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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9강 / 사무엘상 16:14( 성신과 악신) / 190528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무엘상

49강 / 사무엘상 16:14( 성신과 악신) / 190528

정인순 2019. 5. 29. 08:18

 

 

음성1             

 

동영상1          

녹취:이미아

대전-49강 사무엘상16장13-14절(성신과 악신)

20190528-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6장 13-14절

13절,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여기에 사람 말고 두 개의 이질적인 존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성신이고 또 하나는 악신이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보통 자기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자연인으로 봐요. 인간들은 보통. 내가 태어났을 때 순수했고 지금까지 대체로 순수하려고 애를 썼고, 그리고 태어날 때 그 인간이 그대로 유지하게 되니까, 아마 죽을 때도 내가 유지한 순수의 양만큼, 분량만큼 하나님께서 어떻게 고려해주시겠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우리 자신의 자연성과 출생했던 인간의 순수함을 애써서 지키려고 수고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자연인, 순수한 나에게, 내가 그대로 순수하게 유지하면 된다는 것.

 

근데 오늘 본문에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것. 선지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락책이라고 보면 됩니다. 연락책. 이 연락책에 의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이 어떤 현상을 벌어지게 하는데, 자연인으로서는 도저히 예상 못했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다윗이고 하나는 사울 왕, 사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악신, 성신이 없으면 그냥 둘 다 자연인이에요. 그냥 인간이에요.

 

근데 사울 왕에게는 악신이 임하고 다윗에게는 성신이 임했다는 것은, 마지막에 하나님께 심판받을 때 자연인가지고 버틸 수 없다는 겁니다. 소속이 어디냐? 라고 묻는 거죠. 너 성령을 받았냐? 아니면 악신, 악마의 영이죠. 악마의 영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냐? 그거만 물어요.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할 때 앞에 있는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에요. 사람이 아니므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람이 아니에요.

 

근데 성경 말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성경 말고 어디에 나가도 전부 다 사람은 자기를 그냥 인간으로 봐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비춰보면서 살아온 겁니다. 인간이면서 자기 내면에 인간다움이 그대로 살아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 살아있음이 아마 세상 사람들에게 통하듯이 분명히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게도 그렇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정신적으로 은밀하게 대결하고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누가 순수성을 더 많이 품고 있느냐, 그걸 은근히 대결하죠. 목사들도 설교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까 그 순수함을 계속 키워내게 되면 여러분들에게 나중에 장점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구원 얻는데, 천당 가는데 아마 유리할 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성신과 악신이 외부에서 주입된다는 사실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받은 이것을 잘 관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이라는 것이 참조사항이 된다고 그렇게들 생각해요. 성경대로 바르게 살면 내 관리에 유리하게 참고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날마다 자기의 인품이 어느 정도 향상됐는가, 그것 측정하고, 자기가 어느 수준쯤 되고, 어느 쯤에 포함되었는가를 측정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비교하고 그렇죠.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은 이게 선지자가 말을 안 들을 때, 인간들끼리 모였을 때에 기껏 내놓는 아이디어에 불과한 겁니다.

 

평소에 우리가 남을 교육하고 또 우리가 남에게 교육받을 때 어떤 차원에서 교육하고 교육받았습니까? 이런 차원이거든요. 니 안에 신의 품성이 있는데 니가 나쁜 짓하면 감소하고 니가 착한일하면 증가한다. 착한 일이 많이 증가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복을 줄 거고 니 속에 있는 악한 기운을 계속 키워내면 너는 어디가도 저주받는다. 그런 식으로 가르쳐왔던 겁니다. 근데 성경에서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선 과 악이라는 대비되는 그런 인식에 인간이 휘감겨있다는 겁니다. 선과 악에 휘감겨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내가 선한 쪽일까? 악한 쪽일까? 라는, 현재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인식을 가지고 날마다 측정에 나서는 겁니다. 측정에 나서서 잠시 그렇게 모아진 것을,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양심인데, 누구의 양심이냐 하면은 나의 양심. 나만의 양심에 비추어봤을 때 그다지 악하지 않다, 라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각자 자기의 양심에 호소해 사세요.”라고 하는데, 과연 이 양심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이 될까요? 부합되지 않죠. 이 양심은 사회 평균적입니다. 양심이라는 게. 나이지리아 양심하고 대한민국 양심하고 달라요. 북한하고 다르고.

 

양심이라는 것은 항상 조작기능을 발휘하고 있어요.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성립하려고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항상 인간은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고 끄집어내는 거예요. 학교에서 애한테 뭐라고 하면 그 애는 알리바이를 내놓죠. “어제 손님이 와서 숙제를 못했습니다.” 그 애가 나중에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는데, 그 어린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일체 자기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 자예요. 일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어떻다고 단정 짓지 않아요. 어린아이는.

