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한윤범 20190607a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시간의 의미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3장 해봅시다. 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은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이 개입해서 새롭게 생긴 민족이에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않은 처음에 창조할 생기지 않은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없던 나란데 생겼다는 것은 무엇을 닮았느냐 하면, 원래 이 세상 땅과 하늘이 없는 건데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으로 새로 생겼다는 것이 무척 닮았지요. 없는 데서 생긴 것이 이스라엘이라면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세계도 없는 데서 생긴 거예요. 그러면 없음이 있기 전에 유일하게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뭘 품고 태어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없었는데 새로 만들어졌다는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처음에 없었는데 창조해서 있다, 라는 사실을 공포하고 그걸 알려주는 역할을 없는 데서 새로 생긴 이스라엘에게 맡긴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전해야 되는 것이 없는 데서 있게 된 창조라면,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에 결부되고 엮여지고 거기에 모아지는 것은 창조의 원리를 갖고 있는 것들이 모아지겠지요. 창조의 원리가 이스라엘에게 삽입/주입이 된다는 말은 이 원리가 그냥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창조의 목표, 창조의 완성을 보이기까지 멈추지 않을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은.
그러면 이스라엘이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뭘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오늘 레위기 23장에서 시간이 여기에 주입되는 거예요. 시간이 주입된다는 말은 시간이 이스라엘과 결부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이스라엘을 다루겠지요. 어떤 의도로 다루느냐 하면,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창조의 완성, 본래의 뜻과 목표를 드러내는데 시간이 개입해서 이스라엘을 다루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모양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구원의 초월성. 정말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 맞느냐는 것은 뭘 통해서 알 수 있느냐 하면, 하늘나라 올라가고 지옥 구경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우리 곁에 시간이 있다는 걸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걸 문장으로 적어보면, 구원의 초월성, 구원의 눈에 보이지 않는 면, 구원이란 것이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과 관련돼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 그건 굉장히 간단해요. 시간이란 말이죠.
그러면 모든 민족이냐? 아니에요.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의 언약으로 택한 민족에게만 이 시간은 구원의 초월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게 뭐냐? 안식일입니다. 하나님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보통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요. 그들은 시간이 왜 있는지 몰라요. 가장 가까이 매일같이 겪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시간이 말해주는 겁니다.
그걸 먼저 시범조로 보여주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안식일에 나무하면 죽는다. 저주받는다. 지옥이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구원이 굉장히 쉽지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창세기 1장에 보면, 시간의 시작은 안식일이 시작이 아니고 낮과 밤이었어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라. 낮과 밤이 시간의 토대가 되는 겁니다. 낮과 밤이 여섯 번 왕복하고 일곱 번째 되는 날이 있었으니 그게 창세기 2장에 나와요. 그 날은 하나님이 창조를 완성하시고 심히 보기 좋았고 만족하신 날이 있었으니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라.
그러니까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 나라 보면서 저 민족은 희한해. 6일 일하고 하루는 일도 안 해. 이것은 이스라엘이 창조했던 그 사실, 그 사건을 그들이 실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누가 하느냐? 이스라엘이 하는 게 아니고 시간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모양을 만들어가요. 시간이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한테는 그게 이상한 이야기가 되지요. 범죄 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시공간이란 자기 자신을 위한 시공간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정해놓은 시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위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시간이 품고 있는 시간이 가리키는 대로 창조의 원리를 이스라엘은 자기 행동을 통해서 삶을 통해서 충분히 보여줄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상대할까요, 안식일과 상대할까요? 안식일과 상대해요. 매일같이. 일월화수목금은 노동하는 것으로 상대하고 마지막 토요일 안식일은 쉬면서 하나님과 상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매개라는 것, 하나님과 계속 정상적인 관계라는 매개라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증명이 되느냐 하면, 안식일을 기억하느냐로 증명이 되는 겁니다.
시간은 크고 인간은 작아요. 인간은 누구 말을 들어야 되느냐? 시간의 말을 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시간이 인간의 스승이니까. 현대인이나 일반사람들한테 이게 굉장히 낯설어요. 보통 우리가 스승이라 할 때는 신장 몇 센티, 몸무게 얼마, 라고 해서 사람이 등장해서 스승이 되잖아요.
그걸 스승이라 했는데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연결하는 연결통로, 매개는 지난 시간 레위기 22장에서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사물, 제물이라 했지요. 그리고 오늘 23장에서는 누구라 했습니까? 시간이 매개가 되지요. 시간이 인간을 다루고 관리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천국 가는 이스라엘로 변모시키는 거예요.
제물 나왔지요, 시간 나왔지요. 신약에는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나와요. 그래서 예수님이 중보자거든요. 그럼 예수님이 그냥 예수님이냐? 아니에요. 사물의 완성, 시간의 완성으로써의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안식일의 주인공이에요. 모호한 안식일에서 인물 하나 튀어나온다. 그것도 완성적인 차원에서 인물로 굳어져 나온 시간이 사람 된 게 예수님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되고 난 뒤에 시간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서 시간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이에요. 이걸 쉽게 하든 어렵게 하든 마찬가지지만 이 세상에서 시간은 누굴 위해서 있다 했습니까? 날 위한 시간이라 했지요. 이건 예를 드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비가 온다는 것이 어떤 농사한테는 유리하고 어떤 농사에는 불리하겠지요. 그러면 비 오는 공간, 비 온다, 안 온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 때는 그것은 농사짓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일반 회사원들에게는 비 오면 월급주고 비 안 오면 월급 안 주는 것 아니잖아요. 신경 안 써요. 나는 나지요.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이나 고기 잡는 사람에게는 시간에 얽매여있는 거예요. 마치 이스라엘 같아요. 만나가 평소에는 오지만 안식일에는 오지 않습니다. 철저히 시간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조정하고 생산해 나가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오늘날도 안식일 지켜야 하느냐고 하는데 시간의 완성이 오셨다니까요. 지금은 어린양 잡고 안 하지요. 복날 닭 잡고 개 잡는 건 있어도 양 잡진 않잖아요. 양 잡던 시절 있었고 염소 잡던 시절 있었고 소 잡아서 태워서 연기 피우던 시절 있었어요. 왜? 그게 그 당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매개기 때문에.
그것도 있었지만 시간을 지켜야 되는 그런 시절도 있었어요. 이스라엘에게. 오늘 레위기 23장처럼. 지금은 시나 절기나 때나 그런 것으로 너희를 얽매이지 못하게 하라고 돼있어요. 그게 여러분 아시다시피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머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요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옛날 구약에는 이스라엘 신체, 육체와 하나님의 안식일, 사물과 관련된 율법이죠. 제사법과 결부시켜서 인간이 육체로써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될 책임과 의무가 부여됐던 거예요. 근데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가 육체로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말은 우리 육체와 결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다 지나간 거예요. 구약으로. 십일조나 맥추절이나 유월절이나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간 거라니까요.
그럼 맥추절, 유월절, 안식일 몰라도 되느냐? 알아야 되는데 그냥 지키려고 알지 마시고 시간과 사물의 매개가 누구한테 완성됐는가를 응집해서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냥 알지 마시고 예수님을 쪼개보면 그 안에 안식일 들어있고 십일조 들어있고 율법 다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안다는 말은 구약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식으로 완성돼있다는 것을 아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여러분이 아는지 모르는지 후딱 지나가서 다시 정리해볼게요. 구약 때 우리의 신체는 하나님이 강요했고 임무와 책무를 주신 거예요.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는다고.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아직까지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구약 때는 여전히 약간은 있을 것이라고 기대는 하겠지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육체가 시간과 사물을 다 완성했다면, 이 말은 곧 누구한테 기대를 걸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 기대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골로새서 3장에서 너는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은 놈이 뭘 해요. 죽은 놈이 무슨 십일조를 바치고 죽은 놈이 안식일을 지킵니까? 죽었는데.
