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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22: 17 / 예수님의 호주머니 / 190503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22: 17 / 예수님의 호주머니 / 190503

정인순 2019. 5. 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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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90503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예수님의 호주머니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레위기 22장 17절부터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우거하는 자가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열납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레위기도 마찬가지고 율법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원하는 걸 제시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의 법을 대하면 인간이 거북스러워요. 평소에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거든요. 내가 하고 싶다는 스케줄은 누가 정하느냐? 본인이 정한단 말이죠.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정하고 그 일을 내가 함으로써 사는 즐거움과 보람을 얻겠다.

그런 생각이 투철한데 그 생각에는 무엇이 끼어들 수 없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식으로 살 테니까 제삼자는 좀 내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라는 그러한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어요. 내 인생은 즐거운 데로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시하는 게 아닙니다. 일종에 하나님이 갑질하는 느낌이 들지요.

내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강제하듯이 아랫사람 지시하듯이 하게 되면 뭐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을 주관하고 마지막에 심판까지 관장한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주기는 해주지만 썩 내켜서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겁니다. 속으로 어이 더러워서 해주자, 이런 식으로. 안 해주면 삐져서 내 인생 가로막고 나설 게 뻔하기 때문에 해주자, 해주자.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해주지, 뭐.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인간들이.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별로 감사하고 아주 좋은 기분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기껏 인간 쪽에서 내세우는 협상이 이런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싫더라도 억지로라도 해줄 테니까 그 일이 성사되고 난 뒤에는 내가 원하는 걸 하나님께서 들어줄 거요, 말 거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죠.

일해 주는데 공짜는 없다.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억지로 해줄 테니까 그 반대급부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우리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럼 우리 원하는 게 뭐냐? 우리 가정 행복하고 건강하고 사업 잘 되는 거죠, 뭐.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제시한 이유는 이미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버린 자식이거든요. 버린 자식인데 하나님은 아는데 인간은 본인이 망가졌다는 것을 인정 안 하려고 합니다. 먼 나라로 선교 나갈 생각은 하지 선교사로 나가는 자신이 정상이 아닌 것을 선교사 본인이 인정을 안 하려고 해요. 신학교 나와서 목사 할 생각 말고 목사 하겠다는 내가 정상이 아니고 망가졌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게 문제란 말이죠.

근본적으로 어디 있느냐 하면, 이 몸이 몸을 하나 두고 나의 몸이라고 앞에 붙여서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쓰겠다는 겁니다. 고집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그 몸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고, 하나님에 속한 몸이라고 가져가는 거예요. 중간에 이 몸이 죽을 지경입니다. 양쪽 다 고집이 세지요.

내 몸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쓰겠습니다. 주님은 이 몸은 쓰일 데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너의 만족과 너의 편함을 위해서 네 몸이 있는 게 아니고 네 몸은 달리 쓰일 용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 몸의 용도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쓴다고 주께서는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네 몸을 네 원대로 썼더니만 나온 결과가 개판 아니냐, 엉망 아니냐?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고 들어오시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이 탑을 하나 쌓게 되지요. 시날 땅. 그 탑 이름이 바벨탑이에요. 그 탑을 쌓으면서 인간들은 즐거워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의도를 보는 겁니다. 그 탑을 쌓는 목적이 있을 것 아니냐. 그 목적이 뭔지 이미 하나님은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까지 닿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 이름이 어중간하게 하나님께 닿지 않고 어중간하게 땅에 왔다가 땅에서 멈추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의욕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라갈 때까지 올라가보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할 의도로 바벨탑을 쌓는다는 겁니다. 거기서 이 몸, 육신을 자기들 뜻대로 사용하겠다고 할 때 이것은 인간 전체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뜻이 뭔지 완전히 들통 났지요. 우리 이름을 갈 때까지 가겠다, 높아질 때까지 높아지겠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인간의 목적은 결국 자기 이름의 영광성이죠. 자기 몸으로 자기 육신을 가지고 내 이름을 영광스럽게 만들겠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 의로움을 끝까지 하늘까지 뻗혀 보겠다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가치 있고 내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나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하늘 끝까지 땅 끝까지 펼쳐보겠다는 의욕을 모든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공통된 마음으로 공유하고 있더라는 것이 바벨탑 쌓는 것을 통해서 들통 나버린 거예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나님의 뜻은 뭐냐고 직접 아는 게 아니에요. 너희 뜻은 이거였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문제 거야, 라고 지적하는 형식으로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겁니다.

제가 인간의 뜻이 뭔지 먼저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뜻은 뭡니까? 자기 이름을 높이는 거예요. 바벨탑이 완공되지 못했지요. 중간에 흐지부지 됐지요. 그 말은 바벨탑 쌓는 걸 누가 방해했습니까? 하나님이 방해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태여 물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물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정답 나오지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저지하는 겁니까? 내 이름이 높아지는 걸 저지하는 그것이 곧 뭐다? 하나님의 뜻인 거예요.

별로 어려운 것도 없어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몸으로 내가 잘 되는 식으로 나가는 것을 저지하고 그걸 용납하지 않는 그것이 뭐나고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내 교회가 잘 되는 것은 그 교회 교인들이 이구동성 다 원하는 거예요. 그럼 그 교회에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제가 기본문제 이야기했으니까 응용문제에 답변할 차례지요.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그 뜻을 저지하는 게 하나님 뜻이죠. 교회 백날 커도 그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그 교회 교인들의 자존감과 자기 이름이 들어있지요. 일종의 바벨탑이잖아요. 그걸 저지하는 게 하나님 뜻이잖아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죄인인데 인간은 자꾸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거부해요. 이미 하나님께서 규정했는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규정했는데 인간은 지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세밀하게 우리에게 계속 추가적으로 준다는 이 말은, 계속 찾아온다는 이 말은 근원적으로 우리가 무엇이 죄인 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본인이 혼자서 끙끙 앓아 대면서 죄가 무엇인지 알아낸다고 죄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때 비로소 죄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분석해서 죄를 아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타인에 대해서 소홀히 한다든지 관심 없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바벨탑이 창세기 11장이죠. 창세기 12장에는 누구 이야기 나올까요? 아브라함 이야기 나오지요. 그러면 아브라함 이야기 나온다는 말은, 아브라함은 결국 누구 이름을 들고 등장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기 이름이 아니고 인간의 몸, 육이죠. 육을 긍정하는 자기 이름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이것은, 인간의 이름과 반대되는 게 누구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이죠. 언약의 이름, 또는 여호와지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처음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육의 이름이에요. 아브람은 본인의 이름입니다.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란 이름은 아브람은 상상도 못했고 예상도 못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 주의 이름, 약속이 오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요. 그러면 아브람이 육적인 이름이라면 아브라함은 누구의 이름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인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람이란 육체를 하나님의 원대로 사용했단 말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가볼게요. 인간의 몸은 하나인데 서로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태어난 내 몸이니까 내가 사용하겠다고 우기는 반면에, 이 몸은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 있는 몸이라고 자기 몸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브람 몸은 하나에요. 둘이 아닙니다. 하난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으로 보겠다는 거고, 아브람은 우리 아버지가 지어준 아브람으로 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가 니 아버지라는 거예요. 나타난 하나님이 진짜 네 몸의 아버지라는 겁니다. 생뚱맞은 이야기죠.

