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엘 2:1-3 / 징 조 본문
징 조
이근호
2021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요엘 2:1-3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2: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세상 멸망은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겁니다. 세상과 자신의 멸망을 이상한 일로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단지 왜 멸망해야 하는지, 멸망할 것이 태어나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되면 인간은 부질없이 걱정과 염려에 평생 휩싸이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셨고 그 이스라엘에게 적절한 때에 나팔을 부는 지시를 내리신 겁니다. 이스라엘이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경우는, 전쟁을 개시할 때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전쟁하기 위한 집단으로 등장한 겁니다.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두 나팔을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 천부장된 족장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민 10:2-4)
실제로 여리고성을 칠 때도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서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수 6:4) 전쟁을 하는 명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저분하고 더러운 자들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겠다는 의지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통해서 이방민족을 처벌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민족이 되는 이유 또한 나팔을 부는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기나 대속죄일 때에 나발을 부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레 25:9) 그리고 거룩의 완성된 상황이 희년의 나타남입니다.
즉 전쟁의 시작과 경과와 결과를 통해서 그 본유의 거룩이 제대로 그 진기를 다 드러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34에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질 때에 나팔을 붑니다.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저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고 너희는 양각을 불며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고”
이렇게 보면, 거룩을 실현하는 분이 이스라엘 왕으로 나타나셔서 전쟁을 벌리신다는 그 내용이 모두 나팔을 부는 취지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최후로 남을 1인자로서 지목되시는 분은 이스라엘의 취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왕으로 오실 그분 뿐입니다. 그 분이 등장한 날에는 모든 인간의 날들은 깜깜하고 어두워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는 그분의 등장 앞에서 인간들의 개인의 개성과 특징은 모두 제거되는 겁니다. 무효가 됩니다. 마치 이 세상에 먹물을 뿌리듯이 하나님께서는 메뚜기와 그리고 메뚜기같은 거대한 이방군대가 이스라엘 전체를 덮쳐서 모두를 멸절시켜버립니다. 이 일을 홀로 추진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날’ 앞에 ‘나의 날, 너의 날’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날은 오직 한 날, 여호와의 날로 모아집니다. 그날은 세상 전체를 새카맣게 색칠하는 날입니다. 이로서 여호와의 날 앞에서 인간의 모든 희망은 위험한 겁니다. 이 여호와의 날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여러날 중에 단순한 한 날이 아니라 오직 한 순간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들은 이 ‘여호와의 날’ 한 순간의 반복에 해당됩니다. 메뚜기가 날아들고, 앗수르 대군이 몰려서와 이스라엘 멸망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는 ‘징조’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이 ‘징조’ 안에는 인간의 모든 시간이 ‘순간’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19-21에 보면,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징조로서 반복하게 됩니다. 이 반복을 위하여 ‘징조로 부름받은 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신의 기대와 포부와 희망으로 성도되지 않는 자들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 치고 그 누구도 자신의 기대와 포부와 희망을 자진해서 버릴 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와야 비로소 인간은 성도가 됩니다. 성도는 ‘여호와 날’의 징조로서 활동되는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홀로 모든 일을 다 이루시는 순간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4:4-7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날의 징조가 되기 위해서 건짐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일상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대기를 계속 되풀이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날 때, 이 세상을 벌써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돌아가실 때도 이 세상은 어두움이었습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눅 23:44)
예수님처럼 성도가 된 이 세상은 성도에게 두려움이 되고 아픔이 되고 같이 멸망을 당하고 같이 죽음을 당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거기서 기어이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모든 것이 지금 주님 홀로 일하시는 중임을 드러내는 징조로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2:19-2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말씀은 성도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 본인이 매일 겪게 하시므로서 성도로 하여금 주님 이 체험하는 모든 것을 매일 반복해서 드러내는 징조로서 쓰여짐을 감사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그러니 징조로서 다루어짐에 의해 성도의 모든 염려와 걱정은 사실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날, 나의 일이 아예 없고 모두 주의 일, 주의 날임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6강-요엘 2장 1-3절(징조)2110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2장 1-3절입니다.
