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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50강 / 사무엘상 16:16 ( 악령의 한계) / 190625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무엘상

50강 / 사무엘상 16:16 ( 악령의 한계) / 190625

정인순 2019. 6. 25. 22:57

 

 

음성1          

 

동영상1           

 

녹취:이미아

 

대전-50강 사무엘상16장15-16절(악령의 한계)

20190625-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6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15절,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16절,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악신이 사람에게 임하죠. 그 사람이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단은 중요하고요. 사람이 악신 들리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악신이 오는 것은 아니고요. 오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악신이 안 오는 것도 아니고. 상당히 악신에 대해서 또는 악령에 대해서 인간은 무능하죠.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점은 악령에 대해서 인간이 무능하다고 해서 너무 서글프다고 여기지 마시고, 성령이 오실 때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가 성령이 오라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항상 악령이 오나 성령이 오나 인간은 연약하다, 같은 말로 인간은 무능하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인간은 무능하거든요. 무능한데, 악신이 임한 자는 이 무능을 악령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유능한 존재로 착각하게 되어 있어요. 성신이 오게 되면, 성신이 온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죄를 아는 겁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그게 나와 있어요. 시편 51편을 잠시 볼게요.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렇게 되어 있죠.

 

다윗은 자기 자신이 죄를 짓기 전에는 성신이, 악신이니 뭐 자기하고 상관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유능하니까. 아까 강의 처음에 시작할 때 했던 것을 복습해봅시다. 자기가 유능하니까. 유능하다는 말은 내 앞가림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근데 성신이 왔을 때 다윗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유능한 자가 아니고, 무능 정도도 아니고, 아예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서 성신 앞에 왔을 때 자기는 죄인으로 노출이 되고, 그리고 난 뒤에 여기 9절에 보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 하소서” 내 모든 죄를 도말하라고 그렇게 합니다. 성신이 임한 상태에서. 성신이 임하면 첫 번째로 졸지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게 돼요. 뭐, 유능이니 무능이니 그런 것은 딱 끝나버리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고, 그 다음에 죄인인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무슨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은, 성신이 오셔서 나를 죄인 되게 하신 작업은 뭐로 마감이 되느냐 하면은 죄를 들추어내면서 그 죄를 하나님의 의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려고 나한테 찾아왔잖아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공식을 세우면 이렇습니다. 내 안의 죄의 생산은 곧 의의 생산이다. 내 안에 죄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내가 죄의 생산이죠. 이것은 곧 뭐의 생산이냐, 내 안의 의의 생산에 있어서 재료가 되는 겁니다. 재료가 되는 거죠. 그럼 이렇게 되게 되면, 죄 가운데 의로 가는데 있어서의 인간은 유능할까요? 쓸모 있을까요? 무능할까요? 무능이 되는 거예요. 이 무능을 찬미하는 겁니다. 이 무능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는데, 어린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바로 모든 것을 부모한테 미룬다는 겁니다. “저는 못해요. 저는 할 수 없어요.” 스스로 어른 앞에서 자기는 별 볼일이 없고 자기의 작아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천국은, 사람들이 뭐 천국을 보고 싶다, 천국에 가고 싶다, 천국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렇게 하는데, 천국에서는 얼마나 살기 좋을까? 하는 그런 질문들에서 뭐가 자꾸 빠지는가 하면은, 자기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꾸 놓치고 있어요. 자기가 무능하고 죄인이고 그 나라는 내 힘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 나라가 좀 좋아졌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어요. 왜? 내가 선택할 만큼 괜찮았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왜? 자기가 건방지니까. 적어도 나정도 되는 사람한테는 이 정도의 행복한, 완벽한 그런 상황의 나라는 주어져야 내게 걸맞다고, 내게 부합된다고 그렇게 우깁니다. 본인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니까 천국에 대해서 자꾸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 만났잖아요. 베드로는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여기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뭘 모르느냐 하면은 주님이 이 천국에 있으니까 자기들이 의당 천국에 와 있는 자격이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한 거예요. 천국을 봤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죄의 생산이죠. 천국이 되려면, 우리가 어느 나라 갈래? 지옥갈래? 천국갈래? 골라잡아라! 이런 입장이 아니고. 먼저 천국이 다가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이 스타트, 시작이 된 거예요.

