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1b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흠 (강의:이근호 목사)
흠이 있다, 문제 있다 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흠 있는 걸 제거하고 문제 있음을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 성도인 우리 입장에서는 옛날 율법처럼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되고요. 성육신을 생각해야 돼요. 말씀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죄 많은 세상에 왜 오셨는가? 죄를 만들어놔야 오실 것 아닙니까?
일을 사적으로 남한테 싫은 소리 안 듣겠다는 그 자체가 창세기 3장의 상황을 모독한 게 돼요. 이미 우리는 물 건너갔어요. 이미 우리는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경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천국에 대한 어떤 감각을 느낀다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건 내 구원의 일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 식으로 구약 레위기를 다시 보게 되면, 흠 있고, 문제 있는 사람은 오지 말라는 말은 뭐냐 하면, 그 정도로 하나님이 원하는 기본 모델은 완벽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점을 알아야 돼요. 우리의 모습과는 족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완벽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감히 그 완벽한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주제넘은 탐욕이라는 것을 인정해줘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이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예를 들어 23절을 보면, “장 안에 들어가지 모살 것이요 단에 가까이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라”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의 재탕이라 보시면 돼요. 아들이라도 죄가 있을 경우에는 아버지 있는 곳에 합류 못합니다. 사흘 동안이지만 잠시나마 주님과 결별해야 돼요.
23절 끝에 보면,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이 뭔가 지키고 싶은 게 있어요. 하나님 계신 자체를 흠이 없고 티가 없이 거룩하게 만들고자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오지 말라고 거부하지요. 누구한테요? 같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24절에, “모세가 이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였더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한 고집부리죠. 뭐냐 하면, 거룩하지 않은 것은 천지가 개벽할지라도 용납 못하겠고 단호함을 우리한테 제대로 이야기해주신 겁니다. 나 있는 곳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들은 여기 참석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흠이란 것, 비거룩이죠. 더러움이죠. 이 더럽다, 비거룩, 흠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율법에서 나왔거든요. 율법에서 알려주니까 우리가 아는 거잖아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율법은 뭘 염두에 두느냐 하면, 완벽한 원형, 완벽한 모델을 염두에 두고 언급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완벽한 이스라엘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완벽함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홀로 남겨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동행하십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지요. 그러면 문제는 간단한 거예요. 동행하신 하나님이 완벽하잖아요. 이스라엘은 완벽하려고 애를 쓰고. 그러면 전쟁이 일어날 때 그 전쟁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방과의 전쟁과 또 하나는 이스라엘 내부와 내부적인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걸 다시 합쳐보면 이방과의 전쟁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부 전쟁의 일환이에요. 이스라엘이 이길 수 없는 전쟁터에 이스라엘을 몰고 나감으로써 그 전쟁결과와 이스라엘 범죄를 연계시키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연계시키면 율법이 책 또는 말씀 자체가 율법인 동시에 나중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역할 자체가 율법이 됩니다.
이걸 이스라엘 자체가 텍스트(책)가 돼요.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가 돼요.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그래서 제가 아까부터 이야기했잖아요. 나의 스토리가 함께 계신 주님의 스토리라고. 주님의 스토리로 구원받는다고. 거기서 따로 내 스토리를 끄집어내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전쟁 중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망가지지요. 확실히 망가져요. 세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에서도 다른 작은 나라의 경제는 망가지잖아요. 실제로 폭탄이 날아다니는 전쟁을 하게 되면 신혼부부라도 군에 가야 되고 애 낳더라도 피난 가야 돼요. 완전히 나의 인생, 소박한 무지개를 염두에 둔 나의 인생이 망가져버려요.
그러면 이 세상은 전쟁 중입니까, 전쟁 중이 아닙니까? 전쟁 중이죠. 영적 전쟁 중이잖아요. 그러니까 사적인 인생은 아무리 자기가 소망하고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일으키는 그러한 상태를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실이란 언약의 본질이 외부로 발산되는 것. 언약하면 율법도 포함되지요. 율법은 모세언약이니까. 언약이 외부로 발산되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누구의 스토리냐 하면, 이스라엘의 스토리인 동시에 주님의 계시가 돼요.
