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호세아 14:9 / 총명 본문
총명
이근호
2020년 8월 19일
본문 말씀: 호세아 14:9
(14: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의인’과 ‘죄인’이란 정적 개념입니다. 최종 개념입니다. 도중에 변화될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의인’과 ‘죄인’을 자기와 관련해서 시도해야 될 개념처럼 여깁니다. 즉 자신이 하기에 따라서 확정될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는 개념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될 수 있는대로 죄인 안되고 의인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호세아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도를 알것인가?” 즉 하나님의 도는 지금 호세아 외는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만약에 모든 인간들이 각자 자신이 사는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시킨다면 이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수 십억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일단 자신을 무조건 지키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 인류가 달랑 두 종류, 즉 한쪽은 의인이고 다른 한쪽은 죄인으로 최종 분류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기준을 적용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일단 인간들이 각자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은 거부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의인과 죄인으로 분류하는 기준점을 아는 자는 호세아 뿐입니다. 호세아는 그 당시 유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이라는 신은 인간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원칙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신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호세아가 전해주는 말씀 없이 자신이 살아가는 것을 인정해주는 신입니다. 즉 내가 고를 수 있는 신을 말합니다. 하지만 호세아가 알고 있는 신은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럴 때, 호세아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혼인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특징이 없는 신이 바알신입니다.
호세아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조건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바알신을 믿는 자들은 본인이 되는 본인의 조건을 본인들이 결정합니다. 즉 ‘나의 나다움’의 조건을 늘 생각하고 고려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은 항상 자신이 자신을 나무래도 분노를 터뜨리고 자신의 형편을 마음에 들지 않아 화를 냅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기에게 화를 내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화를 냅니다. 남이 못마땅하기 이전에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늘 못마땅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나다음을 구성하는 조건을 어디서 부여받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사람들은 하나같이 동일한 생각으로 움직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철저하게 육신적입니다. 동물처럼 수컷이 암컷을 보호하는데 이는 암컷이 자기 새끼를 임신하니 수컷은 암컷을 보고하고 키웁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늘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아빠를 본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감출 수 없는 본능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을 언급하고 고상한 이념들을 거론해도 근본적으로 작렬하는 동물적 본성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원한 보존 본능을 사력을 다하여 사수하려고 합니다. 이는 곧 ‘나는 내가 지키며 오직 나만을 지키고 싶다’에 대해서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여호와를 아는 호세아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나옵니다. “모든 인간들은 음란하다. 그것을 내가 증명해주마!”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습니다. 호세아의 부인 ‘고멜’은 ‘끝,’ 혹은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즉 호세아는 끝장을 보여주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모든 인간 세상은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못하는 ‘음란한 세계’라는 겁니다. 이 사실은 인간들의 총명과 지혜로는 도저히 알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호세아는 본인이 원하는 여인과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끝장’을 보여주어야 될 여인과 혼인한 겁니다. 이는 곧 의인과 죄인이라는 정적개념은 세상 끝나봐야 알 수 있는 나오는 개념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자진해서 세상 바닥까지 내려갑니다. 곧 의인이란 죄인이 최종 확정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의인되고자 하는 그 어떤 경우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멸망의 바닥을 쳐야 합니다. 아무도 의인이 없음이 분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서, 죄인밖에 없는 곳에서 어떻게 의인이 나오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방식이 바로 ‘사랑’입니다. 호세아 3:1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음녀로 확정되는 바로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 방법이 나옵니다. 그 여인과 다시 혼인하기 위해 값을 남편되는 호세아쪽에서 치르러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인 입장에서는 ‘값없이’ 사랑을 받은 겁니다. 바로 이 ‘값없음’ 상태가 오게 되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됨을 포기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어떤 형편에 있는 지도 모르고 마지막을 향하여 추락하고 있는 그 인간에게, 바닥을 치고 올라온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도중에 추락하는 음녀인 자기 백성을 도중에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랑을 대하게 된 성도는, 이 값없는 사랑을 만나는 순간,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화내거나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마치 다음과 같이 됩니다. 마태복음 8:9에 보면,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힘으로 자신을 정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갈데없는 일곱귀신이 도로 들어오는 바가 됩니다. (마 12:43-45)
인간의 육신적 조건은 이미 이 세상적인 분위가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태복음 19:23-25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부자되고 싶은 본심은 이미 모든 인간이 악마의 마음으로 제공받고 움직입니다. 이런 자아조건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기 총명으로 자기 마음을 결정한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의 도를 모르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을 만나 이전까지 내가 결정하는 나의 모든 조건을 포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55강-호 14장 9절(총명)2008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4장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4: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지혜와 총명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지혜와 총명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그 지혜와 총명으로 인하여 그 결과가 두 종류의 사람이 이 땅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백 종류의 사람, 천 종류, 만 종류의 사람이 아니고, 다양성이 아니고 딱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성경대로 하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아이디어 삼아서 한번 상상해 봅시다. 동대구역이나 거리에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 많이 곳에서 사람들이 두 종류의 유니폼을 입었다고 상상해 보는 겁니다. 한 사람은 까만 유니폼, 또 한사람은 하얀 유니폼.