기존교회에서 십일조, 주일하거든요. 그럼 이상한데, 아닌데. 그러지만 마시고 왜 아닌지 아셔야 돼요. 죽은 놈 붙들고 흔들고 깨우려 해봐야 죽어있지, 뭐. “아버님, 이리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째벼서 못 죽겠다고 일어납니까? 아니잖아요. 죽은 우리를 다시 깨우는 것은 죽은 우리가 우리를 째벼서 깨우는 게 아니에요.
우리 열성 깨우는 게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된 채 성령에 의해서 깨우침을 당해요. 그러면 우리 몸은 주님이 다루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다뤄서 이만큼 사신 거예요. 예에, 이능우 집사님! 특별히 이능우 집사님 대표로 이야기했지만 다들 마찬가지지요.
우리 육체가 등기이전 된 거예요. 몸이 아파 죽던, 우울증 걸리던 그건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기껏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어차피 우린 안 죽어요? 50년 살았다. 안 죽습니까? 전부 90 살아야 죽습니까? 누구 맘대로요. 헝가리 놀러간 사람들 다 90된 사람들이었어요? 여섯 살 먹은 얘도 있고 스무 살도 있고 삼십, 사십, 오십 다 있었어요. 지금 다뉴브 강 물에 떠있어요. 가라앉아있든지. 누구 마음대로에요? 주님 마음대로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죽음이란 바탕화면이라고. 컴퓨터 바탕화면이라고. 우리는 거기에 떠있는 그림 있잖아요. 이미지에 지나지 않아요. 화면 전체, 죽음의 바탕 위에 뭔가 동그랗고 색깔 있듯이 우린 그냥 죽음 위에 떠있는 상태에요. 이미 죽었는데 주께서 필요하다고 해서 새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뤄주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어떤 것인지 세상에 대해서 반영하라고 지금 죽음이란 물 위에 떠있는 겁니다. 뭘 반영하느냐 하면, 세상이 썩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소금 역할하게 하고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등불, 빛의 역할하게 하신 거예요.
수영하는 사람들 제일 쉬운 게 뜨는 거라면서요. 우린 제일 쉬운 것 하고 있는 거예요. 붕 떴어요. 우리가 지금. 헤엄치지 마세요. 빠지면 눈에 소금기 들어갑니다. 사해에서처럼. 헤엄쳐서 살아온 게 아닙니다. 그냥 붕 떠서 흐름에 실려서 가는 거예요. 시간의 흐름, 그리고 주신 사물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구원의 초월성은 시간입니다.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망원경 들여다보지 마세요. 시간의 시작은 뭐라고 했습니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게 한 날이에요. 그 날이 있어줘야 여섯 날이 지나고 일곱 번째 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특별한 날, 창조의 완성이란 정보가 실린 그런 안식일을 이스라엘에게 부어준 겁니다.
안식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다른 것을 새롭게 약속의 백성을 다듬어가고 틀을 잡아가고 모양 잡아가고 천국 가는 민족으로 언약적 민족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것을 시간에 의해서 실시되는 거예요. 그 시간을 매개라고 한 겁니다. 정리가 되셨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밤의 시간을 창조의 시간으로 보지 않고 그냥 지가 일하지 않으니까 잠자는 시간이니까 내일 아침 오기만 기다리고 낭비하고 소비하는 시간으로 됐어요. 그래서 처음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때, 이제부터 강의가 어려워집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이란 없어요. 원래 이스라엘 나라, 사람도 누구였어요? 야곱이었다고요.
여러분, 야곱에게 특별하게 짝이 있다는 사실 아시죠. 쌍둥이죠. 야곱의 쌍둥이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에요. 야곱의 쌍둥이가 에서였지요. 자, 에서의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겁니다. 야곱은 에서한테 안 지려고 싸웠지요. 야곱이 속이고 사기꾼, 거짓말쟁이. 야곱의 거짓말을 누가 다 받아냅니까? 창세기 32장에서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이 받아내는 거예요.
야곱은 형한테 안 지려고 싸우다가 결국 형의 자리에 하나님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이깁니까? 하나님한테 져야지요. 지게 되면 야곱은 죽습니다. 죽고 난 뒤에 죽은 자리를 하나님이 차지해버려요. 새로운 이름으로 차지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이 죽어야 되는 이름, 야곱이 살아 있어서는 나올 수 없는 이름, 야곱이 누굴 만나지 아니하면 생길 수 없는 이름, 그게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고, 신약에서는 예수 성도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이름이에요. 내 이름 날아가고 누구 이름? 야곱 이름 날아가고 이스라엘된 것처럼 우리 이름 날아가고 누구 이름이요? 하나님 이름, 예수 이름이죠. 야곱이란 이름은 육의 이름이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 이름이거든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 자신을 이스라엘로 봤으니까.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니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성령이 오셨다는 거거든요. 성령이 오셨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오신 거예요. 하나님이 오게 되면 야곱은 죽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데 그 이스라엘이 뭘 풍부하게 담고 있느냐 하면, 약속대로 하나님의 자기 숙제에요. 자기가 해야 될 일이 이스라엘 이름 안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란 이름에 담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야곱의 육체가 결합이 돼요. 그러면 육체는 야곱인데 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야곱언약이에요. 그 야곱언약을 할당받고 분배받은 자들이 누구냐 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이에요. 열두 아들이 아버지 야곱이 해야 했던 그 일을 그 다음부터 국가란 이름으로 확장시키고 확대시켜 나갑니다. 그 확대시킨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하늘나라 들어가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 일하는 자만이 하늘나라 들어갈 수 있는 자에요. 지금 울산바닥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쑥 들어갈 생각 마시고. 주께서 성령으로 일을 맡기는데 일 안 할 수 없어요. 해요. 하지만 내 일은 아니에요. 내가 헤엄칠 일은 아니란 말이죠. 그리고 내 육체도 내 육체가 아니고. 주께서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 완전히 등기이전 해서 차압해 가져간 육체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남자든 여자든 우리 마음대로 못 정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처음에 창조할 때 완성된 게 있지요. 창조를 완성했다는 게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있기 위해선 6일이 앞장서야 되지요. 6일 있고 제일 끄트머리에 안식일이잖아요. 안식일이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이잖아요. 그러면 안식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늘 반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계속 반복적으로 가동시켜 가면서 최종적인 안식의 때까지 이스라엘을 끌고 가신다는 뜻이에요.
안식일의 반복입니다. 일주일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반복할 때마다 장차 안식의 상태가 보다 더 질이 심화되겠지요. 더 깊어지겠지요. 더 세밀화 되겠지요. 안식일 빼놓고 안식해야 될 날이 총 일곱 번 있어요. 그 일곱 번이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밤에 새롭게 생겨난 민족에게만 주어집니다.
야곱이 밤에 하나님을 만났잖아요. 그러면 없던 나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분리되는 데요. 그 분리되는 날이 밤이었지요. 다 잠자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문설주와 문지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만 넘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 인간의 상태는 도저히 자고 있었기 때문에 반항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부 다 박탈당한 상태에요.
구원은 그렇게 이뤄지는 겁니다. 기도원에서 기도한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철저하게 인간의 모든 것을 묶어놓고 일체 못하게 만들고 구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벌써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선악을 아는 지식 자체거든요. 그렇다면 구원은 뭐냐? 선과 악과 상관없이 구원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뭘 시키게 되면 자꾸 선악논리로 발작을 일으켜요.
