이 생각했던 진짜 이상적인 하늘나라는 왕을 세우는데 그 왕을 하나님 자기 아들로 삼는 거예요.

아들로 삼아서 그 양자 됨의 영을 받은 자만이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새롭게 부를 수 있는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나라의 왕이나 지도자 두령들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이 그 없는 백성들 등쳐먹지 말고 제대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방금 설교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미가를 보면서 ‘제대로 좀 하지, 제대로. 그것 때문에 표 찍어줬잖아. 제대로 욕심내지 말고 백성의 모범이 되도록 제대로 하지.’ 이렇게 또 대통령에게 희망을 거는 그런 오류를 또다시 반복합니다.

그것은요, 이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 그들에게 뭐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가 한 나라의 권세,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힘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 힘은 욕망과 결합이 되어서 자기 곁에 있는 약한 자들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서 멈추지를 않아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짓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가뭄과 흉년과 자연재앙을 내려요. 자연재앙을 내리게 되면 농사짓는 사람에게 농산물이 생산되지 못하면 거기서 밥 먹고 살기 힘듭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아브라함에게 기근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되었을 때……, 알기 쉽게 말씀드릴게요. 농사짓는 사람이 대출을 받는 거예요. 돈 많은 자에게 빌려요. 예를 들어 60을 빌립니다. 빌려줄 때 네가 내 땅 내 토지에 그 60을 받아서 농사를 짓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가? 농사 망치면 살기 위해서 농토를 부한 자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겨야 돼요.

그러면 자기 소유의 땅에서 농사짓다가 농사가 안되니까 소작농 또는 임대 농부로서 부자에게 예속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부자는 여윳돈이 있으니까 60을 빌려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년에 추수할 때 20의 이자를 쳐서 달라는 거예요. 60을 주고 20을 이자로 쳐주려면 얼마의 생산을 해야 본전이 되느냐 하면, 60가지고 100을 만들어야 본전이 돼요.

60에서 100을 만들면 20은 원래 땅 주인에게 주고, 또 10은 십일조로 제사장에게 주고, 또 10은, 1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번씩 명절에 예루살렘에 방문해야 됩니다, 거기서 성전세라든지 자기 가족의 죄를 위해서 헌물을 드리면 한 10이 또 빠져나가거든요. 그게 얼마냐 하면 30 정도 된다는 말이지요. 30 내지는 40.

그러니까 집주인이 와서 빨리 빌린 돈 60마저 갚으라 할 때 60을 마저 갚을 수가 없어요. 이거 내고 저거 내고 하다 보면. 만일에 60마저 다 가져가면 농사 자체가 없어지니까. 농사짓는 값으로 남의 땅을 대출받았기 때문에. 여윳돈이 있어서 그 땅을 사든지 해야 되는데 맨 농사지어봐야 본전치기에요. 100 생산해 봐야 이것 떼고 저것 떼고 나머지 60 남았는데 그 60은 애초에 내 돈이 아니고 원래 빌린 돈, 상환해야 될 원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날씨가 좋아서 농사가 잘될 것 같으면 본전치기라도 해서 가족끼리 살겠는데 이게 그다음 해에 흉년이 되어버리면 또 빚을 내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아들딸을 노예로 팔아 넘겨야 돼요. 그런 경제적 상황을 오늘 미가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도록 한 그 요인에 있어서 하나님이 한몫 한 셈이 되어버려요.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흘러야 되는데 기근과 흉년과 재앙이 오도록 또는 전쟁이 오도록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조치하십니까, 그런 의문점이 들겠지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느냐 그 말이지요. 그것은 그 전에 선지자들에게 내내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우상 섬기는 것은 모세율법에 위배 되기 때문에 레위기 25장이나 26장에 보면 징벌조항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 징벌조항대로 그 땅에 기근과 흉년과 전쟁이 일어나도록 해서, 심지어 전염병이 일어나서 힘들게 하고 그 힘든 상황이 그대로 가진 사람한테는 영향이 적고 없는 사람한테는 그 영향이 가혹하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갈수록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가진 사람은 아무리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든다 할지라도 이미 가진 것을 통해서 그들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참에 헐값에 그들의 부동산과 토지를 매입할 수가 있어서 그들은 점점 더 부유하게 되는 거예요. 이 욕망, 내가 가진 이 힘의 욕망을 멈추지 않고 강한 자는 주변의 약한 자를 살펴서 더욱 더 그걸 차지하고 싶은 겁니다.

