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52강-창 39장 7-9절(보디발의 처) 1808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9장 7-9절입니다. 구약성경 60페이지입니다.
창 39:7-9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7절에 “그 후”라고 되어 있는데 그 후가 약 10년 세월이 지난 후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내려갈 때 나이가 열일곱 살인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유혹할 그 때의 나이는 스물일곱 쯤 되었습니다. 6절에 보면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영어로 하면 스마트하다, 똑똑하고 예쁘고 잘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에서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강력하게 요구를 했습니다. 자, 요셉은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그것으로 인하여 부모형제와 강제로 갈라져서 홀로 남겨지게 된 겁니다. 요셉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꿈이 요셉을 그런 쪽으로 이끌고 있고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꿈이 이 지상의 인간세계에 정착을 할 때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를 요셉을 통해서 실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요셉이 가는 그 길이 장차 모든 계시를 완성하러 오신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겪어야 될 모든 일을 요셉이 미리 겪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꿈은 개꿈이 되지요. 꿈이 있는 것이나 꿈 없는 것이나 그렇고 그렇다면 사람이 살다가 취직해서 열심히 살고, 장가가서 애 낳고, 그래서 늙어죽고, 거기에 무슨 특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꿈은 받아놓았다는데 받은 자나 안 받은 자나 그렇고 그렇게 똑같이 되잖아요. 성경에서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 꿈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어떤 티가 나야 되는데,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굉장히 선호되는,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대접받는 인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요셉이 꿈을 꾸었기 때문에 형들이 그를 미워하고 시기해서 꿈이 있는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추방했던 그 갈라짐, 헤어짐이 애굽나라에 팔려 와서는 전혀 티가 나지를 않는 거예요. 계속 뭔가 갈라짐이 있어야 돼요. 차별됨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요셉이 꿈을 꾸면서 꿈이 없었던 형들과 꿈이 있는 요셉 사이에 소통할 수 없는, 서로 통할 수 없는 두 개의 영역이 서로 갈라짐을 보이듯이 요셉이 가는 곳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 줘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근원적으로 뭔가 잘못돼 있다는 것, 성도, 하나님이 함께 있는 사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못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줘야 되는 꿈의 기능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가는 곳마다 형통했다면 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배척받는 존재가 아니고 대환영을 받는 존재지요. 마치 예수님께서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가 왔다고 자기네들 기준의 입장에서, 자기들의 생각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고 채워주니까, ‘야, 이게 복인가보다. 이게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인가보다.’ 하고 예수님을 환영한다고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들고 따라다녔습니다.
기적을 베풀 때, 떡을 먹고 배부를 때는 사람들이, 이제 내가 영원히 의지할 만한 사람을 의지했다고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라는,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했을 때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가버렸고, 심지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도 예수님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니까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정면으로, 일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식으로 공박을 했지요.
따라서 오늘 이 본문 보면서, 요셉이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다, 어떤 여자라도 탐을 낼 만한, 한창 빛이 나는 그런 용모를 가졌다는 것은 요셉이 아무리 세상 사람에게 환영을 받아도 세상 사람과 결별해야 될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벌써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세상과 결별을 하는데 이주 중요하고 획기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보디발의 처입니다. 그 사람이 요셉의 진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역할을 다 한 거예요.
그러면 그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꿈을 꿨으니까,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 어디 너 같은 것이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는 식으로 세상과 결별하기를 요셉이 은근히 노린 것이 아니에요. 나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세상이 이쯤해서 나를 핍박해줘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 자기가 시나리오를 쓰지를 않았습니다.
요셉에게 꿈이 있고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고 해서 요셉이 그 꿈과 계시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해야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그리고 십계명에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성경말씀에 하라, 하지 말라, 가 그렇게 많이 나와도 성도가 하나라도 지킬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냥 오늘 본문의 요셉처럼 환영받으면 그저 감사하면서 이 세상에 박혀 살면 돼요. 살면 되고 하나님의 계시와 꿈이라 하는 것은 누가 다루냐 하면, 주님이 다뤄요. 주님이 개입을 하는 겁니다. 개입을 할 때 어떤 식으로 개입하느냐 하면, 요셉이 평소에 “나 이정도야. 꿈꾼 사람이야.”라고 거들먹거리면서 세상 사람과 차별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개입해버리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노출시키는 하나의 계기로서 극히 인간적인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사용을 하시는 거예요.
