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엘 1:13-14 / 제사장의 원형 본문
제사장의 원형
이근호
2021년 10월 13일
본문 말씀: 요엘 1:13-14
(1: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1: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인간의 ‘산다’는 것은 권력과 권세 안에서 생존하는 겁니다. 인간이 홀로 산다는 것은 더 힘센 타인에 의해서 공격의 대상이 되고 먹잇감이 됩니다. 따라서 나보다 더 힘 센 권력의 보호가 필요한데 여기서 인간은 자기를 지켜주겠다는 그 보호자의 지시에 따르는 신세가 됩니다. 그 최고 권력자가 왕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 보다 더 힘을 가진 세력의 범주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국가의 힘이라는 것이 없는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 구석구석에 국가의 힘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 힘의 노예가 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 자신이 선택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태어난 그 현장이 곧 이미 국가의 힘, 왕의 힘이 작용하는 공간입니다.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야 되는 실체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모순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삶의 공간말고 또다른 삶의 방식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 제사장이 있는 나라입니다.
인간들의 힘과 세력이 조밀하게 꽉 차 있는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직을 꽂아넣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본인이 살기 위해 보다 힘 가진 자의 종이 되어야 하지만, 제사장 나라에게는 이미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감히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하려면 하나님의 자비와 어여삐 여기시는 증거자로서 사는 경우 뿐입니다. 제사장직은 바로 이 사실을 나타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재료로 해서 이 제사장직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장치로서 작동하는 겁니다.
이방민족의 백성들은 출발점이,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 무슨 수를 써더라도, 무슨 아부와 아량을 떨더라도 살아남아야 돼”라는 정신이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우리는 죽은 자야. 무슨 수로 우리가 하나님께 함께 지낼 수 있겠어. 그런데 희생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나타나셨네”가 됩니다.
세상 나라의 왕은 권력와 권세를 쥐고 백성들을 통치하지만, 제사장에게는 희생제물의 죽음이 있습니다. 심판을 경유하는 자만이 발견하게 되는 긍휼의 자리를 제사장이 마련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제사장이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제사장을 통한 소제와 전제도 사라집니다.
즉 제사장 제도 자체를 하나님께서 무효로 하시는 겁니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기존의 것에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것이 날아가버리니 더 이상 자기를 지킬 것이 없어 울음으로 자신을 대신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동안 제사장직이 이스라엘을 지키는 무기처럼 여겼습니다.
제사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설마 하나님의 현존의 효과가 사라질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 제사제도는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기존의 제사장 제도를 통해서 생산될 증거자를 하나님께서 낳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 같은 권력과 권세로 지탱하는 나라가 된 겁니다.
열왕기하 23:25-26에 보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폐기업자가 처리할 수 있는 폐기능력이, 밀려드는 쓰레기의 증가로 인해 한도 초과 현상이 일어난 것과도 같습니다. 많은 선지자와 제사장이 선발되어도 이미 그 직책에 세상의 권력과 권세가 작렬하면 제사장직은 벌써 변질된 겁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뭐가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시킨 대로 제사드리고 양잡고 소잡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나 참된 제사장직은 숨겨진 하나님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라면 가능합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을 인간이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율법에 나오는 제사장직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하늘의 제사장직을 겨냥해서 임시적으로 주신 제도입니다.
창세기 14:18에 보면,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이 양이나 염소나 소를 잡을 때, 약간의 미안한 감을 가질 겁니다. 하지만 짐승이 제물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자기 대신 죽어야 한다는 것은 미안한 감정 자체를 넘어서는 관계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억울하게 망해야 하는 그 제물되시는 분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경우가 율법에 다음과 같이 예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민수기 35:25-28에 보면,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가면 피를 보복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피 흘린 죄가 없나니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억울하게 살인자가 된 자는 그 억울함이 자신의 억울함으로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이 대제사장의 심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은 죄없다고 외치면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적으로 얼마나 선하냐 악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제사장의 기능과 역할의 증인이 되어야만 그는 무죄한 자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억울하게 죄인된의 억울함과 아픔은 인간의 제사장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맹세한 제사장을 준비해두시고, 그 전에 이스라엘 역사상에 나타난 한계 있는 제사장과 비교케 하시는 겁니다.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히 7:17)
즉 천국 백성은 자기 것을 지키려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망해야 됨을 알고 예수님과 더불어 망하는 자로 사는 겁니다. 이로 인해 사적인 약점이나 단점은 더 이상 주님의 관심사가 아닙도 압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주님의 제사장직으로 인한 증인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애초에 무너져야 될 자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강-요엘 1장 13-14절(제사장의 원형)2110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1장 13-14절입니다.
