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엘 1:15-20 / 자기로부터 구원 본문
자기로부터 구원
이근호
2021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요엘 1:15-20
(1: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1:16) 먹을 것이 우리 눈 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1:17) 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1:18) 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
(1: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1: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어느 민족이건 멸망당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처지에서는 멸망이 필연적이고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친히 방문했을 때 그 정황을 이스라엘에게는 미리 경험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으로 인해 그 방문지가 초토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온전히 하나님 하시는 일에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은 우선적으로 인간 자신의 생존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분위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없고 오로지 그들 자신들이 살 궁리에만 매진하면서 세상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관리가 가능한 것들로 풍부한 세상이기를 원한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경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신다는 것은 평소의 인간의 의식으로서는 내놓을 수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차라리 인간이 의지했던 것을 싸그리 씨를 말라 비틀어지게 합니다. 더 이상 자신들이 의존했던 삶의 방식이 지속되지 못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당연히 참담함을 느끼고 절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심판성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들이 동행해야만 사이라는 상황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들입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기 성향을 갖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성향을 같이 유지하는 조건하에 동행입니다.
우선 인간의 성향은 이러합니다. 인간은 현실에 대해 상당한 압박감을 갖고 있습니다. 현실이 강제적인 불안감에 늘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현실로부터 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실이 주는 위협에서 나름대로 대처하는 것은 환상으로 도피입니다.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것들이 보다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으면 안심을 합니다.
예측되는 위기에 염두에 두고 너끈하게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풍부한 재물들이 많이 미리 챙겨놓고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의식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행복한 삶을 설계하는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심판받은 자들임에 불구하고 그들과 나란히 역사를 같이 갑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쪽에서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이전되지 않도록 자체적인 희생을 심판 속에 가동시키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속에 아예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가 함께 하면서도 심판을 하나님쪽에서 막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실 시점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시험 안치면 공부안 하는 것처럼 심판없이 심판주를 아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에 합당하게 움직이는 겁니다. 그 원형은 출애굽기 3:2-4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떨기나무라는 식물성 재질이 천사 본연의 일을 하는데 있어 전혀 손상이 가해지지 않고 있는 바로 이 모습이 모세나 이스라엘이 보여주어야 될 원형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0:12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2)
반석 안에는 자체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물없다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잠재우는 급급해서 자신의 분노를 그 반석에서 물내는 행위에 담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반석을 두 번씩이 쳐버린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될 이스라엘 위상’에 합당한 구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더러운 세상이나 세속에서 나를 따로 떼내어 건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바로 그 ‘나’ 자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구원인 겁니다. 나는 언약에 의해서 심판받아야 합당하고 나를 심판하신 그 언약의 완성 차원에서 새롭게 지음받는 그 ‘나’가 구원되는 겁니다.
언약에 부합되지 않는 나는 언약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는 양(量)적으로 나의 생존에 열중한 나를 심판자리에 남겨두고 질(質)적으로 새롭게 구성되는 그 세계로 분리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해서 홀로 살고 싶은 나는 심판에 넘겨져야 하고, 희생 덕분에 생명을 얻게 되는 그 대상 자리에 내가 등장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 이후에 다윗 언약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모세는 모세언약에서 떨어져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지만 모세 언약을 계속 살아남아야 하기에 여호수아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운반이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 언약에 떨어져 나갔지만 다윗 언약의 완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이 같은 처소를 기거하는 참 백성들입니다.(시 132:10-1
4)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인들이라서 언약에 합치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갖은 인간들의 원망과 불평을 몸소 다 받아내신 것이 지속적으로 언약을 따로 완성의 위치까지 도달했는게 그것이 반석입니다. 곧 하나님이십니다.(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신약에 이렇게 정리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반석에서 생명수가 나오는 것은 거기에 예수님이 심판받음과 부활되심의 반복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십자가 능력만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5강-요엘 1장 15-20절(자기로부터의 구원)2110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1장 15-20절입니다.
