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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51강 / 사무엘상 17:1 ( 현실구성) / 190723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무엘상

51강 / 사무엘상 17:1 ( 현실구성) / 190723

정인순 2019. 7. 26. 08:41


음성1       


동영상1      

녹취:이미아

대전-51강 사무엘상17장1절(현실구성)

20190723-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7장 해봅시다. 사무엘상 17장 1절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죠. 유명한 대목입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그리고 소년 다윗이 한판 붙는 그 대목이 사무엘상 17장에 나옵니다. 교회 좀 다녔다는 사람들이라면 어릴 때 이 신나는 이야기를 다 알고 있죠. 그런데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골리앗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다 다윗이 되고 싶어 자부하고 있는데, 실은 우리가 골리앗이에요. 왜냐하면 추구하는 것이 골리앗이기 때문에. 성경에 의도적으로 다윗과 누구 하나님의 선지자 또는 하나님의 신을 받은 사람이 등장할 때는 우리가 성급하게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반대편에 나오는 자들의 성향을 우리가 살펴봐야 돼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성신을 못 받은 사람이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다윗이 소년 다윗이거든요. 이 소년 다윗이 성신 받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성신 받지 못한 사람들 둘이 나옵니다. 하나는 골리앗이죠. 블레셋 사람. 블레셋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우상을 섬기는 것. 우상의 특징은 여러분이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 아실 거예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뭐가 빠졌다? 언약이 없는 신. 언약이 없는 신이에요. 언약이 없는 신. 그런데 또 성신 못 받은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사울+이스라엘 군사들입니다. 현 이스라엘 사람들이죠.

 

사울+이스라엘 군사들이 언약이 없는 골리앗이 등장하니까 맥도 못 추고 있어요. 꼼짝도 못하고 있어요. 왜 골리앗을 겁을 내느냐 하면은 한통속이니까 때문에. 그러니까 골리앗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사울+이스라엘 군사들)과 사실은 한통속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과 교회 다니는 사람과 전부 다 한통속이에요. 하나님의 성신, 성신이라는 말은 요새말로 하면 성령이겠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나오니까, 둘 다 한통속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보낸, 마지막 때에 성령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은, 그전에는 성신이지만, 성령을 최초로 받은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단강에서.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셔서 받죠. 성신은 미완료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은 성령은 최종적이에요. 최종적. 이미 완료적이에요. 완료적입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다윗이 딱 성신을 받고 난 뒤에 나서니까 이쪽(골리앗)은 아예 우상이고 이거(사울+이스라엘 군사들)는 형식으로만 여호와고. 형식으로만 여호와인 것하고 진짜 여호와를 모르는 것에 오히려 그 안에 지금 빌빌 굴복당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세상을 오히려 부러워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 둘을 보여주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양쪽을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는 뭐냐 하면은 ‘전쟁은 어떻게 진행 되는가’입니다.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시작한 전쟁입니다. 인간이 시작한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한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여기 블레셋 나라 장수 골리앗, 이 블레셋 나라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닙니다. 인간의 전쟁이죠. 인간의 전쟁은 오늘날 식으로 이야기하면 생존경쟁 또는 생존투쟁,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는 것. 취직하고 결혼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들 공부시키고. 전부다 이게 전쟁이에요. 전쟁이죠.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까? 하나님의 전쟁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죠. 인간의 전쟁이죠. 아까 차안에서 우연히 들었습니다마는, 애가 군대를 가야하는데 방위를 받았다. 이거 무슨 전쟁입니까? 하나님 전쟁이에요? 인간 전쟁이에요? 하나님 전쟁이냐, 인간 전쟁이냐는 판단하기가 쉬워요. 사람들이 군대를 정식으로 가는 것을 부러워해요? 방위로 빠지는 것을 부러워해요? 방위로 빠지는 것을 부러워하죠. 그러면 그거는 인간전쟁이에요. 왜? 골리앗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의 전쟁에서 이미 적이죠.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적의 편에 서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쟁에서 적이 되는 것들을 우리가 그렇게 선호하고 부러워하고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원하는 것을 위해서 예수 부르짖으면서 교회 세워서 거기 다니고. 교회는 꼭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내 안에 무슨 괴물이 들어있는지를 교회 다녀야 이게 발각이 되거든요. 예수, 예수하지만 예수에 관심 하나도 없어요.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생존에서, 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원해요. 제가 보니까 집사님이 지금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편한 것이에요. 남편 죽고 편한 것. 그냥 내 몸 하나 편하면 돼요. 마음대로 수련회 갈 수도 있고 마음대로 성경공부 참석하고. 이제는 좀 제발 나 좀 놔줘. 힘들어 못 살겠다. 외로워도 좋으니까 좀 꺼져달라고. 뭐 이런 식이죠.