요엘 2:1-3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 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북쪽 이스라엘에 셀 수 없는 많은 북방 군대가 몰려오는 겁니다. 그 몰려오는 양상이 마치 메뚜기가 밭에 농사지은 것을 싹쓸이하기 위해서 덮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메뚜기가 자연적으로 덮치는 그 현상이나 그리고 나중에 앗수르 대군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 다 불 지르기 위해서 오는 그 일이나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라는 것을 지금 이스라엘이 알아야 됩니다.
그게 마귀가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인지 어떻게 아느냐 1절에 보면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시온은 하나님이 계시는 도성이고 거기서 나팔을 부는 거예요. 나팔을 부는 경우가 그 전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제시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런 경우에 나팔을 불어라.” 지정해주셨어요.
나팔을 부는 경우가 보통 세 가지 정도 있습니다. 제일 나팔을 많이 불 때, 첫 번째 특징이 뭐냐? 전쟁할 때 나팔을 붑니다. 전쟁개시. 지금이 전쟁 중이다. ‘be동사 + ~ing’ 전쟁 진행 중, 계속 나팔을 부는 거예요. 여리고 성 돌 때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0장 9절을 봐도 전쟁할 때 나팔 불고 전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찌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
민수기 10장 2-6절에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두 나팔을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 천부장 된 족장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너희가 그것을 울려 불 때에는 동편 진들이 진행할 것이고 제 이차로 울려 불 때에는 남편 진들이 진행할 것이라 무릇 진행하려 할 때에는 나팔소리를 울려 불 것이며”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졸지에 전쟁의 군대로 변합니다. 그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이니까. 싸움을 대비해서 이 지상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마하나임’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천사가 하는 일을 이스라엘이 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이스라엘은 배후의 하나님에 의해서 부추김을 받아서 지상에서 인간의 전쟁을 하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민족이에요. 그 전쟁은 율법이 지시한 대로 움직여야 됩니다. 그냥 막 움직이면 안 돼요. 그것은 인간의 전쟁이 되겠지요. 개인적인 전쟁이 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군대기 때문에 항상 나팔을 앞장세워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은 첫 번째는, 전쟁을 개시했다. 또는 전쟁 중이다. 지금 전쟁의 와중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다음에 전쟁할 때 무슨 전쟁을 하느냐? 명분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명분이 레위기 25장 9절에 나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겁니다. 전쟁의 명분은 “거룩하지 않은 것들아. 거룩한 이스라엘 앞에서 너희는 무릎을 꿇어라. 거룩한 민족이 등장했을 때 너희는 거룩한 민족 앞에서 거룩하지 않고 세속적이고 속되다는 데서 오는 그 징벌로 너희들이 마땅히 멸망 당해야 된다.” 심지어 젖먹이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버리지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지요.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이 세상 나라가 추접고 더럽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추접고 더러운 그 세상 나라는 이스라엘의 거룩 앞에서 무조건 저주 받아야되고 심판 받아야 되고 멸망 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나팔을 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기 때, 제사 지낼 때, 절기 때, 축제 때, 제사를 다 같이 함께 마음을 일치해서 드릴 때에 나팔을 붊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제사 드리면서 형성된 그 거룩이 하늘나라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전쟁 무기가 되는 겁니다.
신약에도 거룩이 있지요.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 신약에서는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자기가 손들고 천당 가겠습니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제시된 거룩의 요소가 장착될 때만 그게 성도가 돼요. 그리고 성도는 나 구원받았다, 하고 입 딱 다시는 것이 아니고 구약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향하여 전쟁하는 군대의 기능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거룩을 안의 내용으로 삼고 전쟁을 할 때에 세 번째, 그러면 또 나팔을 언제 부는가? 그걸 진두지휘하시는 왕이 등장할 때 그때 나팔을 불어요. 이스라엘의 왕이 세워질 때 나팔을 부는 겁니다. 열왕기상 1장 34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어요. 절기, 구체적으로 어떤 축제라 하는 것은 레위기 25장 9절에 보게 되면 그것은 희년(禧年), 기쁜 날, 하나님의 온 나라가 거룩으로 가득 덮인 그 날에 나팔을 부는 겁니다.
