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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22: 8 / 거룩한 양식 / 190405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22: 8 / 거룩한 양식 / 190405

정인순 2019. 4. 6. 01:35



음성1                 음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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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90405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양식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2장 3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제사장의 지시에 의해서 성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제사장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려요. 인간이 하나님께서 성물을 드린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일단 두 가지라면, 첫째, 하나님을 그린다. 하나님의 물건을 대한다.

하나님을 그린다와 하나님의 물건을 대한다, 어느 편이 인간들에게 기본적으로 원하는 바냐 하면, 하나님을 보고서 믿고 싶은 거예요. 그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물건을 대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은 모르겠고 하나님이 관여하는 어떤 사물이나 물체나 물건을 조물딱거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살았다는 소식이 왔을 때 어머니가 이것이 아버지의 물건이고 아버지의 손수건이고, 이게 자식들에게 좋겠어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이 확실하겠습니까? 아버지 얼굴을 직접 보는 게 확실하겠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서(그걸 성화라 합니다) 보여줄 때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마음속에 두겠지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종교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는 겁니다. 자태를 그리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는 쪽을 선호하고, 물건을 대하는 것보다 그리는 것을 더 확실하게 여기는 거예요. 왜 하나님을 그리고 싶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도 같이 존재해서 상대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의 얼굴을 그려놓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이런 식으로요. 고린도전서 13장에도 나오지요. 그때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요.

그런데 하나님을 물건으로 대하게 되면, 하나님의 손수건, 하나님의 바짓가랑이,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런 걸 대하면 이게 하나에 찬송 책처럼 밖에 안 되거든요. 얼굴은 못 보지만 물건이라도 만져서 약간은 더듬어 가는 식으로 하나님을 구성해보자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직접 안 나타나시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 만나면 죽게 돼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발생하는 그런 신체를 아담으로부터 부모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공식 하나 적어보겠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무조건 죽은 자이다. 이 공식입니다. 국무총리든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 새로 당선되든 강원도 고성에 산불 나서 집을 날리니 마니 상관없이 자기 펜션이 멀쩡하든 간에 죄가 있으면 죽은 자에요. 죽은 자에게는 산불 나고 화장하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시집가고 죽은 자가 장가가고 죽은 자가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죽은 자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자에요. 죄가 있으니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너무나 명확한 공식이에요. 이 공식이.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가 죄 있다 해놓고 산 사람으로 행세하는 그 뻔뻔스러움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백독을 하고 천 독을 한들 뭐합니까? 성경에 기본도 안 됐는데.

기본은 뭐냐 하면, 죄가 있는 자는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지금 지위가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가정주부든 집에 백수로 노는 사람이든 그건 무조건 죽은 자에요. 그래서 죄로 인하여 죽었다 했잖아요.

이게 논리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현실에 실감이 안 나서 그래요. 태어날 때부터 자기를 산 자라고 계속해서 자기가 우기고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이왕 살아 있는 인간, 더 가치 있게 빛내봐라. 이런 식으로 옆에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부추기니까 자기가 마치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착각들을 하시는 거예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죄가 있는 자는 무조건 죽은 자에요. 놀러가든 집에서 잠을 자든 죽은 자로 잠을 자고 놀러가도 죽은 자로 놀러가요. 우리 상식으로는 죽은 자는 놀러 못 가고 죽은 자는 축구도 못한다 하지만 아니에요. 얼마든지 죽은 자도 국회의원 나갈 수 있고 보궐선거에 당선할 수도 있고 0.1%에 들어갈 수도 있고, 얼마든지 공무원시험에 지원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남아 있는 이상은 그 사람은 무조건 죽은 자에요. 그래서 확실한 공식으로부터 확실한 것을 뽑아내야 됩니다. 모호한 데서부터 뽑아내면 안 돼요. 확실한 데서 확실한 걸 뽑아내게 되면, 인간이 하는 일은 뭐냐? 하루 온 종일, 평생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지옥 만들기 하는 거예요. 미국 유학 갔다 왔는데, 지옥. 올림픽에서 금메달 땄는데 그것도 지옥 만들기.

왜냐하면 나 혼자 사는 동네가 지옥이에요.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잠을 자고 울고불고 나 자신의 행복, 내 가족의 행복, 내 직장의 번창, 내 교회의 부흥, 이게 전부 다 지옥이에요. 천국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천국이에요. 지옥은 갈수록 내가 더욱 집요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는 게 지옥입니다.

취직해서 뭐하고 있나? 열심히 직장생활 잘합니다. 그게 뭐냐? 내가 하는 재주는 뭐냐 하면, 지옥 만드는 재주 외에는 인간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여자가 아기 낳고 젖을 줬다. 이게 나쁘냐? 그게 바로 지옥 만드는 행세에요. 지옥 만드는 모습이에요.

죄가 있는 것은 무조건 죽은 자요, 심판 저주받을 자요, 그 죄가 있는 사람이 하는 그것은 천국 만들기가 아니고, 천국 만들기는 주님이 하시고요, 인간이 하는 것은 지옥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열심히 연구하고 난 뒤에 쉬는 시간에 배 타고 도전한다고 노 열심히 젓고 지옥 가는 겁니다.

주특기 무엇입니까? 지옥 잘 만듭니다. 어떻게 만듭니까? 나에게 의미를 둡니다. 나에게만 모든 의미가 쏠리도록 그 일을 참 잘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들였는데 우리 집안은 이러니까 너는 제사 제 때하고, 제사는 일 년에 열두 번밖에 안 되니까 잘하고 명절에 친척들 잘 섬기고. 그러면 되바라진 며느리가, “그래서요?” “그러면 우리 가문은 빛나지.” “어머니,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모든 의미가 나에게 쏠린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지옥은 나로 인하여 행복을 얻고 나뿐인 세계, 나만의 세계. 인간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재주는 지옥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 재주가 없어요. 그런 인간이 하나님 보고 싶어서 하나님을 그리고 싶은 거예요. 성화라 하지요. 거룩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 레위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닙니다. 이게 어디서 낯짝을 나한테 들이대, 죽어. 그래서 얼굴이라는 것은 하나님 만난 모세도 하나님을 얼굴을 못 봤어요. 뒤로 주님께서 지나가도록 등을 돌려야 돼요. 얼굴을 보면 안 돼요. 죽어요. 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하나님께선 죄가 있는 인간은 백성 만들기 위해서 그 죄를 없애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 일을 하려면 먼저 우리에게 죄가 있고 이 죄가 우리 몸을 통해서 날마다 발산되고 있음을 인정해줘야 됩니다. 그리고 발산되는 그 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계속 열심히 추진해 나가는 거예요.

어떤 분의 메일에 답장을 이렇게 했어요. 지옥 가는 이 세상 사람들 가련하고 측은하게 여겨야 됩니다. 왜? 실컷 고생하는 데 그 고생이 지옥 가려고 고생하는 거예요. 아침 여섯 시에 출근해서 열 시에 퇴근하는 데 그 모든 일이 뭐냐?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 힘들게 살아가면서 그 결과는 또 힘들게 지옥 가야 돼요. 살아서도 낙을 못 보고 죽어서도 낙을 못 보고. 인간의 선택지는 오직 그것밖에 없습니다. 나로 하여금 지옥 가게 하는 그 행위 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요, 하여튼. 알뜰하게 살고 가계부 쓰고 쿠폰 다 모으고 뭔가 열심히 사는데 지옥이에요. 이 땅에 열심히 산다고 낙도 못 누리고 죽어서도 지옥 가도 낙도 못 누리고. 바보 아니에요? 바보 등신 같아요. 지옥 가는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문제는 소위 복음을 안다는 신자가 그들을 부러워한다는 거예요. 그 딴 걸 왜 부러워합니까? 지옥 가는 게 그렇게 부러워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방향을 틀어야 되지 않습니까? 방향을 틀어야지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방향 틀어야 돼요. 그런데 방향 틀어서 천국 간다는 객관적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에 희한한 버스가 있는데 그 버스는 빈 차에요. 운전사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고, 천사가 버스 운전하면서 어떤 사람을 태우느냐 하면, 천국 갈 사람들만 태우는 버스를 하나님이 운행한다고 봅시다. 버스 번호가 1004번이에요. 천사가 운전하니까.