검은색이나 흰색이 좀 칙칙하다면 색깔을 바꿉시다. 한쪽은 빨간 유니폼, 다른 한쪽은 파란 유니폼을 상상으로 다 입혀보는 거예요. 입혀보게 되면 호세아 14장 9절에 입각한 사람의 눈으로 보게 되면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한쪽은 빨간색, 다른 한쪽은 파란색, 그 두 종류밖에 없어요.
아파트 20층까지 사람들이 산다고 치면 한 40가구가 있잖아요. 아무리 40가구가 살아도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호세아 14장 9절의 안목에 의하면, 또 다른 말로 하면 호세아 선지자의 눈으로 볼 것 같으면 딱 두 종류 밖에 없어요. 한쪽은 의인, 다른 한쪽은 악인.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두 종류로만 나눠진다는 것이 정말 기이한 일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백이면 백가지로 생각하고 천명이면 천 가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 명이면 만 가지라고 생각하고.
각자 자기가 살아온 과거가 있기 때문에 인생기준, 나는 내 식으로 산다는 그 기준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터치 못하는 본인만의 고유한 원칙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서 호세아 선지자 말고 보통 사람들에게 묻게 되면 이 세상에 한 인구가 75억이 되는데 사는 기준이 몇 가지냐고 한다면 75억이라고 이야기하겠지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지문이 다르듯 다 다르니까. 그러면 75억의 사람이 75억의 기준을 가졌다는 것은 당신은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가 내 기준대로 살아가는 그 기준을 그대로 이 세상의 기준으로 제시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내 기준으로 살고 너는 네 기준으로 살고 하다보니까 75억 가지의 기준이 등장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호세아는 이렇게 하지요. 그게 바로 총기가 없고, 그게 바로 지혜가 없고, 그게 총명이 없는 소리다, 하는 거예요. 총명이 있다면 딱 두 종류밖에 나타나지 않는데 총명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마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열 사람이면 열 명의 기준이 있다는 그것이 이해하기 쉽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열 명이 있어도 딱 두 종류밖에 없다고 할 때에 오히려 우리는 무슨 기준을 의아해 하느냐 하면, 열 명인데 도대체 무슨 기준에 의해서 그 열 명이 두 종류밖에 없는가? 모든 인류가 두 종류밖에 없는가? 오히려 그게 기이하게 여겨져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여기 호세아 14장 9절에 나오는 이 총명은 이 총명이 있기 전에 먼저 인간세계 나름대로의 총기와 총명과 지혜가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돼요. 각자 자기 식으로 살아가는 그 기준이 꽉 차 있어요. 이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이 오히려 상식적이고 그 기준대로 사는 것이 남들과 충돌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 성경에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총기, 총명, 지혜 말고 인간들의 지혜의 바탕은 어디서 나왔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자신만만하게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고 할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호세아가 이미 언급을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바알 신을 섬겼다, 라는 것이 호세아 전체의 내용에 나오는데 바알 신을 섬겼다는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지를 못하고 각자 그들이 동의하는 대로 믿다보니 그들은 우상 신을 섬기게 된 거예요.그 당시 우상이라 하는 것은 자연을 설명하는 유일한 원칙이고 원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알기 쉽게 오늘날 이 과학시대에 인간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했지요. 생물 쪽으로 가서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게 되면 간단한 해답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운동하는데 어떤 부부가 함께 운동을 하고 있었어요. 키 작은 여자 분이 앞에 빠르게 걷고 있고 그 뒤에 한 30센티 뒤 떨어져서 키 큰 남편이 뒤따라가요.