 

그게 지금 강의한대로 한다면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이게 나의 전쟁이에요? 주님 전쟁이에요? 나의 전쟁이죠.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목사가 교회 세워놓고 있는 것은 나의 전쟁이지 주의 전쟁이 아닙니다. 근데 목사가 더 나쁜 점은 자기 전쟁이면서도 사람들에게 뭐라고 사기를 치느냐 하면은 이게 주님과 관련된 일이라고, 사업이라고 사기를 치니까 더 나쁘죠. 아무것도 아닌데. 교회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교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구원받고 말씀으로 구원받잖아요.

 

그럼 교회는 뭐냐, 성령으로 인도하고 말씀으로 구원받는 그것을 교회가 오히려 방해하고 있죠. 막아서고 있죠. 근데 이것을 알아채는 사람이 없어요. 교회 등록하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니까. 왜? 구원받은 줄 알고. 본인이 그렇게 착각을 하고 싶어 해요. 교회 다니고 세례 받고 성찬식 받으면 구원되는 줄 알고. 그래서 누가 교회를 욕하면 지 욕하는 줄 알고 적극적으로 거기서 달라 듭니다. 왜 나를 건드리느냐? 자기 전쟁이기 때문에. 교회 욕하면 자기 적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1번 교회한테 죽었다. 2번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죽었다. 3번 모든 사람들한테 죽었다. 모든 사람들이죠. 그 모든 사람 속에,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모든 사람 거기에 이미 우리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은 늘 전쟁을 하는데, 무슨 전쟁을 하느냐 하면은 바로 나의 전쟁을 한다. 여기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나의 전쟁이죠. 나의 전쟁할 때, 나의 몸이 있죠. 몸에서 나온 것이 납니다. 몸에서 나온 것이 나에요. 여기서 몸이 없으면 나도 없어지니까. 몸에서 나온 것이 난데, 나의 전쟁이라는 것은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내 몸을 지키는 전쟁입니다. 내 몸을 지키는 전쟁이죠. 나라고 하는 것은 내 몸에서 나왔는데, 내가 편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 몸이 건강하고 편안하다는 뜻이에요. 외롭지 않고. 수다 떨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몸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서 욕망이 나오는데 욕망이 계속해서 전쟁을 유발합니다.

 

그런데 자, 이 몸이 1살 때, 2살 때, 3살 때, 4살 때, 5살... 세월이 갑니다. 몸이 1살, 2살 때는 가장 기초적인 전쟁을 하겠죠. 배고플 때 젖 달라하고 배설할 때 그냥 배설해버리고. 그러면 이 전쟁에서 갓난아기는 누가 처리해주느냐 하면은, 이 전쟁을 누가 대신 처리해주느냐 하면은 가까운 부모가 처리하죠. 제 말을 잘 들으셔야 해요. 인간의 전쟁은 자기 몸의 전제입니다. 그럼 부모가 언제 좋은가 하면은 내가 해야 할 전쟁을 부모가 다 해줄 때 좋은 거예요. 내 몸을 좋게 하면 그 부모는 좋은 분들이에요. 근데 내 몸이 이렇게 있는데 엄마가 시장에 간다. 애는 호소하죠. 울죠. 나를 놔두고 어디에 가냐고 울잖아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누구 전쟁이에요? 내 몸 하나 중심의 전쟁이에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내가 날 때부터 하나님 없이 자기가 절대자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죽음의 모습인데, 죽음이 나오는 원인인데, 원인이 그건데, 내 몸이 절대적이고 최고에요. 누가 아무리 뭐해도 내 몸이, 내가 잘 돼야 돼요. 내 몸이 편해야 돼요. 그거거든요. 그러면 한 4살 때가 됐다. 온갖 귀여움을 받아가지고 이제 부모는 누구 편이 됐느냐 하면은 내 편이 됐어요. 4살짜리 애가. 그런데 4살짜리 애인데 엄마가 또 동생을 가졌어요. 동생을 임신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애한테 라이벌이 생긴 거예요.

 

그다음부터 전쟁이 뭐냐 하면은, 부모는 내 몸만 절대적으로 위하는 분들이다.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고, 이 때는 무슨 소리든지 다 해요. 커서 어머니께 효도하겠습니다. 뭐, 지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지가 편하니까 다하는 거예요. 근데 딱 동생이 태어나버리니까 엄마아빠의 관심이 다 어디로 갑니까? 갓난 동생한테 관심이 있을 때, 애는 이 동생을 뭐로 보겠습니까? 자신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자기 적으로. 그래도 뭐 철난 언니오빠들은 동생들을 돌본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라이벌이라는 것은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남길 때 동생은 주고 자기는 안 주면 이거는 용서가 안 돼요.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한결 같아요. 인간은 한결같이 자기 위주입니다.

