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호세아 11:5-7 / 하나님이 계신 곳 본문
하나님이 계신 곳
이근호
2020년 5월 27일
본문 말씀: 호세아 11:5-7
(11:5)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11:6)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11:7)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산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우선 순위에 둔다는 점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점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살아도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곳은 ‘약속의 땅’입니다. 이 ‘약속의 땅’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땅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땅은 영구히 이스라엘 자신의 소유가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곧 그 땅에서 결코 떠나는 일이 없다는 점을 아울러 의미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사는 땅에는,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점령하는 일은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방민족으로 추방시키고 그 자리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뜻이 분명히 반영된 결과라고 그들은 믿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뜻을 통고합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 소식이 참으로 의아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사는 이 상황이 ‘돌아오라’의 최종점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땅에 사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된다고 그들은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호세아 선지자의 말귀를 못알아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추가적인 언약으로 인하야 ‘함께 하심’의 자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변의 이방민족을 강성하게 해서 이스라엘이나 유다나라가 물리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필히 이스라엘과 유대 나라를 그 이방민족의 노예로 팔려서 그들의 나라로 팔려가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땅은 비워놓게 했습니다. 이방민족이 접수해서 통치하는 곳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중도에 끊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시편 89:30-36에 보면,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백성을 때리되 그렇다고 해서 언약을 취소시키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언약을 기어이 완성시켜 나가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관성’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이러한 일관성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 자들입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 2:4-5)
즉 달리기 경기를 하는 사람은 주변의 풍경에 정신 팔리면 아니되는 겁니다. 두리번거리면서 세상 유혹에 빠져 중구난방으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로 정해진 방향성을 갖는 생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도 한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이방민족들도 같이 다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친히 마련해두신 자리1은 자리2로 바뀝니다. 이 바뀌는 과정에 이방민족이 통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방의 권세의 움직임으로 인해 언약이 윤곽이 잡힙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몽땅 이방권세에 맥도 못추고 잡혀가서 온통 이방 세상판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 전혀 틈이 보이지 않던 이방권세 한 복판에 구멍이 생깁니다.
마치 ‘태풍의 눈’과 같이 열립니다.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언약대로 이끄시는 자리2입니다. 언약의 힘이 이방권세를 초월하는 겁니다. 가장 어두운 자리 한복판에 가장 밝은 빛이 등장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비록 바벨론이란 그 당시 최고 권력에 사로잡혀 갔지만 그들은 기죽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혜로 따라올 수 없는 지혜를 받게 되는 겁니다. 다니엘은 포로 70년이 지나서 간다는 그 가나안 땅에 가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알고 있는 자리2는 하늘에 계신 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지상의 이방세력 한가운데 마련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다윗 언약 이후 최종 언약이 옵니다. 이 언약의 완성을 위해 하늘의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셔서 나타납니다. 악마가 대지를 지배하기 위한 힘이 분철되는 자리마다 예수님께서는 일을 벌리십니다. 사단과 귀신을 상대하시는 겁니다. 이 권능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최종 언약 완성의 자리는, “이렇게 하면 된다”를 말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뭘해도 안 된다”를 말해주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여호와가 누구신가에 관심두기 보다는 스스로 ‘자기 완성’을 추구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힘을 충당하기 위해 여호와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사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언약이라는 바탕’이 드러나는 겁니다. 성도는 그 바탕과 끊임없이 교류해야 합니다. 마치 생중계하듯이 땅의 일을 하늘에 보고 해야 합니다.
