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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51강 / 사무엘상 17:12 (무한) / 190827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무엘상

51강 / 사무엘상 17:12 (무한) / 190827

정인순 2019. 8. 28. 09:24




음성1            


동영상1       



녹취:이미아


대전-52강 사무엘상17장12절(무한)

20190827-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7장 12절입니다. “다윗은”이라고 되어 있죠.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는 그 대목에 있습니다. “다윗은” 세상에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일들이 A라는 사건, B라는 사건, C라는 사건, D라는 사건... 줄줄이 많은 사건들이 무관하게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무관해보이죠. 무관하다가 중도에 A가 B하고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그렇죠.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A라는 여자와 B라는 남자가 만날 때, 둘이 쭉 아가씨로 총각으로 살다가 만나잖아요. 만나죠. 결혼했다가도 이혼해서 갈라서기도 하고 그렇죠. A라는 사건이 계속 가는 거예요. 그리고 결혼이 계속되게 되면 A라는 것이 계속 유지가 되지만, 같이 한 가정을 이루어서 가지만,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가지고 A라는 사건이, B라는 사건이, 이것이 섞이거나 사라지거나 소멸되거나 그런 게 있습니까? 없죠. 그냥 가까이 접근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부부사이라도 아주 합치될 수는 없죠. 생각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다른 남자보다, 다른 여자보다는 가까운데, 그래도 딱 내 생각과 일치된다는 생각은 못 가지는 겁니다.

 

이게 우리 생각은 둘이 만나서 부부가 됐으면 생각이 하나일 것 같은데, 그건 우리 생각이죠. 자아의 생각은 그래요. 우리 생각, 나의 생각은. 하나의 예를 들면 둘이 결혼해서 자식이 태어났습니다. 자식 생각과 내 생각이 같을까요? 그게 또 아니에요. 분명히 내 몸에서 태어났는데, 내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 나하고 생각이 또 달라요. 자식은 어디서 태어나느냐, 제로(0)지점에서 태어났어요. 없었다가 생긴 그 지점. 둘이 결혼해서 2년 만에 애가 있다. 3년 만에 애가 있다. 그 지점은 제로지점이에요. 제로지점인데 자식이 태어났다 이 말이죠.

 

그러면 자식은 부모의 생각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엄마아빠의 생각 속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자식은 독자적으로 자기 생각을 또 따로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걸 셀프 스토리self story라고 이야기를 해요. 스스로 자기 이야기에 충실 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생각보다 먼저 우선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인간의 몸이 우선돼요. 몸. 우리는 나중에 나오는 내 생각이 몸을 억지로 관리하려고, 통제하려고 아주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근데 제가 방금 한 용어대로, 부사처럼 이게 뭐냐 하면 ‘억지로’에요. 억지로. 억지로 하는 거예요. 자기 몸을 자기가 억지로 통제하는 겁니다. 마치 자기 몸을 하나의 낙타나 말이라고 치고 자기는 거기에 올라타고 있는 주인노릇을 해가지고 자기 몸을 채찍질하고 그렇죠. 소위 성경에도 그런 게 나와요. 경건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학대 한다는 이런 이야기가. 그래도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몸의 주인이 따로 있는 거예요. 몸의 주인이. 나의 부모가 A라는 사건, B라는 사건을 가졌지만, 나도 자식처럼 내가 태어난 제로지점이 있을 게 아닙니까? 나의 제로지점이 있다 이 말이죠. 그 제로지점이 있고, 그 지점에서 내 자아가 생겼고, 그 자아가 평소에 살면서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는, 인간의 해결방법은 뭐냐 하면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그냥 단박에 죽어버리든지, 이러고 싶은 겁니다.

 

지난 낮 설교에 나오죠. 제가 욥기 3장을 언급했어요. 욥의 몸이 괴로우니까 욥이 내놓은 대책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습니다. 아예 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여전히 욥 생각에는 몸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냐 하면은 내가 우선이라는 겁니다. 몸과 나 중에서 몸보다 뭐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더 소중하다.

 

그런데 이 내가, 나라는 인간이 왜 잘못됐느냐 하면은 몸은 태어난 지점이 있고 죽는 지점이 있는데, 나는 한번 생겨버리면 영원한 것처럼 그렇게 여기게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한이라고 합니다. 무한이라고 해요. 무한. 인간의 모든 거짓된 특징이 무한을 추구한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니가 정녕 신처럼 되리라. 신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생각에는 무한이에요. 무한. 무한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몸은 뭐냐, 무한이 아니고 유한이에요. 몸은 내가 없을 때가 있었고, 내가 죽을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유한을 유한으로 보면 되는데, 우리의 자아는 자꾸 유한을 무한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아까 부사로 뭐라고 했습니까? ‘억지로’ 오늘 제목을 ‘억지로’라고 해볼까? 모든 게 내 몸을 가지고 이 대전바닥이나 대구바닥에 살면서 억지가 아닌 날이 한 날도 없어요. 전부 다 억지에요.