 

어린아이가 돈 벌려고 애쓰는 것은 이미 어린아이의 선을 넘어선 겁니다. 어린아이가 돈이 어디서 오게 되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출세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냥 주는 대로 까불면 돼요. 주는 대로 그냥 살면 돼요. 그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는 상태를 이미 우리는 거쳤습니다. 어린아이시절 때 이미 거쳐 왔어요. 어린아이의 선을 얼추 능가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먹는 것 입는 것부터 걱정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어른이 못돼서 환장하는데, 아저씨, 아주머니 너희들이나 다 하라고 하세요. 우리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되면 안 됩니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에요.

 

선과 악을 알면, 이게 점점 자기가 똑똑해진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 똑똑한 게 문제에요. 똑똑하면 안 돼요. 자신의 평가를 자신이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해서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하는 거예요. 니 인생 니 혼자 살게 되면 니가 선악과를 먹든 뭘 먹든 관계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인간에 대한 모든 운명과 결정과 평가는, 이건 하나님 쪽에서 결정할 문제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이 있는 것이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반대되면 안 됩니다.

 

다윗에게 성신이 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윗이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선악으로 평가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니 소속은 결정됐다는 것입니다. 소속문제에요. 애들에게 너 얼마나 착하냐를 묻는 게 아닙니다. 너의 아버지 뭐하시노? 이런 것 있죠. 너는 누구집 소속이냐를 묻는 겁니다. “아저씨 집에 보내주세요.” 집이 있는 거예요. 애들은 집으로 가면 그만이에요. 그 집이 자기의 세계입니다. 독자적으로 자기 의로움과 잘남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꼭 자기변명과 자기방어에 나서는 이유가, 어른들이 뭘 봤느냐 하면은 바깥세상을 봤기 때문이에요. 바깥세상을 봐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평생을 다 보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천국가지 못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 눈치 볼 것 같으면 니가 알아서 니 혼자 살지, 왜 주님만 의지해야 할 나라에 니가 왜 끼어들었느냐 이 말이죠. 천국은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만 가지, 어른심정으로, 이제는 좀 호사나 누려볼까? 이런 식으로 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닙니다. 참, 어른이 천국 못 간다는 것은, 그 어른은 죽어야 돼요. 죽여 버려야 돼요.

 

여기서 사울은 악신이 들렸다고 하는데, 인간 자체가 악신이 들렸다고 할 때에, 악신이, 그러니까 성신 받을 욕심만 부리지 말고, 악신 받은 자는 어떻게 사느냐를 주목하라고 사울에게 특별히 악신이 심하게 발작을 일으키게 했어요. 그러니까 평소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평소에 악신, 성신을 거론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 아주 정상적인 보통 사람, 자연인으로 보는 거예요. 자연인이라는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착하게, 선악을 아니까, 악을 버리고 선하게 살겠다는 그것이 자연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니 품성이니 뭐 그런 식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을 때 사울은 특별히 변할 게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자연인이라고 행세하고 바르게 살겠다고 하는 이것이 곧 누구를 위함이냐 하면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사는 건데, 이게 약간 강화된, 악신이 임하니까 그 노선, 그러한 성질, 성깔이 노골화된 게 악신이 들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마 편향적이에요. 악마와 친근한, 악마와 한통속이 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므로 말미암아 소위 자연인이라고 행세하는 사람의 대변자로 등장이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자연인 같으면 서로가 싸울 이유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어요. 뻔하니까.

 

북한이 미국을 겁내는 이유는 미국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핵폭탄을 가지면 겁내는 나라가 된다. 그래서 북한이 취할 태도는 북한이라는 나라를 남이 넘보지 않고 우리가 행세하려면 우리도 뭘 가지면 된다? 핵을 가지면 된다. 이 사고방식에 별로 뭐 이질적인 것이 있어요? 사고방식이 안 다르죠. 힘을 증강하게 되면 강대한 국가가 된다. 이건 너나 나나 동의 안 할 나라가 없어요. 중국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어린아이같이 돼서 천국 간다. 이거는 뭘 빼는 겁니까? 힘을 빼는 거잖아요. 시편에 보세요. 내가 너희를 구함은 창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애굽의 군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너희의 숫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 된다. 이게 오늘날 정치에 먹혀들어가겠어요? 이질적이잖아요. 그래서 사울에게 악신이 임한 것은 뭐냐 하면은 사울이 정상이고 다윗에게 성신이 임한 이게 굉장히 이질적인 것이다 이 말이죠. 이게. 이게 의당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거는 아주 희한한 현상이에요. 이게. 자연인은 자연인으로 살면 이게 정상으로 여겼던 그들의 집단에서 성신이 임했다는 것은 성신이 임한 사람 빼놓고 나머지기 전부 다 뭐다? 악마와 한통속이고 편향적이고 악마의 힘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악마의 힘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은 뭐 간질이 걸리고 그런 것이 아니고 선악인식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선악인식, 자기 알리바이를 내세우는 그런 버릇에서 못 벗어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악신 들린 자는 어떤 식으로 사는가? 그거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방어죠. 자기방어. 자기방어 하는 식으로 살아요. 그러면 자기방어가 끝난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자기방어를 못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죽는 경우죠. 죽는 경우. 두 팔로 감싸면 자기방어가 되잖아요. 근데 제가 죽었다고 칩시다. 두 팔이 축 늘어지잖아요. 누가 꼬집든 방어가 안 되죠.