예수 믿는 것, 잘했지요? 안 믿는 건 나쁜 짓이죠? 자꾸 선악논리가 나와요. 헌금 한 것은 잘한 거고, 헌금 안 한 것은 못한 거고. 선교한 것은 잘한 거고 선교 안 한 것은 못한 거고. 맨날 선악이 자꾸 동원돼요. 그러니까 인간이 밤에 잘 때 다시 말해서 죽은 채로 있을 때에 선악과는 상관없이 구원해버립니다. 그것은 너 말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그들은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언제 이뤄졌다고요? 밤. 그래서 구원의 진행은 그 밤의 반복입니다. 밤의 반복, 날의 반복이죠. 밤의 반복이 여섯 번 되면 안식일. 안식일의 반복이 또 반복되고 반복되면 안식년.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하면 희년. 희년이 바로 예수님 오시는 차원이죠. 시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의 초월성은 시간이에요. 멀리 하나님 자꾸 만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한테 시간이 있다는 그것이 하나님이 구원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그 시간에 대해서 이방민족들은 생각지 못한 다른 의미를 부여한 거예요. 다른 민족은 그 시간에 아무것도 몰라요. 매일같이 똑같은 날, 그 시간이 내가 일하는 것은 낮에, 쉬는 것은 밤. 그러니까 밤보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인간에게 낮이 중요해요. 그렇지 않고 밤 근무하는 사람은 다르겠습니다만. 밤에 일하는 노래방이나 술집에 있는 사람들은 다르겠지만 대다수는 낮이 중요해요. 낮에 노동해야 자기가 산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유월절 지나고 빠져나오자마자 뒤에 애굽 군대가 죽어라고 따라옵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은 낮과 밤, 시간의 표시에요. 시간이 내일을 이끈다는 뜻이에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출애굽기 14장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그러니까 홍해를 건널 때가 밤이겠어요, 낮이겠어요? 밤이었습니다. 밤은 누구, 어느 민족의 시간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의 시간이에요.
보통 이 세상은 밤은 낮과 낮 사이의 틈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밤과 밤사이가 낮이에요. 왜? 창조의 원리니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 그 다음에 저녁 올 때까지. 유대인들은 저녁이 중요해요. 유월절 날이 저녁이에요. 하루 계산을 저녁부터 시작한다고.
죽은 자를 깨워서 또 일 시켰다, 이 말입니다. 주님이 홍해를 밤새도록 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시간도 아닌 애굽 군대가 밤에 이스라엘 따라서 홍해 속에 들어왔지요. 아침에 보니까 홍해 바닷가에 뭔가 떠다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낮의 민족이 감히 밤의 민족 흉내 내다가 다 죽어버린 거예요.
죽었다는 말은 단절돼있다. 인간의 힘으로 이스라엘 될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이 택한 민족의 범주 속에 그 테두리 안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거룩이고 그 거룩한 민족이 이스라엘이고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전에 22장에서 뭘 이야기했습니까? 특별한 민족 제사 지낼 때 제물 이야기했지요. 이번에는 시간입니다. 안식일입니다. 1년 동안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안식일 말고 특별히 지켜야 될 안식일이 일곱 번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일곱 번이나 있는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안식일에 담고 있는 내용이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더 세밀해지는 거예요. 안식일의 완성을 향하여. 안식일이 완성되면 어떤 내용이 있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1월 14절, 유월절입니다. 물론 우리 달력이 아니고 이스라엘 달력으론 3월이지만 이 날 안식해야 돼요. 그 다음에 1월 14일부터 칠일 동안 무교절 지켜요. 유월절과 무교절은 다릅니다. 유월절은 그냥 넘어간 것, 무교절은 이스트가 들어있지 않는 말랑말랑한 떡이 아닌 딱딱한 떡.
딱딱한 떡은 고난을 뜻하는 거예요. 무교란 고난을 뜻합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어느 강의에서 했는데(대구강의?) 광야라는 것이 사람을 고생시키는 게 아니고 이 고생길에 누가 동행한단 말이죠. 너만 고생하느냐 주님도 고생했단 말이거든요.
울산바닥에 사시는 데 고생들 많지요. 어떤 사람은 노는 데 게이트볼 하느라 고생 많지만. 사시는 데 고생하잖아요. 그런데 고생한다고 하지 마세요. 이 고생 주님도 같이 하고 있어요. 왜 지 고생만 생각합니까? 주님 고생 생각 안 해요? 나, 너무 힘들어서 우울증 걸리겠습니다. 주님은, 난 우울증보다 더 큰 것 걸렸어.
고난의 떡을 먹는다는 건 동참한다는 거거든요. 이 고난은 주님이 고난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고난 밖에 얼쩡거리면 구원 못 받았다는 뜻이에요. 광야 비켜가서 구원받은 사람 없지요. 그렇잖아요. 사막 피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 있습니까? 약속이란 들어갈 때 약속이 아니고 이미 사막부터 시작한 거예요. 사막에 동참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지가 재벌 3세입니까? 위에서 낙하산 인사하게. 밑바닥부터 시작해요. 신참-비정규직-대리-과장-차장-부장 거치고 이사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거예요. 그게 전부 다 고난의 길입니다. 사람들 복음 알고 너무 신나. 도대체 알고 신나하는지 모르겠어.
일단 칠일 동안 무교절할 때는 안식을 안 합니다. 마지막에 1월 21일 그때 안식해요. 그때는 노동하지 않아요. 안식합니다. 그 다음에 맥추절, 밀이 익는 절기에 안식해요. 맥추절은 1월 21일+50일 되는 날, 3월 10일쯤 되겠지요. 세 번째고 네 번째는 뭐냐? 7월 1일 나팔절에 안식합니다.
보통 돌아오는 반복적인 안식일 말고 그건 희년과 관련돼있고, 정기적이 아니고 드문드문 안식이 주어진 것은 이런 내용, 유월절 내용, 고난 내용, 맥추, 씨가 뿌려져서 열매 맺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는 그 약속의 땅의 열매로서 드러나는 내용, 나팔절, 이런 모든 내용들이 마지막에 안식일의 완성 속에 다 포함돼있고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간다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7월 10일의 내용이 깊어집니다. 그게 대속죄일이에요. 그 날에 안식해야 돼요. 유월절 말고 무교절, 맥추절은 농사이야기고 곡식 어떻게 키우는지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7월 10일은 죄 문제에 들어가요. 밥 먹고 보리 먹고 밀 먹는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거든요. 근원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네 죄 문제 어떻게 할래?
그게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하실 일에 다 포함이 돼있어요. 7월 10일이 속죄일이고 7월 15일이 초막절이에요. 집 바깥에 나가 텐트 치는 날. 15일에 안식하고 그 다음에 안식 안 하다가 초막절 끝나는 21일에 안식합니다. 그러면 안식이 총 일곱 번 해요.
이러한 사실을 그래프로 드러내면 간단해요. 직선이 있는데 위에서 곡선이 내려오는 것과 똑같아요. 아까 반복된다 했지요. 줄곧 반복되지요. 6+1 줄곧 반복되잖아요. 그러면 직선으로 보는 거예요. y+x+1=0, 이런 식으로. 일차방정식에선 선이에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y²+x+1=0, 이차방정식은 곡선으로 표현돼요. 그럼 여기 접점지점이 있겠지요. 그 접점지점이 바로 유월절과 맥추절 그런 거예요.
무심코 내가 기억하든 기억 못하든 관계없이 시간은 그냥 밤이 되고 낮이 되고. 세상 사람들은 시간은 원래 그런 거야. 해, 달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자전하고 과학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는데 그렇게 과학적 설명하면 천당 갑니까? 과탐, 수능에서 과학탐구하면 구원받습니까? 과학의 문제점은 딱 하나에요. 자기한테 문제 있다는 걸 모르는 게 문제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자체를 문제시해요. 어떤 정보를 얻으려고 성경 보는 게 아니고 네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비춰볼 때 얼마나 왜곡 되고 엉터리로 해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 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덥석 물지요. 야, 말씀 지켜서 천당 가자.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의 결과와 진짜 그 말씀을 완성하려 오신 예수님이 살아가신 결과와 대비해보면 그야말로 대치해서 완전히 충돌을 일으켜요. 그 충돌사건이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복음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너, 이제 죽었어. 그런 뜻이에요.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엉터리였었어. 이제 알겠냐? 이 인간아. 이게 십자가에요.