거기에는 귀신만 태우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만 태우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 걸 아는 사람들, 그 사람은 귀신같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만 모집해서 버스에 태워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서 이걸 이렇게 해요. 부르심을 입어서. 네가 성도라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호출이죠. 초청이란 말을 해도 되는데 호출이란 말이 더 적당합니다. 호출한 거예요. 이제부터 너의 일은 없고 순전히 나의 일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는 나에게로 호출당해야 되는데 호출할 때 너의 신분과 위상이 달라져야 돼요. 그 달라짐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바로 레위기 22장에서 제사장으로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제 구약과 신약 고린도전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어렴풋이 아시게 될 거예요.

구약의 제사장이 왜 있느냐? 신약의 성도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신약의 제사장들은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에요. 그 제사장들의 복장이라든지 그들이 해야 될 처신 등은 그들이 정한 게 아닙니다. 자기 몸 편한 대로 한 게 아니고 율법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들은 그냥 율법에 휘감겨있다고 보시면 돼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율법의 깁스. 깁스가 딱딱하잖아요. 석고니까. 그러면 뼈에 완고한 율법이 둘러쳐있는 거예요. 율법 안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법 안의 존재에요. 그러면 깁스와 뼈 근육 사이에 보호대가 있겠지요.

율법과 죄인인 제사장 사이에 뭐가 오고가느냐 하면, 바로 죄가 있는 죄를 없애는 역할과 기능이 그 사이에 교류되고 그 사이에 연결돼있습니다. 율법과 제사장 사이에 죄가 있는 제사장을 죄 없이 하는 각가지 장치가 있어요. 장치, 그리고 재료들, 물체들, 사물들이 있어요. 그게 오늘 본문 핵심이 뭐냐 하면, 양식이라는 겁니다.

구약은 율법의 깁스라 했는데 신약 성도는 무엇에 둘러쳐있느냐 하면, 십자가에 둘러쳐있어요. 십자가는 무엇의 완성일까요?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그러면 구약의 제사장이 율법이 있음으로써 제사장은 거룩이 항상 보존된다면 그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안에 성도가 들어있다면, 죄 용서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 십자가의 고유 기능과 역할이 성도를 통해서 발산하게 돼있어요.

깁스는 팔이나 다리만 있는데 온 전신을 다 집어넣는 MRI자기공명영상장치 있잖아요. 선반에 누워서 그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사진 찍히잖아요. 그 전체를 십자가로 보게 되면 죄 많은 우리가 십자가 안에 들어갔다 나오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죄 용서받았지만, 그 과정이 중요해요.

그 과정이 뭐냐 하면, 내가 사라지고 주님의 일이 우리에게 덮치게 돼있어요. 결과적으론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됐지만 과정에서는 뭐가 없어지냐 하면, 그 동안 우리가 지옥 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뭐냐 하면, 주님의 나라가 돼야 되는데 우리는 죽어서도 누구 나라 된다? 내 나라 되는 걸 고집했거든요.

왜냐하면 이 땅에서 하는 짓거리가 오직 나만 챙기는 것으로 줄곧 일관되게 한 시도 쉬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해요. 오직 나를 위해서 계속 나만을 위해서 우리 가정, 내 가족, 하여튼 나와 관련된 모든 것, 내 나라, 내 민족, 나만 위해서 살았던 그 습관, 그 사고방식이 그게 바로 지옥이라 했잖아요. 지옥은 주님이 안 계시고 자기만 덜렁 남아있는 곳이 지옥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아주 잘 나와 있어요.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는데 부자를 유념해서 봐야 돼요. 부자는 지옥 갔을 때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여주는지 잘 봐야 돼요. 부자를 보게 되면 부자가 죽기 전에 하던 행동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울산바닥에서 하던 행동이 그대로 간다면 지옥 갑니다. 왜? 나를 위해서 하는 나만 생각하고 내 행복만 생각한다면 그게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게 지옥이에요. 등신같이 아직 사태파악을 못한 겁니다.

천국을 보내줄 분을 사람들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깁스라면 결국 나의 태도나 나의 투쟁보다도 자기공명장치, 십자가에 둘러쳐있어야 돼요. 내가 생각한 나쁜 짓이 아니고 내 존재 자체가 죄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는 이상은 내 위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본성으로 완전무장 돼있다는 인지해야 돼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다는 에베소서 1장 7절 말씀이 유효하거든요.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은 자를 변호해야 됩니까, 은혜 주신 분을 변호해야 돼요? 어느 쪽입니까? 주신 분을 변호해야 되는데 우리는 너무나 자기 위주로 살다보니까 같은 동질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변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줬는데 숙제를 안 했어요. 그러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준 이유가 성적향상을 위해서 나중에 시험에 어떤 문제가 나와도 풀 수 있는 능력이 생기잖아요. 그것을 다 감안해서 숙제를 내줬는데 학생들이 피곤하다고 숙제를 안 해버렸어요. 그러면 학생들이 선생님 마음을 이해한다면 선생님 편을 들어야 돼요, 자기 친구 편을 들어야 돼요? 선생님 편들어야 마땅하단 말이죠.

그런데 애들은 자기 친구 편드는 거예요. 왜? 자기와 동질한 의식 때문에.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줬으면 인간은 이미 은혜를 받았고, 다른 말로 바꾸면 혜택을 입었단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주무실 때 잠잔다, 잠잔다 해서 잠 오지 않아요. 딴 생각하다가 아침 돼버렸어요. 그러면 그동안 누가 잠재운 거예요? 하나님이 하셨잖아요.

우리는 늘 혜택을 입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혜택주신 주님 생각 안 하고 혜택 받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관리할 생각부터 먼저 하고 있어요. 은혜를 깡그리 모독하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기겠다고 한단 말이죠.

혜택을 입었으면 이 혜택을 누구로부터 공급받았지, 누가 거저 계속 주시는 거야, 라고 그 관계를 생각해야 될 텐데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내 것으로 내가 원하는 내 인생 해보겠다. 전부 다 내가 들어가요. 은혜가 끊어진 상태니까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교회 한 번 나오세요, 하면 바빠서.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예요? 지금 바쁘다는 것은 몸이 안 아프다는 뜻이고, 몸이 아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다는 말 아닙니까. 정말 주시면 도대체 이 건강이 누구한테 왔지, 라고 교회 와서 나한테 어떤 절차에 의해서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밥 먹고 살고 은혜를 주느냐, 그 절차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되고 찬양해야 되는데 바쁘데.

주신 분은 깡그리 모독하고 지는 자기만 고귀하데. 자기만 고귀하고 지 새끼만 고귀하고 자기 집만 고귀하고 자기 부동산, 자기 통장잔고, 재산만 귀하다는 거예요. 자기 가치, 자기 의미만 귀하다는. 천국 갈 생각 안 하고 자꾸 지옥 만드는 일에 아주 혼신의 노력을 다해요. 그래놓고 또 피곤하데, 어깨 아프데. 지옥 만드는 게 피곤해요. 가고자 하는 지옥에 가려하면 악바리처럼 살아야 돼요.

하나님은 오늘 레위기 22장을 통해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을 개조하기 전에 그건 결과고 과정으로 철수하는 거예요. 양식으로 호출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그릴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 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제시한 양식에다 내가 너희를 호출하겠다.