요셉의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답다고 했거든요. 만약에 요셉의 용모가 준수하지 않고, 못생기고, 그렇고 그랬더라면 보디발이 처가 달려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요셉은 그냥 칭찬받으면서 애굽사람과 더불어서 잘 살았을 거예요. 별 볼일 없는 얼굴, 별로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 가지고, 외국인, 노예지만 그렇게 특별대우해주니 고맙습니다, 하고 살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 여자가 요셉에게 달려드는 것을 요셉이 은근히 기대하거나, 노렸거나, 예상했거나,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요셉은 요셉대로 그냥 막 사는 거예요. 막 살게 되면 요셉에게 하나님의 꿈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세상과 요셉의 영역을 분리시키는 겁니다.
애굽은 비언약적이에요. 하나님이 언약이 없고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 야곱언약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둘이 10년 동안 같이 잘 지내다가 이 집안과 요셉이 갈라지는데, 주님께서 언약을 앞장세워서 개입하니까 언약과 언약 아닌 쪽이 서로 충돌하면서 갈라지겠지요.
갈라지는데 갈라지면서 무엇을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느냐 하면, 요셉이 없는 애굽이라면 애굽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주 정상적인 나라에요. 아무 탈 없는, 그냥 인간들이 꾸준하게 자기 일 하고 평화롭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상적이다, 라고 할 때는 애굽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를 못해요.
같은 인간들, 좀 잘나고 좀 못나고 그렇고 그런 인간들끼리 살다보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히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남의 잘못은 잘 보이지만 자기는 착실하게 살아가는데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뭔가 자기 뜻대로 안되면 그 때는 뭔가 잘못되었다 싶어서 “잘못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을 알아서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일어난 사태, 자기에게 안 좋은 사태를 반성하는 척 하고 회개하는 척을 하니까 좀 봐줘서 원상복구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아양 떠는 거예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뭘 잘못했는데?” 본인은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르지요. 다만 갑자기 일이 꼬이니까 좀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살살 비는 거지요. 그러니 이런 식으로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절대로 몰라요. 반성은 되었다 하는데 반성하기 전이나 후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디발의 아내가 애굽나라의 대변자, 대표자로 봅시다. 요셉은 하늘나라, 꿈의 대표자로 봅시다. 보디발의 아내의 말을 보디발이 들어주니까 전부 한통속이라 보자 이 말이죠. 비언약의 대표자, 애굽나라의 대표자.
그 두 대표자가 만났을 때 진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노동을 열심히 한다든지 어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말에 뭐가 실리느냐 하면 그 사람이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의 배경이 주고받는 대화가운데, 말 가운데 다 들어 있어요.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나버리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제가 이스라엘 갔을 때 쿰란 공동체라는 곳에 들렀어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요. 쿰란공동체라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의인되고 의인이 되면 말씀대로 사는 우리 공동체, 쿰란공동체인 우리 공동체만이 메시아가 의의 백성으로 받아준다, 라는 것을 믿는 단체인데 그 단체가 예수님 당시, 그리고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있었어요.
그 단체가 과연 있었다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유적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연히 목동이 동굴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사해문서라는 것이 나옴으로서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해문서의 발견으로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사야서 같은 구약성경이 진짜로 옛날부터 있었는가를 세상 적으로 확인해주는 증거물로서 나온 겁니다.
쿰란공동체가 제일 중요하게 여긴 일이 성경을 필사하는 거예요. 옛날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적는 그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쿰란공동체의 유적지에 보면 욕조가 굉장히 많아요. 그 욕조들이 무슨 용도였는가? 그들은 하나님 앞에 신심, 정성, 순결한 신앙을 내보이기 위해서 성경을 필사하다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그냥 안 베껴요.