몰랐는데 십자가 믿으면 천당 가겠지. 이게 아니고 구원받겠다는 그 자체가 문제에요. 어딜 봐서 구원받아야 돼요? 우린 구원 못 받아요. 십자가 영을 받기 전에는 우린 구원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교회 가서 목사 말 잘 들으면 천당 가는 줄 알았지요. 십자가 영이 딱 오니까 교회고 목사고 나발이고 구원은 누가 한다? 주님이 성령 보내서 알아서 해버려요. 완전히 우릴 묶어놓고.
우리는 교회 가는 건 착한 일, 안 가면 무슨 일? 나쁜 일. 선악이잖아요. 예수 믿으면 착한 일, 안 믿으면 나쁜 일. 이것도 선악이잖아요. 인간은 선악에 농락당하고 있어요. 악마에. 선했으니까 뭘 받겠다? 복 받겠다. 이번에 나쁜 짓했으니까 이번 주에 벌 받겠네. 저주받겠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게 농락당하는 거예요. 주님은 선악을 이야기 안 하는데도 우리가 악마와 너무 친하다보니까 계속해서 악마한테 당하고만 살아요. 기도 좀 열심히 해야 외국에 간 얘들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무탈하게 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이번에 논다고 기도를 안 했구나. 얘들 차사고 안 날까? 이런 생각하겠지요. 집사님, 기도 좀 하면 장사 잘 되고 손님 좀 옵니까?
목사가 개척교회 했다. 목사의 노림수는 뭡니까? 내가 죄인입니다. 그것일까요? 아니지요. 교회 좀 돼야 자기 노후도 커버되잖아요. 맨날 가난한 교인 오지 말고 돈 좀 되는 교인들, 목사 시키는 대로 말 잘 듣고 내라 하면 팍팍 내는 교인들. 교인들 한 50명만 있으면 연금 정도는 나온다는 계산 나오거든요.
그럼 그것에 대해서 왜 교인들이 모르느냐? 목사님이 목사님 잘 되기 위해서 예수 믿듯이 나는 나 잘 되기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왜 잘 돼야 되는 데요? 누구야, 너? 도대체 당신이 누군데 왜 잘 돼야 돼요. 우리 속에 악마가 이야기해요. 무조건 잘 돼야 된다고.
오늘 여기 오면서 우리 동네에서 버스 탔는데 버스 기사와 말다툼을 했어요. 라디오를 틀어놓은 거예요. 시끄럽다고 줄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줄이나마나 해요. 그래서 차에서 라디오를 왜 트느냐? 원래 튼대요. 강요에 그 소음을 다 맞아야 돼요? 그럼 나도 휴대폰 꺼내서 소리 크게 해서 들으라고 해야 되겠네. 공공장소에선 조용해야 돼요. 운전자들의 라디오 트는 것은 승객을 고려함이 아니고 자기 심심해서 음악 들으려고 트는 거예요. 지 잠 깨려고.
대구시에 전화했지요. 120번.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나오데요. 이야기 다했어요. 이름이 김◯◯고, 401번 버스. 나 보고 하는 말이 다른 차 타세요, 하는 거예요. 버스는 조용해야 돼요. 운전사가 지 좋아한다고 강요하면 안 돼요. 본인이 버스가 뭔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가 교육시켰습니까, 그동안? 마귀가 교육시켰잖아요. 마귀가 어떻게 교육시켰습니까? 천하는 없어져서 너만 잘 되면 행복이라고. 니 행복하면 되고 니 만족하면 이게 신의 뜻이라고. 그런 식으로 내 속의 악마가 우리한테 강요하고 가르쳐 왔잖아요. 그 가르침이 유포된 것이 개혁주의신학이에요. 그게 한국교회 신학이라고. 이래도 이단 아니에요? 마귀 종교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망해도 쌉니다. 우리 죽읍시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 봤어요? 오셨습니까? 복 받아 가세요. 그리고 같이 갈라먹기, 헌금은 넉넉하게 내시고 복 받으려거든 십분의 일은 내야 하나님이 다음에 복 줍니다. 지금 이 장사하고 있다고. 기도했으니까 장소 제공하고 겨울에 보일러 때고 여름에 에어컨 켜고 복 받으면 입 닦지 말고 헌금 많이 하세요. 앞자리에 와서 은혜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은혜 값을 내라고.
그게 교회 장사 아닙니까. 자기 잘 되려고 교회 왔잖아요. 그 소리 안 하면 교인들 안 옵니다. 이 교횐 이상해. 왜 왔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 좋아하는 걸 안 하면 안 와요. 안 오면 안 하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는 원래 주께서 세워야 교회지 인간들이 어떤 의도로 세우면 잘 되도 교회 아니고 못 되도 교회 아니에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교회 아닙니까? 제가 거짓말하지 않아요. 구약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지요. 그럼 이스라엘은 주님의 뜻으로 만들어졌지요. 그러면 신약에도 교회가 없는 것이 정상입니까, 있는 것이 정상입니까? 없는 게 정상인데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 부활해 계시고 성령이 계신다는 조건 하에 생긴 게 교회에요.
천당 가려고 구원받으려고 죽어서 좋은 데 가려고 사람들 모여서 교회가 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 교회에서 반복해서 외쳐야 될 건 뭡니까? 우린 아무것도 안 것도 없이 주께서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그 이야기.
버리지 않을 때 계획은 성경에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내 이익을 위해서 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끄집어내고 주님의 십자가 완성과 비교해 보시라 이 말입니다. 비교해보면 뭡니까? 날마다 회개지요, 뭐. 참 또 시건방졌습니다. 또 나만 챙기고 무탈하고 내 인생살이 울산살이 편안하면 그게 신의 복인 줄 알고 지 편한 데로 살아요.
말씀에 관심도 없고 주님에 관심도 없고 하루 종일 자기만 관심 있어요. 그래놓고 밤에 자자는 거예요. 그거는 이방인이죠. 밤은 우리를 죽이는 곳입니다. 실컷 죄 졌으니까 죽으라고 저녁 만들어놓은 거예요. 주께서 일하셔서 아침에 또 깨우잖아요. 오늘도 살라고. 그동안 철저하게 우리는 반대로 살아왔습니다. 그 반대인 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겠지요. 십자가 자체가 반대에요.
사물이나 시간이나 인물은 하나님과 우리의 매개입니다. 매개란 말은 뭐냐 하면, 사람과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뭐라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누가 뭐래도 칭찬하거나 욕해도 신경 뚝 끊는 거예요. 주님이 매개를 통해서 어떤 일을 오늘도 나를 통해서 일으키셨는가, 그 일이 우리로 하여금 맞춤, 천국 가는데 딱 맞는 사람으로 오늘도 주께서 부지런히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그럼 그런 반복적으로 일할 때 어떤 원리 같은 게 있는데 그 원리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진척되는가?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십자가가 아니잖아요. 구약에 여러 가지 언약이 있지요. 이 언약이 어떻게 신약까지 이어지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가?
둘째 시간에 할 걸 미리 약간 말씀드리면, 인간의 육체가 있잖아요. 아담을 둘로 나눠요. 예수님이 아담의 쌍둥이로 오셨으니까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거예요. 인간의 육체를 둘로 나누면 천국의 징후, 징조를 담는 육체가 있고 지옥의 징조를 담는 육체가 있어요. 두 가지 육체로 분리시킵니다. 분리시켜야 틈이 나야 비로소 거룩이란 것이, 갈라짐이 거룩이니까 거룩의 뜻이 나오겠지요. 그건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20190607b 울산강의-레위기23장 : 시간의 의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구약을 모형과 그림자라 했단 말이죠. 그럼 실체는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다 했습니다. 하늘의 실체는 보이지 않아요. 보이는 형식으로 나타난 게 그림자고 모형이었습니다. 그림자와 모형이라 해서 허깨비를 잡는 게 아니고 나름대로 분명히 거기도 실체가 있지요. 실체가 인간의 신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 아브라함 혈통에 속한 인간의 신체성을 말합니다.