단순히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곱게, 곱게 이전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아브람 자신의 고집과 죄성과 불신앙이 거기서 도출되는 거예요. 생산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서 나온 이스마엘은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약속된 자식은 네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함이 분명해졌을 때 이제 자식을 낳을 기미가 전혀 없을 때 그걸 몸이 죽었다고 해요. 태가 죽은 것이 확실해졌을 때에 죽은 태에서 임신되어 생산되는 그 자식이 하나님이 아브람 네 몸을 사용하고 네 아내 몸을 사용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고 나오는 겁니다.

들어보면 어렵지 않지만 이게 현실에서 그런 사례를 찾는다는 것이 상당히 불가능하고 난해하지요. 이론상 어렵지 않은데 현실적으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의아해할 정도로 특이한 거예요. 여러분, 신앙은 특이한 겁니다. 개나 소나 교회에서 세례 받는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니에요. 내가 미쳤나 할 정도로 특이해야 돼요.

제가 특이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꾸준히 내 몸으로 내 편한 데로 내 행복 위해 살고 내 가정 잘 되고 돈 잘 벌면 그만이지. 그게 하나님 믿는 뜻이지, 뭐. 이런 식으로 평소에 거기에 너무 몸이 젖어 있고 그런 식으로 인생을 평생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제가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진짜 신앙인이라는.

지금까지 강의한 걸 요약하게 되면, 몸은 분명히 하난데 각자 쓰시겠다는 양쪽에서 이 몸을 서로 가져가겠다는 그런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어요. 그러면 몸을 어떻게 쓰시는가? 오늘 본문 레위기에 나오듯이 율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가 강의 처음에 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건 우리가 원하는 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아까 누누이 이야기했잖아요. 원하는 것은 내 몸이니까 내 행복을 위해서 사용할 테니까 손대지 마세요. 이게 우리가 원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거는 하나님의 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위한 원칙들이 제시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걸 주는 원칙이 아니고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나를 붙드는 손모가지를 떨어트리는 거예요. 손 떼라. 네 인생에서 네가 손 떼라. 이게 주의 법이에요.

내가 내 몸에서 손 떼는 걸 신약에서는 구약도 마찬가지지만 이걸 죽음이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릴 텐데 이 죽음이란 게 왜 필요한지 나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 육체를 위해서 자기 육체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썩어진 걸 거둔다. 이건 뭐냐 하면,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네 육체를 네 원대로 사용한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란 말이죠. 따라서 죽어있는 상태에서는 인간이 자기 육체를 자기가 관리해봐야 그것이 생명이 될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는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란 말이죠. 성령을 위해서 심는다는 것은 육체를 넘겨주는 거예요. 제 육체가 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하고 주님한테 자기 육체를 인수인계하고 넘겨주는 거예요. 넘겨주게 되면 우리란 뭐냐 하면, 내가 저돌적으로 들이대고 설쳐대는 게 아니고 우리는 내 육체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애쓰고 그 결과물을 따먹는 식이에요. 하나님이 이 몸을 다뤘고 우리는 이 몸에 의해서 얻어진 것을 그냥 누릴 뿐입니다. 가게 열어놨는데 손님 오고 안 오고는 우리가 애썼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주께서 손님 보내주면 그 덕으로 밥 먹고 사는 거고 손님 안 보내주면 못 사는 거죠.

그럴 때 오늘 하루도 육체를 위해 했는지 성령을 위해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장사든 뭐든 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덕분에 오늘도 수입이 짭짤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 몸을 하루 종일 움직였던 모든 움직임에서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얼굴들 보니까 평소에 매일같이 그렇게 사신 것 같은데……

평소에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걱정 되면 자기 육체를 위해 심은 거고 걱정 안 하고 살면 그건 성령께서 하신 거죠. 걱정한다는 건 뭡니까? 내 뜻대로 고집을 부린다는 뜻이거든요. 고집 부린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니에요.

다시 본문 돌아와서 정리하게 되면, 몸은 하나인데 서로 사용하겠다는 분이 양쪽에 따로 계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몸을 사용하실 때 어떻게 하시느냐? 율법을 주신다. 그런데 그 율법 내용은 내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내 뜻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전혀 그것과 일치되는 점이 없다는 것,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위해서 이 몸을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기 19절에 보면, “열납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라고 돼있지요. 보통 이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물을 되게 좋아하시는구나. 역시 하나님도 뇌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로 인간과 똑같네. 소나 양이나 드리자. 드리면 복 받겠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건 구약이니까 신약에 교회에선 뭘 하냐 하면, 하나님께 돈 바치면 하나님이 돈 받으시고 여러분께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줍니다. 이런 식으로 교인들의 은근히 원하고 있어요. 작은 돈을 드렸는데 큰 게 나왔다. 조금 드렸는데 30배, 60배, 100배로 크게 들어왔다. 이건 세상 말로 뭡니까? 돈 놓고 돈 먹기 아닙니까. 앞에 뭘 태우란 말이죠. 태우면 아다리 된다는 거예요.

마중물이라 하지요. 뭐든지 바쳐야 그 바친 걸 보고 최소 30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서영춘이란 코미디언이 잘 이야기했어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있어도 뭐 없이는? 컵이 아닙니다. 꼽뿌 없으면 못 마신다 했어요. 그러니까 그냥 있지 말고 뭔가 천 원이라도 하게 되면 아다리 되면 30배니까 3만원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도박판이에요. 주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네가 복을 못 받는 것은 안 바쳐서 못 받는다는 겁니다. 성급하게 그런 식으로 해석해버려요. 이걸.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 뭘 바쳐도 내 몸은 내가 관리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돼버려요.

하나님 이용해서 나는 원래 잘 되길 원하는데 내가 힘이 모자라니까 하나님께 뇌물을 주게 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내 뇌물 받으시고 양심적으로 섭섭하게 하실 분은 아실 거고, 네 정성이 갸륵하구나, 해서 30배, 60배 주신다. 이 약속을 믿어라. 믿습니다, 하고 안 믿으면 안 돼. 믿으면 그만큼 실제로 살아 계신 증거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기 뜻에 놀아나는 거죠.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몸은 누구 것이 됩니까? 자기 것이 유지되고 이것은 곧 뭘 뜻하느냐 하면,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뭘 원해요? 자기 이름이 잘 되는 것, 자기 자신이 잘 되는 것을 원한다는 인간이 자기 이름에 대해서 못 돌아서요. 돌아설 수 없어요. 자기 잘 되는 것에 대해서 발을 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것으로 드리되 반드시 수컷으로 드려라. 암컷이 아니고 수컷으로 드려라. 그러니까 하나님, 암컷이고 수컷이고 간에 인간이 주는 대로 받으시면 안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은 니 생각이고 네가 네 몸을 생각할 때 그렇게 안일하게 한 거고 하나님께선 네 몸으로 반드시 제물 드릴 때는 수컷으로 드려라. 네 몸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수컷이어야 한다는 뜻과 관련성 있어야 한다는 걸 하나님이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수컷이야 하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 돼요. 왜 암컷은 안 되고 수컷이냐 말이죠. 좀 더 어렵게 말해서 암컷, 수컷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왜 그렇게 따지십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어떤 구조로 짜여 있기에 굳이 수컷이어야 됩니까, 라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면 안 되지요. 알고 있어야 되겠지요.

창세기 15장 8절에서 9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찾아오는 대목이 있는데 유독 거기서 암컷과 수컷을 예리하게 구분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물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물이란 하나님의 반영이에요. 제물이 거울이라면 그 거울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담기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담겨있고 본질이 담겨있어요.

그런데 반드시 어떤 제물이든 항상 어디에 놓습니까? 제단 위에 놓지요. 제단 위에 얹어놓기만 합니까? 여기에 불이 들어가지요. 제단 위에 불이 가미된다는 것은 이 제물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예쁘게 화장하겠다는 뜻이에요, 뭐예요? 제물이 분명히 있잖아요. 있는데 홀라당 다 태우겠다는 겁니다.

