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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십자가의 능력 200719 본문

주일학교 설교(이근호)/주일학교 설교

십자가의 능력 200719

정인순 2020. 7. 19. 13:42

십자가의 능력 200719

 

음성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지난 시간에 가시관 이야기했지요. 관을 썼는데 가시로 만든 관을 썼어요. 예수님께서. 그리고 조롱을 당하는 거지요. 니 자칭 왕관 쓰는 사람이잖아. 그래. 왕관 씌워줄게. 왕관 씌워줄게. 그런데 좀 아파봐라. 왕관을 씌우되 그 왕관이 편안한 왕관이 아니라 이 땅에서는 니 같은 왕은, 우리 인간들이 의논하기를 너 같은 왕은 우리 인간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니 머리 위에다가 너를 죽일 사람의 왕으로서 너를 죽어야 마땅한 가짜 왕이라는 티를 내면서 가시 면류관을 씌워줬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인간 전체에게 보여준 마지막 장면이에요. 이게 마지막 장면이에요. 인간들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들 전체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마지막 뒷모습은 인간들이 그 하나님을 원치 않았다는 겁니다. 다른 하나님 가짜 하나님을 원했던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지지 않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십자가로만 전부를 이야기하지 않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에요. 그것을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면서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분을 샀고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이 말은 화를 냈다는 말은 인간들 마음속에 절대로 접촉점을 갖지 않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인간들 힘으로 인간들이 눈치 채서 알아채서 인간이 공부해서 노력해서 시험 쳐서 어떻게 인간에게 연결해볼까 하는 그 모든 연결점은 실제로 하나님 만나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지 못 했습니다. 인간의 종교라는 것, 기도 헌금 예배 제사 모든 선교 전도까지 전부 다 어떤 경우라도 천국과는 연이 닿아있질 않았어요. 연결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버림받은 것인가? 여기서 제목이 갈대라고 되어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옛날 사형수한테는 갈대를 통해서 뭘 주느냐 하면 마취제를 집어넣었어요. 포도주라든지 이런 것 해가지고 마취제를 아픈 죄인이지만 일말의 인권을 보호하겠다고, 인권 보호차원에서 인권을 지켜주겠다는 차원에서 그래서 아프더라도 이왕 죽는 것 마지막 소원이니 소원 들어주자, 그래 아프지? 얼마나 아프겠는가, 니 소원 내가 안다. 안 아프면 좋겠지. 그래. 안 아프게 약간은 완화시켜줄게, 해서 포도주를 먹였는데 주께서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어떤 사형수가 있었는데 사형수가 사형 집행관에게 마지막 사형 집행하면서 늘 하던 대로 “니가 죽는다. 마지막 소원이 있으면 내가 한 가지는 들어줄게.” 그렇게 하니까 그 사형수가 “엑스프레스 커피를 원합니다.” 이랬거든요. 마지막에. 그러니까 옆에 집행자가 집행 시간이 다 되었으니까 급하니까 커피를 줬어요. 커피를 먹고 “이건 막대 커피인데. 이건 내가 먹던 엑스프레스 커피 아닌데.” 그래서 엑스프레스 주니까 하는 말이 “이거 식었는데.” 코미디 프로에 나왔던 말입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고. 진짜 죽여주고 싶지요.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의 위로조차도 니가 나를 알기는 알고 위로하느냐? 내가 니 같은 존재인 줄 아느냐? 나는 너희들 위로도 필요없다. 그리고 그 아픔도 고스란히 가져갔습니다. 니가 한번 당해봐라.

 

그 다음에 예수님 갈 때에 사람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예수님 입었던 통으로 입던 옷도 있었어요. 그 옷도 그 군병들이 그 때 물자가 없었던지, 북한하고 똑 같이 물자가 없었던지 지가 갖겠다고 서로 둘이 갖겠다고 하니까 가위 바위 보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치는 뭐냐 하면 예수님께 유일한 가치는 입던 옷, 세상에서 입던 옷이 인간들에게는 유일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무가치 한 자,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기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할 때 그 예수는 백 프로 거짓말 가짜 예수입니다. 마귀보고 마귀한테 기도한 것과 같아요.

