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호세아 13:12-14 / 흔적 본문
흔적
이근호
2020년 7월 22일
본문 말씀: 호세아 13:12-14
(13:12)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13:13)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13: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이스라엘이 만들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적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한 나라는 자기네들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이 대대로 후손들에게 전해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파멸을 예언한 말씀도 그대로 그들의 역사(歷史)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켜주심’과 ‘망함’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망해야 함’이 곧 ‘지켜주심의 일종’이요 절차임을 그들은 감안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자신을 위한 이스라엘’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은 기능은 죄를 생산하는 민족이요 그 생산된 죄를 저장하는 창고 역할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죄란 후딱 버려야 마땅한 배제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인간을 철저하게 다루신다는 겁니다.
즉 죄의 원천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들어 있는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이 우주를 운영하는 요소로서 하나님께서 ‘죄’, 그리고 ‘음부의 권세’, 그리고 ‘속량’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인간에 원천을 두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죄의 현존성을 위해 인간이 등장했고, 음부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냐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이 있고, 속량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인간이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선과 악을 구분짓는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선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악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해도 음부의 권세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마치 아기를 임신한 여인네가 본인의 의사와도 상관없이 고통이 찾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임신한 여인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아이를 자기 몸에서 분리시키고 싶어하지만 아이는 산문에 걸려서 아이가 산모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러니 고통을 여인의 몸에 가득한 것처럼, 우리네 인생살이도 또한 그러합니다. 죽음이 주는 공포심은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인간들의 얼굴에는 눈이 있어 그 눈으로 주위에 시선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서 자기 삶과 고통을 면제하는 지혜와 정보와 힘을 획득하고자 합니다. 즉 자기 눈으로 볼 때에 자신의 신체는 곧 자기 것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달리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4:8에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 눈으로 나 전체를 거울을 통해서 볼 때, 어떻게 보아도 나의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보는 자기 시선을 문제가 없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33:20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볼 때에 자기 이해가 잘못되었음이 드러납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즉 인간의 눈에는 하자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얼굴로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를 못합니다.
즉 시선을 교환할 수가 없는 썩은 얼굴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세상 보기’란 누군가 자신을 강하게 응시하는 그 감추어진 시선을 강력하게 반발하는 시선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죄와 죽음의 권세와 속량의 초월적 요소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죄와 죽음과 속량은 ‘하나님의 기억’에 속합니다. 인간에서 나올 기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은 매사에 충돌합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죄는 고스란히 이스라엘이라는 창고에 저장이 됩니다. 이 이스라엘 죄가 간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음부의 세력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고 그 고통 속에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난감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남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속량’입니다. 값을 치르고 기존의 세력권에서 정당하게 빼내시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흔적’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제거해주시되 x표를 하시고 그 밑으로 죄를 없게 하십니다. 이 x표가 신약의 십자가입니다. 개인적인 선악 논리에 의해서 선을 행하면 악이 무마시켜주는 방식이 아니라 죄를 없애주시되 ‘너는 스스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임’을 알려주심을 남기고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래야 ‘나’ 자신을 주님의 일관된 우주 계획에 보탬이 된 자가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하나님 홀로 달성하는 새 우주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얼굴에서 나오는 우리의 시선을 부정합니다. 이는 곧 우리에게 몸체는 있으나 그 몸체의 출처가 우리 얼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이의 얼굴에서 비롯된 몸이 됩니다.