방금 이야기한 것과 첫째 시간과 연결시켜봅시다. 첫째 시간에 흠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흠은 파고 파도 계속 흠이 나와요. 왜 그러냐 하면 흠을 언급하면서 흠이 양산되도록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율법을 여기에다 계속 주입시킵니다. 아까 이스라엘 역사가 율법이라 했으니까. 주께서 일을 만들어요.
명절에 예상하기로는 집에 가서 곱게 잘 있다가 떡국이나 한 그릇 얻어먹고 나중에 처갓집에 갔다고 집에 오면 되지, 뭐. 이런 계획을 잡아놓는다고요. 우리 자신의 계획이죠. 그러나 처갓집에서 시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복음의 텍스트로 삼는다면, 우리가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무슨 일을 만날지 장담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스토리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거든요. 말씀 지키면 되지 하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맞닥뜨리게 하는 전쟁 가운데서 그들은 이방민족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전쟁을 유발시킨 동행하신 하나님께 온갖 원망과 불평과 반발을 다 끄집어냈어요. 모세에게 욕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욕하는 겁니다. 선지자에게 욕하는 게.
우리도 평소에 이런 불평불만이 입에 달렸잖아요. 에이, 씨. 이런 식으로. 왜 내 뜻대로 은혜가 유지되지 않는지, 이런 식으로. 왜 하늘이 그레이 색이지. 계속 우리는 불평할 요소들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킵니다. 유발시키면 열심히 하나님께, 이론상 다 알지요. 열심히 감사하고 고마워하려고 애를 쓰고 온 노력을 다해도 이게 어느새 가식적이 되고 거북한 환경 속에서 불평불만이 안 나올 수 없어요.
우리 자신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울화가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 식으로 곱게 가질 않고 자꾸 망가집니다. 지금 강의하는 것도 내 뜻대로 안 되고 목소리 망가지는데.
이스라엘은 그럴 때마다 계시 하나가 더 추가되는 거예요. 철저하게 사용하니까. 그래서 구약 책이 이렇게 두꺼운 거예요. 하나하나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까불었다. 자기 자신도 모르고 하나님 안다고 까불다가 혼났다. 그런데 그 혼난 상황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도했다. 자력으로 앞을 헤치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스라엘에 사울 왕이 있을 때 이건 후대 이야기잖아요. 사무엘상에 나오니까. 골리앗이 전쟁터에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골리앗이 목소리는 얼마나 크고 얼마나 큰소리치는지. 이스라엘 사람들 전부 주눅 다 들었습니다. 기 다 죽었어요. 일대 일로 붙자. 사나이답게. 이 졸장부들아. 나와 붙어서 이기면 줄게. 너희들 지면 우리나라의 종 되라. 지금 이렇게 나오잖아요.
누가 그렇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유발하신 거예요. 마침 타이밍 맞추어서 소년 다윗이 거기에 왔다가 율법적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저 할례 없는 것들은 하나님이 내어버려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경우에는 허깨비에요, 허수아비거든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허수아비의 외형만 보고 전부 다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작자들이.
그래서 소년 다윗이 나설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거기에 둔 것은 소년 다윗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타이밍 맞춰서 높여주기 위해서 세팅한 겁니다. 그 소년 다윗이 나중에 다윗언약이 되는 거예요.
다시 갑니다. 언약의 본질이 외부로 드러나는 그것이 현실이다. 소년 다윗에게 현실의 분석은, 할례 없는 자가 할례 있는 자를 욕하더라. 사울 왕과 다윗 형들과 대다수가 보는 현실은 뭐냐? 힘 있는 자가 지금 큰소리치더라, 에요. 동일한 현실인데 보는 분석의 평가는 두 개가 나왔어요.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봅시다. 현재 내 인생에 일어난 것은 주께서 아직도 미처 모르는 십자가의 고마움을 더 높이기 위해서 나를 더욱더 흠 있는 자로 주저앉히기 위한 상황이라고 보시는 현실관. 거기에 반한 또 다른 현실관은 이렇게 내가 신앙에 게을러서 지옥에 갈 거라는 벌벌 떠는 현실관, 이 조시로 가다가는 탈락이라는 염려, 걱정은 혼자 다하는 현실관.