쓰던 것을 멈추고 옆에 있는 욕조에서 목욕을 하는데 그것을 ‘정결례’라고 해서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해요. 그 욕조가 정결욕조라고 되어 있고 거기서 정결례를 행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이 더러운 인간이 감히 하나님이라는 말을 적을 수가 없다고 해서 목욕(정결례)을 하고 난 뒤에 적는 거예요.
이게 외형적인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종교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외형적으로 하게 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모방이 가능해요.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잖아요. 양쪽 어깨와 이마를 찍으면서 삼위일체의 상징을 표시하잖아요. 묵주로 기도를 하고, 마리아상도 눈에 보이고. 그리스정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가시적인 형태를 가지고 사람들을 규합하고 단결시키는 겁니다. 두 사람이 모이고, 세 사람이 모이고, 네 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권력이 돼요. 교회라는 것이 성도의 모임이어야 되는데 성도의 모임이 아니고 외형적인 종교적인 법칙을 모방하고 싶은 사람들의 집결체, 이것은 하나의 정치권력이지요.
그렇게 종교집단이 되면 거기서 역사와 전통이 나오고 역사와 전통을 거스르면 이단으로 규정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다 외형을 살려놓기 때문에 그래요. 외형적인 것, 법칙 같은 것을 대대로 물려주는 거예요. 전통 같은 것을.
그렇게 전통대로 하는 이상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요셉은 지금 애굽의 어떤 가정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것, 여호와를 믿는 종교라 하는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어요. 안식일 지키는 것도 아니에요. 하루 종일 그 집에서 일상의 근무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게 무슨 종교고 그게 무슨 신앙처럼 보이겠습니까? 전혀 신앙처럼 안보이지요. 외형적인 형식이 없는 거예요. 없는데 막상 그 보디발의 처가 들이대니까 그 때 대화가운데서, 언어가운데서 평소에 요셉은 어떤 영역 안에서 살고 있는가가 티가 난 겁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9절에 보면,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요셉은, ‘너희들 보기에 내가 지금 혼자 있다고 생각하나?’ 하나님이 같이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둘로 나누게 되면 이렇습니다. 큰 것을 생각하는 것을 공적영역이라 하고 사소한 것, 자기와 직접 관련된 것을 사적영역이라 한다면 보디발의 처는 그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고……, 그 집안에 자기 남편이 있고 하인들이 있었으면 그런 짓을 하겠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갑자기 공적영역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적영역으로 간주한 거예요. 사적영역에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그 대상으로 요셉을 본 거예요. 보디발의 처와 같이 요셉이 아무리 둘러봐도 보디발의 처와 자기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차원에서 공적영역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생각과 보디발의 처의 생각이 어떤 점에서 차이 나는가를 잠시 우리가 분석에 들어가 봐야 돼요. 보디발의 처의 입장이 되었다 합시다. 보디발의 처의 입장이라면, 남편이 있고 하인들도 많이 있다면 보디발의 처는 행동을 자제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만 있는 영역이 아니고 공적인 영역이니까.
그러나 권력이 많은 사람이 있을 때 많은 사람의 눈에 그 권력이 보이잖아요. 권력이 가시적이 되어버리면 그 권력의 외형에 치중해서 인간은 마치 그런 척을 하게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권력이 많은 사람의 눈에 가시적으로, 법적으로 보이는 식으로 있다면 사람들은 남들의 눈을 생각해서라도 사적영역은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말입니다.
오늘 오후에 우리 집 근처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볼게요. 어떤 아가씨가 차를 주차했는데 아무도 없는데 어떤 사람이 차를 긁고 그냥 가버린 모양이에요. 우리 앞 동 아가씨의 차를 긁어놓고 가버린 모양이지요. 만약에 그 때 차 주인이 거기에 있었다면 공적영역으로 들어서는 거예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했을 텐데 아무도 없으니까 차를 긁고 그냥 간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사적영역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자기 차를 보니 긁혔거든요. 긁힌 것도 언뜻 보면 잘 안보여요. 찾아낸 거예요. 그 아가씨가 파출소에 신고해서 경찰관 두 명이 와서 사진도 다 찍어갔어요. 그 아가씨는 사적영역을 공적영역으로 바꾼 겁니다. 증인을 내세우기 위해서.
