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호세아 14:4-8 / 저주통과자 본문
저주통과자
이근호
2020년 8월 12일
본문 말씀: 호세아 14:4-8
(14:4)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14: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14:6)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14:7)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14: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나의 진노가 떠났다’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노가 구원의 필수적 코스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주를 겪지 않는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저주란 나의 모든 가치를 다 잃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평생 공들이며 지켜왔던 것을 전부 하나님에게 도리어 빼앗기는 겁니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라고 여긴 것들이 도리어 철거당하면서 ‘은혜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은혜라는 것이 우리 좋아라고 준 게 아니었던 겁니다. 은혜가 겨냥하는 목표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히브리서 6:4-6에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 소유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그 의미를 향하여 결부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저주받은 사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에게서 개인적으로 이익이냐 손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이 구원의 필수절차라는 겁니다. 피할 수 없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들이 원하는 신(=바알신)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신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이상적인 자아상은, 자아라는 덩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퍼부은 모든 노고와 수고를 외부에서 알아주는 존재가 되는데 있습니다. 나의 가치가 외부에 의해서 강제로 빼앗기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는 신을 인간들은 부담 느끼지 않고 믿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가나안 땅의 토속종교입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의 고유의 가치를 빼앗는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 2:8-9에 보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약속의 땅은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선호하는 종교로 뒤덮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도저히 예상못하게 일을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정신으로 뒤덮여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정신이 뭘까요? 요한복음 13:36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무리 베드로가 예수님 곁을 바짝 따라 붙어도 예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인간은 이 세상의 한도를 보여주기 위한 측정도구였습니다. 인간이 예상하고 상상하는 그 세계는 결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 계시는 곳은, 하늘나라 쪽에서 누군가 오셔서 친히 우리를 데리고 가주셔야 합니다. 우리 홀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원리는 자신만의 가치를 키우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곳을 ‘애굽’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들 끼리 단합해서, 인간들이 원하는 신의 이름으로 종교를 삼고 자신들의 가치를 지켜달라고 제사하는 그런 동네가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그들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로 자기 백성을 뽑아가게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의 일입니다.
서기 1284년 독일 하멜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큰 재앙이 있었습니다. 무려 130명이라는 아이들이 하루 밤 사이에 사라진 겁니다. 그래서 생겨난 동화가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동화입니다. 도시에 하도 쥐가 많으니 도시 당국에서 1천냥이라는 상금을 걸고 죄 퇴치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어느 사나이가 나타나서 피리를 부니 그 많던 쥐들이 그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다음날 사나이는 시에서 약속한 천냥을 내어놓으라고 하니 시당국에서 돈이 아까와서, “이제 쥐도 없으니 우리는 너에게 돈을 안 주어도 그만이다”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약속을 위반한 것이 화가 난 사나이는 그날 밤에 피를 부는 그 도시 아이들이 그 사나이를 따라 숲 속으로 떠나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출애굽의 원칙을 그대로 재현한 것같습니다. 바로 이 원칙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원칙입니다. 우리네 세상은 나만의 소박한 가치라도 꽉 불들고 싶어도 자꾸만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납니다. 사라집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지키고 싶어도 자신마저 언젠가 사라지고 맙니다.