요엘 1:13-14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찌어다 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맟도록 누울찌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여기 제사장들이 나옵니다. 보통 인간의 나라에서는 왕이 권세를 쥐는 겁니다. 권세를 쥐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권세에 도전하면, 권세에 도전하면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렇게 보게 되면 개인이라는 것은 사실은 모든 것이 보장되지를 못하고요, 조건부로 되어 있어요. 왕의 말을 듣는 경우에만 생존이 가능한 것.
인간들이 왕이라는 지도자에게 목숨을 담보 잡혔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왕이 사채업자에요. 왕이 닦달 냅니다. “너 왕의 명령을 들어.”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네 딸내미가 예쁘다면 궁녀로 간택돼서 평생 결혼도 못하고 궁에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왕이 명령을 하게 되면 군소리 못하고 따라야 됩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개인적 생명을 누리는 권세와 권력이 왕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람들 생각에는 왜 그런 왕을 뽑냐, 이렇게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왕국에서 태어난 겁니다. 인간이 인간을 통솔하고 인간의 생명을, 다른 인간이 나라는 생명을 장악하고 있는 그런 환경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대안은 선택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왕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갈 때에 인간의 진정한 개인적인 자유와 개인적인 존엄성은 애초부터 박탈되었다, 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혼자 살면, 혼자 산속에 살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혼자 살면 혼자 살기 위해서 필요한 힘이라든지 에너지라는 것이 주위에서 강도 만나면 다 빼앗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삶 자체가 딜레마입니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든든한 보디가드를 채택하다 보니까 보다 힘센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세금 바치는 것과 자기가 얻는 것, 이렇게 주고받는 것을 다 계산해 보니까 역시 큰 나라 백성이 혼자 사는 것보다 목숨 부지에 유리하다는 그러한 계산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보다 힘센, 권력 있는 자에게 의지하면서 겨우겨우 자기 목숨을 부지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겨우겨우’라는 말은 일반 백성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왕의 측근은 왕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채우면서 잘 먹고 잘살고, 왕 빙자해서 백성들의 것을 삥땅해서 이제는 뭐 왕을 등에 업고, 권세를 등에 업고 다른 백성들, 밑에 있는 계급을 지배하는 그러한 계급사회가 또 나름대로 구축되어 있어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서로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사람을 자기의 밥으로, 식량으로 뜯어 먹는 양식처럼 그렇게 다스리는 그것이 그만 체질화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조건이 방금 이방 나라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좀 다르겠지, 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들의 왕이 통제권을 갖고 권력으로 산골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왕의 통제가, 지배가 꽉 차 있는 거기에다 인간들이 인간들에 의해서 장악된 그 세상에 하나님께서 제사직을 꽂아버린 거예요. 제사직을 꽂아버리고 그 제사직으로 더 이상 인간에게는 왕이 필요 없는 그런 정치제도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지상에서는 제사장 말을 들어라. 그리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어서 내 백성을 통치하는 그러한 방식 제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할 때 그 왕과 이방 나라의 왕과 비교가 안 됩니다. 세상 나라는 힘으로 통치하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직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 나라에 왜 제사직이 꽂혀 있느냐? 왜 그게 침투되어 있느냐?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제사제도를 원형으로 해서 그와 똑같은 원리원칙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에게 그 표준모델을 실습을 시킨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왕이냐? 제사장은 왕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나 이방 나라가 왕을 따르는 것이나 같지 않느냐?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뭘 요구하느냐? 이 세상 왕은요, 내 말 안 들으면 죽는다. 이게 이 세상 나라거든요.
그런데 제사직은 뭐냐? “너희는 이미 죽은 것을 내가 살려주고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 까불면 죽는다, 가 아니라 너는 이미 죽었어, 너의 죽음을 확인차 내가 제사장직을 만든 겁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보겠다, 하는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죽으려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본성이기는 하지만 그 본성이 계속 유지가 되게 되면 권력자들한테 모든 것을 다 뜯기고 빼앗기게 돼요. 군말 없이 다 빼앗기게 됩니다. 왜? 원래 목적이 내가 사는 것이 나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데 제사직은 뭐냐? 살려는 목적, 이것은 너희는 더 이상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사느냐, 가 아니라 내가 이미 죽은 자인데 어떻게 살려지느냐, 거기에 관심을 둬야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하늘나라거든요. 천국이거든요. 천국에는 하나님이 함께 있으려면 보통 인간은 이미 죽어버려야 돼요.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고 인간은 너무나 추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살 자가 없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볼 자도 없어요. 그 영광이 무서워서요.
