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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엘 1:5-7 / 포도주의 의미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엘

요엘 1:5-7 / 포도주의 의미

정인순 2021. 9. 30. 09:24

음성            동영상

 

포도주의 의미

 

이근호
2021년 9월 29일              

 

본문 말씀: 요엘 1:5-7

(1:5)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1:6)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1: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메뚜기의 이스라엘 습격은 뭔가 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세상 사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던 겁니다. 세상 생활에 탐익되어 안일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그들은 그들의 기거하는 약속의 땅의 풍성한 소산물인 포도주의 즐거움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난데없이 그들에게 사는 즐거움을 흠뻑 안겨준 포도재배 농장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메뚜기처럼 감당 못할 숫자로 앗수르 제국 군대가 이스라엘을 들이닥친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공격하도록 상황을 몰아세우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의 소산물을 먹을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조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는 이유는, 이미 이스라엘 내부에 자체 정화 시스템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즉 누릴 것은 넉넉하게 누리면서 이것은 자신이 마땅히 즐길 자격이라도 되는 양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바로 그들에게 쳐들어온 이방민족의 입장과 같는 겁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이방민족,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이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을 친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민족으로 간주하시는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차이가 나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이스라엘의 생각이 그런 정도로 차이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동원시킨 이유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선 것은 일종에 올무에 빠진 바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세계로 진입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같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안목과 동일한 생각을 살기를 원하시고 그 위반에 대해서 이방민족을 통해서 벌 주십니다.

원래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살고자 계획하신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사시고자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이나 포도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입니다. 이사야 5: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농장주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농장주께서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 포도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이 제시하는 이런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세상 사는 이유를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충분히 생존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살아갑니다. 세상을 일종의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드러낼 경쟁장으로 여깁니다. 이 게임에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살만한 자격이 있기에 살아남았다고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일찍 병들어 죽어나 가난한 자는 이 세상을 살 정당성이 많은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재미로 사는 것은 곧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되어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약속의 땅에 일어나는 이런 횡포를 하나님께 그냥 두고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온당치 못한 자들이지만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땅의 소산물을 허락하신 겁니다.

이러한 은혜를 망각하고 일반 세상 사람들의 사는 방식으로 그들이 접어들었고 그것을 지적한 선지자는 왕이나 제사장들도 같이 그런 분위기에 편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도주를 먹을 자격이 없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을 살 권한과 권리가 마치 지니고 태어난 것처럼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치는 빼앗기지 아니하면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면 사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의 생산물을 이스라엘이 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리는 내용이 율법에 담기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실인 제도’입니다.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내용에 의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선택된 자는 정해진 기간 동안 일절 포도와 관련된 것들을 기피하는 지시를 받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 6:3-5)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율법이 그 완성을 향해 가는 시계처럼 작용하고 그 작용한 머리카락은 하나님의 화목제물에 합류가 됩니다.(민 6:18) 이는 죄 있는 자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죄없는 무죄한 자가 의도적으로 복의 혜택에서 차단된 채 살아가므로서 율법 완성이 이런 ‘무죄한 자의 희생’으로 완성을 향하여 전개됨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약속의 땅’이란 억울한 무죄한 자만이 살 수 있는 땅입니다. 이는 곧 ‘무죄한 자의 피(죽음)’을 야기시키는 공간 속에서 무죄한 자의 가치가 독보적으로 죄가 있는 자와 대비되면서 부각됩니다.

태어나면서 죄를 지니고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세상 속에서 마치 자신은 당연히 존재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바로 이 사실이 유일하게 무죄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6:28-29에 보면, 약속의 땅의 최공 산물인 포도주가 어떤 식으로 율법 완성을 보이느냐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즉 나실인처럼 유일하게 죄없기에 최상의 약속의 산물을 먹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제자들이나 성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독보적 무죄함을 입증하는 일에 참여된 자이고 이들의 공간이 곧 천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죄는 우리 인간에게 돌리시고 의는 오직 주님에게 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강-요엘 1장 5-7절(포도주의 의미)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1장 5-7절입니다.