죽기 전에 챙길 것 챙기고 싶어도 결국 내가 사라지면 그것들도 같이 사라집니다. 이 말씀은 곧 이 세상 자체가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죽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가 상주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아무리 천국을 상상해도 그것은 실제 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 세계는 예수님만이 가신 그 세계입니다. 인간들을 따라올 수 없는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산 채로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예외없이 겪여야 하는 그 저주를 통과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생긴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오늘 본문에서는 ‘레바논의 포도주’가 있는 곳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2에 보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뽑아내신 일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극상품 포도주’입니다. 인간이란 이 세상의 한도를 드러내는 도구이기에 이 한도초과적인 모습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5-6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즉 성도는 홀로 애쓰는 식으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의 가지라는 자격으로 천국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천국의 열매가 맺혀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의 선교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는 일입니다.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죽은 자’라고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 구원의 필수코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하나님에서 십자가만 보이는 하나님으로 바뀌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54강-호 14장 4-8절(저주통과자)2008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4장 4-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4:4-8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찌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방금 읽었던 본문은 상당히 긍정적이고 환한 느낌을 주지요. 그런데 그 환한 느낌은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 너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거치지 아니하면 이러한 환한 느낌도 그냥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혹독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이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고 당연히 우리가 그 진노 속에 있어야 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후속조치가 되는 거예요. 여기 4절에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하는 말은 진노 속에 있는 경우에 한해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복이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겁난다고 피해버리고 진노는 나 몰라라, 하나님의 무서운 그 저주는 나 몰라라, 하고 그냥 뒤에 나오는 열매 같은 거나 반기면서 성질 급하게 후딱 따먹으려고 설쳐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의절차가 아닌 다른 인위적절차기 때문에 천국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제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어요. 너는 따라오지 말라, 가 아니라 네가 따라오고 싶어서 못 따라오는 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은 인간이 상상했던 그 천국이 아니었어요. 이 지상에서 바짝 베드로가 예수님 곁에 붙어 있으면, 예수님 가는 길이 천국 가는 길이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고 딱 붙어 있으면 같이 동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베드로가 이 진노라는 절차를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를 통과해야 된다는 이 절차를 놓쳐버리고 야무지게 마음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순수한 마음으로서.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처소가 만들어지게 되면 그 때 내가 너희를 나 있는 곳에 데려오는 식으로 구원할게 내가 가서 너희를 데려오는 식으로 구원할게.”
인간이 천국을 누가 마다하겠어요? 누가 천국을 싫어하겠습니까? 하지만 천국을 그리워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나오신 분이 가이드가 되어서, 우리한테 오셔서 우리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친히 이끌어야, 그래야 베드로가 갈 수 없었던 그곳에 합류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예수님의 성모교회라 해서 한 세트가 되어 있어요. 예수님 죽으신 곳, 그 십자가 앞에 있던 바위, 그리고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까지 한 세트로 되어 있어요. 기업가들이 그 땅을 다 사서 거기에 예배당을 여러 개 지었어요. 지금은 성모교회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여러 개의 예배당을 지었거든요.
거기서 성도들이 울고불고, 바위에 입 맞추면서 주님을 그리워하고, 실제로 가보면 울컥한 마음이 들지요. 감정이 살아나지요. 자, 그럴 때 그런 것을 충분히 느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된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내 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물을 내 마음속에 그리면서 기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감정의 확대에 불과하고요.
실제로 누가 나를 데리고 가야 돼요. 내 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접근해가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데려가야 돼요. 이것은, 주님가신 천국은 인간이 예상도 못한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거쳐야 된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자꾸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진노를 입 꽉 다물고 견뎌내면 되지.’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라 하는 것은 그 고통이 올 때 입 꽉 다물고 통과하는 데가 아니에요. 그 정도 같으면 베드로가 해야 되지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철수해갑니다. 은혜라 하는 것은 줘놓고 빼앗아가요.
성령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만 은혜라 하는 것은……, 은혜가 왔을 때 사람들은 좋아라, 하지요. 세상에 이런 기적의 은혜를……. 그런데 진짜 은혜의 진수는 은혜 줄 때 은혜다운 것이 아니고 주신 은혜를 빼앗길 때 거기에 진짜 은혜의 진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흔히 사람들이 참 해석하기 어렵다는 난해구절로 소문난 구절이 히브리서 6장에 나옵니다. 6장 4-6절에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대목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사람도 있어요. 온 간증집회 다니면서 은사 받은 것 자랑질을 했는데 문제는 내가 받은 은사를 내가 보관할 자신감이 없다는 겁니다. 치매 때문에. 그리고 나에게 어떤 사태, 코로나라든지, 교회 나가지 말라는 나라의 법이라든지, 어떤 조치에 의해서 강제로 신앙을 박탈당하고 신앙을 삭제당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입 꽉 다문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그까짓 거 신앙조차도 버려야 될 때가 오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도 장담 못하거든요.
만약에 공산당이 와서 “너 목사지?” “아닌데요. 무직인데요.” 목사라고 하면 죽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얼굴을 짓밟아라.” “제가 아예 박살을 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못해요. 인간은 정치적으로 카멜레온같이 자꾸 변신을 굉장히 반복하고 있습니다.