그런데, 살 자가 없고 죽어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한데 “거봐. 이스라엘은 이렇게 유지되잖아.” “그러면 그 이유가 뭡니까?” 물으면 그 이유는, 네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제사제도가 강력한 그 모터, 엔진, 그 엔진이 척척척척, 가동되고 있어요. 매일같이 가동되고 있거든요. 그게 무슨 나라냐? 제사장나라라고 합니다.
죽어 마땅한 것을, 죽어 마땅한 자를 통해서, 그걸 재료로 해서 거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죽어 마땅한데 그들을 살려주시면서 여기서 나오는 열매가 뭐냐? 다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자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 바로 죽은 자들을 내가 살려주고 있다는 하나님의 넓으신 아량과 사랑을 증명하는 차원에서 제사장 제도가 계속해서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그 제사장 제도,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서도 우리 죄인을 살려주고 있다는 이것을 이스라엘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무기로 봤어요. 전쟁 무기. 살리는 무기, 강력한 무기, 그게 구약 초반에 보면 언약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임재해 있다는 언약궤를 들이대면 적들은 다 손도 안 대도 하나님이 알아서 처단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포커 칠 때 에이스 한 장 쓱 내미는 거예요. 포커 에이스 쓱 내밀면서 ‘꿇어. 죽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강력한 무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강력한 하나님의 제사 뒤에 숨었습니다. 숨어서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하나님 여호와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고 기뻐하면서 이스라엘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든 율법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에게 그런 혜택이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성도이기 때문에 알지만, 하나님이 만든 이스라엘의 제도 그 율법이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예상 못한 근원적인 죄를 들춰내기 위한 하나의 임시적인 제도라는 사실을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는 몰라요. 전혀 눈치채지를 못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제사장이 있고 매일같이 제사를 드리는데 이게 무슨 하자냐, 이게 무슨 문제냐, 라고 생각한 거예요. 마치 교회가 ‘주일 낮, 주일 오후, 새벽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 수요예배까지 하는데 이게 뭐가 문제냐? 우리는 시키는 대로 예배드리기를 힘쓰고 열심 내고 그렇게 하는데 이게 무슨 하자가 되느냐? 시키는 대로 하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은 버려도 하나님께서 늘 경배하고 예배드리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바로 그게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이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 제사장직 제도 자체가 와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하나님이 시켰으니까 이게 뭐가 문제냐?’ 하는 거지요. 주님께서 “네가 문제다.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문제”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네가 문제라고 선지자들이 아무리 이야기 해도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이야기 해도요, 그들은 왜 우리가 그런지의 그 이유에 대해서 누가 지적한다고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것은 개과천선하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지적하는 그 지시가, 지적을 받는 내가 구상하는 현실을 밀어버리고 지적하는 그 예언 자체를 현실로 전환 시켜 버립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서 뭐냐? 13절에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찌어다” 제사장들아 너희는 울게 될 것이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기존의 것에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예배당 만들고 예배드리는데 나라에서 와서 폐쇄시켰다. 예배당 건물 짓는데 갖다 부은 돈이 얼만데. 부흥사 불러서 부흥회 하는 그것도 돈 들고요. 성전헌금 뽑아내는 전문 부흥사들 있잖아요. 그 사람 초청해서 돈 줬지요. 그 사람 와 가지고 교인들 홀딱 넘어가서 목돈, 적금, 딸내미 결혼자금 다 갖다 냈잖아요.
아니 종교단체가 푼돈 내서 무슨 종교단체가 되겠어요? 신천지가 푼돈 내서 신천지가 되겠습니까? 천주교가 푼돈 내서 천주교 되겠습니까? 영국의 헨리 8세 종교개혁 때요, 종교개혁이 딴 게 아닙니다. 사상개혁이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국가의 영토의 3분의 1을 갖고 있는 교회 재산을 왕국의 재산으로 넘기는 것이 종교개혁이에요. 종교개혁이 아주 고상해 보이는데 부동산 소유권 등기이전에 관한 문제입니다. 교회가 반발할 수밖에 없지요.
