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도르가의 소생 200802 본문
도르가의 소생 200802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랜만에 왔으니, 성경 전체를 다 할 수는 없고 여기에 욥바라는 마을이 있거든요. 현재 이스라엘이라는 해변가 지중해 해변가에 욥바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욥바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이 그 사람들이 하는 업이 고기 잡는 업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남자들은 고기 잡는 것이 무거운 그물을 잡아당기니까 남자들이 해야지 여자들은 잘 못해요.
여자들은 집에서 조그마한 농사나 짓고 애나 키우고 남자는 밖에 나가 배를 타고 위험한 고기 잡는 것을 하는데 하다보니까 바다가 늘 비바람 불고 풍랑치고 하니까 나갔다가 오늘이라도 나갔다가 저녁때는 남편이 죽어서 오는 일들이 많았어요. 배가 파선이 되어가지고.
그러면 그 여자는 애들만 데리고 혼자 사는 거지요. 그런 과부들이 많이 가난한 아줌마들이 과부로 있다 보니까 남편이 그동안 먹여 살렸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애들도 가난하고 아버지가 없으니까 서로 딱한 사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다비다라고 부르고 또는 도르가라고 부르는 분이 계셨어요. 이 사람도 역시 혼자 살면서 애 키우니까 애가 둘인데 큰 애 한번 보세요. 큰 애 근육도 하나도 없고 바싹 말랐지요. 못 먹어가지고 북한 애들처럼 영양실조 걸려가지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힘들지요.
그래서 도르가라는 사람, 이 사람은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줬어요. 과부들이 많은 이 동네에 도르가 이 사람이 과부라는 뜻은 아니고 많이 도와줬어요.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이라서 하도 불쌍해서 오는 사람 옷도 주고 음식도 나눠주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살았는데 그렇게 살았으면 하나님께서 도르가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니까 도와주면 참 좋겠는데 평소에 도르가라는 사람이, 이 사람이 도르가라는 여자 주인공이죠. 많이 도와줬는데 요새로 하면 동사무소 복지과 직원이지요. 그런데 도르가 이 사람은 삯바느질해서 어려운 사람들도 도와주고 했는데 그만 도와줘도 너무 도와줬어요.
어느날 도르가 이 사람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합니다. ‘울지마 톰즈’ 하는 것처럼 남수단에 가서 수단 사람 도와주다가 자기가 혈액암에 걸려죽었던 그 신부처럼, 신부 맞아요? 그 사람처럼 의사고 신부인 그 사람처럼 도르가가 너무 남 살리려고 하다가 본인이 과로가 있어가지고 그만 도르가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니까 착한 도르가 이 사람을 위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누구 좋으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살려주세요. 저렇게 착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납니다.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착한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안 죽이고 나쁜 놈들은 죽여줘야 하나님이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하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이게 반대가 되었어요.
나쁜 사람은 멀쩡하고 착한 사람 도르가가 이렇게 병석에 누워서 아프다가 결국은 죽었어요. 세상의 모든 소설과 드라마는 뭘로 끝나느냐 하면 두 가지로 끝나요. 하나는 주인공은 결혼해가지고 잘 먹고 잘 살고, 나쁜 놈은 죽어야 드라마나 영화가 끝이 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도르가가 죽어버렸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사람들의 문제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일은 끝났지만 죽었던 도르가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었으니까 나아서 남을 못 도와주잖아요. 못 도와주니까 하나님의 일도 중지되고 끝난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웃에 누가 왔느냐 하면 베드로가 그 이웃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대표를 뽑아가지고 룻다라는 동네가 있어요. 룻다라는 동네는 해변가 동네가 아니고 여기서 영천 가기만 한 거리에 룻다라는 평지에 룻다라는 동네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동남쪽 쯤에, 그 사람들이 찾아가서 베드로에게 도르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들이 베드로라고 생각해보세요. 니가 베드로다.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착했다. 그래 착했어. 착했는데 착한 일 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사람이 아파서 누워있다, 그러면 기도해서 낫게 하는데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이미 죽은 마당에 어쩌라고. 여기서. 그러면 시한테 이야기해가지고 복지자금 더 대주라고 정치적으로 행사를 하란 말입니까? 뭐란 말입니까?