 

‘아이고, 어머니 좀 오래 사신다. 좀 알아서 가시지.’ 왜? 내 몸이 내가 불편하잖아. 내가. 내가 효도를 해도 어떻게 무한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내 할 일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무한히 해요. 그런데 엄마는 무한한 효도를 요구하는 거예요. 왜? 엄마는 몸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가, 돌아선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왜 전화 안 하냐고 이래 나오는 거예요. 정말 미쳐요. 미쳐. 아까 오후 두시에 봤잖아요.

 

자식이 돼가지고 뭐 사달라고, 뭐 사달라고 해서 사줬다 이 말이죠. 태권도 보내달라고 해서 태권도 보내줬어요. 오토바이 사달라고 해서 오토바이 사줬어요. 공부하기 싫다, 드럼치고 싶다고 해서 드럼 치게 해줬잖아요. 조국 딸처럼. 공부 때려 치고 드럼 하는 이 애를 어디에 보내려고 온갖 수작을 다했잖아요. 조국이. 왜 자식한테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자식은 몸이 아니고 자식은 따로 자아가 생겨가지고 자기 몸이, 이 머리가 안 되는 거예요.

 

어지간하게 머리가 안 되는데 의대 가려면 다 외워야 하잖아요. 라틴어, 독어부터 외우려면 골치 아픈 거예요. 일주일마다 한 번씩 시험 쳐야 되고.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죠. 한국에서는 의대에 갈 실력이 안 되는 애들이 헝가리에 가면 공짜로 넣어준다고 해서 공짜로 들어갔거든요. 근데 헝가리에서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거든요. 1학년, 2학년 넣어줍니다. 그래놓고 3학년 때는 다 유급시켜버립니다. 실력이 없다고.

 

그러니까 부모들은 헝가리에까지 가서 의대에 보냈는데 졸업을 못하니까, 의사 자격증이 안 나와요. 헝가리 의대는 입이 벌어지죠. 장사가 잘 됐으니까. 그 나라는 돈이 없으니까. 허영심 많은 한국, 일본, 중국, 동양 애들을 봐가지고 의대 운영이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1, 2학년 때 매일 시험 쳐서 안 되니까, 다 쫓아내버리죠. 자격이 안 되니까 무슨 인간의 몸을 다룹니까?

 

그러니까 이게 세상 모든 돌아가는 것의 문제가 뭐냐 하면 ‘억지로’에요. 억지로. 조국의 문제는 억지로입니다. 니만 억지로냐? 우리도 억지로다. 우리도 억지로인데 왜 니만 됐나? 그게 억지로가 남의 억지로를 이겼어요. 고위층의 억지로가 서민층의 억지로를 이겨서 서민층이 화가 난 거예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우리의 몸입니다. 몸인데, 몸이 뭔가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이걸 공식하나 내봅시다. 공식. 공식하니까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세요. 공식은 ‘몸+α’입니다. 알파α, 이게 바로 여분의 것이에요. 여분의 것 또는 잉여, 남아도는 것. 이것이 자아입니다.

 

그러니까 몸은 수상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들풀보고 너 수상하다고 이야기합니까? 안하죠. 참새 너는 음흉하구나! 이런 소리 안하죠. 코끼리 너는 왜 거짓말했어? 코끼리보고 거짓말했다고 안하죠. 그러면 음흉하다, 수상하다, 거짓말한다, 다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사람보고 하는 거예요. 사람보고. 사람보고 하는 거예요. 사단을 코끼리가 낸 게 아니고, 사자가 낸 게 아니고, 인간이 낸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것이 인간이 따먹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유한으로, 별이라든지, 뭐 해바라기, 코스모스 다 유한입니다. 인간도 유한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인간의 시작점은 뭐냐, 흙입니다. 흙은 인간이 아니에요. 흙+알파α, 생령을 집어넣으니까 뭐가 나왔습니까? 인간이 나오죠. 그래서 이 알파가, 하나님이 주신 잉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떠나버리죠. 떠나버리면 인간은 어디로 환원이 되느냐 하면은 인간에서 흙으로 도로 환원이 됩니다. 그냥 환원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사무엘상 17장 이야기입니다.

 

자, 인간이라고 여겼지만 인간은 뭐다? 인간은 몸이 아니고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유한에 만족할 인간이 아니고, 만족하는 유한이 없어요. 아무리 가지고 가져도 어디를 지향한다고 했어요? 무한을 지향하는 겁니다. 무한. 무한을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절대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의 심리 가운데 그런 것이 있어요. 여자는 아니지만. 니가 나보다 더 예쁘냐? 내가 그냥두지 않으리라. 뭐 이런 것. 길 가다가 저게 이쁜데 무슨 화장품을 발랐지? 그 여자들은 자기가 사용하는 화장품을 사용했거든요. 낯선 남자에게서 내가 아는 향기가 난다. 옛날 cf에 그런 게 있죠. 김선아가 나왔던. 김선아가 원래 cf모델 출신이거든요. 낯선 남자에게서 자기가 쓰는 향기가 나온다 이 말이죠. 그 남자의 여자가 내가 쓰는 향수를 똑같이 쓰나? 뭐 이런 거죠.