요엘 1:15-20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멸망의 날, 여호와께서 오시는 그 날에 왜 세상은 이렇게 절망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기쁨으로 맞이하면 될 터인데, 어떤 집안의 어른이 오게 되면 잔치 분위기가 되어야 될 텐데 어른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이 적막하고, 절망적이고, 암담하고, 모든 것이 파괴적인 것, 왜 하나님께서는 오실 때 그렇게 거칠게 오시는가? 그것은 하나님만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이 인간세계가 하나님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자기만 생각하면서 생존해 온 그런 양상들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인간의 거점이 되기 때문에. 그 거점의 주인공은 하나님도 아니고 바로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생존의 주인공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뒷전이고요, 자기부터 밥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기면서 살아왔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핑계 대기를, 우리가 이 땅에 잘 먹고 잘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라고 주장들을 하는데 그렇게 긍정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면 하나님께서 오실 때에 “뭐 줄꼬? 너희가 산다고 고생 많았는데 뭘 더 퍼줄까? 꽃이라도 따줄까?” 그런 식으로 뭘 못 줘서 환장해 오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있는 것도 싸그리 씨를 말려 버립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에 메뚜기가 찾아온 것도 주님이 오시는데 일종의 카펫을 까는 거지요. 메뚜기가 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더는 이 세상에 기대할 것이 전혀 없게 만드는 그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선수 치듯이 그렇게 조성해 버립니다. ‘내가 올 때는 반드시 이러하다. 절망적이다.’
그리고 스스로 이 땅에서 더 한번 살아볼까, 희망을 가지고 한번 버텨봐, 라는 어떠한 기대조차 주님께서 말살해 버리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이 되어질 때 그것은 하나님이 오시는 그런 정황입니다. 징후지요, 징후. 주께서 오시는 징후. 그런 조짐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는 이 세상에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오실 때 그 경우를, 이방 민족에게는 그 경험을 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런 최후의 날, 여호와께서 오시는 날, 마지막 날, 마지막 종말의 날을 이스라엘에게 선험적으로 미리 경험하게 하신 그 대목이 오늘 본문의 대목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 이것도 이스라엘만이 경험해야 될 하나님의 도와주심의 특별한 경험이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망하는가? 그 망하는 경험도 오직 이스라엘이 먼저 그것을 주시는 겁니다. 심판과 절망적인 경험을 하는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주 부르짖지요. 14절에 보면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안타깝고 답답해서, 절망적이라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 그걸 경험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제대로 제 역할을 수동적으로 잘 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가 무너지고 절망적이 될 때 바로 “내가 그렇게 한 거야. 하나님이 그렇게 한 거야. 너는 이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그 절망 가운데서 알면 돼. 하나님이 오실 때 필히 그렇게 될 거야.” 그런 겁니다.
그래서 시험 안 치면 학생들 공부 안 하는 것 알지요. 평소에 시험 안 치면 평균 40점이 1등 해 버리고요. 학생이 시험 안 치면 공부를 안 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이 없고 멸망이 없으면 여호와를 몰라요.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심판의 날,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고 자꾸 손 젖지 마세요. 우리의 것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이스라엘의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나의 것이, 나의 행복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나의 희망이 존재해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오래 살다 보니 이방 민족하고 똑같이 되고 말았어요. 말로는 하나님 덕분에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잘 먹고 잘살아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는데 이미 잘 먹고 잘살고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그 자체 안에는 어떤 뉘앙스가 있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행복한 쪽으로 그냥 밀어 붙일테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용납해 주세요, 하고 자기 입장, 이 세상 것을 자기 것으로 전환하려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오실 때에 여호와의 날이 절망적인 날, 멸망의 날이 된다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 아니고 이제는 제대로 이스라엘이 기쁨의 날이 온다는 뜻이에요. 그 힘든 시험이 없으면 공부도 안 하고 성적도 오르지 않듯이 심판이 없으면 구원의 기쁨도 없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늘상 자기 위주로 자기가 우선처럼 그렇게 살아가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예언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은 뭐냐? 다른 민족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인간들끼리 서로 의견 맞춰서 살면 그게 하나의 국가가 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곳이에요. 하나님의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죄인이거든요.