 

그래서 아까 질문한, 주님은 누구한테 죽었는가? 모든 인간한테 죽었습니다. 자, 4살까지 이야기를 했죠. 어느 부모가 4살 애한테 “애야, 밖에 나가도 밤 10시까지는 집에 들어와!”라고 4살 애한테 이야기하는 부모 있습니까? 없지요. 지가 알아서 오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내 몸이 갖고 있는 세계관, 나의 현실의 범주가 좁아요. 좁아서 골목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항상 어떤 위험을 느끼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많아요. 유치원 버스를 탔으면 유치원 버스는 나의 세계인 동시에 유치원 버스 바깥은 위험한 세계에요. 그래서 유치원 끝나자마자 자기 몸을 태우고 옵니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서 유치원 버스에서 중간에 내려 PC방에 간다면 그 PC방 그 영역만큼은 나의 영역으로 이게 추가가 돼요. 그 PC방 말고 다른 데 못 가요. 그 PC방에 자기 자리에 앉아서 하다가 후딱 집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7살이 되고 10살이 되고 이러면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은 집이 맞긴 맞는데 점점 집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의 범주가 넓어지겠죠. 자기가 넓어지겠죠. 넓어지면서 뭐가 생성이 되느냐 하면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가 드디어 형성이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가. 자기 범주가 늘어나면서.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이 넓은 범주에서 나한테 해코지하는 이건 나쁜 것이고, 나쁜 상황이고, 나쁜 사람이고, 또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짓이 되고. 나에게 욕을 한다든지, 10살 때 어떤 친구를 만났는데, 어떤 친구가 나한테 욕을 한다면 그 애는 나쁜 아이에요. 나쁜 아이.

 

왜? 나한테 욕을 했기 때문에. 내 물건을 빼앗았기 때문에. 아니, 내가 그 물건을 좀 쓰자고 했는데 그 애가 안 돼! 라고 했기 때문에. 누가 깡패인지 구분이 안 돼요. 무조건 내가 하고 싶은데 거절을 했을 때는 패주고 싶은 거예요. 뭐, 깡패가 그냥 만들어집니까? 거기서 만들어지는 거죠.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태권도 다니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저 애 휴대폰 빼앗으라고 해서 그게 10살, 12살에 나온다면 이거는 깡패한테는 자기는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니가 왜 건방지게 갖고 있느냐 하는 거죠. 니는 나한테 무조건 내놓고 굴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범주가 넓어지죠? 아니, 2살 먹은 애가 휴대폰 빼앗으러 다닙니까? 아니잖아요. 가면 갈수록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고 넓어지면서, 아까 몸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욕망이 나오죠. 욕심이 나오죠. 그렇죠. 지금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정리해드리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정리해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왜 우상과 한통속인 가를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몸을 포기를 못한다니까요. 내 욕망을 포기를 못해요.

 

지금 새 아파트에 입주를 하셨는데,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고 서울 강남에 가서 말하지 마세요. 재벌 타운 한남동에 가서 하면 안 돼요. 이 동네에서는 같은 처지니까. 전에 살던 동네에 가서 하세요. 인간의 자랑은 뭐냐 하면은 나는 옳은 일을 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래서 나는 좋은 집을 샀으니까 나는 복 받았다. 나는 옳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거 미쳤어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거 완전히 미친 거예요. 그러나 누가 미쳤다고 하던 이게 본성인데 어떻게 합니까?

 

미리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자리에서 나와요. 주께서 나밖에 모르는 이 본성을 새로운 자리에다가 집어넣습니다. 그 자리는 내가 이 더러운 본성을 가지고 찾아갈 수 없는 자리입니다. 내가 획득할 수 없는 자리에요. 오히려 내가 기피하는 자리에요. 그 자리에 주께서 집어넣습니다. 그 자리는 몇 번지냐? 대전시 몇 번지냐? 없어요. 왜 없는가, 인간이 나이 60이 되고 70이 되도, 인간의 현실은 늘어나기는 늘어나는데 이 늘어난 현실이 다가 아니거든요. 90인생을 살아도, 본인이 경험하고 체험한 것을 다 끌어 모아도 그거는 주님이 아는 현실이 아니고 현실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 인간이 아는 한계점, 그 한계점을 넘어서 주께서 오셨고, 주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한계점 너머의 자리에다가 옮기신 거예요. 처소를 이쪽이 아니고 저쪽에다가 마련하신 거예요. 저쪽에. 그곳이 어디냐고 굳이 물으신다면 저는 어렵게 답변하겠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뭐냐 하면은 ‘언약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굳이 물으신다면 언약 안이에요. 묻는 것이 잘못이었죠. 어디쯤 되는 줄로 아는데, 어디쯤이 아니고 언약 안이죠.

 

아브라함이 어디에 갔습니까? 언약 안으로 들어갔어요. 사라졌어요. 죽었어요. 이삭은 어디에 갔습니까? 언약 안으로. 야곱은 어디에 갔습니까? 언약 안으로.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는 다 모여!‘ 산 자의 하나님인데,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죠. 교회에서 이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교회에서. 교회 교인들 보면 전부다 자기 욕심에 차있는데. 니가 욕심으로 갖고 싶은 그 현실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다른 데 있어요.

 

다른 데 있으려면, 이 속성이 어떤 속성이냐 하면은 이게 하나님의 원수 된 속성이어야 해요. 이 속성이. 우리의 본성이. 내가 내 몸 편해지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과 원수된 거예요.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로마서 5장을 한 번 봅시다. 8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시고 10절을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자, 예수님의 죽으심이 누구에게만 연결이 됩니까? 본인을 어떤 사람으로 볼 때만 예수님의 죽으심이 의미 있게 연결이 돼요? 자기가 죄인이죠. 근데 죄인이라고 해도 부족해요. 왜? “죄 지은 게 있겠지. 뭐, 내가 천사인가? 죄 진 게 있겠지.” 이 정도잖아요.