첫째는 전쟁이고, 두 번째는 절기고, 절기에는 제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왕이 세워질 때 나팔을 불어요. 나팔 하나에,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만든 취지의 그 세 가지가 다 나팔 소리에 같이 결합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 안에 이러한 요소가 다 결합 되어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온에서 나팔을 불면서 드디어 세상이 캄캄한 세상이 되게 됩니다. 나팔을 불 때 2절에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하는 할 때 멸망시킬 수 있는 공중을 나는 곤충, 메뚜기지요, 그 메뚜기 편대가 얼마나 촘촘하게 하늘을 날았으면 햇빛을 다 차단해서 하늘이 새까맣게 된 겁니다.
이 캄캄하고 빽빽한 날, 그 날이 뭐냐 하면, 바로 여호와의 날이 이른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하나 놓칠 수가 없어요. 놓칠 수 없는 이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이걸 ‘징조’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징후 또는 징조. 이 자연 세계와 이스라엘, 북쪽 이스라엘 남쪽 이스라엘 다 마찬가지인데, 이스라엘은 하나의 징조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사용하신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징조라는 말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도행전에 나와요. 사도행전 2장 19-20절에 보면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게 전부 다 징조입니다. 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자체가 이게 징조에요. 그런데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인간으로 또는 구원받은 자로 보는데 인간이거나 구원받은 자로 보면 안 돼요.
구원받은 자로 봐버리면 개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부린 것이 돼요. 제가 뭘 하면, 누구 이름을 부르면 천당 갑니까, 구원 받습니까, 이렇게 자기의 욕망을 과시한 것이 되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그 본래의 취지와 달라요.
그 점을 좀 설명 드리면 다시 요엘 2장 1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의 날”이라 했어요.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은, 나의 날 너의 날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을 위한 인간의 날이 아니에요.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쟁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최후의 1 인자를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걸 지정하기 위한 전쟁입니다. 최후의 1인자. 나머지는 다 예선전 준결승전, 다 떨어져 나가야 되겠지요.
여호와의 날은 내가 구원받는 날이다. 그거 틀렸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가 등장하는 날이에요. 여호와께서 여호와 자신을 위해서 홀로 일하시는, 최후의 1 인자답게 일하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이에요. 그 여호와의 날 앞에 뭐가 없는가? 나의 날은 존재하면 안 돼요. 나의 날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계획하고 스케줄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 전체를 하나님께서 새까맣게 색칠을 해버리는 겁니다. 색칠해 버리면 모든 개성과 특징은 다 무효가 돼요. 없어요.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그것은 새까맣게 다 칠해버립니다. 네가 어떻게 지내며 무엇을 했는지 거기다 먹물을 확 뿌려버려요.
그것은 너의 날이야. 너의 날! 너의 날이고 사적인 날이에요. 여호와 홀로 뜨시는 겁니다. 그냥 등장하시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홀로 등장하셔서 여호와 자신의 일을 하는 거예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 이 한 가지만 생각하면 돼요. 설교를 딱 들으면 나의 모든 인생 문제와 걱정이 한꺼번에 다 해결이 돼야 돼요. 설교 듣고 해결 안 되면 설교 잘못 들은 거예요.
설교를 듣기 전에는 온갖 잡생각과 염려와 걱정과 미래, 그게 뭐 계속 올라오지요. ‘교회 팔리면 어디서 예배 드리노?’ 이런 것. ‘교인들 다 가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것. 우리 애 일하다가 아프면 어떻게 되는가, 군대 간 우리 애가 지금 잘 있는지, 얻어맞지나 않는지, 이런 걱정. 요양병원의 부모님은 잘 계신지, 자기가 말기 암인데 언제 죽을지, 직장 잘리고 애는 커나가는데, 직장 잘리고 수입이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사나, 이런 문제. 이 모든 문제가 인간은 매일같이 쏟아져 나와요.
