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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42:36-38 / 딜레마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2:36-38 / 딜레마

정인순 2018. 12. 6. 09:10

음성     동영상     Youtube


딜레마 



이근호
2018년 12월 5일           



본문 말씀: 창세기 42:36-38

(42:36)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42:37)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42:38)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지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은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일에만 신경 쓰고 싶어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어합니다. 즉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만 반응을 보입니다. 그 외의 일은 나중일로 취급합니다. 창세기 37:3에 보면,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죽고 난 뒤, 야곱은 라헬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요셉에게 집착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자기 사랑의 화신입니다. 이로서 야곱의 자식들 중에서, 라헬 계통의 자식과 그 외의 자식들 사이에 갭이 생겼습니다. 다른 자식들은 야곱에게 있어 덜 사랑하는 자식들입니다.

사랑이란 그 대상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마저 잃는다면 이는 자신이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이와 같은 선언은 창세기 37:36에서 야곱이 보여준 태도와 같은 맥락입니다. 지금 야곱은 유독 사랑했던 요셉을 잃고 난 뒤에 요셉의 동생은 더 이상 요셉의 다른 형들에게 맡기지 않기로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 자식 간의 혈육적 관계에 대해서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약속)은 묵과 하지 않는 겁니다. 참으로 야곱의 가족이 구원되는 가족이요 하늘의 복을 받아야 될 가족이라면 이들 사이의 관계는 다른 이들과 달라야 합니다. 이 ‘다른 관계’가 곧 ‘언약으로 새로 형성된 관계’입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복음적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집요하게 지키고 싶어해서 잃어버린 요셉대신 감싸 안고 있는 베냐민은 야곱의 현 살아가는 방식을 말해줍니다. 인간의 집착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는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관계를 훼방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만 둘리가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 성도들에게 ‘예수님 이야기’가 몰라도 되는 이차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관계를 이 ‘예수님 이야기’를 대체하시는 작업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 요셉은 형을 중개인으로 사용하여 아버지 야곱을 다룹니다. 우선 야곱이 염두에 두는 혈연적 관계를 강제로 파기시킵니다.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강제로 빼앗는 작업을 멀리 애굽에서 요셉이 시행하게 됩니다. 사람이란 자기에게 소중한 것이 있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람 사는 보람이요 이유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줄 그 최후의 소중한 것을 상실한다면 이는 곧 불능상태로 돌입되는 상황입니다.

요셉이 생각하기를, 아버지 야곱이 구원되는 방법은 바로 그 ‘불능의 상황’을 발생시키는 겁니다. 아버지 야곱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했습니다. 과연 ‘내가 나다운 것’이 어떤 모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사랑할만하고 지킬만한 것이 있을 때,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끝까지 자신의 가치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제공되는 구원의 실정을 알려면, 더 이상 나에게 그 어떤 존재 가치나 존재 이유가 없이 다 소멸되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 ‘나 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물세례로부터 시작해서 불세례(십자가)로 이어집니다. 중간에 예수님의 시험을 받으시고, 최후의 만찬을 거쳐 자진해서 죽음이 기다리는 쪽으로 가십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절차는 오늘날 성도에게 있어 역순되어 찾아듭니다. 즉 성도는 구원되고자 노력한 덕분에 조금씩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서 시험과 유혹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는가를 인생을 통해서 체험케 하십니다.

성도에게 있어 획기적인 체험만이 영적체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의 체험마저 성도에게는 자신의 귀한 것을 탈탈 털리는 체험들입니다. 나를 잃고 내가 나에게 절망을 느끼는 그 자리에서만 비로소 구원이 보이고 주님의 분주하심이 보입니다. 곧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구원의 훼방자요 방해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계시까지 한 몸에 받았을 때에, 그는 자신은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로 받은 그 사랑이 그를 버림받고 했고, 하나님께 받은 꿈이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잃게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이 경험한 그 길로 오게 할 작정입니다. 즉 인간 대 인간으로 맺으진 모든 관계를 다 끊어놓을 작정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자리에 요셉이 경험한 관계로 채우려고 합니다. 요셉이 보기에, 아버지 야곱과 형들은 전체 사태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에 엮여있는 관계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아버지와 형들은 본인들이 원치 않는 형편 속에 놓여야 합니다. 진퇴양난이요 딜레마에 빠져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율이나 자유란 크게 보면 사실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잠재성’에 들어 있을 뿐입니다.