그 양식은 제사장 양식이에요. 아까 22장 3절에 나오지만 하나님께 바치는 성물이지만 그것을 누가 놓느냐는 이야기가 레위기 22장의 흐름이고 주제입니다. 그 성물을 쓰레기통에 버릴 일이 아니잖습니까? 누가 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누가 먹는가? 제사장 가족만 먹는다.

그런데 제사장 가족에 딸이 있는데 딸이 시집가면 먹을 수 있느냐? 안 된다. 시집가면 제사장 식구가 아니고 남의 식구기 때문에 못 먹는다. 그러면 이혼하고 애 데리고 오면 먹을 수 있느냐? 그럴 때는 먹을 수 있다. 제사장 집에 있는 머슴들, 종들은 먹을 수 있나? 먹을 수 있다. 왜? 제사장과 한 식구니까. 그런 이야기가 쭉 나와요.

또 제사장이 먹을 때 부정 타는 건 못 먹는다. 8절에 보면,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고 돼있어요. 10절에, “외국인은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며 제사장의 객이나 품꾼은 다 성물을 먹지 못할 것이니라” 그러나 제사장이 돈으로 사람을 샀으면 성물을 먹을 수 있다고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레위기 22장에 쭉 나와요.

제가 서론적으로 이야기 안 하고 보게 되면, 옛날에 어떤 민족의 풍습이고 끝. 옛날이야기잖아. 그랬겠지.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돼버려요. 구약과 신약은 연결돼야 됩니다. 연결되는 방법은 히브리서에 보면 나와요. 구약은 작은 모형이다. 그리고 실체는 신약에서 이미 다 드러났다. 이렇게 돼있어요.

히브리서 1장 1절에 보면, 옛날에는 모형으로 선지자들로 이야기했는데 마지막에는 아들로 이야기한다 했어요. 이런 걸 설명하려면 참, 복잡한 경우가 있는데 그걸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오늘날은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는 말은, 선지자란 존재, 선지자라는 어떤 인물, 아들이란 인물로 일한다는 말이 아니고 선지자에서 하나님 쪽에서 뭔가 준 게 있어요. 그게 물건이에요. 제도나 물건이란 말이죠. 형식 같은 거예요.

선지자 눈에 보이고 아들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는 아들 믿고 옛날 선지자 믿었다. 이러면 안 돼요. 눈에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어떤 물건을 주는 거예요. 물건에서 기능이 나온다고요. 작용이 나와요. 여러분 잘 믿어지지요.

여기 레위기에서 제사장 양식을 함부로 먹으면 백성에서 끊어진다고 했거든요. 부정 탄다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사장 양식으로 천국과 지옥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천국과 지옥을 레위기 22장 당시에는 제사장의 양식을 통해서 천국은 이런 동네고 지옥은 저런 동네란 것을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호출이지요. 내가 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고 내가 지옥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따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여줘서 천국, 지옥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떤 물체, 물건을 제공한단 말이죠. 모형이니까. 시시해 보이지만 이 물건 함부로 먹으면 저주받아, 부정 타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선지자 얼굴 봐서 뭐 할 건데요? 아이고, 우리 제사장 얼굴이, 키가 몇 센티다. 그것 알아서 뭐 할 건데요? 우린 자꾸 천국과 지옥을 사람 얼굴 보고 가려고 하는데 얼굴 본다고 우리가 천당, 지옥 몰라요. 인물 훤하게 생겼으니까 천국 가는 목사인줄 알아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인물 훤한 목사들, 천사의 탈을 쓰고 꼬신다고. 왜냐하면 인물 좋으면 사람들에 먹어주니까. 목사 인물 너무 잘 생겼다. 거기 가보자. 사도 바울, 인물도 별로고 말도 잘 못하고. 말로 들을 때는 상상했는데 얼굴 보니까 실망했다. 실망스러우라고 사도 바울을 그러한 모양새로 주께서 쓰신 거예요.

사람들 약점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 보니까 내가 되고 싶은 조건들 있잖아요. 그 조건들 고대로 가지고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 써먹어요. 그게 취약점인 걸 몰라요. 내가 이렇게 되게 되면 나는 멋있다고 생각하는 데 내 멋있는 것을 저쪽이 가져가고 있네. 그러면 저 사람은 내가 기대하는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내게 없는 결핍된 것을 갖고 있으면 존경의 예우를 표시합니다.

그런데 이건 아까 이야기한 어려운 말로 존재 대 존재로 설명한단 말이죠. 하나님은 아마 너무나 어지실 것이다. 너그럽게 생긴 신이 있어요. 그걸 두 자로 ‘부처’라 합니다. 석굴암 가볼래요? 이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얼굴을 갖고 있어요. 관상학적으로 석가모니는 괜찮은 관상을 갖고 있어요. 귀가 축 늘어져있어요. 추를 달았는지. 얼굴은 하얀데 인자한 얼굴이에요.

우리는 바로 그런 마귀를 우리의 메시아로 구세주로 선호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인물 찾지 말고 지옥이나 천국이나 결정타를 날릴 재료를 찾아라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성경에 율법입니다. 율법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제사장에게 있어서 율법은 깁스, 완전히 둘러쳐버렸어요. 제사장은 인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어떻게 누락 없이 생생하게 율법의 기능이 작용해 나오느냐 이게 관건이에요.

그리고 제사장에게 호출 받는다는 것은 율법에 호출 받는 것과 동일한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지옥 가는지 어떻게 해서 천국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제사장이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경험담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그거는 제사장 역할을 못하는 거예요. 제사장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의 기준만 제시할 뿐이에요. 그리고 그 기준은 제사장이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자기 위신 챙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집에 사람을 초청하잖아요. 어떤 가정주부는 자기가 음식을 너무 잘해서 그걸 자랑하고 싶어서 친구들이나 친척들한테 그게 양식에로의 초청으로 보면 돼요. 그래서 오늘 레위기 22장은 양식에로의 호출이에요. 그 양식은 누구 양식이냐 하면, 제사장을 먹여 살릴래, 말래를 요구하는 거예요.

만약에 백성들이 성물을 주지 아니하면 누가 굶어죽느냐 하면, 제사장이 굶어죽어요. 아이고, 이스라엘 제사장이 굶어죽기야 하겠습니까, 하는데 굶어죽었어요. 왜 그러느냐? 사람은 제사장 위주가 아니고 내 새끼, 내 가족, 내 입, 내 몸 중심이거든요. 우선 나부터 살고 그 다음에 제사장 챙기기.

그런데 그러한 극한 상황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유발해 만들어버렸어요. 마음 같으면 하나님 일하는 제사장 챙기고 싶고 먼저 우선하고 싶지요.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 외에 남을 먼저 챙기는 생리적으로 그렇게 태어나질 않았어요. 친구 믿지 마세요. 결국 친구가 사기 칩니다. “우리 친구 아이가.” 해도 소용없어요. 보증 서달라는 이야기거든요. 술 한 잔 먹으며.

세상에 친구라는 게 없어요. 친구는 내게 이익이 있다고 생각할 때만 그 순간만 임시적 일방적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 앞에 뭐가 붙어요. ‘내’ 친구에요. 아무리 친구라도 나를 떼어놓고 친구 없습니다. 내 친구입니다.

여자들이 결혼하고 다른 여자 친구한테 자기 남편을 뭐라고 소개합니까? 물론 남편 없을 때 주로 그런 이야기하지만. 내 것이다. 점잖게 이야기한 거예요. 경상도 말로 내끼다. 저 남자 내끼다. 손대지 마라. 만약에 그 현장에 남편이 있으면, 내가 고양이가, 개가?