그럼 보이지 않는 신체는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신체성에 있겠지요. 그 두 신체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섞여버린 거예요. 섞여지니까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신체를 생각하듯이 저 사람,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 본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훌륭한 사람 믿는 게 아닙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믿는 게 아니고 그분 앞에서 난 죽었다, 이렇게 돼요. 나 같은 인간은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걸 말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벌이 있고 저주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교도소에 같이 있으면 기죽을 필요 없어요. 그러나 심판주 앞에선 태도가 어때야 됩니까? 세리가 주님 앞에 어떠했습니까? 감히 얼굴도 못 들었잖아요. 그러면 세리가 살아가는 인생 전체 감히 얼굴도 못 드는 인생인 거예요.
장로님께서 만약에 국회의원 됐다. 국회의원이니까 국민들 앞에선 어른이죠. 어딜 걸레질하고 있어, 라고 기자들한테 욕하고 그러겠죠. 그런데 어느 날 오후 4시 쯤 주님을 만났다. 그러면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없어요. “주여, 저를 죽여주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그 소리밖에 할 게 없지요. 그 외에 뭘 하겠어요? 심판주인데요.
평소에는 내가 나를 측정하고 판정했잖아요. 남들 앞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나를 계산했단 말이죠. 그런데 주님 앞에선 계산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그냥 죽은 자에요.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날 핍박하느냐?” 그 앞에서 사울은 나귀 타고 있다가 그냥 고꾸라져서 땅에 넘어졌어요.
꼭 서울 안 가본 인간이 큰소리치면서 이야기한다고 주님 만나게 되면 십일조 얼만 냈습니다, 교회 봉사했습니다.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요. 그런 소리 안 나옵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그걸 자유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이야기나 어떤 평에 대해서 일체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그건 선악이거든요.
적어도 우린 선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용서로 구원받기 때문에 선악과 구원은 단절입니다. 생명나무 기능이 끊어진 것처럼 단절이기 때문에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 우리는 알지만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저쪽에선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는데 개한테 진주를 던질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리 살다 지옥이나 가라. 이러고 끝날 문제에요.
국가가 어떠니 트럼프가 어떠니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 트럼프와 천당이 무슨 관계있습니까? 내 인생, 주님이 이끄는 인생인데.
그림자와 모형이 이 땅에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히브리서에서 언약이라 해요. 그걸 유언이라 하지요. 사람이 죽지 아니하면 유언이 발생되지 않는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은 죽음 바탕으로 전제로 하고 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게 돼있어요. 죽음이에요. 우리는 죽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기뻐요. 거룩한 분의 모형이라서 감사해요.
나의 진면목은 진즉에 죽어야 됨, 이게 나의 성적표고 평생 살아야 이 성적표는 변동이 없습니다. 마트에 물건 사고 계산하지요. 사만오천 원이라든지 나오잖아요. 평생 살아봐야 죽음입니다. 끝나버리는 거예요. 아무리 오래 살고 연금 얼마 받고 소용없어요. 어떻게 살고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죽음이에요. 주님 앞에서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죽이시지 왜 살려주십니까?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언약을 활용하기 위해서 활용체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육체를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죽지 마! 너 필요할 때 있어. 니가 필요한 게 아니고 내가 필요해.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다 나한테 한 것이다.
제가 언제 했습니까? 소자한테 한 것이 주님한테 한 거예요. 주님을 위한 육체로 주께서 그렇게 조정해나가시는 겁니다.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 되도록 조정해나가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나 목숨도 지금 주님이 붙들고 있지 우리가 알아서 예수님께 영광 돌리고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첫째 시간 끝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신체, 인간의 육체는 두 종류가 있다 했어요. 하나는 천국을 보여주고 한쪽은 지옥을 보여주는 육체로 둘로 나눈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그것이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완성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국 가고 예수님을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이죠. 이렇게 돼요. 그러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완성의 양면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옥도 주님이 완성하셨고 천국도 완성하셨어요. 천국만 완성하고 지옥은 나 몰라라 한 게 아닙니다. 마귀를 통해서 지옥을 완성시킨 것도 주님이고 천국 완성시킨 것도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두 일을 다 한 겁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결론적으로 아는데 우리가 공부하는 게 구약이거든요. 그럼 구약에서 신약까지 이끌어가는 과정을 우리가 알아야 되거든요. 그 과정을 수학에서 말하는 행렬이라는 겁니다. 수학에서 행렬은 보통 A=( )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를 들어서 A=라고 한다면, 위에 것을 ‘행’이라 해요. 밑에 것을 ‘(배)열’이라 해요. 합쳐서 행렬이 돼요. 또 B=이라면, A+B라는 것은 같은 자리에 있는 것끼리 더하기해서 새로운 칸을 메운 걸로 돼있습니다. 수학의 법칙에. 수학이란 인간이 만든 거니까 행렬, 영어로 matrix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나가는 겁니다.
이 수학에 나오는 기법이 방식이 언약을 설명하는데 굉장히 편리하게 돼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처음에 행으로 봅시다. 행과 열 아시죠. 가로는 행이고 세로는 열입니다. 이렇게 보겠습니다. 처음에 창조언약이 있어요. 이게 언약의 끝일 것 같으면 행이 필요 없습니다. 창조언약 다음에 노아언약 있어요. 벌써 두 개 등장했지요. 행이 지어지지요.
노아언약 다음에 아브라함언약이지요. 아브라함언약 다음에 모세언약, 모세언약 다음에 다윗언약. 예수님은 누구의 자손? 다윗의 자손, 끝이에요. 이걸로 끝이거든요. 물론 다윗 다음에 새 언약이 있지만 다윗언약에 포함되니까. 이게 행으로 연결돼있는, 창조-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모세-다윗, 이게 행이라면, 배열은 뭐냐 하면, 밑으로 마찬가지에요. 창조-노아-아브라함-모세-다윗.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 창조의 완성이 되게 되면 천국에 이르죠. 맞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완성이란 말은 지킨다는 것도 있지만 안 지켰다, 못 지켰다, 반항했다, 대들다도 있어요. 위반이 있어요. 위반되면 밑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지요. 왜 행렬을 이렇게 나열하느냐 하면, 창조언약 다음에 노아언약 왔을 때 창조언약의 요소가 노아언약에 옵니다.
수학에서는 행과 열의 숫자가 같은 걸 주대각 행렬이란 어려운 말로 전문용어를 쓰는데 노아 이전에 창조가 있어요. 그 다음에 아브라함에는 노아가 창조가 있겠지요. 그리고 창조언약이 이렇게 들어갑니다. 창조언약이 계속 밑에 배열로 하지 말고 창조, 창조, 계속 창조로 나가겠지요. 언약이 가면 갈수록 창조, 노아, 아브라함 배열이 계속 누적이 되겠지요.
