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호세아 14:1-3 / 3자 관계 본문
3자 관계
이근호
2020년 8월 5일
본문 말씀: 호세아 14:1-3
(14: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14: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14: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라는 제국도 나옵니다. 앗수르라는 나라는 그 당시 모든 민족과 도시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큰 나라입니다. 더구나 군사력이 막강해서 그 어느 나라도 앗수르가 시키는대로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나라가 성경에 거론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만 있으면 성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같은 인간들을 만나고 찾습니다. 서로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나’가 우선되고 그 ‘나’와의 맺은 관계이기에 타인은 2자(者) 관계가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을 무죄(無罪)한 자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일단 무조건적으로 자신은 무죄한 자이고, 그 다음에 자신이 2자관계를 통해서 유죄(有罪)한 자나 나와 같은 무죄한 자끼리 친구삼고 사업도 같이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구원되는 자들은 무죄한 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2자 관계를 기초로 해서 맺어지는 인간 사회에서 나름대로 무죄를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단독적으로 자신을 무죄한 자로 여기기 때문에 이 생각에 확고합니다. 이러한 타인과의 만남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도 2자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무죄한 본인이 무죄하신 하나님과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 왜 앗수르라는 나라가 등장했겠습니까? 북이스라엘의 나라 경영이 하나님이 없는 앗수르 나라 경영과 동질입니다. 경제적으로 부하고 강력한 통치력 아래서 나라가 일사불란하고 움직이는 것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힘이 센 나라이기도 이스라엘은 깍듯이 대우해 줍니다.
열왕기하 15:19-20에 보면,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돈 주어서 잠시나마 앗수르 통치를 모면했습니다. 돈으로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노략질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빈번하게 되니 자존심이 상한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그 당시 큰 나라라고 알려진 애굽나라에 기대어 앗수르의 벗어나보려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17:4-5에 보면,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 년을 에워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직접 하나님과의 2자 관계로 구원되면 될터인데 왜 앗수르를 자꾸만 엮기게 하시는 겁니까? 사사기 2:21-23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허나님을 모르는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구원을 위해 자기 백성을 치는 뭉동이로 사용하시려는 겁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2자 관계가 아니라 이방민족까지 동원해서 구성하는 3자 관계 속에서 참된 무죄와 의를 생성해내시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냥 놔두면 당연히 자신은 무죄요 의인이라고 자부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은 불신세계와의 2자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앗수르 이 나라는 참으로 합리적 국가경영을 통해서 대제국 건설과 확장에 성공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민족 섞어버리기 정책, 즉 핏줄 섞어버리는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열왕기하 17:24에 보면,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대로 동일한 의식으로 무장된 같은 핏줄과 민족들은 정치적으로 단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공산이 큽니다. 따라서 중앙정부에 대들지 못하도록 이주정책을 써버린 겁니다. 그런 식으로도 나라가 부강하고 막강하게 되면 그 혜택은 온 백성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선전합니다. 이것이 앗수르 나라에서 통하는 정의(正義)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앗수르 정책에 대해서 대꾸할 말이 없습니다. 앗수르 나라의 성격이나 이스라엘의 성격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쪽 유다나라는 다릅니다. 남쪽 유다는 2자 관계가 아니라 3자 관계였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유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예루살렘을 찾아와서 단단히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속히 항복하기를 종용합니다. 랍사게라는 현지 장군이 주장은 단순한 엄포가 아닙니다. 수월하게 성문을 여는 것이 왕으로 자기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동안 숱한 민족과 신들을 만났지만 다들 앗수르 군대에 다 함락되었다는 실증적인 증거까지 거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남쪽 유다나라에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37:5-7에 보면, “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2자 관계로서 정복만 일삼은 앗수르는 3자 관계 속에서 정당한 의로움이 나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나라에 천사가 방문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루 밤에 앗수르 군사 185,000이 몰살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0:29-30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취미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마저 재판해서 죽여버린 그 정신으로 넘실대는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아를 긍휼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8에 보면,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즉 예수님과 성도와 성령의 3자 관계 속에서 성령님은 성도의 세상적인 2자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얻을 수 없는 의와 구원을 형성시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데려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
14장 1절-3절, 짧은 글이지만 거기서 구원이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요약되어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구원이 되려면, 우선 여기서 북 이스라엘 시대로 돌아가게 되면, 북 이스라엘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또 뭐가 있어야 되느냐? 앗수르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 구원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2자관계(二者關係)’에요. 두 사람의 관계고 구원은 ‘3자관계(三者關係)’에서만 구성이 되는 겁니다. 2자관계라 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갈 때 쉽게 접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사람들 사이에 인사하고 주고받을 때 뭘 주고받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그들이 제공하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2자관계에서는 서로 알고 지내고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같은 동질의 것이 주고받는 겁니다. 그렇게 2자관계가 되어버리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동질이다.’ 그렇게 오해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앗수르라는 나라, 좋지 못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용하시는 이유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한테 잘 보이고, 믿습니다, 하면 되지 앗수르라는 나라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라는 나라, 바벨론이라는 나라,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세상이 있어줘야 구원이 되는데 우리는 그런 것 다 귀찮다고, 내가 바로 하나님 알면 구원이 되겠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요.