 

다윗은 성신이 오고 난 뒤에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방어를 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자기 일 같으면, 평소의 자연인 버릇대로 나의 가치를 준수하고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모션취해서 치려고, 공격하려고 드는데, 이 자기에게 들이닥친 일은 성신과 엮여져서 다가오는 사태가 주어지는 겁니다. 성신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을 앞장세우면서 우르르, 성신이 계시는 그 세계, 월드world 있잖아요. 성신을 보냈던 그 세계, 그 세계가 한꺼번에 다윗에게 덮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되는 세계가 있겠죠. 그리고 기존의 사울세계가 있겠죠.

 

두 세계의 충돌이 일어나는데, 이 충돌은 다윗의 전쟁이 아니고 이것은 무슨 전쟁이냐, 이 전쟁은 다윗언약의 전쟁 또는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는 겁니다. 상당히 성경은 우리가 예상한대로 되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면 천당 가지.” 이것은 여전히 선악이라는 악신, 악마가 유혹을 해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어서, 거기서 못 빠져나오는 그러한 몸부림이라는 발산이죠. 그거는. 바르게 살아서 천당 가겠다는 말은 나 악마요, 라는 말이에요. 결국 그 말이.

 

“주여, 착하게 살 테니까 복 주시옵소서. 착하게 살 테니까 우리 애 시험 치는데 성적 오르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아엠 데블I'm devil, 나는 악마의 종이라는 뜻이에요. 이게. “선교 많이 할 테니까 교회 부흥시켜주옵소서.” 이게 바로 악마라니까요. 이게 악마에요. “현지인에게 착한일 많이 해가지고 선교 활성화되게 하옵소서.” 이게 악마의 짓이라니까요. 나의 일이 없어져야 돼요. 죽은 놈이 무슨 자기 일이 있어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고 전부 다 누구 일이다?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에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를 꽁꽁 묶은, 밧줄로 수갑 채운 거예요. 수갑 채우고, 주님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간에게 주께서, 쓸모 있는 주께서 쓸모없는 것을 통해서 다 이루어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의가 아니고, 바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의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주님의 세계, 주님의 세계가 천국입니다. 그동안 너무 나댔어요. 나댄 거예요.

 

왜 나댔냐 하면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 누구한테 배웠느냐 하면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뒤따라가고 그들과 한패 먹기 위해서 애를 쓴 거예요. “너희들 그 영역에 나 넣어줘!” “너 넣어주려면 이런 짓을 해야 돼.” “어. 할게. 해서 우리 같이 어울려서 한판 놀자. 그쟈? 사이좋게. 행복하게.” 그들을 못 닮아서 환장한 겁니다. 그들의 삶에서 추방될까봐, 그들이 나를 배제할까봐, 조마조마 겁을 집어먹고 평생을 살아온 겁니다. 성경 봐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봐야 뭐. 봐도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저 악신 받은 사람은 자기방어, 자기만 챙기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때부터 뭐냐 하면은 다윗이 자기를 위협하는 위협요인으로 알아요. 악신을 받았던 사울은 악신 받은 티를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악신을 받았다는 것은 똑같이 사울과처럼 악신의 세계가, 하나님께 대적하고 대항하는 세계가 따로 이렇게 모호했는데 이게 구체화됩니다. 그게 무슨 나라냐 하면은 사울의 나라에요. 사울의 나라는 무슨 나라냐 하면은 성신 받은 자를 내치는 속성이 발휘되는 나라,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이 나라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진리로 확정지은 나라가 바로 사울의 나라, 악마의 나라, 악신의 나라에요.