사람이 죽으면서 자기는 죽어 천당 가는 것은 좋은데 아직 천당 안 가고 있는 자식들, 교회도 안 다니는 남편, 그들을 구원하는 방법은 뭡니까? 목돈을 교회에 갖다 바쳐서 교회가 자기계열의 후손들에게 성자의 이름으로 중보기도를 시키는 거예요. 세인트, 성자, 성(聖) 베드로, 열두제자부터 해서 그 뒤에 죽 나오는 성자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성자들로 하여금 ‘살아 생전에 성당 안 가고 교회 안 간 사람 하나님이 잘 봐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는 거지요.
또 예수님한테 강력한 빽이 있어요. 예수님 엄마가 있거든요. 엄마한테 빽을 쓰는 그것을 두고 도고(禱告), 대신 기도할 때는 성당을 지을만한 부동산을 갖다 바쳐야 돼요. 푼돈, 십일조 그런 것은 푼돈이고 목돈, 재산을 바쳐야 돼요. 그 재산 바친 것이 영국 국토의 3분의 1이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해서 2분의 1인가. 엄청났거든요.
그걸 헨리 8세가 화가 나서 다 빼앗아버린 거예요.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신앙심으로 바친 그 신앙의 증거를 네가 뭔데, 하나님한테 바친 것을 네가 뭔데 빼앗나.’ 그런 반발 나오겠지요. 그러나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왕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칼 들고 죽이지 않잖아요. 왕한테 까불면 왕의 군사가 죽이는 거예요. 왕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습니다. 끽소리 못하는 거지요. 내놔, 하면 내놔야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율법을 지킨다 하는데 사람들이 뭘 모르냐 하면, 인간의 생존, 존재, 그 출생 자체가 율법에 의하면 그게 죄가 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좋은 교회 제도라도 거기서 금력과 권력과 권세가 들어가 버리면 전부 다 변질됩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다. 딸랑딸랑, 종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다. 이것은 교인들을 섬기는 종이다, 하면서도 ‘그 종에게 제대로 섬기도록 권력을 주자. 목사에게 당회권을 주자.’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교회는 벌써 맛이 갔어요. 냄새나요. 끝났어, 끝났어. 조직을 위한 조직되는 겁니다.
그러나 조직을 키우려면 힘을 모아야 돼요. 권세, 권력이 없으면 조직이 안되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려면 이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그 당시 왕과 권세를 가지고 결탁이 되어야 돼요. 결탁하는 방법은, 왕이 선지자들을 양성하는 겁니다. 자기 패거리를 양성하는 거예요. 그걸 사자성어로 선지 학교. 사자성어로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신학교. 신학교 세워서 신학생 양성하는 겁니다.
거기에 나라에서 장학금을 줘요. 신흥 기독교 세력이 교세 키우는 방법 중 하나가 소위 똑똑한 애들 장학금 줘서 그들로 하여금 사법고시 합격하게 해서 정치세력권에 자기 종교를 가진, 자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로 하여금 속속들이 주요 요직에 앉히는 방법도 멀리 보는 조직관리 방법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하고 너무 대조적이지요. 우리 가운데 유명한 자가 누가 있으면 우리 가운데 대단한 자 누가 있느냐. 우리는 변변치 못한데 그리스도만으로 기뻐한다. 이런 고린도전서 1장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이 땅에서 기독교가 행세할 것 같으면 힘이 가동돼야 돼요. 원칙은 하나님이 주셨고 이 원칙을 원칙대로 전 세계에 확장하려면 반드시 권세가 있어야 되고, 권세는 자본의 힘이 동원되고 뒷받침되어야 돼요.
1963년도 베트남에 독재자 대통령이 등장하는데 철저한 천주교에요. 베트남이 원래 프랑스 치하에 있었으니까요. 미국에서 밀어줘서 천주교인 부부가 독재자 대통령이 되었어요. 미국의 후원도 받고 나라를 키우기 위해서 독재를 할 수밖에 없지만 그 사람이 집중해서 통치한 것이 뭐냐? 베트남에서 불교 신자를 싹쓸이,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천주교 나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틱꽝특(1897-1963), 틱꽝특, 이름도 어려워요. 이것은 베트남 축구선수 이름보다 더 어려워요. 틱꽝특. 67세 된 중이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자기 제자들 4백 명쯤 모인 데서 가부좌 틀고 앉았습니다. 물론 머리 깎았지요. 중이니까. 보좌하는 사람이 휘발유를 갖다 부었습니다. 때가 되매 라이터 켜려고 하는데 휘발유에 젖어서 라이터가 켜지지를 않았어요.