그래서 남편이 있는데 여자가 다른 사람한테 설음당하면 남편이 지켜보고 있으면 아내가 남편한테 화가 나는 거예요. 왜? 당신의 물건인데 당신 소지품에 남들이 손대는 데 당신은 왜 가만있느냐? 우리 남남이야? 이렇게 놀리다 막 비약되는 거예요. 평소에 네 것인데 왜 간수를 제대로 못하느냐, 이런 뜻이에요.

사물이란 주인의 가치가 확장되는 게 사물이에요. 내 손수건, 내 젓가락, 내 가방. 가방이 저쪽에 있고 내가 여기 있더라도 누가 가방 만지면 나를 만진 게 돼요. 하나님께선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장시키는 거예요. 제사장을 소홀히 하는 것은 곧 누굴 소홀히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왜? 제사장을 통해서 율법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 핵심이 뭐냐? 제사장이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럼 제사장이 살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성물이 나오잖아요. 거룩한 물건, 제사장이 먹는 양식이 나온단 말이죠. 양식이 나오면 그 다음부터 백성들은 제사장 양식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내 양식부터 먼저 챙길 것이냐, 아니면 제사장 양식이 우선이냐, 하는 겁니다. 그러한 도전에 직면해 있어요.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느냐 하면, 너는 너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그런 식으로 계속 테스트 해나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죄 있는 인간이 죄 있는 인간인 체로 천국에는 못 가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했던 것 다시 해봅시다. 공식에 의하면 죄가 있는 인간은 어떻다 했습니까? 무조건 죽은 자에요. 그리고 인간의 죄는 본인으로 하여금 무조건 지옥 가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옥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세계기 때문에. 나를 위한 세계가 지옥이에요.

이것은 거지 나사로 앞집의 부자가 시범을 제대로 보여줬지요. 세상에서 하던 행세가 그대로 이어져 가는 겁니다. 죽고 나서도. 왜?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 살았지요. 죽고 난 뒤에 그 행세가 어디 갑니까? 맨 나를 위해 살아요.

그래서 아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우리가 부러워해선 안 된다. 부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측은히 여겨야 돼요. 안타까워해야 돼요. “아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남편은 교회 안 다니고 아내만 교회 다니면 남편들이 하는 소리가 있어요. 내가 교회 안 가더라도 네가 가서 날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라. 이게 복음을 안 들어봐서 그래요.

주여, 이런 생각이 지옥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 복음인데 그 남편은 교회 가는 걸 절에 가는 것과 똑같이 취급하는 거예요. 가서 비는 것. 왜? 드라마에 나오는 성당이나 교회는 그런 식이거든요. 소설 작가, 시나리오 작가들이 교회에 대해서 뭘 압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가끔 드라마에서 교회 장면이 나오지요. 그때 교인들이 모여서 찬송가 부르는 대목이 나올 거예요. 찬송가 부를 때 취사선택된 가사를 보세요. 거기 죄가 안 들어가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 이야기뿐이에요. 작가가 그런 걸 쓸 때도 전혀 복음을 몰라요.

우리나라 인권위원회에서 숭실대학교에 강력하게 요구했어요. 대학교 직원 뽑을 때 절대로 기독교 신자인지 차별 두지 말고 뽑으라고. 숭실대학에서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기독교 정신으로 세운 취지가 그런데 기독교 신자 안 뽑으면 불교 신자 들어오면 뭐냐? 인권위원회에선 그게 인권이다. 인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성경에 무슨 인권이 나와요. 안 나오잖아요.

개인주의를 인권이라 해요. 개인의 가치는 어떤 것보다 귀하다. 그게 인권주의에요. 그러면 이 땅에서 인권주의가 만들어내면 결국 지옥이잖아요. 그러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은 살아 있으면서 계속 지옥의 세력과 싸울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나 위주거든요.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누구 위주입니까? 율법의 완성 위주에요. 왜? 제사장이니까. 율법의 깁스, 율법에 칭칭 감겼으니까. 죄가 있는 자는 자체가 죽은 자고 주께선 죽은 자는 천국에 못 넣으니까 율법을 통해서 죄를 없애주는 기능이 계속 발산되어 나왔다는 그 과정을 자기 몸을 통해서 발산해야 되는 그런 위치에 자리에 있는 것이 오늘날 성도란 말이죠.

나만 챙기고 나밖에 모른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피 흘리게 만들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계속 알려주는 그 역할, 기능이 뭐냐? 성도의 기능이거든요. 그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 혼자 살지만 하나님 율법의 완성, 복음에 의해서 성도는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여러분, 부르심을 받은 게 뭡니까? 김 대리, 사장님이 부르신다. 이거잖아요. 김 선생님, 교장 선생님이 부르시던데. 이게 호출이죠, 호출. 성경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니까 이것도 너무 상투적이라서 이제 의미가 쇠퇴했어요. 그냥 호출한 거예요.

옛날에 허리춤에 차는 것 있지요. 삐삐. 삐삐 치듯이 항상 우리에게는 호출할 기계가 내장돼있다 이 말이죠.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그 과정 속에 내 일은 없어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누가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에요. 내 일은 없어요. 율법 완성의 일이고 복음의 일입니다. 양식에로의 호출.

자, 양식에로의 호출의 의미가 뭐냐 하면, 너 살래, 제사장 살릴래? 이 이야기에요. 네가 양식 필요한 건 아는데 제사장도 양식 필요하다. 어느 양식이 우선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제사장도 그렇지만 나부터 우선이지요, 라고 했을 때

출애굽기 16장을 봅시다. 거기에 광야의 만나 이야기 나오지요. 만나는 땅에서 시작한 양식이에요, 하늘에서 내려온 거예요? 하늘에서 내려왔지요.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남자만 사십 만 되는 이스라엘 집단은 양식을 어디서? 지가 농사 진 게 아니죠. 위에서 내려온 거죠. 위에서 내려와서 그들의 양식을 먹었다면 광야 사십 년을 견뎌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에서 살려준 거예요.

하늘에서 살려준 그들, 그 양식이 레위기 22장에 들어오면 이제는 구체화되는 거예요. 그 내용이. 네가 준 양식이 그때는 드롭프스 같다, 빵 같다, 과자 같다 하지 이제 구체적으로 진도 나가볼까? 그 만나는 누구의 희생 때문에 생긴 만나였음을 제사장을 통해서 희생제사 작업에 종사케 하고 거기서 발생되는 제사장의 양식이란 강조점은 옛날 광야의 만나와 같은 계열인 것을 백성들이 고백해야 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실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시고 난 뒤에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6장 33절에,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이 떡은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고 예수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발생된 살과 뼈, 예수님의 살과 떡이 광야의 만나의 완성으로서 제시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의 살과 떡을 먹는 사람은 레위기 22장의 제사장의 가족이 되는 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가족의 되는 겁니다. 그것은 공통된 양식을 먹고 마시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경쟁적으로 우선돼야 될 양식은 바로 우리가 육체를 위해 먹는 탄수화물, 단백질이 아닙니다. 지방질이 아니에요. 비타민, 오메가3 아닙니다. 우선되는 것은 예님의 떡이에요. 예수님의 하늘의 만나 같은 양식입니다. 그러면 양식은 어떻게 해서 신약까지 이어지는가? 그건 10분 쉬고 할게요.



20190405b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양식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에서 제사장의 양식을 백성들이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제사장이 욕심이 많아서 된 게 아니고 그들의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께선 인간 중심이 아니고 양식 중심으로 나가는 거예요. 이게 특이한 것이, 양식이란 말이 사람이 아니고 양식으로 본다는 말은 누구한테 잡아먹히란 거예요. 희생의 의미가 담겨있어요.