 

악신의 나라에서는 자기 자신을 악신 들렸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자연인이에요. “다 같이 우리 인간이지. 뭐 동창회하자.” 이러고 모이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보이스피싱을 한 그 범인이 하는 말이 이런 말이에요. “보이스피싱이 뭐지?” 이래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보이스피싱 당사자이기 때문에 보이스피싱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이 좀 안 떠올리면 좋겠다. 왜? 떠올려버리면 자기가 노출이 되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악마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보이스피싱이 뭐예요?” 하는 것처럼, “악마가 뭐예요?” “지옥이 뭐예요?” 그런 것을 이야기 안 해요. 집구성이 엉망이 되면 지옥인줄 알고 그렇지. 보편적인 지옥이라든지 악마이야기를 안 합니다. 왜? 이미 악마의 나라기 때문에. 쉿! 거기에 대해서는, 악마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어요.

 

선지자가 왜 있느냐? 바로 인간들이 단단히 철통같이 봉쇄가 되어 있는 세계에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선지자를 여기 침투해버리면 낯선 이야기, 들었던 이야기가 아니고 낯선 이야기. 낯선 이야기를 해요. 교회에 처음 목사가 와가지고 자기가 정통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고 복음을 이야기해요. 이거 한 2주 갑니다. 3주째 되면 “착하게 살면 복 받습니다, 라고 나와요. 여러분 기도에 따라서, 양에 따라서 복이 결정됩니다.” 이 이야기 외에는 없어요. 교회에 얼마나 돈 내고 헌신하고 시간 바쳤느냐, 그 이야기 외에는 없다 이 말이죠. “여러분이 잘하는 재주 있잖아. 착한 재주. 그 재주를 교회에 퍼부으면 교회도 복 받지만 여러분도 복 받게 됩니다. 우리 교회 잘 되어서 마귀를 이깁시다.” 지가 마귀면서 마귀를 이기자고. 자꾸 인간들에게 행함을 강요해서 전혀 달라진바 없는, 잠시 성령이지 그 다음부터는 끝났어. 성령 그 다음부터 끝났어요. 누가누가 잘났나? 누가누가 부러움의 인생을 사느냐? 이제 그 시합으로 나가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만 알면 그 외의 모든 것에 실패해도 상관이 없어요. 실패에 벌벌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면 그 자체가 이미 완료된 성공이기 때문에, 나머지기는 실패할 것을 두려워할 정도가 아니고 이제 실패 자체에 대해서 겁낼 필요가 없어요. 실패성공에 따라서 휘둘릴 필요가 없다니까요. 주께서 복음을 줬다는 것은, 이거는 내 능력이 아니거든요.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빠져나온 게 복음입니다. 빠져나옴이에요. 빠져나옴. 이게 복음 아닙니까? 빠져나옴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잖아요. 빠져나온 힘이 복음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빠져나온 그 힘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같이 있지만 사실은 빠져나온 사람이다 이 말이죠. 빠져나왔으니까 이 세상의 평가에 그렇게 귀 기울일 필요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의식할 필요도 없죠. 의식할 이유가 없어요.

 

도대체 사람들이 무슨 실패에 그렇게 겁을 내는지. 나도 그거 한번 체험해볼까?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야죠. 거참 재밌겠다. 부도난다는 게 뭐지? 나도 한번 부도나볼까? 6개월 만에 간판 내린다는 말이 뭐지? 자식농사 망쳤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자식농사를 망쳤다는 건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복음 알고 보니까 나는 별로 자식이 걱정이 안 되던데. 도대체 뭘 보고 뭘 평균내서 뭘 망쳤다고 하는지. 오히려 의아해해야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천국에 가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눈물이 없어요. 눈물이 없다는 말은 눈물 있는 이 세상을 우리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한 4년 전인가 tv에서 하는 영화를 봤어요. 내가 복음 알고 뭐 눈물 안 흘린다고 했는데 어느새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어요. 심은경이 나왔던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거든요. 그게 어느 노인네, 노파가 사진관에 가서 사진 잘못 찍어서 갑자기 20살 먹어가지고, 70후반의 노인네가 다시 20살로 돌아간 그 영화에요.

 

어디서 눈물이 나왔는가 하면은 심은경이라는 그 배우가 ‘하얀 나비’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하얀 나비를 부르면서 70후반까지 살면서 그 인생의 내력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2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임신이 된 상태에서, 한국에서 살 길이 없어서 독일 광부를 모집한다고 하니까 아주 착하고 순하게 생긴 남편이 배 불룩한 임신한 아내를 놔두고 자기가 광부로 갔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사망통지서를 받아요. 그때부터 이 20대 젊은 초반의 엄마가 시장바닥에서, 애는 유복자죠. 아빠 없이 난 애 하나 데리고 시래기 주워가면서 시장바닥에서 다 떨어진 솥에다가 시래기 삶이서 애 먹이고, 추어탕 집 부엌에서 울면서 일하는데, 애는 기어 다니고 우니까 발에다가 밧줄로 묶어가지고 그렇게 그 애 하나 키웠을 때에...,