그걸 보면서 ‘바로 저게 인간이 제시하는 이 세상을 사는 해답이다.’ 이렇게 봤어요. 수컷은 암컷을 보호하게 되어 있어요. 그 원리입니다. 복잡하지 않아요. 생물적으로 이미 결론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문제. 왜 수컷은, 남자가 아니고 수컷이에요, 왜 수컷은 키 작은 암컷을 보호하느냐?
암컷이 새끼를 낳게 되면 그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수컷이 암컷을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뿐이에요. 그걸 도킨스라는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아주 고상하게 “dna가 스스로 전파하기 위해서 인간의 탈을 써서 스스로 자기 전개한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냥 이것은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 수컷, 그것뿐이에요. 남성호르몬, 여성호르몬,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이 자식을 또 낳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딱 인간들의 입맞에 맞는 이론을 이미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암컷 수컷으로, 여성호르몬 남성호르몬,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그 본능, 자연적 본능에서 인간은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어요.
진리, 자유, 평화, 천국, 지옥, 행복, 구원, 사랑, 부모공경, 정의, 다 개소리입니다. 다 쓸데없는 소리에요. 쓸데없는 소리, 자기 본색을 감추고 있다고요. ‘나 새끼 까고 싶다.’ 그것뿐이에요. 그것뿐.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육이라고 합니다. 그걸 육, 또는 육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알종교, 신자체가 개소리라고 하는 이유가, 인간들의 그 욕구, 자손을 번식하고 싶다는 그 번식 잘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추상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 신 개념이에요. god, 신, 절대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호세아에 나오는 발언인데 그냥 신이에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신, 모든 인간이 노리는 것, 원래 얻고자 하는 육신의 그 본능을 충실하기 위해서 신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의미를 통해서 만들어내고 그리고 그 신을 믿음으로서 자신이 원래 달성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정신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호세아에 나오는 북이스라엘 그 당시 분위기에요.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신을 섬긴 겁니다. 지금 그 중에서 여호와 아는 사람은 딱 한사람밖에, 호세아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호세아 이 마지막 대목에서, 처음부터 호세아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호세아가 육적으로 새끼를 까지요. 자식을 낳습니다.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을 낳을 때 의도적으로 음란한 여인과 혼인했는데 그 목적이 뭐냐? 인간의 현 상황에서, 이스라엘 현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그 여인과 이 호세아 선지자가 결혼했을 때 나오는 그 자식들을 보라. 그 자식들은 전부다 음란한 자식 외에는 어떤 자식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호세아가 굉장히 쉬운 책이에요. 수컷과 암컷, 남자와 여자가 혼인해서 자식을 낳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음란한 자식 하나도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이 다 음란한 자식을 낳았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함은 전부 다 음란 그 자체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인간들이었다는 것을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는 그러한 이벤트까지 벌여가면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노골적으로 전파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호세아 14장 9절에서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라고, 누가 알겠느냐, 하는 것은 호세아 본인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걸 강조하는 겁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타고 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무도 모른다는 것, 호세아 빼놓고 아무도 모르게 되면 호세아 외에 모든 사람들이 호세아와 대결구조가 되겠지요. 이 호세아와의 대결구조를 호세아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고 일반적인 신, 바알 신과 대결구조로 지금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여호와 하나님과 그 외의 모든 신. 그러니 이름만 여호와, 그것은 인정하지 않지요.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호세아의 여호와 하나님은 뭐냐, 라고 한다면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실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라고 했을 때에 호세아로 하여금 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자기정체를 모르는 그 대중들을,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음란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사명을 가진 사람, 그게 바로여호와의 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총기가 있고 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요. 바닥까지.