에베소서 2:22-23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아버지의 흔적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죄를 지고서 율법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는 곧 교회란 기존의 내 몸을 지켜주는 곳이 아니라 쓰레기 같은 내 몸을 처리하는 쓰레기통 같은 곳입니다. 내 몸이라는 것을 우리가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버려야 합니다. 어디에서 버릴까요? 그것은 율법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의 권세가 율법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53-55에 보면,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과 시선을 마주하실 얼굴이신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면 그 몸체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준비한 새 몸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이 ‘흔적’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성령받은 자의 몸을 위한 일이 곧 예수님의 몸을 위한 일이 됩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 25:4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살면서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51강-호 13장 12-14절(흔적)2007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3장 12-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3:12-14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처음에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그 이스라엘과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서, 수천 년 지나서 이스라엘의 말로, 끝 대목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내부에서 어떤 변화를 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어떤 변화냐 하면, 우리가 이스라엘에 소속된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 되었다, 라는 마음의 안도감, 그리고 확정지은 구원관, 그런 안일함이, 이스라엘 역사가 계속 진행되면서 그것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오해의 원인이 누가 나타나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타나야 비로소 착각이었고 오해했다는 것을 압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 스스로가 ‘우리는 잘못 되었어. 우리는 뭔가 잘못되고 있어.라는 그런 생각이 결코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 자신이 인간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변화시킬 수 없는 그 몸은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 내가 내 몸을 처리해야 되는가? 호세아나 모든 선지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장차 메시아가, 구원자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로 14절처럼 됩니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맨 사망을 이야기합니다)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해가지고는 방금 읽었던 말이 무엇을 의도로 해서, 무엇을 배경으로 이렇게 선언해버리는지 잘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왜냐하면 사망이라 하는 것은 특정개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죽는다는 그 현상을 이야기해서 사망이잖아요. 죽는다는 그 동사, 현상인데 마치 사람보고 이야기하듯이 사망아, 아무개야, 이름 부르듯이 사망을 부를 수 있는, 인간세계에서는 그런 문법이 통하지 않지요.
고린도전서 15장 54, 55절에 보게 되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사망이 인간들을 힘들게 했는데 그 힘들게 한 사망, 죽음의 위세가 이제는 소멸되었다, 그 말이에요.
누구에게만? 이스라엘에게만 소멸된 거예요. 특별히. 다른 사람은 안 되고. 그러면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 말고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인간이 생각하는 이스라엘과 달랐던 겁니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일단 인간은, 하나님의 그 계획한 바에 대해서 인간들은 일단 발을 빼야 돼요. 인간들이 구성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쓸어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12절에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을 뭐로 사용하느냐 하나의 창고로 사용하는 겁니다. 죄를 모아놓는 창고. ‘그 죄 모아서 어디에 쓸데 있다고 죄를 모으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극히 이상해요. 우리 인간은 개인적이거든요. 집단으로 생각할 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죄만 없어지면 괜찮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는 죄를 생산해서, 그걸 저축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창고를 만드신 거예요. 집단적이지요. 개인적이 아니고.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 안 받고, 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째로 다루시는 거예요. 죄를 짓게 해놓고 지어진 죄가 다른 데로 새지 않게 하고 그걸 고이 간직하기 위해서 거대한 하나의 창고로 만드신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그 계획이 이해가 되려면 개인은 자기 개인구원에서 발을 빼야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그 계획에 대해서 거들 데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제가 세 가지의 요소 또는 원소를 뽑아내겠습니다. 하는 뭐냐 죄. 두 번째는 사망, 14절에 나오지요. 사망 또는 음부라고 하는데 지옥이라 해도 괜찮고요.
처음에는 죄, 그리고 그 다음은 사망, 세 번째로는 속량, 14절에 나옵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이 우주를 운영하는 계획의 원소 또는 요소라고 할 수 있어요. 이해가 잘 안되시면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은 내가 있게 되면 내가 죄를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나를 다루고 사용해온 겁니다.
그리고 그 죄는 버리는 것이 아니고 고이고이 이스라엘창고에 저장을 해놔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죄가 있어야 되고 그 죄의 위세, 그 음부의 권세, 지옥의 권세죠, 죄가 있어야 되고 음부의 권세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이 뭐냐? 속량하는데 있어서 일체 인간의 기대와 인간의 협조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죄와 권세 속량 모두 일방적으로 친히 하나님께서 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 자체도 인간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죄라는 요소 그리고 음부의 권세, 악마지요, 음부의 권세, 지옥의 권세, 그 다음에 속량 값을 치러서 용서하는 그 세 가지가 인간의 조작이 스며들 수 없도록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런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계획을 추진시켜 나간다, 그런 뜻이에요. 인간은 거기서 빠지라는 거지요. 죄짓는 것에서 인간이 빠져야 돼요.