이렇게 설명하는 게 더 어렵다 하는데 복잡하고 어려울진 모르지만 이런 점이 있어요. 예를 들면 모세언약에 의하면 전쟁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리라고 돼 있잖아요. 전쟁할 때 사울 왕은 제사를 드리고자 했습니까, 제사를 안 드리고자 했습니까? 제사를 드리고자 했지요. 사울 왕은 모세 때 있었으면 제사 드렸으니까 율법을 마치 지킨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다윗이 기름부음 때에 제사 드리는 것은 다윗언약 때 모세언약은 다윗언약 밑으로 가는 거예요. 배열은 창조 다음에 노아, 아브라함으로 계속 들어간다 했지요. 사울 왕이 모세언약처럼 제사 드리니까 백성들 보기에 우리 임금님은 진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사울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천국을 보여주는 인물이 아니고 무엇을 보여줘요? 율법대로 사는데 결국 지옥을 보여주는 거예요. 행 말고 배열의 마지막 언약은 뭡니까? 새 언약이죠. 새 언약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어디 간다? 지옥 가는 근거가 돼버려요. 십자가 복음은 남 구원하려는 복음이 아니고 구원만 하는 복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십자가 복음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걸 통보하기 위해서 성령이 와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한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돼있지요. 향기는 사도 바울 본인한테나 향기지요. 본인한테는 십자가 복음이 너무 좋아요. 인간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인간의 선악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주님이 창세전에 자기 택한 백성에게 거저 주시는 어린양의 피, 용서로써 건진다.
이게 사도 바울에겐 좋아요. 그리고 이건 정말 샤넬 #5, 이런 향수가 없다할 정도로 계속 맡고 싶은 거예요. 음미하고 싶고 듣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도 복음을 전했으면 알겠습니다만 다 체험들 해봤지요. 가까운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한테 해봤지요. 씨도 안 먹히지요.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이러지요. 그건 향수가 아니라 방구 냄새보다 더 못하지요. 그걸 악취라 하지요.
고린도후서 2장 15절, 16절은 뭐냐 하면, 그럴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기쁜 소식이라는 거예요. 지옥 가는 사람이 지옥 가는 티를 내줘야 그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복음을 아는 목사들이 목회를 왜 합니까? 사람들 끌어 모으려고 합니까? 왜 아직도 안 가세요? 왜 아직 교회 나오세요, 이상하네. 뭘 얻으려고 오시는 거예요, 도대체. 난 복음이 좋아요. 그러면 오세요. 만약에 내 입에서 복음 안 나오거든 날 내치세요. 이단이라고. 그러면 좋아요.
그런데 복음 알고 그래도 교회 다녀야 아이들 취직도 해야 되고 가게 새로 오픈했는데 지하상가 샀는데 팔려야 되고 어떻고 이렇게 나온다면 얼마 못 있습니다. 나가야 돼요. 복음만 전한다는 조건 하에 그 사람은 그 모임에 참석하기가 곤란해요. 교회 나와서 득보려고 하는 사람들, 안 됩니다.
그래도 붙들어야지요. 붙들면 목사가 이단 되는 거예요. 왜? 붙들면 나 괜찮은 목회했으니까 주께서 목사로 알아주겠지, 라는 사적인 욕구와 욕망을 위하여 예수님을 활용하고 이용한 사람이에요. 자기의 가치와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자기 일을 도와줘야 된다고 우기는 사람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약점을 찾아내요. 바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장점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약점을 쥐고 우릴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의 약점이 우릴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의 장점이 아니고.
지금 레위기에서 안식일을 지키라 했지요. 자, 그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지켰겠어요, 안 지켰겠어요? 지켰지요. 우리가 지켰기에 복 받는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들은 아직 언약이 마지막 부분을 몰라요. 중간부분에서 자기가 누군지 본인을 너무 성급하게 단정 지었던 겁니다. 내가 안식일 지켰으니까 구원받겠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구원했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구원했습니까? 조용~.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누굴 생각했는가? 바로 예수님을 생각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예수님 때가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때가 거꾸로 올라가서 아브라함 때에 자기의 행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있었던 거예요.
그 마지막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란 이름으로 이 땅에 태어나야 했던 것을 아브라함이 알게 된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또는 성신을 통해서 알게 된 거예요. 언약 안에 그 아는 게 있어요. 아브라함이 내 때를 보기 원했고 보고 기뻐했다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과 아브라함의 때는 어떤 때냐 하면 시간이 흘러갑니까, 시간이 고정된 겁니까? 고정돼버린 거예요. 아브라함과 예수님이 동기동창이 돼버린 겁니다. 그런 예를 마태복음 17장에 두 사람이 등장했지요. 세상사람 같으면 구경도 못할 사람이 등장했어요. 한 사람은 엘리야고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 세분이 대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대화한다는 것은 같은 시공간에 있을 때나 대화가 가능해요. 죽은 사람 깨워놓고 대화해요? 아이고, 아버지, 해도 아버진 아무 소리 안 하고. 지금 죽어 있는데 무슨 대화가 돼요.
신약성경 사도의 편지에서 ‘예수 안’이라 하잖아요. 예수 안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고 그래요. 달리 이야기할까요. 만년이 일초 같고 일초가 만년 같다 이 말이에요. 시간에 대해선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겁니다.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시간이란, 이 세상의 인간은 누구 의미의 시간입니까? 내 의미의 시간이에요. 공간도 마찬가지고. 비가 온다, 안 온다. 오늘 저녁이다. 다른 날 저녁은 신경도 안 쓰다가 딸내미가 저녁 늦게 동창회 있다고 하면 그때는 왜 시간이 밤 10시가 그렇게 위험한 것인지?
딸내미가 밤 10시에 나가 보세요. 그리고 서울에 따로 자취해보세요. 딸이 문 열고 들어가니까 어떤 인간이 붙드는데, 1초만 늦었어도 성폭행 당했다는 동영상 안 봤습니까? 난 열 번도 넘게 봤는데. 엄마가 오늘 밤 근무라면, 갑자기 밤이라는 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거예요.
다 누구 중심이에요? 나 살기 위해서잖아요. 내가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내가 누군데? 그건 모르지요. 그건 나한테 묻지 마라. 무조건 그렇다는 거예요. 차에선 무조건 라디오 틀어야 된다는 거예요.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무조건 나만 행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자기가 절대자입니다. 인간은 괴물이에요. 세상은 나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이다, 이러고 있다고. 우리가 얼마나 억지스럽게 인생을 살아가는지 몰라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억지에 억지를 더하니까 나중에 지 억지가 지가 치어서 우울증 걸리고 자살하겠다, 하고. 우리는 목매 자살할 자격도 못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언약 속에서 아브람이란 인간은 아브라함한테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진즉에 소멸될 없어져야 될 것을 안다. 그런데 왜 나는 아브라함이 되어야 하는가? 그건 나 때문이 아니고 내게 뒤집어씌워진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요셉은 형한테 팔렸습니다. 진즉에 죽었습니다. 마치 애굽으로 내려가는 대상들, 장사꾼 없었으면 물 없는 구덩이에서 그냥 죽었지요. 얘들 열두 명인데 하나 죽으면 어때요. 왜냐하면 요셉이 계속 있으면 열한 아들이 힘들어져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필이면 장사꾼들 만나서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팔려가게 했거든요.
그러면 요셉 인생 가운데 누가 계속 주관합니까? 요셉 본인이 아니에요. 본인은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아무리 성실해야 안 알아줍니다. 결국 하나님이 말씀대로 응하게 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국무총리가 되게 하니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구원이란 결코 구원받겠다는 내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방적인 꿈같이 찾아온 주님의 뜻이었고 나는 그 속에 예속되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겁니다. 그게 요셉의 일생이에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계속 해봅시다. 노아언약이 오면 창조언약이 밑에 들어가지요. 들어가면서 배열이 이렇게 돼야 되지요. 아까 주대각행렬 식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언약 때에 방주 만들면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그럼 묻습니다. 아브라함언약 때에 바르게 살면 구원받습니까? 안 되지요.