이 현실관은 내가 뭔가 해야 유지하는 이 정도 돼야 신앙인이라는 자기 측정하는 모습이에요. 아까 첫째 시간에 배웠듯이 누구 스토리입니까? 자기 스토리에요. 주님의 스토리가 아니고. 나의 완전을 도모, 이 정도 되면 기분 좋을 텐데, 하는 내 완전을 도모하는 것과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뭐냐? 그렇게 망가진 그것이 주님의 완전함에 이미 내용으로 포함돼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이 바깥으로 발산된 게 지금 나의 현실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외부로 발산한 것이 지금 내 모습이기 때문에. 또 다시 반복해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이것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관계고 혜택이다.
이게 바로 흠입니다. 흠의 유용성이에요. 흠은 누구나 있어야 되고 흠이 사라지면 안 돼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흠집이 있어야 돼요. 이렇게 해도 여러분이 안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다시 복습해봅시다.
흠이 뭐냐 하면, 간단하게 반발심.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흠은, 내가 보기에 외형적으로 율법에 안 맞는 걸 흠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흠이 아니고 내 속에 그런 것은 좀 봐주면 되지 않습니까? 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잖아요. 구구한 변명을 내놓는 식으로 반발하는 것, 감사와 고마움이 없고 반발하는 것 이게 흠이 되는 겁니다.
그 흠을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게 원천이 달라서 그래요. 두 번째 시간은 원천에 관한 문제를 시작합니다. 정리할게요. 비-거룩 또는 더러움, 속된 것, 비-언약, 그리고 흠, 이 모든 것은 어떤 스토리를 갖고 있는데 그 스토리의 원천은 어디서 나왔다? 하나님의 거룩에 반발하는 세력에서 나온 거예요.
강의할 때 기침 안 하고 듣는 사람도 불편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반발이잖아요. 기침하면 기침하는 거지, 뭐. 내가 하고 싶어 했습니까. 안 했으면 좋겠다, 깔끔하게 들렸으면 좋겠다. 이게 반발이에요. 그래서 하늘의 별 딸 일 있습니까, 그래서 천당 갈 겁니까? 아니거든요.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요.
자기 인생이 아닌데 자기 스토리가 아닌데 내 스토리를 집어넣습니까? 집어넣는 것이 원천이 수상한 데서 나왔어요. 나만의 자랑거리, 나만의 가치, 나만의 의미를 챙겨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은근히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그러한 음성, 그러한 욕구 그게 죽을 때까지 우리 속에 계속 가동되고 있어요. 이게 흠입니다. 이게 문젯거리에요.
그렇다면 이게 맞는다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다는 것은 모델이 온 거예요. 율법의 완성은 이런 분이다. 모델이 오니까 모든 사람이 심지어 열두 제자들까지 다 떠났지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십자가에서 세 명의 마리아가 있었지만 전부 다 믿음 없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생각 없었습니다. 시체나 찾으러 주님 무덤 찾아간 여인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었어요. 그걸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이 말은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와 달라요. 다른 이름을 제외시켜버리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하면, 이 이름도 믿고 나도 믿고 주님 믿잖아요. 너 믿지 말고 주님 믿으란 이야기에요. 니 스토리 말고 주님 스토리로 네가 구원받는다는 뜻이에요.
네가 한 평생 얼마나 열심히 예수 위해서 애썼는지 그런 것 믿지 말란 말이죠. 그건 믿을 게 안 돼요. 내 이름이니까, 내 가치고, 내 의미니까. 인간은 자기 가치, 자기 의미, 자기 과거, 기억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게 자아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나로 인해 산다고 했잖아요.