그 잠재성이 한 꺼풀, 두 꺼풀 펼쳐질 뿐입니다. 강제적입니다. 하나님의 강제에 저촉을 받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개인적인 자유를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함부로 인간들의 인생에 개입하고 주관하십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할 위인은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이 드러납니다. 딜레마에 빠트리시는 겁니다. 마치 치약 입구가 꽉 막혀 있는데 무조건 치약을 끝에서 강하게 눌러버리면 치약은 옆구리를 통해서 터져 나와 버립니다.

이럴 때, 그 터져 나온 내용물이 뭘까요? 그것이 바로 그동안 성도를 주관해왔던 영적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그동안 고난의 원리가 성도로 하여금 기존의 모든 육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를 끊도록 강제하신 겁니다. 성도가 내세운 교양과 품위나 품격 있는 행위로 맺어진 모든 관계는 사정없이 폐기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성도에게 늘 말을 먼저 거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요셉과 야곱의 맺어진 관계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67강-창 42장 36-38절(딜레마)

1812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2장 36-38절입니다. 구약성경 67페이지입니다.

창 42:36-38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아버지 야곱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러이러 해서 우리는 시므온을 애굽의 총리인 그 사람에게 볼모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를 배려해서 이 가뭄의 시기에 우리 가족이 굶지 않도록 양식을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의 돈을 받고 양식 파는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는 그 마지막 아들의 존재여부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식을 넉넉하게 줬는데 양식자루에 보니 우리가 양식을 위해서 지불하고자 했던 돈까지 도로 돌려받았습니다. 아버지!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런 조치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우리 가족을 신뢰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쁜 관계로 내치려는 것이 아니고 어쨌든 간에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므온이 비록 볼모로 잡혀 있더라도 전후좌우를 살펴볼 때 시므온에게 해코지 할 사람은 아닙니다.”

이것이 형들이 애굽의 총리를 만난 소감이에요. 줄여서 이야기한다면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사람이, 아버지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마지막 아들의 실제여부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니까, 이미 국무총리 쪽에서 이런 호의를 베풀어줬으니까 우리도 거기에 호응해서 동생을 우리가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라고 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애굽나라의 총리를 전혀 만나본적이 없어요. 일방적으로 중간에서 전달하는 요셉의 형들의 말만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요셉의 형들의 그러한 생각을 신뢰를 못하는 거예요. 신뢰를 못하게 된다면 이것은 뭐냐? 너희들을 버린다 해도 마지막 남은 소망은 지키고 싶은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을 너희들에게 맡겼더니 내가 사랑하는 요셉을 너희가 죽도록 한 적이 있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부인 라헬의 자녀가 달랑 둘 밖에 없잖아요. 요셉은 죽어버렸고 그러면 자기 사랑하는 아내를 닮은 자식은 베냐민 밖에 없는 거예요. 요셉을 잃어버린 그 한까지 다 합해서 베냐민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사랑했던 자기 아내에 대한 그 사랑을 지워버리기 싫어서 그렇게 했겠지요. 창세기 37장 3절에 보면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야곱)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버지가 일찍 죽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자식을 다른 자식들보다 차이 나게 사랑을 했습니다. 특심한 사랑을 한 거지요. 이렇게 볼 때 지금 야곱의 입장에서는 열 명 전부의 자식들보다 남아 있는 베냐민 한 자식을 안 잃어버리는데 온 힘과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잖아요. 요셉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인 요셉이 죽었으니까 야곱 쪽에서 나갔던 그 사랑이 결과가 없이 날라 가게 되잖아요. 그런데 남아 있는 것이 요셉의 동생 베냐민이니까 야곱은 자기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여 베냐민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에 양식 사러 갈 때도 다 가서 다 잘못된다 할지라도 이 베냐민만큼은 내 사랑을 내가 지키는 식으로, 자기의 사랑의 표상으로 지키고 싶었던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야곱과 그 자식들의 관계가 철저하게 사적관계, 아버지 야곱의 일방적인 내리사랑으로 형성된 관계에 있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육적인 관계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셔서 계속해서 야곱 쪽을 향하여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고 난 뒤에 탈진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야곱에게 준 것, 야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게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야곱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그 언약을 하나님 선에서 이루기 위해서 야곱이 사랑하는 요셉에게 꿈을 통해서 미리 계시를 주셨고 그 계시가 현실로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야곱과 요셉이라는 육적인 관계가 끊어져야 되는 것이 하나의 필수과정으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과 요셉의 관계가 사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육적관계가 아니고 언약적관계로 재정립이 되어야 그것이 언약에 속한 가족이라고, 구원받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새언약시대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에요.