 

인간은 유한에서 무한을 추구하기 때문에, 무한이 유한인 몸을 굉장히 강압을 하고 힘들게 만들어요. 시달리게 만드는 거예요. 사람이 몸이 굶어서 교도소에 가고 죄 짓는 경우는 작아요. 그야말로 장발장 같은, 너무나 배가 고파서 빵집 유리창 깨고 하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니가 나 무시해?” 이것 때문에 모든 사건의 99퍼센트가 니가 나 무시해?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드럼이나 치지 뭣 하러 의대에 갑니까? 의대에 가야 조국의 가문을 살리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 모습이 딱 나왔죠. 딱 나온 거예요. 왜 교회에 갑니까? 교회에 가는 이유가 뭐예요? 옛날에는 교회에 안 갔어요. 어디에 갔어요? 무당 찾아 갔어요. 무당은 뭐냐, 신과 지상세계와 연락책이거든요. 연락책이 무당이잖아요. 근데 무당이라는 조잡한 그런 형식에서 이제는 세계화된 무당을 찾아가는 거예요. 뭐 무당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에 교회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아끼고 나를 될 수 있는 대로 무한한 존재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을 받으면 신이 될 수 있다는,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그러한 것을 지향성에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몸이 가만두지 않죠.

 

오늘 첫 번째 강의 사무엘상 다윗과 골리앗 전쟁하면서 서론이 길다고 생각이 들지만, 이 서론은 좀 길어야 돼요. 이 서론이 길지 아니하면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다윗이 나왔죠. 사무엘상 17장 12절에 “다윗은”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는 셀프 스토리self story, 내 이야기이고 싶어요. 내 이야기. 사람들이 다윗이든 예수님이든 뭐 어떤 이야기든 딱 궁금한 것은 나의 역사, 나의 이야기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 괜찮은 인간의 어떤 스토리, 인생의 스토리가 있으면 내가 그것을 흉내 내게 되면 동일한 효과를 내가 얻어 챙길까 싶어서 영웅담이라든지 그런 것을 찾는 거예요.

 

우리 어릴 때 백설공주, 신데렐라, 그런 동화 보잖아요. 신데렐라 인생이 한방이잖아요. 인생 뭐 있어? 한방이지. 한방이 대박이 나면 인생이 풀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신데렐라 아닙니까? 그 한방을 위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보이즈 비 앰비셔스, Boys Be Ambitious가 아닙니까?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한방. 언젠가는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돈 되는 그런 남자가 길거리에서 스카우트 할 것이다. 뭐, 길거리 스카우트 할 수 있죠. 계약직으로 입사했는데 부딪혀서 커피 흘려가지고 만나는 그 이야기. 전부 다 드라마는 한방입니다. 그 한방에 출생의 허접함을 이겨내잖아요. 출생의 비밀까지 이겨내요. 나중에 “오빤데! 배다른 오빠!” 이런 경우가 참. “우리 사랑하게 하옵소서.” 이런 거.

 

다윗이야기를 우리가 수입하려고 하는데, 성경의 이야기는 이렇게 됩니다. 다윗이야기가 등장하면 우리이야기는 접어야 돼요. 접을 때, 뭘 접어야 하느냐 하면 나의 신 됨을 접어야 합니다. 나의 영원함을 접어야 합니다. 다윗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이걸 접으려면, 뭐냐 하면은 여기서 교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체.

 

자, 다윗이야기니까, 여기 다윗이야기는, 셀프스토리는 곧 누구 셀프스토리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기이야기죠. 하나님의 자기이야기를, 나를 유지하는, 견지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여기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들어오려면 내 셀프스토리는 파괴되어야 해요. 있으나마나가 되어야 돼요. 김정은이 미사일 한방을 나한테 쏘아야 돼요. 완전히 박살나버려야 해요. 내 인생에 어떻게 많은 것을 투자하고 애지중지했더라도, 그 애지중지가 다윗이야기 앞에, 또는 하나님이야기 앞에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쌓아놓은 모든 바벨탑이 다 허물어져야 하고 무산되어야 돼요.