내가 죄지었다, 하면 안돼요. 죄가 덮칠 때, 죄가 왕 노릇할 때 인간은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그 인간들의 집단은 할 일이 뭐냐? 할 일은 13절에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판소리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난감하네~.” 난감하게 만들었지요. 뭐가 난감하냐 하면,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죄를 짓게 될 경우에 인간은 본인이 죄를 지었다, 가 아니라 죄의 비축을 하게 되어 있어요. 죄가 비축된 그 저장고, 창고에. 인간이 살아가는 형편은 어떤 형편이냐 하면, 예를 들기를, 여인네가 아기를 배었는데 여인네가 아기하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임신되는 것이 아니지요. 창세기 3장 16절에 보면 여인이 임신할 때는 그냥 임신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고통 중에 임신한다 했어요.
아기를 임신했다, 하는 자체는 인간이 요청하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해산이 따르는 고통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그 고통에서 면제되는 수는 뭐냐? 그 아기가 빨리 내 배에서 분리되면 되는 겁니다. 아기 낳는 산문을 통과해서 딱 분리되면 되는데 이게 딱 산문에서 걸렸어요. 턱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은 고통대로 심한데 대책이 없네요. 아무 해결책이 없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이 죄를 지었다, 내가 죄를 지었다, 하면 인간들은 마귀에 의해서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익히 알기 때문에 죄 지어도 죄 하나 지었을 때 착한 일 열 개 하게 되면 그것은 다 무마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죄를 짓는다, 할 때는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지만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나를 다룰 때는 착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인간의 이 삶이라는 고통, 죄가 주는 그 중압감, 죄가 가져다주는 불안감과 처벌, 징벌 받게 되는 예측되는 공포, 그 고통에서 인간은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와 더불어서 죄가 주는 죄책감이라는 무게감에 평생토록 인간은 바들바들 떨면서 거기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착한일 해도,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늘 미흡한 것이 있어요. ‘이것까지라도 내 장래를 보장 못한다. 이것까지라도 내 행복을 자동적으로 보장 못한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왜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으면 자체적으로 선을, 의를 행해서 해결하려고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그 계획, 죄가 찾아오고, 그 다음에 죽음의 권세, 힘이 찾아오고 그 다음에 속량이 오는 모든 요소는 인간이 다룰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거기서 손을 떼야 돼요.
왜냐하면 이 세 가지의 원천은 인간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심어놨어요. 인간이 태어날 때 선악과가 같이 있었어요.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죽음이 없는데 인간이 스스로 자기에게 처벌내리기를 ‘내가 죄지으면 죽어도 좋습니다.’ 이게 인간이 아니에요.
죽을 수밖에 없는 열매를 기어이 따먹게 되었다는 말은 인간보다 먼저 있는 것이 있어요. 원천적인 것이 있어요. 선악과, 선과 악을 아는 나무가 먼저 심겨져 있고, 그 뒤에는 죽음이 같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식목일에 그 나무 안 심었어요. 생명나무 안 심었습니다.
이래 보나 저래보나 어떻게 보나 인간은, 자기의 원천은 자기 안에 있지를 않아요. 내가 나 됨의 원천이 내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냥 인간은 당하기만 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이스라엘은 아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지요.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기 때문에 아는데 다른 민족에서는 그걸 알 수가 없지요.
더구나 아기 낳을 때 고통이 따른다. 이것은 인간이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내가 아이디어 내서 내가 창안한 몸이 아니에요. 이것은 주어진 몸인데 그 주어진 몸에 대해서 인간들은 죄 안에 있으면서 그 주어진 몸을 뭐라고 보느냐? ‘이것은 내 몸이다. 내 육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잘못된 거예요. 인간은 자기육체를 보면서 내 몸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얼굴에 눈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눈을 보고 거울을 보면서 ‘저 거울에 비친 저 몸이 내 몸이다.’라고 그걸로 끝내버립니다. 그 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몰라요. 하여튼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몸은 분명히 내 머리와 얼굴이 달려 있는 내 몸일 것이다.’
내 눈은 위쪽에 있잖아요. 아래쪽에 눈에 달린 것이 아니고 얼굴에 있지요. 내 얼굴을 보니 거기에 내 몸체가 있고 그 몸체는 거울에 전신이 다 비취니까 내 것이라고 여기신다면 거기에 대해서 뭔가 하자가 있고 뭔가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요.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면서 애 낳으면서 아프기는 왜 아파요? 그걸 왜 당연한 것으로 못 느끼지요? 이상하게 느끼지요.
