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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42:1-4 / 생존과 생명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2:1-4 / 생존과 생명

정인순 2018. 11. 15. 23:29

 음성 동영상 Youtube

 

 생존과 생명

 

이근호
2018년 11월 14일              

 

 

본문 말씀: 창세기 42:1-4

(42:1)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 만하느냐

(42: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42:3) 요셉의 형 십 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 갔으나

(42: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된 야곱 족보 이야기가 야곱이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하다가 이제 창세기 42장에 이르러서야 야곱이 언급됩니다. 무려 20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야곱은 숱한 역경을 거쳐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복이 야곱과 직접 닿지를 않습니다.

엉뚱하게도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 본인은 정작 애굽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야곱이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땅’입니다. 애굽나라와 분명히 구별됩니다. 애굽나라는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야곱은 그 약속의 땅이 아닌 애굽나라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애굽나라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애굽나라를 의지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보장받는 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나안 땅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살기 불편한 곳이라는 생각은 단순히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가뭄이 들고 기근이 찾아들었기에 현실적으로 합당하다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땅으로부터 개조가 됩니다. 즉 언약을 제대로 모르는 자에서 언약을 아는 자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란 오직 개조된 자들에게 허락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기정사실화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문제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께서 원망이나 하면 아니됩니다. 자기 자신이 달라져야 하는 겁니다. 그 달라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대로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 원리는, 언약의 식구들로부터 추방당한 인물에게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 애굽은 죽은 요셉과 상관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형제들로부터는 팔려서 애굽에 온 요셉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살던 땅에서 격리된 곳입니다. 이 애굽은 바로왕의 꿈에 의해서 결국은 처참하게 황폐해져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이 황폐해야 마땅한 애굽은 넉넉하게 풍족한 세계로 변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애굽은 ‘생명의 땅’이 되어 있습니다. 즉 애굽 땅은 여분의 하나님의 혜택을 입고 있는 ‘공적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정치화(政治化)압니다.

즉 하나님께서 특정 공간을 통해 시혜를 분배하시게 되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정치를 행사하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받았던 언약은 야곱을 떠나서 약속의 땅이 아닌 곳에다 다 언약의 혜택의 공간을 마련하시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육과 영을 분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이 영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반대로 영이 육을 찾아가는 식으로 은혜로 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육에 불과하다는 것, 즉 복받을 권리가 없는 자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언약은 이처럼 은혜를 주시는 주체와 은혜를 받을 객체를 새롭게 만드시는 그 둘 사이를 순환하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신이 기대한 자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해서만 새롭게 만들어낸 자아로서 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었을까요? 애굽은 당연히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요셉의 버림받을 통해서 그 성격이 나타났습니다.

애굽은 약속으로부터 버림받은 장소입니다. 이 버림받음이란 곧 죽음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땅에서 예상 못한 생명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꽃을 피우게 된 겁니다. 예수님의 경우와 연결시켜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 오실 때, 인간들은 자기네들에게 어떤 문제가 근원적으로 있는 지를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가치하게 봐서 버렸습니다. 죽였습니다. 이로서 인간 나라에서는 ‘산 자’의 땅과 ‘죽은 자’의 땅을 나름대로 분명하게 구분지으면서 살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땅에 계신 분이 부활하시므로서 생명이란 곧 인간들이 기피하고 외면하고 달아나려는 그 죽음의 공간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마치 야곱과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버렸지만, 그 버려진 요셉에 의해서 ‘황폐에서 풍족’이 나온 겁니다. 바로 이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요셉의 형들이 자신들에게 근원적인 문제가 있고 자신들이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세력에 갇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에게 있어 애굽의 일상은 늘 이방인의 생활이요 죽음에 친숙한 삶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요셉을 애굽의 전권이 일임하게 된 것은 ‘언약에 의한 복’이란 바로 죽음의 공간에서만 피어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날에 적용하면 이러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본인들의 노력으로 채우라고 준 시간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죽음의 세상이 왜 죽을 수밖에 없고 왜 불바다 되어야 될 세상인 것을 알려주기 위한 내용으로 꽉꽉 채워져 주어진 시간입니다.