언약의 최종 완성점인 십자가에 이르게 된 성도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합니다. 죄인이라는 실수와 어설픔은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어 모든 것이 귀함을 압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기 인생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피해자는 우리 주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죄인뿐입니다. 의인은 주님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값으로만 백성이 천국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언약 완성은 성도의 마음까지 들어옵니다. (히 10:16) 이때 마음 속에 들어온 것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 전부입니다. 죄악된 역사에 동참함으로서 주님의 피값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성도의 목숨은 갖고 있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이 진리와 맞바꾸어라고 주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목숨 가지고 자기 완성을 획책하지 않게 하옵소서. 복음과 맞바꾸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3강-호 11장 5-7절(주님이 계신 곳)2005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1장 5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5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1:5-7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에게 언급을 하는데 세 개의 나라가 나와요. 5절에 애굽이라는 나라가 나오고, 역시 5절에 보면 앗수르라는 나라가 나오고, 그리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북이스라엘, 이 세 나라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세 나라가 나오는 가운데서 유독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에 대해서 당부를 하는 그 대목입니다. 당부를 하면서 두 나라를 언급했지요. 애굽, 앗수르나라. 이것을 왜 언급해야 되느냐? 애굽에 신경 쓰고, 앗수르에 관심을 갖는 너희들이 곧 어떤 상태냐 하면, 내게로 오지 않는 마음상태로 그렇게 구축되어 있다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애굽 땅에 대해서 굉장히 선호하고 앗수르에 대해서 신경 쓴다는 자체가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12장 1절에 보면 “에브라임은(북 이스라엘)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12장 1절에 나오는 북 이스라엘의 정책적인 시도를 가지고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계책 또는 계획, 모략 이런 거지요. 그들의 계책, 기껏 내세운다는 것이 양다리 걸치는, 둘 다 강대국이니까 양다리 걸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그것이 자기 딴엔 그게 정치적 묘책인데 주님께서는 묘책으로 인한 그것이 결코 이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호세아를 통해서 이 말씀을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있는 그곳이 옛날 모세가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을 받았던 그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약속의 땅에 와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필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함께 있는 여기에 함께 살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하나님께 안돌아온다고 이야기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7절에 보면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렇게 할 때 선지자가 그런 말 할 때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겁니다.
지금 약속의 땅에 사는 것이 이스라엘이 최종도착지점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올 때까지 다 왔는데 뭘 여기서 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이 땅에 왔는데. 그래서 그들은 상당히 의아해 할 겁니다.
이 말 가지고 21세기의 오늘날 교회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님이 핏대를 세우면서, 교인들을 닦달내면서 “여러분은 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어기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까?”라고 강단에서 신종코로나 전염병 도는 시국에도 막 바이러스 침 튀겨가면서 외칠 때 교인들이 설교시간이라서 가만있지 만약에 강의시간이나 사석에서 이야기한다면 뭐라고 대꾸하고 싶으냐?
“목사님, 돌아온다고 하는데 대체 어디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까? 목사님, 당신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증거를 제시해보세요. 그렇게 돌아오라고 외치는 목사님은 지금 돌아왔다고 교인들에게 지금 자랑질하고 있는데 그러면 목사님이 돌아왔다는 증거를 한 번 대보세요.”라고 하면 목사는 뭐라고 합니까? 다 같이 사택에 가서 살까요?
돌아온 게 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목사님이 궁색한 변명도 아닌 변명으로 내놓는 것이 뭐냐 하면, 하루에 성경 석장, 주일에는 다섯 장 읽고 기도 30분하고, 또 뭐 새벽기도 나오고, 평소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고, 그렇게 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당신이 돈벌이를 안 하니 그렇지요. 돈벌이 위해서 차를 안모니 그런 거예요.
돈벌이 하고 저녁때 성경 보면 된다고요? 저녁때 성경 보면 잠이 오는데, 잠이 밀려오는데 무슨 성경을 봐요? 눈도 안 떨어지는 판에. 목사가 하는 그 행동, 그 일상생활 그게 하나님께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서 호세아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일 난해한 것이 이거예요.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말씀을 안 지키고 주의 율례를 안 지켰다.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완벽해도, 완결을 유지해도 뭔가 티를 잡으면 잡히게 되어있어요.
인간들 본인도 알거든요. 내가 완전치 않다는 것을 아니까 윤리와 법도를 제대로 지키라고 하면 “예, 알았어요. 최선을 다 합니다만 인간인 이상 완벽치는 않네요. 하여간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이것은 되는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할 때는 막연한 거예요. 그 도착지점이 어디인지 그걸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여기까지 왔으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라고 명확하게 꼭 집어달라는 거지요. 그런 생각 안 들겠어요?
우리 동네에 ‘꽃마름’이라는 서민형 뷔페식당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달 들어서 문을 닫았어요. 하도 장사가 안 되니까 문 닫았다는 말이지요. 꽤 큰데 자본금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다 날렸겠지요. 만약에 우리가 그 음식점 사장이라 합시다.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을 지경에 있는데 만약에 여기에 호세아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러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이야”라고 했을 때 지금 부도직전인데 부도직전의 그 사장보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면 뭐가 돌아오는 건데요? 다시 문 열면 손님이 막 쏟아진다는 그런 이야기인지, 대체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난감하지요.