사사기 2장 22-23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들일 때에 이방민족을 쫓아냈잖아요. 그런데 이방민족들이 멀리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국경 그 경계선에 딱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머물게 하신 거예요. 여기 보면 21-23절에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2자관계, 하나님과 우리사이로 구원이 된다가 아니라 그 옆에 지켜보고 있는 좋지 않은 민족들이 딱 도사리고 있는 그 민족들과 더불어서 3자관계를 형성해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2자관계에서만 안되고 3자관계에서만 되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할 때 심판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유죄, 죄가 있기 때문에 심판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주고받을 때 거기에 나는 죄가 없다, 무죄지요. 너는 죄가 있다, 유죄지요. 무죄 유죄가 마구 섞여 들어오는 겁니다. 단독적으로 자신이 유죄무죄를 단정 짓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친하게 인사하고 지내도 그것은 남남이 되는 겁니다. 나 잘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네가 필요하고 너는 너 잘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하다. 이미 스스로 자신은 무죄하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자부하면서 만나고 있지요. 그렇게 해서는 이것은 만나기 전부터 자기는 죄 없다고 우기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그러면 유죄나 무죄는 어디서 생기는가? 유죄 무죄는 3자관계에서, 그 과정 속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어느 누구의 개인적인 무죄가 되지 않게 만들어요. 그러면 오늘본문에서 3자관계는 하나님, 또 이스라엘, 앗수르라는 제국, 이렇게 삼자관계입니다
이 3자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구원이지요.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말은 말씀으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2절의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온다. 어디서? 앗수르에서. 이게 바로 3자관계지요.
“앗수르 제켜버리고,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에게 돌아오너라.” 그것이 아니라 “앗수르에 잠겨 있던 네가 말씀을 가지고 나에게 돌아오라.”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북 이스라엘하고 앗수르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가? 그들은 2자관계로 지내왔습니다.
자, 앗수르하고 북 이스라엘이 2자관계로 지내왔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열왕기하 15장 19절에서 20절에 보면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하매 므나헴(북이스라엘의 왕)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실감나지요. 양도세.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앗수르라는 나라와 북이스라엘 나라가 서로 똑같은 의식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동질성이 있어요. 돈이면 다 되는 겁니다. 힘이 없다. 그러면 돈 긁어모아 주면서 “도와주세요.” 하면 돌아가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 돈 관계뿐만 아니에요.
앗수르라는 나라가 대단히 큰 나라인데 이스라엘이 그 앗수르라는 나라한테 압박당하면서도 부러운 겁니다. 자꾸 의지하려고 했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앗수르에게 너무 의지해서 다 빼앗기니까 화가 나서 애굽이라는 큰 나라, 그 애굽나라에 의지해볼까, 하는 그 구절이 열왕기하 17장 4, 5절에 나옵니다.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년을 에워쌌더라.”
이 구절에서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입니다. 이제 북 이스라엘이 망하는 거예요 망할 때 북이스라엘이 평소에 나라를 어떻게 경영했는가? 힘이 있는 나라에게 의지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애굽한테 의지해서 앗수르라는 큰 나라의 위협에서 애굽나라가 도와주리라 생각했는데 앗수르가 더 힘이 셌어요. 그래서 그 나라는 망했습니다.