요엘 1:5-7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찌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지난 시간에 메뚜기떼가 덮친다고 했습니다. 이 메뚜기 드론이 무엇을 노리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즐거움을 끝장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5절에 보면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라고 나와 있지요.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세상살이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고 그것에 푹 빠진 사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메뚜기떼를 동원합니다. 본문 6절에, ‘한 이족’ 다른 이방 민족, 이것은 앗수르인데요, 마치 메뚜기같이 무수하게 몰려오는, 뭔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고 의도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모든 삶의 터전을 혼란케 하고 혼동케 하시는 의도를 가진 양 이방민족이 북 이스라엘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미리 이야기하지요. 그것조차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어떤 계획이었느냐?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기쁨의 열매를 먹을 자격이 못 됨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겁 없이 그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풍성한 포도주의 소산물을 마시면서 네 인생의 즐거움에 흠뻑 취했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나는 그 기쁨을 주는 포도의 생산물을 네가 누릴 자격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그 기쁨에 참여했느냐를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번 돌아보라는 말이지요. 코로나 사태 이후에 미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술집을 일찍 문 닫게 하니까 술을 밤늦게까지 못 먹잖아요. 우리의 세상 사는 즐거움을 막지 말라. 그런 데모를 벌이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살이의 어떤 즐거움을 마땅히 가져야 되는 그런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멸망 당하기 전 이스라엘의 모든 체제가요, 사는 즐거움을 생산해내는 그런 체제로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왜 이렇게 사는 즐거움에 도취하느냐 하면, 인간들은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이 자기가 얼마나 사는데 정당한 인물인지를 그것을 증명하고 싶어해요. 마음껏 행복을 누리고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에 빨려들어서 그저 자극적인 것을 찾는 이유는, 거기서 나오는 즐거움과 만족감, 행복감을 가지면서 나는 그것을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그런 정당한 존재인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일찍 어떤 사람이 돌아가신다면 그것은, 누가 정당하냐를 보여주는 이 세상 게임판에서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찍 게임에서 탈락했다고 보는 겁니다. 낙오자가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걔 죽었대” “내가 걔 줄을 줄 알았어. 걔는 세상 즐거움을 누릴 자격자가 못돼.” 그렇게 이야기하는 본인은? 본인이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으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확장하고 싶은 겁니다.

인간의 일상생활의 그 의도가 뭐냐? 그들이 진정 마음속에 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세상에 살아도 될만한 사람이라는 그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은 거예요. 기어이 살아남고 기어이 버티는 이유가, 내가 그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이유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왔던 이스라엘 사람도 다를 바 없어요. 똑같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만드실 때 이스라엘을 뭐로 만들었느냐 하면, 포도원으로 여겨서 만드신 겁니다. 이사야 5장 2절에 보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농원입니다. 농장이지요. 그러면 농장주가 농사지을 때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원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극상품 포도나무를 원했던 이유가 뭐냐?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 되시니까, 농장주가 주님이니까 하나님이, 자기가 그걸 먹고 싶은 거예요. 따먹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했던 성과의 즐거움으로 홀로 자기만이 만족스러워지고 싶은 거예요. 그만한 정당성과 타당성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취지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계시는 약속의 땅에 같이 동거하고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의 젖과 꿀을 마땅히 먹을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그런 권한과 자격이 갖추어져야 이 약속의 땅에 사는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된다. 그걸 알려주기 위한 겁니다.