왜냐하면 이 의인이라고 하는 것, 오늘 본문에 의인 나오지요. 그 다음에 죄인이 나오지요. 의인과 죄인은 정적개념이에요. 고정개념입니다. 그 고정에 변화의 여지가 없어요. 확정적 개념이에요. 그 의인이라는 확정개념은 도중에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닭갈비 먹다가 목에 걸리면 계륵이라고 하지요.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골치 아픕니다.
엘리베이터가 중간 쯤 걸치는 그런 것, 의인도 죄인도 아니고 그렇게 규정짓지 마세요. 의인이라고 규정지으려면 죄인이 가는 그 바닥에서 의인이 새롭게 거기서 나타나는 거예요. 죄인의 바닥, 거기서 의인은 나타나지 거기에 합류되지 못하면 다른 데서의 의인은 의인이 아닙니다. 끝까지 의인은 지옥에서 나오는 거예요. 의는 죄에서 의가 나오는 겁니다.
어중간히 걸쳐서는 그걸 의인이라 우기지 마세요. 갈 때가지 한번 가보자는 거예요. 호세아처럼. 호세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하고 결혼 못했어요. 못하고 창녀촌에 가서 저 여자다, 하면 저 여자하고 결혼해야 돼요. 애 낳아야 돼요. 아들 둘, 딸 하나 낳았는데 셋 다 골칫거리입니다. 왜 아빠는 안 닮고 엄마만 쏙 빼닮았어요. 희한한 애들만 낳은 거예요. 다 엄마만 빼닮았어요.
자식 낳은 것이 복이라 하잖아요. 호세아는 이것도 복이냐, 이렇게 물어요. “하나님이 안 받아주는 자식을 낳는 것도 이것도 복에 속하냐? 복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왜 나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게 하셨느냐 하면, 정적개념, 확정된 개념, 규정된 개념, 이미 최종적으로 확정된 의인은 뭐고, 죄인은 뭐냐 하는 것을 정적개념으로 규정짓기 위해서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게 한 겁니다.
그러면 이 호세아가 이제는 갈 때까지 간 거예요. 음란한 여인과 결혼해서 음란한 자식을 낳은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호세아가 또 뭘 더 해야 됩니까, 라고 물으면 호세아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시합니다. 아내는 음란한 아내기 때문에 한 남편으로 만족하지 못해요. 그 성질이 어디 갑니까? 또 바람피우러 나가는 겁니다. 결혼해놓고도 집 나갔지요.
바로 그런 여자와 혼인을 하게 해놓고 3장 1절에 보면 음부된 그 여인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하라고, 음부된 여인을 사랑하라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그냥 하나님께서 너 의인이야, 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고 “이제는 네가 하나님보시기에 음녀가 된 여인을 이제는 사랑하라.” 거기에 붙인다면 “죽도록 사랑하라.” 다른 말로 하면, 버리지 말라, 영원히 그 여자를 떠나지 말라는 그런 뜻이겠지요. 그렇게 할 때 그냥은 하지 못하고 “값을 치르고 사라.” 그 음란한 여인을 값을 치르고 다시 네 아내로 데려오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제일 깊은 우물이라고 생각합시다. 상상을 그렇게 해야 돼요. 깊은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의 모든 것은 음란밖에 없어요. 세상의 하는 모든 일들은 음란이에요. 프로야구도 음란이고 프로축구 음란이고 공부하는 것도 음란이에요. 모든 것은 음란입니다. 인간들은 그 점을 알지 못해요. 그 음란이 가득 찬 우물 속에 빠져서 못나옵니다.