제물 태우는 것, 이게 죽음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본 얼굴, 본성, 본질은 어디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한 죽는 사건 안에서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다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새 언약이라 할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린 양이라 보지요. 요한복음 1장에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죠. 자기를 어린 양으로 보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도 새끼 양이라고 예수님을 양으로 보는데.

양으로 본다는 것은 예쁘다, 참하다, 토실토실하다 그런 뜻이 아니고 이것은 바로 죽기 위한 제물이란 뜻이에요. 누가요? 예수님이. 그런데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아는 거예요. 아들은 아버지의 내부입니다. 아버지 안에 아들 들어있어요.

그런데 아들이 그냥 멀쩡하게 신장 얼마, 체중 얼마, 이렇게 나타나는 게 아니고 그 아들이 우리에게 보여줄 때 아들을 휘감고 있는 아버지의 짊어진 뜻이 있어요. 그 뜻이 사건인데 그 뜻을 하나님의 원리원칙이거든요. 하나님의 원리원칙이 어떤 사건화 되어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다 보여준 겁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죽는 십자가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나타날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죽는 하나님이에요. 너희들 뜻을 살고 싶지. 아버지 뜻은 죽는 거다. 너희 뜻과 정반대되는 거예요. 너희들은 살아서 너희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데 하나님은 반대로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살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죠. 만날 수도 없는 거고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얼마나 엄격하고 두려운 거룩으로 인하여 저주받은 죽음이었어요. 죄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아버지께 버림받으신 거예요. 아버지 뜻은 뭐냐? 죄 있는 것은 아들이라도 버리겠다.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게 아버지 뜻입니다.

그런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가 몰라요. 모르는데 아버지 뜻에 의해 오신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 또는 아들이 이 땅에 아버지 뜻을 남기기 위해서 그 제물, 수컷으로 드리고 어떻게 드리고 세세히 율법으로 해놓고 그 율법을 제단에서 홀라당 다 태우는 겁니다. 아까 있었던 제물 어디 갔지? 다 태워 없앴어요. 이게 아버지 뜻이에요.

있음은 아버지에 의해서 없음으로 나가야 돼요. 있음이 그대로 있으면 안 돼요. 있다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없어져야 될 대상이다. 없어질 것에 불과한 거예요. 거기에 우리가 참여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나의 자존감, 자존심, 우리 가정은 어떻고 한 달 수입은 어떻고, 여러 가지 뒤에 줄줄 따라오는 게 많아요.

나는 인물이 예쁘고 잘 생기고 키가 크고 배울 만큼 배웠고. 내가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있단 말이죠. 우리 교회 교인이 몇 명이고. 그런데 주님의 제단 앞에 우리 몸을 던진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긴 꼬리 같은 있잖아요. 난 이렇게 배웠고 어느 대학 출신이고 이 모든 것도 제단에서 어떻게 됩니까? 홀라당 다 타는 거죠. 없는 거예요.

옛날 유명한 단편에 그런 것 있잖아요. 남편이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시장에서 제일 비싼 머리빗을 사줬는데 막상 아내는 머리를 홀라당 다 깎았어요. 남편 시곗줄 사준다고 있을 머리칼 다 잘라서. 하여튼 부부가 사고가 안 맞아. 좀 의논해보고 사야지. 이 땅에서 우리가 영생 얻고자 천당 가고자 준비한 모든 것은 일방적인 내 뜻이지 아버지 뜻은 그게 아니에요.

십일조를 삼십년간 빠짐없이 다 했고 적금 넣듯이 주일헌금 다 했고 개척교회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이슬비 전도지 해서 교회 데려오고 온갖 것 해서 준비 다 했어요. 경건하게 살고 파출소 한 번 안 가고 부부싸움, 누구한테 욕 한 번 안 하고 과속도 안 하고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이만큼 준비하면 절 받아주시겠지요? 뒤에 구구절절하게 되도 않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많이 하게 되면, 니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딴 게 아무 소용없어요.

살아서 뭘 하겠단 말입니까? 그냥 죽이는 대로 죽어 가면 그만이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제물을 바치란 말은, 너는 제물처럼 같은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제물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리고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합류되는 메시아가 오게 되는데 그 메시아도 너와 똑같이 이 땅에서 죽어야 될 운명이다.

그러면 구원받아야 될 너도 죽고 구원시켜주려 온 메시아 죽고 따라서 그 둘이 합쳐서 하나님의 제물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란 그 제물에 예수님도 계시지만 사도 바울도 거기에 함께 죽는 겁니다.

자, 그런데 같이 죽으면 합동 자살이 되잖아요. 우리는 죽는 게 마땅하지만 죽지 않아야 될 분, 죄가 없으신 분이 죄를 위해서 함께 죽었다면, 함께 죽었던 그분이 그분의 의거든요. 그분은 그 의는 부활로 이어져야 되는 거예요. 죽을 때 두 사람이 죽었는데 한 사람이 먼저 부활되고 난 뒤에, 그걸 부활의 첫 열매라 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죽음에 참석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에 참석한 사람에게만 두 번째 부활이 주어지는 겁니다. 부활절 지킨다고 부활을 믿습니다, 해서 천당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해야 돼요. 같이 죽고 난 뒤에 한 사람이 살아나서 그분이 죽은 사람을 살려주는 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참 쉽지요. 구원이. 억수로 쉬워요.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 어려우냐 하면, 나는 이미 죽은 자다, 라는 이 서술 이 문장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겁니다. 왜? 죽기에는 너무 잘 생겼기 때문에, 죽기에는 너무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죽기에는 너무 성실한 가장이라. 성실한 주부고 훌륭한 어머니고. 나 죽으면 자식들 걱정 돼서 죽은 자 되기 싫어. 아직도 내 친구들은 낚시로 놀러가고 그러는데 나 죽어버리면 죽은 자한테 아무도 안 오잖아요.

우리는 내가 죽었다는 이 현실을 계속 피하고 돌아다닙니다. 계속 기피해요. 안 들은 걸로 칩시다, 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얼마나 내가 잘났는지를 뽐내면서 평생을 살고 싶어 해요. 나 이렇게 살아왔고 보상받고 잘 되고 있다고 그것 떠벌이고 사는 거예요, 계속.

그렇다면 여기서 아까 배운 것 다시 해봅시다. 같이 죽을 때 예수님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이름으로 아버지 이름으로 죽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죽을 때 누구 이름입니까? 고집스런 내 이름으로 하지요. 그러면 내 이름은 죽고 주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를 교체해야 되겠지요.

살아날 때 다시 내 이름으로 살아나는 일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지요. 그 자체가 죄니까 그게 바벨탑이니까. 내 자체가 탑 아닙니까? 우리는 거울 앞에 하나의 탑으로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거예요. 난 왜 이리 예쁜 탑이지, 이런 식으로. 오늘 화장 잘된 탑이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하늘까지 하나님이 알아주기까지 하나님이 내 잘남을 공유해서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게 매일같이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우리의 기본적인 탐욕이거든요. 오늘도 기도했으니까 응답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거요. 착한 일했으니까 우리 가정에 복을 듬뿍 주시옵소서. 이런 식이에요. 자기 이름을 포기할 줄 몰라요. 포기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고 또 배워서 될 문제도 아니고. 본능이니까.

