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65강-창 42장 7-12절(요셉과의 만남) 1811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2장 7-12절입니다. 구약성경 66페이지입니다.
창 42:7-12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 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니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20년 만에 형제들을 만납니다. 만나면서 서로 의견이 상충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대하는 태도는 요셉의 자기인생에 형들을 엮이게 하고 싶어서 일종의 초청조로 하나님께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지요. 그런데 형들은 누구의 인생하고 엮이기 싫은 거예요. 그저 양식만 사러 온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뭘 생각해야 되느냐? 창세기 42장부터 거의 끝부분까지 뭐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나와요. 경건이라는 것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손을 떼고 세속적인 통치자인 요셉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느낌을 줘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경건이라든지 영적생활 하는 것을 율법책, 하나님의 계명의 책을 달달 외우고 그걸 공부한다고 해서 그게 경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을 알아버리면 성경을 알았다는 그것 때문에 무엇이 방해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성경대로 나를 새롭게 조성한다는 그 사실이 가려져요. 본인이 성경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본인이 성경 알아서 구원받고 천국 가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구원은 뭐냐 하면, 말씀이 우리를 천국 가는 사람으로 조성해내고 만들어낸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그 믿음,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성경 알고, 내가 이만큼 안다는 것을 놔버려야 돼요. 내가 성경을 안다는 것이 내 경건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을 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성경을 알면서도 성경을 모른다고 칠 때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세속적인 삶만 남아 있지요. 바로 그 세속적인 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교회생활이라는 것이 정작 하나님의 일을 엄청나게 훼방하는 경우로 작용하게 돼요. 교회 일이라는 것,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이것이 정작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장애요소가 되는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지는 그 모든 환경, 상황은 극히 세속적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는 전혀 입에서 안 나오고 성경 말씀 전혀 안 나오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시장바닥에서 성경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오늘 대목을 보면서, 형들은 양식 사러 왔고 요셉은 양식을 팔러 왔어요. 그게 무슨 경건이겠습니까? 그게 무슨 구원의 심오한 뜻이 있겠느냐, 이런 생각이 들지요.
우리가 평소에 세속 속에서, 현실 속에서 성경말씀의 하나님의 작용을 뽑아내는 안목이 없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모든 것이 일처리가 된다고 했을 때 그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거기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알아봐야 돼요.
오늘 내용이 상당히 함축이 되어 있는데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함축이 되어서 난해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라고 했지요.
형들은 기억이 없어요. 요셉 앞에 설 때는. 왜냐하면 형들에게 있어서의 요셉은 이미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잃어버렸다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모든 기억은 고스란히 누가 다 품고 있느냐 하면, 요셉 쪽에서 다 갖고 있어요. 내가 놓쳐버리고 내가 허투루,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가 잃어버렸던 모든 과거와 기억이 소복이 요셉에게 다 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기억이라는 것, 기억의 뭉치는 곧 자아입니다. 우리는 덜렁덜렁, 덜렁이거든요. 현재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자아다. 그렇게 하지만 그 자아는 내가 남들에게 뽐내기 위해서 현재 재구성된 일방적인 엉터리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거해버리고, 놓쳐버리고, 우리 때문에 아파했던 사람의 기억은 없고, 그냥 지금 나는 잘났다, 거기에 해당되는 사항만 뭉쳐서 이게 나다, 하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놓쳐버린,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기억과 과거는 누구한테 가 있느냐 하면, 우리 주님한테 가 있어요. 그 주님한테 우리는 돌려받는 겁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경건으로 우리가 언약사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이기주의, 자기밖에 모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갖다 버린 나의 진면목들을 주께서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몽땅 우리 예수님이 가지고 가셔서 그냥 돌려줘버리면 우리는 지옥 가는 저주의 자아를 돌려받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아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언약적으로 완성을 시켜놓았습니다. 그 완성된 제2의 자아를 우리가 돌려받는 거예요.
그 구조가 오늘 본문 구조에요. 형들은 몰라요. 자기들이 요셉에게 하는 짓도 모르고 요셉 걱정도 안 해요. 진즉에 팔아먹었으니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입니다.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루 일과가 예수님하고 상관없어요. 물론 어려울 때는 도와주세요, 하지요.
그것은 지금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구원받지도 못할 자아가지고 예수님의 능력을 한 번 이용해볼까, 하는 못된 심보를 가지고 하는 것이고, 진짜 우리는 내 코앞의 돈벌이나 양식 사는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어가지고 자기가 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신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단독적인 삶과 거기에 대한 자유분방함을 남에게 은근히 과시합니다. 재벌 2세들이 자랑질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너희들 도움 없이도 산다는 그걸 자랑하는 거예요. 밑에서 일하는 비굴한 을들, 밑의 직원들은 재벌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상 잘리면 죽으니까 감히 함부로,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말을 못해요. 적어도 직장에서 근무시간에는, 9-5,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못합니다.