 

자, 로마서 5장 1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영웅이고 좋은 분이지, 진정 죽으심의 의미를 몰라요. ‘에이 뭐 죽었다가 곧 부활하겠지. 나는 부활만 챙기면 되니까.’ 이런 식의 생각으로, 아이디어가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고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십자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굳이 뭐가 되어야 합니까? 굳이 우리가 원치 아니하더라도 우리는 뭐가 돼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집 잘 사셨어요. 집 잘 사셨고 보람된 인생이라고 자부를 느끼셔야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원수가 된 거예요. 내 몸 하나 편하죠. 내 몸 하나 편하면 최고가 아닙니까? 굳이 제가 이런 질문을 해야 됩니까? 예수 믿는 게 편해요? 지 몸 편한 게 편해요? 꼭 그런 얄궂은 질문을 해야 되겠어요? 예수님으로 족합니까? 아파트 있는 것으로 족합니까? 이거 자칫 잘못하면 오늘 점심도 못 얻어먹고 쫓겨날 수가 있어요. 이사 왔으니 고생했습니다. 축복받았습니다. 이래 나와야 되는데, 이게, 이사 온 게 하나님의 원수의 또 다른 양상이에요. 원수 된 데에서 또 하나 추가하신 거예요. 근데 그걸 필히 해야 됩니다. 앞으로 더 크고 넓은 원수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빌딩을 사시든지.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죽으심을 양보 못 하거든요. 죽으심을 도저히, 니 머릿속에서 나의 죽음이 날아가는 것을 내가 참을 수가 없다. 택한 백성 같으면. 내 죽음 대신 다른 것으로 대리, 대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죠. 지난 낮 설교에 십자가만을 자랑하라고 했죠. 십자가만을. 성도의 특징은 뭐냐 예수 죽으신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가 나는데? 밥하는 소리에요? 이 동네는 밥하는데도 조용히 못하고 말을 하는 모양이라.

 

자, 아까 한 것을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좁은 범주라고 하는 것은, 7살 애한테 좁은 범주라고 하는 것은 해당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만약에 “니는 7살밖에 안 돼서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밖에 안 돼.”라고 한다면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46살 먹은 범주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70살 먹은 사람이 “아이고, 그것도 세상 살았다고.” 이러면 화를 내요. 왜? 자기 딴에 46년이라는 세월이 허송세월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여 진리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나름대로의 모든 노력을 해서, 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고 굴러가는구나, 라고 정리한 거예요.

 

그러나 백날 정리하면 뭐합니까? 나는 항상 옳다. 나는 항상 옳고 나는 항상 편해야 마땅하고 나는 절대로 고생하면 안 되는 인간이고. 나라는 존재는. 나는 내 눈에서 눈물 나면 안 되고. 만약에 누가 내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너 나 잘못 건드렸어! 나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만만한 인간 아니야! 하고 와락 달려들고. 구청에 가서 신나(시너)들고 불 지르고. 감히 구청이 우리 집에 공사한다고 난 용납 못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폭이 자기밖에 모르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사적영역이라고 합니다. 사적영역.

 

그럼 사적영역 바깥은 뭡니까? 공적영역이죠. 반대말이. 공적영역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 모르는 거예요. 공적영역에 대해서. 길에서 담배피우지 마세요. 왜? 내가 피우고 싶은데. 이게 뭐냐 하면은 집에서 담배 못 피우게 하니까 밖에 나가서 피운다고 할 때에, 피우지 마세요! 피우려면 한쪽 구석에 가서 피우고 담배꽁초는 주머니에 넣고 다른 사람이 길에 다닐 때는 담배연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안 나오게 해야 되고 버스 탈 때는 담배 피면 온 몸에 냄새가 배어서 다른 사람에게 냄새가 난다. 이런 것 공적사회를 담배피우는 인간이 압니까? 모르죠. 그걸 알면 담배를 피우겠어요? 안 피우죠.

 

내가 내 편하게 하는 행동이 무작위한 다른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줄 거냐를 자기가 살아온 자기 현실에서는 그게 없는 거예요. 그 따짐이 없는, 이성적인 판단이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결혼을 할 때, 중매할 때 너희 집안이 배운 집안이냐를 보는 이유가 뭣 때문입니까? 사적영역이 어설프기 짝이 없으면 시집이라는 공적사회에서 제대로 막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옛날 어른들이 그걸 따지는 거예요. 너희 아버지 교장이면 잘 배웠겠네. 요새 뭐 교장도 뭘 해서 교장이 된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교장선생님 이런 집안은 엄격해서 가정교육을 잘 받았고, 그러면 그 정보회사에서 점수가 막 올라가요. 아주 80점 막 올라간다고요.