이번 수련회 아가 할 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거예요. 사랑은 어느 정도냐 하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아요, 가 사랑이지요. 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자기가 생각나지 않는 순간, 내 눈에 그대만 보이잖아요. 그대는 내 눈에만 보여요. 다른 눈엔 안 보인다는. 꽂혀버렸지요. 오죽했으면 아가에서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나는 사랑 때문에 병이 낫다. 상사병이라 하지요. 상사병, 잠 못 듭니다. 그립고 보고 싶어요.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왔을 때 다 떠나고 말았어요. 의도적으로 의도한 거예요. 양을 치니 떠났지요. 그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라. 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들 내부에 하늘에 이를 수 없는 천국 갈 수 없는 악마적인 원천이 계속해서 인간 육신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붙들고 있어요. 너를 놓치면 무슨 소용 있느냐? 한 평생 너 좋으라고 살아야지 남 좋으라고 살면 안 되잖아, 하는 그런 내면의 욕구가 자꾸 가동되는 거예요. 그게 흠이 되고. 그게 왜 흠이 되느냐? 주의 말씀에 변명과 반발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부터 어렵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 드리면, 이스라엘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은 뭐라 했습니까? 두 자로 전쟁이라 했지요. 전쟁은 전략과 전술로 이뤄진다고 제가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역시 그 방법을 사용하신 거예요.
마태복음 12장 3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를 해치는 자니라” 기준이 누구냐? 나입니다. 고요한 바다에 그냥 고요히 가만있으면 돼요. 그런데 거기에 큰 바위를 던지면 갑자기 격한 파동이 생기잖아요. 주님께서는 화평한 이 세상에 불화를 일으켜요. 격랑을 일으키려 오신 분이에요.
고요하다는 말은 사람이 이미 정신적으로 안정 상태에 있다는 거예요. 안정 상태에 있다는 말은 서로 의기투합, 서로가 의견이 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을 보세요. 막 싸우듯이 하지만 결국은 양보할 건 양보하고 협상하고 타협해서 다시 평정을 유지하잖아요. 세상 자체가. 천하에 죽을 것 같이 달려들다가 나중에 사과한다고 몇 마디하고, 그런 적 없다고 했다가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조아리고 쑥 들어가지요.
세상은 고만고만한 거기서 거기까지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어요. 백번 양보해도 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라는 거예요. 참 멋진 교훈인데 여기 쓰기엔 아까운 교훈인데 제목을 길게 하면 이것 하고 싶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이다. 그러면 됐지, 뭐. 북한 주님의 소원은 하얀 쌀밥에 소고기국 먹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와 만났을 때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떡을 먹으라 했잖아요. 그 악마의 말은 지금 이 세상의 평정을 유지하는 원리를 대표해서 악마가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악마의 의도는 뭐냐 하면, 하나님 축복의 마지막 결정체는 등 따시고 배부른 것으로 보는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철이 없지 않거든요. 말씀으로 사는 걸 몰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씀으로 사는 목적이 뭐냐? 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 아니냐는 것이죠. 말씀을 지키는 이유도 말씀 자체가 종결되는 게 아니고 말씀 지키면 복이 되는데 그 복이 뭐냐 말이죠. 등 따시고 배부른 거예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래서 성령께서 일부러 예수님을 40일 동안 굶겼습니다. 굶기고 악마를 만나게 한 거예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40일 굶었을 때 어디를 지향하게 돼있어요? 누구나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을 지향하겠지요. 과연 목적이 그거냐, 왜 하나님께서 나를 굶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바로 굶는 가운데서 등 따시고 배부른 목적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그걸 제거해보잔 말이죠. 그게 마지막 스크린인지, 마지막 최종점인지 잘라보잔 말이죠.
왜냐하면 악마가 그 뒷부분을 알면서도 가리고 있거든요. 여기까지만 오면 최곱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죠. 그러면 하나님 복 받은 거예요. 전부 다 거기까지 스톱시키는 거예요. 주님은 그걸 뚫고 간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굶음으로서. 굶어도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굶어도 말씀만 있으면 그게 영생이고 그게 하나님 뜻이란 거예요.
벌써 악마와 만날 때 주님께선 풍랑을 일으킨 겁니다. 인간 세계에. 악마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 조용하게 가자. 하던 대로 하자. 풍속대로 전통대로 유난 떨지 말고 조용한 게 좋은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전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영적 전쟁을 일으켜야 돼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마태복음 12장 30절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영적 전쟁 이야기할 때 나오는 말씀이에요. 마태복음 12장 26절에 보면,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분쟁 이야기 나오지요. 27절에 보면, “또 내가 바알세블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이렇게 해놓고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은 악마의 전쟁을 해야 돼요. 29절에 보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30절에, 나와 함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적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면 이 본문과 아까 흠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아해하실 건데 성경 예수님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를 더 찾으면 비로소 그 이유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9장 40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마태복음 12장 30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 왜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거예요? 헷갈리게. 일관성이 없어요. 마태복음 12장 30절에는 너, 나 안 할 거야? 그러면 넌 적이야. 상당히 적극적이죠. 그런데 마가복음 9장 40절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 쳐다보고 그냥 지나갔어요.