하지만 설교 한번 딱 듣고 난 뒤에는 전부 다 싸그리 없어져 버려야 돼요. 왜 걱정 근심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내가, 있기때문에 문제가 저절로 생기는 거예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먹물을 얼굴에 확 부어버려야 돼요.
징조라는 것은 나를 위한 징조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홀로, 홀로 등장하셔서 모든 일을 홀로 마감하셨다는 그 징조로 우리 성도라는 것이 만들어져서 거기에 관여하게 된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내 문제는 남아 있지 않지요. 내 구원이라는 것도 없어요. 내 개성과 특징도 없는데 무슨 내 문제가 있고 내 걱정이라는 것이 이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니까요, 어둡고 캄캄한 날. 여러분, 다 같이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그러고 싶어요. 그냥 어둡고 캄캄해요. 어둡고 캄캄한 거예요. 원래 관객석은 어두워요. 그래야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누군가 받을 게 아니겠습니까. 등장인물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무대는 캄캄하기 마련이에요. 조용필이 나올 때 조명 딱 비추잖아요. 나훈아 나올 때.
지금 전쟁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 빼놓고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애초부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겁니다. 지금 걱정과 근심이 생기는 것은 뭘 놓치고 있기 때문에 그러냐 하면, 내가 뭔가 긴지 알아요. 내가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닌데. 어느 정도냐? 아예 없어도 괜찮은 존재가 나예요. 또 여러분이고.
괜히 만들어졌으니까 마귀가 등 짝에 들러붙어서 걱정 근심을 하는 거예요. 없어져도 되는데 있으니까 챙기려 하는 거예요. 그럴싸하게 챙기려 하는 거예요.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들이 캄캄하고 어두워야 마땅한데 그게 안 되니까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캄캄하고 어두워야 마땅한데, 그들은 거룩하지도 않은데 온갖 추접고 더러우면서도 뭔가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 하니까 여호와께서 손봐야 되겠다, 해서 나타나 가지고 전부 다 그것을 캄캄하고 어둡게 만드는 겁니다. 개성이 없어요. 개개인의 어떤 계급이라든지 누가 누가 잘하나, 이런 것. 누가 더 우수하냐, 훌륭하냐, 이런 것은 아예 여호와 앞에서는 그런 발언은 삼가야 됩니다.
그런 이야기는 용납이 안 됩니다. 자기 것이 없다. 나의 것이 없게 만드는 것. “메뚜기, 쉭! 물어!” 메뚜기가 와서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앗수르 군대가 와 전부 다 불바다 만들어버렸어요. 누가? 앗수르가 아니에요. 메뚜기가 아니에요. 나팔 불라고 지시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여호와 자신만이 등장해야 되기 때문에, 자신만이 주인공이고 우리는 나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등장했다. 이 말한 순간 우리의 모든 걱정, 근심, 공포, 두려움, 어떤 문제도 다 해결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죽음보다 더 심각한 일이 등장했기 때문에. 내 죽음보다. 내 죽음도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의 죽음보다 더 심각한 더 다급한 문제, 하나님 보시기에. 그분이 바로 등장하신 거예요.
그러면 나팔 불 때 하나님의 성도로 만들어서 관여된 사람은, 여호와께서 등장한다면 그 캄캄하고 어두운 가운데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세상에 우리 인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구나.’ 새삼스럽게 이 세상이 인간들의 세계가 아닌 것을 새롭게 알게 되는 그 희열 환희가 있어요. 환희가!
정말 성도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매 순간 하늘에 구멍이 나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늘의 비밀이, 감추었던 비밀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계기로서 내가 하루하루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기회로서. 그러한 관계를 가지고 하늘의 비밀이 쏟아지는 거예요.