 

왜 그런 관행들이 있느냐 하면은, 이걸 보는 거예요. 니가 아무것도 안 배웠는데 니가 철이 날 일은 없다. 어릴 때부터 이단이든 삼단이든 교회 다닌 애들 보면 좀 이렇게 주춤하는 게 있어요. 조심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교회 안 다니고 막 되먹은 애들은 주춤하는 게 없어요. 왜 하나님이 없으니까.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니가 와? 신이 어디에 있나? 신이 어디에 있어? 이런 식으로. 신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내가 신이라는 것을 노골화시키는 거예요. 자제할 줄 모르고 노골화시킨다 이 말이죠. 어릴 때 엄마 따라서 교회 다닌 애들, 그 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가지만, 크리스마스 때 빵이라도 얻어먹으러간 애들은, 군에 연무대가서 실로암 노래 부르면서 눈물 좀 흘리고 군에 제대하면 교회 잘 다니겠다고 하죠. 제대하면 마찬가지지만.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 그리고 사울과 이스라엘이 있죠. 이 사람들이나 이 사람들이나 뭘 이루느냐 하면은 연대를 이루죠. 연대라는 말 알죠. 여러 사람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 연대를 이룬다. 혼자서 할 때는 이게 옳은가 그른가 자신감이 없는데,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같은 질의 친구를 만나니까, 아,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블레셋 앞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골리앗이 등장하죠. 그럼 골리앗 뒤에 누가 있습니까? 여러 사람이 있었던 거예요.

 

골리앗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야! 이번 전쟁 간단히 끝내자. 대표자 뽑아가지고, 나 한 사람 나설게. 니도 한사람 나서가지고 우리 이긴 쪽이 다 먹기로 하자.” 이걸 사자성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승자독식이에요. 이긴 사람이 다 먹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국회의원 선거 아닙니까? 2등이 뭐 필요해요? 1등만 국회의원이지 2등은 국회의원이 아니거든요. 승자독식이에요. 승자가 다 먹는 거예요. 좀 나눠주는 게 없어요. 화투판에서는 나눠주는 게 좀 있는지 모르겠지만. 화투판보다 더 하죠. 현실은. 다 먹죠.

 

자, 대학교 때 친구 둘이 있었다. 서로 친합니다. 그런데 대학 4년 졸업반이 되어서 취직자리가 한 개 남았어요. 한 개 남았다. 교수님은 나에게 취직하라고 하지 않고 내 친구한테 알려주라고 했다. 니 말고 니 친구가 딱 적임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을 먼저 접한 내가, 친구한테 알리지 않고 그 회사를 먼저 안 내가 알아서 합격했다면 이거 뭡니까? 배신이죠. 배신이다 이 말이죠.

 

여러분 오늘 강의를 잘 들으셨을 줄 알고 계속 진도를 팍팍 나갑니다. 자, 군에 갔다 온 시기가 28세라고 합시다. 28세 대학교 같은 과에 있는 둘이라고 합시다. 28세까지 둘이 친구였을 때 현실은 뭐냐 하면은 배신 없는 현실을 맞이했죠. 28살 때까지. 대학교 4학년 졸업할 때까지 배신 없는 현실을 맞이했습니다. 근데 군에 갔다 와서 졸업할 때가 되가지고 취직자리가 달랑 한 개 남았어요. 둘인데 한 사람만 뽑아요. 둘을 뽑는 것이 아니고. 하는데, 친구한테 해야 될 그 자리를 자기가 인터셉트, 가로채서, 교수추천만 되는 곳인데, 교수추천이 되는 곳에 한 애가 자기 친구는 싫다고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들어갔다면, 이 두 친구가 새로운 현실을 맞이했다면 그 현실은 뭐가 추가된 현실입니까?

 

살기 위해서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이 추가된 새로운 현실의 폭을 넓힌 겁니다. 가면 갈수록요, 선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순진에서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순수함에서. 이런 경우를 여러분들이 친구한테 당할 수도 있고. 당한 얼굴들이 아닌 것 같은데. 그걸 입 다물고 적극적으로 거짓말 한 게 아니고, 입 다문 그 자체가 배신이 되고 거짓말 하면서 평생을 자식 잘 키우고 교육 잘 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가 승자기 때문에.

 

이런 순수함 진리가 문제가 아니고 살아남는 것, 그것도 내 몸 하나 편하고 잘 먹고 살아남는 자가 이 땅에서, 이 골리앗이 세상에서는 뭐다? 이게 승자로, 누가? 연대적으로, 남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남들이 다 그렇게. 여러분 오늘 성경 잘못 보신 겁니다. 안 봐야 되는데 괜히 봤어. 이거 안 보면 착한 사람이 되는데 완전히 이거 하고 난 뒤에 하나님 원수가 되었어요. 어떤 인간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 연대니까. 연대. 연대라고 하는 것은 내가 거기서 빠져버리면 나는 왕따 당해요. 그러면 나한테 일거리 맡길 사람도 없고 나한테 취직시킬 사람도 없어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야 그 사람들이 나를 취직시켜주고 월급 줘서 내 가정을 먹여살려주는 거예요. 세상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 범위라니까요. 그 범위. 일곱 살 때, 네 살 때는 그걸 몰랐죠. 엄마 말씀 잘 들으면 되는 줄로 알았죠. 그러나 이미 열네 살, 열다섯 살이 되면 엄마 말 안 듣습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컴퓨터를 못하니까. 이제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현실에서 엄마가 무용지물이에요. 똑똑한 친구가 유용해요. 그러면 엄마를 버리고 컴퓨터를 하죠. 컴퓨터 기술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친구를 하죠. 그럼 그 친구가 갖고 있던 그 사고방식도 같이 수입을 해가지고 엄마의 인생관을 버리게 되어 있어요.