 

어떤 인식이? 그런 죄의 생산이 정말 하나님의 천국을 이루고 의의 나라를 이루는 재료로서 이미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과정에 포함이 된 거예요. 이게 바로 성신이 임할 때, 요즘 말로 하면 성령이겠죠. 성신이 임한 사람의 특징이에요. 지금 사울이 악신이 임했다는 그 상태를 설명하려면, 성신이 임한 것부터 지금 제가 설명을 해드리는 겁니다. 성신이 임하게 되게 되면 나를 위하여 주님이 계시다는 이런 관련성이 애당초 이게 없다는 것을 알아요. 나를 위하여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 내가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뽑힌 겁니다. 채택된 거예요.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성신이 오기 전에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뭐 이거 자기가 최고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성신이 오고 난 뒤에는 시편 51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제사도 원치 않고 번제도 원치 않는다. 이 말은 제사, 번제 드려가지고 의가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뭘 헌금 바치고 봉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성신이 오게 되면 자기는 뭐합니까? 무능하죠. 무능한자가 전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해봐야 이게 뭡니까? 이게 절대로 하나님께서 유능하다고 간주하지 않겠죠. 찬양하고 뭘 해봐도. 무능한 자인데, 그냥 무능한 자가 아니고 뭘 뿜어내는 무능한 자이다? 죄를 뿜어내는 무능한 자.

 

근데 이것이 나한테는 굉장히 손해가 될 것 같지만, 이게 주님의 의 생산 공장에 이미 작업이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러니 내가 이렇게 하면 할수록 누가 기뻐요? 주님 자신이 기쁘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급해서 우리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기쁨이. 주님의 기쁨을 경유해서 나의 기쁨이 되는 겁니다. 이게 성신 받은,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면, 이 세상은 뭐냐 무능한 자를 사람취급해주지 않고 유능과 유능의 마주침이에요. 누가누가 유능 하냐, 누가누가 재주가 있느냐, 누가 쓸모가 있는 인간이냐, 카메라 하는 것도 제대로 못해가지고 유능하지 않잖아요. 누가 쓸모 있느냐의 대결장이에요. 누가 쓸모 있느냐의.

 

그럼 그 결과는 우리는 뭘 기대하겠습니까? 나는 남한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유능한 자, 괜찮은 사람으로 등극되기를, 등장하기를 고대하겠죠. 이것이 바로 성신의 뜻이 아니고 악령, 악신의 뜻입니다. 자신의 유능에 몰입하고. 이걸 하기 위해서 평생을 여기다가 모든 걸 몰입합니다. 평생을 여기다 다 던져 넣죠. 어떻게 하면 자기의 무능이 들키지 않을까, 그런데 모든 인간은 모든 방면에 다 유능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의 유능을 가지고 모든 무능을 커버하겠다고 하는 이걸 가지고 뭐냐, 프로페셔널, 전문가라고 합니다. “니 전공이 뭐냐?” 전공이 뭐 어떻게? 망치질하는 겁니까? 배추 파는 거? 전공이 뭐냐?

 

문제는 사람들은 네 전공이 뭐냐고 묻는데, 주님은 우리의 전공을 아예 묻지를 않습니다. 전공을 묻고 천국을 아예 안 보내줘요. 천국을 보낼 때 전공을 안 물어요. 왜냐하면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죄가 된다면 따로 죄인 것과 죄 아닌 것을 설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제일 심리적으로 프레스 되고 억압받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다고 인정될 때, 그거는 누가 안 건드려도 마음이 굉장히 우울하죠. 사는 게 힘들고. 그게 착각이다 말이죠. 죄 아닌 게 없어요. 모든 게 죄가 되는 겁니다. 다 모든 게 죄인데 유난떨면서, 아이고 내가 이런 죄를 짓다니! 그건 뭔가 자기가 죄만 안 지었으면 내가 유능한 자로 남 앞에 내세울 게 있고 또 하나님 앞에 이 정도 하면 내가 성도답죠? 라고 내세우겠는데, 그 죄를 짓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음메 기죽어 산다. 기죽어 사는 것이 기분 나쁜 거예요. 죄인이 뭐 기죽어 살아야지. 뭘 기죽는 것을, 그것을 원통해하고 절통해합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비교에서 오는 것이거든요. 비교에서. 행복은 절대치가 아니고 상대치에요. 지금은 촌동네에서 좀 산다고, 밥 먹는다고 행복해하지만 서울 강남에 가서 살면 내가 이게 거지지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 동네에서 공부 잘한다고 까불대봐야 진짜 공부 잘하는데 가면 이거는 꼴찌 하죠. 상대적이거든요.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한계, 자기의 한치를 어느 정도인지 계속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모르고 있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계속 꾸역꾸역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면서.

