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61강-창 41장 37-45절(꿈의 통치자) 1810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장 38-45절입니다. 구약성경 64페이지입니다.
창 41:37-45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지금 바로에 속한 애굽 신하들이 요셉의 꿈의 해몽에 대해서 환호성을 보냅니다.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7년의 풍년이 있고 난 뒤에 7년의 흉년이 있다고 해몽을 했거든요. 아직 14년 안 지났잖아요. 왜 이렇게 성급하게 나서는지.
왜 그것을 가지고 성급한 판단을 하는지 오늘 우리고 오히려 의아할 정도입니다. 38절에 보면 바로가 업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얻었다고 아주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흥분하게 했을까? 과연 그들이 요셉의 꿈 해몽의 취지를 제대로 파악해서 이렇게 환호성을 올렸는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와 그 신하들, 백성들이 요셉에 대해서 좋게 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꿈으로 다시 돌아가 봐야 돼요. 7년 풍년과 그 다음에 7년 흉년이 오는데, 꿈 말고 일상적으로 풍년이 오고 흉년이 오게 된다면 그 풍년이 아무리 뒤따라서 흉년이 온다 할지라도 풍년의 효력은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겁니다.
바로 왕이 꿈을 꿨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앞에 있는 7년 풍년이 무효가 될 정도로 지독한 흉년이 오는 거예요. 따라서 꿈 자체로 볼 때 이것은 절망적입니다. 희망이 없어요. 그런데 요셉이 이야기한 것을 가만 들어보니까, 앞에 먼저 있었던 풍년의 효과가 그대로 유지가 된다는 낙관론을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14년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낙관적인 해몽을 내놓았다는 말은 이제는 꿈이냐 아니면 요셉의 낙관론이냐, 그 둘을 놓고 어느 쪽을 선호하느냐? 요셉의 해석을 더 선호하게 된 거예요. 애굽나라에서 요셉을 받들어서 좋게 보는 의식은 애굽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애굽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대변해주는 사람들의 집합이에요.
따라서 이들은 요셉의 해몽과 그들의 대표자인 왕의 꿈 사이, 그걸로 모든 범위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요셉 뒤에 짊어진 가방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요셉에게 짊어지운 꿈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더 단출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애굽의 백성들이나 왕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애굽 나라가 실재적인 나라가 아니에요. 애굽나라는 요셉의 꿈으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암호입니다. 비밀이에요. 세상자체가 숨어 있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밀, 일급비밀, 비밀로서 작용되어야 돼요.
바로의 꿈을 해몽하니까 그들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바로의 꿈 그것이 애굽의 운명의 전부라고 여겼던 거예요. 아직 요셉의 꿈은 거론조차 안한 겁니다. 성경을 사람들이 보면서, 성경을 풀이해주면 사람들은 낙관적인 것을 기어이 찾아내서, 은혜 받았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그걸로 마감시켜버려요. 이 성경자체를 마감시켜 버립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 했어요. 보이지 않는 것이 따로 있는데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다 모든 승부를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자기만의 세계에서 인간이 스스로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게 화근이에요. 그게 성경을 잘못 보게 하는 겁니다. 자기만의 세계.
오늘 본문 같으면 애굽나라의 세계는 애굽사람 자기만의 세계에요. 그 세계에서 풍족의 유효함이 계속 이어진다고 하니 환호성을 보낸 겁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처음 본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하는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그 여분의 것은 뭐냐? 이 세상을 통해서 정말 드러내고자 하는 나머지 비밀의 내용은 뭐냐를 파악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 하나마나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에 공익광고에 그런 것이 있었어요. 한 아가씨가 늦게 퇴근을 하는데 가로등만 있는 한적한 골목입니다. 다 집에 가고 밤늦게 걷고 있습니다. 그 때 건장한 남자, 괴한이 모자를 눌러쓰고 따라오고 있어요. 아가씨가 가방을 들고 가다가 그 가방을 앞으로 돌립니다.
긴장되어서 움츠리는 거지요. 종종걸음으로 막 가요. 그 아가씨가 빨리 가니까 뒤따라오던 남자도 덩달아 막 따라옵니다. 공익광고의 그 내용이 이웃사랑인데 왜 그동안 인사도 안하고 지냈느냐는 그거예요. 그 공익광고의 내용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그 아가씨가 모자를 푹 눌러쓴 수상한 괴한에 쫓기면서 희망이 뭐냐?