칙, 칙, 이게 중국산인지 켜지지를 않았어요. 그때 제자 중 하나가 성냥을 그어서 불을 붙였습니다. 그걸 가지고 불교에서 소신공양이라 합니다. 부처에게 몸을 바치는 것. 그러고 난 뒤에 그걸 보고 감동보고 해외언론에서 떠들어대서 그 독재자가 쫓겨났습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베트남에서 불교를 지킨 거예요. 이게 바로 악마가 종교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권세와 힘, 이게 없으면 종교는 실체가 없다는 생각이 인간 생각이에요. 그런데 제사장직의 본모습은, 제사장은 있는데 그 안에 희생하는 분, 분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그 희생하는 분이 구약에 동물로 표현되어 있어요. 소의 희생, 염소의 희생, 양의 희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엔진의 모터를 가동시킬 때 그 가동시키는 핵심장치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피가 들어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사람들은 신약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을 미처 모르기 때문에 왜 짐승의 피가 들어가는지 그 이유를 몰랐어요.
그냥 양 잡아라, 소 잡아라, 하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줄 알았지요. 그러면 제사직이 유지되는 줄로 알았지요. 나중에, 오늘 본문처럼 제사장이 울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사장이 오늘 본문에서 운다는 말은, 기존의 것을 계속 고수하려고 하니까 그런데요, 기존의 것을 잘 유지를 못 하니까 그래서 울어버린 겁니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뭐냐? 과거의 자기가 알던 그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줄곧 자기가 속해 있던 그 현실 자체가 와르르 무너지니까 자기를 지켰던 그것이 더 이상 자기를 지킬 것이 없는 데서 오는 그 낭패감, 절망감, 참담함, 이것 때문에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들은 본의 아니게 이미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힘을 나름대로 갖추고 살았다. 이렇게 보면 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죄인, 죄인, 하는데 저는 별로 죄지은 것이 없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어떤 사람이요 허름한 아파트를 옛날에 사서 죽을 때까지라도 살려고 지금껏 살고 있는데 공시가격이 올라버렸어요. 아파트 공시가격이요. 공시가격이 오르니까 자기의 기본소득이 많아져 버렸어요. 많아져버리니까 나이 70 넘은 사람이 그다음부터는 최저생계비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원인을 조사해 보니까 주변이 개발되어서 그래요. 가만있는데 자기 집값이 올랐던 거예요. 그러면 자기 주변 사람 멱살을 쥐어야 될 것 아닙니까? “너희는 왜 같이 살면서 나에게 죄를 짓느냐?” 그러면 주변 사람은 “무슨 죄? 내가 어쨌다고? 내가 당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해? 이 할아버지가 왜 그래? 우린 그냥 잘 살잖아.”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당신들 때문에 나라에서 나오던 생계비지원이 끊어졌어요.” 가진 아파트로 재산이 많다고 해서 안 나오는 겁니다.
이래도 그 주변 사람들이 죄를 안 지었습니까? 심지어 임대아파트도 전매 투기 바람이 불었어요. 임대아파트. 가만있는데도 누가 와서 “임대아파트 들어가는 권리 저에게 파세요.” 이사 가려고 팔았다. 그런데 그것이 죄가 될 줄이야.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요, 이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쉴새 없이, 돈의 권력과 권세가 계속 바람처럼, 계속 편서풍처럼, 계절풍처럼 계속 바람이 불어와요.