그것이 바로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모세가 시내산 올라가서 하나님을 볼 때에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어도 하나님의 얼굴은 못 봅니다. 그러면 인간의 몸의 원형은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끼리 출세하고, 인간끼리 모여서 우리 중에 누가 가장 하나님의 몸다운 몸이냐고 뽑아내지 마세요.
하나님의 몸은 친히 하나님이 보여준 그 몸입니다. 하나님의 몸이 우리의 몸의 원형이에요.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를 못합니다. 이 말은 얼굴은 따로 있고 몸은 바로 여기 있는 거예요. 인간의 몸의 원천은 따로 있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뭐가 문제냐? 내 얼굴에 있는 눈을 가지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그 몸이 내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 얼굴이 썩은 얼굴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인간이 남을 보는 것을 가지고 ‘시선’이라고 해요. 내가 누굴 보는 그것을 가지고 시선이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시선은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억지로 감추기 위한 용도로 시선이 움직여요.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누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억지로 덮어씌우기 위해서 인간은 나름대로 부지런히 뭔가를 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관찰하기에 내 몸은 누구 몸이냐 하면, 주님의 몸이고 하나님의 몸이에요. 그런데 내 얼굴에 달린 내 눈은 거울을 보면서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이 몸은 내겁니다.’ 하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로마서 14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했거든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초상화와 사진의 차이점은? 사진은 그냥 찰칵, 찍어버리면 있는 그대로 다 사진에 등장하지요. 그런데 초상화는 아무리 정교하게 사진처럼 그린다 할지라도 그리는 그 초상화가의 대상에 대한 감정이 다 들어 있어요. 감정, 느낌, 그림 그릴 때의 습도와 온도, 그런 것이 다 녹아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앉혀놓고 초상화를 그리는데 실내 기온이 42도다. 짜증나서 막 그리지요. 그런데 에어컨 팡팡 틀어놓고 기분이 좋다. 아주 기분 좋게 그려버리지요. 이 땅에서 인간이 먼저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먼저 계시지요. 먼저 계신분이 나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전부다 단절되어 있어요.
다 끊어졌으니까 죄 짓고 난 뒤에 기껏 하는 것은, 내가 보매 주인공이 되겠다는 거예요. 내가 눈에 보이는 대로 그 정보를 긁어모아서 나는 이렇고, 너는 이렇고,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내가 세상을 이렇게 판정한다, 라고 본인이 일방적으로 판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한소리 하게 되면,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극구 그것을 저지하지요.
나 네 말 안 들어, 이런 식으로. 그래서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는가? 호세아에 있는 이 말씀, 호세아 13장 14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이 어떻게 고린도전서 15장 54, 55절에서는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어떻게 그걸 완성이라고, 그걸 성취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뭐냐?
중간에 누구 하나 어떤 몸이 개입해요. 우리 몸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이 개입한다고요. 예수님 몸이 개입해버리면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요, 우리가 죄안에 있어요. 죄 안에 있고,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죄가 나를 다스렸다, 죄짓게 했다는 그 증거가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에브라임은 죄를 짓고 죄가 어느 정도 찼다 싶으면 그걸 저장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입각해서 볼 때에, 이것은 ‘내가 사적으로 죄를 짓고 내가 선으로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 그런 식으로 죄가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죄는 간수되어야 돼요. 간직되어야 돼요. 귀하게. 그게 ‘슬기로운 죄 생활’이에요. 죄는 간직되어야 돼요.
내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속량을 위해서 죄가 필요한 거예요. 주님의 속량을 위해서. 주님의 속량을 위해서 죄가 필요하다면 죄와 속량 두 개만 있으면 되겠지요? 아니에요. 하나가 더 있어야 돼요. 음부, 지옥의 힘이 있어야 돼요. 지옥의 권세, 지옥의 권세가 있어줘야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내가 착해가지고 내 죄를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이 모든 것이 헛수고로 드러나게 만드는 어떤 힘을,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의 요소 원소로서 그것을 허락하신 겁니다.