하나님께서 돌아오라는 이 말씀에서 그들이 뭔가 오해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세한테 준 언약에 의하면 약속의 땅은 약속의 땅이에요. 그런데 그 다음에 다윗왕에게 준 약속이 추가적으로 새로운 언약으로 계약이 갱신이 됩니다. 언약이 바뀌어져요.
계약이 바뀌게 되면 계약이 바뀐다는 말이 뭐냐? 전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한 그 약속에서 주님께서 함께 있는 자리를 변경시킨 겁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약속의 땅에 와서 살면 그게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추가적인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이 함께 있는 장소가 변경이 돼요. 바뀌게 되는 거예요. 여기 있다가 주님께서 저기 있게 되면 저기 가셔서 하는 말이 “내게 돌아오라” 그 말이에요.
기존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살게 되면 그게 최종 하나님과 함께 있는 최종점이다, 도착점이다,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그걸 바꿔버렸어요. 주님께서 제 1자리, 처음에 있던 가나안 땅 제 1자리에서 그 다음에 제 2의 자리로 주님께서 마련하신 자리가 따로 있어요. 내가 그 자리에서 너희를 맞이하겠다는 겁니다. 너희를 기다리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가나안 땅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이제는 가나안땅에 산다고 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님을 새롭게 갱신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그 땅에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통보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땅 그 장소가 하나님 계신 곳이 아니고 다른 장소로 옮겼다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그 약속의 땅은 이방민족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땅이거든요. 하나님이 쫓아냈으니까.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이 계신다면 쫓아낼 것인데 하나님이 그 땅을 그 성전과 그 땅을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떠나버리면 그 땅에 누가 오느냐 하면, 이방인들이 우르르 쳐들어오게 돼요. 이방인들이 접수한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리 이동이 있었다는 그 낌새를 어떻게 아느냐? 영원히 우리 민족이 여기 있을 것이라고, 대한민국 같으면 한반도지요, 이 한반도에, 이스라엘 같으면 가나안 그 땅에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여기에 앗수르 군대, 이방민족이, 다른 신을 믿는 그 군대가 쳐들어오는 겁니다.
쳐들어와서 그들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빌지요. 그들이 물러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비는데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화를 내듯이 아예 접수를 해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인데 하나님은 왜 우리 편을 들지 않고 앗수르로 하여금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쳐들어오게 하십니까, 라고 할 때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호세아 말에 의하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이 땅을, 이스라엘이 사는 땅을 이방민족이 지배하도록 쳐들어오도록 해서 성전이고 뭐가 불태워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물러가도록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은 다시 돌아보게 되지요. 앗수르, 그리고 나중에는 바벨론, 왜 그 나라가 여기에 쳐들어오는가? 그것은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통로 역할 하라고 하나님께서 세상 이방권세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뭘 잡기 위해서? 언약의 윤곽을 잡기 위해서 적재적소에 이방민족을 다루시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변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가짐이 될 때 언약변경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보시기에 내가 잘 먹고 잘사느냐, 내가 건강하게 더 오래 사느냐, 아니면 아파 죽느냐, 내 인생 신세가 어떻게 처박히느냐, 우리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호세아의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애굽이라는 나라가 중요하고, 앗수르라는 그 덩치가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나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이 눈에 보이는 세상권력이 어떤 식으로 일관성을 갖게 되는가? 일관성, 이게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 본인이 나는 성도냐 성도 아니냐를 어떤 식으로 쉽게 측정할 수 있느냐? 여러분 하루하루의 삶과 여러분 인생이 어떤 일관성이 있습니까? 중구난방이 아니고.
일관성이라 하는 것은 신약의 사도바울에 의하면, 디모데전서와 후서에 의하면 달음박질 하는 사람은 딴 데 한눈팔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하는 사람, 마라톤 하는 사람이 주변 풍경 다 보면서 간섭 다하고,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 거예요. 그냥 코스대로 달리는 거예요.
코스대로 그냥 달린다는 것이 뭐냐? 내 인생에서 내가 일관성이 있음을 느낀다는 거예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떤 일관성이 있게, 어떤 방향이 정해진 방향대로 계속 휘몰려 가는 거예요. 이끌림을 당하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 일관성은 일종의 통로역할을 하는 거지요. 통로라 하는 것은 긴 파이프가 있으면 그 안에서는 방향이 하나로 이미 정해버렸지요.