어디서 하느냐? 근무 끝나고 술집에 가서 하지요. “더러워라. 성질 같아서는 벌써 열 번 사표 냈다.” 이러잖아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최고의 자랑거리가 뭐냐? 나는 너 없이도 나 혼자 자존한다는 것. 천상천하유아독존. 그것만 자랑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자존감, 또는 좋게 이야기해서 자존심.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맨이거든요. 언약의 가족들은, 그러고 싶은데 가뭄이 들었네요. 그러고 싶은데 양식이 똑 떨어졌어요.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인간이 원하는 것은 남의 인생에 엮이기 싫은 겁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히 도사지요.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엮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경건은 뭐냐? 안 엮임으로서 단독적으로 경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게 도 닦는 거거든요. 지리산이나 기도원에 가서 모든 것을 끊어버린다는 말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것을 안 하는 조건하에 천사되겠습니다, 하는 주장이라는 말이지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철저하게 세속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세속은 내가 징벌 받아 마땅함을 확인해주는 환경이거든요. 누구나 혼자 있으면 점잖아요. 그러나 누구 인생에 엮이게 되면 참……, 저쪽이 지저분하면 오염되어서 같이 지저분해져요.
말 섞어줘야 되니까. 요한복음 14, 15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세상아, 내 제자를 괴롭게 말라는 겁니다. 세상이 성도를 괴롭게 하는 것은 곧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가 좀 특이하잖아요. 특이하니까 세상은 계속해서 괴롭혀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유치원에 예쁜 여자 애가 나오면 붙들고 그렇게 막 괴롭혀요. 지금 우리 외손녀도 많이 괴롭힘 당하고 있어요. 귀엽다고 괴롭힘 당하는데. 왜 괴롭히느냐 하면, 좀 엮이자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나 엮여버리면 내가 그동안 공들였던 경건이 날라 가버려요. 이게 때가 묻는다고요. 단독적으로,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요.
세상에서 멀어지면 그게 가능한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모든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 언급 안하고 예수님 언급 안 해요. 그냥 세상에 던져버립니다. 세상에 던져 버리면, 내가 무심코 했던 행세를 저쪽 상대방이 그대로 다 하고 있어요. 그들의 수법, 저질스러움이 다 눈에 들어와요.
그러나 문제는 그들과 결별될 수 없는, 따로 살 수 없는 이유는 양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형들은 양식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성경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았느냐를 초점으로 하고 있는데 형들은 양식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요셉이 누군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셉은 양식 파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 제목과 같아요. 7절에 보면, “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를 물어요. 뻔히 알아요. 양식 사러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를 묻는 겁니다. 질문이 수능보다 더 어려워요. 굉장히 심오한 질문을 합니다. 네가 어느 동네에 사시다가 오셨어요, 지금 그걸 묻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요셉은 알기 때문에. ‘형들이여, 당신의 과거를 잊었나이까?’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당신이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걸 기억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당신이 잊어버린 당신의 진짜 자아의 모습, 당신이 언약의 가족, 야곱언약이라는 그 가족의 위상과 위치, 그런 것은 다 놓쳐버린 상태를 이제 요셉이 완성시킬 겁니다.’라는 마음자세로서 묻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형들에게 그냥 곱게 양식 줘서 보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엮이는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요셉 본인의 인생은 본인의 인생이 아니에요. 꿈을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현실화시킨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그 언약이 현실화되려면 요셉의 형들과 아버지는 그냥 그 자리에서 빌고 기도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누굴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요셉과 엮여야 돼요.
요셉의 인생에 엮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라 하는 것은 동떨어진 거예요. 지금 요셉은 벼르고 있습니다. 곱게 양식 주고 집에 돌려보낼 하등의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형들은 모르지만 요셉은 알고 있는 언약의 깊은 내용을 형들이 그대로 거기에 뒤집어씌우는 작업에 나섭니다.
지난 시간에 했던 42장 4절을 잠깐 보겠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아버지 야곱은 비록 요셉을 만나지 않는 채로 20년 동안 가나안 집에 그냥 있었어도 뭐는 아느냐 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받은 이 가정이 언약대로 되는 과정 속에서 뭔가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감 잡습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이 요셉의 형들은 징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요셉은 아는데 요셉의 형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징벌이라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규정이 되느냐 하면……, 정말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저는 교도소에 안 가봤습니다만 교도소에 가면 징벌방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요.