그러면 자격이 되는지 안 되는지 뭘로 아느냐? 그것은 율법을 제시하면서 그게 판정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막상 율법을 주니까 오히려 율법으로 인하여 율법에 부합되지 못한 인간들이 이 약속의 땅에 왔다는 것이 그만 들통이 난 겁니다. 율법으로 잘못되었으면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감사나 검열반이, 감찰반이 동원되어서 자체적인 정화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율법을 줬을 때 “아, 우리가 죄인입니다. 잘못되었습니다” 할 때는 제사장이 나서서 “그래,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하나님이 용서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양을 잡고 소를 잡으면서, 하나님은 죄인과 더불어 사시면서 그 죄를 자신이 가져와서 긍휼로 너희를 사한다는 이런 원리가 계속 유지가 되어야 하는데 나중에 그들이 뻔뻔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배 드렸다, 되었다, 우리는 그냥 세상 즐거움을 탐닉하고 거기에 몰입해도 상관없다, 그런 식으로 막가자는 이야기지요. 그냥 막간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 자체적인 정화시스템이 이미 무너진 거예요. 재판장이나 왕이나 그리고 선지자나 다 같이 전부 다 율법이고 뭐고 그런 정신도 다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요. 그저 그들은 세상 사람과 똑같습니다.

‘내 인생 내가 즐기는데 왜 즐길 수 있는가? 나는 그만한 권한과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이 땅에 살아간다.’ 줄곧 그걸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체가 잘못됐으면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스스로 그들을 징벌하는 체제 시스템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졌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죄를 끄집어내고 그 율법대로의 징벌은 이방 민족을 가지고 징벌을 해버렸어요. 앗수르라는 이방 민족이 메뚜기같이 쳐들어와서.

이것은 뭐냐 하면, 이방 민족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자기들을 징벌할 때에 ‘어? 앗수르 저 이방민족은 우리가 심판해야 될 대상인데 어찌 그들이 우리를 심판해?’ 다시 말해서 이방 민족은 율법이 없는 민족이에요.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는 민족입니다. 이방 민족은 할례받지 못한 거예요. 거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했어요.

그러면 형식적으로 자기들은 거룩한 민족입니다. 거룩한 민족이 누굴 심판해야 되는가? 거룩하지 않은 이방민족을 심판해야 자격이 있다고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와서 포도주를 먹는데 이것은 이방 민족이 와서 자기들이 먹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던 그 포도주, 포도밭을 전부 다 싹쓸이 불태워버렸던 거예요.

심판을 해야 될 대상이 도리어 그들에게 심판받아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저 거룩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우리가 심판한다.’라고 하던 그 이방의 족속이나 우리나 둘 다 이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그 기쁨의 소산물 이, 포도주가 주는 기쁨 이것을 먹을 자격은 아예 없었다는 겁니다.

포도주가 기쁨이 된다는 이것은 아가서 1장 2절에 나옵니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육신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맛있는 포도주, 사람의 영혼이 뻑 갈 정도의 맛있는 포도주……, 저는 뭐 그런 포도주는 안 먹습니다만, 그저 포도즙을 아침마다 먹고 있습니다만, 당 높다고 그것도 함부로 못 먹지만요.

아가서에서는 내게 불쑥 찾아온 사랑이 얼마나 새로운 기쁨을 주는지 지금껏 내가 내 스스로 기쁨을 얻고자 시도했던 그 맛있는 포도주보다 더하다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 포도주라 하는 것은 기쁨을 누릴 자격이 되냐 안되냐를 결정짓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 포도주가 그 약속의 땅의 소산물이기 때문에요.

그렇다면 근원적으로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땅에 왜 왔는가? 이스라엘 땅에 온 것은 그들은 함정에 빠진 겁니다. 올가미였습니다. 맛보고 잘리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뭐와 같으냐?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느냐와 똑같은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보면서 우리는 내가 세상에 살만한 자격이 된다고 자기 맘대로 일방적으로 자기를 그렇게 증명하고 잘난 체하다가 결국은 끽, 하고 잘리잖아요. 우리는 함정에 빠진 겁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잠시 나타나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보낸 것은 네가 빼앗기지 아니하면 약속의 그 가치를 네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빼앗기는 데서 가치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죽임으로써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다고, 포도가 잘 생산되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포도를 먹었는데 그들은 포도를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통해서 포도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었습니다.