 

그 다윗이야기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다윗이야기 속에 십자가이야기가 들어있어요. 그러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나의 세계는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내 셀프스토리가 무의미한,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애썼던 내 인생이 예수님 한방에, 십자가 한방에 끝. END. 끝났어요. 세리나 창기가 자기인생, 자기셀프스토리 그거 붙들려고 간수하고 빛내려고 하는 인간들보다, 세리와 창기는 바닥인생이죠. 이거는 내세울 것이 전혀 전무한 거예요. 없는 거예요. 굳이 내세울 것이 없는 인생.

 

꼭 지금 옆에 털갈이 하고 있는 개 같아요. 차라리 개가, 무한을 포기한 개가 더 인간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주여, 개처럼 되게 하옵소서.” 왜 그런 기도를 안 합니까? 자존심도 없고, 그냥 천당 갈 생각도 안 하고. 줏대가 없어요. 개는. 아무 줏대가 없죠. 물론 자존심 있다, 줏대가 있다고 하지만 그거는 너무 인간하고 가까이하다보니까 인간물이 들어서 그래요. 오염된 개에요. 개 같지도 않은 개. 그건 개가 아니고 위험한 개에요. 진짜 개는, 순수한 개는 인간들이 청문회 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는 개. 청문회 할 때 국회의원 다 치우고 개를 이쪽에 다섯 마리 이쪽에 다섯 마리 놔두면 좋겠어요. 깔끔하게.

 

독재자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을 개로 보고 유일하게 자기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 독재자에요. 김정은이죠. 이걸 수련회 때 예외라고 했어요. 예외. 그런데 예수님은 예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비-전체. 전체 속에 아예 들어와 버렸죠. 예외, 멀찍이에서 내려다보는 위치가 아니고, 개만도 못한 속에 같이 개만도 못한 같은 처지로서 들어와 버렸어요. 이게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입니다. 이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이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전부 다 뭐냐 하면은 자아가 상상한, 그걸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이념이에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고 싶거든요. 되고 싶은 것에 누가 먼저 있다고, 누가 먼저 가 계시다고 상상하고, 거기서 내 삶에 활기를 주고 목표가 될 수 있는 대상, 그걸 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신은 거기에 계시고 내가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기 전에 이미 오셨어요. 비천한 몰골로. 우리가 외면할 정도로. “나는 그런 타입은 내 타입이 아닙니다.”라는 거예요. 그런 신은 내 타입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타입은 뭐냐, 나를 신으로 만들어주는 신이 좋은 타입이에요. 나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타입이 내가 믿고 싶은 타입이지, 나를 저 밑에서 잡아당기는 하나님은 내 타입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내가 비참한 게 싫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욥기 3장은 왜 나온 거예요? 욥기 3장에. 욥기는 왜 있는 겁니까? 하나님 때문에 마귀가 왔고, 마귀가 밀어내니까 욥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좋았습니다. 태어나기 전까지 가게 하옵소서.” 제가 자꾸 서론에 머무는데, 제가 본론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본론이 참 어려워서 그래요. 그래도 어려워도 들어가기는 들어가야 하니까.

 

자, 몸과 자아를 분리시켰습니다. 자아는 무한, 신. 몸은 이미 흙이에요. 이미 흙이라니까요. 이미 흙이에요. 여러분 인간보고 흙이라고 하면 이게 명예훼손죄로 걸립니까? 안 걸리죠. 인간보고 흙이라면? 왜? 흙이니까. “당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나쁜 말이 아니잖아요. 당연한 거잖아요. 죽어 가면 뭐가 되죠? 흙이 되죠. 그러니까 “당신, 흙이 되어갑니다.” 이게 무슨 욕이에요? 지당한 팩트지. 욕이 아니다 이 말이죠. 욕이 아니죠. 그걸 명예훼손 걸고 그러면 안 되죠.

 

근데 이 자아를 주께서는 회수하는 겁니다. 이 자아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선악과 들어있으니까 이거는 나쁜 자아거든요. 신이 되려고 했다 이 말이죠. 진짜 자아는 어디에 들어 있느냐 하면은 몸에 부합이 되어줘요. 이 몸에 부합된 자아일 때, 그 자아가 몸에 합당한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몸의 자아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아라는 것을 인식하는 거예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피조물에게는 뭐가 없을 거예요? 인생의 주도권이, 피조물이니까, 창조된 거니까, 창조되었다는 말은 지금 창조주가 살아있다는 뜻이거든요. 창조주가 우리를 창조해놓고 돌아가셨어요? 그게 아니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는 분이 주도권을 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악마가 주도권을 쥠으로 말미암아, 완전 창조주는 이 몸의 주도권이 현재 니가 이 몸이 살아있다는 것으로 나가서는 그게 참된 자아, 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반대로 나가버려요.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 몸을 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몸을 지닌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어요. 실제로 그것도 재수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내가 살려고 온 것이 아니고 죽고자 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죽음이 창조에요. 죽음이 왜 창조냐 하면은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내 백성을 위해서 죽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 죽음의 효과는 오직 누구한테만 해당이 됩니까? 내 백성한테 해당이 되겠죠. 그러면 누가 성도냐, 누가 성도 아니냐 하는 것은 오직 죽음만 전파해야 되죠.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전파해야 돼요. 죽음을. “죽음이 나를 살렸군요.”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그래서 나의 삶보다 뭐가 더 소중하다? 나의 살아있는 셀프스토리보다 뭐가 더 소중한 거예요? 예수의 죽으심이 더 소중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아무것도 알지 않는다. 아무것도, 라는 이 말은 모든 성경구절들이 어디에 모아서 해석이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만 도출되는, 내가 뭐 믿음이 좋다는 이런 것 말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왜? 그 분만이 진짜 하나님이니까.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은 죽음으로 나타나거든요.