성도라 하는 것은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이 똑같아요. 뭐냐 하면,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자리이동 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에요. 주님께서 전에는 이 땅의 특정 지점에다 약속의 세계라는 것을 설정을 했는데 그걸 이제는 포기하고 이 세상 말고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 약속변경이 더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렇게 개인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모든 땅은 차라리 이방민족한테 다 내줘버려라. 다 줘버려. 그런 것은 그들이 차지하게.” 마치 뷔페에서 실컷 먹게 하고 나중에 나오면서 설사해서 다 날라 간 것처럼. 세상 것에 푹 빠지고, 정치, 좌파니 우파니 거기에 푹 빠지게 해놓고 나중에 그게 다 소용없는, 다 헛발질 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방민족들 그리고 갈 방향을,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우왕좌왕 하는 인간들의 결말입니다.
성도는 어떤 특정한, 일관성 있는 방향성이 좍 있어요. 그 방향성에 동원된 것이 바로 앗수르와 애굽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그 이방민족 애굽과 앗수르에 포로 잡혀가고 나중에 바벨론에 그들이 포로 잡혀 가면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게 뭐냐?
분명히 이방민족한테 전부 다 사로잡혔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끝났다고 낙담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나라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거기서 빈 구멍이 생기는 겁니다. 새로운 중심부위가 발생됩니다.
그곳이 바로 주님께서 준비한 자리 2, 두 번째 자리입니다. 이방민족 가운데서 전부 다 함몰되었는데 그런데 거기서 그 이방민족이 마저 접수할 수 없고 마저 손댈 수 없는 어떤 블랙홀 같은 빈공간이 생기는 거예요. 이래서는 잘 모를 테니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북한에서 인민군이 6.25때 내려와서 서울에 사는 하나님의 성도 집안 네 식구를 다 잡아갔다 합시다. 대구 살다가 평양으로 갔다 합시다. 우리가 알고 있기는 평양은 기독교신자라면 다 총살시키고 아오지 탄광에 보내서 고생시켜서 종교를 말살시키는 곳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게 그곳으로 포로 잡혀가서 이제 신앙생활, ‘하나님 믿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족을 잡아간 그 집이 북한군 수뇌부의 첫 번째 집이고 그 집 둘째 아들이 현 빈이네. 그 둘째 아들이 분명히 공산당 간부의 둘 째 아들이에요.
설교시간에 ‘현빈’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그 공산당 수뇌부의 둘째 아들이 신앙생활 하라고 하면서 성경책 갖다 주고 본인도 기도하고, “내가 북한에 있으면서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서 성경말씀 제대로 몰랐는데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또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에, 태풍의 눈처럼 모든 것이 불신의 세계인데 그 안에 구멍이 생겨버렸어요. 그리고 애인을 만났는데 그게 손 혜진이라. 둘이 얼마나 신앙생활 잘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끔찍이 섬기는지. 오히려 서울에 있을 때보다 믿음이 더 좋아졌어. 왜?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우리가 끝났다. 안 된다. 모든 것이 작살났다. 나 이제 더 이상 신앙생활 해봐야 지옥 간다고 생각했는데, 없다고 여긴 그 장소에 이 세상 모든 권력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여호와를 이겼다고 여기는 그 자리에 세상에, 제대로 여호와는 살아계시는구나.’
그 묘책, 오늘 본문에는 그 계책, 그 계책을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에 준해서 마련하시는 겁니다. 언약의 대단함, 언약의 초월적인 힘, 어떤 세상 사람도 꿈꿀 수 없는 언약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그것을 시편 89편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통해서 예언을 했어요.
30-32절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지금 징책하는 이것이 북이스라엘과 남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완전히 작살나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포로생활 하는 거예요.
33-36절에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이게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언약의 구성요소가 뭐냐? 맴매, 매 맞아야 될 요소가 다윗언약 속에 요건으로 들어가 있는 거예요. 얻어맞아야 될 것은 얻어맞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그들이 소위 눈을 뜬다, 개안이라 하는데 눈을 뜬다 할 까.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약속의 땅에서 밥먹고 잘 사느냐, 그냥 내가 밥 먹고 잘 사느냐에 관심을 뒀기 때문에 어디에 관심이 없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거기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살기에 급급한 거예요.