참, 이참에 러시아 자산 매입하면 멋진데요. 지금 루블화가 70퍼센트 폭락했기 때문에. 가진 사람들, 여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욕망,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을 인간은 멈추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은 없는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돈 빌려주고 이자 더 받아먹고 나중에 그들의 부동산까지 점점 차지해 버리면 농토가 점점 늘어나는 겁니다.

소위 국가 안에 계층이 발생되는 거예요, 계층. 흔히 말하는 계급이라 하는데 계급이 발생되는 거예요. 우리나라 탁구가 6부리그까지 있어요. 1부리그, 2부 리그, 3부 리그, 4부 리그, 이런 식으로 가진 자 없는 자, 그 무늬가, 지층이 확 생겨버리는 거예요. 그걸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이러한 지경에 빠지도록 하나님께서 왜 그냥 방치하느냐?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의 징벌이 오고 징벌이 오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충동대로 본능대로 나서기 마련이고요. 율법 지킨다고 먹고 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은 가진 자가 더욱 더 가진 자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자비를 베풀라는 그 여호와의 율법을 더욱더 멀리하기 마련이에요.

왜? 가진 자가 가졌기 때문에 추진력이 더 생긴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상을 섬긴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는가? 더욱더 그 이스라엘에 가난한 자가 많아지는 결과를 야기 시킨 거예요. 여러분 생각에 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것은 나라 꼴이 점점 더 황폐해지고 엉망진창이 되어가지고 가망성이 없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게 바로 이방적 사고방식이고 그게 잘못된 사고방식이에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범죄한 인간들입장에서 보기에 불공정한 재판을, 하나님께서 하늘의 법정을 열었습니다. 인간들 보기에는 이것은 너무나 불공정한 편파적 재판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편파적 재판이 뭐냐? 권력층, 권력을 가졌다는 것, 힘을 가졌다는 그 자체만으로 피고로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이게 하늘나라 법정의 원칙이에요.

누가복음 1장 51-53절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최종 하나님의 재판이 이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교만한 자를 발굴해내고 생산하는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해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가진 자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뭐 경주 최씨 집안은 가졌어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겸손했다.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교만은, 마음이 겸손해서 남 도와주면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인간이 가진 모든 권세와 부함은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뺏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않는 그 구조를 이스라엘 내부에 덫을 놓듯이 그걸 마련했다 그 말입니다. 인간이 ‘나는 마음이 착해서 있으면 더 줘.’ 그런 마음은, 율법에 의하면 그런 의인은 없어요.

모세율법에서 모든 인간은, ‘가졌습니까? 부유했습니까?’ 그 자체가 교만이에요, 그 자체가. 교만 안 할 수가 없어요. 욕망은 멈추지를 않으니까요. 아프리카에 있는 아동들은 돈 천 원이 없어서 말라리아약을 못 먹어요. 돈 천 원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한국 애들 말라리아에 안 걸렸잖아요. 애들 학교 잘 다니고 있잖아요. 건강하게 말라리아에 안 걸린 채로. 겸손합니까?