따라서 그 죄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이스라엘을 심판할 수 있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이 동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그 심판을 자체적인 희생을 통해서, 그 심판주가 인간이라는 이스라엘과 함께 기거하면서도 심판이 전이되지 않도록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는 그게 도달되지 않도록 늘 그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거기에 가동되고 있었던 겁니다. 작동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심판성이 나란히 진행하면서 역사가 이어져 오고 있었던 거예요. 오늘 본문 보면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모습이거든요. 심판받는 모습인데 이때 심판을 받는 게 아니고 원래 심판이 이스라엘 속에 합류하고 있었던 거예요. 같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심판주와 동행하고 있는 거예요. 심판주와. 심판주와 동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원이라는 것이 형성이 안 돼요.
때려도 되는데 안 때리고 봐주는 것,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십자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죽어 마땅한데 네가 살아 있는 것은 그 십자가의 희생 덕분에 그 하나님의 저주와 지옥의 형벌이 너한테는 도달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같이 나란히 하나님과 함께 나란히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에서는 자기 일만 챙기면 되는 거예요. 자기 농사짓고, 자기 소 키우고, 자기 일만 하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늘 하나님과 교류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한 40년 전, 3십몇 년 전에 안동 성광교회라는 곳에서 일했어요. 강도사 때 처음 갔다가 거기서 목사가 되었는데 그 교회 예배당이 굉장히 컸어요.
다 들어가면 150명에서 200명이 들어가는 큰 예배당인데 제가 갔을 때 교인이 몇 명이냐 하면, 열 명 정도밖에 안 되었어요. 한 분밖에 없는 장로님이 은근히 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장로로서 당신에게 이 예배당 마련해 줬다. 이제 이 예배당을 수백명 채우는 것은 당신 역량이고 당신의 몫이다. 빨리 채워라.’ 하는 식의 압박감을 줬어요.
3평짜리 예배당에 10명이 있어 보세요. 굉장히 부흥된 것 같겠지요. 그런데 이 예배당은 2백 명이 들어갈 공간인데요, 코로나 거리 두기도 아닌데 이쪽에 다섯 명 저쪽에 다섯 명, 휑~ 하지요. 앞에 앉아 있는 그 교회 개척한 장로님은 자꾸 뒤를 돌아보지요. 오늘도 새로운 교인이라도 왔는가 싶어서.
그래서 제가 거기서 도대체 뭘 해야 되는가, 생각해 보니까 내린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숫자를 채우고 몇 명인가, 가 아니라 몇 명이라도 하나님과 교류하는 사람, 교제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게 중요한 겁니다. 한 명이 되었든 두 명이 되었든 그게 하나님의 요소가 꽉 차 있는 교회,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상관없어요.
‘나 너 기뻐한다. 네가 내 희생을 아는구나. 네가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내 희생 덕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중이구나.’ 이게 이스라엘의 원형입니다. 그러면 되었어요. 열 사람이면 열사람 입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 예배당은, 그 교회는 주님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다른 교회처럼 빨리 부흥시켜서 큰 교회 장로라는 명예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걸핏하면 뒤를 돌아봐요. 이쪽에서는 장로님이 뒤를 돌아보고 다른 이쪽에서는 부인되는 권사님이 또 뒤를 돌아보고요. 봐야 다섯 명, 다섯 명, 자기 빼놓고는 네 명이지요. 네 명, 네 명. 그래서 거기서 10개월쯤 있으니까 한 스무 명이 되었어요. 그래서 장로님이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띄는 거예요.
계산을 하지요. 10개월에 20명 같으면 3년이면 50명, 5년 내에 백 명이 되겠다. 뭐 그런 계산을 막 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고 난 뒤에 거기서 나오게 되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주변 이방 민족과 같이 있다 보니까 내 것, 내 영향력, 나의 것, 나의 것으로 내가 살고 싶어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본능이 그런데요. 내가 내 것 안에 내가 안심 놓고 살고 싶어요.그걸 행복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두 가지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마주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현실감이에요. 또 하나는 환상감인데, 현실감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 현실에 대해서 압박을 당하고 있고 뭔가 쫓기고 있다는 느낌, 이게 현실감이에요. 현실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주변에 의해서 압박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해도 압박을 당해요. 손흥민이 한 골 더 넣어야 되는데……, 이번 대선에서는 누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응원하는 팀이 우승해야 되는데……, 부인이 늦는데 빨리 집에 와야 되는데……, 가만 있어도 모든 것이 현실이 주는 압박감이에요. 계속 요구하는 바가 있어요.
