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익 162강-창 41장 50-52절(요셉의 두 아들) 1810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장 50-52절입니다. 구약성경 65페이지입니다.
창 41:50-52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이 애굽까지 오게 된 것은 언약으로 인하여 이끌림 받아서 오게 된 겁니다. 그 오게 된 장소가 애굽입니다. 애굽이라는 것이 애굽사람한테는 세상의 전부고 현실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창세기 끝나고 출애굽이라는 것이 나오지요.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것,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현실의 전부라고 여겼던 그 애굽, 거기서 빠져나온다는 것, 애굽을 빠져나온 입장에서 애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용납하는 세상이었었나,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자의 몫입니다.
빠져나온 사람만 그 사실을 알게 되지요. 요셉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애굽이냐, 아니면 요셉이냐, 서로 합치될 수 없는 사실이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제시된 겁니다. 애굽나라 가질래, 요셉 가질래, 하는 뜻이에요.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애굽나라 가질래, 요셉이 내포하고 있는 그 세계가 더 좋으냐를 묻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출애굽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택한 약속의 땅은 애굽에서의 탈출이 필수적입니다. 애굽에서의 탈출이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러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의 의사였고 그들의 희망이었는가?
아닙니다. 거기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공식하나 만들어드립니다. “언약은 스스로 한계를 만들 때 그 한계를 계속 밀어낸다.” 이런 공식입니다. 언약은 어떤 한계를 주되 결국 그 한계가 전부가 아니라 그 한계를 밀어냄으로서 어떤 노선을 형성하게 되고 최종언약이 나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언약의 이름으로 인간세계를 계속 한계지우는 거예요.
한계라는 말은, 테두리 짓는다는 것, 달리 이야기해서 ‘이게 아마 현실의 전부일거야. 이게 아마 세상의 전부일거야.’라고 오해하게 만드는 현상을 계속 유발합니다. 그리고 언약은 말합니다. “네가 보기에 그게 전부지? 그게 전부가 아니야.”라고 그 한계를 밀어내고 새롭게 언약이 보여주는 또 다른 세계를 펼쳐주지요.
그래서 언약에 이끌리는 사람은, 언약이 인도하는 대로 이끌리다 보면 어떤 노선이 형성되는 겁니다. 복음을 10년 들었다, 20년 들었다, 30년 들었다, 우리 십자가 마을이나 교인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30년 듣고 혹은 20년 들었는데, 복음이 뭐라는 것은 알겠는데 초창기에 알았던 복음의 기쁨은 지금 왜 없어져서 다 날라 가버리고 그냥 시큰둥합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묻는 사람은 없어요.
묻는 사람은 없지만 제 눈에는 다 보이거든요. 복음의 기쁨 없이 ‘그거 다 아는 건데 뭐’ 이런 식이거든요. 왜 그러냐하면, 멈춰있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 아는 것에서 멈추다 보니까 자기가 복음을 공부를 하게 돼요. 마치 학원에 가서 복음 연구해서 천당 가려고 복음 연구하듯이. 학원에서 공부할 때, 이 정도 수준이면 대충 알 것은 다 알았다,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인도함을 받아서 꾸준히 언약의 진행방향과 같이 움직여나가는 사람만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복음이에요. 주님에게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이 자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 세상에서 복음 알았으니 이제 천국은 걱정 안 해도 되고 슬슬 내 할 일을 해 볼까, 이래가지고서는 초창기의 그 기쁨과 감격은 없어요.
멈춘다는 것은 뭐냐 하면, 도로 나 자신을 기억하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노선을 따라서, 계속 언약에 휘둘려서 어떤 특정자리에 멈추지 않게 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어디서 뭘 하는지 그 자체조차도 기억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사람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 생각한다는 것은 멈췄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멈추지 않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천국이고 복음입니다. 계속해서 언약은 자기한계를 짓고 그 한계를 밀어붙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멈춰버리면 언약도 멈춰버려요.
‘아, 이게 전부구나. 이 정도 알았으니까 너끈하게 천국은 가겠지.’ 하고 그 자리에 자기가 스톱해서 그 입장에서 자기가 아는 안목에서 늘 생각하는 거지요. 마치 앨범 속에서 지나간 때의 사진을 보게 되면 그 사진의 모습을 내 모습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완성된 그것으로 자꾸 한정짓다 보니까 자기가 아는 언약가지고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거예요.