음부의 권세,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게 살아도 음부의 권세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인간이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요.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인간이 벗을 수 없는 죄의 권세를 벗겨줄 때 그냥 개인적인 죄가 벗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라는 그 무게가 주는 중압감, 그게 음부의 권세거든요, 죄 있는 곳에 저주가 있잖아요, 그 저주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죄짓는 것과 그리고 인간이 힘들게 사는 것과 그리고 거기서 속량, 구원받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예요.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기억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억과 현재 인간의 사적인 기억이 계속 충돌되는 겁니다. 내가 내 스스로 천국가고 내가 내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나의 기억과 그런 조작적인 것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한대로 밀어붙이는 그 하나님의 기억, 그 기억의 요소에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죄와 그리고 음부의 권세와 그리고 속량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을 누가 이기는가? 하나님의 기억이 이기는 거예요. 어떻게 이기는가?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죄를 삭제시켜 주되 죄의 흔적을 남기고 삭제해버려요. 그래서 죄를 저장하는 겁니다.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저장시켜 놓고 그 다음에 그 저장된 죄에 대해서 ‘×’표를 해놓고, 즉 죄를 없애되 ‘×’는 남아요.
그 표는 남기고 그 밑에 속해 있는 죄는 delete,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흔적이 남는 거예요. 그 흔적이 뭐냐?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인격이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흔적을 남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의 흔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다음차례, 그 다음차례, 그 다음차례는 누구냐? 오늘날 성도들을 하나님의 흔적으로 삼습니다. 십자가의 흔적.
성도로 하여금 죄 안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로 하여금 죄짓게 하시고, 죄가 인간보다 우세하니까 죄짓게 하고 그 다음에 그 인간의 힘으로 그 죄를 이기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길 수가 없어요. 저주의 그 압력을, 저주의 그 중량을 못 이겨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 죄를 없애버리되 그냥 없애지 않고 ‘×’표를 해놓고 없애버리는 거예요.
골프 칠 때 홀컵에 공을 넣잖아요. 한번 두 번 세 번 만에 홀컵에 들어가게 하는데 한번 탁 치고 두 번째 ‘칩샷’ 해서 가까이 가서 쳤는데 너무 멀어요. 그 다음에 “내가 계속 칠까? 네가 칠래?” “너무 먼데 네가 먼저 쳐라. 다음에 내가 칠게.”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 끄집어내서 공이 원래 있던 자리에 놔둡니다.
그럴 때 골프공과 동전을 같이 놔두는 것이 아니에요. 동전만 놔두고 그 자리에 있던 골프공은 거기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 때 그 동전이 흔적이라 그 말이지요. 그 자리에 골프공이 있었다, 를 표시하는 거예요. 그래야 나의 구원이 주님의 솜씨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공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 천당 못 보내서 환장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예수님이 하신 일의 표식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는 거예요. 이마에 표시하듯이.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죄짓는 것, 죄를 생산하는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슬기로운 죄 생활’이에요 그게.
그 죄가 뭐냐? 아무리 선을 행해도 무슨 죄가 이런 죄가 다 있는지, 아무리 선을 행해도 죄책감,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내가 뭘 봐야지요. 내가 선인지 악인지를 봐야 되는데 보려고 하면 이 썩어빠진 해골 같은 내 눈을 가지고 세상을 일방적으로 판정을 하고 평가를 하거든요.
아주 모가지를 날려야 돼요. 우리의 모가지는 날리고 몸체는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고 머리되시는 분이 따로 있어요.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에 보게 되면,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 몸보고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을 보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머리를 보고 복종하는 거예요. 우리의 머리 되시는 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예수님이 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위해서 이 땅에 남겨둔 죄악 된 흔적이다. 흔적, 동전이에요. 골프공이 있던 그 흔적으로 있는 거예요. 우리 몸이 따지고 보면 귀한 몸이에요. 죄짓는 몸이지만 굉장히 귀한 몸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흔적이니까.
마태복음 25장 40-4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상당히 어려운 말씀인데요. 주님께서, 네가 진실로 그렇게 했다고 한 당사자, 천국 가는 사람이 의아해하면서 “주님, 언제 제가 예수님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언제 영접했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여기 있는 내 형제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 지극히 작은 자의 몸체는 그 사람에게 달린 그 사람의 얼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얼굴 주님의 얼굴에서 나온, 그 원천에서 나온 몸인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모세의 얼굴은요, 하나님을 응시, 보는 것으로 이미 탈락이에요. 네 목 위에 달린 그 얼굴에 달린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은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얼굴부위, 누가 내 몸을 규정하고 누가 바라보느냐, 하는 그 얼굴부위를 나중에 구원받을 때 교체시키겠다는 거예요. 이 얼굴부위를 주님의 얼굴로 교체를 시키는 거예요. 주님의 머리로. 수술한번 해야 실감나지요. 목 위로 잘라내고 예수님의 머리를 박아 넣든지 해야 되지요. 형제들 보이지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니까요.