즉 시간이란 주님의 자신의 활동을 담아서 우리 인간들에게 제시된 겁니다. 우리들이 일상을 통해서 이 사실을 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일상이란 자신이 마땅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시간을 채웁니다. 안 죽어야 하고 오래 살아야 하는 평범한 그런 세월인줄 압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천국 간다는 것은 어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자기 자신이 죽음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혜택은 요셉이 있는 그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어져야 가능합니다. 성령이 오셔야 천국 가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의지로서 우리가 천국에 갈수는 없습니다.

이 오기와 의지가 바뀌어야 합니다. 아무리 고집 부려도 소용없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을 떠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곧 죽음으로 간 바로 그 길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고 기꺼이 반겨야 합니다. 약속에 의해서 죽는 자만이 영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일상의 무료함에 우리의 몸을 맡기지 말고 그 속에서 주님의 심판의 엄격함을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64강-창 42장 1-4절(생존과 생명)

1811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2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65페이지입니다.

창 42:1-4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십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에서의 족보 이후, 그 다음에 야곱의 족보가 나오기 마련이지요. 그것이 일관된 흐름인데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의 족보가 이러하니라, 라고 에서의 족보와 비교하면서, 야곱의 족보 소개하면서 바로 요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요셉 이야기가 37장부터 41장까지 설정해 놓고 그 다음 41장 지나서 42장에 와서 야곱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등장할 때 요셉은 없는 겁니다. 야곱에게는 열 한 아들만 있는데 야곱이 등장하면서 곱게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애굽쪽을 바라보면서 야곱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야곱이 애굽을 좋아하지는 않았고 그리워하지도 않았지요.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애굽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 사는 땅은 약속의 땅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기를 축복의 땅이라 했습니다. 축복의 땅에 기근이 찾아온 겁니다. 그리고 저주받아야 마땅한 애굽 땅은 저주는커녕 지금 번영하고 있고 풍족합니다.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백성을 약속의 땅에 넣어주는데 그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복된 땅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비교해서 밀리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땅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이나 다들 약속의 땅에 어떤 기대를 걸고 살았지만 그 약속의 땅에 가뭄이 들고 기근이 들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가뭄이 들고 기근이 든다는 이 말은 뭐냐? 약속의 땅은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뜻이지요. 과연 약속의 땅이 살만한 곳이 못되는가?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은 살만한 곳이 못됩니다.

누구에게 그런가 하면, 육의 사람한테는 살만한 곳이 못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놓고는 그 땅이 육의 모습을 가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눈에는 결코 살만한 땅이 못됨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 약속의 땅이 문제가 아니라 그 땅에 들어왔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후손들 본인이 육이라는 사실, 본인이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보낸 거예요. 그러니까 땅이 인간을 바꾸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땅에 살면서 자기가 문제 있다고는 생각이 안 들어요. 땅에 가뭄이 들고 기근이 들면 자기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이 나에게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환경 탓 하지요.

이 약속의 땅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언약의 땅이죠. 언약이 통치하고 언약이 작렬하는 곳이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언약이 작렬한다는 말은, 전에 언약을 몰랐던 육의 인간들, 그냥 보통 인간들이라 합시다, 육의 인간들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기 편하도록 하나님께서 환경을 조성해줄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 그 생각은 고쳐져야 될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뀌어야 될 생각이라는 것을 약속의 땅, 언약의 땅에 들어와서 비로소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육의 본능은 뭐냐? 무조건 내게 유리하고 이익이 있어야 그게 내가 기대했던 천국이고 내가 생각한 참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으니까 환경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조차도 다른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거짓된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는 겁니다. 거짓된 하나님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날 잘해줄 때 그것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의식을 고수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땅을 약속의 땅, 언약의 땅답게 언약을 작렬하게 하십니다. 작렬하게 하시고 적용을 시키게 되면 이 야곱과 그 후손들은 약속의 땅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감지를 해야 돼요. 2절에 보면,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야곱이 약속의 땅에 살면서 죽음이 자기를 덮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있는데 죽음이 더욱더 가까이 다가오는 거예요. 죽음으로 내몰리는 땅, 그게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기초적인 상식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야곱은 축복받은 족속입니다. 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그런데 축복받은 이 야곱이 하나님께 복 받았다 하니 나름대로 그런 정황을 생각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막상 돌아가는 현실은 지금 생존이 아니라 반대로 죽음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죽음에 내몰리니까 살기 위해서는 자동적으로 사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애굽을 쳐다보게 되었어요.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야곱이 애굽을 쳐다보게 되었다. 애굽에는 우리가 먹을 만한 곡식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야곱은 애굽을 쳐다보지만 지금 제 3자로서, 창세기를 죽 이어서 본 우리의 입장에서는 애굽에 요셉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나라에 요셉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야곱입장에서는 애굽나라만 보입니다. 거기에 양식이 있다, 그게 보였습니다. 요셉이 있다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양식이 보이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양식이 있다는 애굽나라’에서 ‘요셉이 있다는 애굽나라’로 바뀌는 과정을 설정하시고 그 과정을 통해서 야곱과 형제들을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서 어떻게 약속의 땅에 합한 인간으로 달라지게 하는가를 우리보고 주시하게 하십니다.

