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84강, 385강) 접붙임, 다른 존재 / 220322 본문
녹취:이하림
384강-YouTube강의(접붙임 로마서 11:17)20220322-이 근호 목사
제384강, ‘접붙임’. 접붙임은 원래 둘이 따로 떨어져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서로 다른 운명을 갖고 있는 두 부류의 집단이 있는데 그중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한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다른 한쪽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집단이 되는 거죠.
이것은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개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한다, 자기가 인생을 만들어나간다고 학교에서 또 주위에서 그렇게 알고 있는데 성경에 나온 이스라엘 역사를 보게 되면 그것은 이방민족, 그러니까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자기들끼리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들을 이방인이라 하는 겁니다, 이방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구원했다는 말은 이방인 집단은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에서 탈락되는 거예요.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방민족에게 있어서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의 안목을 알려고 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버림받았다’ 하는 그 사실을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그것부터 세상을 출발해야 돼요.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자가 천국 가려하는 모든 시도는 어떤 시도를 해도 그것은 왜 너희들은 구원되지 못하느냐를 도리어 제대로 보여주는 증거들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 가운데서 각자 서로가 하나님을 향하여 노력해보자, 열심을 내보자, 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지 한번 시합 붙어보자, 경쟁해보자, 이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무엇이 빠져 있느냐 하면 접붙임이 빠져있기 때문에 그래요. 접붙여주지 아니하면 그들은 구원 노선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접붙임이란 이미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접붙임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구원에서 배제되었다는 말은 이방인 주제에 아무리 노력하고 착하게 바르게 살고 성경대로 지킨다할지라도 그것은 왜 구원받지 못하냐를 도리어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만 계속해서 드러낼 뿐이에요.
예를 들면 노선이 다른 두 개의 버스가 있다 합시다. 한쪽은 천국 가는 버스인데 천국 가는 버스 안에서 애들이 막 시끄럽게 떠들고 장난치고 싸우고 이래요. 그런데 다른 한쪽버스는 방향이 지옥 가는 버스에요. 지옥 가는 버스 안에서 애들이 착실하고 성경 공부하고 오늘은 주일이니까 예배드리고 말 잘 듣고. 선생님이 조용히 해! 하면 예, 하고 조용하고. 열심히 공부해야지, 예. 서로서로 이웃을 사랑해야지, 예.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예. 아무리 한들 그 버스 자체 방향이 지옥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 나오는 결론은 간단해요. 이방인 중에서 구원될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그렇게 돼줘야 하나님의 택한 자만 구원된다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그 원칙이 두각을 나타내는 거예요. 이것은 개인적으로 구원에 얼마나 희망과 열심을 내느냐 하는 것과 아무 소용도 아무 관계도 없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원리원칙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방인 가운데서 구원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선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구원 안 되는 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합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몇 군데이고..., 교회 몇 군데 소용없어요. 택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세우든 기도원을 세우든 선교에 열심내도 소용없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게 되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돼요. 그러면 그 이방인들은 어디서 발생된 것인가. 천국 가는 그 버스가 가는 도중에 이방나라 노선으로 차 사고를 일으켜서 박치기를 했어요. 두 개의 버스가 충돌한 거예요. 옆구리를 치고 들어온 겁니다. 이스라엘 버스도 박살나고 이방인 버스도 박살났죠.
차 옆구리가 박살나서 찢어졌으니까 원래 두 대의 버스였는데 그 가는 방향이 편차가 커서 각자 벌어져야 되는데 이스라엘 버스가 이방민족을 좋아해서 우상을 섬겨가지고 버스가 제 방향 가지 않고 이방나라 쪽으로 와서 박치기를 해버린 거예요.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버스가 옆구리 터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가운데서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배제되어야 되는 사람들은 이방인 쪽 버스에 확 몰려 쏟아지고 그다음 본의 아니게 이방인으로서 운명 자체가 지옥 가야 되는 것인데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충돌이 되어서 이게 내 버스냐 저게 내 버스냐, 구분도 안돼요. 충돌되고 난 뒤에 정신이 없어가지고. 그래서 떼구르르 구르다 보니까 이스라엘 버스 쪽으로 몸이 기울었네요. 들어와버렸어요.