 

죽으심으로 나타나는 해석만이 진짜 해석이에요. 다른 해석은 안 됩니다. 뭐, 이거해가지고 교회 복 받아서 부흥됐다. 이런 해석은 안 됩니다. 교회가 있다, 없다가 아니고 죽으심이에요. 죽으심이, 말이 재밌어요. 죽으심이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것은 아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살아있고, 우리는 그 죽으심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죽지만 산사람이 돼요.

 

주의 일은 뭐냐 하면은 반드시 내 죽음을 잡아당겨서 들어갑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주님은 내 안에서 비로소 살아있어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전제조건이 뭡니까? 내가 이미 죽은 자, 흙이며, 이 몸은 죽어야 될 몸인 것을 인정하는 순간, 다시 말해서 나의인생, 셀프스토리가 흐지부지 되는 순간, 주님의 백성에 대해서 꾸준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진도를 나가봅시다. 그거하고 이 이야기하고 다윗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나오겠죠. 중요합니다. 자아가 헛방이에요. 이거는 헛방이에요. 몸에서 여분이 나오는데, 여분이 뭔가 수상해요. 뭔가 음침해요. 악마적이라서 이 몸을 누구 몸으로 바꾸느냐 하면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몸으로 바꿔져야 해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이 땅에 인간의 죄의 몸으로 오신 거예요. 자기백성에 한해서.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자아가, 자아로 인하여 몸이, 자아에서 몸으로 가야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자아와 몸이 만남으로 죄가 자꾸 생산이 되어야 합니다. 생산되어야 이 몸을 처리하여야 할 정당성이 확보가 되는 거예요. 죄의 값은 뭡니까? 사망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죽는 거예요. 어떤 철학자도 우리 인간이 왜 죽는지를 몰라요. 철학자들이 아무리 이론을 내도, 과학적 이론을 내도 왜 죽는지를 몰라요.

 

담즙은 어떻게 고치는가, 갑상선은 어떻게 고치는가, 이건 되는데, 고쳐놔 봐야 죽는 이유를 의사는 몰라요. 부산의학전문대도 몰라요. 장학금 받아봐야 몰라요. 왜 죽는지를 모른다고요. 이 말은 살아있는 내가 왜 의미 없이 살아있는지 이유를 몰라요. 헛되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중들이 헛되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헛된 이유를 몰라요. 왜 헛된데요?

 

제가 어제 여수강의를 했거든요. 기타강의에 보면 나옵니다. 여수강의. 강의하면서 거기에 계신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누가 당신을 건드리면 기분이 나쁘죠? 왜 기분 나쁘죠? 기분 나쁜 이유를 한번 대보세요. 문제는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왜 기분 나쁜지. 기분 나쁜 것은 맞는데 왜 기분 나쁜지. 그러면 누가 당신을 죽이면 기분 좋습니까? 당연히 기분 나쁘죠.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죽이면 하나님에 대해서 기분 나빠하겠습니까? 당연히 기분 나쁘죠.

 

근데 기분 나쁘다고 하면 믿음이 없다는 소리 들어가지고 또 인생 힘들게 만들까싶어서 또 아양을 떨어야 될 게 아닙니까?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사실 뜻이 뭡니까? 그냥 유한을 가지고 무한을 행세한, 모방한 거예요. 이게 마귀 짓이거든요. 유한이면 유한으로 이렇게 인정을 해야지, 어떻게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갑니까? 세상만사가 어떻게 내 뜻대로 다되어집니까?