자기 집에 막 도착해서는 초인종을 마구 누르겠지요. 마침 정원에 담배 피우러 나왔던 아버지가 딸이 거기 있다는 것을 봤을 때에 아가씨는 얼마나 휴, 하고 안심을 하겠어요. 인생이 쫓기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더 나은 것, 더 새로운 동네로 빠지는 것이 아니고 알던 장소로 가게 되면, 그게 보이면 안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알던 장소가 뭐냐? 자기만의 세계에요. 이게 애굽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꿈을 꾸었는데 보통 꿈이라 하는 것은 자기 맘대로 못 꿔요. 마찬가지로 이 꿈도 너무나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애굽의 운명에 관한 겁니다. 왕이니까, 임금이니까.
바로 왕이 저주받는다는 것, 그것도 흉악한 이삭, 파리한 암소가 등장하니까 얼마나 공포심이 많았겠습니까? 마치 늦게 귀가하는 아가씨의 심정처럼 피할 곳, 피신할 곳은 뭐냐? 옛날 내가 안심하고 안정되게 살았던 그 자리로 가면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도로 회복해준다면 더는 소원이 없겠다고 나오겠지요. 내가 알던 그 자기만의 세계가 안정적으로 다치지 않고 그걸 그대로 보전한다면 신에게 내가 뭔들 감사 못하겠느냐는 식의 이것이 세상을 지칭하는 애굽, 세상 모든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불의는 못 참아도 불이익은 참는다는 말이 있어요. 불의를 보고 못 참아서 나대고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도 자기한테 불이익이 오게 되면 아무소리 않고 참습니다. 애굽으로 말하는 인간세계의 운명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세계라는 테두리를 치고 거기서 안전하게 보존되게 되면 그것을 괜찮은 운명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운명이라는 것은 위반하면서 실상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운명에 거슬리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내가 알던 운명은 나만의 세계를 보전하고자 하는 엉터리 운명이라는 것, 일방적인 나의 착각에 불과한 운명이라는 것이 그 때 뭔가 긁어줘야 나타나요. 이게 부서져야, 깨져야 되는 겁니다.
뭐 예정론이 어떠니, 전부 다 운명론이거든요. 애굽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암호가 없어요. 비밀이 없어요. 그냥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입니다. 이것은 가짜에요. 진짜가 왔을 때는 가짜는 진짜한테 모든 권력을 인수인계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다시피 바로왕은 여지없이 자기의 모든 권한을 여지없이 요셉에게 인수인계합니다. 인수인계 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라고 지었답니다. 애굽의 이름인데 그 뜻은 ‘세상의 구세주’ 또는 생명의 부요함, 그런 뜻이에요.
세상의 구세주. 축복, 축복해주는 사람이라 그 말이에요. 생명의 부요, 우리는 이제 살았다는 그 말입니다. 곡식이 있는 한 우리는 신이고 뭐고 더는 필요 없다는 거예요. 풍족한 먹을거리, ‘풍족한 입을 거리가 있으면 그게 좋은 세상이지 뭐가 더 좋은 세상이 있겠느냐.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최고지.’라는 사고방식. 눈에 보이는 그 현상이 전부인줄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항해서 진짜 요셉이라는 이름은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 30장 24절에 보면, 요셉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그 경위가 있어요. 창세기 30장 23, 24절을 읽어보면 요셉의 엄마 이름이 라헬인데 그 라헬이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요셉은 본인의 이름이 없어요. 요셉의 이름은 본인의 이름이 아니고 내 다음의 자식이 하나 더 나올 때 비로소 징검다리 같은 중간매개역할을 하는 기능, 그 기능이 요셉이라는 존재라는 말이지요. 요셉의 이름은 최종적인 이름을 뒤에다 남겨둔 이름이에요.
이것은 미완료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바로왕은 요셉의 존재자체를 완료로 본 거예요. 세상의 구세주, 생명이 더함, 사브낫바네아. 이런 이름을 짓게 된 것은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만의 세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아 있어요. 눈이 안 떠진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과거의 기억 안에서만 논다고요. 자기가 경험한 것, 그 체험 안에서만 논다고요. 새롭다는 것은 없어요. 자기가 과거에 했던 것, 괜찮은 것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비밀이라든지 이 세상이 암호라는 사실을 전혀, 눈이 감겼으니까, 소경이니까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은 지금 바로의 꿈을 완전히 도배를 한 거예요. 덮쳐버린 겁니다. 애굽을 인수인계하되 애굽을 인수인계함으로서 인간들의 한계, 애굽의 보편적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이 점을 좀 더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느 정도로 한계가 있는가, 인간은 불의는 못 참아도 불이익은 억지로 참는다는 그것과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의 한계는 윤리와 도덕이에요. 같이 봐도 되지만 좀 더 세밀하게 나눠봅시다. 도덕이라 하는 것은 ‘옳고 그름’(right, wrong) 이게 도덕이에요. 형이상학, 어떤 절대적기준으로 보는데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도덕이고, ‘good과 bad’를 따지는 이것은 윤리에요. 옳고 그름은 불의함, 정의로움, 그겁니다.