겸손/교만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겸손의 기준을 만나지 않은 한 모든 인간은 교만해요. 극단적인 최후의 겸손한 자를 만나지 아니하면요. 모든 인간은 자기 딴에 겸손하다고 우기지 마세요. 그거 다 교만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을 이미 죄인으로 규정을 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다 교만하다는 뜻이고 지금 이 두령들과 치리자들은 이미 힘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들 본심을 드러냈지만 가난한 자들이 그 자리에 그만한 돈과 힘을 가져보세요. 그 인간이 그런 짓 안 하겠어요? 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오직 국민만 바라보면서 대통령 합니다.” 하이고, 참!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시가 내려오는 가장 근접한 그 위치, 목이 되는 위치에 왕을 딱 두실 때 그 왕, 아까 다윗의 고백같은 경우는 뭐냐, “나는 마치 이 땅에 머무름이 없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치리자나, 야곱의 두령들이나, 이방 나라 모든 정권 잡은 자나, 모든 자의 문제는 뭐가 문제냐? 나라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라가,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가 아예 없습니다. 무(無)입니다. 없습니다. 없는 나라 속에서만 하늘나라가 나와요. 있는 나라가 개선되어서 하늘나라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있는 나라 가운데서 택한 백성 뽑아내서 없는 나라 새로 구성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선택받은 자만. 휴거하듯이 뽑아내는 거예요. “너, 너, 너, 너! 나와. 미국에서 너 나오고, 중국에서……, 중국에는 없다, 중국하고 러시아는 빼고, 우크라이나에서 너 나와! 아프리카에서 너 나와!”

그들 뽑혀 나온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왜 이 땅에서 아무것도, 개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왜 우리는 교만하고 왜 우리는 건방지게 살아가는지?’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왕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교만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현재 양자물리학에서 그 비슷한 비유적인 사유를 해요. 이 세상 우주는 아무것도 없음에서 나왔다. 아무것도 물질, 입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 입자는 어디서 생겼는가? 원래 파동밖에 없는데, 에너지의 물결밖에 없는데 인간이 관찰하는 순간 그게 입자로 변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그 장(場)을 뭐라고 하느냐 힉스장이라고 해요, 힉스장. 사람 이름 따서 힉스장이라하는데 힉스장의 특징은 뭐냐? 수영장, 풀장 같아요. 수영장 같아서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서 거기서 어떤 입자의 움직임이 있게 되면 어떤 저항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뻑뻑하게 저항을 느끼면 그 저항을 가지고 그걸 무게라 합니다. 그걸 질량이라고 하는 거예요.

힉스장에서 질량은 운동하는데 저항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광자같이 질량이 없는 것은 빛의 속도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보다 약간 질량이 나가는 것은 중성미자(中性微子, neutrino), 소립자 가운데서 z입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미자가 사람 이름 아닙니다. 미약한 입자라는 뜻이에요. 저항이 생기면 빛의 속도보다 떨어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걸 통해서 파악을 하는 거예요. 광자만이 질량이 없고 나머지 입자들은 질량을 가지게 되면 가진 만큼 속도가 떨어지니까 입자를 발견할 때 그런 식으로 파악을 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살 때 아까 머무름이 없다 했지요. 나그네 같다 했지요. 다윗이 말하기를, 다윗이 고백하기를. 하늘나라 성도의 특징은 과거를 자기가 계속해서 없어지는 존재로 보는 거예요. 심지어 오늘도 내일 되면 없어지는 존재예요. 나의 질량감이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만 살아계시면 돼요. 왕만 살아계시면 되는 거예요.

왕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살아 있고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매일같이 삭제되어서 소거되고 없어져도 이것은 살아계신 주님에 의해서 제대로 일하신 하나의 증거로서 그걸로 우리의 의미는 충족된다는 겁니다. 내가 죽어 없어지는 이것이 살아계신 주님만 지금도 살아서 일하심을 증거한다면 그걸로 우리는 오케이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권세자는 이 땅에 오실 때 있는 것 같은데 갈수록 점점 더 없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1장 4, 5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왕이신데 ‘짐승의 새끼’ ‘겸손하여’라고. 그 나귀의 뜻이 뭐냐? “그는 겸손하여 나귀……” 스가랴 9장 9절에 있는 선지자의 말씀을 마태복음 21장 4절과 5절에서 인용하고 있어요. 그 타신 분이 누구냐 하면,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가장 높은 곳에서 찬양받아 합당한 분이 이 땅에 오니까 이 땅의 속성을 완전히 드러내는 방식의 새로운 변형되는 왕의 모습인데 그 왕의 모습이 뭐냐? 점점 쭈그러드는 모습이에요. 낮아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습니까? 아니지요. 이제는 나귀도 날아가 버려요. 나귀 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 죄인이 지는 십자가 형틀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하는데 그 모습이 뭐냐? “종의 형체를 지니사” 종의.