 

자, 이쯤 이야기했으면 여러분들이 악신 들린 자는 어떤가를 알겠죠. 악신 들린 자는 악신을 몰라요. 그게 특징이에요. 악신 들린 자는, 자기가 악령이 들린 자는 악령을 몰라요. 왜냐하면 아담 자체가 범죄하고 난 뒤에 악령에, 죄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멀쩡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제가 언젠가, 오후설교인지 그런 이야기를 했죠. 개목줄이 풀리면 혼자서 세상을 배회한다고.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목줄이 다 풀려가지고 어디가야 날 알아줄까, 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 시장바닥부터 해가지고 모든 게. 모든 세상의 만남이 다 그래요. 전부 다 남한테 우습게 안 보이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만 대따 보이고, 그것만 보이고, 그냥 아무도 자기를 지시하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 그냥 혼자 살아요. 독자적으로.

 

그래서 악신에 들린 자의 특징은 독자적이다. 독립적이다. 관계성이 없이 독립적이에요. 사무엘상 오늘 본문 16장에 사울 왕이 나옵니다. 사울 왕의 특징은 악신이 들렸다고 되어 있는 거예요. 본인은 악신 들렸는지 모른다고 했죠. 그런데 신하들은 이 사람이 좀 오버한다, 도가 심하다, 이러는 거예요. 자, 그 도가 심한 게 뭐냐 하면은, 너무너무 겸손해서 도가 심할까요? 안 그러면 잘난 체해서 도가 심할까요? 악신은, 악령자체가 하나님 앞에 대든 자거든요. 하나님에게 대든다는 말은 하나님이 여기 계시면 자기가 동등하다고 우기는 자예요. “하나님 니가 뭔데?” 이런 성질을 갖고 있는 자가 악령이거든요.

 

그럼 악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가 제일 높아요. 자기가 최고입니다. 최고니까, 산에 한 사람만 설 수 있는 산꼭대기에 본인이 우뚝 서 있는 거예요. 뭐 최고가 아니라도 그 밑에 새끼 산이라도 자기 나름대로 최고라고 여기는 거예요. 항상 자기가 최고일 때가 자기의 성격과 딱 맞아떨어져요. 일곱 살 먹은 애가 거실에서 안 놀고 문 닫고 자기 방에서 맨날 게임을 할 때, 자기 방의 공간은 뭡니까? 아무도 안 들어오죠. 그럼 이 방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본인이죠.

 

이게 지금 자기 방의 작은 공간이지만, 이게 뭐냐 마운틴, 산 위에 홀로 있는 그것이 자기의 기본 성품과 딱 맞아 떨어지는 공간인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합니까? 자폐증이죠. 자폐증. 자폐증인데, 어른 되면 이게 뭐냐 하면은 집착하는, 편집증이에요. 편집증. 하나에 올인 하는 거예요. 이게 안 되면 사람의 정신이 둘로 쪼개지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분열증이라고 해요. 이거는 뭐 여기가도 좋다, 저기가도 좋다, 자기 주제를 몰라요. 이 분열증 걸린 인간이 기껏 나다운 나라고 하는 것이 편집증, 둘 다 뭐냐 하면 정신병자. 그래서 인간은 정신병자와 정신병자 사이에 계속해서 헤매고 있는 거예요. 끈이 끊어져서, 개목줄이 없으니까 혼자서 세상 속을 살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자연은 뭐냐, 자연은 누구한테 매여 있습니까? 자연은 혼자 독자적이 아니에요. 자연은 누구한테 매여 있습니까? 갈릴리바다를 누가 잠잠케 했습니까? 예수님이죠. 자연은 누구한테 매여 있죠? 예수님에게 매여 있고 하나님에게 매여 있는 거예요. 근데 그 자연 속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인간이 살고 있잖아요.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자연 속에 악령이 침범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한테 이런 과제를 드린다는 것이 무의미하겠지만, 과제를 한번 해보고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세요. 내가 악령 들렸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가 악령 들렸다는 증거를 한번 제시해보세요. 아까 우리가 공부했잖아요. 잘난 척도 같은 증상이 되겠죠. 아까 산위에, 마운틴위에 홀로 있고 남들을 내려다보고. 이게 뭐냐 하면은, 항상 마음속에는 어떤 소리가 있느냐 하면은 “날 무시하지 마라!” 하나님이라고 해서 배반한 천사를 무시하지 마라는 이게 악령이죠.