만약에 차 긁어놓은 사람이 아가씨가 곧 결혼할 남자 친구는 그런 식으로 안하겠지요. 그게 뭐냐? 보이는 권력이 있게 되면 자기의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해서는 반비례해서 작아져요. 쉽게 말해서 누가 있으면 그 사람에 잘 보이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교회에 뭔가 사람들이 있으면 그 교인들 앞에서 찬송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하지만 아무도 없다면, 보이는 권력이 없다면 사람은 자기의 속내, 진짜 모습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지금 요셉은 보이든 안보이든 관계없이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보디발의 처가 요셉에게 들이대기 전까지는 보디발의 처는 요셉이 그렇고 그런 인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디발의 처가 요셉에게 달려들었는데 요셉 입에서 나오는 그 언어, 아까 했지요? 언어라 하는 것은 평소에 살고 있는 모든 배경, 권력이 그 언어를 통해서 대변된다고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보디발의 처는 처음으로 들은 거예요. 하나님께 득죄하면 안 된다. 그리고 공적영역에서 우리 주인이, 내 주인이 모든 것을 맡기되 음식과 당신에 대해서는 손대지 말라는 것을 공적영역에서 이미 우리가 아는 바잖아,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그 공적영역을 우리가 봤으면 우리가 어떤 오류에 빠지느냐 하면, 우리가 그 요셉의 이야기를 그대로 흉내 내고 그대로 모방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 역시 신앙인은 누가 보든 안보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해.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오늘 본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의 말을 흉내 내거나 모방해서는 안돼요. 그것은 교회의 전통이 돼버려요. 그것은 또 하나의 교회라는 권력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어디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보디발의 처를 경유해서 보디발의 처처럼 생각하지 아니하고 요셉처럼 와야 돼요.
보디발의 처를 먼저 경유를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보디발의 처가 사적영역에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보디발의 처는 하나님을 생각 안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생각 안할 때 남녀관계가 어떤 변수가 있는가? 제가 임의로 변수를 세 가지로 뽑아봤어요.
하나님이 없는 세계, 애굽의 세계, 비언약의 세계에서 인간 대 인간의 남녀관계에서 축소해 보면 대략 세 가지의 변수가 나와요. 하나는, 나이가 많다/적다. 그 다음에 그걸 간추리기 위해서 거기에 뭘 추가하느냐 하면, 역시 젊은 사람은 잘 생겼으니까 나이가 적다는 것을 잘생겼다는 것으로 일단 칩시다. 나이 적다, 동시에 예쁘다, 잘생겼다, 스마트하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다, 는 것으로 같이 보자는 말이지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위계 있는 권력, ‘미투’ 알지요? 돈 있음과 권력 있는 것을 같이 보자는 말이지요. 그 다음 세 번째가, 기혼/미혼, 여부가 있어요. 이 세 가지 변수로 하게 되면 여기서 경우의 총수가 몇 가지가 나오느냐? 8×8×2=128가지가 나와요.
그 경우 중에 인간의 만남, 남녀의 관계는 딱 하나밖에 안됩니다. 예를 들면, 남자 측을 먼저 따져봅시다. 젊다, 돈 없다, 미혼, 이런 경우 있겠지요. 두 번째, 늙었다, 돈 없다, 미혼. 세 번째, 젊다, 돈 없다, 미혼. 다섯 번째, 늙었다, 돈 있다, 미혼. 여섯 번째, 늙었다, 돈 있다, 기혼. 일곱 번째, 늙었다, 돈 없다, 기혼. 여덟 번째, 젊다, 돈 있다, 미혼. 여덟 번째, 젊다, 돈 있다, 기혼. 이것이 전부에요.