그러나 언약은 계속 우리를 이끕니다. 이끌다 보면 직직, 끌리는 자국이 있지요. 그 자국을 요셉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51절에 보면,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잊어버렸다는 말은 애굽이라는 나라에 요셉이 어떤 자국을 내고 긁어온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이걸 제가 노선이라고 한 거예요. 그것은 요셉의 인생이 아니라 언약자체의 노선이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요셉은 멈추지 않았다. 요셉은 계속 언약이 인도하는 대로 이끌려서 어떤 일정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완성을 향하여 이끌림 받았다는 그 흔적이 요셉의 자식의 이름을 통해서 드러났거든요. 그러면 우리도 멈추지 말고 매일같이 주께서 강렬하게 이끌고 갔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느껴져야 됩니다. 멈추면 안돼요. 사람은 안 움직이면 죽는 날입니다. 성도도 움직여야 돼요.
스스로 움직이면 안돼요. 매일같이 주께서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어떤 흔적, 세상에 자국을 낸, 스크래치를 낸 흔적이 있어야 돼요. 그 흔적을 통해서 이제 요셉은 본인을 잊어버려야 돼요. 내가 이정도 되었다 하는 그 자신을 잊어버려야 돼요. 믿음 있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없는 자만이 믿음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음 있다고 우겼던 그 한계를 언약은 계속해서 스톱되지 않도록 이끄셨던 거예요. 내가 예수를 믿으면 안돼요. 주님이 나로 하여금 계속 예수 믿지 않는 자라고 티를 낼 때 이미 그것은 나의 흔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믿음 억수로 없는 나를 계속 이끄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요셉은 죽고 자식 둘만 남았다. 자식 둘은 요셉의 내부에 있던 요셉의 본질이었습니다. 이 언약의 원리가 아브라함과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아브라함은 잊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야기는 끝이에요. 이삭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놓고 이제는 이삭 이야기가 끝나요. 이삭은 죽은 자가 됩니다. 이삭은 죽었지만 야곱과 에서 속에서 이삭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언약의 자손이라고 해요. 자손이 등장할 때까지 그 선조는 스크래치, 이 세상을 긁고 지나가는, 자국을 남기는, 노선을 남기는 그 기능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확정된 최종점, 최종점이 나를 이끌 때까지 부모는 자식이라는 이름의 본질을 그 배에서 이 땅에 쏟아내면서 자기는 소리 없이 사라지지요. 어제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성도의 소원은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초라하게 소리 없이 사라지는가, 그게 소원이어야 하는 거예요. 유명 떨지 말고.
‘그런 사람 있었어?’ 할 정도로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살다가 아무것도 아니게 날라 가는 겁니다. 그러나 애굽의 입장에서 봐서는 요셉은 대단한 존재지요. 그래서 애굽에서 출애굽 되어야 되는 겁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꿈에 의하면 꿈을 드러내게 하는 무대의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나라 사람들과 바로왕은 애굽이 현실의 전부라고 봤기 때문에. 애굽은 그 애굽나라를 꿈으로 여기지를 않았어요.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애굽은 출애굽을 예상할 수밖에 없는, 없어져야 될 세계, 정말 꿈같은 현실이 애굽이고, 현실이 꿈이고 꿈이 현실이 되는 거예요.