그런데 윤리는 뭐냐? 인간의 신체 대 신체,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나오는 실익이냐 손실이냐를 따지는 겁니다. 내가 어느 정도 이익이 있으면 이것은 ‘good’이에요. 그리고 아무리 정의로워도 나에게 손실이 오게 되면 이것은 bad, 나쁜 것이 돼요.
좋고 나쁜 것은 윤리고, 바르다 그르다, 하는 것은 도덕입니다. 자, 이 도덕과 윤리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적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욕망에 이끌리는가? 도덕일까요? 도덕은 명분이고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익을 얻기 위한 구실로서 도덕들을 활용하지요.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이 선한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니까 실력을 주셔야지요.” 이런다는 말이지요. 지난 시간 요셉의 꿈에 나오듯이, 곡식과 암소가 다 토지에서 나오는 곡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애굽의 신들이 많고 인간들이 신을 찾아도 도덕이라는 것은 배부른 자가 자기 잘났다 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고 실제로서는 도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good이냐 bad냐가 더 예민하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의 꿈은 그들에게 실력을 주거든요.
다시 말해서 “풍년의 기운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빠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그들은 대환영을 한 거예요. 오늘날의 현실을 애굽사람들이 어떻게 그대로 보여주는지. 너무나 잘 보여줘요. 하나님이요? 예수요? 윤리적인 실리를 얻고자 ‘하나님은 의롭습니다.’ 하는 도덕을 명분으로, 구실로 내세운 거예요.
진짜 본인들이 신앙생활 잘했다 못했다 하는 것은 예수 믿고 난 뒤에 그 세월이 흘러갔을 때에 예수 믿기 전보다 얼마나 많은 소득이 올랐는지, 얼마나 내가 건강한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가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럴 듯하게 보인다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라고 본인이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요.
왜? 본인은 애굽사람이니까. 요셉을 세상의 구세주로, 그 당시 세상이란 애굽이 전부지요, 세상의 구세주로 이름을 지어놓았다는 말은 요셉 너의 해몽이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서 우리는 매우 기쁘다, 이렇게 대환영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실 때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습니다. 실익이 있다고 본 거예요. 저 사람 가까이 가면 얻을 것이 있다고 본 겁니다. 사람이 종교를 바꾼다든지, 종교가 없다가 교회 나올 때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노림수가 있어요. 하나님 안 믿다가 믿었으니까 가정이든 사업이든 건강이나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혜택이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 시험해 봐요. 10년 다니고, 20년 다니고, 30년 다니고. 나중에 ‘혜택이 있을 거야’ 했는데 자신의 그 꿈에 본인이 지쳐가요. 지쳐가면서 진즉에 토해놔야 될 그 솔직한 심정을 결국은 참다참다 못해 털어놓습니다. “목사님, 이제 교회 그만 나오렵니다. 믿음이 없는가 봐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믿음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이미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가짜 믿음인데 뭐냐? 나의 세계 잘되는 것. 모든 화근은 나의 세계가 그득 들어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요셉은 절대로 본인의 있음이 본인의 완료가 아니에요. 내 꿈의 완료가 아닙니다.
이름이 ‘더함’이에요. ‘지금 내가 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야. 분명히 나를 중간 다리, 매개로 해서, 나를 통해서 다른 게 있어.’라고 전달하고 그걸 전하는 입장에서 본인이 서 있는 겁니다. 요셉의 기능이 그거예요. 따라서 요셉의 그 기능을 좀 더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다시 요셉의 꿈의 해석을 볼 필요가 있어요.
41장 34절에 보면,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국중에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29절에 보면 “온 애굽 땅에 일곱해 큰 풍년이 있겠고” 꿈에 일곱 해라는 말이 안 나와요. 일곱 암소 나오고 일곱 이삭 나옵니다.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는 것은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듯이 이 꿈이 정말 맞는다면 14년을 기다려봐야 돼요. 기다려보고 그 때 가서 “요셉, 네가 최고다.” 그래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미 늦거든요. 요셉이 자기의 존재, 자기의 실존에서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바로 왕까지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를 만나는 그 절차와 과정도 하나님이 요셉에게 이르는 꿈의 절차와 과정의 일부가 돼요.