분명히 애굽나라는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약속의 땅이 아닌데 약속의 땅이 아닌 곳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나온다. 머리 좋은 사람은 대번 알거예요. 우리를 살리러 오시는 분은 하늘에서 오실 것이라는 그런 안일한 생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릴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그러나 무덤에 들어가신 분, 우리가 들어가기 싫어하고, 우리가 거부하고, 우리가 강렬하게 반발하는 그 죽음, 그 죽음 속에서 나오신 분이 우리의 생명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을 우리에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우리가 기피하는 죽음, 그 죽음 속에서 우리가 기피하든 말든 그 죽음에서만 무조건 생명이 있고 길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진리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피하는,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오늘 당장 죽을까, 내일 죽을까, 죽음에 늘 쫓기고 있는 우리가 정작 주시해야 되고 바라봐야 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 죽음 속에 있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 편하게 살다가 부르실 때 편안히 천국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라는 것은 약속의 땅이거든요. 약속의 땅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그 언약의 완성자가 우리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싫어하는 죽음 쪽에 있다면 주의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으로 이끄는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제는 죽음과 친하라는 말입니다. 죽음과 안 친하지 말고 죽음과 친해라. 죽음을 반겨라.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라. 죽음 앞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이 다 허사인 것을 일거에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게 죽음이 주는 교훈이에요.

살고자 할 때 누가 살고자 하는가? 남이? 아니에요. 내가 살고자 하는 거예요. 내가 살고자 하는 모든 일평생의 노력이 다 허사로 끝난다는 것, 그게 소용없다는 사실을 죽음이 알려줍니다. 그 죽음은 애굽에서 어떻게 피어나는가? 역시 애굽도 가나안 약속의 땅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땅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 번 제가 이야기하지만, 바로가 꾼 꿈의 마지막, 그 끝은 황폐함이에요. 저주요, 죽음입니다. 애굽나라의 운명은 황폐함으로 마감되는 것이 정상이었어요. 그런데 애굽나라에 누가 있느냐? 거기에 요셉이 있었어요. 요셉으로 말미암아 ‘바로 꿈 + 요셉의 꿈’, 이렇게 요셉의 꿈이 바로의 꿈에 추가되니까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어야 마땅한데 거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나님의 정치, 하나님이 정치를 벌이는 정치공간이 되는 겁니다. 공적공간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분배의 혜택을 입는 공적공간이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분배받는 중심지로서 애굽이 부각되지요. 이것이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정치적전략입니다. 하나님의 정치화지요. 하나님이 정치한다면 어떻게 정치하겠는가? 그것을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나라에 양식이 남아돈다는 것은 결코 애굽백성들의 노력의 결과도 아니고 어떤 인간의 소원도 아니에요. 요셉이 그 애굽 안에 있음을 통해서 요셉이 어떤 인물인가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요셉자체를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안 그래도 현재 요셉은 높이 되었어요. 애굽의 모든 전권을 위임받은 국무총리지요.

한국당의 위임을 받은 전원책과 비슷한 위치라고나 할까요? 토사구팽 당했지만. 전권을 위임받은 거예요. 전권을 위임받은 자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이 그 인물을 지금 정치적지도자로 등장시킨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의 실효성이 언약을 받아야 될 인간에 의해서 미움 받고 배척받은 처지에 있었고 그 처지에 있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감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과 애굽 땅 사이에는 분명히 경계가 있고 구분이 있는데 야곱 입장에서의 애굽나라는 언약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나라에요.