 

그래서 이사야 같은 데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하죠. 이 하나님이 하신 이야기를 악령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최고다. 돈도 별로 없으면서 항상 건드리면 내가 최고다. 건드린 사람마다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강아지도 튀어나옵니다. 강아지도 뭐 최고다고 하지만, 뭐 사료주고 밥줄 때는 또 주인님이 최고다, 라고 꼬리 흔들고 난리도 아니죠.

 

악령 들린 증거를 찾으라는 말은 이미 인간은 뭐가 정상이다? 악령 들린 것이 정상이다. 이게 보편적이다. 이게 다수다. 이게 대세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게 정상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이게 되는 사회, 경쟁이 되는 사회, 경쟁사회라고 하죠. 누가 돈이 많나, 누가 월급이 많나, 누가 건강 하냐, 누가 50대에 갱년기를 수월하게 지나 가냐, 모든 게 경쟁이죠. 인간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신인 것으로 확인될 때 행복한 거예요. 자기 악마의 품성에 환경이 잠시 부합될 때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행복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게 대조해서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면 자기는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게 맞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뭘 이상하게 느껴야 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왕이라고 해서 돛대처럼 설치는 이게 이상한 것이 아니고, 분명히 최고의 자리에서 자기의 위세를, 교만하다든지 건방지다든지 그런 말을 듣더라도 자기 왕의 왕다움에 권위를 맘껏 발휘하고 아랫사람을 아주 낮추어보는 그게 왕의 마음이잖아요.

 

근데 왕이 만약에 순해빠졌다. 그게 좀 이상하죠. 왕이 갑자기 순해빠졌다 하면 이상하다 이 말이죠. 성신이 누구한테 왔느냐 하면은 다윗한테 왔습니다. 그리고 악신은 누구한테 왔느냐 하면은 사울에게 왔습니다. 그전에 다윗이, 지금 우리가 16장을 하고 있죠. 성신이 다윗에게 임하고, 성신이 다윗에게 임한 것은 사무엘이 찾아와가지고 차기 왕으로 기름을 부을 때 성신이 온 거예요. 그러면 아까 우리가 배웠던 공식을 해봅시다. 자, 성신이 왔다는 말은 다윗에게 좋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다윗이 하나님의 일에 쓰였다는 말입니까? 쓰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좋다고 하면 안 돼요.

 

우리가 다윗을 사울과 비교해가지고 사울보다 다윗이 낫다고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이러면 우리가 아까 이야기한 악신 들린 품성을, 본성을 또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나 누구 편에 설래,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다윗은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거예요. 다윗에게 성신이 임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다윗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지금 이스라엘과 더불어서 뭘 하느냐 하면은 전쟁을 시작한 거예요. 전쟁을.

 

이스라엘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거든요. 근데 주인은 하나님인데 이걸 망친 요소가 있어요. 사울이거든요. 그러면 왜 망쳤는가를 알아야 될 게 아닙니까? 그거는 사울에게 악신이 임해서 사울적인 인식과 사고방식이 하나님이 주인 되는 그 나라, 이스라엘을 망치고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이 다윗에게 어떻게 했느냐를, 그 증거를 역사를 통해서 이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가면서 전개하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임한 것은 내 일이 아니에요. 내 하는 프로페셔널의 일, 내 일이 잘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무슨 뜻이 있는데 그 뜻은 뭐냐 하면은 왜 세상은 멸망해야 되는가를 성령을 보낸 사람과, 이걸 하나님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성령 받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고 주님의 전쟁에 성도가 말려들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그 길을 성도는 본인도 가고 싶죠. 본인도 가고 싶은데 누가 못 가게 하느냐 하면은 성령께서 “너는 그쪽은 안 돼!”라고 강하게 막아버립니다.