 

여수에 가면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어요.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는데, 너무나 유명하고 요리가 너무 좋아요. 토속적으로. 문제는 주차장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주차장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장사를 안 하면 돼요. 이게 인간의 모순이에요. 인간의 모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이 꼭 죽어야 돼요. 남이 나보다 쳐져야 되고. 이 경쟁 사회에서. 그걸 제로섬zero-sum이라고 하는데, 한쪽이 플러스가 되면 필히 한쪽이 마이너스가 되는 거예요. 한쪽이 합격하면 한쪽이 불합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자아와 몸의 결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몸을 죽이되 그냥 죽이지 않고, 죄와 결탁시켜서 이 몸을 제거하는 작업을 해주시는 거예요. 제거하는 작업. 이걸 오늘 사무엘상 17장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게 전쟁이에요. 다윗과 지금 누구하고 전쟁을 하죠? 골리앗과 전쟁하죠. 그런데 이 다윗이 어른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지만, 남들 보기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죠. 블레셋의 대표자는 골리앗, 그럼 이스라엘의 대표자는 그 당시에 왕이 있어요. 사울이 대표자가 되어야 하는데, 사울이 대표자를 하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다윗이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은 이미 골리앗의 전쟁에서 이미 승리한 것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패배자가 되는 거예요. 패배자.

 

지금 제가 하는 취지를, 중요한 대목이니까 이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로마서 5장 12절에 읽어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다 이 말이죠.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사망의 왕 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죄의 왕 노릇, 사망의 왕 노릇, 그게 17절에 나옵니다. 누가 읽어볼까요?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왕 노릇 한다고 되어 있죠. 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이 뭐냐 하면은, 개인이 사적으로 어떻게 착하게 사느냐, 바르게 사느냐, 그거 접자. 우리 그거 접자. 내가 옛날에 이런 실수를 했고 이런 죄를 지었다. 아, 그거 일단 접자. 접고, 하나님의 그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쪽의 대표자가 뭐냐 하면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인간 니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고, 인간을 누가 지배하고 통제하고 통솔했고 누가 왕 노릇 했는가를, 니가 그 왕을 내세우는 식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죄가 나에게 왕이 되고 그 죄에 대해서 우리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내 욕망의 왕 노릇을, 내가 거기에 대해서 반항할 수 있는 자질이나 그런 역량이 없습니다. 교회 가서 빌어도 소용이 없어요. 전부 다 교회 가서 비는 것, 행동하는 것, 내 욕심과 욕망에서 나온 겁니다.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몸+여분의 것’이에요. 제가 아까 욕망의 방향은 어디라고 했습니까? 욕망의 방향은 무한이에요. 무한.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이 되니까 주님께서 관여하사, 신이 되고자 하니까, 신의 특징은 안 죽어요. 이게 불멸성이 있어요.

 

그런데 진짜 그때는 계시를 모를 때고, 계시고 딱 오고 보니까, 아, 우리가 신이 되고 하는 그것이 나를 죽이는구나! 그게 지금 우리는 죽이기 전에 벌써 죽음으로 질주할 수밖에 없고, 그 자체가 이미 죽은 상태구나! 사망이 왕 노릇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죽은 상태라고 제대로 지적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이래서 죽는다고 하는 것만 복음일까요? 아니에요.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뭐가? 하나님의 의가. 이쪽의 대표자가 인간이 아니고 악마라면, 죄라면, 사망이라면, 저쪽의 대표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사적으로 남한테 도와주고 착한일하고 뭐 훌륭하게 살고, 그거는 구원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고 상관도 없는 짓이에요. 없는 짓인데, 마귀가 니가 바르게 해야 한다고 왜 자꾸 독촉하는 겁니까? 기분상 이렇게 바르게 착하게 살면 어느 신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그렇게 내가 느끼도록, 배후에서 마귀가 그런 식으로 거짓된 인생을 평생 살도록 나를 그렇게 뒤에서 채찍질해온 거예요. 참, 실수했다고 무릎을 치고 잘했다고 우쭐대고. 그렇죠. 전부 다 청문회 열어볼까요? 까발려볼까요? 도대체 믿어야 할 것은 안 믿고 자기 행함을 믿어요. 내가 예수 믿었다. 십자가 믿었다. 전부 다 하는 짓이 내가 믿었다. 내가 행했다. 좀 빠져 도! 안 빠져요. 우리가.

 

대표자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범죄 한 그 모든 정황을, 이 사태를, 수습을 어떻게 하느냐, 너네 말고 한 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문제에서 해결되고 그 죄의 왕 노릇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그 벗어났을 때의 예수님의 행하심이 있잖아요. 그 행하심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내 의가 아니고 주의 의가, 아담의 죄가 나를 죽였듯이 주의 의가 있는 한 나는 지옥가고 싶어도 못 가는 신세. 지옥이 고향인데,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지난 오전설교에서 했거든요. 룻하고 오르바가 대조적이에요. 오르바는 자기 남편 죽고 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갔잖아요. 룻은 가고 싶어도 가면 주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거예요.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고향 바꾸기. 출처 바꾸기. 태생 바꾸기.

 

따라서 이거는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인간의 본질은 전쟁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아요. 인간은 누가 나를 건드려줘야 해요. 전쟁을 하는 순간, 주님께서 무슨 조치를 하셨는가, 내가 안 되는 것을 다 이루셨거든요. 완료입니다. 완료. 첫째 강의 제목을 완료로 하고 싶어요. 완료입니다. 사울이 못한 것을,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 어느 누구도 못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한 게 아니에요.