양식의 특징, 만나의 특징은 있더라도 누가 먹고 날아가 없어지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누구를 살리기 위한 양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죄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천국은 죄를 원치 않아요. 그럼 중간에 누가 등장해서 있는 죄를 없애는 방식이 새롭게 여기에다 부가가 돼야 돼요.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가 없는 곳에는 기쁜 소식, 복음이 의미가 없어요. 죄를 모른다는 것은 복음도 같이 그 현장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나타낼 때는 반드시 복음만 나타나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내 죄를 동반해서 나타내게 돼있어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바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지적하고 책망을 해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책망과 더불어서 책망하는 이유가 바로 복음의 가치가 너의 존재의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그러면 성도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잊는 동시에 감사로 이어지지요. 이걸 말로 하니까 복잡한데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준 거예요. 신명기 8장에 보면 만나를 말씀이라고 했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신명기 8장 3절에 나옵니다. 사십 년 동안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만나를 떡으로 하게 되면 네 입장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떡을 달라 했지만 하나님은 떡을 주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준 거예요. 그 말씀이 사람들 보기에 마치 양식이 내려오는 것처럼 만나가 내려온 겁니다. 이 만나는 말씀이죠. 그래서 여기서 만나를 주면서 만나를 먹는다가 돼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먹는다고 바꿨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에서. 제가 바꾼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꾸어서 설명해준 거예요. 말씀을 먹는다는 거예요.

문제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물컹물컹한 물체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만나가 끊어진 상태에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겁니다. 만나는 물체니까. 그러면 만나가 말씀이 되는 과정 속에서 여기에 만나를 대신할 다른 사물체가 계속 투입이 돼야 돼요. 만나는 끊어졌으니까 만나를 대체할 다른 투입이 오늘 본문에서 그걸 제사장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제사장의 양식을 언급하면서 초반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제사장의 양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잡수시는 음식, 하나님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란 말이죠. 이걸 성물이라 하는데 하나님이 먹는 거예요. 하나님이 먹는데 실제로 누가 먹어요? 제사장이 먹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먹는 것과 제사장 먹는 것이 연결되려면 제사장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시는 지시에 종속돼야 돼요.

제사장이 자기 먹고 싶다고 짬뽕 시켜서 될 문제가 아니고 양식 하나하나에다 전부 다 하나님의 음식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맞추어서 제사장은 먹어야 됩니다. 먹게 되면 제사장은 생존이 돼요. 제사장이 생존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물로 제사장이 설치고 다니는 거예요. 설친다는 것보다도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제사장을 하나님처럼 보겠습니까, 같은 인간으로 보겠습니까? 같은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자기와 라이벌 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리 제사장이 좋은 일 하지만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고 나오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계속 사건을 유발합니다.

어떤 사건이냐 하면, 저는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제사장 섬기겠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입에 발린 소리 백날 하더라도 막상 사건 하나 탁 터져버리면 하나님 원망하고 제사장은 뒷전이고 우선 내 가족부터 먹고 살겠다고 본색을 드러내죠. 본색을 드러내는 게 하나님의 실수가 아닙니다. 본인의 실수가 아니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죄 사함이 등장하려면 반드시 죄가 등장해야 돼요.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인간은 죄를 안 짓습니다. 인간이 죄를 안 짓는 이유가, 항상 인간에게는 선과 악, 두 개의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악을 짓더라도 선을 통해서 얼마든지 악을 덮어버리고 핑계를 댑니다. 악이 다섯 개라면 선을 여섯 개 해서 6-5=1, 나머지 하나 만큼은 역시 선했다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인간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뉴스를 통해서 계속해서 그렇게 해요. 속초에 어떤 집이 산불로 탔다. 어지간히 나쁜 짓고 많이 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평소 우리의 선악 논리에 의하면 아직도 우리 집이 불에 타지 않고 멀쩡한 것은 그만큼 내가 착하다는 반증이라고 보는 거예요. 본인 스스로 그렇게.

인간의 본심은 어떤 식으로라도 의인으로 자꾸 돌려세우는 그러한 방식은 이건 배웠든 못 배웠든 관계없이 성깔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무기수로 잡힌 험악한 인간이라도 항상 변명거리와 핑계거리는 늘 입에 달고 다닙니다. 어떤 인간도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어요. 나쁜 짓 할 수 있고 실수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나쁜 인간은 아니고 근본적으로 죄인은 아니라는 그것이 우리 안에 철썩 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지옥 가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요. 열심히 살아가는 데 열심히 살면 살수록 그것이 점점 더 나를 의롭고 가치 있게 만들어버리죠. 우리는 늘 생각하지요. 내가 죄 안 지은 지 너무 오래됐다는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군에 가기 전에 잠시 술 먹고 그때 이후로 기억이 없네. 정말 우리는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죄 진 기억이 안 나요.

그래도 가끔은 반성하는 데요. 이러거든요. 그것은 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말 죄라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자기가 지금 죽어 마땅함을 아는 게 죄에요. 모든 부동산, 동산, 자식들 다 놔두고 지금 하나님께서 벼락 내려서 나를 산불로 죽인다 할지라도 저는 감사합니다. 이 정도 돼야 죄인이죠. 이건 심하지 않습니까? 이건 아직도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잘난 맛에 사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의 모든 행동이 나 잘났습니다, 하는 행동이에요.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려도 미치겠다. 그림을 왜 이렇게 잘 그리지? 찬양해도 왜 소리가 그렇게 잘 나오는지 몰라. 컨디션 괜찮아. 예배 참석하다니 기특하다. 바쁜 중에도. 이런 식으로.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자기가 감상하면서 흐뭇해하면서 그러니까 아직도 나는 살아야 될 자격이 있고 살아야 될 이유가 있는 거야. 자기 존재감, 자존감 챙기는 데 급급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라고 그런 사람 추천할 사람 있습니까? 제가 1분 만에 그 사람 분노케 합니다.

건드려서 화 안 내는 사람 어디 있어요. 건드리면 화내게 돼있고 화낸다는 말은, 내가 이 정도까지는 욕 얻어먹을 입장 아니라고 뭔가 마지막 꼬불쳐놓은 게 있어요. 딴 건 다 건드려도 좋은데 내 자식만큼은 건드리지 말라. 이런 것 있잖아요. 나는 욕해도 되는데 내 아들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 그런 게 있어요.

이건 누구 개인 이야기지만 어떤 가족이 은퇴해서 말레이시아에 살겠다고 미세먼지도 없고 몸도 아프신데 좋다고 친구와 같이 했는데 당신 아들이 목사니까 여기서 목회하라 해라. 그래놓고 목회하는데 돈 좀 투자해야 되지 않느냐, 아들이 지가 알아서 전도해야지. 이 소리했다고 뿔따구 나서 그 친구가 짐 싸들고 한국에 돌아오게 돼요.

딴 건 다 좋은데 내 자식, 내 아들 건드리면 용서가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게 했습니다. 꽁꽁 숨겨놓은 그것마저 내놓지 아니하면 너는 네 잘난 맛에 살아가는 지옥 가는 인간일 뿐이란 말이죠.

아무리 건성으로 형식적으로 종교를 언급하고 복음을 언급해도 주여, 이것만큼은 못 놓겠다는 것이 있다면 아직 멀었다. 그건 신앙이 아니라는 거예요. 신앙이란 고귀한 것이 너한테 준 그것이 고귀하지 네가 갖고 있는 것은 고귀한 게 아니에요. 아무리 좋은 것도 우리 안에 갖고 있으면 썩어버리는 우리는 타고난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양식을 중심으로 아까 호출한다 했지요. 모든 백성들을 네 양식 위주가 아니고 제사장 양식 위주로 율법의 모델로 삼아서 딱 제시하게 됩니다. 제시하면서 제사장과 다른 백성을 차별화시켜 버려요. 제사장 받는 음식과 일반인이 먹는 음식을 차별화시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제사장이 있다면 제사장이 제사장답게 되는 기능은 제사 기능이에요. 제사 기능을 하지 않으면 제사장이 안 되지요.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사 기능은 죽음의 기능이에요. 그러니까 제사장의 양식이라는 것은 그 과정에 무슨 절차가 있느냐 하면, 참된 억울한 죽음이 있고 난 뒤에 비로소 나타나는 양식이에요. 억울한 죽음에 참여한 자에게만 얻을 수 있는 양식이 제사장 양식입니다.