망하고 난 뒤에 열왕기하 17장 6절에 보면 앗수르 왕이 어떤 정책을 썼는가? “호세아(선지자가 아니고 북이스라엘 왕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앗수르왕이 어떤 정책을 폈느냐? 그 땅 살던 사람을 그냥 그 땅에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핏줄을 섞어 버려요. 혈통 같은 것을 다 찢어버립니다. 열왕기하 17장 24절에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치 간도에 살던 조선 고종 밑에 있던 조선 사람을 중앙아시아로 스탈린이 강제로 이주시켰잖아요. 거기 있으면 자꾸 독립하려고 하고 시끄럽게 되니까 섞어 버린 거예요. 그리고 러시아 사람을 간도에 살게 만들고. 앗수르도 그런 정책을 쓴 겁니다.
왜 혼합정책을 왜 써야 되는가? 혈통이나 집안끼리 있으면 자꾸 정치적 결집을 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힘이 모아져서 반란을 꾀할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 반란을 없애고 모든 민족을 통합해서 단일체로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서 앗수르는 그야말로 그 당시 최고의 거대제국을 이뤘습니다. 힘이 넘치는 제국, 돈 많고 영토 많고 사람 많고 특히 군사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그 나라를 보면서 다른 지배받는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그 나라를 부러워했겠어요. 저렇게 되어야 나라답다. 이게 뭐냐? 2자관계에요. 2자관계란 뭐냐 하면, 내가 이스라엘 왕이라면 “하나님이여, 저 앗수르처럼 되게 도와주세요.” 이게 2자관계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이 일치되게 하옵소서.” 이런 거지요.
이는 3자관계가 아니고 2자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이자관계가 된다는 것이 좀 난해해 보인다면 아주 쉬운 것도 있어요. 마가복음 10장 29, 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자, 여기서 2자관계가 뭐냐? 자기의 혈통입니다. 자기의 가족이에요. 딱 보면 눈빛만 봐도 서로 통하지요.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 그게 2자관계지요. ‘결혼해서 애 낳고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 우리끼리는 생각이 같으니까 내가 의로우면 너도 의롭고 내가 무죄하면 너도 무죄하고 무죄함끼리 모이면 무죄한 가정이 되고 무죄한 가정이면 구원받는다.’ 이게 2자관계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면서 도대체 왜 신앙에 실패하느냐 하면, 나라는 것이 3자관계가 아니고 2자관계에서 나온 그런 나를 구원하려 하니까 실패하는 거예요. 앗수르라는 그 나쁜 나라가 있어야 되는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앗수르나라 빼고 갑시다. 하나님도 안 믿는 민족 그거 우리가 신경 쓸 것 뭐가 있느냐?”
아니에요. 막상 아까도 봤지만 북 이스라엘이 아쉬울 때 애굽 찾고 그리고 앗수르가 쳐들어오니 조공 바치고, 실제적으로 앗수르나라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주민들 다 죽이고 다 데려가서 나의 살던 고향에 다른 사람이 와서 사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정들었던, 물장구치고 놀던 그 아름다운 내 고향 땅에 다른 사람들이, 백인이나 흑인들이 와서 살면서 자기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추상이고 관념입니까? 실제로 그래요, 실제로. 그러면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을 거지요. “우리가 왜 하나님도 믿지 않는 앗스르에게 당합니까?” 하고 물으면 하나님 답변은 간단해요. “그들과 네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 똑같은 생각이라고. 부러워했잖아. 그들을.” ‘나는 미국이라는 큰 나라가 좋아요.’ 그렇게 부러워했다는 말이지요.
탈북자들이 ‘나는 남한이 좋아요.’ 전부 다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난 남한에 가서 냉면집 해야 지.’ 그게 2자관계입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공통점을 끄집어내서 서로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 그게 행복이겠고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아름다운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2자관계에요.
그런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한테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하나님 저 알지요? 저도 하나님 압니다. 친하게 지냅시다.” 2자관계에요.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잡아당겨요. 사사기2장 22절,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구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읽은 마가복음 10장 29절의 말씀처럼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 아무리 천국이 좋고 영생이 좋지만 그동안의 2자관계를, 아주 다복하게 했던 형제자매 어미 아비를 다 버립니까? 너무 심한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쯤에서 해답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 편하겠지요?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2자관계 아니에요. 거기서 3자관계가 형성됩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있어요. 3자관계에요. 그러면 우리, 예수 믿는다는 그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받을만한 것들을 제시했느냐?
아니에요. 우리는 앗수르 출신입니다 세상과 급이 동급이에요. 세상 좋아하는 것 다 좋아하는, 세상이 탐내는 것 같이 탐내고, 그런 동급이에요. 따라서 성령께서는 세상과 우리 사이의 이자관계를 파괴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 성령에 의해서 여기에 마가복음 10장 29절 말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게 만들어버리죠.