이따위 인간 비밀이요, 북한에 핵폭탄이 몇 기냐, 그런 것은 몰라도 돼요. 다음 대선에 누가 되느냐, 그것은 비밀도 아니에요. 진짜 비밀은 인간세계 말고 하나님의 비밀이 쏟아지는 것, 이것보다 더 소중한 보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을 이 지상에 던지는 하나의 징조로서 우리가 활용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성도에요. 그런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은 캄캄해야 되고 새까맣게 숯처럼 타버려야 되지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있으면 징조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있으면 나의 증인, 내 잘남의 증인 되기 때문에 이것은 징조가 되지를 못해요.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유지가 되어줘야 이게 징조다운 겁니다. 따라서 나는 여기 있다, 가 아니라 나는 내 옆에 다른 분이 계시다는 것을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다른 분이 계시다. 그 다른 분을 드러내는 징조로써 우리는 이 땅의 성도가 된 겁니다.
최후의 1 인자는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최후의 1 인자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슴팍에 칼로 나는 아니다, 가위표를 해야 돼요. 가위표 좍 그어 버려야 돼요. 나는 어딜 가나, 목욕탕에 가나, 놀러 가나 웃통 벗으면 가위표 딱 나와야 돼요. 등짝에 가위표 나와야 돼요. 어깨에도 가위표.
계급도 필요 없고, 나이도 필요 없고, 출신도 필요 없고, 성분도 필요 없어요. 사상도 필요 없어요. 그냥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가위표. 오늘 제목 가위표로 해야 할까요. 조폭도 그런 조폭이 없지요. 온몸에 문신이 가위표니까요
그래서 희망이라는 것은 위험한 겁니다. 등장하신 분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다 지워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는데 하나님께서 나의 희망을 지울 때 이걸 처음부터 원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땅에 자진해서 성도 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자진해서 성도 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자진해서 구원될 사람 같으면 여기저기서 저요, 저요, 다 손 올릴 거에요. 그것은 희망이에요. 그것은 자기 잘남의 증거되는 겁니다. “손 다 내려!” 잉크, 먹물 확 부어버려요. “이것들이 어둡고 캄캄한 날을 몰라서 그렇구나.” 자꾸 구원받고자 손들면 이것은 자기 자신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또렷하게 더욱더 부각이 되고 더 아끼고 싶고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이 성도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여호와께서 등장하지 아니하면 성도는 없습니다. 성도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을 원하는 게 아니고 주님 자신의 징조를 원했기 때문에. 누구누구의 징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징조가 등장하면 비로소 그 징조가 누구냐? 바로 징조 자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 자체가 징조에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구원된 자가 아니라 그 자체가 주의 징조라니까요.
내가 지금 예수 믿으면 구원받겠다. 예수 믿는 내 모습을 내가 희망하거나 소망하지 마세요. 그것은 여전히 나의 야망에 불과합니다. 야심에 불과해요. 자기는 더럽고 추접하면서도 천당은 가려고 그런 때를 쓰는 게 어디 있어요. 따라서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 된다는 것은, 하늘로서 모든 것을 심판하고 망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성도 된 그 성도를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모든 것을 싹 밟아버리고 무너뜨려 버리지요. 그러면 거기 등장하는 것이 뭐냐? 오직 그분입니다. 그분! 그래서 여기서 보통 날은 뭐냐 하면, 내가 하루하루 카운트하는 날이 나의 날이 되거든요. 인간의 시간관에 의하면 하루하루가 날이라면, 오늘 10월 28일입니까, 27일이지요, 27일, 이게 의미 있는 것은 내가 27일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의미 있잖아요. 내일이 되면 28일,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오늘내일 합치면 이틀이 되지요.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런 것을 다 짓밟았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은 다수의 날이 아니고 바로 한 날이 돼요. 여호와께서 일하시는 한날. 그러면 그 한날은 하루냐, 이렇게 나와요. 하루냐고 따지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24시간을 하루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도 하루냐, 이렇게 묻는데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그러면 뭐냐? 순간이 되는 겁니다.