여기서 젊다는 것은 인물 좋은 것도 포함된다고 했지요. 그 다음에 돈 있다는 것은 위계, 돈은 좀 없어도 권력,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있다든지, 집안이 권력 있는 집안이라든지, 그런 것도 포함했어요. 이렇게 하면 이게 8가지밖에 안되는데, 남자측만 그런데 여자측도 8가지니까 어떻게 만나는가?
젊었다, 돈 없다, 미혼인데 여자는 늙었다, 돈 있다 기혼이다. 이렇게 붙는 경우가 오늘 본문에서 보디발의 처와 요셉의 경우라는 말이지요. 그런 경우의 수가 8×8=64, 이쪽 8가지 경우의 수, 그리고 상대방 쪽 8가지 경우 중에서 한 가지가 걸린 거예요. 64가지인데 왜 이게 128가지가 되느냐?
누가 먼저 들이대느냐가 문제에요. 대시를 누구 쪽에서 먼저 하는가? 결국은 128가지의 경우의 수에 모든 이 세상 남녀관계는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거 외에는 없어요. 그러면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교회 다니는 사람이, 특히 권사님이 아들이나 딸 중매할 때에 그저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요, 이것만 보고 결혼시키지는 않아요.
반드시 어딜 경유하느냐 하면, 보디발의 처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을 경유해서 모든 혼사에 나서게 된다 이 말이지요. 딸보고 “네가 나이 40이 넘었는데 누구하고 사귀나?” “엄마, 좋은 사람이 있어요.” “그래? 나이가 그렇게 많은데도 좋은 사람이 있나? 돈도 좀 있나?” “돈도 좀 있어요.” “그러면 미혼이냐?” “당연 총각이지요.” “그래? 잘 됐네. 데려 와봐라.”
그래서 보니까 자기보다 열일곱 살 적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남자친구는 늘 공적영역만 생각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까, 만 생각해요. 그러면 그 엄마가, 아무 쓸데없는 생각이나 한다고 하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의 도덕이란 뭐냐? 남자가 여자보다 네 살 많으면 궁합도 안보고 간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128가지 중에서 일단은 네 살 차이로 묶읍시다. 가하시면 ‘예’하시기 바랍니다. 남자가 좀 여자보다 나이가 많고 여자는 좀 남자보다는 젊어야 돼요.
돈의 문제에 있어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삼분지 1이상 수입이 많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 양쪽 다 이미 결혼한 번 했거나, 이혼 했어도 안돼요. 이미 결혼한 상대는 물론 안 되고, 애도 당연히 없어야 되고 미혼상태이어야 돼요.
결국 세상 사람들의 기준은 뭐냐 하면, 네 살 차이, 이것은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고 세 살 정도도 괜찮지만, 네 살 차이나고 남자가 여자보다 좀 돈을 더 잘 벌어서 여자가 돈 번다고 남자를 무시하지 않고, 그 다음에 둘 다 미혼상태, 이게 주님의 뜻입니까? 이게 주의 뜻이냐 그 말이지요.
128가지 속에 들어가는 것은 맞는데 이게 주의 뜻이냐 그 말입니다. 실제로 모든 인간 속에는 네 살 차이가 나고, 이걸 제가 너무 강조하는데, 네 살 차이나고, 돈은 남자가 좀 더 벌고, 둘 다 미혼이고. 이게 보디발의 처의 사고방식인데 그게 딱 들어있으면서, 이 애굽적인 사고방식이 들어 있으면서 그 다음에 더 뒤에 조건을 하나 더 붙이는 거예요.