그런데 그 압박감을 수동적으로 당하고 있거든요. 당하고 있으니까 이것을 모면하는 방법으로 좀 넉넉하게 가지는 것이 많을 때는 내가 미래를 미리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바로 환상입니다. 환상. 이 세상에서 당하고 있으니까 어떤 결핍을 느끼고 결핍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처하기 위해서 좀 쪼들리지 말고 보다 넉넉하게 장래까지 너끈하게 대비하면 좋겠다. 이게 인간이 갖고 있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동행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든요. 심판받아 마땅한데 내가 심판대상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자기 포부 자기 뜻만 자기 환상만 계속 실현해서 행복하기를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뭐가 잘못되었는가 동행의 원형은 출애굽기 3장 1-3절에 보면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떨기나무는 물질입니다. 물질적 재료에요. 재료인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천사가 떨기나무에 붙었어요. 붙으니까 떨기나무가 불이 타기 시작하는데, 탄다는 말은 재료가 소진되어야 하는데 소진되지는 않으면서 떨기나무는 불에 활활 타고 있습니다.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해야 되는 고유의 일이에요.
고유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가 등장하기 위해서 차용했던 그 떨기나무라는 재질, 그 식물성 재질은 전혀 손상이 없어요. 인간의 신체, 재질, 여기에 하나님의 업무가 모세한테 주어지게 되면 모세는 자신의 신체와 재질이 떨기나무처럼 하나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 가장 모세다운 모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민수기 20장에 보면 그것이 실패로 끝나요. 민수기 20장 10-12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백성들을 탓하면서 백성들에게 물을 제공하는데 있어서 아론과 모세가 물 나오는 반석을 두 번을 친 거예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물이 나왔어요. 백성들 먹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하여 모세와 아론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동행한다는 요소를 놓친 거예요. 떨기나무의 원형에서 벌써 벗어난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모세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야 될 모세가 아니라 모세는 모세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야 되는 거예요. 내가 나로부터 구원돼야 이게 구원이에요. 내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게 구원이 아니고 나에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되는 거예요.
이 나라는 신체 재질, 그 재질이 품고 있는 이 자아는 하나님의 구원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드러낸 겁니다. 모세뿐만이 아니에요. 민수기 14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보고 하는 거거든요. 22, 23절에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신약적으로 봐서 구원되지 못한다. 왜 그들은 열 번이나 원망하고, 하나님께 분노하고, 모세는 또 백성 앞에서 분노해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왜 드러내지 못했는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자기를 이 세상에서 건져내려고 한 거예요. 자기 자체를. 자기라는 그 덩어리를 이 세상에서 분리시키려고 한 거예요.
본인으로부터 자기가 빠져 나와야 돼요. 빠져나올 때 본인은 놔두고 모세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질 내가 거기서 빠져나와야 돼요. 모세언약에 의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할 만한 사람을 모세에서 분리시켜 모세는 놔둬 버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것, 신약으로 하면 예수님의 것을 모세와 분리시켜서 뽑아내는 작업이 바로 구원의 작업입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자체가 멸망 받아야 될, 심판받아야 될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한테 발목 잡히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나는 나의 구원에 발목 잡히면 안 돼요. 나의 구원에서 구원을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내 안에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모세 같으면 모세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모세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요소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요소는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이게 재질과 그 사명이 분리되지 않는, 딱 단일화되어 있는데 제대로 된 일을 하는 그 것이 원형이고 그게 모델이거든요. 그게 모델이 되려면 이것은 모세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 안에 모세 약속, 모세 언약이 들어가서 모세와 모세 언약이 분리됨으로서 새로운 모세가 구원받는 겁니다.