징조 안에 하나님의 카운트 하는, 하나님이 계산하는 시간이 거기 들어 있어요. 들어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순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것이 순간이 돼요. 순간이 되어버리면 그 순간을 이 지상에, 징조기 때문에, 징조기 때문에 매일같이 그걸 반복을 시킵니다. 되풀이시키는 거예요.
그걸 되풀이시키면 그게 하나의 박자가 되고 비트가 돼요. 박자가 되고 리듬이 되고. 이게 바로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자신의 음악이 되는 거지요. 우주의 음악입니다. 그것은 뭘 반복하느냐? 여호와의 날에 나팔을 불면서 등장했던 그 모든 것이 완료가 되고 완수가 되었다는 그 순간들을 자기 사람, 징조를 통해서 이 땅에 매일같이 반복시키고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 반복 안에는 예수님의 자신의 일대기가 반복되는 겁니다. 자신의 이 땅에 있던 운명이 되풀이되는 겁니다. 누구 안에서? 징조라고 하는 자기 성도 안에서 그걸 되풀이시켜 주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부른다 했으니까. 징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여호와로 오셨잖아요. 이 땅에 인간의 세월을 살았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간은 모든 것이 여호와의 날이고 순간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육체들의 시간들은 계속해서 한 해 두 해, 한 달 두 달 계속해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일대기를 이 땅 지상에 징조 되는 성도를 통해서 되풀이해버립니다.
되풀이하게 되면 그게 뭐냐? 지금부터 어렵지만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4장 18, 19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 ‘주의 은혜의 해’가 나오는데 이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레위기 25장 9절에 나오는 바로 나팔 부는 그날이에요. 나팔 부는 그날, 희년을 시작했던 날. 그런데 그 희년을 시작했던 날이 예수님 자체가 여호와의 날이거든요. 이 이야기를 한 날이 안식일이에요.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말씀이기 때문에 본인의 모든 행위, 본인의 일대기, 곧 성경에 나오는 나팔 불면서 이뤄야 될 그 희년의 성취가 자기 몸으로 왔음을 알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일대기 자체가 압축해 보면, 축약하면 이게 여호와의 날이 되는 거예요. 여호와의 날, 그 내용이 바로 아까 본대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그 이사야의 내용이 예수님의 일대기 안에 압축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의 증인이 되고, 징조가 되고, 그 은혜의 나팔에 참여된 자들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참여 되어 징조가 된 자들은 그들 인생 내에 예수님 일대기가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일주일에 교회 일곱 번 나왔다 해 가지고 일곱 번 했다 하면 안 되고 한번 한 것을 되풀이한 거예요. 순간이니까. 여호와의 날은 순간이니까요.
그러면 그 순간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 일대기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 예수님은 밤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지요. 마태복음 2장 14절에 보면 동방박사가 빠져나갈 때도 밤에 꿈에서 주께서 빠져나가게 하셨고요. 아기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신할 때도 14절에 보면 밤에 천사가 찾아와서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이렇게 밤중에 하는 거예요. 밤중에.
그러니까 그 당시 헤롯은 뭐냐? 밤이 아니고 낮을 통치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기 예수 메시아를 보낼 때는 밤에 일을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처음 만들어질 때 그 날이 여호와의 밤이거든요. 유월절, 여호와의 밤이었습니다. 야곱이 천사 만날 때도 밤에 만났거든요. 인간이 활동하지 못하고 인간은 잠잘 때예요.
그러면 여호와의 날은 뭐냐? 나 혼자, 여호와 나 혼자 홀로 일하시는 날이에요. 홀로 일하시는 날. 홀로 일하심의 그 과정과 결과를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징조가 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 안에서 성도의 일생을 통해서 늘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는 느낌이 잘 안 오지요.