그래도 교회 다니면 더 안 났겠는가, 하는 식으로. 이것은 마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 그런 옵션하나 채택하는 것처럼 걸쳐놓고 그것이 주님의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사랑받은 결혼이에요? 아니지요. 이게 언약적개입입니까? 결국 우리는 보디발의 처를 비난하거나 보디발의 처를 나무랄 수가 없는 똑같은 128가지의 사고방식, 그 경우의 수에 같이 한통속으로 묶여 있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보디발의 처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요셉마저도 튀기 위해서,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그런 소리를 한 게 아니에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도 인간의 근본, 종교의 근본,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기독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남들 하니까 하는 것처럼 그걸 신앙이랍시고 엉터리신앙을 가지고 실제로는 보디발의 처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요셉을 보면서 어설프게 모방하려고 훌륭하다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요셉은 고난 받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오’ 하는 훌륭한 고백까지는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요셉처럼 이런 것을 흉내 내서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안합니다. 나에게 죄짓게 하지 마세요.”라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지만 그런 언급을 하고 난 뒤에 은근히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축복을 보상으로 기대할 수 있느냐, 아니면 그런 고백을 함으로서 지금 얼추 살아가는 이 삶의 형편보다 더 추락한다면, 더 살기 힘들어지고 억울해진다면, 그래도 이런 고백 하시겠어요?
그걸 복이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아브라함이 없는 자식이 새로 생길 때 누구나 그걸 복이라고 보는 거예요. 하지만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쪼개서 드리는 그것까지라도 복의 연속성이라고, 저것도 복이지만 이것도 복이야, 라고 기쁨으로 자식을 바칠 수 있는, 그것조차도 복이라고 볼 수 있는 안목을 우리가 갖출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말씀 지키는 것은 인간의 손을 떠났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요셉 훌륭하다고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정들어 있고, 우리가 안 떠나려는 이 세상이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적대적 영역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우리 성도를 통해서, 또는 요셉을 통해서 까발리고 있는 겁니다.
그 일에 요셉이 지금 쓰이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가 쓰이고 있는 겁니다. 요셉은 어떤 의미에서 천진난만하지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상처 같은 것도 없고, 상당히 순진하지요. 그 순진한 것에 어떤 외형적인 것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진한 그 요셉에게 결국은 마음에 상처를, 인생에 상처를 내버립니다.
가만히 좋게 지나면 되거든요. 주인 보디발이 얼마나 요셉을 대우하고 환영하고 있습니까? 그걸 상찬이라 하는데 아주 늘 높이고 떠받들고 모든 것을 맡길 정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남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신뢰성 있게 하게 되면 자유를 느껴요. 그 정도로 요셉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처와 관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음식물 빼놓고는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맘대로 하는 특권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이라는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디발의 처가 들이대서 요셉은 그 축복 다 날라 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의 끝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보디발의 처가 요셉에게 고통을 주는 그것마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고통처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보디발의 처는 쳐들어왔고 그 뜻은 결국 요셉에게 고통과 마음의 상처와 암울한, 캄캄한 미래를 제공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꿈을 받은 사람, 복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형국이고 모습입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 성도에게 무슨 보람이 있고 예수 믿는 성도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어요. 요셉은 바르게 살아서 내일 잘되고, 모레 잘되는 것이 아니에요. 요셉에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은 뭐냐? 내일을 기약할 필요 없어요.
지금 하나님께 어떻게 쓰이는가? 그걸 통해서 요셉은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포부나 희망은 접어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꿈이 중요하지 내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계시가 중요하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시느냐, 지금 현재가 중요하지 내일 내가 성공하고, 실패하고, 그것은 요셉이 미리 당겨서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그처럼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앞으로 잘되고, 10년 후에 잘되고, 20년 후에 잘되고, 그런 것은 욕심에 불과한 겁니다. 오늘 하루 주께 어떻게 쓰여서 내가 미련 두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하나님 앞에 유황불 받을 만한 지저분한 생각으로 무장되어 있는가를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는 그것이 바로 요셉의 임무고 장차오실 예수님의 역할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보고 신앙인을 얼추 흉내 내는 외형적인 짓은 그만하게 해 주옵소서.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보디발의 처와 동일하면서도 요셉을 얼마나 흉내 냈습니까? 우리 자신이 세상을 좋아하는 그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버림받아야 될 마땅한 죄인인 것을 다시 한 번 주님의 뜻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