사람을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 앉아 있어도 죄짓고 있는 거예요. 왜? 집값이 올랐으니까. 따라서 인간이 울음이 난다는 것은, 바로 내가 평생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아야지, 라는 그것을 캡슐처럼 여기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나름대로의 자기의 권세와 권력 안에 본인이 놓여 있는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장직 제도 자체를 하나님께서 허물어버립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그래서 제사장이 우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또 뭐라고 되었느냐? 13절에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하나님께서 기존제사장 제도 자체를 완전히 와르르 무너뜨립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까 설교 초반에 했던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있는 것을 알면서도, 죽은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제사직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우리를 사랑을 해줬다, 라는 그 체제 자체가 무너져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게 왜 무너졌는가? 그게 열왕기하 23장 26절을 읽어보면 여러분이 이해가 좀 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열왕기하 23장 26절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므낫세 다음 왕이 요시아 왕인데 요시아 왕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상이란 우상을 완전히, 모조리 다 부숴 버렸어요. 25절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게 바로 열왕기상 23장 25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시아왕이 이렇게 잘했으면 요시아 왕이 온전한 제사장이잖아요. 그렇게 했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아야 되는데, 허물지 않아야 되는데, 망가뜨리지 않아야 되는데 왜 이렇게 망가뜨리느냐? 방금 읽었던 본문처럼 요시아왕 그 전 므낫세왕이 너무 심하게, 너무 심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열왕기하 21장 5, 6절에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진노를 격발했다. 이 진노를 그 뒤 후임 왕 요시아가 아무리 잘해도 이 전임자로 인한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폐기물처리에서 폐기물이 너무 많이 들어와 버리면 그 폐기물 처리하는 기계가 고장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제사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도를 초과한 겁니다. 죄 처리하는 것이 제사직인데 죄가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그 죄를 처리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것을 단축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더 이상 제사장직으로 증거 할 게 없다는 말이다. 제사장직을 통과함으로써 다 죽어 마땅하지만 그러나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흔쾌히 받으시고 너희들만큼은 용서해줄게. 그렇게 용서하는 자의 숫자가 남아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제사장직을 설치한 증거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몽땅 다 심판해 버리면 더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 할 대상자가 없기 때문에 자동으로 이 제사장 자체를 주께서는 이제는 무효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왜 하나님께서는 몇몇이라도 제사장직 때문에 은혜와 긍휼을 받은 이스라엘이 근근이 지만 유지될 수 있는, 이스라엘이 간당간당 하지만 그래도 이어지는 그런 것을 왜 안 남기고 모조리 말살하시는 이유가 뭐냐?
뭐 때문에, 죄가 많아서 그런가, 뭐 때문에 그런가,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제사장제도의 원형을 보게 되면, 거기에 인간을 제사장으로 삼지 아니하고 인간 말고 하늘에 계신 분을 제사장으로 삼는다는 것, 벌써 창세기 14장부터 그런 낌새가 보이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좀 어렵게 되었는데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제 설명을 들으시면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논리를 이어가지 말고 결론과 결론부로 이어가겠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거기 살렘왕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18절에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것이 히브리서 7장 17-1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그게 뭐냐 하면, 맹세 없이 제사장 된 자는 일정기간 동안만 제사장 하고 폐기되도록 되어 있어요. 맹세 없이 제사장 된 것. 그러면 맹세 있는 제사장은 뭐냐 하면, 양의 죽음이나 소의 죽음이나 염소의 죽음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오신 분의 죽음이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의 천국의 백성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것 설명하려면 몇 시간 잡아야 될지 모르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민수기 35장 28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도피성이라는 공간, 이스라엘이라는 넓은 공간 안에 도피성이라는 낯선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그 공간은 뭐냐?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살던 곳이에요.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권세와 권력의 땅에 뭔가 끼어 들어온 거지요. 세상 인간들은요, 힘으로 꽉꽉 차 있기 때문에 뭐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밀고 들어오는 거예요. 제사장직을 밀고 들어와 버립니다. 밀고 들어와 버리면 거기서 죽음이 발생하고요, 양의 죽음, 소의 죽음, 염소의 죽음이 발생하고 그 죽음을 토대로, 근거로 해서 거기에는 산다, 이미 죽은 자도 영원히 살 수 있다, 가 효과를 드러내는 특수한 공간이 마련되는 거예요.
이게 도피성입니다. 이게 도피성이고 이게 제사장직, 도피성의 취지가 이스라엘 전체로 펼쳐버리면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거예요. 제사장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사람을 죽인 자, 살인자지요, 사람을 죽인 자도 안 죽게 되는 영원히 구원을 얻는, 영생을 얻는 그런 효과를 주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는 거예요.
그 공간의 한가운데는 어떤 엔진이 가동되는데 그 엔진은 뭐냐?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영원히 책임지고 영생을 줘서 영원히 살게 만드는 그런 근거로서 하나님의 죽음이 그 자리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두 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히브리서는 첫째는, 옛날 처음 율법을 폐기하는 거예요. 폐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이 있는 동안에는 유효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그 제사직은 이미 하나님보시기에,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이라는 인간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와 권력과 금력으로 결탁된 하나님을 자기 살리는데 이용하는 그러한 못된 것은 그 죄가 한도를 초과한 거예요.