교인들이 교회 올 때 자기의 사적인 기대치가 있을 거예요. 집사님, 장로님, 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교양 같은 것, 한평생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내가 이정도 배려는 할 용의가 되어있다는 자기의 윤리도덕적인 역량, 그런 것을 가지고 관계를 맺게 되면 그 관계 속에서 뭐가 다치지 않느냐 하면 자기 자신의 자존심은 다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 나름대로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놈의 예의바름, 다 깨져버려요. 다 끊어져 버리지요. 성도와 성도의 관계는 예의바름과 사회적 교양, 소양, 인간적 행함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식이고 위선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목사와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님!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지켜주옵소서.” 목사입장에서는 “노! 안됩니다.”

지키려고 하는 야곱이 작살나는 거예요.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 안에 내 사랑이 소복이 들어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배려를 자기가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세상 같으면 용납이 되지요. 예의바름과 교양과 그러한 상식선에서 서로 우호적인 교제를 나누면 건전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어느 정도 가정교육만 받으면 다 아는 겁니다.

그렇게 잘해서 지옥 가니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렇게 잘해서, 남들에게 그렇게 인간다운 배려를 다 해줬는데 가보니 지옥이다. 무슨 난리가 그런 난리가 있어요? 하나님의 복음적 개입, 언약적개입이 없어버리면, 다른 말로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언약적개입이 있어야 돼요. 언약적 개입은 나를 안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다른 것은 다 잃더라도 이것만큼은 내가 사랑하고 싶다는 그것에 대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성인 것은 인정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지니게 되면 전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그것이 어떠한 사태인지가 파악이 안 됩니다. 주님의 전체 일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리가 무지할 자유는 없습니다.

주께서 깨우치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야곱은 집구석에 앉아서 자기의 베냐민만 쥐고 있으면 안돼요. 야곱 본인이 무지하고 모르는 사태파악을 저쪽 애굽에 있는 요셉에 의해서 강제로 추궁당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은 지금 멀리서 외치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여, 사태파악하소서.”

오늘날 하나님이 구원되기로 작정된 성도도 이처럼 지금 계속해서 예수님으로부터 강요당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무지해서는 안 된다는 강요, 너는 무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추궁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 아쉬운 것, 자기 필요한 것에 대해서 자기가 먼저 이야기를 끄집어내지요.

자기가 어렵고 힘들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예수님께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걸 뒤집습니다. 반대로 합니다. 요셉 쪽에서 야곱에게 할 말이 있는 거예요.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할 말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도피하기 바빠요. 자기 동굴을 파고 거기에 ‘하나님, 나는 이것으로만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꽁꽁 숨어요.