마가복음 9장 38절에,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냥 지나가게 되면 그 사람은 우리 적 아니야. 왜? 반대를 안 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싶지요.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으면 반대한다는 마태복음 12장 30절은 이미 주님 쪽에 붙어있는 한 반대하는 자가 누군지 명확하게 드러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제자들은 신난 거예요. 왜? 자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자는 자기 집단과 함께 있지 않으니까 자동적으로 예수님에 반대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씹을 수가 있다니까요. 오히려 분별하기가 쉬운 거예요.
그런데 마가복음 9장 40절 경우에는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노골적으로 적대시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한 자란 이 말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이 다 주님 편이란 말이 아니고 현재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조차 하나님과 함께 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춘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주님을 반대 안 하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 홀로 지고 가실 때 목자가 치니 양들이 흩어졌을 때 그들이 예수님에 있다가 떠나버린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비로소 자진해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셈이 돼버리죠. 아예 안 한 것과 있다가 떠난 것과 어느 것이 배신자가 되겠어요? 바로 있다가 떠난 자들이 또렷하게 배신자가 되겠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아직도 너희들이 주님 앞에 흠이라는 사실을 인정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노골적인 반대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름대로 성실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예수를 믿으려고 애쓰고 신앙생활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여전히 자기가 어느 정도로 주님의 반대자인지를 본인이 혹독하게 철저하게 경험 못하고 있어요.
한가할 때 교회 나왔다 칩시다. 그럴 때 목사가 하는 말이, 노골적으로 반대 안 하는 걸 보니까 성도 맞습니다, 라고 했어요. 위로한답시고. 그런데 명절 바쁘다고 교회 안 나왔어요. 그러면 앞의 원리라면 또 봐줘야 돼요. 바쁘니까 나중에 한가하면 나오겠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럼 그 사람이 언제 주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도대체 알 수 있는 기회를 그 사람은 제공 못 받게 돼요.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정말 나는 배신자인 것을, 다시 태어나도 배신자인 것을, 또 태어나도 배신자인 것을 육으로 난 것은 백 번을 천 번을 죽고 태어나도 배신자인 것을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돼요.
오늘 본문에 흠이란 것이 나왔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흠이란 것은, 나는 절뚝발이 아니다. 나는 코가 괜찮아. 난 소경 아니야. 아이고, 난 기분 좋아. 복 받았어, 라고 어쭙잖게 자기 자신을 옹호했던 그것이 나중에 신약에 와서 그게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성경해석인 줄 알아야 돼요.
지옥 갈 때 소경만 지옥 갔습니까? 멀쩡한 사람도 다 갔어요. 무슨 뜻입니까, 이게? 멀쩡한 유대인들 지옥 갔다고요. 예수님을 배반하고 배신했던 유대인들이 어디 신체에 흠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안 그래도 멀쩡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 의롭다는 자를 죄인이라 욕하니까 주님을 욕하잖아요. 나 죄인 아닌데? 간음한 저 여인이나 문제 있지 우린 돌 던져도 마땅하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원리가 또 나와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이 붙었잖아요. 지금 바리새인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세리가 부러워져야 돼. 그런데 바리새인은 죽었다 깨나도 세리 되긴 싫어. 왜? 자긴 율법에 흠이 없으니까. 그런데 세리를 참 쉽지요. 왜? 율법에 흠이 있으니까.
그럼 오늘 레위기 21장 16절부터 끝까지 말씀에 흠이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멀쩡한 인간이 흠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 멀쩡한데 무슨 흠이 있어요. 기다려 보세요. 주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몰아세우는지. 왜 신앙생활 하려고 교회 잘 다니는데 저에게 이런 일이 납니까, 라고 반발심이 나오지요. 그게 숨겨놓은 흠이에요. 그게 악마에서 나온 원천이에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 해볼게요. 악마는 인간을 빈 통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 대신에 그걸 대체해서 다른 걸 집어넣었어요. 네가 알아서 선과 악을 헤아리면 너는 신이 된다. 그냥 빈 통이 아니라니까요. 빈 깡통이 아니라 꽉 차있어요. 그 놈의 양심이란 이름으로, 선해야 된다는 의지로 꽉 차있다니까요.