자, 노아 때는 방주 만들면 홍수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때에 방주 만들면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 밑에 노아 방주가 깔려있단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 시대 사람들은 창조언약으로 심판받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언약으로 심판받는데 그 심판이 뭐냐? 노아언약의 수준에서 아브라함언약까지 뚫어내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심판받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렵습니까? 쉽게 가겠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 있을 때에 유대인들은 무슨 언약에 있었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십자가 빼놓고 줄줄이 다 있지요.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천지창조는 누가 만들었다? 여호와가 만들었다. 그 다음에 안식일 지킵니까, 안 지킵니까? 지키지요. 지키니까 창조언약 맞지요.
그 다음에 그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해요, 안 해요? 아브라함 자손이죠. 아브라함언약에서 할례언약 나오지요. 할례 행했습니까, 안 행했습니까? 할례 행했지요. 잘했어요, 할례. 그 다음에 그들은 십계명 지킵니까, 안 지킵니까? 지키죠. 안식일 다 지키는 거예요. 그들은 다윗의 메시아를 기다립니까, 안 기다립니까? 기다렸지요.
그런데 그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메시아를 왜 죽여요? 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이것을 인간 쪽에서 올라오는 방향은 하나님께서 차단시켜서 절대로 올라올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는 주님에 의해서 분류되는 게 아니고 나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무조건 지옥 가선 안 되고 무조건 천국 가야 된다는 것이 철두철미하게 내 육체를 감싸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교회 오는 사람치고 지옥 가고 싶어서 오는 사람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교회에서 배운 데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목적이 뭐죠? 그 의미가 뭡니까? 자기 구원이죠. 이걸 구원론이라 하는데 유병언이나 거듭남의 비밀 박옥수나 그뿐만 아니죠. 한국교회 전부 다지요. 신천지도 그렇고.
그들의 목적은 자기 구원받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거기에 약간 내용이 첨가되면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고 무탈한 가정이 됩니까? 그게 눈치 안 들키게 하면서 뒤에 살짝 붙어요. 구원받으면 덤으로 이걸 주시겠지, 갖다 붙인다고요.
그렇다면 주대각행렬이 왜 있느냐? 이게 저주기 때문에 그래요. 이쪽 행렬은 천국이죠. 그런데 아브라함 할 때 이미 예수님이 그 속에 들어왔지요. 예수님께서 노아 속에 들어왔지요. 예수님께서 아담 속에 들어오고 아벨 속에 들어왔지요. 이 행의 이야기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늘나아의 모형이고 그림자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고 주께서 어떤 모형과 그림자를 깔아놓고 그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 히브리서를 쓴 그분의 신학이고 믿음이고 복음이에요. 사도 바울의 복음이 그건 거예요.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하셨던 대로 그냥 찾아오는 거예요.
찾아올 때 구원받았다고 좋아하라고 찾아오는 게 아니고 창세전에 아들에게 하신 그 일을 우리를 통해서 발산되도록 찾아오시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 10절 봅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하나님 안에서 통일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에요. 하나님 안에서 통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통일이라면 이미 유대인들이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이방인들도 알고 있는 거예요. 이방인의 전설이나 신화 보세요. 노아언약 다 나옵니다. 태초에 전설에 보면, 이건 성경 관계없이 모든 민족 속에 홍수이야기가 다 들어있어요. 사람이 입이 싸서 전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홍수 경험했던 노아 자식들, 후손들이 입이 근질근질해서 가만있겠습니까? 이야기하겠지요.
그래서 생긴 탑이 바벨탑 아닙니까. 다시는 헤어지지 말고 한데 모으자. 두 번 다시 당할 순 없다. 이름을 어디까지 놓는다? 하늘까지 놓으면 그게 엘리베이터 돼서 올라간다는 말 아닙니까.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내자.
창조언약에 선악 나오지요. 모든 인류는 종교가 있든 없든 어린애든 어른이든 구십이 되던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양심이라는 게 있고, 그 양심이 뭐냐? 나쁜 짓하면 지옥 가고 착한 일하면 천당 간다. 이건 제일 밑바닥에 언약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선악이니까.
그 다음에 노아언약을 줘도 노아는 착하다는 거예요. 무슨 착한 사람이 술 먹고 하체를 드러냅니까. 노아언약은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방주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벌써 내가 아니고 방주라는 사물이 첫째 시간에 했지요. 하나님과 땅이 매개되는 사물로써 구원받는 겁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누가 들어있느냐? 정결한 짐승이 들어있었고 바깥으로 나와서 그 정결한 짐승의 피를 내고 발랐기 때문에 피 먹지 말라는 새로운 조항이 노아언약에 최초로 주어집니다. 피는 네 소유가 아니고 오히려 네가 피의 소유돼야 된다는 피가 너를 먹을 것이다. 그래야 네가 구원받는다. 네가 피를 먹지 말고.
모든 것이 피 중심으로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거예요. 피 있는 제사가. 창세기 4장에서 아벨도 마찬가지고요. 다시 말해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언약 아래 있는 인간들이 언약을 통해서 위에서 찾아오느냐, 그러면 구원이죠. 천국이고. 우리가 그것을 시도하느냐? 그러면 지옥이죠.
오늘 본문 레위기는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언약 다음에 모세언약이죠. 안식일을 지키라. 그들은 뭐냐? 아브라함언약에다 새로운 계시가 주어졌으니까 아브라함언약, 할례언약도 지켜야 되고 그 다음에 안식일도 지켜야 되고.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이거는 언약의 완성에 아직 이르지 않았어요.
언약의 완성에 이르지 않았지만 중간에 무엇이 드러난다? 저주스러움과 복스러움이 드러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안식일 지킬 때 억지로 지킨다든지 감사함이 없으면 안식일 지켜놓고도 벌 받아요. 안식일에 어떤 내용이 추가되는지 여호수아 6장을 봅시다. 여러분 잠도 오고 하니까 6장 14, 15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 제 이일에도 성을 한 번 돌고 전에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 그날뿐이라. 무슨 날을 강조해요? 안식일을 강조하는 거예요. 그럼 안식일은 인간이 지킨다, 주님이 지킨다? 주님이 지키는 거예요.
인간이 지키는 방법은 노동하지 않고 제사 드리면 지킨다고 했어요. 그건 여리고 성 오기까지 알던 이야기에요. 여리고 성에서 새롭게 일이 추가되면 이것이 안식일이 제사 지내고 노는 날이 아니고 그 자체가 무기가 되는 겁니다. 안식일이 공격무기, 심판무기. 안식일이 무기가 된다는 것은 좀 엉뚱하고 희한한 이야기지만 안식일이라는 시간이 무형체가 유형체가 되면, 마치 총이 되고 칼이 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실은 안식일이 모여서 총 되고 칼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되죠. 예수님이 되죠. 예수님이 너무 초라하고 허름하니까 이건 막 먹자고 나가는 거예요. 주님이 심판주라 해도 듣지도 않아요. 내가 마지막에 모든 민족을 다 모으고 오른편 양, 왼편에 염소로 나눈다 해도 그들은 구라 떨지 말라고 어딜 협박하느냐는 거예요. 뭐 당신이 구름 타고 와 죽는데. 지금 우리 손에 죽잖아. 살아 있어서 구름을 타든지 말든지 하란 말이야. 죽는데 무슨 구름을 타고 와요. 죽으면 끝이지.
여기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 맞아요. 여리고 성을 신약적 복음적 십자가로 달리 해석해야 되겠지요. 여리고 성은 뭐냐?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함락할 수 없는 세계. 그러면 안식일 지키면 되겠네. 안식일이 여리고 성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면 결국 안식일 자체가 누가 돼야 돼요?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과 그리고 안식일 안의 어떤 인물이 살아 있어야 되겠지요.
안식일이라는 시공간을 보이지 않는 인물이 휘감고 돌아야 저쪽에 안식일 없는 민족을 쳐서 승리할 수 있는 거예요. 여리고 성은 안식일이 없잖아요. 안식일이 없다는 말은 여리고 성은 토담, 모든 재료와 인간의 노동으로 세운 것 아닙니까. 결국 여리고 전쟁은 인간의 힘이냐, 누구 힘이냐? 주님의 힘인데 여호수아에선 그게 안식일의 힘으로 보는 거예요.