포도를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이지요. 이 약속의 땅의 포도를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오늘날 천구백몇 년도에 이 땅에 태어나서 주민등록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태어났다고 해서 이 땅에 마치 살 권한이 있다고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산 것은 죽음이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살렸다가 죽이는 것뿐이에요. ‘주님이여, 우리를 죽여서라도 진정한 죽음의 의미가 나타난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 의미는, 우리 도리는 다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렇게 살려고~ 살려고~, 죽으면 안 된다고 사는 것, 그것 왜 삽니까?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은 게임이야. 살아남는 자는 살만해서 살아났고 죽은 자는 이것은 우리보다 영 가치가 떨어져서……”,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면 갖다 버리잖아요. 그래서 “……게임에서 탈락한 것이다.”

이 세상 자체가 산자를 하나의 승리자로 생각하는 거예요. 살아 있다는 것은 잘나서 살아 있다는 승리자, 영웅으로 추앙하고 일찍 죽거나 아니면 거의 죽음에 가 있는, 쉽게 말해서 가난한 자들이지요, 병든 자, 가난한 자, 저것은 갖다 버려도 되는 쓰레기에 접근 되어 있는 그런 사람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남는 자는 마지막 골인 지점에 가서 만세를 부르는 거예요. “내 인생 이만큼 이 나이까지 살았으니까 만세!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만세)” 만세를 부르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오징어 게임, 오징어처럼 동그라미 그리고 세모 그려서 도형을 오징어처럼 해놓고 각자의 영역에서는 두 발을 딛지만 바깥에서는 공격을 해야 되는데 공격하는 자는 한 발로만 딛는 핸디캡을 줘요. 수비하는 자는 두 발 딛고 수비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공격자는 한 발로만 딛고도 두 발 딛고 선 자를 꺾어버리고 다시 자기의 본향으로 돌아올 때 만세를 부르는 거예요.

이처럼 이 세상 사람은요, 이 세상을 누가 마련했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이 터전은 누구 좋으라고 했는지 전혀 모르고, 그저 태어났으니까 자기만 계속 살아남으면 그 자체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는 양 이렇게 오해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아는 국민학교 때 배웠던 동요 있잖아요. <오빠 생각>이라는 동요인데 그 동요에서 소녀가 누구 생각을 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이 동요의 제목이 <오빠 생각>인데 제목 잘못되었어요. 자기 생각이에요 이것은. 그러니까 그 오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절에,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것이 2절 가사에요. 우수수 나뭇잎만 떨어져요. 서울 간 오빠 애인 만나서 촌의 여동생 생각 안 하고 둘이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기 바쁜데 비단 구두 살 시간 없어요. 오빤 자기 생각해야지요. 인간은 오빠 생각을 안 하고 오빠 생각을 우회해서 내 생각해요. 자기 생각.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맛있는, 인간에게 최고의 기쁨을 주는 그 포도주 생산의 의미가 뭐냐? 그것은 민수기에 나옵니다. 민수기의 나실인, 바쳤다는 뜻이거든요. 나실인이라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딱 한 사람을 어떤 경우에 때가 되면 선택을 해요.

선택을 하면 그 사람에게 특수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그 임무가 포도와 관련된 임무입니다. 민수기 6장 2절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찌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찌며.”

뭐 포도 농사하고 원수진 일이라도 있습니까? 일체 포도하고는 관계없게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율법에 의하면 죄지은 사람이 자기의 죄의 대가를 흠 없는 양을 잡아서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그것이 초반의 율법의 내용이라면, 점차 갈수록 죄 있는 자, 죄지은 자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죄 없는 무죄한 자가 남의 죄를 대신해서 제물을 바치지 아니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이대로 유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죄 있는 자의 제사에서 죄 없는 자의 제사로 전환되어 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상황은 바로 죄 있는 자가 회개하는 것도 한두 번이고 반성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하게 되면……,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사는 이유가 뭐다? 내가 얼마나 잘났냐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는데 맨날 죄, 죄, 죄, 죄, 누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맨날 죄밖에 모르냐, 하는 것처럼 맨날 죄, 죄 이야기하게 되면 짜증이 확 올라와요, 짜증이!