애굽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 마당에서 요셉의 본질은, 나는 거기서 나를 잊은 자로, 사라진 자로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듯이 자식이름을 그렇게 지은 겁니다. 좀 복잡하게 이야기하게 되면, 요셉이 결혼한 여자가 제사장의 딸인데 ‘온 제사장’ 이거든요. ‘온’이라는 말은 ‘모든’ 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 장소, 지역의 이름이 ‘온’이에요.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지금 애굽사람의 입장에서 요셉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우리 애굽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신의 계시로서 우리 애굽나라의 미래를 미리 점지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애굽사람의 입장에서 그래요. 애굽이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브낫바네아라고 요셉의 이름을 애굽식으로 지었지요. 45절에 나오지요. 그런데 그것은 엉뚱한 생각이고 그 생각에 대해서 요셉이 동의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데 애굽식의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51절에 보면,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그리고 52절에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애굽식 이름이 아니고 히브리식의 이름을 지은 거예요. 첫째 이름이 므낫세라 했는데 이것은 “잊어버리게 하셨다” 둘째 이름이 에브라임인데 이는 52절에 “창성하게 하셨다”라고 되어 있지요. 52절에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두 아들 낳는 것이 요셉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드디어 꿈이 현실이 된 것으로 봐요. 꿈이 두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현실은 그냥 꿈속에서 아직 나타나지를 않은 겁니다. 꿈이 현실화되었을 때 애굽사람들은 국가가 잘되는 것을 꿈의 현실로 봤는데 요셉은 뭐로 보느냐 하면, 또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국가가 등장한 것이 아니고 인물이 등장하는, 국가와 관계없는 특정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꿈의 완성으로 보는 겁니다.
땅이 잘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소원이라면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꿈의 실제성입니다. 교인들이 천국 가는 것이 교인들의 소원이라면,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그 가운데서 나를 잊어버리라는 조건에 충족되는 것은 내 존재를 대신할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등장할 때 내 존재라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마땅하고 정당하기에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성령이 옵니다.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했습니다. 환상이나 꿈이나 예언이나 전부 다 같은 말입니다. 꿈을 꾸리라. 꿈을 꾼다는 말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또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 꿈의 내용은 언약적으로 보면, 어떤 인물의 등장이에요.
왜 내가 들어갈 천국이 꿈의 현실이 아니냐 하면, 내가 천국을 사모하고 그걸 그리워하게 되면, 그 천국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잊지 못할 나가 거기에 엄연히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언약의 제대로 된 완성이 아닙니다. 언약이 완성되려면 반드시 요셉의 이름을 지었던 두 아들의 절차를, 그 노선을 반드시 거쳐야 돼요.
그 노선이 뭐냐? “잊어버려라. 그러면 창성할 것이다.” 그 두 조건입니다. 어렵지요? 제가 설교하면서도 참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이게 말이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고 저에게 이익이 뭐예요?’ 사고방식이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설교초반부터 이야기합니다. 왜 출애굽을 안 하십니까? 출애굽 없는 구원은 없거든요. 출애굽이 되려면 애굽에 대해서 충실하게 온몸으로 느껴야 돼요.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대로 내 소원인 적도 없고 내 꿈인 적도 없었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를 원합니다. 왜? 그것이 나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본질은 언약에 의해서 강제로 완전히 삭제당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저 천국 갈래요.” 주님께서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렇게 하겠지요. 제가 대전강의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유대인들의 구원관이 뭐냐 하면, 의롭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천국 간다는 겁니다. 예수님 죽인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그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누가복음 16장을 언급했지요. 불의한 자가 되지 않으면 천국 못가요. 그러면 불의한 자와 의롭다고 자부하는 이 바리새인의 차이점이 뭐냐? 불의한 자의 특징은 그 의가 자기 내부에 없는 거예요.
불의한 자를 천국에 보낸다는 말은, 그 불의한 자의 내용은 불의한 자가 본인을 잊어버린다는 조건이 갖춰져야 돼요. 그러나 의로운 자는 그 의로움 때문에 절대로 자기 자신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자의 특징이 뭐냐? 불의한 자를 하나님이 질질 끌고 간다면 그 흔적은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끌고 가시는 주님의 흔적이 되고 자국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의로운 자가 알아서 열심히 해버리면, 십일조 내고 뭘 하게 되면 이것은 자기가 잘났음을 증거 하는 그러한 자국이 되는 겁니다. 언약에 있어서는 증명이 진리보다 더 커요. 왜냐하면 사람이 진리라고 우기면 그걸 소지를 하게 돼요. 나는 진리를 안다. 그러나 진리의 진리 됨을 증명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 아니고 하나님의 몫입니다.
진리라고 여겼던 그 한계가, 그 벽이 점점 더 부서지고 깨지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는 것이 나 잘되기 위해서 하잖아요. 나 잘되어야 한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그것은 애굽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왜 거기서 못 벗어나느냐는 말이지요. 나 잘되기에서 못 벗어나느냐?