< 꺼삐딴리>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어요. 아무 유명한 건데 그 소설에 일제의 앞잡이 친일파 였던 의사가 북한에 있다가 소련군이 오니까 소련군에게 붙었다가 나중에 남한에 와서는 미군에 붙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온갖 처세술을 벌이는 내용의 소설이 <꺼삐딴리>라는 책이에요.
상당히 명작인데 이것은 뭐냐? 개인이라 하는 것은 국가 밑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대로 받아줘야 되지 거기에 거역할 어떤 힘은 자체적으로 없어요. 따라서 변신에 변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은 약하니까. 바로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금 호세아 본문이 다 끝나 가는데요.
왜 그들은 바알종교를 믿었느냐, 라고 사람들은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된 채로 호세아를 끝낼 수가 있고 선지서를 읽을 때가 있어요. 성경을 봐도, 왜 그들은 그토록 선지자들이 믿지 말라는 바알을 섬길까, 하는데 이 바알종교라는 것이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 당시 바알종교가 그게 신이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가 이상한 신이에요. 여호와가 이단 같아요. 인간의 보편적인 것,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사람이라면 다 같이 마음속에 잠복되어 있는, 기본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절대자, 그게 바알입니다. 바알의 특징은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준다는 겁니다. 그냥 교양으로 살짝 들으시기 바랍니다.
민주주의사회라 하는 것은, 옛날 신분사회 봉건사회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특정직업에 대해서 공정한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것이 민주주의에요. 예를 들어서 40년 동안 목침을 만든 사람이 있지요. 40년 동안 목침을 만든 사람과 병원의 의사하고 똑같이 자기만의 고유의 가치가 있음을 사회가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가방수선해서 월 수천만 원 버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불고기 굽는 맛 집하는 사람 있어요. 불고기 굽는다고 해서 공무원이 와서 이 가치 없는 짓을 하다니, 그렇게 신분적으로 차등두지 말자는 겁니다. 민주주의 사회라 하는 것은 공무원을 하든지, 농사짓든지, 나는 불고기 굽겠다, 하는 이것은 나만의 고유한 가치니까 이 가치를 나는 무산시킬 수 없다, 이걸 인정해 달라, 그것이 민주주의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은 뭐냐? 민주주의적 신이에요.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신. 그런 가치를 중성적 가치라, 중립적 가치라, 하는 겁니다. 중성적 가치, 옳다 그르다, 를 누구한테 평가받을 필요가 없는 가치,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그걸 가지고 시시하다느니 돈 안 된다느니 욕하지 말라, 나는 이게 사는 보람이다, 그런 공정한 중성적 가치들이 분포를 이룰 때 가장 균등한 공정성 있는 민주주의 정의가 실현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입니다.
그러한 나의 본성에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이런 가치를 민주주의도 인정하지만, 죽어서도 인정해주는 그 천국의 신 그게 바로 바알신이에요. 이걸 한마디로 이야기해드릴까요? 나의 가치를 빼앗지 않는 하나님, 이게 바로 바알신입니다. 그냥 신이에요. 바알 자체가 아버지, 그런 뜻이 있으니까 그냥 신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편하게 믿을 수 있는, 아무 부담 없이 믿을 수 있는 신이 바로 그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2장 9절에 보면, 약속의 땅이라는 특수한 지역이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편하게 믿을 수 있는, 나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신, 바알 신, 그 바알 신 앞에서는 자기가 죄인이 아니에요. 열심히 한다는 칭찬의 대상이지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것은 바알 신 앞에서는 없어요. 나를 저주하고 나를 진노한다. 그런 신이 아닙니다. 그냥 가인처럼 정성들여 바치면 복주는 그런 신이에요. 나를 위한 신이에요. 나를 위한 신. 그런데 호세아 2장 9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빼앗는, 나의 고유한 가치를 빼앗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 의 본질 모르면 5십년, 6십년 교회 다닌 것 다 소용없고 다 헛것예요. 바알 신을 섬기신 거예요. 십자가 의미를 모르면서 계속 다니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 앞장세워서 하나님 일하신다는 그 의도를 도대체 알 길이 없지요. 십자가를 좋게 생각하는 겁니다.