지난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사울이라는 사람이 겁도 없고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니까 예수님이 중간에 찾아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을 핍박한 것이 곧 나를 핍박한 거예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 말은 그들이 훌륭하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완벽하다, 가 아니라 예수 믿는, 성령이 온 사람은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흔적으로서 이 몸체를 갖고 있는 거예요. 물론 썩은 얼굴도 갖고 있지만. 눈이 있으니까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겁니다.
설교 처음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이스라엘은 착각을 한 거예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 구름기둥 불기둥에 홍해도 갈라지고 하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양 자기가 괜찮은 양 그렇게 여겼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의 시작에 불과했고요.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면서 그들은 뭔가 우리 자신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는 역사를 보내는 겁니다. 호세아 13장 11절에 보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그 들이 이방나라처럼 왕을 달라고 할 때 “왕 줄게. 그런데 왕 줄 때 왕 주는 그 취지가 왕 뒷면에 붙어 있는 것이 너는 안보이지?”
그들이 왕을 달라는 것은 그들 각자의 판단력과 이성, 합리성, 자기인생은 사적으로 내가 알아서 구원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때문에 왕을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의 자기 몸을 자기가 시선을 두고 판단하는 그것은 나중에 예수님이라는 색다른 몸이 온다는 사실, 하나님 아버지와 유일하게 연결되는 어떤 특정한 몸이 이 땅에 메시아로 온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어떤 지혜를 끄집어내서 모으면 괜찮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죄를 저장해놓고, 그 다음에 표시 해놓고, 그리고는 delete, 죄를 지워버려요. 죄를 지울 때 앞에 표시한 대목에 이스라엘대신에 누가 거기 들어가느냐? 예수님이 들어갑니다. 숫자가 많다고 이스라엘이고 숫자 적다고 이스라엘 아닌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한분이라도 이스라엘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듯이 천사가 자기 머리위에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유일하게 성취하시는 분, 언약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한 요건을 예수님이 혼자 다 이루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되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얼굴이 있고, 그 얼굴은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고, 교통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얼굴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땅에서 예수님의 몸을 만드는 거예요. 그게 교회고 그게 새로운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뭐냐? 흔적이에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흔적으로 왔어요.
이 땅에 오셨고 이제는 흔적2, 흔적3, 흔적4……, 계속해서 예수님께 일어난 새로운 일이 반복해서 머리에서 일어난 일이 첫 번째고, 그 다음에 몸으로 확산되면서 머리에서 머리에 계신 분의 똑같은 그 운명 그 가시는 길을 몸체가 같이 딸려서 가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첫째부활이라고 하고 그 다음 나머지를 두 번째 부활, 세 번째 부활, 이렇게 부활로 설명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23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러면 예수님이 뭘 했는가? 오늘본문 14절에 있는 대로 속량을 하셨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음부의 권세, 다른 말로 지옥의 권세, 다른 말로 악마의 권세, 악마의 권세의 자리에 유일하게 맞닥뜨린 분은 이 호세아의 순간에서 장차오실 메시아밖에 없어요. 메시아가 의도적으로 음부의 권세 제일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갑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 아버지, 날 도와 주세요.”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고 자기 몸을 처리하는, 백성의 죄를 짊어졌기에 죄악 된 몸이지요. 죄짓지 않았지만 죄의 몸이에요. 이걸 처리하심으로 마귀한테 맡기는 거예요. 나를 죽이도록 맡기는 거예요. 사탄이 가룟유다에 들어갈 때 예수님이 가룟유다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 네 할 일 해야지.”