바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앞에서 엘리야하고 이야기했던 그 모세에요. 모세의 시체는 없어요. 어디 갔는지 없어요. 어쨌든간에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한 그 경계선을 보여주는 겁니다. 모세는 못 들어갔지만 모세에게 준 모세언약은 요단강 들어갔으면 이것은 바로 모세언약 안에서 모세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게 바로 심판성이에요. 심판받을 것은 심판받고 심판 속에서, 심판 안에서 주님이 심판을 재질로 해서 만들어낸 구원이 새롭게 만들어지는데 그 구원 안에 언약대로 만들어지는 모세가 있고 언약대로 만들어진 엘리야가 있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조건이냐 하면, 언약이 온전하다는 조건 하에 그렇게 되는데 그 언약의 온전한 조건은 바로 신약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조건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해서 이해될 것 같으면……, 이것이 모세뿐만 아니고 다윗도 마찬가지예요. 시편 132편 10-14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찌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찌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찐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10절에 보면, 내가 다윗을 위하여 뭘 줬느냐? 다윗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준 거예요. 언약을 준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죽어 떨어져 나가야 되고요. 죄인으로서. 그런데 다윗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다윗이 심판받는다는 의미인데, 심판받고 떨어져 나가는데 그 떨어져 나가는 그 절차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진짜 다윗언약이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그 떨어져 나가는 다윗이 발판이 되는 겁니다.
죄인 안에서 의가 나와요. 아버지께 저주받는 예수님 안에서 부활이 나오고 구원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죄인이 죄를 짓고 죽어줘야 비로소 거기서 생명이 나오고 의가 나오는 거예요. 심판 없고 저주 없는 곳에는 의도 없고 생명도 없는 거예요. 그 저주에, 심판에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바로 택한 자가 들어가는 거예요. 구원될 자가 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은 더러우니까 저리 가! 나는 세상에서 구원받을 거야.’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원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예요. 종교적 감수성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곤란하고 생로병사에 괴로우니까 어떻게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어서 나 하나 건져보겠다는 것은 그것은 환상이에요.
그것은 자기 생각만 하는 거예요. 같이 동행하시는, 심판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뜻하고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것은 홀로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요령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 자기 살 궁리를 챙기고 있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살지, 이런 발상은 이방적이에요. 이것은 언약적이 아닙니다. 주님은 조폭보다 더 심해요. “갖다 묻어. 묻어! 묻어버려!” 삽 들고요. 무덤에 들어가야 삼일 만에 부활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신체는 피부색에요. 그러나 우리 자아는 무채색이에요. 이스라엘이 모델입니다. 심판받는 이스라엘이 모델이에요. 인간은 이 세상 살면서 자꾸 양적으로 끌어모으려고 해요. ‘이 예배당 넓은데 언제 다 채우냐?’ 그거 채워서 뭐할건데요. 아무 의미 없어요. 안동에는 별로 돈도 되지 않아요. 아무 의미 없어요. 전부 양적이에요. 많이 끌어모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으로 이스라엘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심판이 주어지고 한번 이루어진 그 심판이 반복될 수 있는 단 하나의 경우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끄집어내고자 하는 거예요. 반복해서 되풀이 될 수 있는 그 원리원칙을 이스라엘로 끄집어내는데 그 원리원칙을 어디에 써먹느냐?