어떤 한도냐? 인간이 제사장 되어서 처리할 수 있는 죄, 죄의 한도, 즉 그 용서의 한도, 그들이 저지른 죄가 넘쳐버린 거예요. 폐물업체 문 닫아야 됩니다. 인간이 제사장이면 뭐가 문제냐 하면요, 하나님의 아픔을 온전한 제사장이면 온전히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아픔을 인간이기 때문에 연약해서 온전히 그 아픔을 받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온전하게 죽지 않고 나도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제사장은 지키는 게 아니에요. 버림받고 매를 맞는 겁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메시아가 죽기 전까지는 사람은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하면, 본인하고 제물, 바치는 양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그래서 맨날 이야기하는 것이 “양아, 미안하다. 소야, 미안하다. 염소야, 미안해. 너 내 대신 좀 죽어 줘야돼. 미안해, 미안해.” 양이야 뭐 짐승이니까 죽어도 또 여러 마리 있으니까 죽어도 되는데 만약에 양이 아니고, 소가 아니고, 염소가 아니고 사람이라면, 흠 없고 죄 없는 사람이라면 ‘미안해. 당신 나 대신 좀 죽어야 해.’ 이런 관점으로 생각했던 것이 망해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나 하나 살리기 위해서 당신이 대신 좀 죽어주면 안 되겠어?’ 이런 식으로.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에요. 하나님까지 이용해서 내가 안 망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뭐냐? 그 도피성에 온 사람이 억울하게 사람을 죽인 사람이에요. 죽일 의사도 없는데 억울하게 사람을 죽인 사람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제사장직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영원히 무죄한 사람이 되려면 제사장이 너의 그 억울함과 더불어서 너도 제사장도 함께 죽어줘야 돼요. 그래서 민수기 35장 28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살인한 살인죄, 하지만 그 살인죄는 억울함을 품고 죽은 살인자, 그리고 그 살인자는 그냥 나 억울하다, 죄 없다, 하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이, 그 살인자의 억울함과 같이하는 그 제사장이 그 억울함 때문에 함께 죽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다시 하나님께서 산업을 주신 본래의 은혜의 땅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하나의 과정, 절차를 필히 통과해야 돼요. 거쳐야 돼요. 뭐냐 하면, ‘하나님, 당신 주특기가 죄용서니까 용서해줘. 내가 믿어줄 게.’ 이게 아니라 본인 자체가 ‘나는 더이상 살아서는 안 되고 망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망하는 자만이 진리를 알아요. 망하는 자만이! 지옥을 아는 자만이 이 세상 온갖 어려움을 즐겁게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너 백날 까불어도 지옥 있다~.’
그러니까 통과가 안 된 사람, 자꾸 십자가 이용하려 하고 하나님 이용하려 하는 사람은 뭘 자꾸 생각하냐 하면, 사람 만나는 것이 겁이 나는 거예요. 왜 사람 만나는 것이 겁이 나느냐 하면, 사람들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기 약점과 단점을 상대방이 같이 알까 싶어서, 겁이 나서 사람을 잘 안 만나는데 생각해 보세요.
인간에게 약점과 단점을 신경 쓸 권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직은요, 우리 개인적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따라서 나의 단점과 나의 약점도 나의 운명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상관이 없는 약점과 단점을 왜 그렇게 신경 쓰면서 고민 걱정을 하고 살아갑니까? 여러분에게 묻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아니까.
히브리서 7장 17절 이미 봤지만 그 뒤에 보게 되면 24, 25절에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말은요, 성도는 지금 사적인, 개인적인 생각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성도는 뭔가 증거 할 것이 있어야 돼요. 나 대신 돌아가신 분을 증거 할 것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안에서 예수님의 제사직은 지금 제대로 엔진이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작동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신경 쓸 내 일은요, 나한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십자가 이야기고, 주님이 채찍 맞아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그 이야기지 개인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운다는 것이 자기 것이 있는데 뜻대로 안 되어서 우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주님과 같이 망하고 보니까 비로소 마땅히 망해야 됨을 저희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개인적인 문제로 울고불고 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공은주
<20211013:제사장의 원형-수요설교 설명>
수요설교 들었다 치고 요약해 드리면 세 가지 점을 연결했습니다. 하나는 원래 원형은 멜기세덱 제사장이에요. 이 멜기세덱은 이 땅에 족보가 없습니다. 이 땅의 인물이 아니에요. 이 땅의 인물이 아닌 자라고 내세우시면서 이 땅에 인물을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셨지요.