날 잡아 죽여라, 그 말이지요. 체포되는 데 도와줘라, 그 말이지요. “사탄아, 네 할 일 해라.” 그 말이지요. 예를 들면 교회 나올 때 왜 교회 나옵니까? 내 몸을 내가 쥐고 있으면 안돼요. 이 내몸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내 시선에서 봤던 내 몸이기 때문에 내 몸을 그냥 쥐고 있으면 이게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도 못하고 영원한 음부의 권세 지옥의 저주아래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것은 내 몸을 버릴 데를 찾는 거예요. ‘내 몸을 어디에 버리지?’ 고린도전서 15장 55, 56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 속에, 우리보고 죄라고 규정하는 그 율법 안에다가……, 좋은 찬스가 온 거에요. 율법이 우리보고 죄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내 몸을 그 율법에다 던져버리세요. 이 몸, 썩어빠진 내 시선에서 간파된 내 몸을 율법의 저주가 있는 곳에 던져 넣는 거예요. 교회 오는 것은 내 몸을 지켜달라고 교회가 아니에요. 내 몸을 버려달라고 교회에요. “내 몸을 어느 쓰레기통에다 버리면 됩니까? 내 몸을 버리는 거예요.
내 몸에서 내가 나를 놔버리는 겁니다. 율법의 저주 앞에서 어느 하나라도 못 지키면 이것은 저주에요. 그것도 늘, 항상 어느 하나라도 못 지키면 저주입니다. 따라서 율법 앞에 내 몸을 그냥 쓰레기 몸이라고 갖다 버리면 되는 거예요. 이 썩은 얼굴이고 뭐고 다 갖다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머리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뭘 통과했느냐 하면, 사망을 쏴대는 그 율법의 권능에서부터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그 권능에서 벗어난 분이 우리의 머리가 된다는 주님의 시선이 그 때부터 우리 온몸에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표다. 주님의 맡겨준 동전이다. 그리고 이 몸은 주님이 낸 흔적 때문에 이 몸은 서서히 늙어가고 서서히 없어져 가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그리고 주께서 주신 인, 성령의 인 치심, 이 동전은 결국은 예수님처럼 똑같이 영광스러운 그 머리를 닮은 그 몸, 그 신랑을 닮은 신부로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계획이 아니고 주님의 기억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일관된 기억에 대해서 호세아가 미리 이렇게 예언하신 겁니다.
“이스라엘아, 왜 내가 이스라엘 너희들을 만든 줄 아느냐? 너의 계획이 아니야.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어. 이스라엘 만들고, 죄짓게 하고, 죄지은 것 버리지 않고 그대로 다 저장해놓고 그 저장한 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곤욕을 치르고, 고생을 치르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그 죄의 권세에서 못 빠져 나오고, 그렇게 해서 ‘아, 우리는 안 돼. 우리는 안 되는거야. 내가 내 몸으로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야. 이 음부의 권세에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이 율법의 권능, 쏘시는 이 저주의 권능에서 누가 우리를 살려주시랴.’
그런데 속량하시는 희소식이 들려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친히 그것을 속량했을 때 그 다음부터 14절에 뭐라고 우리는 자신 있게 이야기하느냐? “사망아, 너는 나하고 상관없다. 사망아, 너는 차라리 내 앞에, 사망이 어디 있느냐? 지옥이 어디 있느냐? 지옥이 내 앞에서 숨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위세 등등한 그 죽음의 협박, 교회 나오면 3백만 원 벌금 물린다는 그 협박, 그 협박에 여러분이 아직도 주눅 든다는 것은 아직도 내 몸을 내가 간수하고 내가 지키려는, 내가 나라는 인간을 조작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내 썩은 눈으로 봤던 그 세상 것에 취해서 그 지식가지고 내 몸을 자꾸 건사하려고 하니까 이게 화근입니다.
내 몸을 내가 놓지 않은 이것이 사달난 거예요. 그냥 놔버리세요. 죄짓도록. 새삼스레 죄지을 필요는 없어요. 모든 것이 죄 되게 만들어요. 죄 없을 때는 죄 짓는다, 이렇게 되겠지만 밥 먹는 것도 죄인데 뭘 새삼스럽게 죄를 져요.
모든 것이 죄였다는 것, 뭔가 내 힘으로 내가 구원해 보고자하는 시도였다는 것, 그것은 내 기억이지 하나님의 기억과 충돌된다는 사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 앞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억만 내 기억을 쫓아내시고 주의 일관된 기억만 우리 안에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쓸어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구상한 것, 내가 목표 삼은 것, 내가 기대한 것, 잘못된 내 몸부림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속량의 위력과 효과가 우리 안에 가득차서 예수님의 공로임을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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