 

전쟁하기 전에, 다윗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패배되어 있어요. 여기 골리앗은 큰소리가 막 나오는 거예요. “이 비겁한 머슴아들아 나오너라!” 막 이런 식으로. “우리 일대일로 붙자! 남자끼리. 전쟁할 거 뭐 있노? 손해만 나니까 일대일로 해가지고 이긴 팀이 다 먹자. 이긴 쪽이 다 먹자. 몰빵하자! 콜?” 막 이런 식으로 놀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용기가 없나? 인간들아!”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왜 겁을 냈습니까? 이걸 묻고 싶어요. 왜 골리앗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까? 아까 전에 질문한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왜 당신은 누가 건드리면 기분 나쁩니까? 하고 똑같은 거예요. 답변은 뭡니까? 우리의 본성이니까 그렇죠. 무조건 나를 건드리면 나는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본성이 있어요. 하나님 건드려도 우리는 신경 안 써요. 근데 나를 건드리면 내가 신경질 나요. 왜? 하나님보다 내가 더 소중하니까.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비교하는 거예요. 진정 소중한 것이 뭐냐, 우리가 진짜 소중한 것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소중한 것을 끊임없이 이걸 가리고 있구나. 치워라! 그거. 되도 않는 것을! 치워야 되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왜 골리앗을 무서워하느냐에 답변을 드리면 골리앗이 등치가 크거든요. 등치가 커요. 답변이 별로 어렵지 않죠. 왜 등치가 큰 게 무서운가 하면은, 이미 이스라엘이 등치가 큰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 보통 사람은 등치가 1미터 70센티미터라면 골리앗은 3미터거든요. 그러면 1미터70에 비해서 3미터는 1미터 70한테는 뭐로 받아들여지느냐 하면은 무한으로 받아들여져요. 무한으로 여겨지는 겁니다. 무한으로.

 

지방대학 학생한테는 서울대학이 무한으로 여겨져요. 서울대학 학생한테는 의대학생이 무한으로 여겨져요. 세상에! 그 어려운 단어를 어떻게 다 외워요. 의대 1,2학년 해보세요. 정신없습니다. 외울 단어가 수천 개가 돼요. 고둥학교 때 그렇게 공부했으면 천재 다 됐을 거예요. 그걸 다 외워야 해요. 일일이 그것도 색다른 용어. 그것도 단어가 짧은 게 아니라 긴 용어. 그걸 다 외워야 돼요. 그걸 다 외워야, 그 다음에 재료가 되어야 재료를 엮는 원리구조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을 철저하게 해부해야 되니까. 나이 많아서는 의대공부 못해요. 머리가 안 돼서. 한창 파릇파릇 할 때 의대공부 하잖아요.

 

170한테 296.8되는, 약 3미터가 넘는 엄청난 키는 비상적(어떠한 한도나 한계를 뛰어넘어 벗어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죠. 비상적이고 초월적이죠. 거인족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거인족을 두신 이유를 알겠죠.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 잠재력과 능력의 밖에 있을 때, 이거는 마치 뭐냐, 우리의 소망을 미리 현실화시킨 신 같은 존재에요. 신 같은 존재. 목사의 강대상이 높은 것은 바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내 기도해야 소용이 없어. 의인의 기도만이 간구를 들어주는 기도야. 의인이 누구냐, 목사가 기도해줘야 되요. 그래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차 샀는데 교통사고 나지 않게 차 대가리에다가 기도해주세요.” 이렇게 하는데, 물론 목사는 그게 또 솔찬히, 꽤 많이 수입이 돼요. 수입이 된다고요.

 

전쟁이 초월적이고 무한한, 죄 된 인간이 무한을 선망하는, 무한히, 힘센, 나보다 위대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그리고 그것만 있으면 나는 내 소원과 욕망을 달성할 것 같은 그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자진해서 고개를 숙이죠. 그렇죠. 이 세상이 그렇잖아요. 힘센 것, 돈 많은 것, 권력 있는 것에 대해서.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어디에 있어요. 돈으로 다 되죠. 재벌 3세가 까불락까불락 거리는 이유가 뭡니까? 변호사보고 반말하는 이유가 뭐예요? “니 돈 보고 온 우리 집 하인이 아니냐?”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이런 세계와 전쟁을 벌인다는 말은, 다른 식으로 이 다윗의 세계는 구성되고, 운용되고, 돌아간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윗의 세계가 뭐냐, 이게 바로 천국이고, 이쪽, 골리앗의 세계는 뭡니까?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이 되죠. 전쟁이 천국과 지옥의 전쟁을 다윗과 골리앗을 대변해서 대표해서 보여준 거예요.