두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해요.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살려달라는 거예요. 도르가를. 그래서 이름이 도르가는 아니에요. 도로. 도로 살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인간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발상입니다. 뭐 이런 발상이 다 있어요. 죽었으면 게임 오버예요. 게임 끝난 거예요. 컴퓨터 게임 안 하잖아. 예수 믿기 때문에 안 하잖아. 니가. 게임 죽으면 게임 오버 끝났잖아. 이건 다시 하려면 돈 오백 원 더 줘야 돼. 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이미 죽었는데, 죽었는데 살려줄 수 있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런 무리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이런 사고방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죽었으면 실선이 딱 하면 끝이에요. 그 다음은 점점 더 끝나는 건데 이 실선이 죽고 난 뒤에 실선이 또 있다는 거예요. 이런 발상은 도대체 두 제자한테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한테 떼를 쓰지요. 그래도 베드로는 살릴 재주도 없어요. 지가 뭔데 주님도 아닌데 지가 왜 살리겠어요.
그냥 가자 했어요. 가게 되면 베드로가 간 이유가 있어요. 주께서 이러한 도르가가 착한 도르가가 죽고 이미 죽어버리고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왔을 때는 이것도 사람 일이 아니고 배후에 주께서 뭔가 하실 일이 있는 모양이라 생각해서 “일단은 갑시다.” 일단 가보니까 죽은 몸이 이렇게 누워 있지요. 누워 있는 거 보이지요? 그 곁에 여자들이 둘러앉아서 울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고 난 뒤에 여자들이 자기의 만든 옷을 보고 착한 일을 여기서 또 되풀이 합니다. 여기서 이 장면 한번 보세요. 베드로가 도르가는 있고 다른 사람들은 울고 난리 났어요. 베드로는 어처구니 없어가지고 “어쩌라고 하는 말이냐?” 하고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그 때 베드로는 이미 성령을 받았어요. 주님으로부터 다뤄짐을 당하는 거예요. 자기가 행동의 주인공이 아니라 배후에 성령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시는 주님이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죽은 도르가의 몸 옆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여기서 베드로가 기도를 하는데 이게 중요합니다. 뭐냐 하면 베드로 본인의 마음이 여기에 섞이면 안 돼요. 바로 주변에 일어났던 그 사람의 요구 조건이 이건 인간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했다, 그러면 그 기도의 내용은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베드로가 그냥 대신해주는 것뿐이에요. 이들의 소원이 도르가가 사는 것이니까 ‘주여. 이게 주의 뜻에 합당하면 도르가를 도로 살게 해달라.’ 도르가 이름이 다비다라고 했지요. 다비다 도르가.
기도를 마친 후에 딱 베드로가 감이 왔어요. 이것은 도르가의 진정한 착한 일이라는 것은 밥이나 주고 떡이나 주고 음식이나 나눠주고 그렇게 하는 일이 착한 일이 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와 함께 있음을 도르가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고 베드로는 도르가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옆에서 목격자로서 기도로서 말해주는 이것조차도 주의 일에 포함이 되어있는 거예요.
이런 모든 상황 자체가 주님께서 이미 연출한 것이고 주께서 배정을 한 위치에서 각각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역할의 마지막은 뭐냐?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 참 터무니 없지요. 과학시간에 배웠어요? 죽어도 다시 사는 것 배웠어요? 수학 시간에 배웠어요? 어느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합니까? 그 선생님이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교육부에 신고당해가지고 잘리는 수가 있어요.
죽는다는 것은 엄연한 눈에 보이는 실증적인 사실이에요. 죽는다는 것은. 나이 들면 죽는다. 그러니까 장례식장도 있고 공동묘지가 있는 걸 보잖아요. 눈에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것까지 파악을 못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왜 죽는지.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은 왜 죽었는지. 그냥 총알 맞고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아이스크림 하나 선전하고 죽어버리고. 이순신 장군이 왜 죽었는지 그럼 나는 왜 죽어 가는지. 거기에 대해서 전부 다 함구령, 입을 다물고 있어요. 솔직하게 누가 이야기하면 되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해. 입은 왜 달아놨어요? 마스크 하라고 달았는가? 말을 안 해.
왜 죽어야 되느냐? 만약에 어느 학교에 교훈이 ‘죽자, 그리고 살자’ 이런 학교 있으면 학부형들 그 학교에 안 보내지 싶어요. 죽음과는 멀리 하기 위해서 교훈을 정한다고요. 모든 게 세상 모든 게 단체로 속이고 있어요. 우리 자신을. 세상 자체가. 제일 중요한 것은 놔두고 중요하지 않은 것 가지고 딴 것을 가르치고 있어요. 죽어도 산다는 것을.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까 베드로의 말에 죽었던 도르가가 눈을 떴어요.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장면, 살아났지요.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이게 오늘 이야기의 끝이에요.
결국 우리는 도르가라는 이 여인이 착한 일이라는 것은, 도르가가 착한 일 한다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보이지만 참 되게 착한 일 하신 최종적인 착한 일, 궁극적인 착한 일, 결정적인 착한 일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지 사람은 못 합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그 주님의 착한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았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남은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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