“그러니까 많이 했잖아. 돈 좀 교회 갖다 바쳤잖아. 뭘 더 어쩌라고! 이 정도 내가 회개하고 반성하고 착실한데 이 정도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없어~.” 이제는 뻔뻔스러워지는 거예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이거 처음 교회 나올 때 한번 불러요. 그다음부터는 가사가 감감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약속의 땅에서 준 포도는 주님께서 먹어야 될 양식이에요. 왜? 하나님 자기 포도원이기 때문에.

그런데 불쌍히 여겨서 나눠준다고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그 맛있는 포도를 먹고 있으면 불쌍하게 보일 눈을 해 가지고 ‘저는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죄가 용서된 백성에게는 포도를 나눠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포도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포도를 먹는 게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는 게 아니고요, 포도주가 특정 하나님의 언약 관계에 있는 자에게 포도주가 언약적으로 그 사람을 활용하는 겁니다. 포도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냥 인간이 포도주를 먹어버리면 이것은 순전히 인간이, 나는 기뻐할 만한 자격이 있다, 해서 자기 기쁨으로 포도주를 그냥 의미도 없이 함부로 먹는 셈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정인 나실인에게 “너 앞으로 네가 서원한 기간 동안에 일체 그 기쁨의 산물이라는, 하나님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는 그 포도주를 너는 스톱, 못 먹어.” 그리고 포도주를 못 먹으면서 못 먹는 그 기간 동안에 멈추지 않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머리카락이에요.

이거 설명하려면 이걸 먼저 아셔야 돼요. 우리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요새 애들은 시계 다들 차고 있지만요. 시간도 못 보면서도. 우리 클 때도 부잣집 애들은 시계를 차고 있었어요. 그걸 보면 다른 애들은 부럽잖아요. 그러니까 약이 올라서 자기가 볼펜 가지고 손목에다 시계를 그려요.

그런데 그 시계는 가지를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믿고 율법 안다고 해서 설쳐대는 모양새, 마치 손목에다 시계를 그리면 자기가 구원의 길을 가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어린아이가 시계를 그릴 때 정작 시계는 어디 있느냐? 어린아이는 그 생체리듬이라는 시계의 일부가 돼요. 어린아이 자체가.

왜? 그 어린아이는 늙어가니까. 어린아이가 자기 손목에 시계를 그리든 말든 시간은 척척 가는 거예요. 형식적으로 제사 드리는 것, 형식적으로 율법 지키는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형식 말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왜 젖과 꿀이 흐르게 하시고 포도원이 왜 잘되게 하느냐,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무 죄 없는 무죄한 나실인으로 하여금 특별역할을 맡기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아무 죄도 없으면서, 나는 마땅히 하나님 덕분으로 먹고 마셔도 돼, 라는 것을 특정 시간대에 못하게 만들어요.

못하게 만들면서 그 시간의 시계는 뭐냐? 머리카락입니다. 그러면 그 머리카락은 나중에 기간이 딱 6개월, 서원의 기간을 마치게 되면 6개월 동안 자랐던 그 머리카락이 있지요. 그 머리카락을 잘라요. 그 잘라낸 머리카락은 이 사람 나실인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그대로 순종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대조가 되는 방식으로 “이 사람을 봐. 이 사람은 내가 율법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서원한 대로 포도와 관련된 것 다 거부했잖아. 너희는 먹고 마시고 다 좋다고 했지만, 의미도 모르고 먹고 마시지만 이 사람은 먹을 수 있는데도 안 먹었잖아.” 그 기간이 머리카락으로 해서 그게 하나님의 화목제물 그 제사에 첨가가 돼요.