 

자, 세상이 가는 길은 누가 최고다? 내가 최고다. 내가 최고다, 라는 이런 의식을 물론 성도도 매일같이 가져요. 갖지만, 성도한테는 이게 용납이 안 돼요. 내가 최고다,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 바로 그게 뭐냐 하면은 이게 죄의 생산인 것을 성도는 알아요. 죄의 생산인 것을. 그래서 내가 남보다 더 낫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는 죄용서가, 죄 용서를 다른 말로 의죠. 하나님의 의가 되는 생산라인에 내가 들어갔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 라인, 그 관계가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는 인간들에게는 성신이 없고 악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밖에 없고, 독자적으로 자기밖에 없어요. 인간은 누굴 믿습니까? 인간은 나를 믿어요. 나를 믿기 때문에 다른 믿음이 들어갈,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내가 나를 믿는데 또 누굴 믿어요? 나한테 허락 맡고 들어와야지. 내가 나의 파수꾼이고 내가 나의 전부인데. 그런데 그게 바로 그들은, “악마야! 너는 내 허락이 없이는 못 들어가.”라고 하지만, 그게 이미 악령에 걸렸기 때문에 큰소리치는 거예요. 악마는 그 사람에게 안 와요. 왜냐하면 이미 악마와 더불어 있는데 또 올 게 없어요.

 

그런데 성도는 늘 성령께서 오셔가지고 우리 육이 품어내고 있는 죄를 더욱 죄답게 들추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자, 악신과 누구의 만남? 악신과 성신의 만남에서 주의 작업은 이렇게 진행이 됩니다. 악신과 성신, 성신과 악신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그 작업을 전개하시죠. 그러면 여기서 악신 들린 것을 신하들이 알았을 때 이스라엘이 걱정이 되죠. 사울 왕이 어디 말도 안 듣고 자기가 최고처럼, 돛대처럼 미쳐서 서대니까, 이거는 뭐 신하가 있으나마나죠. 자기가 모든 결정을 내리니까.

 

여기에 악신이 들려서 정상이 아니다, 해서 이걸 풀어주기 위해서 방법이 뭡니까? 수금 타는, 수금은 요새 악기 같으면 하프, 또 옛날 악기가 단순하잖아요. 초기 바이올린, 초기 기타나 튕기는 정도, 나팔이나 피리 정도. 수금 타는 것을 여기다가 대비시킵니다. 그러면 수금 타는 자가 소년 다윗이 되거든요. 여기서 우리가 악신을 공격하는 성신의 무기의 구성요소를 한번 봅시다. 첫 번째는 다윗이 소년이라는 사실. 두 번째는 수금. 수금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음률이 나오죠. 가락이 나오죠. 가락이 나온다고요.

 

자, 여기서 음률이 악신이 들렸는데 무슨 효과가 되겠는가? 다시 말해서 악령을 봉인하는데 있어서의 음악이, 음률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좀 의아하게 생각이 되겠죠. 이 자연 자체가 이게 음률이에요. 음률. 아까 이야기했는데 자연은 누구 손에 있습니까? 예수님 손에 있죠. 자연은 음률이다 말이죠. 자연의 특징은 뭐냐 하면 선과 악이 없어요. 선한 자연, 악한 자연이 없어요. 인간은 못돼가지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 선과 악을 따지지만, 자연은 선과 악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연이 하나님의 뜻에 더 원형을 보관하고 있어요? 아니면 인간이겠습니까? 자연이겠죠. 그러면 인간은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어느 쪽을 취하느냐 하면은 악령 쪽을 추구하는 거예요. 악령. 악령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반발하고 반항한다는 이 말입니다. 인간이 자살합니다.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는 인간이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인간이 그냥 자연이 죽이는 대로 죽는 것이 아니고 반발과 반항의 몸짓으로 자살한다 이 말입니다. 개가 자살하는 것을 봤습니까? 의미는 누구의 의미? 자기의 의미. 독자적인 의미. 나는 따로 살겠다는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따로 살겠다는 거예요. 나로 인하여. 모든 것이 귀찮고 나는 이 자연 속에서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네가 신처럼 되리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자기는 신처럼 되고 싶고, 자연은 선악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거는 누구한테 속하냐 하면은 하나님한테 속하거든요. 그럼 자연 속에서 하나는 신처럼 되겠다고 반발심을 갖고 있고, 자연은 신에게 반발하지 않고, 근데 인간이 사는 환경은 뭡니까? 대자연이 아닙니까? 대자연에서 사니까 인간은 이게 맞아요? 안 맞아요? 이게 안 맞는 거예요. 본인이 힘든 거예요.