진정한 하늘나라의 왕, 모든 인간은 죽은 인간인데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아들로 규정한, 다윗언약에 준해서 나타나신 진짜 하나님의 독생자는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모든 인간이 기피하는 십자가의 죽음 자리에 가셨습니다. 따라서 백성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지도자부터 먼저 생겼어요. 왕부터 생겼습니다.

그러면 백성은 어떻게 만드는가? 요한복음 5장에서 그 왕이 자기 백성을 지목하고 선택하지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누구 이름으로? 예수님 본인의 이름으로 지목하고 선택합니다. 그렇게 발생된 그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데 그 성도의 특징은 뭐냐? 그 성도의 특징은, 모습은 인간의 모습으로 껍데기, 껍질을 하고 있지만 속에는 복음만 가득 들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없어요.

복음만 가득 들어 있다는 것은 복음을 내내 소지한다는 말이 아니고 복음이 운용되고 운용, 복음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같이 딸려 들어가는 그러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아까 다윗의 고백처럼 나그네처럼 사라져주는, 복음만 드러내고 사라져주는 사람의 모습, 그게 바로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그러면 그 성도를, 세상은 그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가? 갈라디아서 5장 10절에 보면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아무것도 없이 오직 복음만 들어 있어요. 십자가 복음만 들어 있다는 말은 왕이신 주님만이 우리의 왕이고, 나는 백성인데 주님이 왕이 되어서 건져왔다는 뜻이 아니고요, “나는, 백성은 없었는데 왕이 먼저 계셨고 그 왕에 의해서 새로이 십자가로 인하여, 은혜로 인하여, 긍휼로 인하여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접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내용만 들어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심판해버린다는 겁니다.

끝으로 바로 이러한 원리원칙은, 처음에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그들은 전부 다 고아였고 과부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에요. 그 고아와 과부 같은 이스라엘을 건드리면 내가 그들은 저주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출애굽기 22장 25-27절에 나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려서 다 같이 골고루 평등하게 사는 게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한쪽은 잘살게 하고요, 잘사는 현상 그리고 한쪽 못사는 현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놓고, 잘살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더욱더 탐을 내는 그런 방식의 덫을 이스라엘 내부에 그걸 깔아놓은 거예요. 잘 걸려들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들 보기에 불공평한 재판이에요. 하나님의 재판이 부한 자 가진 자를 애초부터 작심하시고 피고로 처벌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그 재판정이 이스라엘을 토해서 드러난 겁니다. 뭐 인간들이 말하는 공정함, 공정한 재판은 없어요. ‘부자 잡아라.’ 부자 잡고, ‘가난한 자 잡아라.’ 왜? 그들은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부하다는 이유 때문에 낙타가 바늘구멍 못 들어가는 것처럼 지옥 가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처음부터 부자 되고 싶어 했어? 네 속에 마귀 들었잖아. 처음부터 왜 권력을 잡으려고 해?”

이야기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요, 자기 남편을 장관 만들기 위해서 새벽기도 나온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왜 교만하게 새벽 기도해서 남편을 장관 만들고 차관 만들고, 왜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장관 되든 안 되든 간에 의도 자체가 이게 바로 교만하잖아. 네가 율법에서 처음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을 못 하잖아.”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신 겸손하신 왕으로 오신 그분이 우리에게 왕의 마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에 의해서 아무것도 없이 그냥 주님을 증거 하라고 복음을 받은 그 자체 그걸 가지고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것이 심령이 진짜 가난한 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만든 이유를 깨닫게 하옵소서. 그들은 이 세상에 심판하는 덫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나라고 어느 누구도 그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십자가만이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물고 저희들을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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