이걸 흠이라고 여기는 사람 있습니까? 이걸 착함으로 여기지 흠으로 여깁니까? 우린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 자신은 교만하기 짝이 없고 정말 성도라면,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자체가 주의 일에 방해물입니다.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런 고백이 하루에도 몇 번 나와야 돼요.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체가 주의 일에 방해물이에요. 살아 있으니까 자꾸 뭔가 꾸역꾸역 계획을 집어넣고 내 잘남, 내 의미 쪽으로 계속 뭘 해놓는 거예요. 오늘 내가 기침 많이 해서 얼마나 흠이 있음을 드러내서 감사한지. 기침해서 살겠어요. 죽여야 되지. 주의 말씀을 기침으로 훼방했으니 죽어 마땅한데.
꼭 살 필요 없습니다. 안 살아도 돼요. 살면 나한테 화근 돼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 바울이 사는 것은,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것 외치기 위해서 계속 살려주시는 거예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그 소리하기 위해서 살려주시는 겁니다. 그게 완전이에요. 내 자체로 흠의 창고인 것을 깨닫는 그게 축복입니다. 축복이고 무서운 게 없고, 아까 강의 처음에 안정돼있어요. 흔들림이 없어요. 내 인생에 무슨 일 있어? 원래 망가져야 되는데 무슨 일 있었나.
좀 잘난 척하니까 약점 들춰내 알리고, 조금 가정이 평안하니까 애가 무슨 일 있으면 우리 집에 그런 일은 없다며 그것으로 잔소리하고, 성적이 늘 1등하니까 2등 내려왔다고 애를 잡아 죽여. 코디 붙여야 되겠어. 이래서 서울의대 들어가겠어, 이런 식으로.
그걸 성경에선 교만이라 하거든요. 교만은 남과 비교해서 교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비교해서 교만이에요. 그러니까 교만 아닌 인간이 없어요. 흠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원천이 수상하지 않은 인간이 없어요. 다 수상해요. 다 엉터리에요. 인간 자체가 인간도 아니에요.
최선을 다하여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교회 열심히 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자기 자신도 모르는 흠이에요. 일종에 반발이거든요. 제발 내 인생 그만 괴롭히라는. 나도 안다고. 나도 선과 악은 어느 정돈지 기본적으로 안다고 그것으로 버티는 거예요. 왜? 인간은 빈 깡통이 아니니까. 악마가 집어넣어준 게 있단 말이죠. 그것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대전에 어떤 분이 성경공부하려 오셨는데 좀 수심이 있었어요. 그 수심이 뭐냐 하면, 세종시에 아파트를 사놨는데 그날 세종시에서 준공을 거절해버렸어요. <제보자>란 프로 봤어요? 울산 남구에서 아파트 준공이 안 나는 거예요. 남구청에서 고발해도 까딱 안 해요. 무조건 들어가라는 거예요. 들어가면 하자보수 해주겠다. 안 들어갑니다. 벌써 여러분들이 솔깃하잖아요. 현실 이야기하니까.
성경공부를 하든 뭘 하든 간에 현실은, 그러니까 그분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어요. 그 날짜 맞춰서 이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준공이 안 떨어져서 지금 데모하고 난리에요. 시청에서 준공 못 받는 게 내 뜻이었습니까? 내 뜻 아니지요. 나는 점잖고 성경공부 잘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복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 되고 준공도 딱 맞춰서 들어가야 돼요. 내가 예상하기는 내 행세에 비하면 그 정도 기본 복은 당연하다고 여기죠.
그런데 현실은 오도 가도 못할 때 속에서 울화가 터지겠지요. 주여, 이럴 순 없습니다. 바로 존재한다는 자체가 주님 앞에 대드는 악한 원천을 보여주는 시간들이 된 겁니다. 내가 산다는 자체가. 우리의 흠은 내 힘으로 지울 길 없고 오히려 발휘가 되고 키워지는 겁니다.