원래 화목제물은요, 그것도 그렇고 모든 제사에는 사람이 일체 들어가면 안 돼요. 흠 없는 제물이 들어가야 되지 흠 있는 인간은 못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특별히 그 나실인의 화목제물에서는 그 나실인이 율법을 순종했다는 증거로 자라난 머리카락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에 섞여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자, 이 이야기가 신약에 오면 예수님에게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마태복음 26장 27-29절,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예수님께서 최후의 식사를 하시면서……, 어떤 사람은 만찬이라 하는데 만찬이라고 할 것 뭐 있어요. 주스하고 떡만 있는데 무슨 만찬이에요? 만찬이 아니고 그냥 식사를 하시면서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아까 그 민수기 6장의 그 나실인과 연관을 시켜 보세요. 그다음이 중요해요. 29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독점적이라. 예수님이 독점했다는 겁니다. 모든 율법완성은 예수님이 독점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히 이 세상의 즐거움을 가질 권한은 예수님 빼놓고는 그 누구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린 거예요. 그게 포도주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눠준 포도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이것은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말은 너는 이 세상에서 네가 정당하고 잘난 어떠한 가치가 없음을 드디어 땅! 땅! 땅! 확정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 앞에서 그 피를 받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겁니까? 무죄한 자, 그 무죄한 자가 억울한 희생을 했다는 그 작업에 그들은 참여하는 영광을 누린 거예요. 그 공간이 바로 무슨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한 분만이 천국의 모든 복을 누릴 유일한 자격자고 그 외에는 없다는 그 작업에 합류되고 증인으로 참여된 사람, 그 공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그 말은, 이제는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우리 죄 대신 희생할 합당한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 내가 포도나무요, 내가 이 포도주를 마신다면 더는 다른 포도주나 다른 포도나무는 하나님께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나를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나 잘났다고 그걸 목표로 사십니까?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요, 하나님의 나라와 무관한 일은 일어난 적이 없어요. 모든 일, 트럼프가 낙선한 일부터 해서 모든 것, 중국 어떤 기업이 부도난 것, 이 세상 어떤 일도, 코로나는 물론이고 어떤 일도, 안산이라는 아가씨가 올림픽 양궁에서 메달 세 개 딴 그 일도, 어떤 일도 하늘나라와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이 세상 어떤 일도 나의 구원에 관한 일은 일어난 적이 없어요. 우리는 주님의 구원에 참여한 자지 내 구원을 챙기는 자가 아니에요. 내 구원을 챙길만한 그런 권한과 자격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격을 부여받고 태어난 적이 없어요. 이 땅에서.

만약에 내 구원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세상 나라 있잖아요. 이방 나라, 메뚜기 드론, 그처럼 자기는 무조건 살아야 되고, 무조건 천국 가야 되고, 자기는 무조건 구원 되어야 되고, 자기는 절대로 천국에서 탈락하면 안 되고. 이것은 아무 근거도 없는 거예요.

주께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야 너, 너 뭐냐? Who are you? 너 뭐지?” “참~, 나는 주님만 생각하고요. 예수님만 생각했어요.” “그것이 바로 오빠 생각이야. 사실은 너 생각했으면서!” 오빠가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는데 그 오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단 구두가 더 중요하지요. 참, 내가 동심을 다 파괴시켜서 미안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에게 이 세상은요, 내 잘남을 증명하려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세상은 주님만이 무죄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공간이에요. 주님만이 무죄하다는 것을 입증해요. 율법에 그게 나와 있어요. 신명기 21장에 나옵니다. 1절에서 8절까지를 죽 보게 되면 그 내용이 뭐냐? 어떤 데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에서 혹시 피살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어떤 들판에 시체가 엎어져 있어요. 피를 흘리면서. 그런데 범인을 못 잡았습니다. 그 당시에 CCTV가 설치가 안 되어서 범인이 오리무중이에요. 화성 연쇄살인 사건 비슷해요. 뭐가 없어요. 쳐죽인 자를 알지 못합니다.

이때 제사장이 나섭니다. 그 당시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검사나 판사같은 엘리트기 때문에 우리 생각에는 그들이 범인을 잡아준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범인을 잡아주는 자가 제사장이 아닙니다.

