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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80강, 381강) 후회, 완료와 종료 / 220222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380강, 381강) 후회, 완료와 종료 / 220222

정인순 2022. 2. 23. 09:02

380강                  음성               동영상

381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80강-YouTube강의(후회 사무엘상 15:11)20220222-이 근호 목사


제380강, ‘후회’. 보통 후회는 사람들만이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도 ‘후회하신다’ 라는 말이 나와요. 사무엘상 15장 11절에 보면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사무엘상 15장 35절에도 같은 취지입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후회와 비슷한 말씀으로 또 하나님께서 ‘한탄하신다’ 그 말씀도 창세기 6장 5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렇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 한탄하신다’라는 그러한 마음을 나타내는 그 무대가 바로 인간이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네보고 후회하시고 한탄하시고 탄식하시는 거예요. 하늘나라보고 후회하고 탄식하고 그런 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을 보시고 후회한다, 탄식한다, 근심하사, 걱정하신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후회한다는 마음을 혼자 간직하고 품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계시로 발설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들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자, 사람이 자기가 어느 정도의 존재인지, 가치인지 인간이 스스로 파악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평가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항상 좋게 보는 버릇이 있어요. 스스로 자기를 제거하고 싶지는 않은 겁니다. 그만큼 살려고 노력했고 애썼기 때문에 자기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없애버릴 그 정도는 아니라고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인관계에서 누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대들고 변명하고 핑계하는 것이 그게 뭐 자연적인 본성이죠. 이번 동계 올림픽 때 한국 선수단이 메달 판정 시비하니까 중국에서는 ‘아이고,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던가요? 아니죠. 강력하게 방어하죠.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알려고 해도 항상 자기를 좋게 보는 그 한계선에서 진도가 더 나가지를 않아요.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은 뭐냐?

그것은 인간으로서 닿을 수 없는, 인간으로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에 계신 분이 인간자체를 제대로 지적해줄 때 비로소 인간은 ‘아, 저게 나의 진면목이구나. 진짜 모습은 내가 스스로 내 모습 보면서 결정짓는 게 아니고 외부의 단호한 시선으로서 나를 봐야 비로소 내 자신을 아는구나.’ 그런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고 하는 말이, “참 한심스럽다. 어느 정도로 한심스러우냐. 내가 너 만든 것 자체를 후회할 정도로 한심스럽다.” 라고 하시면서 ‘후회’라는 말을, “이 인간들아. 너희들은 어떤 경우에 후회라는 말을 사용하는지 너희들이 잘 알고 있잖아.”라고 인간들이 쓰는 단어 개념을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의 심정을 전달하는 그 방법에다가 넣어서 인간에게 되돌려주는 겁니다.

후회한다는 말은 인간들끼리 쓰는 말이거든요. 그 말에 하나님의 심정을 담아서 끼어드신 거예요. 그래서 이 ‘후회’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뭐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걸 아시는 분이 후회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순 아니냐?’ 이렇게 따질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 자식은 누가 낳은 거예요? 부모가 낳았죠. 부모가 낳았으면서도 자식 하는 꼴을 보고 ‘참, 내가 너 낳은 것이 후회스럽다.’ 라고 할 때는 지금 무르자는 이야기에요? 뭐 엄마가 돼서 자식을 아주 없애버리겠다는 그런 단호함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죠. 똑바로 해, 똑바로. 부모의 뜻이 뭔지를 똑바로 알아. 여기에 대한 아주 강력한 부모의 의사전달입니다. 그렇죠?

‘나 너 낳은 것이 후회스럽다.’ 할 때 자식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후회스러우니까 결국 내가 엇나가도 이건 뭐 내 잘못 아니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당신 잘못이네요.’ 이렇게 헤헤거리라고 그 말씀 주신 게 아니잖아요. ‘아, 난 책임 없구나. 부모가 잘못 낳았다고 부모가 스스로 반성하네. 그러면 그 반성에서 나는 빠져도 되겠네.’ 지금 그런 태도를 가지라고 부모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죠.