살기에 급급한데 하나님께서 이방민족마저 진짜 언약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윤곽 잡는 용도로 활용하시기 때문에, 이방민족의 쳐들어옴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 하나님, 언급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잘살고 행복한 그것을 도착지점으로 여겼지 제대로 하나님께 돌아오지를 않았던 거예요.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것을 중간에 자기가 가로막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되느냐?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해서 행동을 본인이 조심하게 돼요. 스스로 ‘이만큼 착하면 벌은 안 받겠지.’ 계속 행동을 착하게 하고, 바르게 하고, 성실하게 하고, 그렇게 착하게 살려고 하는 모든 목적이 주님의 자리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고 단독적으로 ‘내가 이만하면 얼추 행복하다 잘 먹고 잘 산다. 나는 이제 어떤 아쉬운 것 없이 산다’는 사적인 자기완성에다 목표를 두고 하나님을 이용한 겁니다. 자기완성에.
인간이 자기 완성하라고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지막 유혹은 자기완성이에요. 마귀가 그랬잖아요. 네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신처럼 되리라. 신처럼 된다는 것, 내가 신이 된다는 것은 신이 내가 된다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이 내가 되는 것은 주님의 몫이고 내가 신이 되는 것은 악마의 성품을 물려받은 모든 인간들의 상식적인 선에서의 인생목표에요. 그 인생목표가 자기완전체에요. 완전한 인간, 나의 완성입니다.
나의 완성이기 때문에 조심하되 조심하는 그 이유가 자기 잘되려고 자기를 위해서 조심해요. 행동에 나쁜 짓 안하는 식으로.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그렇게 자기완성이 아니고 주님과 계속해서 교류하는 거예요. 교류하는 것, 대화하고 지시받는 것. 교류라 하는 것은 서로 주고받고 통하는 것이 있다는 그것이 교류거든요.
쉽게 말해서 뭐냐? 내 행동에 실수했다, 옳았다, 그걸 주께서 안 봐요. 지금 너의 바탕이 뭐냐를 네가 늘 생각하면서 네 바탕과 교류하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네 바탕, 네 원천, 일관성 있게 너를 이끄는 그 원천과 늘 주고받고, 주고받고 늘 하느냐는 그 말입니다. 이걸 아주 알기 쉽게 해서 뭐냐?
우리는 방송국에서 파견한 리포터에요. 제주도 태풍 오는데 방송국에서 파견된 기자가 현장에 갑니다. 바람 막 부는데 현장에 서서 일부러 용감한 체 하면서 모자 뒤집어쓰고 “지금 태풍이 제주 남쪽 해상 10킬로까지 왔습니다. 김 대기 기자입니다.” 이게 뭐냐? 보고 하는 거예요. 리포트 하는 것, 보고 하는 것, 생중계하는 겁니다.
나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주님의 주님 되신 바탕에서 나온 그 일관성에 하나의 통로로서 자기가 휘말려가고 있음을 계속해서 생중계하면서, 주님의 방송국 직원인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바탕과 관련된다는 것, 우리의 잘잘못, 행동에 대해서 주님이 탓하지 않아요. 그걸 문제 삼지 않습니다. 바탕만 안 놓치면 돼요, 바탕만! 우리를 일관성 있게 끌고 가는 그 바탕만 안 놓치면 돼요.
바탕은 안보고 자기 행동만 조사하는 거예요. 내가 착했을까 안착했을까 선악적인 사고방식가지고. 그것은 자기완성이에요. 그것은 이방민족이에요. 이스라엘사람들은 뭘 모르냐 하면, 다윗언약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신 곳에 대해서 그들은 그 지점을 몰라요.
모르면서도 택한 백성 같으면, 그러나 이 참에 모르지만 주님의 바탕에서 나온 그 말씀이 결국은 우리를 주님께 합류하게 하신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택한 백성들은 바벨론이나 앗수르에 포로 잡혀 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선지자들이 대부분인데 에스겔 예레미야 다 마찬가지지만 다니엘이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 기죽지 않았어요.
남들은 70년 만에 돌아간다 하는데 다니엘은 안돌아가요. 거기 돌아가면 뭐하냐는 말이지요. 그곳이 아닌데요. 뭐. 더 다른 곳이 있다는 말이지요. 다니엘과 세 친구가 알았던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준비한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 주께서 친히 준비한 하나님의 자리 2, 그 자리는 뭐냐?