아, 너무 냉혹하고 차갑지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북 이스라엘이 이렇게 앗수르 부러워하고, 애굽 부러워하고, 세상제국들과 동급으로 그들이 갖고 싶은 것 자기들도 갖고 싶다고 그렇게 했는데 그러면 앗수르에게 망하지 않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가 북이스라엘 밑에 있는 유다나라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뭘 살펴볼 필요가 있느냐? 도대체 북 이스라엘과 유다나라의 차이점이 뭐냐? 도대체 북이스라엘이 2자관계라면 유다는 3자관계인데 그 3자관계의 요소가 유다한테는 어떻게 그것이 드러나는가? 그걸 살펴보게 되면 우선 앗수르라는 나라는 이사야 10장 5절에 보면 몽둥이입니다.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그냥 쓰이는 몽둥이에요. 홍두깨같이 그냥 쓰이는 거예요. 삼자관계에서 주님이 앗수르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2자관계로 앗수르에게 조공 바치고 잘해보려고 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까지 합세한 3자관계에요.
강강술래 한다고 보면 됩니다. 3인이 손잡고 빙빙 돌면서 내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 3자관계 속에서 죄 없음을 하나님께서 생산해 내는 겁니다. 3자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의가 되는 거예요. 혼자 의 챙길 생각하지 마시고. 그러면 유다는 북 이스라엘과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그 산헤립이라는 앗수르, 앗수르가 이스라엘에 많이 걸쳐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몽둥이로 사용하실 때, 앗수르를 통해서 삼자관계를 형성할 때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사야 37장 7절에 보면 산헤립이 와서 북쪽 이스라엘 다 잡아먹어버리고 이제는 남쪽 유다나라를 점령하려고 포위한 거예요.
히스기야 왕 때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바들바들 떨었지요. 앗수르가 당시에 얼마나 큰 제국인지 애굽까지 그리고 터어키까지 다 먹었어요. 산헤립의 신하 랍사게장군이 하는 말이 “우리는 수많은 전쟁을 하고 수많은 민족의 신들을 다 격파했다. 따라서 너희들이 조그만 소국인 유다나라가, 뭐 무슨 신? 여호와? 큰 나라 신들도 우리한테 다 무너졌는데 그 여호와가 너희나라 지켜주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사야 37장 10. 11절이지요.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너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건짐을 얻겠느냐.”
그럴 때 히스기야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물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앗수르, 너희가 물리친 것은 신이 아니고 잡신이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조작해낸 조잡한 신이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었다.”
랍사게는 자꾸 항복하기를 종용합니다. 자기 자신도 쳐들어가면 여러 가지 비용이 들어가니까 좋게 가자, 이렇게 하는 겁니다. 히스기야가 옷을 찢고 랍사게에 대해서 제 3자를 부릅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하고 상대해서 애굽에 의지한다든지 조공을 바쳐서 2자관계를 유지해서 해결하려고 한 반면에 유다의 히스기야왕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5절-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소문)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산헤립왕은 나중에 부하들에게 죽어요. 이게 3자관계에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게요. 덴마크에서는 지금 화폐를 사용 안하기로 했답니다. 그 이유는 편리함, 국가행정의 투명성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디지털 화폐만 사용하게 해서 그 사람이 어느 식당에 가서 냉면을 먹었는지, 만둣국을 먹었는지, 어느 마트에 가서 쮸쮸바를 샀는지, 오렌지주스를 샀는지, 동장이 뭘 줬는지, 이런 것 전부 다 하나의 통치자의 기억창고에 몽땅 다 기록됩니다.
이 말은 전 국민이 한 사람의 절대자에게 어디서 뭘 하며, 돈은 얼마를 벌며, 세금은 얼마 내며, 그 사람이 사적으로 누구하고 놀러갔는지, 이런 것이 전부 다 밝혀지는 거예요. 편리 때문에. 광주의 어느 교회에 공무원이 들어와서 제대로 마스크 썼는지, 거리 띄우는지, 그걸 조사하러 왔어요.
그걸 보고 광주의 목사님이 그 공무원을 고발했습니다. 예배방해죄로. 그리고 영장 없이 침범한 죄로. 모든 것이 차별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을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는 충분히 협조해야 된다는 겁니다. 코로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협조를 충분히 하라는 그 말이거든요. 그게 굉장히 합리적이에요.