물론 뭐 반듯하게 산 사람한테 부모가 ‘나 너 낳은 것을 후회한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이런 부모는 있을 거예요. 아주 불도(佛道)가 심한 그런 부모가 있는데 자식이 만약에 복음에 빠졌다. 그런데 부모가 기독교를 너무나 싫어한다면 ‘난 정말 너 낳은 것에 대해서 후회스럽다.’ 그 이야기 할 때 자식이 그 이야기 듣고 ‘예. 늦게나마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이제부터 교회 안 나가고 복음을 철회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제대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겠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세우신 것을 후회한다 하실 때 이 후회하는 것에 대해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자기들 인간 사이에 하나님은 어떤 관점으로 인간을 보시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가슴을 치는 식으로 인간에 대해서 인간을 보고 있던 그 본(本)모습, 본(本)심정을 그렇게 애타게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너무나 인간적인 표현을 했잖아요, 후회한다고.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다 아시는 분이 아니고 뭐 무지하신 분이네. 자기가 세워놓고 자기 계획에 스스로 차질을 서슴없이 자인했다면 우리는 그렇게 불완전한, 전혀 예측도 못하는 그러한 온전치 못한 하나님을 우리가 과연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느냐?’ 이런 식으로 나오라고 후회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에요.

아마 ‘에이, 하나님도 모르는 게 많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진짜 나는 그런 소리하는 너를 후회한다. ‘후회한다’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내 사람 될 수 없다’ 그런 뜻이죠. 나 있는 곳에 있지 말고 그냥 버려버리죠. 저리 가라. 나 있는 곳에 너는 못 와. 단호하게 처리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 사울 왕은 나중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마, 악신이 임했다는 사실을 아시죠.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늘 주시하신다는 거예요. 주시하시면서 그냥 주시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우리에게 털어놓는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381강-YouTube강의(완료와 종료 요한복음 19:30)20220222-이 근호 목사


제381강, ‘완료와 종료’. ‘종료’라는 말을 영어로 하게 되면 알기 쉬워요. 파이널(final). 노래 자랑할 때 예선, 준결승할 때 제일 마지막 라운드를 파이널 라운드라 하죠. 노래 대회 할 때 결승전 파이널 끝나면 지구 멸망합니까? 아니죠. 그렇죠? 동계 올림픽 결승전 하게 되면 올림픽은 끝나는데 이 세상이 불바다 되는 겁니까? 아니죠.

인간들은 항상 종료라는 것을 생각하는 이유가 ‘올림픽 끝나고 다 같이 망하자. 다 같이 불에 타 죽자.’ 그것 때문에 올림픽 하는 게 아니잖아요. 올림픽은 비록 종료 돼도 본인의 삶은 종료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실제로 또 더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늙어죽는 한이 있다할지라도 내가 죽는다 해서 내 자식들이나 내 모든 친구들이 나와 같이 세상 모두 끝장나는 건 아니죠. 물론 옛날 왕들 가운데는 순장제도가 있어서 자기 왕 죽으면 나 죽는데 너네 사는 게 꼴 보기 싫어서인지 왕 죽을 때 왕 부인들하고 충신들까지 해서 묘를 작게 만드는 게 아니고 크게 만들어서 산 사람을 집어넣어요. 그 산사람한테 양식 한 보름치 줘서 왕은 이미 죽고 난 뒤에 왕가에 있었던 가족들과 같이 묻혀가지고 거기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현대적 인권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무지하고 너무나 잔인한 짓이죠.

그런데 위대한 분이 죽는데 그 위대한 분과 절친하거나 그 사람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왕 목숨의 연장으로 봐서 왕 죽는데 네 목숨도 이젠 더 이상 살 이유없다해서 ‘왕 따라 가거라. 그것이 더 명예스럽다.’ 라고 같이 죽인 겁니다. 왕 죽고 난 뒤에 다음 세상이 있건 없건 간에 왕 자체적인 그 구역, 영역, 왕 고유의 기억 전체를 왕의 죽음과 함께 같이 없애버리는 그런 제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멀쩡할 때는 이 세상에 어떤 축제가 있다든지 아니면 같이 파티를 열 계획을 한다하면 ‘아, 내가 그날 참석하면 좋겠다.’ 하고 기분이 좋고 업 되고 우쭐거리겠죠. 그런데 만약에 친구끼리 파티를 열기로 한 1주일 남겨놓고 자기가 맹장수술을 한다. 그래서 병원에 한 2주 있어야 된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2주 후에 내가 다 낫고 난 뒤에 그때 파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들겠죠.

결혼식 할 때 나는 남편이고 아내가 있다면 둘이 결혼식하게 되어있는데 내가 갑자기 결혼식 1주일 앞두고 차사고 나서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면 아내 혼자 결혼식장에 행진해가서 주례 앞에서 결혼식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하지 못하죠.

그처럼 인간은 말할 때는 나는 내 주장만 하고 내 생각만 하지만 인간이 내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무조건 내 주장에 따라야 될 사람들을 자꾸 붙잡아두는 경향이 있어요. 혼자 죽을 수 없다 뭐 그런 뜻이죠.