 

인생사는 게 왜 힘드냐 하면은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이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요. 인간의 소원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자연이 움직여주는 것이 아니에요. 자연은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겁니다. “이 못돼먹은 이 나무야!” 이러면 안 돼요. 요나가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하고 동업도 못하겠다고 삐져가지고 있을 때에, 요나 자기도 의식도 못했는데, 그렇게 불평불만하고 있었을 때에 마침 요나의 머리가 시원했던 모양이죠. 박넝쿨이 그늘이 져서. 나 하나님하고 이야기 안 한다. 심판한다고 해놓고 안 해서 헛소리가 됐기 때문에. 선지자의 위선이 완전히 바닥을 쳤죠.

 

왜냐하면 주인하고 종이 이게 생각이 맞아야 되는데, 분명히 심판을 한다고 했는데 심판이 안 오니까, 자기가 삐진 거예요. 근데 자기가 어떤 혜택을 입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한테 의미를 둔 거예요. “이럴 것 같으면 나는 자살합니다.”라고 했는데, 갑자기 그늘이 사라지고 쨍쨍한 햇빛이 비치니까, 이제는 자기가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떠죽어서, 본인과 관계없이 죽게 생겼어요. 박넝쿨이 그만큼 고귀한 것을 몰랐던 거예요. 자연은 요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억지를 부리죠.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저 집 애는 KT 47대1을 뚫고 합격이 안 되더라도 내 아들은 KT에 47대 1을 뚫고 합격하기를 원해요. 기분 좋다고. 황교안이 자기 아들이 KT에 합격했다고 아들 자랑했죠. 공부 잘했다고 한다 이 말이죠. 행복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대적 우열이 행복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좀 사는 것이 힘들거든, 여러분 보다 더 못 사는 동네로 이사 가세요. 잠시 행복할 겁니다. 잠시는 행복한데 나중에는 그게 우범지역이 될 거예요. 밤에 문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뒤따라가서 잡으려고 하는, 1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죠. 그런 동네. 어서 돈 벌어서 여기서 벗어나고 싶을 거예요. 촌이 시원한데, 세종시 같은 데 왜 이사 가려고 합니까?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마운틴 하이, 산꼭대기에서, 산에 홀로 살면서 내려다보는 그 즐거움. 쾌감. 뭐, 그런 것은 아니겠죠? 돈이 없어서 촌으로 쫓겨났다고 보시면 돼요.

 

어른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한테 의미를 그만큼 축적해왔어요. 살아오면서. 어른은 과거가 긴 사람이잖아요. 내 과거가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데, 인간의 그 높아짐은 본인도 모르게 계속해서 더, 더, 더 높아질 요소가 매일같이 새로 생겨요. 내가 이만한 정도면 만족한다, 행복하다, 라고 그걸 자기 자신에게 해주잖아요. 그걸 자아재편이라고 합니다. 자아재편. 자아구성이에요. 자아구성. 자아구성을 가지고 새로운 욕심이 추가가 되면서 재편해요. ‘아이, 이 정도는 돼야지.’ 내가 어제까지 만족한 것은 이제는 시시해지고 시답지 않게 되는 거예요. 더, 더, 더, 더 자꾸 높아지려고 하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아까 성령을 받은 요소가 뭐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는 소년, 두 번째는 음률, 음악이죠. 음악은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자연에서 오죠. 이 소년이 하프 치면서, 다윗이 이거 하게 되면 나는 취직될 거야, 라는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소년에게는 더 높음이 없잖아요. 더 높음이.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내가 뭘 해도 뭐가 된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서 벗어나겠다고 하는 이 몫은 성령주신 그분의 계획이지, 작업이지 내가 거기에 관여할 수 없어요. 왜? 나는 거기에 무능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 무능해요.

 

뭐, 바둑을 못 두고 운전을 못해서 무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생산에 우리가 무능한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것을 드릴 수가 없어서 우리는 무능하다 이 말이죠.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고 신학을 하고 뭐 어떻게 장로, 목사, 교회 봉사해도 그거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모든 짓거리가 계속해서 죄의 생산만 될 뿐이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익히 아는 겁니다. 높아봤자 죄고 낮아져봤자 죄에요.