그것은 친히 주님께서 인자라는 분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어떤 일을 벌여요. 일을 벌이는데 그 일 벌이는 주님의 한발자국 한발자국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발자국입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수시로 인간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이 대지에 구멍이 나 있어요. 그것을 저는 분출공이라 합니다.
용암지대에 가보면 다 용암이 나온 것이 아니고 군데군데 뜨거운 김이 나오는 구멍이 있잖아요. 그 구멍 하나하나가 분출되는 구멍이라 그 말이지요. 그처럼 이 세상에 괴물이 콧바람을 내면서 씩씩 거리면서 숨을 내 쉬듯이 악마가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는 그 구멍들이 있어요.
그 구멍들을 찾아서 주님께서 그 구멍을 따라서 활동을 하십니다. 말씀을 주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겁니다. 그 뒤에 누가 따라가는가? 새로운 이스라엘 열두 제자들이 따라갑니다. 왜 제자가 12인가? 12는 하나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하나가 된 12가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권능, 바로 인간세계에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사탄과 귀신과 싸우는 현장을 어떻게 주님께서 제대로 찾아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 코스가 있어요. 처음에는 갈릴리, 그 다음에는 유다, 유다에서 돌아가셨어요. 나중에 성령이라는 처소.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또는 사도의 편지에 의하면 그리스도안, 또는 성령 안, 또 달리 사도바울에 의하면 ‘십자가 안’이라는 새로운 만남의 자리까지 자기 성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참 신기하지요. 이 땅에는 주님이 거하는 장소는 없어요. 이 세상은 악마에 의해서 이방민족에 의해서 전부 다 지배받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그 이방민족의 특징은 뭐냐? 이방민족의 특징은 권세는 있어요. 하나님이 허락했으니까. 악마를 통해서 권세 있게 했으니까. 그러나 무엇이 없느냐? 여호와의 약속이 없는 곳이에요. 아까도 기도할 때 언급했지만 우리가 세상에 나가보세요. 얼마나 점잖고, 착하고, 훌륭하고,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남에게 해코지 할 줄 모르고.
요리를 해도 “얼마나 맛있게 해요.” 하는 뚱뚱한 사람 있거든요. 남에게 베풀고 말 한마디 태도 하나 그렇게 차분하고 남에게 상처 안주려고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지요. 하지만 그 사람을 인형이라 생각하고 한번 눌러보세요. “알라브유, 알라브유!”(I love you! I love you!) 그렇게 십자가가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시중 기독교서점에 가보면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 간증집, 설교집이 굉장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나는 말씀대로 이렇게 한다. 어떤 사람은 94 된 사람인데 하루에 앉아서 7시간동안 성경을 본대요. 그런 목사님이 계신답니다. 이름은 굳이 안 밝히겠어요. 박 희천 목사님이라고 안 밝히겠는데요. 나도 설교학 시간에 그 교수한테 배웠어요. 완전히 바리새인 같아. 맨 날 남에게 설교하게 되면 “성경 많이 보세요. 기도 많이 하세요.” 인형이 이상한 인형이라. 마지막 언약이 안 나와요.
사도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십자가가 안 나와요. “열심히 합시다. 성실하게 바르게 삽시다. 예수 믿고 그냥 있으면 안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형상을, 아름다운 형상 거룩한 형상을 우리가 마음껏 성실하게 지켜냅시다.” 이런 이야기만 나오지 십자가 이야기가 안 나와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마지막 만남의 장소는 이겁니다. 이것 하시면 됩니다, 가 아니라 “이것 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 자리가 만남의 장소에요. 인간이 아무리 기도 열심히 하고 아무리 앉아서 7시간 8시간 성경 봐도, 성실하게 착하게 살고, 이웃사랑 천 날 만날 하고 불쌍한 사람 위안부를 위해서 모금하고, 기부하고, 뭘 해봐도 그거 이 세상에서 구원되는 인간 단 한명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의인은 없나니, 그 하나도 없음을 수긍하는 그 자리, 우리가 불가능한 자라는 것, 자신의 무능을 받아들이는 자리, 자기의 무능을 발견한 것을 기뻐하는 자리, 실수와 어설픔이 새삼스럽지 않는 자리, 맨 날 우리는 실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귀하게 여겨지는 자리, 그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멀쩡하지만 강도의 이름으로, 멀쩡하지만 세리와 창기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 서는 거예요. 사실 멀쩡하지도 않지요. 똑같이 자기완성을 추구한 인간이니까 그게 뭐가 되겠어요?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보이지 않는 자리,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께 오지 않는 거예요. 여호와께 왔으면 여호와가 보여야 되는데 그들의 여호와는 바알과 비스무리 한, 비슷한 신이에요. 전지전능한 신이에요. 그러나 실제로 이 땅 여호와는 뭐냐? 비참한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죄수의 모습으로,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채찍 맞으신 분이에요. 비난 받으신 분이고. 그런 분 앞에 우리가 뭘 자랑 할 수 있겠어요? 무슨 행함을 자랑할 수 있겠어요? 내 인생이 돈 떼어서 억울하다고요? 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옥가도 마땅한데, 천국 갈 수도 없는데 뭘 억울합니까? 피해 입었다고요? 피해자는 단 한 사람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피해자에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피해 입은 거예요.