주께서는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반대하는 자다. 이제 그 뜻을 알았지요. 주와 함께 있을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5장에 나와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십자가 피가 있거든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10절) 이제 이 문장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아들의 죽으심에는 솔깃하지만 앞의 문장,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라는 문장은 이상하게 느낌이 없어. 동의가 안 되는 거예요. 교도소 왔다 갔다 하는 그 인간에게나 해당되지 내가 왜 원수인데? 하나님 믿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그런데 성경에서는 원수 된 자에게 뭐가 보인다? 피 흘림의 가치가 유난히도 커지는 거예요. 원수 된 자가 오늘 본문에선 흠 있는 자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 사람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는 말이,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내 편이다. 이렇게 이야기했고,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반대하는 자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어쨌든 간에 제자들 듣기에는 기분 좋은 거예요. 지금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걸 제자들에게 이야기한 줄은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십자가 질 때 예수님 홀로 졌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양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거예요. 그들이. 인간의 힘으로 주와 함께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구나. 우리 인간이란 태생이 나는 나와 함께 있지 내 가족과 함께 있지 주와 함께 있는 그런 위인들의 못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흠 있는 자는 거룩하지 못한다는 이 말씀으로 지금도 성령께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우리를 때려줘야 되지요. 네가 바로 그 인간이다.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제가 절망적인 존재 맞네요. 전에는 인정했지만 살다보니 잊어버렸습니다. 맞네요. 과연 그러네요. 내가 잘 살아보겠다는 자체가 욕심이었네요. 기침 안 나고 좀 더 살아보자 이것도 욕심이에요.
마지막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실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언약에서 발산되는 게 현실이에요. 사람들이 아는 현실은 그저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아요. 지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손질했다고 해서 세상 달라졌다? 지 세상이나 달라졌지 옆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세상이란 서로 엮여져 있기 때문에 내게 이익이 오면 저쪽은 손해 보게 돼있습니다. 주식해서 돈 벌었다. 뭔 뜻이겠어요? 나 때문에 주식해서 돈 날아간 사람이 있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도박판이니까. 도박판의 돈은 그 안에서 뺑뺑이 돌잖아요. 내가 땄다는 말은 누가 잃었다는 거예요.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르다. 이 말은 누가 춥고 배고프단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회사에서 보너스 많이 받았다는 말은 우리 회사 보너스 주려고 여러 회사 망했다는 그런 뜻이에요.
위에서 보세요. 하늘에서 보세요. 다 보이잖아요. 인간이 얼마나 이기주의적인지를. 그래놓고 나름대로 반듯하게 사셨다고요? 그다지 죄 진 게 없다고요? 성실했다고요? 누굴 위한 성실입니까? 자기 집구석을 위한 성실이죠. 내 가족을 위한 성실이잖아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 위한 적 없어요.
인간의 근성, 본성이 흠 있기 때문에 나 잘 되면 좋은 하나님이고, 못 되면 악마로 간주했던 겁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악마의 모습 같은 거예요. 그런 주님을 믿는다는 것? 이것은 성령 받은 기적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론 예수를 못 믿게 돼있어요. 가짜니까 쉽게 믿어요. 엉터리니까 인형 같으니까 쉽게 믿어요.
진짜 믿는 사람은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저 같은 인간, 탕자는 아들로 안 받아줘도 괜찮아요, 란 고백이 서슴없이 나와야 제대로 주님 만나신 겁니다. 나 같은 인간 더 살려줄 필요 없고 죽여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그걸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그대 있음에 나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아요. 이 마음은 우리에게 안정을 보장합니다. 정돈돼있고 고정돼있고 확정돼있어요.
다만 우리가 돌아서면 또 세상 스토리, 내 스토리, 주고받는 스토리 때문에 주님의 스토리를 잊어버리게 되면 다시 우리는 흔들흔들 다 잊어버리고 그러는데 다시 성령께서 주님의 스토리로 돌아오게 되면 그런 불평조차도 이게 하나님이 주신 완전함 속에 포함된 주의 일인 것을 우린 놓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가 원한 요구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일을 훼방하는 존재인 것을 깨우치는 사랑인 것을 도리어 그것을 고맙고 감사해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