 

아버지도 없지, 젊은 20초반의 여자가 애 하나 키우기 위해서, 이거는 뭐 자기 아름다움이고 청춘이고 그런 것 생각도 없이, 이거는 뭐 인생을 애 하나에다가 전념을 다 한 거예요. 그것을 70 후반이 다 된 상태에서 다시 20대로 돌아와서 20대의 노파가 하얀 나비를 부르는데, 그 하얀 나비의 가사가 뭐냐, 님은 어디에 갔느냐 이 말이죠. 남편이 죽고 난 뒤에 그 하얀 가루를 바다에 뿌리거든요. 하얀 소복을 입고 울면서 뿌려요. 뿌려놓고 그 다음부터 애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노래에 담아요. 어디로 갔나요? 내가 믿어야 할 내 하얀 나비가 어디로 갔나요? 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노래 할 때에 눈물이 났어요.

 

났는데, 참 복음이 매정하죠. 그렇게 눈물을 같이 내면, 아직도 나는 아직도 순수하고 착해 보이잖아요. 근데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세요. 과연 그게 눈물을 흘릴 일인가를 한번 따져봤습니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져볼 때, 첫째는 그 여자의 아이가 건강하다는 거예요. 건강하면 뭔들 못해요. 집안에 아픈 사람이 한번 있어보세요. 착하고 싶어도 아파서 못 착해요. 뭐 여기도 계시지만. 사람이 아프면 자기만 아픈 게 아니고 온 집안이 다 아파요. 본의 아니게 남한테 해를 입힌다니까요. 근데 젊지요, 애 건강하게 있지요, 젊으니까 건강이 있으니까 키우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말이 한국말이고 사는 곳이 한국 땅이잖아요. 이게 난민이 아니에요. 베트남아가씨가 아니라니까요. 네팔아저씨가 아니에요. 한국 어디가도 취직이 됩니다. 근데 가버나움이라는 영화 평 했죠. 거기는 난민들이에요. 나라가 전쟁이 일어나서 남의 나라에 가도 취직할 데도 없어요. 말도 안 통하고 서류가 없어서 출생신고도 못한대요. 근데 여기는 최저임금이라고 해서 생활비도 보조받아요. 옛날에는 못 받았지만, 하지만 주위에서 도와주기라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평균적인 어떤 슬픔, 선과 악, 이 정도 되어야 웃음이고 이 정도는 슬프다, 라는 그 자기가 속한 공간에서 임시적으로, 평균적으로, 통계적으로 정해진 그 기준에서 내려가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눈물이. 그만큼 자기는 우수하다는 거예요. 나는 그런 사정이 안 돼서 나는 좋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누구를 애도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애도하는 거예요.

 

니는 내가 필요로 할 때 있어야 하지, 왜 내 허락도 없이 미리 죽느냐 이 말이죠. 니 죽으니까 내가 할 일이 많잖아. 인간아! 같이 놀 사람도 없고. 아이고, 부모는 사는데 어린 내 자식이 왜 먼저 죽느냐 이 말이죠. 나는 너한테 모든 것을, 수억 들여 가지고 대학 보내고 공부 다 시켜놨는데, 내가 너 없으면 무슨 보람으로 사냐? 인간아! 왜 내 허락도 없이 미리 죽느냐고 원망조로 애도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울에 세계입니다. 악마의 세계에요. 자기중심주의에요. 선악에 계속 얽매여져 있는 겁니다. 근데 다윗이 성령 받아버리면 선악을 초월해버려요. 선악을. 울 일도 웃을 일도 본인이 결정할 수가 없어요. 왜냐, 이거는 어떤 수준에 이르면 웃어야 되고 울어야 되는지, 그 수준 자체가 넘어서는 수준에 입각해서 그거는 낯선 존재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돼요.

 

쉬는 시간에 유튜브 들어가서 하얀 나비 찾아서 들어보세요. 지금 봐도 눈물이 나요. 심은경이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음~~ 생각을 말아요~~♬ 하는데, 너무 잘해요. 자, 이 성신이 어떤 계통에서 오는가, 성신이 어떤 내용이 있어요. 아까 악신은 이야기했어요. 악신은 선악체제에 의해서 자기방어, 자기절대성, 이게 어딜 감히 내 세계를 넘봐! 강력한 저지죠. 내 세계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치는 거예요. 나한테 복종하려면 들어오고 안 그러면 말라. 내 믿음은 내가 가장 중요하니까. 내가 최고로 가치 있는 거니까.