두 대의 버스가 하나로 접붙임을 받은 거예요. 섞여버렸어요. 섞이고 난 뒤에 기절했다가 이제 정신을 차린 이방인이 “이게 어디 가는 버스에요?” 물으니까 “여기는 천국 가는 버스인데요.”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사람이?” 그러니까 이스라엘 버스 운전사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만 간답니다.”
“그 은혜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은혜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용서하기로 아버지와 약속이 되어 있어서 이미 택한 자에게는 그들의 죄를 의로 바꾸어주는 조치가 천국 가는 버스 안에서는 이미 작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선택된 자에게 주입되는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라는 이야기가 천국 가는 버스 안에 퍼져 있는 거예요. 기절했는데 깨보니까 그런 소리 나오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서 저 천국 가는 버스 타볼까, 해서 탄 게 아니고 충돌된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에 탔던 그 사람들은 지옥 가는 이방민족 차로 떼구르르 굴러서 빠졌는데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다는 그쪽으로 쏠리는 거예요. 그들은 육적으로 이스라엘이지만 한번도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었던 겁니다. 잘만하면 율법을 지키게 되면 자기 의를 축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결국 제 이야기가 로마서 11장 17절에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꺾여진 게 사고 난 거죠.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이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데요. 그렇게 되려면 사고가 일어나야겠죠. 그 사고를 유발시킨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고 그 사고가 뭐냐? 바로 십자가 사고에요. 십자가라는 인간이 하나님을 죽이는 그 사고. 하나님이 인간하고 충돌해서 죽어버린 그 사고.
그 사고의 현장이 유일하게 용서하시는 은혜가 터져 나오는 하나님의 생명의 샘이 되는 겁니다. 그게 진액이에요. 그 진액이, 그저 모든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는 그 진액이 터져 나오는 그곳이 바로 천국 가는 버스.
그것이 로마서 11장 26절에서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385강-YouTube강의(다른 존재 이사야 1:18)20220322-이 근호 목사
제385강, ‘다른 존재’. 인간보고 존재라는 말을 쓸 때는 ‘너 다르고 나 다르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통합적으로 ‘아이고, 존재야 이 인간아’ 할 때 통합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존재라는 말을 쓰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이죠. 그러니까 존재로 말을 바꾸면, 인간은 인간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두 똑같은 존재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전부다 이의가 없고 동의를 해요. 그럼 인간 사는 것은 고만고만하죠. 별다른 인간 없다 이 말이죠.
다만 별다른 인간은 없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생각에 남들을 서열화 시키고 측정해요. 저 사람은 성공한 사람, 저 사람은 실패한 사람. 그러한 서열, 계층, 계급은 누가 내리느냐 하면 본인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내립니다.
그런데 그 서열화, 계층화할 때 저 사람은 나보다 잘 살고 나는 못 산다 할 때 어떤 마음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비록 나는 너보다 못 살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내가 노력하게 되면 네 수준만큼 따라 붙일 수 있어. 나도 너처럼 잘 살 수 있어.’ 라는 희망을 인간은 늦추지 않습니다. 희망마저 인간은 버리지 않아요.
‘그래 아이고, 잘 사는구나.’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도 너처럼 되면 참 좋겠다.’하는 희망을 피력하는 겁니다. 나타내는 거거든요. 인간 존재는 그 인간 존재 안에서 다 같은 인간이니까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 나도 운 좋으면 너처럼 될 수 있어. 나도 좋은 집안에 좋은 부모 만나면 너처럼 이렇게 으스대며 살 수 있어.’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아, 나는 참새가 되고 싶어.’ 이건 뭐 정신 이상자도 아니고 희한하죠. ‘나는 참새가 되고 싶어. 나는 옥수수가 되고 싶어.’ 그건 뭐 미친 사람이죠. ‘나는 나중에 대통령이 될 거야.’ 이걸 미쳤다고 하지 않죠. 왜냐하면 대통령이나 나나 같은 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데 ‘옥수수가 되고 싶어. 나는 참새가 되고 싶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네가 될 수 있는 걸 이야기하라.’ 대번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할 수 있는 걸 하라,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까 제 말은 어떤 존재로 구역을 치면 절대로 인간은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고만고만하죠. 뒤떨어진 존재, 앞서간 존재. 성공한 존재, 인생 낙오된 존재. 같은 존재이지만 그 안에서 서열화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네 인간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상상도 못한 거죠. 같은 인간 존재 안에서는 노력하면 따라 붙일 수가 있어요. 연속적일 수 있단 말이죠. 물론 힘든 건 맞아요. 노력하다 나중에 늙어죽을 수도 있고 아파 죽을 수도 있고. 나중에 ‘분하다. 결국은 내 원대로 안 됐네.’ 하며 낙담할 수도 있지만 희망은 가져볼 수 있잖아요.