어떤 사람이 전화를 통해서, 요새 뜨는 목사 한 사람을 소개해줬어요. 아주 요새 유명한 목사로 뜬다고 해서 그 이름을 알았어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뜨는 목사인가 싶어서 유-튜브에서 찾아봤습니다. 설교를 들어봤어요. 기존교회와 차별성을 두면서, 돈으로 내는 십일조는 없다는 주장들을 하면서 뭔가 차별화를 꾀하려고 애를 써요.
뭘 느꼈느냐 하면, 제가 심정이 좀 상했는데, ‘아, 요새 이래야 뜨는구나.’ 했어요.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 사람은 전혀 모르고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요. 성경 내용은 이렇게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내가 이것을 알고 있다는 그것은 전혀 감추고, 사람들이 설명 잘하기를 원하는 그 설명 잘하는 것에 집중해서 설교를 하고 있어요.
‘아, 저래서 유명인사가 되었구나. 저래서 뜨는구나.’ 조회 수가 한 일주일만 지나면 천회 이상이 될 정도로 유명인사로 떠요. 양복도 안 입고 그저 편하게 입고. 나이는 한 4십 후반쯤 된 사람인데 그의 설교나 강의 내용을 죽 들어보니까 성경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애를 쓰고 있는데 전부 다 조작된 거예요.
조작된 것을 숨기기 위해서 원어까지 동원시켜요. 사람들은 진리라는 것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유사진리라도 그럴싸하게 설명을 해달라는 거예요. 성경은 그리스도만 남기고 나머지기는 다 사라지는 것이 성경이에요.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만 증거하고 나머지기는 다 사라지는 거예요.
왜 그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됩니까? 사라질 인간들에게 왜 설명해야 돼요? 신약의 사도행전에서 획기적인 것이 뭐냐 하면,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의고, 구원이고, 영생이고 없다는 이야기에요. 성령의 세례라는 것은 인간이 천국가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다 그야말로 허망한 꿈이라는 말이지요. 허망한 꿈이에요.
현실에서 하나님이 주신 꿈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설명할 수가 없을 때 그것은 하나의 절단된 절벽이 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여분의 것이 나와요. 여분의 것이라는 것은 예상 못한 겁니다. 그 여분의 것이 뭐냐 하면, 꿈이에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꿈이라 하는 것은 미리 예상해서 꿈을 꿉니까? 꿈이 꾸기 전에 그 시나리오를 본인이 작성하는 거예요? 꿈은 그냥 난데없이 쳐들어온 거잖아요. 그 쳐들어온 것이 없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핵심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쳐들어온 것에 대해서 내가 관리하거나 요리하지 않습니다. 꿈이 나를 질질 끌고 가는데요. 내가 그 꿈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말합니다. “네 인생 잊어버려라. 네 인생을 잊어버려라.” 자꾸 네 인생 가꿔서 천당 보내려고 하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이끄심이 나를 잊을만한 존재밖에 안 된다는 것을 계속 강요하면서 잊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없어져야 될 나에게 꿈이, 복음이 찾아오는 것은 스크래치를 내기 위해서, 이 땅을 긁어내기 위해서 오시는 거예요. 말 안 들으면 패잖아요. 패서 축 쳐져서 시체처럼 되면 질질 끌고 가는 거지요. 가면서 이 땅에 그리스도 피만으로 적시면서 가는 거예요.
세상을 충실히 살고 세상에 깊숙이 개입하세요. 출애굽을 알기 위해서는 애굽에 푹 젖어야 비로소 우리는 애굽도 잊어버리고 나도 잊어버리고, 세상도 잊어버리고 그 속에 있던 나도 잊어버리고, 그리고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만 생각하는 곳. 이것은 진리거든요. 이것은 설명할 것이 아니에요. 진리에요.