따라서 주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교체가 되겠지요. 주의 이름으로 부활되잖아요. 부활하신 분이 찾아오게 되면 성령으로 오시거든요. 성령으로 오시게 되면 인간의 몸을 나의 이름에 포박되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모든 일되신 주를 위한 몸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성령께서 가만있지 않고 계속해서 활동을 하겠지요.

그러면 죽을 때는 수컷으로 들어가요. 나올 때는 암컷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15장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 이렇게 돼있지요. 처음에 삼년 된 암소, 암염소라 해서 이게 암컷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여자를 먼저 창조한 게 아니고 남자를 먼저 창조한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는 순서가 남자가 먼저가 아니고 여자가 먼저입니다. 이미 범죄 한 인간을 구원할 때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인질로 잡힌 자기 백성을 구해요.

뱀의 후손과 싸우는 자가 남자에요, 여자에요? 남자라니까요. 처음에 창조할 때는 수컷이 먼저고 수컷 때문에 뒤에 암컷이 만들어졌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3장 이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약속을 할 때는 그 약속에서 주인공은 수컷입니까, 암컷입니까? 남자에요, 여자에요? 여자 아닙니까, 여자.

남자의 이름이 흙이에요. 그런데 하와란 이름의 뜻이 뭐예요? 생명이잖아요. 이 말은 남자는 생명이 아니란 말이죠. 생명이 어느 쪽에서 시작한다? 여자 쪽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여자가 흙에 죽음에 불과한 남자에게 생명을 부여하게 되면 죽은 남자가 여자 덕분에 사는 겁니다. 페미니즘인가. 그게 여자의 후손이에요.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마리아가 여자라나 말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여성성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선조는 후손이 갖고 있는 내용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성질이 뭐냐 하면, 이 땅에 지상에 어떤 인간의 뜻이 포함되지 않아요. 하늘의 뜻이에요.

하늘의 뜻이 있다는 말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럼 약속이 뭐냐?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약속이라면 예수님의 예수님 됨은 인간에 포함되지 않는 그것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 세상은 범죄 하고 난 뒤에 남자의 세계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 복속해야 되고 남자를 사모해야 되고 남자 없이 못 사는 그런 식으로 됐어요. 이 세상은.

따라서 여성이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칙으로 여성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제가 괜히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고 갈라디아서 4장에 있는 말씀인데 전에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지상을 대표하는 남자와 하늘을 대표하는 여자에서 남자에 속한 자식은 육에 속한 자식이지만 하늘에 속한 자식은 영에 속한 구원에 속한 자식인데 그것으로 어머니가 이 지상에 없다고 본 거예요.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로 표현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성이란 마리아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이 지상의 사람이 아니란 걸 표현하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도 아닌 것 같은데 하는 표정이라서 자꾸 설명이 가해지는 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창세기 15장 8절과 9절에서 제물이 높은 단계가 있어요. 소나 염소는 높은 단계에요. 양은 낮은 단계에요. 높은 단계의 제물의 암수 구분은 뭐냐? 암컷이에요. 낮은 단계는 수컷입니다.

제물은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모습이죠. 하나님의 모습이나 하나님의 사건들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하늘에서 땅에 있는 자를 건져내는 거예요. 건져내는 데 그게 함축되어서 바로 제물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언약이거든요. 그런데 레위기에 있는 것은 아브라함언약의 전개과정에서 세밀화 된 모세언약에 속한 것을 오늘 레위기를 보고 있는 겁니다.

여기 보면 소나 염소나 양이라 할 때 반드시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라는 말은 암수를 구분하겠다는 내 의지가 제물 속에 수컷이라는 말 속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암수를 구별하겠다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남자의 후손을 구별하겠다. 그 뜻이에요.

성경에 창세기에 여자의 후손 나오지요. 거기에 남자의 후손은 안 나와요. 여자의 후손과 대결하는 것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뱀의 후손이에요. 왜 뱀의 후손이냐? 인간 전체가 남자든 여자든 마귀에 속한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하늘에 속한 겁니다.

지상에서 제사 드릴 때 수컷으로 제사 드린다는 말은 수컷으로 드리는 이 제물은 보다 상위 높은 위치 위상의 차이에 의해서 이들의 운명이 바꿔지는 예비단계에서 반드시 수컷으로 드려야 된다. 수컷에서 결국 어디까지 가요? 암컷으로 가야 된다. 이거는 땅에서 드리는 제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땅에 속하지 않는 분의 제사로써 완성이 된다는 걸 뜻하는 겁니다. 나타내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듯해서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이건 좀 아재 개그 같은 유치한 거지만 잘 들으세요. 어떤 사람이 편의점에서 주머니에 빵을 집어넣었어요. 동네 한 바퀴 돌고 30분 뒤에 빵을 주머니에 넣었던 그 자리에 아저씨가 서있다고 한다면, 빵의 위치가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지요. 뺑 돌다 그 자리에 왔기 때문에.

그런데 위상은 어떻게 돼요? 선반 위의 빵이 어디에 있어요? 그 사람 주머니에 있지요. 그게 위상의 변화잖아요. 신약에 보면 구원받을 때 예수 안에서 구원받거든요. 예수님 주머니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아저씨 빵 좀 봅시다. 보니까 단팥빵이라. 처음에 선반 위에 무슨 빵? 단팥빵. 주머니에서 꺼내놓은 것도 단팥빵. 전혀 달라질 게 없어요. 성령 받기 전에 단팥빵, 성령 받은 후에 단팥빵. 남들은 위상의 변화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 믿을 때고 세끼 먹고 예수 믿기 전에도 세끼 먹고. 달라질 게 전혀 없어요.

그러나 예수 안이라면 위상이 바뀌는 겁니다. 전에는 누구 안이라는 게 없어요. 누구 호주머니 안에 들어있지 않았어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갈취했어요. 나를 강탈해서 자기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죽는 것은 똑같이 죽는데 죽는 모습 보니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별 다른 게 없는데 위상이 달라요, 위상이. 한쪽에선 수컷이었는데 나중에 암컷으로 바뀐 여자의 후손에 속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부부가 날 태어나게 했는데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하늘의 어머니가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단 말이죠.

주님이 손댄 거예요. 주님이 위상이 바뀌게 한 겁니다. 그 위상변화가 레위기에 율법 안에 그 내용이 담겨있는데 보다 자세한 것은 10분 쉬고 둘째 시간에 해봅시다.



20190503b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예수님의 호주머니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2장 17절에서 예수님이 흠 없는 수컷이라 할 때는 딱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 자신이 아들이라는 사실. 유대인들이 제물을 수컷으로 드리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가? 말씀에 수컷의 제사를 드리라 했으니까 드리면 완성이 되는가? 아니면 제물 자체가 수컷 되신 분이 스스로 드리는 게 완성이냐, 하는 그것으로 신약 때까지 계속 경쟁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제가 첫째 시간에 예수님은 암컷 요소를 갖고 있다고 했지요. 하늘의 요소. 예수님이 지상에서는 여자의 후손, 아들로 오신 거예요. 위에서나 아래나 제물은 사람이 신에게 바치는 게 아니고 제물 자체가 누구냐는 쪽으로 겨냥하는 것을 지향하면서 제물을 바쳐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제물 드리는 그 당사자는 결국은 예수님과 경쟁해서 우리 자신이 하는 제사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제물이 21절 끝에 보면, “아무 흠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라고 돼있지요. 점점 추가적인 법이 계속 제시되는 겁니다. 23절에 보면, “우양의 지체가 더하거나 덜하거나 한 것은 너희가 낙헌 예물로는 쓰려니와 서원한 것을 갚음으로 드리면 열납되지 못하리라” 추가적인 지시사항이 계속 부여되지요.