그런데 요셉이 애굽 땅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은, 야곱 입장에서 이미 자기가 사랑하는 요셉은 죽은 자에요. 요셉이 죽었고 야곱은 그냥 약속의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야곱 입장에서 언약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조리 다 끊어진 상태입니다. 야곱 입장에서 요셉은 죽은 자라는 말은, 요셉 입장에서 야곱은 죽은 자라는 이야기에요.

다시 말해서 요셉이 성취한 풍족한 양식을 소유한 입장에서, 요셉이 국무총리니까 양식을 갖고 있잖아요, 그 입장에서 지금 아버지 야곱은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누가 산자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 입장에서 요셉은 이미 죽은 자에요. 그런데 살아 있는 요셉 입장에서는 야곱이 죽은 자에요.

왜냐하면 요셉에게는 살 수 있는 양식이 있지만 야곱의 가족에게는 양식이 없기에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뭐냐? 요셉에게 있거든요. 그렇다면 인간들 보기에 예수님은 죽은 자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인간들은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는 것은 죽음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 있는 분이 죽음 속에서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그 권능, 그 능력을 어디에 넘겨주느냐 하면, 죽음에 있는 사람인 자기 축복받을 백성에게 그 넉넉한 생명을 성령을 통해서 나눠줄 때 거기서 언약은 효과를 보고 언약의 혜택을 입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결국 뭐냐?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살았다는 사람으로서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고 평범한 일이에요. 성경이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설교를 이렇게 해도 사람들은 지금 살아가는 그것이 자기들 보기에 너무 지루할 정도로 평범해요. 그리고 심심할 정도로 일상적입니다.

그날이 그날이고 내일이 되면 또 그날이에요. 어떤 특이사항이 없는 평범함 속에서 다만 그들이 감지하는 것은 뭐냐? 그런 평범한 일상을 내가 보고 있고, 뉴스를 듣고 있다는 그 자체가 자기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언약이 개입되게 되면 그 평범함이 도리어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게 만드는, 그야말로 악마의 힘이에요. 나를 죽게 하는 악마의 힘이 되는 겁니다. 등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간만 보내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주고 그 시간을 채우라고 그렇게 시간을 주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쪽에서 시간을 주실 때는 그 시간의 내용은 우리가 채우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꽉꽉 채워서 시간자체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겁니다.

시간 자체가 언약에서 흘러나오는 거거든요. 신약적으로 말해서 시간 자체가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시간을 받고 택배의 그 선물의 뚜껑을 열어봐야지요. 그 안에 생명의 언약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함의 일상이 들어있는지. 그걸 봐야 되거든요.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시간 속에서 주님이 살려내시는 언약의 다 이루심이 감지될 것이고 내가 살았다고 여기고, ‘나는 아무 문제없어. 내가 뭐 어때서? 나는 남들과 별 차이 없이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끌려가는지,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 겁니다.

평범한 그것이 인간의 눈을 가려버린 거예요. 지루한 일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 주신 언약에 대한 감사가 없게 만들었어요. 신자인지 아닌지는 아주 간단하게 구별됩니다. 고마움과 감사가 입에서 안 나오면 신자 아니지요. 왜? 고마움과 감사가 안 나오면 늘 주둥이가 튀어나와 있거든요. 늘 불만이 튀어나와요. 그리고 불안증세를 보이고. 항상 발발발, 떨면서 살아요. 정신이, 마음이 발발발발, 떨고 있어요.

죽음에 쫓기는 겁니다. 오늘 본문 42장 1, 2절을 보게 되면 “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야곱이 이야기했지요.

이건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들고 자기 자신이 살아 있음을 정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뭔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과 야곱 그 양쪽을 보고 있는 성도입장에서는 주의 초점이 뭐냐? 야곱이 뭘 얻을까, 그렇게 보지 마시고 ‘주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의 관점으로 성경을 봐야 돼요. 이것은 야곱에게만 충고할 것이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충고해야 할 거예요.

오늘이 11월 14일이잖아요. “주님이 오늘은 무슨 일을 벌였습니까?” 주님이 무슨 일을 벌이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꿈을 갖게 된 그 요셉이 애굽생활 하루하루를 통해서 주께서 요셉에게 무슨 일을 벌였는지, 와 같은 뜻이에요.