로마서 4장에 6-8절에 보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게 일한 것이 없이 여호와께 의를 받은 거예요. 일한 것이 없이, 일한 것이 없이 그 사람이 의인이 될 때는 그러면 일을 누가 했다는 말입니까? 주님 홀로 일하신 거예요. 그 일하심의 징조로서 성도라는 작자가 출현 된 겁니다. 저와 여러분 되었으면 참 좋겠어요. 일한 것도 없이,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추접고 더러운 인간이 졸지에 의인 되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일했다 하면 안 돼요. 이것은 주님 홀로 일하신 거예요. 이게 징조에요. 왜 예수님의 일대기가 반복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처음에 밤에 출생했을 때 분위기가 공포 분위기였습니다. 분위기가 공포 분위기니까 제가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출생할 때 무섭다. 공포니까 무서운 거예요.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 보세요. 무서움 없이 살아갑니까? 매일같이 무섭습니다, 매일같이. 집에 있다 직장 들어가면 무섭다. 늘 무서워요. 무섭고, 그 다음에 거기서 일을 해야 되니까 아파요. 무섭고 아프고. 결국은 인간은 멸망 받고 죽고 모든 의미는 소멸되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일대기에요.
예수님이 탄생할 때 얼마나 협박과 공갈과 무력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가는 길에 제자들이 따라갔지만 이것은 아예 주위에 있는 핍박하는 세력에 의해서 그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또 예수님 가는 길에 얼마나 아픈 사람도 많고. 무서우니까 마음이 또 아프고 고통스럽지요. 불안하고, 초조하고, 염려되고, 암담하고, 참담하고, 그렇지요.
그래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희망을 걸었는데 그 희망 걸었던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희망이 날아 가버렸어요. 왜? 끝까지 뭐가 되리라 했는데 끝까지 죽어버렸어요. 드라마를 몇 달째 보고 있는 시청자의 마지막 희망은 뭐냐?
드라마 마지막 회는 뭔가 악인들은 다 처벌받든지 안 그러면 정신병원 가든지, 그리고 그렇게 학대받던 사람들은 나중에 둘이 우리 사랑하게 해달라, 그 소원대로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잃어버렸던 돈도 다시 찾고 명예도 회복하고, 이게 드라마의 마지막 회, 그것 하나 보고 참는 거예요. 밤잠 설쳐 가면서 마지막 회 어떻게 끝나는가.
그런데 주님의 마지막 회는 뭐냐 하면, 죽어버렸어요. 이 주인공이. 무슨 이런 드라마가 다 있습니까? 제자들이 얼마나 실망스러웠겠어요? 우리에게 희망을 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던 가룟유다는 까이기 전에 깐다는 원칙에 의해서 자기가 까버렸잖아요. 자기가 예수님 팔아먹었잖아요.
교회 나가다가 교회 안 나가는 그 사람들은 뭡니까? 까이기 전에 까겠다는 거지요. ‘별것 없더라. 예수 믿어도 소용없다. 예수, 그게 뭔데? 십자가가 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지 뭐. 그게 뭐 중요한데? 뭣이 중헌디!’ 이러면서 나와 버리잖아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미래, 행복, 희망, 이걸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걸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자기 문제를 자기가 갖고 있을 때 거기에는 초조와 불안과 근심과……, 그러니까 인생 자체가 자기한테 족쇄에요. 항상 바들바들 떨면서 안 그런 척하면서 살지요. 성도는 이 세상이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이에요. 희망을 둘 필요 없어요.
하지만 주님의 그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 주님이 체험했던 그 세상, 자신도 지금쯤 하나님께서 날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남겨둔 이유는 주님의 그 했던 아픈 체험, 그 서글픈 체험을 몸소 매일같이 되풀이하면서 체험한다는 그 자체가 이것이 주님의 징조입니다. 주님의 징조에요. 이것이 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문제가 훅 들어온 거예요. 우리 안에. 내가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주님이 아예 들어와 사시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러면 이 말씀 하나로 우리의 모든 문제와 걱정이 다 해결돼 버린 거예요. 아까 기도할 때 했지만 내 방식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 방식의 구원이에요. 주님 방식의 구원은 뭐냐? 주님 홀로, 주님 홀로 하셔서 홀로 주님 자신이 구원받은 그 방식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떠넘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우리에게 찾아와서 그 방식을 완수시켜 버린 거예요. 일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된 겁니다.