 

그래서 소년 다윗은 모든 주어진 것에 대해서 고분고분할 뿐이죠.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오늘은 오늘 주어진 무대장치에서 그렇게 살고, 내일되면 내일 주께서 마련한 무대장치에서 사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이 만든 스크린 밖으로, 브라운관 바깥으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주께서 짜놓은 그 프레임 안에서 살죠. 프레임 안에서.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마련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마련한 것이기 때문에. 신하들이 뭘 하느냐 하면, 음률을 생산, 만들어내는 것으로 악신이 물러가게 한다는 이것을 신하들이 했다면, 소년은 뭘 하면 돼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음률을 만들어내면 됩니다.

 

그러면 음악은 자연이잖아요. 자연자체. 자연자체에서 악신을 봉인하는 방법은 애초부터 주께서 자연을 가지고 악신을 이미 묶어놨다는 사실을 오늘 사무엘상 16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악마도 한계가 있다. 악마는 절대로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런데 악마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는데, 이미 악령을 받고 있는 모든 인간은 개코나! 돈은 얼마 없으면서 행세는 전지전능하게 행세해요.

 

옛날 조선시대에도 그랬지만, 60년대 이후에 소위 가장들 보세요. 밖에서는 고개 숙이고 하다가 그 한풀이를 집구석에 들어와 가지고 개부터 발로 차고 애들 다 깨우고 술 먹고 들어와 가지고. 왜 술을 먹어요? 내가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래요. 술 먹고 운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잖아요. 왜 술 먹습니까? 나는 법을 깰 수 있는 그러한 것이 내 욕구에 부응된다는 거예요. 내 욕구가 원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구름보다 모가지가 더 나왔을 때, 그거는 술 먹고 마약한 기분, 그때 그 기분이거든요.

 

왜 도박을 합니까? 뭐, 도박은 안 해봤지만, 왜 도박을 합니까? 도박은 푼돈을 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판을 전부다 내가 다 쥘 때 그 재미, 그 재미로 하는 거예요. 왜 로또를 삽니까? 6등 하려고? 최고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이 복권세계에서 나만이 독점적으로 주목을 받는다는 그것. 그게 악령의 기쁨이에요. 이것은 아무리 산이 높고 전지전능해도 자기 혼자 전지전능한 거예요.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것을 누가 알고 있느냐 하면은 대자연이 알고 있어요. 대자연은 알아요. 인간들이 악령이 있어가지고 자연 밑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도대체 다윗이 탔던 음악이 뭔지를 우리가 모르잖아요. 음악도 안 나오고 가사도 안 나오고. 나중에 시편에 나오지만. 이것은 시편도 아니고 하니까. 노래 불렀다는 이야기도 없고. 그래서 제가 무슨 음악을 틀었을까? 강의를 하면서 좀 실감이 나야 되지 않습니까? 틀었더니만 갑자기 그 위세 있던 그 사울이 순한 양처럼 됐다. 순한 양처럼 됐다 하지 말고 사실은 소년 다윗처럼 됐다고 보면 좋겠죠. 그렇죠. 소년 다윗이 뭐하고 있습니까? 소년 다윗이 지금 음악을 틀잖아요. 그러면 음악을 튼 사람에게 일단은 숙이고 들어오는 거죠.

 

그 잘난 어른 사울이 어린애가 하는 그 음악에 복종하고 순복하게 되는 거예요. 성신이 누굴 무너뜨렸다? 악신을 무너뜨린 거예요. 근데 그 음률이, 자연적인 그 음률을 우리는 몰라요. 모르지만 실감나게 하나의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만족스럽지 않지만, 사랑의 인사가 들려온다 이 말이죠. 예를 들어 다 화가나있는데 엘가의 사랑의 인사(이걸 핸드폰으로 들려주셨다)가 들려온다면 갑자기 마음이..., 남편이 술 먹고 싸우는데 우리 이종분 집사님이 바이올린 가지고 이 곡을 켠다면 갑자기 조용해지겠죠.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애초부터 자연의 뭐가 된다? 애초부터 자연의 일부였다. 까불지 마라! 이 말입니다. 애초부터 자연의 일부였다. 절대로 모가지 쳐들고 자연 밖으로 튀어나갈 수 없다. 인간은.