 

자, 주님께서 다윗의 세계가, 주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니까, 다윗에게 일어났던 그 상황을 주님이 그대로 몸소 했고,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했던 또는 다윗이 있던 상황을 자기백성이기 때문에, 자기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그걸 제공해버리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오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이름을 풀이하면 뭐냐 하면은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백성을 죄에서, 아까 죄는 내가 짓는 죄는 죄가 아니죠. 현재 왕 노릇하는 이 전체가 죄예요. 크고 돈 되고 위대하고 하는 그것을 선망하는 것이 죄다 이 말이죠. 그 세계에서는 통용이 돼요. “아이고, 부러워라! 골리앗. 부러워라! 골리앗.” “니 취직 어디에 했노?” 추석이 되면 젊은 애들 혼나죠. 결혼은 했나? 취직은 했나? 언제 장가갈 거야? 애인은 공부 잘한대? “취직은 했나?” “이번에 대기업에 했습니다.” “아이고, 대기업!” 대(大)자에요. 대(大)자. 큰 거. 대기업이에요. 대기업. 골리앗이 아닙니까? 골리앗.

 

대기업의 특징은 안정성이 있다는 것. 평생을 몸 바칠 수 있다는 것. 연봉이 4천만 원이라는 것. 중소기업은 연봉이 2천만 원이에요. 반값이에요. 반값. 왜 반값이냐, 대기업에서 하청 받았으니까 반값이죠. 중간에서 떼고 가니까. 뻔한 거잖아요. 대기업 되는 순간 다른 기업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냥 대기업 못해가지고 뭐 노끈공장해서 돌리고. 광산김씨처럼 노끈공장해가지고 나도 언젠가는 내 아들이 스타가 될 거라는 것을 기다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성경에서 왜 다윗이 등장하는가를 이제는 아시겠죠.

 

이 세상이 경쟁입니다. 우리가 친숙하고 익숙한 이 세상이 계시의 세계에요. 주님께서 이 세계를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거예요. 다윗은, 다윗을 쳐야 되겠죠. 다윗의 세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다윗의 특징은, 다른 말로 하면 다윗의 무기는 뭐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인간 대 인간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대 인간의 전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지옥 속의 인간들의 발상에서 나왔죠. 참된 하나님은 소년 다윗,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저 비리비리하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그 거인 골리앗에 비해서, 골리앗은 어른이죠. 키 크죠. 소년은 미성숙하잖아요. 소년이니까. 어른은 아니다 이 말이죠.

 

무기는, 골리앗은 칼 들고 방패 들고 완전무장하고. 이쪽은 뭡니까? 다윗은 비무장이다가 방탄복도 안 입었어요. 돌멩이 들고 나와요. 돌멩이 들고. 근데 이 돌멩이의 의미가 뭐냐, 이 골리앗을 뭐로 보느냐,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뭐로 봅니까? 하나의 짐승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뭡니까? 유일한 인간이죠. 인간이 짐승 잡는 거예요. 왜 그런 안목은 우리한테 없습니까?

 

이 말은 복음이 안 통하거든 말 섞지 마세요.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이 안 통할 때는. 갑자기 걱정이 되죠. 이혼을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혼해도 마찬가지에요. 같이 있어도 이혼이냐 진배없으니까. 괜찮아요. 구태여 헤어질 생각하지 말고. 제 말은 말이 안 통하거든 억지로 달래줄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러면 소년 다윗이 안 되고 이스라엘 돼버려요. 아부한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핑계로 아부하지 마세요. 그거는 얼추 부러운 거예요. 부러우면 지는 거예요. 그쪽 세계가.

 

다시 한 번 내 몸을 자초하는, 무한으로 내 몸을 감싸려는 그런 시도를 하지 마세요. 우리는 무한이 아니고 유한입니다. 이 유한은 악마라는 무한에 지금 통제당하고 있어요. 완전히 노예에요. 노비에요. 노비. 다윗의 정신이 되도록 성령께서 오십니다. 다윗의 정신은 뭐냐 하면은, 이 내가 보잘 것 없어요. 맞아요. 반드시 보잘 것이 없는데, 보잘 것 없어도 의미 있어요. 왜? 이건 셀프스토리, 나의 스토리가 아니고 누구 스토리? 주님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전쟁에서 이겨야 되지 않습니까? 이미 이겼어요. 왜 우리가 나서서 이기려고 합니까? 이미 이긴 꼬라지가 이 꼬라지에요. 이미 이긴 꼬라지가. 부러워하지 않는 꼬라지. 그 나라와 의를 사모하는 꼬라지. 이게 이미 이긴 겁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환란과 핍박이 올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보다 더 소중하고,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는 운반체거든요. 내 몸은 어디에 효력이 있느냐, 십자가로 승리했음을, 십자가로 이제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는 그 몸으로 사용되기 위해서 아직도 주께서는 우리 몸을 여전히 살려주십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