억울한 죽음이 뭐냐? 억울한 죽음은 반드시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죄와 만났을 때 이게 억울함이란 사실이 밝혀져요. 세상에 억울함에 두 가지 있잖아요. 하나는 내가 잘났는데 당하는 억울함이 있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억울함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일이 벌어진 억울함이 있어요.

이런 예를 들어야 쉽게 되겠지요. 내가 아침부터 제일 일찍 와서 노동을 했는데 농땡이 부려서 마지막 퇴근 시간에 한 시간만 달랑 일하고 임금 십만 원 받고, 나는 아침부터 새빠지게 일했는데 십만 원 받고. 이게 상대적인 억울함을 느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당하는 억울함인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늘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이 착한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뭐 아무리 월급을 받고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줘도 항상 내가 생각한 목표에 미달돼요. 하나님이 월급 더 주시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가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하고 했으면 그 다음 주일에는 적어도 곱빼기 교인들이 와줘야 자기가 덜 억울한 걸 느끼는 거예요. 왜? 투자한 노동이 많기 때문에. 이만큼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교인이 늘지 않고 줄어든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지옥 갈 인간들의 억울함이에요. 전제가 뭐예요? 나는 대우받아 마땅한 의인이다. 이 억울함.

그에 반해서 어떤 억울함이 있느냐 하면, 본인이 억울한 것도 몰라요. 집에 부도가 나서 짐 싸서 이사 가게 됐다면 애는 부도난 것도 모르고 쫓겨난 것도 모르고 다만 이 동네 살다가 다른 동네로 가서 친구 만난다는 그것뿐이죠. 어른들 하는 일에 휩싸여서 그냥 이동해서 집을 떠났을 뿐이란 말이죠.

그런데 떠나는 아이 붙들고 이웃들이 너 얼마나 억울하겠느냐. 아버지가 억울하게 부도 당했단다. 아버지는 죄가 없는데 다른 사람이 사기 쳐서 그렇게 됐단다. 너 참 억울하지? 그럼 애가 하는 말이, 난 새로운 친구 만날 거예요.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 증거 하라고 지금 이런 상태로 주께서 삶을 살도록 이끄신 겁니다. 성도는 부르심을 입었으니까 호출 받았으니까. 남들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본인은 골프 치고 있어요. 물론 골프 치다가 손에 굳은 살 배기는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여러분, 어느 쪽의 억울함입니까? 억울한 줄도 모르고 늘 감사하는데 주님 보시기에 복음 안에서 고난이고, 한쪽은 빡세게 입만 떼면 주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데 항상 입은 튀어나오고. 맨날 울고 있고. 새벽제단 두드려 가면서 콧물은 앞에 다 흘리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여. 다 바쳤잖아요. 더는 못 내놓습니다. 십일조 내놓고 자식 신학교 보내고 다 내놨고 예배당 다 했는데 세상에 우리 사업이 이렇게 꼬라박을 수 있습니까, 이럴 순 없습니다. 맨날 이런 억울함. 데모인지 억울함인지 어디 하늘나라에 민노총 등장했어.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못 놔서 그래요. 성경은 사람 위주가 아니고 양식 위주입니다. 내 위주가 아니고 양식 위주에요. 내 위주가 아니고 네가 누구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주의 복음입니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있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양식이고, 그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양식이 우리거든요.

흔히 우리 보고 양식이래. 남을 살리는 양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내가 양식 먹어야 되는 주인공 역할 했는데 이제는 내가 필요한 주인공은 우리도 몰라요. 주께서 누구와 붙여줄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사람 천국 보내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종으로 부리니까 희생물로 부리니까 저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 이미 구원받은 우리를 사용하시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양식으로 희생된 그 절차를 성도도 똑같이 밟아가는 거예요. 그게 제사장입니다. 사람 위주가 아니고 양식 위주가 되는 거예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어렵다 해놓고 하나도 안 어렵다 하는데 진짜 어려워요. 양식이 주어지게 되면 나 예수님의 생명의 떡 먹고 구원받았다. 이건 아니에요. 이거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거는 자기 위주에요. 양식이 주어지게 되면 나가 없어지고 비-개인이 돼요. 또는 비-개별. 내가 개별자, 개인이 아니에요. 누구한테 쓰임 받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관계. 이 말이 쉬워 보이지요.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쓰임 받는 관계는 모든 계획의 구체적인 것에 있어서 그 시도를 내 쪽에서 하는 것을 주께서 용납을 안 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기를 낳았다. 젖을 먹여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 엄마 보통 편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주신 아기를 젖 먹이고 잘 키워서 공부시켜서 하나님의 훌륭한 주의 종 만들겠습니다.

그게 잘못인 거예요. 걸핏하면 억울하다고 호소할 것이니까. 그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이미 양식화시켜서 아기를 낳게 하고 아기가 우니까 젖 먹이는 희생을 하라고 젖 먹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것은 항상 어떤 일어난 일이 내가 구상하고 내가 설계한 게 아니고 주께서 설계한 대로 진척을 보일 뿐이에요. 우리는 거기에.

주어진 상황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 되겠어요? 이미 주의 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데 우리는 그 벨트에 말려든 거예요. 어떤 노동자가 벨트에 말려 죽은 사람이 있지요. 우리는 돌아가는 화력발전소 벨트에 말려든 거예요.

어렵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쉽게 생각하면 사도 바울과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그 사람들은 자기 일 없어요. 심지어 이렇게 해요. 나는 내 일을 버렸다 했어요. 내 일을 버렸다 해놓고 천막 만들고 있단 말이죠.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가 세상사는 버릇이 항상 시작을 내가 시작할 때만 의미가 생긴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시작하고. 내가 시작하게 되면 그 결과도 내가 성취됐는지 측정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양식으로 말미암아 비-개인이 되려면 양식은 뭐가 되느냐 하면, 교체와 교환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양식을 주신 분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냈다면 그 과정에서 누가 부정돼야 돼요? 내가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부정돼야 되겠지요. 부정될 때 새로이 신자가 된 이 사람이 나를 쳐다봐야 되겠어요, 주님을 쳐다봐야 됩니까? 주님을 쳐다보도록 해야 주의 일이 돼요. 인간은 인간을 구원 못하니까. 죄인이 무슨 남을 구원해요. 주님만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가 있었지요. 거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가게 됩니다. 주께서 보낸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여 보면서 주께서 아미 당신을 걷게 하셨습니다, 낫게 하셨습니다, 라고 할 때 그걸 쉬운 말로 주의 이름이라 해요. 주께서 이미 당신을 성도라고 했습니다, 라고 통보하는 순간 그 사람은 걷게 된 거예요.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냅니다. 만약에 거기서 베드로가 주의 이름으로 걸으라 할 때 그 사람이 안 걸었으면 구원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문제 간단합니다. 문제 되게 쉬운데 둘 중에 하난데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냥 앉은뱅이로 앉아있을 수가 없어요. 주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주의 능력을 다시 재확인하는 그러한 경우들을 주께서는 성도와 성도의 만남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깨닫게 하는 거예요. 추가적인 선물을 주는 게 아니고 깨닫게 하는 거예요. 네가 누리고 있는 형편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환경인지, 네가 좋아하는 출세에 좋은 환경이 아니고 여전히 너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여전히 너를 하나님 백성으로 다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그런 입장에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산림청장이 있다 합시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느냐? 내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골프 좋아하고 바둑 좋아하고 낚시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그 사람은 출근도장 찍고는 맨날 골프 치고 놀러다닙니다. 예를 들어서. 그런데 강원도에 산불 나서 양복 벗고 공무원들 입는 노란 작업복입지요. 열심히 일하는 티내려고 헬기 타고 산불현장에 나타났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뭘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낚시 광이고 골프광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산림청장 값을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재주가 지옥 가는 것 내 무덤 파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개입하고 관여하면 졸지에 남을 살리는 양식으로 변한다니까요. 내가 했다면 그건 신자 아니죠. 누가 한 겁니까? 주께서 나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아느냐? 성도기 때문에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은 그걸 설명해도 몰라요. 다른 보기엔 굉장히 겸손해 보이지 진담인 줄 몰라요. 성도는 진짜 진담인데.