징조 중에 하나를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바로 누가복음 11장 20, 21절입니다. 오늘 요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홀로 등장하셔서 홀로 일하셔요. 모든 것을 아주 불바다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왜? 그것은 원래 불바다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왜요? 아니 되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여호와께서 자기가 만든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가 불사르는 그러한 권한이 있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아이고, 심판받으면 안 되는데’ 하고 염려할 내용이 아니에요. 우리가 염려할 거리가 안 된다니까요. 주의 일은 주가 알아서 하는데 되지도 않은 우리가 왜 거기 끼어듭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져야 징조거든요.
그런데 징조가 아닌 자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9, 20절 보면 어떤 부자가 있는데 농사가 잘되어서 창고를 더 지었어요. 창고를 더 지어도 거기에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이 사람이 기분 좋은 고민이 벌어진 거예요.
물건 쌓아두고 하는 말이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그다음 나오는 단어가 뭐냐? 어리석은 자여.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일을 누가 하시는가? 주님이 홀로 이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내용이 이 어리석은 자, 이것은 어리석은 자다, 라고 할 것이 아니고 주께서 지적하시는 그 내용이 하나님의 징조가 된 우리 성도에게 이게 매일같이 되풀이되고 반복되는 즐거움을 주시는 겁니다. 즐거움을!
오늘 새벽 두 시 46분에 네 영혼 데려갈 때 네가 했던 그 모든 가치, 평생 네가 애썼던 네 업적은 어떻게 되는가? 홀라당 날아간다, 라고 했을 때 그게 기쁨이 되고 환희가 되고 이게 감사가 되는 거예요. 감격이 되는 거예요. ‘야, 내 것 다 날아가는구나.’
허허, 웃는 이것은 미친 거고요. 그것은 미친 것이고, ‘주께서 말씀대로 실시하시는구나.’를 또다시 느끼는 거예요‘누가복음 12장 20, 21절을 나를 통해서 그걸 또다시 반복시키는 일을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내가 주님의 징조 맞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바로 우리가 주님의 나팔이에요. 주께서 홀로 하신 일을 빰빠라밤빠빰~, 부니까 나팔이 돼요. 이게 징조에요. 나팔을 불어라. 매일같이 성도의 삶은 주님이 부시는 나팔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는 나팔이에요. 전쟁 끝났다. 전쟁 중이었었는데 전쟁 끝났다. 여리고 성 돌 때 나팔 불고 와르르 무너졌어요.
이왕 부는 나팔 즐겁게 불자는 말이에요. 돈 많다고 자랑했더니만 한꺼번에 사기를 당해서 다 날렸다. 빰빠바빰~ 주여, 주님 가신 길을 재현시켜 주시는 이 놀라운 기적, 나는 성도 될 마음이 없었는데 주께서 친히 홀로 일하셔서 우리를 성도 되게 하신 거예요. 나팔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매일매일은 뭐냐? 여호와의 순간순간이 되고 여호와의 날이 됩니다. 그러면 세상 어떻게 보느냐? 세상은 바로 캄캄하고 저주받을 세상으로 훤히 보이는 이 감격, 이 환희, 이 세상에 나의 날은 아예 없고, 모조리 다 나의 날이 아니고 주의 날이라는 것을 아는 이 기쁨, 이 기쁨 앞에서 우리의 모든 소소한 문제, 걱정, 근심 아무것도 없이 다 날아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느새 돌아서면 내가 대단한 존재인 양, 지켜야 될 대상인 양, 버텨야 될 대상인 양 또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놓치지 아니하시고 말씀 주셔서 저희들의 개성과 특징 아예 묵사발 만드시고, 밟아버리시고 주님만 우리 안에서 우뚝 등장시키시는 이 감격을 늘 회복시켜 주니 이 은혜에 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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