애굽은 바로의 꿈에 의해서 이미 저주받고 멸망 받고 황폐하는 것이 마땅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그냥 황폐케 하지 않습니다. 어떤 뜻을 가지고 황폐케 해요. 이사야 5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구름에게 명령, 지시해서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우리 눈에 보기에는 그냥 구름이 있고, 구름이 수증기와 먼지와 결합이 되어서 추운 날 하나의 고체가 되어서 떨어진다. 이것이 과학적설명이잖아요. 과학에서는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해요.

그 자연스럽다 하는 것은 어떤 현상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왜 구름이 비를 내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몰라요. 비가 오니까 온다는 동사를 가지고 비가 온다, 이렇게 표현한 것뿐이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요. 왜 죽는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 구름은 왜 있으며, 해는 왜 있으며, 달은 왜 있는지 모릅니다.

해와 달을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달에 가는 것은 좋은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고 가야 되지 않습니까?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달에다가 암스트롱 보냈고, 달에 실제로 간 적이 있니 없니, 뭐 그런 되지도 않는 이야기, 가짜뉴스까지 막 나오고 있는데요.

여기 이사야 5장 6절의 하나님의 계시가 장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무식한 것을 계시를 통해서 이렇게 알려주거든요. 구름이나 비 오는 것도 주의 명령 없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비를 왜 제때 주시지 않습니까, 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뭔데 내가 너에게 비를 내리냐는 말이지요.

인간은 뭔가 받을 권리가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왜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고 왜 애굽 땅이 황폐합니까? 인간은 이 땅에 어떤 식으로도 살아야 되겠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그것은 배후에 악마가 있다, 그런 뜻이에요. 교회 와서 빡세게 기도해서 살겠다고요? 그거 악마가 시킨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살겠다, 하는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드는 겁니다.

인간이 살겠다, 하는 그것 때문에 도리어 누가 죽었나? 메시아가 죽었어요.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설교 했지요. 하나님이 죽으로 오셨다는 그것이 모든 성경해석의 끝판왕, 끝장이라고. 다시 말해서 인간은 다른 하나님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날 살려주는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어요.

내가 천당 가도록 하나님이 오라는 거예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러 오시는 분이지 천당 보내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몰라요. 왜 사는지, 왜 움직이는지, 11월 14일이라는 날짜를 왜 우리에게 허락했는지 전혀 몰라요. 11월 14일이라는 시간은 우리 살라고 준 시간이 아니고 주님이 일하려고 주님 자신이 제시한 그 시간이에요.

그 시간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겁니다. 나 좋으라고 있는 시간이 아니고 주님의 숙제, 주님 자신의 일을 하려고 11월 14일을 준 거예요. 수능예비일 아닙니다. 주님이 수능칠 일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죽었다. 그거 당연한 거예요. 누구든지 인간 속에는 죽음의 세포, 죽음의 암세포가 자라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작은 폭탄을 갖고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 안의 폭탄이죠. 그 폭탄을 주께서 터트리는 날 우리는 살고 싶어도 죽어요. 우리 안에 죽음의 폭탄이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 우리가 아느냐?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이 보이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인간을 육에서 영으로 바꾸는 땅입니다. 무엇으로? 언약에 의해서. 그러면 언약은 어떻게 활동하느냐? 인간들에 자기 잘남을 위해서 쫓아내버린, 인간에 의해서 배척받은 그 분의 일과, 그분의 인생 속에서, 즉 요셉의 일생 속에서 어떻게 언약이 피어나오는지? 요셉은 죽음의 땅에서 어떻게 국무총리까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지금 형제와 아버지에게 그대로 답습해 주시는 겁니다.

요셉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죽어도 되는데 그 꿈 때문에, 요셉에게 준 그 중요한 꿈 스스로 요셉을 살려내는 거예요. 꿈이 요셉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꿈이 요셉 안에 있는 꿈을 살려내다 보니까 덩달아 요셉이 국무총리로까지 살게 된 겁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요셉 안에 주의 일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껍데기였어요. 일종의 운반체였고. 자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이 스스로 요셉이라는 인간을 통해서 실현될 때 그 말이 뭐냐?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사람을 하나님이 언약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내요.