오늘 본문 호세아에 의하면 호세아 선지자. 바람난 아내를 위해서 값을 치렀던 호세아 선지자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에요. 왜 성신 받았으니까. 주님의 성신을 미리 받았으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새언약에서는 그 자리에 어떻게 오느냐?
히브리서 10장 1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이스라엘 역사가 남의 역사가 아니고 딴 동네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마음이 그대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잘 새겨들으셔야 돼요. 주님의 용서하는 마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실패한 마음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야 이게 언약이 돼요. ‘실패한 것은 이스라엘 네가 실패했고 나는 그 때 태어나지도 않았어. 그저 용서하는 그 마음만 주옵소서. 사하심의 마음만 주옵소서.’ 그렇게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한 이스라엘, 이방에 노예로 끌려간, 여호와를 모르고 자기완성, 자기행복만 추구하다 실패한 그 마음이 안 들어오면 용서도 의미 없고 사죄함도 아무 맛이 안나요. 망해버린 이스라엘의 마음이 같이 들어와야 된다고요. 들어올 필요도 없지요. 우리는 이미 이방민족으로 한통속이니까. ‘눈에 보이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사는데요 뭐. 그 이방민족이나 우리나 다 마찬가지에요. 다 멸망 받아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환경, 배경이 뭐냐? 십자가라는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 오늘날 문 재인 대통령, 김 정은, 트럼프 대통령, 이 모든 세상, 십자가 하나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주께서 십자가 윤곽 잡으라고 다 사용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담임선생님도, 교수님도, 코로나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목숨이라는 것은 나의 완성을 위한 목숨이 아니고 진리가 오거든 빨리 바꿔치기 하라고 준 목숨이에요. 진리를 갖고 있지 말고 저게 진리냐, 그러면 그 진리를 위해서 이 목숨도 과감하게 바꿔치기 해버리는 거예요. ‘나는 내 목숨보다 저 진리가 더 좋아.’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새언약을 통해서 들어온다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새언약의 마음은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마음이거든요. 십자가질 때 그 억울한 마음, 아픈 마음이 그대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가룟유다는 놓쳐버리고 다른 열한 제자에게 성령이 들어와서 알게 된 예수님의 마음, 진짜 의인이고 진짜 피해자고 진짜 억울하신 분은 내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뿐이라는 것,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 거예요.
성경 몇 장 읽고 천당 가고 구원받는 이것이 성도의 모습의 일관성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되시고, 바탕도 십자가 바탕에서 예수님이 주되신 나라도 아들의 나라 천국이고, 그 일관성에 우리를 일관성 있게 몰아세운 거예요.
따라서 네가 어떤 행동을 했느냐, 네가 뭘 완벽하게 했느냐, 완벽한 것도 없지요, 그러니 네가 탓하지 말고, 너를 자책하지 말고 하나님의 그 언약의 바탕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것이 나 구원이 아니라 언약 스스로의 완성을 위해서,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우리를 쓰고 있다는 것, 사용하고 있다는 것, 하나의 리포터로, 주님을 증거 하는 리포터로, 또는 파견기자로서 우리의 자리가 생중계하는 자리, 주께 보고하는 자리, 이 자리의 신분이 얼마나 귀한지 목숨도 아깝지 않은 자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주님만남의 장소가 어디인지 우리 힘으로 찾아갈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찾아갈 수 없었지만 주께서 십자가 마음으로 찾아오셔서 이미 함께 하셨다는 기쁜 소식이기에 우리가 목숨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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