2-5절, “너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나가서 그 피살한 곳에서 사면에 있는 각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찌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그 피 흘린 시체하고 제일 가까운 마을의 장로들을 불러요. 그러면 장로들이 쫄지요. ‘혐의가 우리한테 주어졌구나.’ 왜? 가장 근거리에 있는 자가 살해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거든요. 누굴 죽였다는 것은 원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고, 원한 관계라는 이 말은 서로 어떻게든 아는 사이였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 당시에 운송수단도 변변치 않았어요. 어떤 경운기 같은 것도 없었잖아요. 원한 관계로 사람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그냥 두면 안 되니까, 자기는 범인 아니라고 숨겨야 되니까 시체 내다 버릴 때 1톤 트럭을 이용하겠습니까, 택시! 해서 택시를 이용하겠습니까? 그냥 질질 끌고 헉헉대며 가봤자 근거리, 가까운 거리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제사장은 지금 범인을 잡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의 마을 장로들을 불러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실직고 해라. 범인은 너희 동네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고을이 무죄하다는 것을 입증해라, 무죄하다는 것을 입증하세요, 가까이 있다는 것 때문에 억울한 혐의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 믿지마라 사람을, 이런 것 있잖아요. 그 원칙이에요.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데 레위인들도 거기에 옵니다. 6절에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서 7절에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를 입증하는 거예요.

입증할 때 그 가까운 고을에 있는 사람은 자신들이 범인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됩니다. “우리는 모르는 바입니다. 우리 마을이 얼마나 점잖은데 그런 살인자를 자식으로 둔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 혐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어버리면 가까운데 있는 고을들의 죄가 없어졌지요. 일체 혐의가 없게 되었지요.

그러면 이 죽은 자는 뭐냐? 죄없이 억울한 자가 되는 거예요. 죄없이 억울한 자, 여기 8절에 그게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무죄한 자의 피, 죄 없는 자의 피니까 이것은 죄 없는 자의 죽음, 죄 없는 자의 죽음과 관련짓지 않는 이스라엘 되게 하옵소서. 그 말입니다.

이 말은, 결국은 율법의 마지막 완성이 되게 되면 죄 없는 자가 이 땅에 도착한다는 말이고요,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운명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착하고 참하고 훌륭하냐, 그게 아니라 주님만이 억울하게 죽으신 분이라는 것, 그 작업에 연관되어 있고 참여된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제가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면서 모두가 생각하는 것은,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 건드리지 마라. 나는 살아야 되겠어. 네가 손해 보든 말든 나는 손해 보기 싫어.’ 이게 인간의 본성이거든요.

그런데 오직 진짜 그럴 권리가 있는 사람, 진짜 기쁨의 포도주를 마실 수 있고 이 땅에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직 따로 계시다는 것에 거기에 관심을 두면서 그 공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만이 이미 천국에 도착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나 구원받겠다, 하는 사람과 사귀지 마세요. 그거 이단입니다. 구원받겠다고 설치는 사람과 사귀지 마세요. 사람을 기쁘게 한 포도가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을 위해서 택한 자를 위해서 흘리는 피가 되었습니다. 곧 피는 죽음이에요. “너희는 사는 즐거움을 위해서 포도주를 마셨잖아. 지금까지. 이제는 너를 위해서 어떤 죄 없는 무죄한 자가 죽었다는 사실, 여기에 네가 참여해야 된다.” 그것이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똑바로 보는 거예요. 이 세상은 그렇게 보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일은 하나도,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만드셨다 그 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파주에 가든 어딜 가더라도. 우리 자신은 희희낙락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칫하면 나만 억울하다, 그렇게 돼요.

‘나는 포도 마셔야 되는데 저 앗수르가 와서 포도원을 다 박살 내니 하나님이 이렇게 나올수가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대들게 될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는 늪에 빠졌습니다. 올가미에 빠졌어요. 함정에 빠진 겁니다. 주께만 사실 수 있는 곳에 건방 떨면서 살려고 하다가 ‘아이쿠, 이게 우리가 살 동네가 아니구나.’라고 아는 사람, 천국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스스로 기뻐할 권한도 자격도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오직 자격자는 우리 대신 죽으신 무죄하신 분, 무죄하신 분은 오직 주님만 무죄하고 모든 죄는 우리에게 돌려주옵소서. 그래서 영광을 주께만 드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