그렇다면 자기 속에서 7년이라는 말의 기발한 해석이 나온다는 말은 요셉 자체에 대해서 7년 또 7년, 곧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나온다고 보면 돼요. 이 꿈의 해몽은 애굽나라가 잘된다는 것이 아니고 요셉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가 완성된 나라, 7년이라는 완전한 나라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요셉 자체가 7년이에요. 요셉 자체가 메시아에요. 진정한 메시아. 다시 설명합니다. 요셉 안에 하나님이 집어넣은 꿈이 있어요. 요셉의 꿈이나 바로의 꿈이나 바로 신하의 꿈에서 항상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이 현실이 현실이 아니고 도로 허망한 꿈이고, 진짜 현실은 꿈같은 현실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애굽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어떤 나라가 애굽나라의 대를 잇는다는 뜻이에요. 그 대를 잇는 메신저역할, 마중 나와서 미리 접수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요셉이 되는 겁니다. 지금 요셉은 애굽나라의 왕이에요. 메시아입니다. 총 지도자에요. 총 통치자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많은 논리적 도약이 있어서 수긍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요한복음 17장 2절 말씀을 보게 되면, 무슨 뜻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여러분은 감 잡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자. 이 만민 자체를 그 당시의 애굽으로 봅시다. 애굽을 다스리는 권세자를 지금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파견시킨 겁니다. 오늘 본문 44절에 보면,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바로 왕 내가 아니고 요셉이지요. 요셉의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이것을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는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구한테 줬는가? 예수님한테 주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디에 편입되느냐,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세계, 아직 우리 두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가리키는, 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성도 등짝에 전부 다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꿈을 지고 가는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물인데 그 증거물이 오늘 본문에서 요셉입니다. 요셉자체가 증거물이고 오늘날 우리 성도가 증거물이에요. 왜? 그들만이 세상이 꿈인 줄,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럴 거예요. 왜 이 세상이 허망하냐? 물으면 이렇게 우리는 답변하세요. 세상을 가지고 나만의 세계를 꿈꾸고 있기에 그게 허망하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나만의 세계는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아까 밤거리에 늦게 귀가하는 아가씨가 총총 걸음으로 자기 핸드백 추슬러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내빼는데 결국 그 아가씨가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오늘 출근하러 나섰던 자기 집이에요.
집에 들어가서 휴~,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대체 인간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정말 우리가 소원하는 것이 뭡니까? 등 따숩고 배부른, 정말 이 세상에서 내가 희망하는 그게 전부잖아요. 그거 되면 나는 믿음 좋은 것이고요.
왜? 실익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소원대로 해줬으니까 나는 믿음이 좋은 것이고, 그거 안 되고 유리방황하고 뜻대로 뭐가 안 되게 되면, ‘내가 믿음이 없는 거냐? 내가 믿음이 없는지 아니면 하나님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인지?’ 드디어 혼선이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복 준다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교회 다니고, 복 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고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해서 그런 교회 등록하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나에게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내 육신을 편하게 해주시니까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고 하는 겁니다.
그 가짜, 언제까지 그 가짜가 계속 이어질 거예요?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만, 선지자들 보세요. 그리고 사도들 보세요. 어떻게 살았습니까? 사도바울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기에 정말 그 근거 없는 이야기, 누가 봐도 허풍스러운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하잖아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너나 잘하세요. 당신 재산 얼마나 되나? 당신 부동산 몇 개 있어?” 이렇게 나올 거라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 당신은 왜 그리 고생이 많은지. 죽는 자 같으나 산자요.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에요?
사도바울은 본인의 자신감이 아닙니다.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인생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과 다른 사람이 차이점이 뭐냐? 나를 위한 나만의 세계가 없습니다. 신앙이요? 신앙인 말입니까? 자기만의 세계가 없는 사람이 신앙인이에요.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꿍치게 되면 항상 점검해서, 오늘도 헌금하고 오늘도 기도하고 오늘도 봉사했으니 내 재산이 얼마나 불어났고, 내가 앞으로 이 땅에서 밥 먹고 사는데 얼마나 안정성 있는 여분의 자산을 모아놨느냐, 내 몸은 일교차 심한데 감기몸살이 나았는지, 자꾸 측정해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만의 세계가 나의 목표기 때문에. 그게 나의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애굽사람들이나 바로왕의 오해가 뭐냐 하면, 7년 풍년, 그 다음에 7년 흉년이에요. 그 해석은 요셉에게 들었으니까 일단 그들은 인정해요. 그런데 요셉에게서 나온 모든 대책이 어떤 대책이냐 하면, 앞에 있는 7년 풍년의 효과가 유지될 수 있도록 주는 대책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 대책을 한 번 볼게요. 34절부터 보면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에 적치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해 흉년을 예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을 인하여 멸망치 아니하리이다.”