그 징벌방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넓은 교도소 안의 한 공간이 징벌방이에요. 그 징벌방은 죄수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교도소장이 결정했겠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어디 가서 살고 싶고 내 인생은 이렇게 되고 싶다는 것을 징벌의 당사자는 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안’과 ‘밖’이라는 거예요. ‘예수 안’, ‘예수 밖’이라는 징벌방이 없이 그냥 나대로 살게 되면, 어떤 인간을 붙들고 물어봐도 자기는 지금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간주하게 돼요. “징벌? 징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 같은 사람이 징벌 받는다면 징벌 안 받을 사람 하나도 없겠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데. 나같이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외부의 다른 분이 안과 밖이라는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요셉이 성도거든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성도에요. 인간성이 어떻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으면 성도인데 그 성도가 요셉의 형들에게 일방적으로 안과 밖을 설정해 버려요.
엮일 때 그냥 엮이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언약 안에 있습니다, 하고 차단막을, 테두리를 쳐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 안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이냐 하면, 요셉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사태와 상황, 여러분 고유의 자기인생이 있더라도 이 안에서는 일방적으로 요셉이 경험했던 그 체험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반추하고 되비치는 체험을 해야 돼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저 요셉을 어떻게 했는가? 그것을 약간 더 깊이 있게 하면, 우리가 라헬이라는 또 다른 엄마의 자식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요셉 안이라는 세계 속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기회를 부여받는 것, 이것이 복입니다.
예수 십자가 안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십자가 피 발랐다. 구원받았다.” 그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성령으로 사건을 가지고 내가 있는 인생에다 동그라미를 쳐버려요. 동그라미를 쳐버리면, 그러니까 훌라후프를 혼자 하다가 앞에 있는 사람까지 걸어서 둘이 다, 양쪽 다 훌라후프 안의 공간에 놓여 있다 봅시다.
그러면 훌라후프를 걸어서 강제로 집어넣어진 사람에게는 훌라후프를 집어넣은 그 사람의 안목과 인생 경험했던 그 사실에 의해서, 그 말씀의 성취에 의해서 규정을 받는 거예요. “너 나에게 어떻게 했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의 세속화에요. 경건의 세속화입니다.
우리는 혼자 있으면 천하에 훌륭한 사람이고, 경건된 사람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에요. 혼자만 있으면. 혼자 있는 내가 여기 있어도 그렇고, 지리산에 가도 그렇고, 기도원에 가 있어도 훌륭해요. 왜냐하면 내가 아는 과거는 근사한 과거, 최선을 다한 과거, 또는 어제 강의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살아온 그 과거, 나쁜 것은 다 도려내고 그저 예쁜 것, 자랑할 것, 참한 것, 선한 것, 그런 것만, 아름다운 것만 간직해서 이게 자아라고 우길 거예요.
십자가라는 훌라후프 안에 집어넣어 보세요. 그런 인식자체가 예수님을 얼마나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훌라후프를 걸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이제는 성도가 세상에 나갈 때 그냥 나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걸었던 훌라후프를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걸어버립니다.
걸어버리면 그 사람은 징벌 받아 마땅한 사람이 돼요. 요셉이 바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요셉이 훌륭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셉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고 그 주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성경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세속화 되어야 돼요.
언약이 실제로 정치화 되어야 돼요. 언약이 정치화될 때 요셉은 요셉의 형들을 자기 인생에다 걸고 자기 인생 쪽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이걸 정치적으로 표현한다면 중앙집권체제라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의도했든 안했든, 좋든 싫든 한 사람만 쳐다보게 만들었어요.
요셉이 양식 안주면 그들은 다 굶어죽어요. 중앙집권체제입니다. 한 사람만 쳐다보게 만들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마찬가지에요. “양식 주이소.” 이렇게 온 거예요. 9절에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정탐꾼이라는 말은, 이게 참 오묘한데요. 이게 뭐냐 하면, 지금 요셉은 판을 다시 짜기 위해서 미끼를 던집니다. 정탐꾼이라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에요. 나쁜 의도를 가진 너희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쁨에 대해서 주어지는 결과는 징벌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징벌이라고 한 거예요.