그리고 앗수르가 점령지에 혼합정책을 쓰는 이유는, 같은 민족끼리 사돈의 팔촌이 뭉쳐 있으면 반란을 일으키잖아요. 얼마나 반란방지에 효과적이고 합리적입니까? 그러니까 나라를 위해서 개인이 갖고 있던 소망이나 꿈들은 나라 위한다는 점에서 좀 접으라는 그 말입니다.
“나라가 있어야 너희들이 사니까 나라 잘되기 위해서, 다른 나라와 경쟁해서 이기기 위해서 영토를 넓히고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국민 된 도리로서 모든 정보를 한 절대자에게 다 바치라.” 그 말입니다. “어디서 뭘 하는지 다 들통 나도록 하라.” 그 말이지요.
그게 바로 2자관계에요. 네 생각하고 내 생각이, 국가 생각과 내 생각이 같다는 거예요. 그게 2자관계입니다. 그걸 그들은 의롭다고 보고 정당하다고 본 겁니다. 나라가 잘 되어야 우리가 잘 산다. 이건 정당한 일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나라를 흠모합니까? 심지어 유다의 아하스왕은 앗수르나라의 종교가 그렇게 좋아서, 그 나라가 대체 어떤 신을 믿고 어떻게 제사를 드렸기에 이렇게 큰 나라가 되었는가, 해서 그 설계도 그대로 가져와서 분점을 냈어요. 이게 이자관계에요. 내 생각하고 네 생각하고 같다는 겁니다.
둘이 생각이 같으면 그것은 죄 있다가 아니고 우리끼리 죄 없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것을 국가가 감시하는 것에 대해서 흔쾌히 그것을 수용하라는 거예요. 앞으로 모든 시대가. 나라가 그렇게 해놓고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국가가 하는 이 합리적이고 정당하고 실용적인 이 일에 대해서 너희가 무슨 이의가 있나? 틀리면 틀렸다고 해봐 이의 있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앞으로 예배당에 모이지 말고 인터넷으로 하라는 겁니다. 나라에서 지시를 내리는 거예요. 일제시대 때는 어떻게 한 줄 알아요? 예배시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 찾지 말고 ‘일본천황만세(덴노헤이카반자이)’ 일본천황과 일본 신을 먼저 찬양하고 그 다음에 교독문 읽고 여호와를 예배하든지 하는 거예요. 일본 신을 더 높이고 예배하라고 형사들이 예배당 앞에 앉아 있다고요.
왜냐하면 그 당시가 일제시대거든요. 강점기니 그런 말 쓰기도 싫어요. 그냥 일제시대거든요. 그러면 목사나 믿음 좋은 장로들과 훌륭하신 목사님들 뭐하고 있느냐, 그 생각하겠지요. 개코같은 소리, 뭐가 믿음이 있고 뭐가 신앙이 좋아요? 전부 다 2자관계인데요. 자기신세 편하고 자기 인생 편하게 살려고 하나님 믿은 거예요.
내가 좋은 게 하나님도 좋은 것이라고 이자관계를 형성한 거예요. 진짜 신은요, 철통보안이에요. 한 사람도 못 빠져나와요, 천국으로. 그리고 천국도 이 땅으로, 두루 도는 화염검 때문에 못 빠져나옵니다. 둘 다 철통보안, 둘 다 막혀 있어요.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2절에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 싸운다고 한 겁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은 지금 자기의 통치력을 잃기 싫은 거예요. 그걸 포기하기 싫은 거예요.
“너희들이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괜찮은 것 줄게. 그러니까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 있잖아. 줄게.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말 들어. 오케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걸 아까 이사야 37장에서 랍사게가 그대로 히스기야 왕에게 했어요. 싸워봤자 게임은 끝났어요.
“너희들 무기 봐. 백성들 갇혀 있는 판에 물도 떨어질 것 아닌가? 봐줄게. 너희들 깨끗하게 목숨 살려줄 테니까 성문 열어라. 좋은 것이 좋다고 히스기야 왕이여, 왕이 되어서 백성들 고생시켜서는 안 되잖아. 고생 안 시키는 방법은 뭐냐? 성문 열고 화친 맺어서 다른 나라들처럼 앗수르제국의 속국이 되는 거야. 보장해줄게. 행복, 너희들 행복 원하잖아. 행복 때문에 하나님 믿잖아. 그거 보장해줄게. 만약에 우리말 거부하면 다른 민족들 작살내는 것 봤지? 그렇게 작살내줄게.”