언약이 그 주체와 받을 객체를, 언약이 그 양쪽을 순환하기 위해서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객체를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야곱도 달라져야 되고 형제들에게 쫓겨난 요셉도 달라져야 돼요. 언약을 받은 주체가 되는 야곱, 그 야곱언약의 혜택을 받아야 되는 요셉도, 주체도 객체도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주체, 새로운 객체로 다 새로 만들어져야 되고 그 둘 사이에 주고받으며 이동하는……, 42장부터 보면 왔다갔다, 하거든요.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갔다, 해요. 왔다갔다, 하는 그 순환의 과정 속에서 육의 인간이 어떻게 영의 인간으로 달라지는가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거기에 일관된 원칙이 있는데, 내가 살 필요 없고 죽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 달라지게 하는 거예요. 그래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나 좋으라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좋으라고 하루하루 지금껏 수명을 더하고 있는 겁니다.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봐야 되느냐 하면, 부산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이 성경을 보게 되면 공허하게 느껴져요. 허무하게, 아무것도 안인 것처럼, 돈도 되지도 않고. 그만큼 인간이 이 땅에서 일상이라는 그 무료함에 파묻혀 있는 거예요. 주님만 지금 바빠요.

주님만 바쁘고 주님만 심각해요.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냥 밥이나 먹고 살면 예수 믿으니까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천당 보내줘요? 인간이 안 달라졌는데. 눈만 뜨면 자기를 위해서, 눈을 감아도 자기를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눈만 뜨면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눈을 감아도 자기 가치 지키기 위해서. 나를 나답게 지키는 것, 내가 절대자, 내가 고귀하고 내가 중요하다는 그것 하나 지키기 위해서 주님 주신 시간과 공간을 허비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의미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지금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어요. 참, 살만한 곳이 못되지요. 이것은 하나님탓이 아니고 인간탓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어디로 불러냈느냐 하면, 애굽으로 불러내요. 애굽땅은 누가 거기에서 정치하고 있느냐 하면, 요셉이 애굽의 실제적인 정치권력자로서 있는 겁니다.

권력인데 그 내용이 뭐냐? 은혜를 분배하기 위한, 새로운 혜택을 입는 새로운, 없던 공간이 발생돼요. 없던 공간. 그 공간은 은혜를 무상으로 주는 공간이에요. 특히 언약의 백성, 다른 사람한테는 돈 받고 주지만 국무총리 요셉이 자기 형제들과 아버지에게는 왜 돈을 받겠습니까? 돈을 줬지만 그 돈을 도로 메워주면서 거기에 더 얹어주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너는 나하고 아는 사이’라 그 말입니다. 당신들 구원하려고 나를 이렇게 먼저 애굽에 보냈던 것이 내 꿈의 진짜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귀한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일상에 매인 사람, 자기 일, 자기 전문직종에 매인 사람들은 자꾸 잊어버려요.

지금 돈 버는데 바쁘거든요. 돈을 왜 법니까? 그래야 밥 먹고 사니까. 왜 살아야 되는데? 그걸로 끝이에요. 그게 사는 것이 아니고 그걸로 인하여 진짜 진리를 방해하고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자꾸 죽음을 기피하게 만들어서, 죽기 위해서 오신 진짜 하나님을 살고자 하는 내가 방해하고 훼방하고 가려버리는 마귀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하는 자에요.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우리 자리가 황폐한 자리가 내 목숨이 위태한 자리고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고생고생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야기 시키는 원인이 그게 약속이라는 것, 그게 복음이고 그게 생명이라는 것, 나를 죽이는 그 힘이 바로 복음에서 나온 생명의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자만이,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만이 산다는 것. 예수님에 일어났던 죽음과 부활의 그 과정, 그것이 미리 요셉을 통해서, 죽었던 요셉이 다시 산 것처럼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새로운 피조물, 다시 말해서 육에서 받은 세상이 아니라 영의 인간으로 달라졌을 때 세상은 무엇으로 보이느냐? 세상은 마땅히 불심판 되어야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 그 지시가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오는 거예요.

아, 그러니까 이 세상을 주께서 불심판으로 만드는 그 이유를 이제는, 이제는 생생하게 온 몸으로 느끼는 거예요. ‘죽는 것이 남는 거구나.’ 죽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마음껏 온 몸으로 체험하시는 요셉 같은, 그리고 야곱 같은 언약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이 잘 풀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인생이 고요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지옥가고 있으면서도 천국 간다고 착각하게 만든 그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유혹인 것을 우리는 왜 몰랐습니까? 이제는 주님 가신 길에 눈이 뜨이게 하시고 생명은 넓은 길에 있지 않고 좁은 길에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