요셉에게 양식을 사러 온 사람을 보고 “당신 스파이지?” 이렇게 묻는 경우는 없어요. 오직 자기 형들에게만 의도적으로 “당신 스파이지?”라고 묻는 거예요. 형들만이 요셉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형들이 구원을 받아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리고 형들은 본인이 “야, 우리 죄인 되자. 국무총리에게 양식 구하러 가서 빌빌거리면서 낮아져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자.” 이렇게 의논한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생각하는 나쁜 것이라 하는 것은, 돈을 안주고 양식을 사는 것이 나쁘고 그것은 징벌을 받아 마땅해요. 그래서 죄인 안 되려고 애쓰는 것이 요셉의 형들의 일상이고 일과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보편적인 아담의 자손과 똑같아요. 줄 것 주고받을 것 받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뭐냐? 그러한 너희들을 강제로 이유도 없이 무조건 징벌 받아야 합당한 자로 만들겠다. 왜? 내가 던진 훌라후프 속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인 되어야 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그렇게 규정한 거예요.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규정한 거예요.
내가 주님에 의해서 무조건 죄인 되는 이것은 평생을 두고도 감사, 감사가 계속해서 우러나와야 되고 터져 나와야 됩니다. 주님한테 묶여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누구 앞에서 죄인이 되겠어요? 주님이 엮여주니까, 주님의 인생에 엮이니까, 주님이 십자가 지신 그 십자가에 엮이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된 거예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야, 주님의 말씀 사역은 나에게까지 미쳤구나. 나에게까지 왔구나.’ 우리는 참 평소에 육적인 요소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예수와 멀어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싶어요. 왜냐하면 타고난 본성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뭔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어떤 자유감, 아무데도 엮이지 않는데서 자유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계속해서 훌라후프 던져서 우리로 하여금 “네가 내 앞에서 죄인이다.” 죄인 되어야 네가 이 예수님이 구성한 그 자아를 되돌려 받게 됩니다. 요셉을 경유하고,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용서함에 경유된 자아가 없으면 우리는 천국이 있어도 못갑니다.
아주 주님께서 자기백성 사랑하는데 지독해요. 우리로 하여금 결핍을 느끼게 합니다. 형들은 지금 양식이 없어서 왔어요. 양식 있었으면 요셉에게 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 전체, 그리고 가나안 땅 전체를 오직 요셉과 형들의 가족, 아버지와의 만남 그거 하나 성립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7년 동안 풍년내리고 또 7년 동안 흉년 내렸다는 거예요.
와!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언약중심입니다. 이 당시는 요셉중심이고 오늘날은 예수님 십자가중심이에요.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구원될 사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된 기쁨을 제공하는 그런 조로 주께서 진행하십니다. 주님의 우리에 대한 이웃사랑, 예수님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는 이웃사랑, 이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느 정도껏 사랑한다면, 주님 사랑하고 우리도 좀 사랑하고, 장군멍군 하듯이 사랑하면 되는데 이것은 지독한 사랑, 일방적으로 계속해서 집적대로 달려들어서 삼켜버리는, “내가 네 자아 그냥 안 둔다. 창세전에 사랑했던 것, 네가 도망치라고 놔둘 성 싶어? 기어이 너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해버릴 거니 각오해.”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이 잘난 우리를 정탐꾼으로, 스파이로, 양식이고 뭐고 그런 것을 줄 가치도 없는 인간으로, 이 땅에서 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으로 졸지에 만들어버렸어요.
“주여, 죽여주옵소서. 저는 살 이유도 없습니다.” 라는 것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터져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는 거예요. 감사와 고마움이 없으면 이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라고요. 왜냐하면 무슨 조건을 달아서 감사하는 이것은 훌라후프 밖입니다. 그것은 감사했다고 자기 자랑하는 인간들이에요. 그것은 아니에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행에 옮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거 아무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자기 말씀의 완성, 언약을 우리를 포섭해서 집어넣어서 이걸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물을 거예요. “목사님, 우리가 적용된 사람인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천국 가는 사람인지 지옥 갈 사람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알지요. 내 인생이 망가지고 처참하게 완전히 다 잃는다 할지라도 싱글벙글. 왜?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뭘 가질 자격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게 죄인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뭘 걱정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인생에 엮이기 싫어하는 인간이에요.
우리는 주님한테 돈이나 받고, 주님이 먹여 살리는 양식만 주면 주님한테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못된 심성이에요. 그저 우리 자식 잘되고, 우리 교회 잘되고, 나 믿음 좋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고, 내가 인간성이 좋고 바르게 산다는 그런 것을 알아주면 족합니다, 하는 데 그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그것은 내가 만든 훌라후프를 아직 그대로 쥐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만든 첫 번째 자아거든요. 이게 지옥 가는 자아인데 내 자아 속에서 꿈쩍도 안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로서 우리를 걸어버립니다. 십자가로 걸어버리고 집요하게 우리에게 죄인 됨을 쑤십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우리를 밀어붙이고 궁지에 몰아넣느냐?