“제발 이 영역 넘어서지 마세요. 이것만큼은 내가 지킬 수 있도록, 사랑할 수 있도록 제발 가만 놔두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어리광을 부리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노골적으로 말씀 드릴까요? 예수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주님은 남겨두지 않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그 이야기, 요셉이 겪었던 그 일을 이제는 “성도냐? 그러면 너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 이야기가 우리에게 돈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이야기를 안다고 해서 생활비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요. 예수 이야기가 하다가는 있는 교인도 다 나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하지만 주님의 소원은 예수님께 일어난 그 십자가 이야기가 예수님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천국백성이라면 너도 필히 그것을 알도록 내가 너에게 다가가고 촉구할 것이라고 지금 윽박지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것만 사랑하고 싶은데요? 어쩌지요? 작살나야 되지요. 박살나야 되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나를 잘나보이게 하는 것만 지키고 싶은데요? 십자가는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싶은 것이 우리 속성이거든요. 예수님이 너무 고생하니까 나는 그 고생에서 빼달라는 겁니다. 제발 예수 이야기는 예수님만 움키고 계시고 나한테까지는 없게 하옵소서, 그러고 있는 거예요. 나는 내 식대로, 내 즐거움과 내 사랑하는 그것으로 내 인생 꾸려가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그렇게 합니까? 야곱은 베냐민을 꽉 쥐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전폭적으로, 베냐민의 형, 잃어버린 요셉에게 줬던 사랑까지 더해서 아예 더블로 꽉 쥐고 있습니다. 그것을 먼데 있는 요셉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말합니다. “아버지, 내가 겪었던 일을 겪지 아니하면 아버지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내가 겪었던 일을 겪지 아니하면.”

요셉은 버림받았어요. 아버지도 버림받아야 돼요. 아버지도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버림받을 줄 알아야 됩니다. 요셉은 이제 그런 시도의 공작에 나섭니다. 책략에 나서게 된 거예요. 그래서 중간에서 형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부활해서 살아계시지요. 살아계셔서 하시는 일이 뭐겠습니까?

요셉이 야곱에게 했던 일을 그대로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본격적으로 공생애 시작하면서 한 일이 물로서 세례를 받은 겁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난 뒤에 악마로부터 시험을 받았지요. 그 뒤에 긴 3년의 세월은 악마로부터 시험받은 그 세월의 연속이었지요. 그러고 난 뒤에 마지막 돌아가시던 날 밤에는 제자들 모아놓고 성만찬을 했습니다.

“이것은 내 살이고 이것은 내 피다.” 그러니까 열 두 제자를 하나의 떡과 하나의 살에 전부 응집을 시킨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뒤에 부활하셨잖아요. 이게 예수님이 가신 길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역순으로 하는 겁니다.

이미 너희들은 내 백성이라고, 십자가에서 구원받았다고 이미 확정을 지어놓습니다. 확정지어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제는 너희들과 나는 분리될 수 없는 한 살이고 한 피, 한 몸에 속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일러주시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순서가, 예수님이 시험받았던 그것으로 자기 백성들도 공히 시험받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험을 받게 된 그 이유가 예수님이, 의인되시는 분이 죄인 속에 들어왔던 그 체험을 성도의 일상적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노력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미 구원시켜놓고 그 다음에 줄줄이 이어가는 성도의 인생은 뭐냐?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수모와 시험, 아픔과 버림받음과 무시와 모독, 격분이 나는 일들을 당하셨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시는 거예요. 일상을 통해서.

그런데 그 예수님의 적이 누구냐? 그 당시 유대인이지만 성도가 그 일을 겪으면서는 나의 적이 누구냐? 바로 내 자신이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적이 된다는 사실, 내 구원에 내가 방해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공로는 주님께 돌리는 겁니다. 야곱같은 경우는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일관성에 다 돌리겠지요.