그래서 그게 뭐냐 원형이라는 말은 왜 인간은 제사장이 될 수 없는가, 이게 원형이에요. 왜 인간은 제사장이 될 수 없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픔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아픔을 온전히 담아내야, 인간들은 철이 없어서 내가 한 짓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몰라요.
그냥 변명만 해요. “뭐 살다보니 그럴 수 있잖아요.” 계속 변명이에요. “뭐 더는 어쩌란 말입니까? 이 만한 것도 나름대로 지금 희생한다고 희생하는데 더는 못하지요. 제가. 할 일도 있고.” 여러 가지 변명을 하는 거예요. 온전한 아픔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제시한 분만 온전히 아픔을 아버지 아픔을 담당한다는 것을 하기 위해서 왜 인간은 탈락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속에 인간 제사장을 내세운 겁니다. 한시적이지요.
그러면 제사장 하는 일이 뭐냐, 그건 도피성에서 나타나요. 그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살인을 범했습니다. 의도한 사람은 도피성에 올 수 없어요. 그래서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살인자 됐고 살인한 친척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따라 올 때에 피해야 되는데 이 살인자는 약간 억울하지요. 약간이 아니고 많이 억울하지요.
그래서 재도피성이라는 곳이 46군데가 있는데, 그 도피성에다가 피해버립니다. 피하고 난 뒤에 거기에 제사장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나, 억울합니다. 쫓기고 있습니다. 저를 보호해주세요.” 할 때, 제사장이 “그건 너는 너의 억울함만 알지. 이 제사장이 있는 위치가 지금 이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억울함을 내가 다 품고 있는 위치다.”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살 수가 없어요. 어제 수요 설교에 나온 내용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태어날 때부터 더럽고 하나님은 너무나 깨끗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함께 할 수가 없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함께 할 수는 없고 백성은 되어야 되겠고, 따라서 함께 할 수 없는 자를 함께 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거예요.
그걸 어제는 폐기물 처리 장치라 했는데. 폐기물 처리하는 장치가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그 억울하게 살인하게 된 사람은 자기 생각만 하면 안 되고 제사장이 어떤 본질을 갖고 있기에 죄인마저도 이게 죄가 처리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 제사장이 죽게 되면 그 살인한 사람은 떳떳하게 그 지역에 어디에 가도 무죄한 자로 풀려나올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말은 본인이 나는 의도 없이 사람 죽였다. 내 의사 없이 사람 죽였다. 자기 철저함, 자기 정당성에 있는 게 아니고 옆에 있는 제사장의 죽음으로 이 죄가 이 억울함이 해소가 된 거예요. 그래서 제사직은 바로 도피성에 있는 제사장의 죽음으로서 그 실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의 제사장의 죽음으로서 이렇게 억울한 살인자가 다시 원상복귀 할 수 있다면 그럼 사람들이 제사 지낼 때,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고 하잖아요. 이건 하나의 오늘날 교회 예배드리는 것처럼 형식적이에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양 잡으라 해서 양 잡았고, 소 잡으라 해서 소 잡았으니까 하나님 우리 별 일 없겠지요. 맨 날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그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는 그 자리에 직접 사람이 등장해 버리면 이게 내가 양 잡고, 소 잡는 이 행위로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들통 납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이 못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소위 교회에서 하는 종교생활, 신앙생활은 다 헛수고입니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아무 소용없는 짓이에요. 그럼 소용 있는 짓은 무엇이냐, 이사야53장5절에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거예요.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소용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애초부터 이방민족은 살려고 왕을 섬기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 놓고 죽은 자인데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서 제사직을 거기다가 꽂아 넣은 거거든요.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실을 우리가 받는다면 나의 사적인 나의 약점이나 단점 같은 거 그런 것은 나한테 문제거리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나에 대한 관심사는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보고 구원하지 않기 때문에. 채찍에 맞으신 분보고, 채찍은 그 분이 맞고 낫기는 우리가 나았다는 말은 그 때부터는 꾸준하게 나를 위해서 누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그게 핵심이에요.
내가 하나님한테 뭘 했느냐는 전혀 핵심에 집어넣으면 안돼요. 이건 항상 살아가면서 마이너스 빼어야 돼요. 내가 뭘 했는걸 다 딜리트 삭제시켜줘야 된다고요. 만약에 내가 내 의미를 줘버리면 어떤 의미가 죽어버리느냐 하면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멀뚱하니 내가 영원한 천국에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이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 이게 훼손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마귀는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 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어제 수요 설교에 압축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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