양적으로 양 많으면 행복이고 적으면 비극이라는 그 양적으로 행복만 생각하는 이 생존세계의 원리원칙을 질적인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질적으로 도약하는, 질적으로 이 세상을 다루기 위한 그 지점, 양적인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거기서 질적인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일을 하십니다. 주님께서요.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 이스라엘 이 사람들이 지금 부르짖고 탄식합니다. 또 생축이 탄식하고, 소 떼가 민망해하고 양 떼도 피곤하지요. 그 말은, 이들이 그 땅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땅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다윗언약의 땅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존에 급급한 땅으로 본 거예요. 자기 생존을 위한 땅이라는 거예요. 이 땅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거기서 애통하고 우는 거예요. 왜? 자기가 먹을 것이 없으니까. 17, 18절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소 떼도 양 떼도 먹을 것이 없어요. 꼴이 없으니까 소 떼가 보기에 민망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 “하나님이여, 왜 우리가, 이스라엘이 이 땅에 생존하는 데 왜 불리합니까? 이것이 불행이고 이것이 비극입니다.”라고 호소할 만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없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주님께서 생존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게 아니잖아요. 동행하시는 분이 뜻이 따로 있다, 이 말이지요. 동행하시는 분의 뜻. 울어도, 애곡을 해도 동행하시는 분의 뜻을 느끼면서 애곡해야 돼요. 그게 예레미야 1장 1절에서 2절 또는 6절에 나오는데 읽어보겠습니다.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슬퍼서 우는 대목이 그 대목이거든요,
“슬프다 이 성이여” 슬프다, 해서 예레미야 애가, 슬픈 노래라고 제목을 단 거예요.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이방 나라, 우상 섬기는 나라에 완전히 포로 잡혔다 그 말입니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6절에 보면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7절에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함을 비웃도다”
이게 뭐냐 하면, 예레미야는 생존 때문에 울고불고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했던 그 예루살렘 성전이 이게 훼파되고 망해버리는 것, 하나님이 없다고 해서 우는 거예요. “하나님, 어디로 가셨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있을 그때가 좋았는데.” 지금 이런 질적인 차원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울어도 이렇게 울어야 돼요.
교회 교인 천명, 2천 명 있으면 뭐합니까? 십자가 아는 사람 없고, 십자가로 기뻐하는 사람이 없다면 다 같이 엉엉 울어야 됩니다. 여기 앞에 앉은 장로님 딸 이번에 사법고시 합격, 이쪽에 셋째 아들까지 의사 만들어, 저쪽에는 재벌회사 다니는데 디스플레이 수출 잘돼서 잔업 한다고 바빠, 돈 막 벌어,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엉엉 우는 거예요.
“왜 주님은 쓸데없는 양적인 것, 출세하는 것, 우리 생존에 기쁨이 되는 것, 왜 그런 것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대신 희생하심을 잊어버리게 하십니까? 주여, 엉엉엉~, 엉엉엉엉~, 어찌 우리에게 이런 질적인 가치 있는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갑니까? 엉엉~” 울어야 되지요.
이쪽에는 뭐 주식 대박 났다 하지요. 여기는 뭐 화천인지 대유인지 퇴직금만 50억 받은 아이도 있지요. “왜 우리는 나를 못 떠나게 합니까, 주여! 이 세상에서 왜 나를 발 못 빼게 합니까? 왜 아직도 나에게 희망을 갖게 하십니까? 세상에서 살지 말아야 될 우리가 왜 세상 것으로 즐거워하게 만드십니까?” 이렇게 울어야 돼요. 이게 동행하는 자세거든요.
주님께서 이 모세와 아론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하셨는데 그러면 무엇이 들어가느냐?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신명기 32장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들과 함께 영원히 천국과 이어지는 지속적으로 내달리고 있는 요소가 있어요. “그는 반석이시니” 반석.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고 모세와 아론이 알고 있었을 때에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그 반석이 주님의 자체적인 희생, 백성들이 받아야 될 징벌을 하나님 스스로 품고 있던 그 반석이었다는 사실을 모세와 아론이 모르고 자꾸 백성들이 물 달라 하니까 물 주는 데 급급했어요.
물 달라 할 때 물 줘야 지도자다운 위신이 서잖아요. 그러니까 이 반석 안에 주님이 이미 많이 봐주고 있다는, 주님의 자체적인 희생을 하고 있다는 그 내용이 반석 안에 들어 있는데 그 용도를 백성들한테 인기 있는 지도자상으로 비취기 위한 용도로 전환 시킨 것이 바로 모세와 아론의 잘못입니다.
이것은 떨기나무가 떨기나무 고유의 자기 의견은 없고 불이 붙으면 그냥 뜨겁게 불이 붙은 채로 떨기나무는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내 주장, 내 환상, 내 기대는 주와 함께 일할 때는 이것은 소멸되어야 마땅하거든요. 이게 티가 나면, 이게 드러나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이 자꾸 물 달라 하니까 화가 나서 자기 성질을 그대로 반석에다가 보태버린 거예요. 에이 성질난다, 하고 두 번 때려버린 겁니다. 그냥 가리키면 될 것을 가지고. 자기 성질을 거기다가 갖다 붙인 거예요.