 

그러면 성신의 내막은 어디서 오는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옵니다. 언약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바치는 심정.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심정. 자, 성신이 왔다는 말은 성신 배후에 뭐가 오느냐 하면은 언약의 세계를 성취하기 위해서 성신을 꽂아주는 거예요. 이제 다윗에게. 다윗은 그냥 자연인으로 자기는 자기 편한 대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사울에게 욕 얻어먹는 것도, 사실은 사울에게 욕 얻어먹을 짓을 안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왕위를 넘보면 이거는 정권 다툼하다가 쿠데타 실패해서 쫓긴다고 이게 되겠는데, 다윗은 그런 것도 없어요. 시편 22편에 나오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왜 하나님께서 괜히 내 인생 관여해가지고 계속해서, 모든 주변사람들이 뭐냐 하면은 원수가 되어 있어요. 원수. 다윗의 원수가 이게 내용이 뭐냐 하면은 시편의 내용이에요.

 

이 시편의 내용은 결국은 신약에 와서 누구의 원수가 돼요? 다윗 자리에 누가 뛰어듭니까? 예수님이 다윗 자리에 뛰어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윗을 다윗 되게 하는 것은 다윗언약이고 다윗언약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틀은 다윗이 만들고 그 틀에 예수님이 완성을 채우시기 위해서 들어가시는 거예요.

 

이게 다윗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의 이야기에요. 우리는, 성령 받은 성도는 내 인생이 낯설어야 돼요. 뭐 별 욕심도 없는데 이상하게 꼬여요. 인생이. 참외 먹고 싶은데 수박이 나온다든지. 차타고 빨리 가야 되는데 갑자기 가자마자 떠난다든지. 매사가 희한하게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세요. 내 뜻대로.

 

그것은 뭐냐 하면 언약 자체가 무엇이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 다음에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니까 내 뜻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뜻과 교체하는 방식으로 투입된다. 이 인간아!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거기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뜻만 이야기하니까. 적용시키니까.

 

사실은 성령이 오지 않으면요, 자기 인생사는 것만 돌아보면서 자기의 수고한 것과 자기의 업적과 자기의 애씀의 결과에 대해서 날마다 자화자찬에 빠져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자식 잘 키우고 잘 살았구나, 하고 모든 영광을 누가 가져갑니까? 내가 가져가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간음하고 살인하고 나쁜 짓하는 것이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나 잘났다고 하는 것이 욕되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은 반드시 악신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반드시 염두에 두고 오시거든요. 성령께서 우리 멱살을 쥐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 인간아! 이게 성령의 일이 아니고, 너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왜 자꾸 네가 뭐 했다고 등장하느냐? 비켜라! 비키라는 식으로 와요. 그게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겁니다. 비켜! 좀 비켜! 나는 너 배후에 악마하고 상대할 거야.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악신 앞에 뭐가 있습니까? “여호와가 부리신” 악신이죠. 여호와는 지금 어떤 구조, 체계를 그리고 있는 거예요. 체계를. 무대에 어떤 드라마를 올리고 있는 겁니다. 성신의 의미를 사람들은 모르거든요. 그들의 반대편에 허장강 같은 악신이 등장하는 거예요. 나쁜 역할을 하는. 나쁜 역할을 누가 해요? 악신이 들린 사울이 하는 거예요.

 

근데 사울이 하는 일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사람들은 사울 편에 들까요? 다윗 편에 들까요? 놀랍게도 사울 편에 듭니다. 왜냐하면 악신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마 편향적이니까. 사울이 하는 것에 자기가 판단해도 나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동조하게 되어 있어요. 악신은, 악마가 하는 일은 전부 다 우리가 고개 끄덕일 일이에요. 으응~~ 아닌데?? 이거는 필요 없어요. 우리 교인들만 그래요.

 

우리 교인들은 누가 와서 설교하면서, “여러분 이렇게 복음 아니까 그 복음에 합당하게 행합시다.”라고 하면, 그런 목사도 안 왔지만, 우리 교인들은 빈틈이 없어요. 으응~~ 이상하게 아닌데??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설교하는 사람은 뭐? 뭐? 성경대로인데. 성경대로 잘 가르쳐줬는데. 뭔가 이상하게 수상해? 헌금할 때 바르게 하시고. 뭔가 이상해? 이상해? 열심히 다해서 주를 섬기고. 뭔가 이상해? 이상해? 아닌 것 같아. 뭔가 꿍꿍이 노림수가 있는 것 같아. 감 잡습니다. 놀라죠. 제가 놀라죠. 정상이 아니므니다.