 

솔로몬이 여자가 많잖아요. 솔로몬이 여자가 천명 가까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들이 올 때 그냥 몸만 왔습니까? 종교와 사상도 같이 왔습니까? 같이 왔죠. 그래서 솔로몬이 그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상 제단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솔로몬이 아는 현실의 전부에요. 솔로몬이 아는 현실의 전부. 솔로몬은 그런 식으로 복 받는 이스라엘을 복 되게 지키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자리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교회를 집어넣어봅시다. 그럼 당회장 목사가 교회 개척교회 했습니다. 자기는 이 교회가 그야말로 하나님의 순결한 신부처럼 순수하기를 원했죠.

 

그런데 여기에 뭐가 옵니까? 여기에 교인들이 어떻게 와요? 교인들의 욕망, 욕심, 기도제목, 그거 신경 안 쓸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그거 들어줍니다. 성경말씀 다 바꿔가지고 그들의 무당 짓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때에, 이 이스라엘은 무슨 이스라엘이에요? 이거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죠. 교회가 아니죠. 절이죠. 절. 그거 왜 그렇게 했느냐? 목사한테는 이 교회가 자기 현실의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가 있으면 나는 밥 먹고 살고 교회가 없으면 나는 밥 못 먹고 죽기 때문에 그래요. 생존이에요. 생존.

 

그런데 자기가 개척교회를 했는데 다른 교회 개척교회가 인테리어를 잘했다. 에어컨 팡팡 나오고 그런다. 그럼 돈 들여 가지고 또 기도해가지고 인테리어 또 바꿔요. 이거는 둘 다 가게에요. 가게. 업소에요. 업소. 이쪽은 장로교합동 측인데 이쪽은 통합 측이다. 그럼 내 교회는 뭘 주장합니까? 내 교회는 프랜차이즈를 주장해요. 프랜차이즈를. “우리교회는 장로교합동측입니다. 저 교회는 wcc(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해가지고 자유신학이니 가지마세요. 혹시 이사 오거든 정통합동 측인 우리교회로 오세요.” 앞에다가 간판 걸어요. 합동측 간판은 동그라미로 되어 있고 통합측은 두루마리처럼 되어 있거든요. 이걸 왜 합니까? 교단적으로. 프랜차이즈에요. 프랜차이즈.

 

이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내가 아는 현실에서 내가 행복하고 복 받은 증거를 찾기 위해서 교회를 온 겁니다. 나는 이 정도보다 더 잘 살아야 합당한 존재인 것을 목사님 쪽에서 좀 이렇게 긍정적으로 증명해달라는 거예요. 이 모든 문제는 인간의 한계가 있다. 인간의 현실적인,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복을 알아도 그 현실을 뒤집을만한 현실은 없어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십자가를 안다. 알지요. 우리가 알아요. 모르는 게 아니에요. 로마서 아까 읽어봤잖아요. 알잖아요.

 

근데 내 몸은 배고픈데 어떻게 하라고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무상관이. 내가 어금니가 아픈데 어떻게 할 거예요? 어금니가 아픈데. 그 어금니 내가 아프게 했습니까? 누가 아프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프게 했잖아요. 하나님이. 결국 하나님이 아프게 했다는 말은 내가 내 능력으로, 내 실력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 없다? 못 지킨다는 단절성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성령 받은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역할은 누가 합니까? 오늘 본문 사무엘상 17장에서 누가 합니까? 누가 하겠어요? 이 전쟁에서 누가합니까? 하나님의 전쟁을 누가합니까? 누가 내세워서 합니까? 다윗이죠. 다윗은 뭐냐 왕, 선지자입니다. 왕+선지자입니다. 왕이요 선지자에요. 왜냐하면 다윗은 이 전쟁 이전에 먼저 기름 부었죠. 사울을 대신했죠. 근데 사무엘이 입 다물라고 했죠. 왜? 죽으니까.