앗수르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들인지요. 포로 잡힌 사람을 산채로 껍질 벗기는 민족이에요. 말 안 들으면 그렇게 해요. 옛날 몽골도 현재의 이란 침입했을 때 그렇게 잔인했어요.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가르는 일도 하고 아주 잔인했어요. 본때를 보이는 거예요. 본때를 보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은 2자관계 외에 다른 관계는 없는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 그 외에는 없는 겁니다. 강한자가 정당하고, 강한 자가 정의롭고, 강한자가 무죄고 의로운 거예요. 없는 사람은 그 자체로 유죄 죄가 있는 겁니다. 그게 전부에요. 그리고 신이라 하는 것은 취미활동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라.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몸뚱이 편한 게 최고고, 고통 없이 사는 것이 최고지, 그 뭐 허황된 하나님 믿어서 뭐 할 건데?”
그걸 랍사게가 이야기했는데 북이스라엘 쪽에서는 그걸로 넘어갔어요. 왜? 세상이 부러워서. 똑같은 방법을 지금 유다에게 쓰는 겁니다. 자, 그러면 유다는 삼자관계에 있는데 산헤립이 뭘 놓쳤느냐? 바로 천사를 몰랐던 겁니다. 천사를.
아까 제가 이야기한 대목이 이사야 37장 18, 19절에 나오는데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 땅을 황폐케 하였고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활동하게 합니다. 이사야 37장 36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다 죽었어요. 천사가 찾아온 겁니다. 천사가 유다에 찾아온 거예요. 선지자와 함께 있던 겁니다.
다른 데는 선지자가 없지만 이 유다나라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던 거예요. 국가, 심지어 이 지구까지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불로 다 태워집니다. 이 지구를 하나님께서 다 멸망시켜요. 벌건 불로. 유황불로. 그리고 지옥이 있습니다. 이게 과연 허황된 일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이자관계가 허황된 일입니까?
이제 우리가 아셔야 될 것은 바로 하나님마저 인간에게 심판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이 땅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사람이 도리어 심판한 셈입니다. 엉망이에요, 엉망. 누가 누구를 심판합니까? 피조물이 창조주를 심판하는 이러한 성격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리는 이 세상에서 뭔가 편하게 살 생각만 했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성령이 왔지요. 성령이 왔고 귀신들도 알아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귀신들이 알아요.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을 알아요. 그러니까 사도들, 성령 받은 사람은 뭘 아느냐? 둘 다를 알아요. 2자관계와 3자관계의 차이를 압니다.
호세아 14장 3절 끝에,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요한복음 14장에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했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라,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뭘 주시는데?”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분이 아니고 생선을 달라는데 전갈 주실 분 아니다.”
그러면 뭘 주느냐?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주시게 되면 우리가 2자관계에 빠져 있는 이 세상이 전부고 이 세상이 진짜 현실, 실제, 실제 이 현실, 오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진짜야, 라고 하는 2자관계에 물든 우리, 앗수르의 일부가 되어 하나님마저 심판한 이 더러운 성질이 있는 이 세상과 한통속이 된 나를 성령께서 나무라십니다.
“너는 고아가 되어야 해. 이 땅에서. 주님 말고는 아무도 너를 이 땅에서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 세상에서 후, 하면 같이 동조하고 뭐 하면 동조하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물론 가족끼리 헤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족이 같은 집안이고 성씨가 같다는 2자관계로 하지 말고 성령의 개입으로 가족이라도 3자관계를 형성하면 되는 겁니다. “아버지, 이 맛있는 소시지가 웬 겁니까?” “이것은 성령님께서 주셨다.” 뭐 이런 것. “너는 왜 성적이 왜 이 모양이냐?” “성령께서 놀게 해주셨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성령이 고아같이 두지 않고 하나의 가장이 되셔서 이끄시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3자관계로 형성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좋은 것이 좋다고 대충 살면서 교회는 취미생활로 때우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저희들, 이 세상 사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세상의 정체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마저 때려죽이는 이 세상을 좋아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인하여 이 세상 나그네처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호세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세아 14:9 / 총명 (0) | 2020.08.20 |
---|---|
호세아 14:4-8 / 저주통과자 (0) | 2020.08.13 |
호세아 13:15-16 / 실패의 기적 (0) | 2020.07.30 |
호세아 13:12-14 / 흔적 (0) | 2020.07.22 |
호세아 13:9-11 / 왕을 주신 이유 (0) | 2020.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