‘사랑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런 식으로 내 것을 빼앗는 십자가라는 생각을 못하고, 내 것 있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주의 사랑을 덧붙여 준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오므라이스처럼 노란 계란 하나 덮어주는 것처럼, 케첩 좍 뿌려서 그런 식으로 뭐 추가적으로 주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내 것은 안 건드리고.
여자들이요, 사랑을 하는 것을 겁내는 이유가 또 버림받을까 싶어서 그래요. 제가 보면 우스워요. 여자들은 사랑을 할 때부터 진정한 사랑을 몰라요 오므라이스의 계란 덮인 것처럼 날 보호하는 사랑만 찾고 있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내 것은 안 다치고 내 것을 포근한 이불처럼 덮어주는 보디가드 같은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웬 다이아~(And I will always love you~)” 그런 노래 알지요? <보디가드>에서 휘트니휴스턴이 부르는 노래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사랑하기가 겁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계산적입니까? 버림을 안 받겠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내가 뭔데 버림을 안 받아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개 56마리 키우는 사람이 있어요. 양 하연이라는 가수는 개를 56마리 키우는데 내가 보기에는 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유기견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덮을 이불을 사랑해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겁니다. 자기를 안 잃어버리겠다는 거예요.
자기를 밑천으로 삼아서 자기가 원하는 내가 되려는 그러한 수작은 주님한테 안 통합니다. 그것은 바알에서나 통하지요. 주님께서는 빼앗아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제가 아까 요한복음 13장에서 본 대로, 베드로가 딱 붙어서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고자 한 그 모든 시도에 대해서 주님께서 베드로가 따라올 수 없는 세계로 훌쩍 넘어가 버렸어요.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뭐냐? 인간이라는 것은 이 땅에 한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도구가 인간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인간으로 왔지만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에요. ‘한도초과적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못 따라가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준다는 말은 이것은 놀라운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으로서는 갈 수 없는 그 세계에 성령이 옴으로써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세계에 나를 집어넣거든요. 그런데 그 작업자체에 절차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진노를 맛봐야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9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나라의 법으로 금식기간이 있었어요. 8월 14일부터 15일까지 금식 이런 것이 있어요. 그것 안하면 벌금 3백만 원 때리는 겁니다. 예수님 오신 나라가 그런 나라에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안 해버렸어요. 앞으로 국가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에 지하교회가 시작되는 겁니다. 등록되지 않은 교회. 북한처럼 지하교회 할 수밖에 없어요. 지하로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감시하고 이러니 이게 무슨 교회입니까? 예수님에게 “당신제자는 왜 금식 안 합니까?” 이렇게 공무원이 이야기하니까 마태복음 9장 15절의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겁니다.
금식한다는 말, 신랑을 빼앗긴다는 말은 예수님은 은혜거든요. 은혜가 있을 때 제자들은 좋아라, 했지요. 그러나 그 은혜의 진짜 진가는 예수님이 있을 때가 아니라 예수님을 빼앗길 때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요. 우리가 믿던 것이 바알인지 진짜 하나님인지 하나님을 잘 믿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된 통으로 뒤통수 맞아야 돼요.
하나님의 뜻대로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작살나야 됩니다. 엄마도 두 종류의 엄마가 있습니다. 좌파엄마와 우파엄마가 있는데 좌파 엄마는 애가 딱지를 이만큼 모아놓으면 그것을 안 버리는 엄마는 좌파엄마에요. 왜? 인권이 살아 있으니까. 그런데 우파 엄마는 3년간 모아놓은 딱지 다 버립니다. 애한테는 그게 생명이거든요.
전도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손짓하는 거예요. 당신은 죽었다고 당신 목숨은 목숨이 아니야. 당신은 지금 자기 목숨은 곧 사라질 목숨입니다. 여러분 군에 가본 사람은 압니다. 군대얘기 해서 미안합니다만. 훈련소 마치고 여러 가지 자대훈련도 있지요. 101보니 103보니 자대훈련까지 하면서 동기생들이 함께 고생하다 보면 동기에가 생겨요. 동지애가 생긴다고요.
몇 개 월 같이 살다 보니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우샤우샤,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전출호명을 해요. 아무개는 포천, 아무개는 춘천, 아무개는 저 속초, 아무개는 저 마산통합병원 후방, 이런 식, 아무개는 보안부대, 아무개는 카투사, 분명히 동기들이 한 덩어리고 한 몸이라 여겼는데 갑자기 하나씩 둘씩 사라져요. 내 주변에서 사라진다고요.