 

사람들의 현실에 맞춰서 그들이 원하는 현실은 이미 있어요. 사울 왕한테는 한통속으로 말이 왜 그렇게 잘 통하는지 잘 통해요. 사울 왕이 추구하는 것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키우자! 백성들은 오케이하고 나선 거예요. 여기서 소년다윗은 뭐 있습니까? 기름만 부었을 뿐이지. 아직 어린애인데요. 지가 김정은이가? 어린애인데요. 백성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천천이고 만만은 사무엘상 17장 지나봐야 아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소년다윗 자기도 난감해요. 자기는 뭐 별개입니까? 자기는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요. 하나님의 성신이 가만두지를 않는다니까요.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근데 성령이, 주님이 가만두지를 않는다니까요. 넓은 길로 못 가게 만들어요. 가면 지옥이니까.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입사 지원하는 것이 아니고 스카우트하는 거죠. 원서 내는 것이 아니에요. 아, 좋은 나라니까 들어갑니다. 자기가 원서 내는 것이 아니고 스카우트하는 거예요. 스카우트. 스카우트 당할 때 선물로 오는데, 선물로 왔을 때에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자신이 갑자기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선물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쓸모 있다? 쓸모없다? 아무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꼬라지 세상만 좋아서 그거 어디 쓸모 있어요? 우리는 하늘나라에는 쓸모없어요. 그걸 폭로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신 거예요.

 

그리고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못 찾아가요. 우리야 가만히 있는 입장이 못 되거든요. 부지런히 설치는데 그 설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넓은 길, 세상과 연대가 하는 것. “나 여기 쓸모 있어요. 나 필요하죠. 나 채용해주세요. 나는 돈 필요하고 당신은 나 필요하니까 잘 됐네.”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내 생존. 나는 존재할만한 가치가 넉넉히 있음. 그것을 남한테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 실력을 자랑하죠. 십자가를 자랑해가지고 어디 취직한다고요? 십자가 자랑해서는 교회도 취직이 안 되는데. 교회도 십자가 자랑하면 취직됩니까? 안 되죠. 큰일 나죠. 사람 끌어 모으는 재주를 자랑해야지 십자가 자랑한다고 되지를 않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색은 가면 갈수록 내가 알고 있던 이 현실판, 내 중심의, 중심은 항상 내 중심이죠. 내가 잘되기 위한 이 현실판은 이거는 엎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아니라도 원수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겁니다. 남들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하고, 이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대치되는,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반대편에 있는 겁니다. 그냥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매일 전쟁 중입니다. 주님하고 매일 전쟁 중이에요.

 

우리 강집사님 그림 하나 딱 그려놓고. 잘 그려놨잖아요. 카메라 한번 비춰봐야 하는데. 이 정도로 잘 그렸잖아요. 이거 아마추어 솜씨가 아니잖아요. 그림 그린 사람은 뜻이 뭐냐 하면은 내 생각한대로 그대로 반영이 될 때 제일 기쁘죠. 내 생각한대로. 그래 아주 기쁘죠. 십자가 기쁨입니까? 내 생각대로 작품이 나왔을 때, 아, 내가 내 현실 속에서는 나는 그림을 못 그렸다고 여겼던 그것이 몇 달 전이었는데 그림 작품이 딱 나온 뒤에는 뭐가 추가 되었느냐 하면은, 얼추 그리네! 내 자신이 생각하기를 얼추 그리네! 이래하다가 나 화가로 나갈까? 저 정도 같으면 화가 솜씨 같은데. 예? 동생이 화가라고요. 아, 그럼 강집사님 동생이 그린거구나! 끝날 때 카메라 한번 좀 비춰주세요. 이렇게 말만 하면 듣는 사람들이 감질 난다고요. 얼마나 잘 그렸길래 그러는지.. 제가 대신 자랑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 자랑 대신.

 

우리는 전쟁을 안 하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이 시비를 걸어서 전쟁을 하게 하십니다. 그 전쟁을. 어떤 차원이냐 하면은 왕과 선지자거든요. “왕+선지자” 자,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일평생 살면서 내 몸 위주의 현실판이 있어요. 그런데 왕과 선지자는 그 배후에 왕과 선지자가 되게 하신 성신의 세계에 있는 현실이 따로 있습니다. 그 현실과 이 현실의 대치관계, 대치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면 흔히 우리가 이해하듯이, 교회 와서, 나는 이 세상 버리고 천국가고 싶어요. 진심이십니까? 예. 진심입니다. 그런데 이 몸은 어디에 익숙해졌는가 하면은, 친근한가 하면은 내 몸 위주의 이 현실에 친근하거든요. 여기에 친근한 몸이기 때문에, 주님의 몸에 들어가려면, 내 쪽의 몸이 아니고 왕과 선지자 쪽의 몸이 되려면 내 몸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은 어떻게 되겠어요? 완전히 교체해야 되겠죠. 바꿔져야 되겠죠. 그 말은 뭐냐, 내 몸의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느냐 하면은 실망해야 됩니다. 오늘 첫 번째 제목은 실망이에요.

이 모든 것의 실망인데, 실망을 언제 하느냐, 주께서 인도하시면 매일 실망하는데, 누구한테 실망해요? 처음에는 현실한테 실망해요. 세상이 나를 안 알아준다고.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고하고 나중에는 뭐냐 하면은 나한테 실망해요. 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라는 것을 십자가와 복음 앞에서 다시 한 번 그걸 깨닫는 거예요. 나한테 실망하면서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 첫째는 현실에 실망하면서 짜증나고 두 번째 나한테 실망하면서 낙담되고 세 번째 이게 바로 기쁨이 돼요.