 

성신이 온다는 것은 악신을 드러내는 거죠. 다 합쳐서 그리스도가 꾸미는 언약체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쪽은 뭐냐 하면은 악신이죠. 그러면 이게 고요하게 잘 지내는 것이 아니죠. 누가 누구를 공격합니까? 악신이 누구를 공격해요? 성신을 공격하게 되면 성신은 악신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피해 도망가죠. 이거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이 그대로 앞서서 재현해주는, 앞서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신 들린 사람이 쫓겨 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은, 이거는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내 인생에서 무엇이 당연 하겠다? 죽음이 당연함을 느끼는 겁니다. 자, 이삭이 태어났죠. 이삭의 본질은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밥 먹고 살았다. 여기에 이삭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내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이삭의 본질입니다.

 

근데 이삭을 죽도록 제물로 바치는 분이 누구냐? 아버지잖아요. 아버지의 이름이 아브라함이잖아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잖아요. 이것은 대역이에요. 대역. 누구 대역이냐 하면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 대역을 아브라함과 이삭이 한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는 때가 마지막 때고 아브라함이 BC2000년경에, 그 사이에 누가 끼어듭니까? 다윗이 끼어들었다 이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 때 이 시대에는 우리가 있고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는 게 정상이 아니고 바쳐진 제물로 살아야 된다. 죽음을, 주님이 생각한 언약적 죽음, 영생을 제공하는 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형식의 죽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사는 형식의 죽음. 기차가 있을 때 기차 앞에 에너지, 동력을 주는 기차를 기관차라고 하죠. 이 힘에 의해서 붙잡혀 가는 것을 객차라고 하죠. 그러면 기관차가 앞서가고 객차가 뒤따라가는 형국이죠. 우리는 뭐냐 하면 “살다보면 죽는다.” 이거잖아요.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거꾸로’에요. 죽음이 기관차고, 사는 것, 이것은 여분의 것이에요. 죽음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지금 등장한 겁니다. 죽음이 주가 되고 우리는 보조가 되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보조가 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죽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근데 그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죽음에 부딪히는 건데, 보통 천국 가는 문이 있다고 하잖아요. 성경에는 문이 없어요. 문이 없으니까 주님께서 문이 없는, 전혀 문이 없는 곳으로 몰아세우십니다.

 

문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가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 없다? 천국에 갈 자격이 없는데 주님의 죽음과 동반해서 죽음이 앞장서서가니까, 없다고 여기는 그 현장에, 허공에 구멍이 생겨버린 거예요. 그러니 인간의 행함으로 무슨 수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게 무슨 상태냐 하면은 갇혀있는 상태거든요. 아무리 애를 쓰고, 종교적으로 기도하고 헌금해도 빠져나올 구멍이 없어요. 내 행함 자체가 내가 선악에 의해서 나의 선으로 이해가 되기 때문에, 나의 의로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이것마저 떨쳐버릴 재주가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인간에게 없어요.

 

그러면 방법이 뭐냐, 주님의 언약적 죽음이죠. 내가 스스로 자살하면 안 되고. 아버지에 의해서 죽는 죽음에 합류되어야 해요. 아버지에 의해서. 성신에 의해서 다윗이 죽어야 돼요. 죽는데, 죽음이 기관차니까, 객차에서는 뭐냐, 죽음이 뭐냐를 보여주는 것이 객차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만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 사건들입니다. 그게 뭐냐면 바로 내 식대로 안 되는데,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어떤 결과물을 내주는 거예요. 골리앗을, 어?! 내가 이기게 해주는 거예요. 빈틈없는 골리앗에 빈틈을 만들어서 이기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놓고 다윗은 말하기를 “이 싸움은 내 싸움이 아니에요. 내가 이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었어요.”라고 자꾸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시편 23편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이 외우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는 그분이 인도해야만 길과 문이 그쪽에 있어요. 내가 문을 찾아가고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을 내가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에요. 좁은 길을 알아서 가면 알아서 가는 그 자체가 나의 의가되기 때문에 안 돼요. 우리는 그냥 제가 한 게 없습니다, 에요. 왜? 나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라는 인식을 갖고 보게 되면 항상 그 길이 영생의 길이에요. 내가 한 모든 길이 영생의 길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만들었어요. 이게 뭐냐, 선악이전으로 돌리는 겁니다. 선악이 없는 상태의 다윗이 되게 하는 거예요. 다윗이 되려면 다윗으로 하여금 죽은 자로 만들고, 죽은 자가 경험할 때, 뭐냐 하면은 따먹을까요? 말까요? 이게 아니라, 이제는 따먹고 말고의 선택의 여지도 없이 소속이 이미 성령의 소속, 성신의 소속, 주님의 소속이 돼버린 거예요.