그게 추가된다 했지요. 안식이 일곱 있다 했지 않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마지막 날, 맥추절, 나팔절, 대속죄일 등등 있잖아요. 그 내용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전개되고 펼쳐진다 이 말입니다. 그 안식일에 담긴 하나하나 내용을 패를 까자 이 말이죠. 까게 되면 여리고 성 무너지는 사건도 나올 거고 그 뒤에 온갖 사건들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안식일에서 모든 사건이 튀어나온다면 이 말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튀어나온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지금 트럼프와 중국이 무역전쟁하지요. 그게 다 어느 몸에서 나온 사건이에요? 주님의 십자가 몸에서 나온 사건이죠. 왜?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모든 것은 어디서 통일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기 때문에.
우연히 그냥 일어난 일은 없어요. 오늘 울산에 비 왔다. 그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시공간, 시간과 공간은 그리스도의 통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언약 밑에 있는 인간들은, 나는 양심은 있는데 나는 나쁜 것은 나쁘다고 알고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아는데 살다보니까 좀 양보했다, 왜? 봐주소, 주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봐달라고 나오는 것도 대단한 거죠. 사실은 뭐가 뭔지도 몰라요.
행렬봅시다. 보통 행렬에서는 Aij로 표시해요. i는 행, j는 배열. 만약에 아까 A=에서 위에 행이 셋, 배열이 두 개잖아요. A₃₂ 이렇게 표현한단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육체가 있을 때 언약이 우리한테 새겨지는 거예요. 십자가가 새겨진다는 것은 십자가만 새겨진다는 말이 아니고 창조-노아-아브라함 모든 것이 십자가 안에 모여서 새겨지는 겁니다. 예수의 흔적처럼 말이죠. 십자가 안에 모든 것이 다 이뤘다가 새겨져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언약 행하고 또 뭘 행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육체로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때로는 노아언약 환경, 때로는 아브라함 환경, 때로는 모세 환경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우리 신체는 필히 뭐가 나와야 돼요? 죄가 되어서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죄가 되어 나와야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죄+피’가 될 때 이게 예수님의 제물성을 대변해주고 있거든요. 죄인을 위해서 피 흘려야지 죄인도 없는 피 흘리면 피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잖아요. 주님이 헛수고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도 모르는 죄를 자꾸 밝혀주는 겁니다. 주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 자신의 공로가 얼마나 대단하면 오직 주께만 찬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 있습니까? 이거 위험한 발언이다. 아내, 남편만 사랑해준다는 것이 우리의 모범답안이잖아요. 그런 모범답안 말고 나이 60이든 70이든 80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챙기기에 나서겠어요? 이상한 생각 말고 예를 들어서 손녀라고 합시다. 손녀 앞에 어른 행세하겠습니까?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지요. 그저 손녀 보기에 재미있는 할아버지라 하면 그걸로 대만족 아닙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랑이란 같이 있고 싶어 해야 돼요. 같이 있고 싶지도 않은데 사랑이란 말하면 안 돼요. 솔직하게 미워하면서도 미워하는 걸 감추기 위해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남발하는데 자꾸 가방 사주고 뭐 사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미운 감정이 없어지는 것 아니잖아요. 사랑한다는 말은 네가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고 제발 너를 없앨 방법을 찾아보란 뜻이에요.
지금 모든 고민과 걱정이 내가 의식돼서 그래요. 내 몸을 바칠 대상이 없어서 미치는 거예요. 인간은. 그대만 있다면 나 지금 죽어도 좋아요. 아까 손녀 예를 들었지만 손녀, 너만 잘 큰다면 내 돈 없어져도 좋아. 할아버지, 빵 사주세요. 너 빵 사주면 난 뭘 먹고? 이런 할아버지는 별로 없을 걸요. 사람이 상대가 좋으면 귀찮게 해도 좋아요. 귀찮다고 물러나면 사랑도 아니죠. 귀찮다 하던 저리 가라 하던 그건 그쪽 생각이고 지 좋으면 좋은 감정 유지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릴 알아요. 우리가 왜 힘든지. 우리가 힘든 이유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없어 그래요. 우리 인생을 살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자기 단도리, 자기 관리한다고 이건 괴물이 따로 없어, 환자입니다. 그것도 너무 순한 표현이다. 그냥 우린 정신병 환자들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정신병 환자들. 그저 성령 받아 천당 가야 돼. 이것도 정신병 환자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나 천당 가야지, 이게 아니고 나 같은 것까지 신경 써주시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주일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어떤 마을에 행실 나쁜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향수를 다 뿌리고 울면서 했지요. 우리 보기에 그 여자가 헌신한다고 하는데 헌신한 게 아니에요. 주님의 헌신이 너무 커서 자기 헌신은 보잘 것 없어 헌신 축에도 못 껴. 주님이 먼저 나 같은 죄인을 건져주신 그 헌신과 희생이 너무 커서 기껏 하는 헌신이 시집 갈 때 쓰려고 모아놓은 향수 다 허비한 고 정도밖에 안 돼요. 그래놓고 울고 있어요. 눈물까지 보태요. 그것도 주님이 주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기를 잃어버릴 때 내 걱정 안 하고 내 자식 걱정, 사업 걱정, 내 장래 걱정, 노후 걱정, 내 건강 걱정, 나라 걱정, 그런 것 안 합니다. 좌빨이고 우빨이고 간에 그런 걱정 안 해요. 말아먹든지 북한에 다 바치든지 몰라. 그것에 내 기분이 매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U-20 월드컵 4강 들어가든 말든, 류현진이 10승하든 말든 그게 결정적인 문제 아니에요.
적어도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어떻게 아느냐? 사랑과 견줄만한 것 다 견줘보세요. 상상해보라고. 사랑하면 내 얘가 헝가리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도 괜찮아. 이러면 사랑은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사랑이 있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시잖아요. 안식일의 완성이에요. 모든 시간의 완성. 시간이 이스라엘을 다뤘듯이 그분이 나를 지금도 천국 가는 사람으로 다루고 모양을 만들고 틀을 만들고 내용을 그분이 알아서 다 채우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했어요. 이것은 안식일이 이어지게 되면 바로 희년이 되고 쭉 나가서 다른 언약은 다 깨지더라도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보면 안식일은 영원하리라는 말이 나와요. 그 영원한 날이 예수님에 오면 이걸 안식일이라 하지 않고 안식일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 누가복음 4장에서 희년 이야기해요. 50년, 안식일의 절정이죠.
희년은 어떤 상태냐 하면, 옥에 갇힌 자, 죄에 갇힌 자 더 이상 자력으로 뭘 해볼 도리가 없는 자에게 그냥 사면을 선포하는 거예요. 이게 줄곧 안식일이 그리스도와 만나야 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지켜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십자가 피를 흘리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의 안식일은 뭐냐? 이미 우리 신체 속에 들어있는 언약을 겨냥해서 안식일이 왔고 그 언약을 두 조각난다. 하나는 네 신체가 지옥 갈 신체인지 천국 갈 신체인지 미리 하나님께서 이 정보를 인간을 만들 때마다 심어놨어요. 심어놓은 걸 아까 행렬로 A₃₂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A 뒤에 ‘천국’라는 것이 먼저고 이걸 위해서 우리의 신체를 이 땅에 생년월일 정해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우리가 걸어 다니는 지옥이냐, 걸어 다니는 천국이냐? 그거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합치도록 이끄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안식의 완성의 신체성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안식일에 담긴 완성의 의미가 우리의 평소의 삶과 행동과 말씨와 태도와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마구마구 발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게 된 것을 고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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