 

내가 어떤 인격이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에 이미 놓여져 있는가를. 이미 이쪽 자리(왕+선지자)에 놓여있는, 자리는 이미 나도 모르게, 잠자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도 모르게 이미 성령이 와버렸어요. 왔기 때문에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자리는 이쪽 주님의 자리인데, 몸은 완전히 기존세계에요. 그러니까 인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아, 나는 하는 것마다 짜증나요. 내 뜻대로 안 되는지 짜증내다가, 성령이 와서 깨달음을 줘서 보니까, 아, 내가 큰일 날 뻔했구나!

 

내가 저쪽으로 가면 지옥이죠. 이쪽으로 가면 천국이고. 가만있었으면 천국으로, 컨테이너에 실려서 그냥 천국으로 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갑자기 나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이 불쌍해지고 측은해지고 가련한 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는 신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으니까. 이게 내가 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주께서 그냥 일방적으로 주신 거예요. 창세 전에 예정된 자에게 그냥 주신 거예요.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따로 있어요. 그것 때문에 사도행전이 있거든요. 영생 주는 것이 스카우트라고 했으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 중에 포함이 되었기에, 비로소 내가 평생 공들인 이 현실이 나를 망하게 한 현실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게 누구의 사고방식이냐 하면은 바로 다윗의 사고방식입니다. 이게 다윗의 사고방식이에요. 다윗이 늘 그런 생각을 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자, 그럼 좀 더 진도를 나가봅시다. 제가 아까 이쪽의 세상을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연대라고 했죠. 연대. 혼자가 아니고 연대. 서로 의견이 하나가 됐죠. 근데 다윗은 몇 명이죠? 놀랍게도 가시적으로 달랑 한명이죠. 한명. 1名. 누가 말렸는가 하면은 이쪽 사울 쪽에서 말렸어요. “야야, 그냥 가지 말고 갑옷입어라. 창 들어라. 투구 써라.” 가다가 무거워서 벗어놨다는 거예요. 무거워서.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지. 제목을 바꿀까? 무거움으로.

 

우리는 이 현실이 무거워요. 강집사님 화가처럼 그림 발전하려면 레슨 받아야 합니다. 일하시는 것 한 15만원 나가야, 레슨 받아야 저 작품이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발전이 되려면 뭐가 돼요? 발전이 나에게 중력이 되고 나의 짐이 된다니까요.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욕망이 나에게 스트레스같이 다가온다고요. 애들 키워보세요. 지금 애 키우고 있잖아요? 무슨 생각이 납니까? “천재처럼 잘 키웠다. 아주 훌륭하게 키웠다.” 애를 키웠는데 이렇게 가족들로부터, 주위로부터 좀 듣고 싶어요. 아이고, “애 키웠는데 아주 엉망이네.‘ 이것보다 낫잖아요. 끝도 없어요. 끝도. 내 현실을 넓히는데 끝도 없어요. 좀 더 유명해지고 가치 있고 쓸모 있다고 그렇게 평가를 받고 싶어요.

 

이게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다윗은 갑옷이고 뭐고 세상이 주는 것 다 갖다버렸어요. 필요 없다고요. 왜 필요 없는가 하면은 이 전쟁은요, 나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걸 우리한테 하면 내 인생, 여기 이사 온 것, 내 뜻 아닙니다. 우리 애 방위로 빠진 거 내 뜻 아닙니다. 우리 애 영창 간 거 내 뜻 아닙니다. 다 누구의 뜻입니까? 주님의 선하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그럼 니 거는? 니 것은 없잖아? 없어서 감사하죠. 내 것이 없어서 감사해요. 그냥 소유가 아니고 그냥 누리는 거죠. 그냥 누리는 거예요. 이 아파트 그냥 누리는 거예요. 그냥 감사하면서 뭘 하든지 마음껏 누리는 거예요. 즐기는 거죠. 욕심내봤자, 욕심낸 만큼 우리는 이 땅에서 그만큼 내주는 게 있어야 돼요. 그냥 공짜가 없거든요. 욕심낸 만큼 그만큼 힘든 희생을 또 감수해야 돼요.

 

따라서 이 다윗을 요약해보면 다윗은 뭐였다? 왕+선지자죠. 이거 이야기는 다음 강의 때 하겠습니다. 왕, 선지자라는 내용은 무슨 내용이냐 하면은 이것은 항상 단독자라는 것을 아시고 여러분들이 너무 외로워마세요. 다윗도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외로웠기 때문에 연대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했어요? 아주 개무시를 한 거죠. “아이고, 뭐 혼자 믿음이 좋기는..” 그들은 연대를 이루고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은 지옥 가는 길이잖아요. 성도는 이렇게 외로워요. 하지만 주어진 현실이, 이 자리는 내가 전에 알던 자리가 아니고 낯선 자리에요. 그 자리에서 날마다 새로운 기쁨이 나오시길 바랍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