24절에 보면, “너희는 불알이 상하였거나 치었거나 터졌거나 베임을 당한 것은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계속해서 온전한 것, 완전한 것을 추가적인 요소가 주입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의 조항을 지켰다고 해서 이제는 지켰으니까 우리 행함을 근거로 해서 천국 넣어주세요,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인간이 애를 써도 율법이 요구한 대로 다 들어줄 수 없습니다. 천 개를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되니까.

그러면 인간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죠.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말은 미흡하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최선을 다할 뿐이지 완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말씀에 스스로 모순돼요. 완전한 것을 바친다 해놓고 완전하지 못한 것을 오히려 들춰낸다면, 이것은 말씀에 해당되는 어떤 분이 하늘에서 특별히 말씀을 완성할 분이 따로 오셔야 된다는 것을 내다보고 하는 예언입니다. 레위기가.

우리가 손 놔야 되겠구나. 그래서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번제나 제사를 원치 않는다 했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상한 심령이다. 우리 몸 자체가 말씀을 지키는 데 부합되는 몸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게 아니고 알아도 지킬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 이 말이죠.

정리해봅시다. 말씀을 주시는 데 이 말씀이 몸의 온전함을 원하는 데 온전함에 미흡하게 되면 우린 탈락이 되는 거예요. 제사 드려도 소용없는 겁니다. 사실은 모든 율법이 이 점을 내다보고 있어요. 출애굽기 21장 24절에 보면 율법은 몸과 몸을 비교하면서 몸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교체하기 위한 용도로 법이 주어졌다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이렇게 돼있어요.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3~25)

고대 바벨론에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있거든요. BC 18세기 쯤 되는데 169조에 보면, 남의 눈을 빼는 자는 필히 그 사람의 눈을 빼야 된다는 대목이 나와요. 법이란 몸에 대해서 몸으로 갚으라는 그것이 법으로 규정돼있습니다. 법은 왜 있느냐 하면, 몸의 가치를 지키는 용도로 법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오늘날 헌법, 상법도 마찬가지에요. 형사법, 민사법도 다 마찬가지고.

방금 읽은 출애굽기 21장 24절 말씀에도 마찬가지로 이는 이, 눈은 눈으로 돼있지요. 법이 뭘 보호하느냐 하면, 지켜야 될 몸을 지키겠다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몸에 대해서 주인이 따로 있다고 했지요. 주님이 주인이고 그 몸을 지키기 위해서 법이 추가되는 겁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려면, 몸이 원래 누구 몸이냐 하면, 인간이 자기 몸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 몸이라면 그 몸이 하나님의 원래 취지에 부합되는지 보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발에는 발, 손에는 손, 할 자신 있나? 묻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정신의 확대로 보는 겁니다. 확산 된 것으로 봐요.

원래 간통, 간음을 사람들은 간음이라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을 뭐로 봅니까? 간음으로 보는 거예요. 나는 정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정신도 몸의 일부로 보는 거예요. 예수님 정신 따로, 예수님 몸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몸이 정신이에요. 전부 다.

성도를 예수님의 몸의 지체라 하지요. 우린 그걸 안 보인다고 정신이라 하지 마세요. 그냥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가 근육질 몸에서 멈추면 안 되고 몸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것도 주의 몸의 일부에요. 성도를 건드리면 주님을 건드린 게 돼요. 몸의 일부니까. 몸의 지체를 건드린 거니까.

사람들이야 지 몸 따로, 정신 따로 있지만 주님께는 그런 게 안 통한단 말이죠. 네가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어떻게 합니까? 빼버려라. 오른 눈이 범죄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오른 몸으로 정신적으로 범죄 하지요. 우리가 아는 건 그겁니다. 오른 눈이 갑자기 빠져나와서 돌아다니고 이게 아니고 오른 눈으로 보이는 것이 우리의 정신에 작용해서 정신적으로 우리는 범죄 하는 걸로 돼 있잖아요.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오른 눈이 범죄 하면 오른 눈을 빼버려라. 그게 빠진다고 왼 눈이 가만있겠습니까? 정신이니 육체니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자기 몸인 줄 알고 자기 몸을 다루는 방식이 그렇게 제한적인 거예요.

결국 하나님께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에 몸을 주신 관계 속에서 그걸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가운데서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관계가 나오는 겁니다. 그 예가 레위기 22장 26절, 27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 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 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 되리라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수컷이냐, 암컷이냐 이야기했잖아요. 수컷이란 것은 배후에 더 높은 단계, 암컷의 단계에 아브라함언약이 있지만 레위언약에선 수컷이라 해서 누군가 와서 몸소 와서 율법을 외면하지 않고 친히 다 지켜나가시는 어떤 분이 있는데 그분과 율법을 지키는 너와 경쟁관계에 돌입된 거예요. 수컷과 수컷의 싸움이니까.

이 세상의 여자들은 그냥 수컷에 소속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수컷의 일부라고 보면 돼요. 여자라도. 왜냐하면 남자의 소속이니까. 그래서 자식 낳으면 엄마가 낳은 게 아니고 누가 낳았다고 합니까? 아버지가 낳았다 하지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들을 엄마 키워주는 셈이 되죠. 정철의 시조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 어찌 살았을까”

마태복음 1장에도 나오잖아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지요. 이삭이 야곱을 낳고. 남자가 남자를 낳는 것으로 돼있어요. 왜냐하면 남자가 대표자니까. 이 땅은 수컷이 대표자에요. 그 수컷의 세계에서 진정한 수컷은 너희들 맞느냐고 주님께서 수컷의 아들로 제물로써 이 땅에 들어오신 거예요. 신약에서 보면.

구약에서 보면, 수컷 드리라 하면 그냥 무심코 수컷 드리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과연 그것으로 온전해지겠느냐는 겁니다. 온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추가적으로 율법이 더 세밀하게 온전함이 계속 주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몸과 정신 관계에서 가장 좋은 예를 들라 하면 바둑과 바둑돌로 잘 알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 최상급 바둑돌과 수십 만원하는 비자나무 바둑판에서 두 사람이 바둑 두는 경지, 바둑의 솜씨와 프로 9단, 우리나라에서 바둑 제일 잘 둔다는 박정환 9단과 신진식 9단이 바둑 둘 때 바둑알이 낡았어. 바둑판도 두껍지 않고 그냥 동네 할아버지 바둑판이에요. 그럴 때 바둑 두는 수준이 어느 쪽이 높습니까? 바둑알이 못 해도 수준 차가 나지요.

우리가 예수 믿는 데 내 몸 핑계대지 말란 말이죠. 주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이에요. 그런데 아버지 뜻을 다 이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리 핑계가 많은지. 이장한다고 핑계대고. 돌봄 교실에다 전래동화 할머니라 해서 한복 입고 가르치는 게 있어요. 한 달에 오십 만원 주는가. 그런 것들이 다 나의 이름이 빛나는 영광을 위한 일이거든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될까요?

아주 흔한 예를 듭시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변호사가 돼서 돈 밝히지 않고 어려운 사람 위해서 변호했다. 그럼 그 변호사 천당 갑니까, 지옥 갑니까? 마땅히 지옥 가지요. 마땅히 지옥 가는 거예요, 그 사람은. 왜? 인간은 자기 행함에 의미를 자꾸 부가하는 더러운 버릇이 있어요. 돈 안 밝히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억울한 자를 위해서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변호했다. 지옥 가서 변호 많이 하세요.

인간은 어떤 일을 행해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그리스도와 수준에 안 맞는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과 아담의 아들과 비교해봐라. 대결해봐. 그 정도로 해서 하나님이 받아주는가. 안 받아줘요.