주께서 나그네 인생을 살게 하셔서 나를 구원했다는 고백이 나중에 나옵니다. 야곱이 나중에 요셉을 만나고 요셉의 두 아들을 어긋맞게 축복하면서 그런 고백이 나와요. 내 평생 나그네 길을 갔지만 그 나그네 길은 이미 구원받은 자였기에 이 땅을 남의 땅, 이방인, 객으로 살게 했다는 거예요.

내가 머물 필요가 없는 세상임을 깨닫도록 해주셨다는 겁니다. 본향은 저 하늘나라에 있고. 이런 점에서 그 시작이 요셉 쪽에 있습니다. 이미 자기 형들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다가가지요. 아버지는 무지하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이런 요셉의 언약적전략에 의하면 야곱은 어느 정도까지 내려가야 되느냐 하면, 회복 불능한 지점까지 내려가야 돼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다시 옛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붙드는 것을 실패하는 그 지점을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이게 야곱의 구원의 지점이기도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하나님께 구원받아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떤 실력이나 능력을 발휘하게 돼요.

발휘한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을 내다보는 겁니다. 불능상태가 아니고 가능상태로 자기를 생각해서 고상한 것, 건전한 것, 경건된 것, 거룩한 생활, 이런 것을 다 동원하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어디로 가야 되느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시도한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주님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독하게 나를 사랑한다는 면을 감추는 위선적인 행동들이에요. 다 나 좋으라고 하는 행동들이라는 말이지요.

아직도 나는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화하면서, 그걸 안 들키게 하면서 ‘주께 영광, 찬미’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내 쪽에서 주님을 찾아갈 수 없는 겁니다. 야곱 쪽에서 아무리 해도 요셉을 찾아갈 수 없어요. 왜? 요셉은 이미 죽은 아들이니까.

그러니 요셉 쪽에서 야곱으로 하여금 절망에 이르게 하는 거예요. 내가 너무 사랑하기에 이것만큼은 못 내놓는다. 베냐민만큼은 못 내놓는다는 그것을 강탈하는 겁니다. 빼앗아버려요. 그것을 빼앗겼을 때 야곱은 뭘 간파해야 되느냐 하면, 나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간파해야 돼요. 그게 사태파악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내 자율, 자유, 나의 선택이 아무짝도 소용없이 뭔가 누구로부터 움직여지는 세상인 것을 감 잡아야 돼요. 압도적인 체험만 주님의 체험이 아닙니다. 획기적인 체험만 주님의 체험이 아니에요. 일상자체가 주님이 우리한테 지금 질문을 던지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들입니다.

그저 획기적이고, 아주 압도적인 체험을 자꾸 기대하는 것은 사탄에 시험 드는 거예요. ‘평범한 가운데서 주께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다 빼앗아가는구나. 탈탈 털리는 구나.’ 그렇게 털리는 감각이 있을 때 성도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게 털리지 아니하면 아무리 ‘하나님 영광’이라고 해도 뭔가 내가 끝까지 고수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나의 나다움을 끝까지 내세우고 싶은 약간의 희망적인 요소가 있다고요.

그것마저 강탈당할 때 사람은 자기 가치가 다 마모되고 소실되는 그 지점이겠지요. 그 지점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체험에 동참하는 순간이 되지요. ‘내가 한 나의 구원은 구원이 아니구나. 내가 날 구원하겠다는 의지와 열의를 보고 주께서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거예요.

천국가고 싶다는 그 열망과 소망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구원은 이미 내 손을 떠난 거예요. 그리고 그 절망의 자리에서 비로소 내가 진짜 어떤 입장에 있고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겁니다.

그냥 말로 아는 것이 아니고 빼앗겨봐야 돼요. 도망치면 계속 따라와서 빼앗고, 이것만큼은 잃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마저 또 빼앗기고, 그런 겁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유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자유의 반대말이 뭐냐? 성도에게 자유는 없지만 뭐가 있느냐? 성도에게는 잠재성이 있어요.