아무 쓸모없는 인간으로 쓸모없지요. 왜? 지밖에 모르는데 무슨 쓸모 있겠어요? 아무 쓸모없는 인간으로 남을 구원하는 데 쓰였다면 그 시작부터 계획부터 과정까지 전부 다 누구의 작품이에요? 주님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럼 누가 은혜 받습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은혜 받아요, 한 마디 했던 본인이 은혜 받아요? 본인이 은혜 받는 거예요.

갑자기 없던 본인이 은혜 받으면서 뭘 아느냐? 본인이 그동안 몰랐던 죄를 다시 한 번 새겨보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죄 용서가 있지요. 죄 용서가 내 자식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한 2초 동안 그렇게 아는 거예요.

살아온 것만 해도…, 무슨 욕심을 부리면서 새벽제단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지르면서 철야기도하면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그게 죄인 줄 몰랐지요. 목돈으로 헌금한 게 죄인 줄 몰랐고 남한테 전도해서 교회 오라고 한 그게 죄인 줄 몰랐어요. 전부 다 죄 아닌 게 없어요. 내가 시작한 일이거든요. 자식에게 예수 믿으라고 한 그 소리도 죄인 줄 몰랐던 거예요.

내가 아무리 꼬셔봐야 한 사람도 구원 못합니다. 그리고 성도한테는 태만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게으름뱅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아침 열시에 일어나서 밥 먹고, 배부르다고 잠 한숨 자고 오후 세시에 점심 먹고, 저녁에 운동하고 열시에 드라마 보고 난 뒤에 그냥 자요. 그것 성도 되게 부지런한 거예요. 무지무지 부지런한 거예요. 주께서 그걸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지는 천당 갔다고 우기니 이런 느긋함과 뻔뻔한 사람 봤습니까? 그거는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얼마 후에 집에서 쫓겨나고 대출 못 갚았고 나중에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도는데 순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장례식 때 복음을 아는 목사가 이렇게 하지요. 태어나면서부터 게으름뱅이로 태어난 것이 주의 일을 위함이라. 이런 식으로. 그렇게 설교할 수 있다면 목사가 그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돼요.

그 사람 평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평하는 겁니다. 사람이 부지런하다고요? 부지런함의 기준이 뭡니까?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는 게 부지런한 거예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게 부지런한 겁니까? 새벽 네 시,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것이 부지런하다는 것은 인간이 아직도 선과 악을 못 벗어난 그 잘남을 못 버리고 그 미련을 못 버린 거예요.

이러면 그건 남의 양식이 될 수 없어요. 주님의 다 깨어진 그 양식과 동일한 질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걸 포기했어요. 그래 저주받을게. 이게 주님의 양식이거든요. 주님의 양식 안에는 저주가 들어있어요. 나는 저주받을만하다. 이게 양식다운 거예요. 나는 남보다 더 잘 살아야지, 더 승진해야지. 이게 아니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없어요. 나는 지금 저주받는다 해도 지옥 간다 해도 할 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성도의 본래의 자세에요. 이게 없으니까 감사가 없고 고마움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제 뜻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더 극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학생이 편의점에 가서 보름달 빵을 훔쳤을 때 현장에서 잡혔어요. 왜 그런 짓을 했냐 하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했어요. 그것이 형량 감경하는데 도움 안 돼요. 이것 되바라졌다고 판사가 미워서 3년 때릴 걸 5년 때립니다. 억울하지 않느냐? 천만의 말씀. 5년 치게 한 것도 주의 뜻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나한테는 선과 악의 논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주께서 보름달이란 빵을 훔치는 계기를 저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만약에 성령을 안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빵 값을 돌려드리겠다고 나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뭐가 되냐 하면, 비록 악을 행했지만 그 사람이 행했던 선이 악을 이김으로써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교회 다니는 참 착한 학생이라고 평 받았을 거예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모습은 남들 보기엔 욕 얻어먹을 죄지만 그것을 주의 일로 생각해서 오히려 감사의 계기로 삼는다는 것, 그런 발상이 생긴다는 것.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양식 안에는 주님이 들어오는 순간 나와 동거가 되고 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 일을 시키지 않잖아요. 주께서 죄인을 가지고 일하지 죄인에게 네가 앞장서서 일하라 하진 않잖아요. 나를 잃어버릴 계기가 되기 위해서.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의 일을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20년, 30년, 50년 사는 것은 주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닌 겁니다.

왜 이렇게 제사장을 언급하느냐? 제사장이 죽음과 관련된 이 일이 신약에 오게 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로 구석구석 확산이 돼버려요. 확대가 됩니다. 옛날 구약의 제사장은 제사장 가족만 먹는 음식과 일반인이 먹는 음식을 구분했잖아요. 그것이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모두 제사장이 돼요.

제사장이 되면서 그 다음부터 입으로 들어가는 양식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모든 삶이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내 양식이 아니고 주님의 양식 되게 하는 그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재료가 돼요. 호미로 밭의 잡초를 뽑는 그것도 주의 양식에 포함되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됐으면 교회 일만 찬송 부르고 예배 참석하고 주의 일이 끝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이라고 하는 모든 생활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낮추시고 나의 죄를 깨닫게 하는 그 일상 전체가 주께서 다른 사람,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한 제사장적 기능의 일부로 사건을 유발시켜서 우리를 만나는 사람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도가 하는 일이 복음과 무관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레위기 22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에게 온전히 드려야 되는데 이것이 나중에 제사장이 핍박을 받지요. 제사장에게 십일조 안 하고 그래서 그들이 흩어지게 돼요.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백성들은 믿음이 없지요. 믿음이 없다는 말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단 뜻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이 귀한 줄 모르고 자기 생존만 급급한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그들은 언약을 잊었도다. 언약을 잊은 것을 너희들은 언약이 없는 여호와, 다른 신을 섬기는 거예요. 여호와든 신이 되던 언약이 빠져버리면 다른 신이 되는 겁니다. 언약을 챙기려면 제사장의 희생을 염두에 둬야 되는데 제사장의 희생, 아까 이야기한 억울함, 제사장 안에 있는 주님의 희생과 억울함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죄인을 의인 만들기 위해서 대신 희생한다는 그 정신이 없고 내 것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세상으로 퍼진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에게 가서 내 양식 돌려줘, 이렇게 해야 됩니까? 아니면 소위 자기밖에 모르는 시대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등장한 제사장도 이미 물 건너가고 자기 살 궁리 찾는 입장에서 사사기나 룻기에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다시 말해서 언약을 모르는 이 이스라엘 속에서 누가 등장하겠어요? 언약을 아는 이방여인이라든지 희생자가 등장하겠지요.

그러니까 제사장이라는 형식화된 종교 틀에서 알맹이가 쏙 빠지면서 제사장이 갖고 있던 죽음과 관련된 것이 희생과 억울함과 관련된 일이 실제로는 일반인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의한 희생자로 등장한 자로 등장했으니 그게 룻기에선 모압여인 룻, 그리고 나오미, 사사기에서는 사사들. 그리고 사무엘상에선 한나, 그리고 사무엘.