바둑돌 탓하지 마세요. 살아온 환경이 어려워서 예수 안 믿는다는 그런 탓하지 마세요. 돌 문제가 아닙니다. 꼭 기타 못 치는 것들이 기타 탓하고 있어. 농사 못 짓는 게 꼭. 목수가 연장 탓한다 하잖아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든지 하나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만 부인한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우리를 해부해요.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 우리 자신을 해부합니다. 해부하는 방법이 17절에선 수컷이냐, 암컷이냐? 이번 28절에선 어미와 자식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먼저 이것과 비슷한 구절이 두 군데 더 있기 때문에 그걸 읽어드리겠습니다.

신명기 14장 21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신명기 22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첫째 시간에는 암컷이냐, 수컷이냐 따졌지요. 내가 따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분한다니까. 암컷은 안 된다. 수컷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제물은. 그런데 아브라함언약에선 뭡니까? 수컷이 있는데 수컷의 단계가 낮은 단계였어요. 구체적 단계, 실제적 단계에요. 상위, 높은 단계는 마치 하나님의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은 암컷이에요.

수컷은 지상에서 말씀을 지킬 때 수컷이 대표자가 돼야 된다. 왜? 이 세상은 아담의 세계기 때문에 아담이 자식을 낳기 때문에 그래요. 자식 낳아도 아담 이름으로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남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계시록 12에서 여자가 자식을 낳는 게 아니고 아들을 낳는다 했어요. 이 여자는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죠. 하늘의 요소가 예수님을 낳습니다. 마리아는 그냥 몸을 빌려준 거고요. 마리아 의미 없어요.

그렇다면 왜 어미 새와 새끼를 같이 잡지 말아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육의 관계의 해부와 재결합 원칙 때문에. 해부한 거예요. 쪼개는 겁니다. 인간의 몸이죠. 몸에서 몸이 나옵니다. 이게 번식이라 하는데 어미의 몸에서 자식이 나와요. 이걸 세상에선 번식이라 하는 겁니다. 이건 육의 세계에서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육으로 난 것은 뭐로 끝납니까? 육으로 끝나요. 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어요. 제가 아까 갈라디아서 4장 24절 이야기했지요. 잉태치 못한 자가 인간의 육으로 잉태하지 못한 자가 어디 간다? 하늘에 천국 가는 겁니다.

아까 강의한 것 다시 해봅시다. 육의 몸에 누가 합류해서 동반자살, 동반해서 죽었다 했지요. 제물은 죽음을 표현한다 했지요. 제물은 불태우니까 죽이는 거예요. 육을 죽이는 거예요. 육을 죽일 때 혼자 죽으면 소용없어요. 그냥 육의 죽음이에요. 육을 죽이는데 함께 죽으신 분이 있지요. 예수님이 함께 죽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뭐냐 하면, 성령께서는 그 점을 우리에게 계속 각인시키는 겁니다. 네 몸은 예수와 함께 주님의 호주머니에 함께 있는 한 너는 영생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을 계속 성령이 와서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육은 육만 달랑 있는 게 아니라 육의 본성이 있어요.

성경을 통해서 육의 본성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은 생존을 원합니다. 죽기 싫어해요. 죽기 싫다. 히브리서 2장 15절 말씀이에요. 죽기 싫어서 인간은 의식주를 원해요. 의복과 식사와 주택, 이걸 원한다고요.

여기에 대해서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언급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뭘 원해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생각한다 했지요. 이게 다 이방인들, 천국 상관없는 인간들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육은 생존이에요.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 이게 모토가 돼있습니다. 이게 삶의 목표로 돼있어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광야에서 마귀가 기다렸다가 예수님 만나서 테스트하고 시험하고 유혹할 때 강압과 협박 공갈할 때 뭐로 했습니까? 의식주로 한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협박 공갈했다는 것은 지금도 마귀가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너 그러면 굶어죽어. 너 살고 싶잖아. 죽으면 모든 게 소용없잖아. 네가 살아남아야 그게 남는 장사야. 계속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단 말이에요. 수시로. 그걸 공부해야 압니까.

모든 예능프로나 드라마가 전부 다 이거에요.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느냐? 경제문제, 정치문제도 마찬가지고. 골목식당 문제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살아남아야 되는 거예요. 부부가 자식들 교육시킬 때 너 그래서 굶어죽어. 공부 그렇게 게을러서 게임만 하다 굶어죽는다고 그것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부모가 자식들한테 그렇게 하느냐 하면, 본인이 거기에 꽂혀 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 외에는 말할 건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이게 인간의 육의 한계입니다. 아까 갈라디아서 6장 8절에서 사람이 육을 위해 심는 자는 썩어질 시체를 거두잖아요.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시체 되라고 강요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공부해, 하는 것은 빨리 죽어서 시체 되라는 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두 번째는 장래 미래를 생각한다고요. 이게 번식이에요. 생존의 욕구가 있는 반면에 번식의 욕구가 있어요. 번식을 이 세상에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뭘 번식합니까? 육에서 영을 번식해요? 아니죠. 육에서 육을 번식하는 거예요. “우리 결혼할까요?” 이게 뭐예요? 우리 번식할까요, 에요. 우리 날 잡을까요, 이런 것. 우리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삽시다.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 좀 투박하지만 비 낭만적이지만 우리 번식할까요. 바퀴벌레와 차이점 없어요.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I love you~~ 이게 번식의 표시에요.

그래서 자식이 돈 좀 벌고 인물 멀쩡한데 장가를 안 가려 해. 시집을 안 가려 해. 그러면 부모는 육적 본능에 의하면 그게 짜증나는 거예요. 빨리 결혼하라 하지요. 차마 그걸 투박스럽게 표현은 못해. 빨리 번식해야지. 이 말은 못하고 빨리 결혼해서 손자 한번 보고 싶다. 내 나이면 손자, 손녀 다 있어. 그런데 너 때문에 못 보고 있다. 빨리 가야 손자, 손녀를 낳지. 이게 인간의 육의 번식이에요. 한평생 부모로 하는 짓거리 보세요. 평생을 지옥 갈 짓만 하고 있는 거예요.

세 번째는 생존하고 번식하면서 가장 숨어있는 욕망이 나옵니다. 그건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명예, 자기 이름 빛내는 것,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의미를 드러내는 것. 이건 아까 바벨탑 이야기했지요. 이걸 함축적으로 자기 의로움.

그러면 십자가는 이 세 개를 다 지워버리는 거예요. 번식, 자기 의 다 조지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육 자체가 율법에,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기 때문에 이걸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이걸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이에요. 지옥 구경하려면 실컷 하세요. 육의 세계, 이게 지옥입니다. 이것 고대로 가요.

지옥은 나사로 앞집에 부자가 지옥 가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잖아요. 이 땅에 있는 울산바닥에 있는 사람들 똑같은 짓이 곧 지옥이에요. 그걸 다시 풀이하면 지옥을 앞당겨서 체험케 하는 거예요. 성도로 하여금. 자기의 생존과 번식과 자기 잘남, 뛰어남, 자기 우수함 대화의 내용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교회 부흥됐다, 우리 집안 잘됐다, 이런 것. 우리 애 또 합격했다, 이런 것. 전부 다 지옥에서나 나올 수 있는 메아리 울림이에요. 대화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것 말고 무슨 대화할까요? 대화할 것 없지요. 이것 말고 할 게 없어요. 그저 주님의 복음을 이야기하지. 그것도 주님의 복음을 왜 이야기하는 데요? 주님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일번, 이번, 삼번을 은근히 노리고 하는 짓인데. 전도하는 것도 은근히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니까 생계 유지해줄 거고. 번식, 번식 그만하자. 하나 낳았으면 됐지. 세 번째 자기 의는 한도 끝도 없이 계속 가잖아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는 지옥다워야 돼요. 이 사람이 누구냐? 이미 천국 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지옥다운 것 외에는 다른 걸 내세울 재주가 없음을 인정해야 돼요. 내가 육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만 알고 성령 안 받으면 자기가 육인 줄 몰라요. 정상인 줄 알고 있어요. 육 자체가 비정상이거든요. 성령을 받아야 자기가 비정상인 줄 알지요.