그러면 거기서 호세아는 저 우물바닥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거침없이 중력에 의해서 뛰어내려 가지요. 그러면 호세아는 그 중에서 자기하고 결혼할 자기마음에 맞는 여자를 찾을 수가 없고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아무나 골라도 그것은 음란한 여인이에요. 음란한 여인과 혼인해서 음란한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 지옥 같은 세계에서 하나님의 추가적인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여기서 기적이 일어나는 겁니다. 바로 사랑의 위대함, 사랑의 위대함. 그러면 자,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신의 차이점이 뭐냐? 바알신은 인간이, 본인이 선택한 신이에요. 자기심성에 맞는 신을 바알신으로 한 겁니다.
신 자체가 인간의 심성, 이념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신에 충돌될 필요가 없지요. 그 바알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뭘 로 이렇게 접선을 시켰느냐 하면, 사랑으로 다가가요. 사랑으로 다가간다면 그 사랑은 우물 제일 밑바닥에서 위로 사랑이 터져 나옵니다.
사랑이 좍 퍼져 나오게 되면 그 사랑은 무엇을 극복한 사랑이냐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음란한 것은 분명한데 그 음란한 것을 이미 값을 치렀다는 그 내용의 힘이 호세아로 하여금 우물바닥에서 우물바깥으로 올려 세우는, 그 호세아를 밑에서 사랑의 힘으로 올려붙이는 거예요.
올려붙이면 호세아는 우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바로 사랑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총명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사랑이야기 하게 되면 그 우물 위에서 계속 지옥으로 떨어지는 숱한 영혼들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숱한 사람들이 있겠지요. 아직도 자기가 가는 길이 천당 가는 줄로 알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내려오겠지요.
그러면 그 우물이라는 좁은 통로 안에서 위에서는 아래로 떨어지고 있고 바닥을 친 호세아는 사랑가지고 위로 올라간다면 그 다음에 둘이 만나는 지점이 있겠지요. 그 만나는 지점이 바로 호세아 지점이에요. 의인은 정적개념이고 악인도 정적개념이에요. 정적개념은 이게 확정된 거예요.
모든 사람이 우물 바닥에서 올라오지 않아요. 호세아처럼 하나님의 의인이라는 평가를 최종적으로 받았던 호세아에 한해서만, 호세아의 의해서만 올라오는 겁니다. 그 호세아가 사랑을, 계속해서 올라오면서 뿌리게 되면 내려오는 숱한 영혼들,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의인이 될 사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기백성한테는 어떤 소리로 알아듣느냐?
호세아가 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최종개념이거든요. 사랑이 최종개념입니다. 일단 사랑받고 또 다른 것 챙기고, 그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최종 갈 때까지 다 간데서 솟구쳐 올라온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거예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게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이미 호세아 아내의 이름이 고멜이거든요. 고멜의 뜻이 뭐냐 하면, 끝이에요 끝. 이게 정적개념이에요. “너는 끝났어. 너는 끝이야. 너는 악인이야.” 이미 규정을 했다는 말이지요. 이 규정을 했다는 말, 고멜이라고 아내의 이름을 일방적으로 지어줬고 아들 이름을 이스르엘로 지어줬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평소에 75억 인간들은 자기의 문명이라든지 미래를 누가 정하느냐? 본인이 정해요. 이게 바로 바알신을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본인이 정하는데 왜 본인이 정하느냐 하면, 내가 나 다운 내가 되고 싶어서 그래요. 내가, 내가 되는 조건을 내가 결정해요. 그러니까 그게 마음대로 안 되면 누구한테 저주하느냐 하면, 내가 나한테 저주해요. 분노를 터트립니다.
“이 등신같은 인간아. 그것도 못하나? 왜 너는 철저하지 못해? 왜 너는 실수가 많아?” 본인이 매일같이 본인을 나무랍니다. 화를 내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좀 더 잘하라고 격려하기도 하고. 본인이 본인한테 하는 행동을 인간은 꼭 남에게 하게 되어 있어요. 남한테 하는 행동은 본인이 본인한테 하는 행동, 그것의 연장입니다. 꼭 그렇게 하게 돼요.