이게 인생입니다. 인생이란 사라지는 거예요. 좋았던 할아버지, 할머니, 나한테 예쁜 손자라고 잘해줬던 그런 분들, 내 친구처럼 대해줬던 유머 많던 삼촌, 술을 많이 먹었지만 용돈줄 때는 팍팍 기마이 썼던 우리 중간삼촌, 늘 젊을 때 예쁘기만 했던 고모들, 어느새 다 죽었어요.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고등학교 때 같이 농구했던 친구들, 자살했다느니 해서 사라지고 또 어떤 친구는 병들어서 암에 걸려서 죽고. 이렇게 자꾸 사라져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요. 왜 자꾸 사라지는지? 심지어 안 죽어도 같이 있던 아들 장가보낼 때 사라지지요. 딸 시집보낼 때 또 사라지지요. 집에 키우던 개가 죽으면, 개도 또 하늘나라 같다고 하면서…….
무슨 하늘나라가 개까지 들어가는 하늘나라가 다 있는지 어쨌든 사라지지요. 모든 것이 사라져요. 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은 한도가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통과 못한다는 기구로서 도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났어요. 그게 환상입니다.
오늘 낮에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의 설교와 제 설교의 차이점이 뭡니까? 그렇게 묻기에 제가 이렇게 답을 했어요. 자기 딴엔 복음 전한다는 그 유명한 목사는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 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열심을 다해서 복음 전하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그것이 보고 싶은 거예요.
저는 뭐냐? 모든 것을 환상으로 봅니다. 어차피 사라질 것, 어차피 모든 것이 환상이에요.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같이 있어도 얼마 안 있으면, 몇 년 있으면 없어져 죽어요. 죽으면, 뒤돌아보면 그 긴긴 세월 보낸 것 같지요. 아니에요. 그 세월도 없어져요. 모든 게 환상 속에 둘러싸여 사는 겁니다. 인간은.
꿈같아요. 모든 것이 꿈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나 자신도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은 뭐냐? 복음은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부활의 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부활의 영이 올 때 비로소 우리는 상상도 못한 세계로, 거기에, 성도는 거기서 모여 사는 겁니다. 그것도 영원히, 영원히 사는 거예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전에 절차가 뭐냐 하면, 내가 나에게 전도해야 돼요. 너 죽었다고, 너 죽었다고 손짓해야 돼요.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그걸 인정해야 돼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 특히 나 자신을 내가 붙들지 마세요. 붙잡는다고 해서 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1283년 6월 26일 날 하멜른이라는 작은 마을에 재앙이 일어났는데 아이들 130명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재앙으로 인하여 어떤 동화가 나왔는데 그 동화가 <피리 부는 사나이> 라는 동화에요. 어느 마을에 쥐가 들끓어서 시당국에서 천 냥의 상금을 걸었어요. “이 쥐들을 없애주는 사람에게는 천 냥의 상금을 준다.”
어떤 사나이가 피리하나 달랑 들고 와서 “제가 쫓아내겠습니다.” 했어요. 그래서 그 사나이가 피리를 부니까 그 마을의 쥐들은 그 사나이를 다 따라간 거예요. 그 사나이가 숲속으로 들어가니까 쥐도 따라서 숲속으로 사라졌어요. 그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나이가 “돈 줘. 상금 줘.” 하니까 그제야 돈이 아까운 시당국이 “네가 피리를 불어서 쥐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쥐들이 그냥 스스로 죽은 것이다.” 해서 상금을 안줬어요.
안주니까 피리 부는 사람이 “너희들이 상상도 못할 예상도 못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너희들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시 당국자가 “해봐! 해봐! 해봐! 쥐도 없는데. 뭐 걱정거리도 없는데. 아쉬운 것이 없다. 해 봐!” 이렇게 하니까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부니까 그 마을 아이들 130명이 다 따라 나갔어요.