자식들에게 남편한테 아내에게 이야기할 때 이 세 가지 말고 다른 내용 있습니까? 없어요. 특히 여자들은 번식, 가정의 행복이 전부에요. 자기가 애 낳고 키우다보니까 오직 모든 관심사가 가정에 있어요. 남자는 밖으로 싸돌아다니느라 바쁘고. 여자는 밖으로 돌아다니는 남자를 붙들어오느라 바쁘고. 물론 여자가 돈 번다고 남자가 살림하면 반대가 될 게 뻔하겠지만.

그래서 이러한 육을 하나님께선 어떻게 구원하느냐? 육의 내부를 분해합니다. 분해한 게 오늘 본문 27절에 나오지요.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 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 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 되리라” 지금부터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다시 정리해야겠어요. 제물이란 뭐냐? 제물은 하나님의 본성을 바깥으로 드러낸 거예요. 제물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죽음이죠. 그러니까 죽음을 표현하고 묘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암컷, 수컷, 그리고 어미, 새끼라는 이런 재료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육의 세계에서는 몸이 몸을 나니까 자식은 어미의 몸이 되고 부모의 초석이 돼버려요. 어미의 몸, 몸의 연장이 돼버린다고요. 같이 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보니까 어미 새와 새끼가 따로 있다. 둘 다 먹잇감이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한 몸이니까 잘 됐다고 저녁 찬거리로 둘 다 가져가죠. 아까 신명기에 보면 어미젖으로 새끼를 삶지 말라 했지요.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짐승의 어미나 새끼에 대해서 그다지 차이를 둘 필요 없지요. 둘 다 먹잇감이니까. 그 몸에서 그 몸이 나왔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의 육의 세계에서 구분하지 않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분리를 시킵니다. 구분지어 버려요. 어미 따로 새끼 따로 분명히 구분지어요. 마치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듯이. 수컷이어야 돼. 암컷은 안 돼. 아까 17절에서 봤지요. 수컷이라고 고집하는 그 법 안에 장차 누가 거기에 합류합니까?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거기에 합류해서 우리와 말씀 지키는 경쟁으로 삼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어미와 새끼를 구분지란 말은 그 가치를 둘 다 양식으로 음식으로 보지 말고 구분질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분리시키고 다시 재결합하면서 분리할 때 새롭게 밝혀진 추가적인 내용이 하나님의 본색적 내용이 분리되고 재결합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그 점에 주목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육의 상식으론 부모가 자식을 낳지요.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그게 반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게 아니고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먼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부모가 정해진 게 아니고 자식이 정해져 있어요. 그 자식이 자식답도록 결정된 자식을 위해서 그 목표점에 맞추기 위해서 필요한 부모들이 먼저 있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지상에서 전개하는 방식입니다. 언약의 방식이에요.

예를 들면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았잖아요. 그러면 이스마엘 dna 속에 누구 dna가 포함돼있습니까? 아브람의 dna가 포함돼있지요. 그러면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안 받는다면 뭘 안 받는 거예요? 나는 육적인 아버지로 행사한 그 자식은 안 받겠다는 거죠. 그러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구원이 되려면 본인이 시작점이 되는 방법으로서는 불가능한 거예요. 왜? 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지 자식 낳는 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가 자식을 낳아도 소용없다면 대안이 뭐예요? 예상 못한 자식이 등장해서 그 부모를 새로운 부모로 바꾸는 작전은 어때요? 그 작전을 쓰는 거예요. 내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식 때문에 내가 새로운 뭐가 되느냐? 아버지가 돼버린 겁니다. 자식이 부모를 살리는 거예요.

그 관계가 믿음이라는 겁니다. 보통 세상 믿음은 뭐냐? 나부터 출발해요. 내가 믿으면 그게 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인정받는다, 이래 되잖아요. 내게서 나오지 않는 믿음이 나를 변화시킬 때 그 믿음의 원천은 내 속에 있지 않고 나는 그 믿음의 결과물이 될 뿐이죠. 나는 결과가 된다면 원인은 나한테 없지요. 나한테 없는 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홍해 이야기해봅시다. 여러분, 바다에 빠지면 살아요, 죽어요? 사람이 바닷물에 빠지면 죽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디서 기어올라 왔습니까? 바다에서 기어올라 왔지요. 그전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점을 감안하시고 믿으라 했다고요. 모세를 따르라 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믿으라 하면 일단 믿는 내용을 이야기해주고 그 다음에 과연 믿을 건지 말 건지 그 내용을 점검해서 믿을 만하면 믿고 못 믿으면 못 믿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믿음이란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기억이나 상식이나 지식에 입각해서 그 범위 안에서 내가 수용할 때 그걸 믿는다고 하잖아요.

어떤 사람이, 보통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택시 운전사를 믿지요. 그런데 택시 운전사를 나이 89이고 택시 타기 전에 상갓집에서 소주 다섯 병을 먹었어요. 지도 걷지도 못하고 앞문인지 뒷문인지 분간도 못하면서 하는 말이, 손님 타소. 날 믿으시고. (지도 자기 집 어딘지 모르면서도) 집이 어딥니까? 내가 안전하게 모실 테니까 타시오. 그러면서 어, 취한다 하면 우린 못 믿지요.

왜 못 믿습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 내에선 운전사는 술 하지 않고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몸으로 한다. 이게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에요. 나는 이 택시 타지 않겠다고 하지요. 우리가 뭘 믿을 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걸 믿는다고요. 그러면 사람이 물에서 살아나온다는 걸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믿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믿음의 백성이에요. 설득할 문제가 아닙니다. 납득시킬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가 됐다. 어떤 목사는 자식이 열둘이래요. 개척교회해도 열두 명 먹고 들어가지요. 주일학교 아이들. 전도한 거예요? 제가 대전강의에 사무엘상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무엘이 차기 왕을 뽑기 위해서 후보감을 보자 하니까 이새가 아들 일곱 명을 불러 후보감으로 내세웠습니다. 다 잘난 인간이니까 이중에 하나는 있겠지. 사무엘도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 지시가 일곱 명 중에 한 명도 없어요. 그러면 이새는 뭘 믿었습니까? 자기 보기에 임금 감이 된다고 생각한 일곱을 다 내세운 거예요.

따라서 믿음이란 인간이 얼마나 엉터리를 믿고 있고 믿음이 전혀 없음을 폭로하고 그걸 노출시키는 작업이 선행돼야 돼요. 반드시. 나는 예수 믿습니다. 20대부터 믿어서 50대까지 믿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어느 순간이 성령이 오게 되면 그게 뭐로 드러나야 돼요? 내가 악마를 믿었구나. 예수 믿은 게 아니고 내가 마귀를 믿어왔구나, 라는 게 들통 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비로소 믿는 사람이 된 거예요.