왜? 이스라엘은, 교회가 한번 잘해보려고, 그 넓은 안동 성광교회 다 채워보려고 쓸데없이 목회 프로그램 제시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주님께서는 바로 그때까지 전이되지 않았던,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 끝내 참았던 이스라엘의 그 심판성을, 가만히 동행하기 때문에 그 동행한 심판성을 이제는 그 둑을 터트려서 그 심판을 먼저 같이 동행한 이스라엘에게 덮치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의 날이고 멸망의 날이에요. 제대로 된 하나님의 면면을 보인 겁니다. 바른 뜻을 보인 거예요.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어떻게 나오는가? 신약에서 그런 해답의 근거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것은 이스라엘을 진짜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마지막 이스라엘, 최후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양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질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 민족으로 함께 거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다윗 언약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겁니다.
모세 언약에서는 모세 개인적인 성깔 가지고 문제를 다뤘거든요. 모세 너는 못 들어간다. 모세 언약은 들어가되 모세는 못 들어가고, 모세 언약은 들어가는데 누구와 함께 가는가? 여호수아와 함께 들어가요.
그럴 때 여호수아를 보게 되면 내가 했다, 하지 않고 모세에게 준 약속이 지금도 나를 이끌고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언약은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는데 모세언약에 맞는 사람만 바꿔치기 할 뿐이에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죽었지만 다윗언약에 맞춰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거예요.
그러면 모세언약은 모세 개인적인 사정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래서 모세가 모세언약에서 끊어졌지만 다윗언약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있어요. 다윗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다윗언약의 혜택을 입는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서 영원히 같은 거주지를 형성하는 것, 그게 바로 다윗언약의 나라,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언약에 의해서 계속 진행 중인 거예요. 언약이 언약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언약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떨어져 나가야 돼요.
임금님의 용안을 그리는 화공이 있어요. 예를 들어 그 이름을 홍천기라 합시다. 홍천기가 임금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인데 모함을 받아서 쫓길 때에 누가 자꾸 거치적거리느냐 하면 홍천기 아버지가 자꾸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독화살 맞고 아버지는 죽어 버립니다. 홀가분하게 이제 가는 거지요.
모세 떨어지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준 언약을 이루는 거예요. 다윗 떨어지고 다윗언약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이루시는 겁니다. 내가 떨어지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를 다윗언약으로 새롭게 구원해 내시는 겁니다. 하여튼 007영화의 본드걸이 문제라. 좀 나대지 말고 숨어 있으면 007이 다 구원해주는데 “싫어요. 같이 가겠어요” 해서 007이 난처한 지경에 이르잖아요. 본드걸 때문에. 과감하게 본드걸 내쳐야지요.
합당하게 일을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너는 죽어!” 죽게 되면 바로 언약에 의해서, 너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내용물로 꽉꽉 채워진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로 우리를 만들어낼 때 그게 바로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수적이냐? 내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구원이 아니고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게 구원이에요. 나로부터 양적인 나가 떨어지고 질적으로 완성된 예수님에 의해서 내 속에 언약이 들어올 때 껍데기는 썩어가는 내 피부고 세월 따라 시체가 되어가는 내 모습이지만 거기에 그리스도가 함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이미 용서하신 그리스도가 동행할 때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부활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심판이 비극이 아니고 도리어 심판받는 것이 ‘양적’에서 ‘질적’으로 승화되는 기쁜 소식인 것을 저희들이 이제는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요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엘2:4-11 / 공포 없음 (0) | 2021.11.03 |
---|---|
요엘 2:1-3 / 징 조 (0) | 2021.10.27 |
요엘 1:13-14 / 제사장의 원형 (0) | 2021.10.13 |
요엘 1:8-12 / 맞춤 공격 (0) | 2021.10.07 |
요엘 1:5-7 / 포도주의 의미 (0) | 2021.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