 

진짜 예수님과의 만남은 예수님 쪽에서 나와 공통점이 있어줘야 되는 거예요. 기도할 때 내 이름으로 하면 안 되고 주님의 심정으로 해야 되는데 우리는 내 심정으로 기도해놓고 끝에다가 예수 이름으로 후딱 끝내버리죠. 끝에다가 예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나의 소원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일 경우에만 이뤄지게 하옵소서, 라는 뜻이라는 거예요. 요한일서에 보면 아버지 내 뜻대로 주의 뜻대로 되는 모든 기도는 다 이루어진다. 구하라. 내 뜻에 맞는 것은 다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있어요. 누구하고? 아버지하고 연락을 취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집에서 놀거나 게임하거나 이것을 그대로 십자가 원리를 적용시키세요. “하나님 아버지, 지금 게임 30분 하려고 하는데 되겠습니까?” 두두둑 “30분만 해라.”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함으로 게임을 하든 뭘 하든 감사함이 나오면 그것은 주의 일이고 억지로 하게 되면 주의 일이 아니에요. 이건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한테 들어오게 되면 니가 살아있는 것 숨 쉬는 것부터 시작해서 니가 하는 모든 것은 내 허락 하에 니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보고 알라는 겁니다. 알아채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면서도 이건 나만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리라는 것을 그대로 끝까지 보여줍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아야 돼요. 예수님한테는 우리가 지은 죄가 대신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도 대신 죽으셔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 사실은 우리가 져야 될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아야 될 버림받는 자리에 예수님이 먼저 가 있어가지고 우리를 그 자리에다가 그냥 가버리면 내 혼자 지옥 가지만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같이 있으면 예수님 사실 때 같이 살아나는 그러한 새로운 마음을 살아있을 때부터 벌써 우리한테 분배받게 돼요. 그 성령이 있으면 죽어도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삼베라는 제목이 나오는데 이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예수님의 시체가 삼베에 싸였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척하거나 하나님께서 죽을 때 기적적으로 반전이 일어나서 되살리고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죽게 만들어요. 그냥 죽게 만든 이유는 그래야 모든 인간은 못 따라오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에 의한 특수한 죽음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죽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그 죽음에 같이 참여는 못 해요.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도 이 죽음에 참여 못 하고 도중에 돌아갔어요. 예수님만 빠져나가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하신 일, 그걸 예수 이름이라 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하신 일로만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자기 공로 집어치우고 예수님의 공로와 그 위력과 그 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내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이름을 지키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겁니다. 내 이름은 아무것도 예수님의 하신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여기 돌이 나오지요. 이 돌은 지금도 그 돌이 그대로 예수님의 성모교회라고 해가지고 예루살렘에 보면 돌이 아직도 있어요. 그래서 많은 외국 사람들이 와가지고 제가 볼 때 많이 울어요. 돌을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만지면서 반질반질해요. 하도 만져가지고. 울어요. 왜 우느냐 하면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예수님의 희생이 안타까워 우는 것도 있지만 어떤 울음은 뭐냐 하면 이미 내 죄가 평생 살면서 자식 키우면서 살면서 모든 죄가 이 돌에 누웠던 예수님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깔끔하게 이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끝났다는 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기쁨의 눈물을. 그게 며칠 갈 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나중에 호텔 가가지고 싸우고 하다가 다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여기 와서 이 돌을 만지다니, 내가 모든 죄 짐과 죄 책임 이런 것이 다 없어졌다는 그 기쁨, 절로 주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짜 현실은 사람들이 웅성대고 협력하는 역사가 현실이 아니라 그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고요히 부활하신 그것만이 진짜 참된 현실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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