 

이건 소년이 얼마나 수금을 잘 켜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얼마나 하프를 잘 켜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소년이에요. 소년은 이미, 성신 받은 소년은 자연의 선악체제가 아닌, 자연에 순복합니다. 그냥 불러서 하프 켜라고 해서 하프 켠 거예요. 이거는 소년 다윗의 기타 솜씨가 아니에요. 성신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은 악신에 대한 성신의 우위, 또는 악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우위, 우열함, 승리, 이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에서 계속 무엇이 생산이 되어야 해요? 죄가 생산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죄가 생산되고, 소년 다윗은 거기에 대해서 무시당하고 미움 받고 쫓겨 다닐 때, 이거는 장차 진짜 요단강에서 성령 받으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들에게 온전하게 주님으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오해하고 곡해를 받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심지어 가까운 열두제자한테도 배신당하고, 세례요한한테도 “당신은 오실 분이 맞습니까?”라고 의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자연의 이치에 합치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거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에요. 악마를 충분하게 활용해주는 겁니다. 악마야 물러가라! 이게 아닙니다. 악마조차도 주님의 뜻대로 움직여줘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알 것은 그 악신의 한계를 알아야죠. 악신의 한계. 아무리 까불고 뛰고 해도 성령한테는 못 이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전부다 아담의 자손으로서, 육의 요소로서 이미 악령의 지배를 받죠. 로마서 5장에서는 죄의 지배아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죄의 위력 안에 있어요. 죄의 위력 안에. 있는데, 인간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인간은 선악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악을 저지르면 그게 악이 되고 내가 착하게 되면 악이 아니고 선이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사도바울은 내가 선하고 싶어요. 선하고 싶은데 뭐가 발목을 잡습니까?

 

이게 선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악이 있는 줄 몰랐는데, 내가 선하고 싶어 하는 순간 악이 등장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로마서 7장에 나오는 탐내지 말라는 선. 탐내면 악이고 탐내지 않으면 선이라고 왔을 때에 그 선이 목표가 되어가지고, 마치 우리가 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해가지고, ‘그래 나는 이제부터 탐을 안 낼 거야.’라고 하는 순간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은 그 선의 미흡함과 미약함과 그런 선을 우리는 이룰 능력이 못 된다는 것을 악마가 더 센 힘으로 악마의 실제를 우리에게 느끼게 만들어요.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선하고 싶고 저것 지켜서 더 착하고 싶은데, 우리 내부는 그걸 기회로 삼아서 “너는 원래부터 선할 수 없어. 악이 너보다 더 우세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럼 그 사이에 누가 낍니까? 로마서 7장에 보면 주님이 들어오죠.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은, 내가 뭘 어떻게 착해서 천당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벌이신 일에 내가 참여된 성령 받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알게 돼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악이 나를 이긴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에 국한해서 알아요.

 

로마서 7장을 쓴 사도 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아주 뭐 거침없이 자신이 죄밖에 지을 것이 없다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거침없이 다 고백을 해버리는 거예요. 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이거는 죄고 저거는 죄가 아니고 이게 아니라 내놓는 모든 것이 죄만 내놓는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기쁨으로. 따라서 내가 잘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시달리지 않게 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누구한테 질문이 있다고 해서 전화를 받았는데, 그 전화내용이 뭐냐 하면은 너무나 기분 나쁜 꿈을 꿔가지고, 그 꿈이 뭐냐 하면은, 자기 어머니 꿈에, 며느리가, 그러니까 아들 부인이 차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겁니다. 그 꿈이 너무나 실감이 나가지고 이제부터는 니가 운전해라고 해서 아들에게 시켰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해서 그런 질문을 한 거예요. 그냥 꿈이라고 하면 되는데, 꿈과 현실을 이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좀 이렇게 마음에 안심이 되나 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의미가 뭐냐 하면은, 무능한 죄인한테는 뽑아낼 의미가 없어요. 근데 내가 유능하고 내가 살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는 의미로 여겨지잖아요. 이 의미와 밖에 있는 움직임, 이 대자연과 자연적으로 이거는 투쟁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조심할 대로 조심하게 되면 그 이익은 누구한테 온다? 우리한테로 온다는 거예요. 바로 이런 사실이 모아져서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속성들이. 그래서 어떻습니까? 죄는 승리했죠. 죄가 승리해야 돼요. 죄가 승리해야 되는 것이 이 세상이 멸망할 이유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필히 의가 승리하지 말고 죄가 승리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승리자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