자기한테 불만이 있으니까 그 불만을 남한테 자기한테 하듯이 하는 거예요. 인간이 왜 자기한테 불만이 있습니까? 그동안 내가 나 된다는 것, 내가 나 됨을 결정한다는 이것이 누구 식이냐 하면, 악마가 아담한테 사주한 거예요. 뒤에서 배후조종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악마의 지시를 받았고 악마로부터 뭘 공격 받으냐 하면, 내가 나 되는 조건들을 공여 받는 것, 그걸 제공받은 거예요. ‘너는 이렇게 해야 너다워. 이렇게 해야 너답다는 말이야.’라고 계속해서 악마로부터 내가 나 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공여 받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23,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어느 정도로 어려우냐 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그것보다 더 어렵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뭐 우리하고 별로 상관없네.” 그런 이야기를 했나요, 아니면 제자들이 얼굴이 새파래졌습니까? ‘조졌다. 아, 세상에 이런……’
그래서 제자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호들갑을 떨었거든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나답다는 조건을 이미 마귀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이래야 나답다는 그런 조건들을 이미 제공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걸 반대로 이야기해버리니까 당황스러워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답다는 그 굴레, 그 노선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어요. 예수를 믿으나, 하나님을 믿으나, 성경 보나, 뭘 해도 자기총기, 자기총명을 자기가 믿어요. 자기 지혜를.
그러다 보니까 세상사는 기준이 75억 가지에요. 생각해 보세요. 세상 기준이 딱 두 가지라 할 때 이 두 가지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이 두 가지라는 것은, 인간이 어떤 아이디어를 모아도 두 가지가 안돼요. 두 가지가 될 수 없습니다. 악인과 선인, 이 두 가지가 되는 것은 최종적인 심판을 미리 아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이미 확정조건을 받은 사람에게나, 주님이 내리신 심판의 조건을 미리 아는 사람에게나 이 조건이 되지 다른 사람한테는 이 조건이 성립이 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내가 나 다운 조건을 인간은 포기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1편 6절에 보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딱 두 종류의 인간들을 만드는 쪽으로 그냥 일을 밀어붙이는 거예요. 의인의 길, 의인이 있고 반드시 필히 악인이 있어야 되고,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 합류가 되고 악인의 길은 합류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망합니다.
그 두 가지 종류의 인간 외에 다른 종류는 아예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에 여러분이 동대구역에 가거든 사람들에게 전부다 유니폼을 입혀보세요. 가만 있어보자,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지만 상상해보는 거예요. 저 사람은 피를 믿으니까 빨간 유니폼, 저 사람은 복음을 모르니까 파란 유니폼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그게 호세아의 세상보기입니다. 호세아의 세상 보는 안목이고 시선이에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걸 총명이라 하는 거예요. 총기 있다. 총명이 있다.
그러면 총명이 있어서 구분하는 것은 좋은데 총명이 그 자체는 무슨 일을 하느냐?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자기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이해와 해석을 벗겨버리는 일을 총명이 하게 됩니다. 벗기는 안목, 그게 총명이에요. 그게 지혜입니다. 인간은 그 우물의 중간에 걸쳐 있어요.
내가 어느 정도 될 까, 날마다 자기를 반성하고 일기 써가면서 “하나님, 이정도 되면 나는 괜찮은 겁니까? 좀 더 착해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데 그게 좀 더 더 착해져야 됩니까, 하는 그 의문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나를 책임 있게 내가 되고 싶은 조건을 내가 결정한다는 그러한 바알적인 사고방식을 이 세상에서 부여받고 태어난 거예요.