그 사람이 설명을 하는데 사람들에게 성경이 이렇게 깊다는 것을 막 설득시키기 위해서 “출애굽 때 첫째 재앙에서 강이 피되는데 피 색깔을 빨갛습니다. 따라서 물이 포도주 되는 그것도 빨강이고 그래서 그들이 영생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런 무리수를 둘까요? 유명인사는 되었지. 강의는 들으러 오지. 시간은 무슨 내용으로든 메워야 되겠지요. 원어도 끄집어냈다가 그래서 시간을 메우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나는 이것을 압니다, 하는 그것만, 자기가 확신이 있는 그 진리만 이야기하면 되지 남을 가르치고 설명할 이유는 없어요.
구원은 주님 몫이지 목사 몫이 아니거든요. 목사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없어야 돼요. 지금 내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없어져야 돼요. 남 제대하는데 지금 제대는 안하고 무슨 짓이에요? 사라진다는 말은 뭐냐? 나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든지, 나 때문에 내 인생 더럽게 되었다든지 그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인생 생각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수많은 잡귀들이 들러붙어서 자꾸 두려움을 줘요. 물은 새는데 원인은 모르겠고. ‘잘됐다. 집주인도 아니고 편하다.’ 자꾸 뭔가 일이 벌어져서 깜짝깜짝, 경기 일어나게 만든다니까요. 왜 경기 나게 만드냐 하면, 뭔가 나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내 것이 안 다치게 하겠다는 의중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악마를 보내서 “조져버려라. 폭격해라.” 내 것 지키려 하니까 갑자기 두려움이 더 생기는 거예요. 이거 언제까지 지킬 수 있는지, 이거 흠집나면 내 인생 얼마나 볼품이 없어지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예요. 공포심에.
요즘 교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옥을 잊어버렸어요. 현실의 문제에 빠지다 보니 지옥을 잊어버렸어요. 요한계시록 8장 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그 다음 8절에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그 다음 10절에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 나오는 용어가 뭐냐? 불 나오지요. 피 나오지요. 불나오고 피 나오고 썩고 죽고, 이렇게 나오지요. 이게 지금 어디서 일어나는 현상이냐 하면, 이 애굽같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이 세상이 애굽입니다.
그 지옥을 잊어버리면 안돼요. 여기서 복 받고 살려고 하면 안돼요. 지옥에서 살겠다는 사람은 죽어서도 지옥 갈 사람만 해당되는 겁니다. 나오라고 하니까 아까워서 못나오겠다는 거예요. 얼마나 공들여서 만든 나인데. 오늘 하나님께서 요셉의 본질을 통해서 나오는 그 본질이 뭐냐?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뭐냐 하면, 잊어버리는 말입니다. 잊어버려라.
왜 잊어버려야 될 도성인가를 요셉이 짊어진 꿈을 통해서, 다른 말로 하면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이 세상이 잊어버려야 될 세상인 것을 충실하게 알려주는 겁니다. 이 세상을 잊지 못하는 것은 요셉 너를 잊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나 자신이 나 자신을 자꾸 붙잡고 있으니까 지옥인 세상에서 승부를 한 번 걸고 살아보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이동하는 겁니다. 어디로 이동하느냐? 최종점으로 이동해요. 요셉이 이동해 버리면 애굽나라 자체가 그야말로 개꿈이 되는 겁니다. 허망한 세상이 돼요. 최종점이 이동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요셉이 이런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선과 악이라는 그 의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는 세계, 선악과가 아니라, 선과 악이라는 그 논리와 상관없이 꿈에 의해서 완성되어서 제공되는 그 가치의 세계를 지금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선과 악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필히 선과 악에 대해서 깊숙하게 거기서 살아야 돼요.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옥 같은 세상,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치댈 대로 다 치대고, 당할 대로 다 당해야 돼요. 혹독하게 선과 악을 온몸으로, 선과 악이 주는 그 아픔을 느껴야 돼요. 진리는 아픔에서 보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진리가 안보입니다.
선과 악이라 하는 것은 아까의 논리에 의하면 마찬가지에요. 내가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 나를 통해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오늘은 잘했을까? 이것은 못한 것인데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이 논리는 애굽에서 살던, 애굽에 잠겨 있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논리입니다.