언약에 속한 네 동생을 어떻게 했느냐를 우리가 파악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말씀을 길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주님이 가인에게 찾아왔을 때 하나님과 가인의 대화가 흥미로워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고 했어요.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주님께서 아시면서도 묻는 이유는, 그 다음 가인의 입을 통해서 왜 가인이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인가를 티를 내는 답변을 해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나는 내 몸만 지키면 되지 저 아우를 내가 왜 꼭 굳이 지켜야 되느냐 하는 발언은, 장차 오실 예수님은 자기 몸만 구원하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의 백성을 내 몸같이 사랑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에요. 이 세상 모든 일어난 일들이 자기백성 사랑하기 위해서 세밀하게 정확하게 수치로 딱 정해서 예정된 일들만 일어나요. 자기백성 건지는데 하자가 없도록, 오류가 없도록, 지장이 없도록.
거기에 대한 성도의 반응은 뭐냐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는 거예요. 살만큼 살았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요셉이 알았던 언약의 완성으로 판을 다시 짜기, 재편하는 것, 현실의 재편입니다. 현실을 다시 까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작업이 후대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신명기 27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 오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신명기 27장에는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백성들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기를 합니다. 주고받기 하는 그 내용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서 15절에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이 말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그 문장, 말씀에 아멘, 하는 순간에 그 말씀에 실효성 있게 우리 몸이 활용되었다는 겁니다. 그 저주성이 우리 몸에 내면화되는 거예요. 요셉의 형들이 갖고 있던 그 죄악성의 현실화가 고난 받는 요셉이 된 거예요.
따라서 요셉하고 형들은 따로가 아니고 형들의 더러운 내면이 요셉입니다. 그 형들의 더러운 내면이 된 요셉, 요셉이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국무총리, 다시 말해서 중앙집권체제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그 말은, 요셉이 형들보고 “형들이여, 당신 것 가져가세요. 더럽던 당신의 내용물이 주님의 꿈에 의해서 저처럼 이렇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님의 축복에 의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당신 것 가져가야지요. 이제 당신은 의인입니다.”
그 조건은 뭐냐? 나로 인하여 절대적인 죄인이 되어야 돼요. 이유 없어요. 나쁜 짓 하고 안하고와 관계없어요. 무조건 죄인이 되어야 돼요. 무조건 더 살면 안돼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무조건 그래야 돼요. 저주를 아멘, 했거든요. 저주를 아멘이라고 한 자에게 예수님께서 그 저주가 예수님의 공로로만 축복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움직이는 율법의 완성이 되니까. 예수님의 결과물이 돼요. 다 이루었다, 하는 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성도입니다. 따라서 성도를 괴롭히는 사람은 주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도 그런 글을 썼습니다만, 내 것이기에 소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에 소중합니다.
내 교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성도밖에 없어요. 따라서 내가 저 사람을 잡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저주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고 빛을 발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저주성이 있는데도 나는 지금 웃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용서받았기 때문에.
“혹시 우리가 같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둘러친, 같은 훌라후프속입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이루신 형제사랑이고 언약의 완성입니다. 상실된 자아가 주님에 의해서 변화된 자아로 주님에 의해서, 주님을 경유해서 되돌려 받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실망하지만 주님 생각하면서 실망이 있기에 비로소 제대로 된 완벽한 감사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걸 ‘소박한 성스러움’이라 하지요. 남의 인생에 낄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주님의 인생에 끼었기 때문에. 성도의 관계는 우리가 서로 엮여 있는,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너와 나 사이에 있는 모든 관계는 내 손아귀를 뻗으면 안돼요. 저쪽 손아귀를 뻗어도 안 되고요.
우리는 다 주님의 인생의 엮임을 제공해야지, ‘너는 내 사람이라서 이만큼 내가 잘해준다.’ 또 ‘당신 내 사람이라서 잘해줄게.’ 이런 인간들의 주고받음, 이것은 언약 안에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제 요셉의 형들은 잃어버린, 자기가 기억치 않는, 요셉을 팔아먹었던 과거에 대해서 생생하게 밑바닥까지, 그 깊이까지 다 들춰낼 거예요.
‘아, 나는 선악과 따먹고 나의 왕국, 내 나름대로의 아우라, 내 나와바리, 내 영역을 따로 구축했구나. 그런데 그것을 강제로 요셉을 통해서 천국에 합류시켰구나.’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활동하는 십자가의 위력이고 언약의 현실성, 실제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말씀공부하고 지키면 성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도외시하고 날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하고 철저한가만 측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을 가로막는 숨어 있는 저주의 표상인 것을, 악마의 모습인 것을 느끼고 도리어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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