아까 암컷, 수컷, 했지만 암컷, 수컷, 그래서 나는 죽지만 자식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식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나는 영원한 거예요. 안 죽고 자식 안에서 계속 살아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나는 영원해야 된다는 그 조건, 내가 나 다운 기본 조건, 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영원해야 된다는 그 조건입니다. 그래서 그 조건을 더욱더 구체화하기위해서 인간은 해석을 하게 되고 그리고 이해를 하게 돼요. 세상에서 그 모든 것을 공부를 하게 돼요.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내가 총명하다, 총기 있다,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그 총기와 총명은 뭐냐 하면, 나다운 내가 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모든 정보 지식은 다 끌어 모으겠다는 겁니다.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의 본성은 그런 동물적인 본성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누구와 만나야 되느냐 하면, 호세아와 만나야 돼요. 호세아는 이미 바닥을 쳤어요. 이미 알 것은 다 압니다. 마지막, 자기 부인이름이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을 이미 경험한 사람으로서 우물을 통해서 다시 위로 올라옵니다. 올라오면서 중간에서 떨어지고 있는 뭔가를 만나는 겁니다.
‘우리는 안 죽었잖아. 안 죽었으니까 우리는 죽고 난 뒤에 뭐 되겠지. 무슨 수가 있겠지.’ 그러나 모호해요 애매모호해. ‘내가 예수 믿는데 천당 갈까, 지옥 갈까? 난 참 궁금해.’ 이런 식으로. “열심히 하면 뭔가 좋은 소식이 있겠지.‘ 그냥 가능성, 짐작만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중간에 호세아와 만나는 거예요.
만나면서 우리는 무슨 계산하느냐 하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요? 이렇게 살아가도 나 구원 받겠어요?’라는 그런 데에 관심두면서 중간에 만나는 거예요. 만나는데 호세아가 하는 말이 “값없이, 주께서 대신 값을 치렀기 때문에 값없이 너는 구원받았다.”라는 소식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의인은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그 피로 인하여 모든 음란한 죄가 용서받고 값없이 의인되었다.”고 땅, 땅, 땅, 확정되었다는 그 소식을 호세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지요.
전달하게 되면 그 전달받은 사람은 그동안 내가 나에게 분노하고, 화내고, 또는 우쭐대고, 교만하고, 또는 마음이 좋았다가 절망적이다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뭔가 믿지를 못하는 이런 모든 것, 내가 내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조마조마하고, 이웃사랑도 해보고, 선한 일도 해보고, 이 모든 일, 내가 나에게 기여하려고 애썼던 그 모든 총명을 더한 일이 그 사랑을 만나는 순간 다 그것이 헛짓이 되는 겁니다. 헛짓이 돼요.
교회 와서 진리를 알고, 자유를 알고, 평화를 알고, 행복을 추구한 그것이 진짜 멍멍, 개소리에 불과한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아, 그럴 필요도 없는 것, 아무 쓰잘때기 없는 그런 것인데 그동안 내가 내걱정하면서 살았구나. 내가 착한 일 하는 그것도 시험인줄 이제 알았다. 바르게 사는 것도 큰 시험인 것을 이제 알았다. 착실하게 사는 것도 이게 큰 시험이었다. 내가 나를 나무라고 닦달 내는 이것도 큰 시험이었다.’ 이것은 마귀가 제공한 아이디어였다는 겁니다. 마귀가 제공한 아이디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 흘리도록 한 것이 마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귀가 있는 곳까지 갔다 와요. 십자가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곳, 마귀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거든요. 그 심판에 예수님이 합류했습니다. 그게 무저갱이에요. 지옥 갈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 그 무저갱에 가서 거기서 주님이 심판을 받고 거꾸로 차고 올라오는 거예요. 자기백성 데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멋도 모르고 그냥 ‘잘 될거야. 뭔가 이대로 착실하게 사니까 그다지 꾸중은 안 들을거야.’ 하고 자기가 자기당도리 하고, 자기측정하고, 맨 날 자기에게 시험치고, 오늘 70점, 내일 80점, 이런 식으로 시험치고, 내려오는 이 모든 일이 그동안 옴팍 악마에게 속아서 그 짓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총명을 받는 순간 ‘아, 그게 다……’ 비로소 깨닫게 되지요.