그것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애굽에 있던 바로가 “해봐! 해봐! 해봐! 네가 뭔데? 누가 너를 보냈어?” “여호와.” “여호와? 나 여호와 몰라. 네가 재주껏 할 수 있으면 해봐. 우리 권력에서 네 백성들,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사람, 뽑아갈 사람 재주껏 한번 뽑아가 봐.” 한 거예요.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그리고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발랐더니 자기 백성, 무려 남자만 쳐서도 60만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따라, 피리 부는 사나이 따라 나와 버렸어요. 이것이 바로 여호와가 하시는 반복적인 대원칙이에요. 이 원칙이 지금도 안 죽었습니다. 이 원칙대로만 이루어져요. 이 언약원칙이거든요.
이게 바로 언약을 앞장세우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다른 신은 언약이 없어요. 약속이 없어요. 계약서가 없다니까요. 지지난 수요일에 제가 계약서 이야기를 했어요. 계약서가 있고 난 뒤에 인간이 있지 계약서 없으면 인간은 아예 없는 존재가 된다고 했어요.
성경의 복음이라는 것은 보게 되면 굉장히 단출하고 단순해요. 자, 전도가 뭐냐? “너 죽었어.” 이게 전도에요. 교회는 사람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죽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뭔가 죽는 것이 있어야 사는 게 그 다음에 있지, 자기가 살았다고 멀쩡하게 있는데 그게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죽었어요. 뭘 해도 죽었어요. 60년 후에 당신이 이 땅에 있는지 내가 장담하는데 당신은 없다.
인간은 사라져요. 60년 남았다 하지만 그 날 되어보세요. 남은 것이 하나도 안 남았어요. 남았다고 여기는 여유조차 하나도 안 남았다고. 인간은 그래요. 하루 살면 과거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여유 만만한 것이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육체를 가지고 자기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존재를 본인이 감당 못해요. 자기를, 이 덩치를 감당 못해요. 사람이 자꾸 외로워요. 그리고 왠지, 뭔가, 저게 있으면 행복하다 싶으면 막상 가져보게 되면 그다지 아니고 또 다른 결핍을 또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감당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세계는 한도 있음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로서 인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체적으로 충족감, 자충족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스스로 만족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호세아 14장 4절에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이 말은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떠난 것이 아니에요. 하나의 절차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떠나게 될 때 비로소 죽었던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나는 죽어 있고 내게 주어지는 생명은 내 생명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7절에 나옵니다.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여기 레바논의 포도주가 나오는데 이사야 5장 2절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내가 직접 약속의 땅을 포도원 삼았다는 겁니다. 이 말씀하기 전에 전제를 먼저 합시다. 그 땅은 이미 바알신이 미리 밑에 딱 장판처럼 깔려 있는 곳이에요. 깔려있는 곳에 하나님이 율법의 성취를 위해서 그 땅을 접수했고 그 땅에 일방적으로 애굽에 살던 자기백성을 이주정책 이주를 시킨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때는 여호와를 알았지요.
그런데 막상 약속의 땅에 들어오고 난 뒤에는 여호와냐 바알이냐를 두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부담을 계속 지고 있었던 겁니다. 형식적으로는 여호와 맞는데 그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방식은 그냥 신이에요. 나를 위한 신, 나 잘되기 위한 신이었지 여호와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 그런 신은 원래 토착민들에게는 없었어요.
나의 중성적인 가치, 나는 내 가치를 위해서 산다, 나는 내 딱지놀이를 위해서 내가 산다. 이거하고 똑같은 겁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들이대면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약속 율법을 버리면 내가 친히 너희들을 빼앗아버릴 것이다. 이 땅에서는 원래 곡식이 안 자랐는데 내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곡식이 나온다. 그런데 그 곡식을 맛보면서 그게 어디서 나오는지를 분간 못한다면 내가 그 백성을 통째로 뽑아내는 그러한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라고 신명기 28장에서 율법을 가지고 그런 약속을 했잖아요.
여기 이사야 5장 2절에 보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다음 2절에 계속해서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는데 그들의 포도는 들포도였다. 어떻게 하느냐? 걷어내야지요. 작살내야지요. 저주해야지요. 하나님의 진노가 와야 되지요.