사실 제가 오늘 설교하면서 설명할 것이 많이 있어요. 뭐부터 출발해야 하느냐 하면, 왜 부모가 자식을 낳고 부모는 사라지느냐? 그게 왜 언약의 원리냐 하는 그것이 좀 더 깊이 있게 설명되어야 되는데 그것은 잠간 언급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구원하거든요.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데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계시가 오게 되면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형성돼요. 요셉이나 우리나 입장이 똑같아요. 꿈이 요셉의 자식과 요셉을 떼 내게 만들어요. 그런데 떼 내려면 그 안에 뭐가 새로운 것이 생산되어야 되는데 그 생산은 요셉의 뜻이 아니고 요셉에게 꿈을 주신 분의 솜씨거든요.
이걸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면 간단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만을 드러내는 것, 이렇게 되거든요. 이걸 구약적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하니까 육적인 어떤 요소들이 겸해서 설명이 되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부모와 자식사이라는 말이지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면 부모로서는 더 살 이유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식을 낳고는 그 자식에 대해서 부모가 자기 인생 살아온,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 모든 것을 이름이라는 것으로서 갖다 붙여줘야 돼요. 그게 바로 므낫세, 잊어버림이고 창성하다는 뜻, 크게 됨, 그런 뜻을 가진 에브라임이라는 말이지요.
아들이 볼 때 “어이, 잊어버림! 물 떠 오너라.” “어이, 창성함!” 하고 심부름을 시킨다는 그 말은 자식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제조한, 생산된 나가 자식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 자식이 있는 한 나는 이제 은퇴해도 괜찮은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라 하는 자체가 거짓이고 언약에 의해서 조성된 나를 만들기 위해서 육적인 나를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 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출애굽 되어야 된다는 말은 곧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하나님, 천국이 원하는 나로 새롭게 끄집어내는 방식이 출애굽인데 그냥 노력해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개입되어야 돼요.
요셉처럼 꿈이 개입돼요. 꿈이 개입되면 세상 사람들은 그걸 꿈이라 보지만 세상 사람들이 오해한 거지요. 세상이 개꿈이고 허망한 것이고 그것만이 진짜 영원히 있는, 잠간 있는 세상이 아니고 영원한 나, 영원한 세계는 하나님의 꿈같은 계시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그걸 꿈이라 하는 겁니까, 라고 물으면 꿈은 우리가, 내가 예상 못한 것이고 내가 기대하지 않은 것이 돌발적으로 나를 통해서 나오게 한 것이 꿈이거든요. 진짜 현실은 내가 익히 아는, 나라는 인간을 익히 아는 그런 현실이 아니에요. 그 현실은 내가 살려고, 밥 먹고 살려고 애쓰는, 나를 더욱 더 집착하게 만들거든요.
지금 만약에 내가 쌀농사를 짓는다. 쌀값이 80킬로그램 한 가마에 2십 만원이 넘었어요. 국민들이 이럽니다. “왜 쌀값 안정화 안 시키느냐? 쌀 북한에 다 퍼주고 비축된 쌀이 없으니까 값이 오르잖아.” 할 때 농부 입장에서 인터뷰를 한다면 “이거 비싼 것 아닙니다. 그동안 하도 쌀값이 낮았던 겁니다. 지금 겨우 정상화 된 겁니다.” 이렇게 하겠지요.
이런 대화 속에서, 현실이라 하는 것은 쌀값 오르는 그 꿈이 이뤄질 때 나를 농부로서 가치 있게 만드는 대화를 주고받은 거예요. 그 농부가 복음을 안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만 돌아서서는, ‘참 오늘도 내가 개꿈 같은 이야기했다. 쌀값 오르던 말든 죽으면 그만인데. 원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도 없는, 그저 출애굽 될 수도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같이 지옥으로 묻힐 수밖에 없는 저쪽 꿈에 맞춰서 듣고 싶은 대화를 내가 왜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게 평소에 늘 지옥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 원망하지 마시고 푹 젖으세요. 어차피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세요. “무시해서 미안합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되 그런 나는 주께서 없애버리기 위해서 십자가 지셨다는 것, 이게 바로 진정한 현실이에요.
진실입니다. 이미 진실을 알고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악에 치이고 마귀한테 쫓기고, 죄에 쫓기고, 그러면서도 살기는 살아야 되고. 조금이라도 쓸데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주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통해서 이 지옥이 지옥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그러한 흔적을 주님의 뜻에 의해서 드러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