그러고 난 뒤에 하는 그 고백이 마태복음 8장 8, 9절에 나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전에는 어떤 자세로 살았는가? 마태복음 12장 43-45절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자기 딴에 깨끗하게 한다고 소제하고, 청소하고, “마귀 들어오지 마!” 그렇게 했는데 마귀가 갈 데가 없어요. 꽉 찼어요. 이 세상은 귀신으로 꽉 차가지고 인간의 말도 듣지 않고 그냥 편한 대로 쑥 들어오는 거예요. 왜? 인간은 처음부터 악마의 노예니까 자기의 독자적인 권한이 없어요. “악령아, 들어오지 마. 귀신아, 들어오지 마.” 할 권한이 없습니다.
악마가 들어오게 되면 악마는 또 다시 닦달내고 저주하고, “율법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너는 뭐하고 있느냐? 네가 목사가 되어서 죄지으면 되겠어?” 이런 식으로 계속 우리 속에서 힘들게 하고 우리를 소위 앵벌이를 시키는 거예요. “더, 더, 더, 더, 해야지. 더 바르게 해야지. 과거에 네가 바르게 산 것 아깝지도 않은가? 여기서 네가 주저앉으면 안 돼. 고지가 얼마 안 남았어. 이제는 10년만 버티면 천당 가는 거야.”
이런 구라, 이런 개소리, 오늘 멍멍, 개소리 많이 나온다, 이런 구라를 계속해서 해대는 거예요. 호세아는 값을 주고 샀다고 하잖아요. 값을 주고 그 아내를. 그 여인은 바닥에 있는 여자였어요. 자체적으로 자기가 개과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요. 인간성 정신 바짝 차려봐야 소용없습니다. 나의 나됨의 그 의식은 마귀로부터 주어져서 마귀를 쏙 빼닮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되겠다는 이 품성이 의식은 내 힘으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걸 어떻게 뽑아내요? 내가 나 다운 그것, 내가 신인데, 내가 신인데 어떻게 신이 신을 포기합니까?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호세아, 호세아라 해도 되고 예수님이라 해도 돼요, 호세아 속에 예수님이 있으니까, 그리스도의 영, 호세아의 총기, 성령,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딱 이야기하게 되면 내가 나를 더 이상 손대는 것이 아니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하는 그런 식으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랑의 사람으로 증거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음란한 여인에서 태어나야 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그걸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을 알고 아무리 알아도 우리의 타고난 육신의 성깔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니 바뀌지 않습니다, 라는 말 잘못했어요. 바뀔 필요가 없어요. 바뀔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바뀌어버린다는 것은 뭐냐 하면, 또 바뀐 내가 나답다고 또 마귀로부터 아이디어를 제공받는 거예요.
“네가 이제 예수 믿고 십자가 믿었잖아. 그러면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마귀로부터 규정받게 돼요. 왜? 우리의 육신의 본성은 나의 다다움으로 끝나기 때문에. 나만 챙기면 끝나기 때문에. 그 기준이 되어버리면 이 세상은 내게 속한 사람은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 가는 겁니다. 내가 이해하고 내가 판정내릴 거니까.
하지만 성령께서는 내가 내린 해석과 이해를 전부다 다 발라냅니다. 다 걷어냅니다. 이 마귀적인 사고방식을 다 깎아내요. ‘이쯤 하면 되겠지요?’ 그것도 내일 되면 또 긁어내요. 하여튼 나로 인하여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신 그 피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오늘로 알지만 내일되면 또 덮이거든요.
이 우물, 내려오게 되면 그 주위의 분위기가 덮인다고요. 내려오면 벌써 다 묻었어요. 다 묻어 있다고요. 성령이 와서 또 그것을, 총명이 그것을 다 긁어내고 발라냅니다. 뭘 하더라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생각, 그리고 그 하게 한 이유가 뭐냐?
호세아를 생각하세요. 호세아의 총명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있어버리면 하나님은 정적개념, 최종적으로 의인 따로 있고 죄인 따로 있는데 의인은 뭐냐? 호세아처럼 값없음을 이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합격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호세아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자욱한 안개처럼 모두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세상, 벌써 우리도 익숙해진 세상, 다 자기 잘났다고 외치는 세상, 우리도 한통속이 되는, 주여, 이것, 이런 것이 바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그 성령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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