그렇다면 오늘 호세아 본문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철거되었다, 없어졌다, 이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은혜가 와서 그리고 다시 뜯어가면서 십자가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아,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십자가라는 하나님자신의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측정기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내 행복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그 피가 네가 알지 못하는 영원한 세계로 데려가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주신 거예요. 그 절차는 아까 말씀드렸지요. 베드로로 하여금 가지 못하게 만드는 절차 가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다시 오는 절차, 성령을 보내는 절차.
자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하기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진노가 철수 되었으니 이제는 신바람나는 일만 남았네요.’라고 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을 때 너희들을 포도나무로 간주하지 않고 포도나무다운 포도나무가 따로 있어요. 그분이 누구냐?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내가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예수님이 살고 계시는 그 나라, 베드로가 스스로의 힘으로 가지 못하는 그 나라, 그 나라에다 우리를 초대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고 6절에 보면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했어요.
이것은 뭐냐? 우리가 죽어 있다, 우리는 저주 받았다, 라는 것이 계속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면서 우리를 구원해내시면서, 우리를 부활에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홀로, 독자적으로 있어서 네가 극상품 포도나무가 아니라, 예수님과 가지라는 조건하에 너는 극상품 열매라는 거예요.
그래서 열매를 맺는 그 주인 되시는 분이 우리 자신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의 열매를 우리를 통해서 맺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영, 부활의 영이에요. 부활의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가 호세아에서 보고 있는 이 모든 묘사는 요한계시록 21장을 부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부터 보게 되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 때는 치과도 필요 없어요.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제거되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자들은 다 제거가 돼요. 믿지 않는다는 말은, 주님의 성령이 안 왔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거예요.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 하지만 하나님은 참 이상한 분이에요. 성령 주지도 않고서 성령 안 받았다고 패시는 하나님입니다. 와, 이거 정말 얼마나 불합리해요.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 했잖아요. 믿음은 우리가 만드는 믿음은 인정하지 않아요. 그건 베드로 믿음이에요. 그건 천국에 참여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주님이 처소를 마련했다는 신호로서, 시그널로서 우리에게 오는 성령은 마치 테이큰 건이라 합니까, 총을 쏘면 줄이 달려 있어서 맞은 사람과 총 쏜 사람이 줄로 연결되는 것처럼 성령의 총을 탕, 쏴버리면 성령 받은 자와 성령 주신 분이 연결이 되어 있어서 끊어지지 않아요.
어떤 환란에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테이큰 건이, 총이 그런 총이에요. 아주 복음적인 총입니다. 하나가 되어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세계였습니다. 이미 그것이 왔다는 말은 “네가 생각한 세계는 이미 저주와, 주와 함께 죽음으로서 잊어버려라, 나는 이렇게 해서 예수 믿어서 이렇게 잘 되겠다, 하는 생각은 잊어버려라.”
그런 것은 너의 사라짐과 같이 동시에 사라져버리고,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고 실제로 성령이 오게 되면 항상 생각하는 것은 ‘내게 예상 못한 복을 주셨군요. 예수님만이 누려야 될 가치가 있는, 그 가치 있는 세계를 신부라는 이름으로, 주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참여시키니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와 기쁨이 나오는 그러한 성령, 그것이 바로 극상품 포도주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마시고 싶은 포도주 극상품 포도주입니다. 그럴 때 아,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는 필수코스라는 거예요. 이것은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걸 통과해서 내가 구상한 내가 생각한 나 잘되는 신 바알신 이것이 도리어 우리가 버림받아야 돼요. 내가 아는 하나님한테 내가 버림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믿다가 십자가로 옳기는 거예요.
모든 명칭이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 이제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보이면서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이미 죽은자라는 것을 깨닫는,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이미 죽었고, 나 스스로 손짓하면서 너는 죽었고, 버림받고, 죽었다는 이것이 하나의 이념이 아니고 결국은 몇 년 살다보면 죽었고 하는 그 손가락질도 같이 죽어요.
결국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니까 전출 가듯이 자꾸 없어져요. 나도 없어지고 다 없어져요.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너무 미련 갖지 맙시다. 어차피 성령 받은 사람은 그게 주님의 극상품의 조치요 절차인 것을 우리가 갈수록 기쁨이 더욱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부활하신 주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은 것 쏘신 것이고 결합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우리 욕심으로 주님을, 십자가를 가리지 말고 도리어 십자가 피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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