 

누가? 다윗이. 그 상태가 다윗이 성신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성신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계획한 일은 전혀 없어요. 주의 계획, 다윗 같은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너처럼 왕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맞닥트리는 이런 모든 사태는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온갖 원치 않는, 예상 못한 일들을 계속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은 누구를 충분하게 이해를 합니까? 사울에 소속된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거예요. 충분히. 이해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누구를 이해해요? 바로 죄인들을 이해하는 겁니다. 갇혀있기 때문에 그런 외침과 그런 반항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바르게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알아요. 뭘 아느냐? 우리의 태생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뭐냐 하면은 헌금이나 우리의 제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십일조 안 받아요.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뭘 받느냐 하면은 상한심령을 받아요. 상한심령. 상한심령을 받는 거예요. 돈 안 받습니다. 감사헌금 올려놓은 거 안 받습니다. 하얀 봉투에 감사헌금 이런 거, 우리 애 수시합격, 이런 거 안 받아요. 새 아파트 이사해서 감사헌금, 그런 거 안 받습니다. 주께서 상한심령을 받습니다. 따라서 새 아파트 마련해서 가세요.

 

“주여, 오늘도 또 상한심령이 되라고 새 아파트 주셨사오니, 이 새 아파트에서 더 심하게 상한심령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더러운 태생이 노골화되게 하옵소서. 본색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루를 더 살게 하셨사오니, 하루치 산만큼 또 더러운, 내가 왜 상한심령일 수밖에 없고, 주께서 내가 드릴 것은 왜 이것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으러 가는 것을 즐거워해야 돼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전 있죠? 이게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지막 장면이에요. 더 세상 구경할 생각하지 마세요. 해외 나갈 생각도 하지 말고. 이게 마지막 장면이에요. 이거 보고 오늘 잠을 자면, 잠자다가 주께서 데려가면 끝나는 거예요. 항상 마지막이라는 인식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구의 재판이나 누구의 평가에 휘둘릴 이유가 없고 그게 부담으로 올 필요가 없어요. 부부가 잠을 자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소속이고, 그 주님한테 휘둘리는 거예요. 나의 어떤 가치나 이런 것을 따로 챙기는 것은 사울의 세계, 악신이 들린 자들에게만 납득이 되는 세계, 거기에서 통용되는 원리원칙입니다. 방금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내가 누구의 소속이냐, 이게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이죠. 성령을 안 받으면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로 몰려오느냐? 이게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화를 냈던 이유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거든요. 보니까, 저기 방탄소년단 팬들이 더 많은 거예요. 오늘날은 해외는 방탄소년단이고 국내는 송가인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송가인 몰라도 돼요. 미스트롯에서 용두산 엘레지 부른 가수.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유명하다고 좋아하는 것은 얼추 나도 그게 부러운 거예요. 왜 우리 집안에는 저런, 내 아들은 저렇게 안 되고 우리 집안에는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안 나오는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겁니다.

 

자, 이 분노, 누가 나한테 몰려오는가를 가지고 나의 역량,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측정하고 싶은데, 올 때 기분 잠시 좋아요. 그러나 그 사람이 왔다가 떠나버리면 모든 게 분노입니다. 화를 내요. 이거는 부부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손에 물 안 만지게 하겠다고 해놓고, 결혼하고서는 관심도 없을 때는 분노가 일어나죠.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내 중심으로, ‘당신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내 중심으로 살아야 돼.’라는 것을 내가 은연중에 그걸 구축했어요. ‘내 눈에 눈물이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 나는 하얀 나비는 안 부를 거다.’ 이런 식으로. 하지만 이것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꾸리려고 하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살아야 되겠다는 기관차가 앞장서니까, 이거는 뭐 세상에 고생, 고생, 고생, 그런 마음고생이 없어요.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누구한테나 고개를 다 숙여.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진리기 때문에, 더 살아도 더럽게 살아요. 더럽게 살다가 지옥 가는 거죠.

 

그런데 다윗은 성령 받았기 때문에 뭡니까? 나는 누구의 소속인 거예요. 도대체 나에게서 하나님의 것이 나오도록 나를 뭐로 만들었다? 아주 죄인 중에 죄인으로 만든 거예요. 상한심령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 끝에 했죠. 너무 조심스럽게 살지 말라고요. 조심스럽게 산다는 것은 남을 의식한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기준 하는 나의 모델을 내가 못 버렸다는 뜻입니다. 내가 나를 괴롭혀요. 근사한 이미지가 나를 괴롭힌다고요. 이 기관차에다가 십자가를 꽂아 넣으시고 주님의 죽음에 동참한 자만이, 그 자체가 이미 산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