구약에서 신약까지 이어지면서 예레미야, 이사야 계속해서 고난 받는 그런 모습들이 등장하지요. 엘리야, 엘리사 그 사람들 속에 제사장 양식적인 정신이 그 안에 장착돼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억울한 죽음을 그 안에 미리 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신약에선 누구 차례겠어요? 저와 여러분 차례지요.

강원도 산불 났는데 안타깝지 않느냐? 전혀, never. 왜냐하면 욥기에 보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간 자도 하나님이다. 평소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가스 불도 안 틀었는데 집이 오래 돼서 방전되어 홀랑 불타고 자기 집만 날아가면 괜찮은데 윗집, 아랫집 다 물어줘야 될 때 노후대책으로 연금 타던 것 다 토해낼 때 억울하십니까? 지금이라도 주께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권한이 계십니다.

왜 그렇게 안 했습니까? 그거는 조작된 희생자거든요. 뭔가 멋있어 보이는 희생 있잖아요. 에티오피아에 선교사로 간다든지 소말리아에 선교사로 죽으면 죽으리라. 이거는 건성으로 보이는 희생이잖아요. 가짜지요. 지금 멀쩡히 한국 땅에 잘 살고 있으면 이게 희생인데 따로이 뭔가 소설을 쓰고 있는 거예요.

희생이라도 이왕이면 멋있는 희생. 자꾸 그런 걸 염두에 둔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잘났다는 것을 아직도 포기 못하고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밥 먹고 너무 운동 안 해서 똥배 나온 희생. 그 희생은 왜 생각 안 해요? 춥다고 안 나오고 미세먼지라서 안 나오고. 운동 안 한지 몇 개월 돼서 갑자기 나오는 이것, 이게 얼마나 큰 희생입니까, 임신 몇 개월도 아니고.

왜 사람들은 자기 잘남을 유지해야 천당 간다고 그러한 망상들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율법으로 말씀으로, 아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잖아요. 말씀으로 깁스해야 돼요. 말씀 안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됩니다.

지구가 이렇게 있습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번개, 지진 모든 것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 다른 말로 언약이거든요. 언약 완성에서 일어난 일이란 말이죠. 그럼 어떤 집에 있다가 벼락 맞았다. 이건 어디서 온 거예요?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신약성경 찾아봐야 돼요.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고린도전서 3장 21절부터 23절까지 읽어보세요. 사도 바울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아멘. 여기서 개인이 아니고 비-개인이 나와요. 너희, 집단이 나와요. 개인의 나라는 지옥 갑니다. 아까 그 부자처럼 지옥 가서도 개인 것만 챙기고 있어요. 그러나 천국은 중간에 개인이 없어졌어요. 뭐냐 하면, 개인에서 하나님의 양식으로 달라진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제사장의 죽음 속에서 제사장은 날마다 자기를 죽여야 되니까. 내가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니고 나에게 율법에 주어진 이 일을 제사장이 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에게 양식을 제공해야 된다는 것이 레위기 22장 이야기거든요.

이게 어디로 이어졌다 했습니까? 오늘날 신약 성도에게 그대로 주어졌잖아요. 개인이 생존하려고 살아가는 사람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에요. 성도의 모습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번개나 지진이든 산불이든 뭐든 간에 다 누구의 것이다? 다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뭘 자랑하지 말라 합니까?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을 의식하지 말라. 남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못 사느냐, 그렇게 의식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꾸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이 죽어버렸는데 비교할 게 뭐가 있다고 남과 비교합니까.

제가 어디서 그런 강의했는데 잊어버렸어요. 이런 이야기했지요. 악마가 와서 거래하자는 거예요. 네가 내 말만 들으면 네 소원 이뤄줄게. 이렇게 할 때 우리가 그 악마와 거래할 이유가 없는 게 내놓을 목숨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목숨만 살려 달라 하는데 이미 목숨이 없는데 저쪽에서 뭘 주면 내 쪽에서 뭘 내놔야 되는데 내놓을 목숨이란 게 없어요. 이미 죄 지은 인간은 죽은 인간인데 죄밖에 내놓을 게 없는데 죄는 악마가 안 받잖아요. 내놓을 게 죄밖에 없는데 뭘 거래해요, 뭘 교환합니까?

그러니까 악마가 와도 입맛이 없는 거예요. 재미가 없어요. 주고받고, 네가 이렇게 하면 실익이 있고 이익 있다고 하는데 이익이고 실익이고 내놓을 게 없는데 뭐요. 주어진 모든 것이 주의 것인데, 그리고 주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붙잡을 수가 없어요. 주의 것의 특징은 뭐냐? 소유대상이 안 된다는 거예요. 붙잡을 주체가 없는데 뭘 붙잡고 있어요? 그냥 주의 것만 있어요.

집에 택배가 열 개 왔는데 뜯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럼 집에 들어가면 택배가 열 개가 나와 있는 거예요. 전부 다 주의 것이에요. 내 몸도 주의 것이고 내 건강도 내 자식도 전부 다 주의 것인데 뭘 뜯어봐요. 다만 주께서 만나처럼 주신 것은 만나 자체가 양식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장하고 예수님처럼 제2, 제3의 예수님처럼 이제는 남을 구원하는데 주님의 억울함을 담고 희생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하는 거예요. 희생하라 하니까 또 선교사 생각하고 하는데 그 희생이 아니고 내 의를 생각하지 않는 데서 오는 희생, 나는 잘난 것도 없고 요구할 권리도 없고 더 살려 달라고 외칠 입장도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그 희생 말이에요.

그냥 주시는 것 염치없지만 뻔뻔스럽지만 잘 받아쓰겠습니다, 하는 그런 자세가 돼야 돼요. 사람이 선악과 있으면 자기 잘못한 게 있으면 벌 받을까 벌벌 떨고요, 좀 잘한 게 있으면 좋은 일 생각하다 교만해서 까불어서 안 돼요. 선하면 까불어서 안 되고 좀 죄 지었다 싶으면 낙담해서 안 되고. 악마가 주는 작은 북에 같이 춤추고 있어요.

맨날 하는 일이 자기 점검이에요. 나는 오늘도 얼마나 가치가, 지가 주식입니까? 오늘 얼마나 주식 값 올랐는지 보자. 맨날 내 가치는, 내 훌륭함은, 나의 못남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나의 가치를 의미를 더 높여줄까. 하는 일이 맨날 그것 하면서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진 그 영역, 그게 바로 지옥 아닙니까.

실컷 고생하고 죽어서 또 고생하고. 바보도 아니고. 진짜 천하에 바보에요, 불신자들이. 혼자 똑똑하다고 학위가 세 개 있고 유학 갔다 오고 언어도 세 개, 네 개, 뭐 사우디 말하지요, 영어 하지요, 한국말하지요, 몇 개해도 백날 해봤자 관심사가, 나 너한테 기 안 죽는다는 오기만 남아있다면 희생이 아니고 남을 오히려 희생시킬 사람밖에 안 돼요.

우리 자신이 우릴 키울 생각하지 마시고 못돼먹은 성질머리 있더라도 이것마저 주께서 다 필요에 의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이 주의 것이니까 세상 전부가, 주께서 필요에 의해서 이렇게 만드신 것을 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러면 있던 마귀, 바이바이 하고 가버립니다.

끝으로 당부합니다. 절대로 누구하고 거래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남한테 희생하고 봉사 이외에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게 물건 살 때 악착같이 아끼는 것, 그것 봉사입니다. 왜냐하면 괜히 했다가 인간 버리거든요. 저 사람 돈 좋아하게 만들면 안 되거든요. 악착같이 아껴서 몇 푼이라고 긁어내는 것, 왜 그렇게 합니까? 당신 인간 만들기 위해서 그래. 항상 상대방을 좋게 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우리는 주의 양식이 돼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위신과 가치와 의미를 포기하는 그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