만약에 친구가 파티를 여는데 나는 지금 아픈 걸 뻔히 알면서도 10명인데 9명 자기들끼리 좋다고 웃고 떠들고 뭐 재미나게 지내면서 그걸 그냥 지내면 되는데 그걸 또 동영상 찍어가지고 아픈 나한테 떡 보내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요? ‘내가 너네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나 빼놓고 잘들 노는구나. 그렇다면 이 모임에서 나는 있으나마나한 그런 존재다 이 말이지.’ 하고 갑자기 울화가 터지겠죠. 분노가 나겠죠.

가족들 가운데 그런 경우 있어요. 시어머니가 자기 생일 아는지 모르는지 딱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가르쳐주면 될 것을 며느리가 직장 생활 바빠서 잊어버렸다. 사전에 잊어버린 티가 나잖아요. 그럼 알려주면 되는데 시어머니가 이참에 너 한번 혼나봐라, 해가지고 생일날 안 알려주고 자기 혼자 미역국 끓여서 먹지도 않는 막걸리 가지고 화를 내면서 ‘이래도 너 눈치 못 채?’이러고 불퉁하게 있으면 이것은 사태를 더 키우는 거예요.

그냥 알려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시어머니란 내 존재가 너희들 앞에 이렇게 하찮다 이 말이지. 너희들 자식새끼 생일은 챙기면서 이 어른 생일 하나 못 챙기나? 너희들 한번 나 화내는 거 봐라.’ 이렇게 돼버리면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겠죠.

그래서 이 ‘종료’라는 말은 인간은 끊임없이 종료하고 난 뒤에 또 다음 일 꾸며가지고 종료시키고 파이널, 종료, 종료,... 이런 식으로 인간들은 살아가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사적인 종료를 통해서 기뻐하고 그다음에 또 기뻐할 거리를 또 따로 만들어서 또 종료시키고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위해 또 일 벌리고... 이런 식으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대해서 거기에 무슨 의미를 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안 두죠.

하나님께서는 사적인 종료가 아니라 주님의 약속의 종료만 준비해놨어요, 약속의 종료. 이 약속의 종료, 완료, 완성. 세상의 모든 주의 계획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면서 결국 끝내 이루리라. 다 이루리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이 마태복음, 마가복음과는 조금 달라요.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에요. 여기에 다 이루었다는 것이 종료입니까, 완료입니까? 어떻습니까? 사적인 종료가 아니고 완료된 거죠. 완료에요.

그런데 이 완료를 제자들도 몰랐고 성령 받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것의 완료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성도의 할 일이 뭡니까? 내가 물을게요. 둘 중에 하나 골라보세요. 사적인 파이널, 종료입니까? 완료입니까?

어느 쪽으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완료에요, 종료에요? 개인적인 내 파티 여는 것이나 내 인생계획을 종료시키는 그것입니까, 내 목적달성이에요? 아니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하신 일의 완료입니까? 완료죠.

자꾸 사적인 일의 종료를 하는 사람은 ‘이번 하는 내 일이 잘 됐는데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남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라는 게 있지만 완료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나를 무시하든 내 말을 듣든 안 듣든 관계없이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에요. 엄연한 사실이고 십자가에서 분명히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었다”했죠. 내가 이야기를 한들 안한들 관계없이 현실 자체가 주님께서 다 이루신 거예요.

그러면 적어도 성도라면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는데 남이 안 알아줘서 짜증난다.’ 이러지 마시고 ‘나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놀러간다.’ 이러지 마시고요. 우리의 기쁨은 종료가 아니고 완료에 있습니다. 애 셋 놓고 나는 종료다. 그 의미보다도 내가 애 셋 놓고 이제 그만 놓는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 거침없기를 바랍니다, 거침없기를.

지금 케이블 방송에 3월 9일 선거하는 데 집중하잖아요. 전부다 선거 얘기잖아요. 선거해봐야 그건 완료가 아니고 종료입니다. 선거해봐야 2년 후에 또 국회의원 선거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뭐 완료 없이 그냥 종료들만 연속되는 그런 세상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죠. 성도는 최종진리를 다 알아버렸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어요. 그 다 이루심 안에 무엇이 다 이루어지는가. 우리 자신의 미래와 운명도 십자가를 아는 순간 다 이루어진 거예요.

이 십자가, 주께서는 일을 손 털었다는 것,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에게 부담 없이 누구한테 주눅 들지 말고 마음 조이지 않고 신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개의치 말고 진짜 전할 진리를 전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십자가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