예레미야 13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피부가 까만 흑인이 백인이 될 수 있느냐. 와... 이것은 안 되죠. 나중에 백인이랑 결혼해서 애 낳는 그것 말고 피부 자체가 흑인으로 태어났으면 흑인이고 백인으로 태어났으면 백인입니다. 병 걸리면 백인이 될 수도 있죠, 마이클잭슨처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반점 없으면 그건 표범이 아니죠. 그냥 범이죠. 호랑이죠. 표범이 반점을 변할 수 있느냐? 인간 세계에는 없어요. 표범 고유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성은 반점이 없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어요. 흑인이 백인이라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은 해줄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사야 1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현재 우리 상태를 색깔로 말했다는 것은 이 색깔은 변할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하는 거예요.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마치 흑인의 피부색같이. 표범의 반점 있는 피부처럼. 우리 죄는 속에서 꾸역꾸역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그래요.
원래 죄가 없는데 죄 지으면 먼지 같은 거잖아요. 먼지는 물에 씻으면 되죠. 외부에서 묻은 죄는. 내가 본의 아니게 한 실수 같은 것은 그 다음에 실수 안하면 되죠. 그러나 죄라는 것은 본의 아니게가 아니라 태생이 그래요, 우리는.
죄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자기의 죄가 자기의 속성이 투명하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평소에 말씀을 안 보니까 자기가 건전하고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하죠. 말씀을 보게 되면 말씀에 위배 안 되는 게 없어요.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 되는 겁니다.
눈 감고 어느 말씀이라도 딱 들추면 다 그래요. 내가 아무데나 들췄는데 빌립보서 3장 20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이걸 하루 종일 중에 우리가 얼마나 생각합니까? 어느 성경구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굳이 들 필요도 없어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러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사랑의 뜻에 위배되죠. 위배되어놓고 자기가 그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옵니까? 나올 수가 없죠.
그래서 성경 이사야 1장 같은 경우에 네 죄가 주홍 같다는 말은 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네 죄에 대해서는 더는 손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노아 때 홍수 왔잖아요. 죄가 어느 정도냐, 죄와 죄의 심판이 어느 정도냐 하면 노아 때 물이 오는 것을 노아가 그때그때 바케스로 퍼낸다고 비가 내린 그 물을 다 없앨 수 있어요? 못 없애죠.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소낙비를 인간이 무슨 수로 다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이미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계속 꾸역꾸역 죄가 나오기 때문에, 하루 살면 계속 죄가 더 나오기 때문에 그냥 죄 지었다 하지 마시고 내 피부 자체가 죄 덩어리이다. 그 색깔이 붉은 색깔이다. 얼마나 올라왔으면 붉은 색이겠어요. 어느 하나 얼룩덜룩하지도 않아요. 벌게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다 했습니까? 붉은 색깔이 양털같이 희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에서 올라온 색깔 자체가 어디 갔지? 이게 왜 없어졌지? 어? 왜 죄가 없어졌지? 하얗게 되어버린 겁니다. 너무나 하얘서 뭐 죄 하나라도 새로 생기면 금방 눈에 확 들어오게. 죄 거기 있잖아, 딱 지적이 될 정도로 그 배경이 하얘요. 이 말은 어디를 봐도 죄가 있다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순백의 피부로 바뀌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어디서? 이사야 1장에서.
그것이 이사야 53장에 보면 주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서 그분이 오셨다는 것으로 주님이 지적하시고 주님이 해결책을 제시한 책, 이게 바로 이사야입니다.
이게 이사야만 그럴까요?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바로 인간이 못했지만 내가 해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너희들은 나는 못했습니다. 나는 해내지 못했습니다, 를 계속해서 유지하시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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