내가 믿었던 것이 다 엉터리란 것을 깨닫는 그 순간, 내가 믿어서 천당 갈만한 내용은 이 세상에 주님이 주신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믿지 못한 걸 줘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미쳤다고 했겠어요. 우리는 사도 바울만큼 미쳐야 돼요. 인간은 자기 소중함에서 못 돌아서요. 소중한 것을 믿지 소중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믿겠어요.

교회가 믿는 예수는 지가 원하는 예수에요. 마귀가 제시한 가짜 예수입니다. 가짜 하나님이에요. 가짜 삼위일체에요. 그럼 어떻게 하는가? 나는 그런 예수 안 믿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내 믿음 없음을 고발하는 예수님,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까발리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죠. 그래야 내 믿음이 내 믿음이라고 우기지 않게 되잖아요.

사람이 자기 믿음이 되게 되면 그 믿음으로 나중에 부자 되는데 획책한다고요. 그걸 부자 되는 미끼로 사용해요. 이렇게 믿으니까 내 아들 취직시켜주시고 내가 믿으니까 우리 아들 결혼시켜주시고. 맨날 자기 믿는 걸 자기 소원 풀이하는 어떤 부적처럼 사용한다고요. 교회가 그래서 장사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바다에서 기어 나오는 거예요. 죽었다가 기어 나온 거예요. 광야에서 그들은 죽은 자였습니다. 만나 없이는 다 죽은 거예요. 꼭 3D체험을 해야 되겠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인간 만들어요.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인간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이 아담 속에 있는 예정된 택한 백성을 사람 만들지요.

그 마지막 아담이 누굽니까? 아담 끝에 오실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의인으로 오셨단 말은 우리는 따로 죄 안 지어도 육으로 태어난 자체가 죄에요. 산다는 자체가 죄고. 내가 존재한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반성이나 회개할 필요 없어요. 가만있어도 죈데 뭘 따로 끄집어내서 무슨 죄를 지었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생각하는 것도 죈데, 뭘 또 죄를 생각해요.

인간은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죄에요. 따라서 인간은 죄에서 못 벗어나요. 왜? 행동할 때마다 잘했는지 못했는지 따지기 때문에 죄에서 못 벗어납니다. 못 벗어나는 걸 감사해야 돼요. 왜? 못 벗어나니까 내 믿음으로 내가 구원 못 받는 걸 너무나 감사하지요.

내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으면 여러분 치매 걸리면 끝났어요. 믿음 시효 끝났어요. 나중에 치매 걸려서 권사님, 예수님 누구십니까? 예수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안 나가나. 이렇게 돼요. 정신이 처음부터 우리는 제 정신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치매 안 걸려도 이미 우리가 치매에요. 태어날 때부터 치매였어요. 아까 어예쁜 치매 하나 있었는데 어디 가버렸노?

치매가 잠복돼있는데 나중에 크면 치매 걸리지, 뭐. 늙으면 다 건망증 있고 정신없잖아요. 처음부터 우린 정신없었어요. 힘 약해서 정신이 이상해서 정신이 없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우린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에요. 뭐가 뭔지 몰라요, 인간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문재인만 문제 있는 인간 아니에요. 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문제 있다는 걸 안다는 이게 보통 믿음이 아니에요. 나는 물속에서 못 빠져나와야 돼. 나는 지옥에서 빠져나오면 안 돼. 왜? 지옥의 생산물이니까. 이걸 아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미 천국이 주님 호주머니 안에 있으니까. 세상이 지옥이고 나는 지옥 출생인 것을 자기가 확신하고 있잖아요.

주께서 지옥 출신에게 뭘 요구합니까? 헌금을 요구해요, 전도를 요구해요, 뭘 요구해요? 아는 건 지옥밖에 없는데 지옥을 지옥답게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주께서 뭘 원하겠습니까? 이것 바치면 천당 보내줄게, 이것 헌신하면 복 줄게.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살던 대로 살아. 살다가 천국 와. 아니 이미 천국 와 있어요.

우리의 부모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자식이고. 이거는 육의 노선이 아니에요.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그 노선에서 벗어났습니다. 아버지와 모든 육의 관계, 동생, 처남, 올케, 모든 관계에 십자가가 끼어들면 천하 자식이나 누구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가 돼버려요.

육의 관계는 재편성돼야 됩니다. 복음으로 이어진 관계. 처음에 결혼할 때 복음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둘 다 성령 받았다. 그러면 그 부부는 성도끼리의 부부가 아니라 다 같이 예수님의 신부란 입장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대하는 새로운 부부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이걸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 주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라. 주님의 호주머니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남편이, 나는 이렇게 돈 벌어주는데 너는 집구석에서 뭐하냐? 이렇게 돼요. 이게 아까 육은 첫째 생존, 두 번째 번식, 다른 말로 사랑이고 세 번째는 자기 의로움. 너보다 내가 더 훌륭하고 착하고 성실하고 노력하고 있고 희생적이라고 남 앞에 그걸 좀 알아달라는 식이거든요.

그러니까 남편이 주님을 떠나버리면 지적질한다고요. 나는 바보같이 고생만 하고 너는 돈 쓰기만 하냐고 이렇게 나온다. 그러면 여자도 가만있지 않지요. 네 아버지, 어머니, 시부모 누가 돌봤는데 네 엄마 치매 걸렸을 때 내가 다 돌봤잖아. 이런 식으로. 나 아니면 도울 사람 누가 있느냐고 나오지요. 둘 다 뭘 자랑하고 있습니까? 자기 잘남 자랑하지요. 개판되는 거예요.

이게 속에 계속 잠복돼있는 거예요. 잠복돼있다 어떤 계기가 되면 화산처럼 터져버려요. 갑자기 오년 전, 십년 전 이야기 다 끄집어냅니다. 이미 한 물 지나간 걸로 또 새긴다고. 부부생활 할 때마다 옛날이야기 끄집어내고 난리 나요. 이게 인간이 자기 의를 못 버려서 그래요. 부부가 아니고 서로 자기를 위해서 하녀가 되고 하인이 되란 뜻이에요. 내 이용물이 되란 뜻입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그럼 그렇게 안 살아가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없지요. 바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본색을 다 노출시킵니다. 그래놓고 나 같은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과 일방적인 사랑 아니면 용서 아니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한꺼번에 또다시 확인하고 받아들이게 돼있어요. 그러면 나한테 갑질하고 잘난 척하는 그 남편과 아내가 고맙지요. 네가 안 쑤시면 내 성질 더러운 게 어떻게 노출되겠느냐? “고맙다, 여보야. 더 성질부려라.” 좀 이상하네. 전개가. 남 약 올린 것밖에 안 되지요.

그러니까 부부가 성령 받아서 복음으로 같이 산다는 자체가 한쪽만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한쪽이 성령 안 받았으면 어떻게 하느냐?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마세요. 개는 개로 취급해야 되지 인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뭘 그 사람한테 잘해주고, 그럴 필요 없어요. 못 알아듣는데 뭐. 잘해줘야 소용없어요. 지 잘나서 잘해주는 걸로 착각할 테니까.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 열심히 사신다고 애쓰십니다. 그냥 이렇게 맞춰주면 돼요. 맞춰주고 돈만 빼내면 되고, 기대 같은 것 하지 마세요. 인간은 안 바뀝니다. 나도 안 바뀌는 데 남한테 바뀌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사람을 기대하지 마세요. 인간을 믿지 마세요. 인간은 안 바뀝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의 대상 아니에요. 서로 이용의 대상일 뿐이에요. 이것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알게 하옵소서. 얼마나 이기주의며 나만 챙기는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것을 받아들여서 이 같은 죄인 중에 괴수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주셨사오니 주님보다 더 소중한 분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