잠재성이라 하는 것은 안에 있어서 들키지는 않지만 이미 들어 있는 것을 잠재성이라 하거든요. 쉬운 예를 들어서 대구 서문시장에 큰 불 났다 칩시다. 속옷가게에 불이 붙었어요. 소방차가 와서 마구 물을 뿌려댑니다. 가게 안에 있던 속옷들이 어느 정도는 타고 또 얼마쯤은 그대로 있겠지요. 불을 진화하고 난 뒤에 가게 주인이 들어가서 쓸 만한 상품이 남아 있나 싶어서 떡이 되어 있는 속옷들을 하나하나 들춰내겠지요. 이게 우리네 인생이에요.

이미 떡이 되어 있는 우리, 잠재성인데, 그 안의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몰라요. 그런데 나는 모르지만 주님은 알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어떤 못된 마음, 어떤 악마의 속성을 가지고 따먹었는가, 우리는 그 몸을 그대로 인수받았어요. 그 속성을.

따라서 주님께서는 아담의 범죄 하기 전의, 창조 때의 그 아름다움의 기준과 수준을 가지고, 그 원리원칙을 가지고 ‘이 인간은 어디서 개판이고 불에 타버렸지?’ 하고 핀셋을 가지고 우리의 속성과 성격과 성질을 하나하나 들춰서 노출시킵니다. 굽이굽이 인생을 살게 하면서. 계속해서 어떤 사태를 일으키면서. 하나하나 노출시키지요.

불타버려 물을 뒤집어쓰고 떡이 되어 있는 옷 하나 들출 때 마다 우리는 발작하듯이 반발합니다. “주님, 진짜 이거 없으면 나 죽습니다. 이것만큼은 원상회복 안 되겠습니까?” 주님에게 빌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기도하면서 협박하기도 하고. “정말 나 이거 없으면 나답지 못합니다. 주님이 제발 내가 생각하는 나다움의 수준을 어느 정도라도 맞춰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너답다는 것이 뭐지? 너답다는 것이 뭐야? 도대체 너답다는 것을 내가 너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누가 너에게 미리 ‘이 정도 돼야 너는 너답다’고 거짓말로 자아를 뒤집어씌웠지?”라고 묻습니다.

요셉도 예외가 아니에요. 요셉도 채색 옷 입고,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요셉에게 나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 그것이 나 다운 거예요.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가부장제도하에서 아버지로부터 몰빵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것은 거칠 것이 없는 은사를 누리는 거지요. 형들 보기를 아주 우습게 보는 거예요. 아버지라는 후원자가 든든하니까. 왕실로 치면 세자 아닙니까? 왕 다음에 세자잖아요.

그런데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형들이 요셉을 죽여 버렸잖아요. 팔아먹은 거지만 죽인 것이나 팔아먹은 것이나 어쨌든 눈앞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요셉은 뭘 느꼈겠습니까? 나답다는 그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아버지와 나라는 인간적인 사랑, 우정, 또는 돌봄, 육적인 관계로서 기껏 형성된 나다움이거든요.

그런데 요셉 본인도 원치 않았던 꿈이었어요. 본인이 꿈꾸고자 노력한 것도 없어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계시를 줘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럴 경우에 ‘아,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는데다가 하나님의 계시까지 받으니 하나님마저 내편이구나.’ 그 꿈의 내용을 보니까 최고가 되는 거예요. 형들이, 아버지마저 자기한테 절하는 꿈이니까. ‘그래, 내가 잘나고 잘난 이것이 나다운 것이다.’라고 생각했지요.