이 이야기 듣고 환호성을 안 울릴 애굽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오늘날 이 해석을 듣고 21세기 모든 교회 안에 앉아 있는 교인들이 환호성을 올린다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사람 굶주리지 않게 주께서 알아서 해준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굶주렸는데요? 그 사람은 굶었는데요?
그러니까 교인들의 사고방식이, 교회에 온 사고방식이,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 집 창고를 그득하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신다면 까짓 거 십일조라도 아깝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벌써 나오는 자세부터가 나만의 세상, 내가 생각하는, 내가 귀하게 여기는 그것 지키기 하는 거예요.
신앙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일 아끼는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에 그게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경우가 성경에 명확하게 두 가지 나오는데 하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 이야기를 했어요. 제일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했고 또 하나는 솔로몬이 재판할 때입니다.
두 아줌마가 각자 애가 있었는데 한 애가 죽으니까 서로 자기애라고 우길 때 거기서 솔로몬의 재판이 하나님의 지혜거든요. 나만의 세계가 없는 쪽이 어느 쪽이냐? 저 애가 내 애가 안 되더라도 저는 좋습니다, 하는 쪽 그 여자가 진짜 엄마라고 하잖아요.
그것은 무엇을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 온 우리에게, 교회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너는 요셉이 되어야지, 뭔가 더함이 되어야지 너 자신으로 거기서 스톱,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완료가 되어야지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완료가 되어버리면 너는 세상 잘못 읽고 있고 너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엉터리라는 겁니다. 너 자신을 네가 가짜로 자꾸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이 꿈의 내용이 현실로 되면서 이 애굽나라의 풍족은 결코 애굽나라를 위함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기의 아버지와 형들을 구원하기 위한 용도에요. 애굽나라의 총리가 됨으로서 이제는 아버지와 요셉을 버린 형들 쪽에서는 건너올 수 없어도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 상황에서는 아버지와 형이 요셉에게 안 끌려 올라야 안 끌려올 수가 없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7장 2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여기서 ‘모든 자’라는 것은 예수님이 택한 백성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에 ‘모든’이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는 말이지요.
네가 구원 안 받고 배기는가 한 번 보자, 라는 그것이 우리는 인정되어야 돼요. 내가 얼마나 착하냐, 내가 얼마나 그르냐(right, wrong) 실익이냐 손실이냐(good, bad), 아무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죽이든 살리든 자기 백성 안 놓친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에요. 이게 요한복음 17장 2절의 뜻입니다. 이게 꿈이에요. 내 꿈을 포기하도록, 주님의 꿈이 내 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것이 내 꿈에서 주님의 꿈으로 끌려가는 상황입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에요.
그동안 우리가 걱정 근심한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 것 지키려고 걱정근심 했잖아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그동안 그냥 무상으로 살려줬잖아요. 오늘 저녁에 죽인다 해도 너무 주님 앞에 탓하지 말고 주님 원망하면 안돼요. “주님,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돼요. 나의 것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지금 가짜로 만드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이 비밀이어야 돼요. 우리 자신이 세상에 보여주는 암호입니다. “그래, 세상 사람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나 잘 먹고 잘 사는 인간은 지옥에 갑니다. 천국에 가지를 못해요. 천국은 아무도 못갑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한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내 꿈을 포기할 때, 나의 세계를 포기할 때 비로소 보입니다. ‘나는 그냥 다른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직도 이 세상에 버티고 있구나. 살아야 하기에 버티는 것이 아니고 안 살아도 되는데 살게 하면서 다른 것을, 다른 세계를, 주님이 만든 주님 품안에 있는 천국이라는 것, 이 세상 말고 또 다른 세계, 그 세계에 현재 우리가 속했다는 것,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가짜만 있는 세계에 누구라도 진짜를 이야기해야 되지 않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세상 헛되게 세월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맨 날 따지듯이 “주님,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달려들 줄만 아는 우리들, 세상에 쫓기고, 악마에 쫓기고, 주여, 이제는 쫓아오시는 분이 주님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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