요셉은 형들과의 관계성이나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 그대로 기존의 인간의 관계를 포기를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요셉으로 하여금 아버지한테는 죽은 자가 되고 형들에게는 완전히 버림받은, 팔린, ‘너는 동생 가치가 없어.’라고 처절하게 내몰린 입장에서 이제는 고향도 잊어버리고, 가족도 잊어버리고, 이방나라인 애굽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게 바로 요셉다운 것이었습니다. 노예가 문제가 아닙니다. 기존의 관계가 다 끊어졌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형들에게 좋게 할 수 있고, 아버지에게 좋게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더 이상 형들에게 좋게 할 수 있는 여지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누구한테 좋게 해버리면 나에게 어떤 호의를 받은 그 사람이 나에게 또 좋게 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좋은 인간적 관계를 형성할 겁니다. 그걸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외톨이가 되게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내가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람이 죽을 때나 생기는 현상 아닙니까?

죽을 때는 “아이고 아버지!” 하고 울고불고 하지만 몇 개월도 안 되어서 ‘아버지 돌아가신 지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몇 년이나 된 거지?’ 그것도 잊어버려요. 그거 잊지 말라고 강제로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그것은 다 허례허식이고 형식에 불과한 것이고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요셉은 자기가 살 수 있는 모든 관계에서 다 끊어졌어요. 스스로 살 수 없는 거예요. 이게 요셉다운 겁니다. 죽어버린 요셉에서 어떤 싹이 나듯이 어떤 새로운 관계가 거기서 삐져나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에 장악되어 있어요. 그 꿈이 복음이라는 의미의 새로운 관계, 그 콩나물줄기가 솟아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형들과 요셉의 본가의 야곱, 이제는 그들도 요셉처럼 똑같이 인간적인 모든 관계는 실망과 불만으로서, 좌절로서 끊어져야 되지요. 그 조치를 요셉이 멀리서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주님이 자기백성에게 하고 있는 거고요.

흔히 부모들이 자식들보고 하는 소리가 있잖아요. “얘들아! 난 너희들 때문에 산다. 나 죽거든 제사 잊지 말고 꼬박꼬박 지내야 된다.” 기독교집안 같으면 추도 예배 꼭 하라고 요구하듯이. 나는 너희들 때문에 산다. 무심코 나오는 일상의 대화들이지요. 그러나 요셉한테는 그런 것이 용납이 안 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도 용납이 되지 않지요.

물론 예수님이 그 말씀 하신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은 인간이다. 새로운 관계, 사적이고 혈육적인 관계, 예의를 서로 주고받는 관계, 교양주고 받는 관계, 윤리도덕적 관계, 그거 다 소용없는 관계에요

정말 형제라면 복음적관계로 다시 맺어져야 됩니다. 그 복음적관계의 절차는 주님이 다루는 저쪽에서 나로 하여금 내가 이것만큼은 지켜줘야 나답다는 그것마저 주님께서 용납을 하지 않네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제목이 ‘진퇴양난’인데 영어로 하면 ‘딜레마’거든요.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야곱의 처지를 대변해주고 있어요. 치약이 오래돼서 입구가 막혔다고 칩시다. 그런데 저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막힌 것 뚫지도 않고 그냥 눌러서 억지로 짜버려요. 그러면 옆구리가 터져서 치약이 흘러나오지요. 김밥 옆구리 터진다고들 말하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달랜다고 해서 우리가 주께 영광 돌리고, 우리의 소중한 것을 포기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옆구리 터지게 해서, 내가 생각도 못한 영적인 그것이 내 옆구리를 통해서 흘러나오게 하는 거예요. 우리인생은 조져놓은 거지요. 내 인생은 아주 우세당하고, 수치당하고, 부끄럼을 당하고, 망가지는데 망가지기에 비로소 십자가의 복음의 옆구리를 통해서 터져 나올 때 ‘아, 성도 맞구나.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어도 상관이 없구나.’

세리나 창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리나 창기가 천국가면서 옆구리에서 줄줄 새면서 흘러나오는 여분의 것, 잉여의 것, 그게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심이에요. 사랑이거든요. 제발 이 옆구리 터지는 소리가 하나의 농담이 되지 않고 요셉처럼, 야곱처럼, 우리들의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주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독하고 집요한가를, 주님의 십자가피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우리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통해서라도 흘러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