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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39:1-6 / 두 영역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9:1-6 / 두 영역

정인순 2018. 8. 15. 21:45

 음성       동영상

 

 두 영역 

 

이근호
2018년 8월 15일            

 

 

본문 말씀: 창세기 39:1-6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39: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39:6)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기독교의 상식은, 구원이란 외부에서 넘어와서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는 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논리에서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들이 생각하는 자아성이 안 다치고 안 깨어지고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철저하게 파괴시켜 데려간다는 사실이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대략 비슷합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은 내 것이니까 그것들을 모으고 그것을 지켜내고 그것을 키우는 재미로 살아가는 겁니다. 자식을 낳게 되면 그것은 당연히 부모 것이고, 부모의 보람은 그 자식들이 부모의 소원대로 잘 되어서 자식 키운 보람을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기 것’을 이미 구축하고 있는 입장에서 외부에서 (하늘나라)에서 누가 데려온다고 했을 때, 그동안 자존심걸고 지켜 온 자기 것이 안 다친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에 나와 있는 구원을 통해서 보면, 이런 사고방식은 모조리 거짓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영원한 구분은 이 지상에서 복과 저주로 나타납니다. 그 기준점으로 특별히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최초의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은 단일 인물이지만 그 결과 복과 저주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결과를 낳습니다. 마치 긴 창 대는 하나만 그 창의 끝은 날카롭게 두 개로 따로 구분되어 있는 무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을 줄곧 주목한다면 아브라함 주변에서 어떤 식으로 복과 저주가 일어나는 지를 살필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지시받고 내려갑니다. 단일 영역에서 줄곧 번창하며 잘 살게 되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 보면, 그 약속의 땅에 기근이 일어나고 그는 애굽이라는 또 다른 영역을 밟게 됩니다.

바로 이 애굽 땅에 있는 바로왕궁에 아브라함 인한 저주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왕이 하나님에 의해서 혼줄 납니다. 덕분에 아브라함 가정은 바로왕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단일 언약이 이 지상에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복의 영역과 저주의 영역, 이 두 영역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37장 마지막 구절과 이어져야 맞습니다.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창 37:36) 그런데 창세기 38장이 통째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왜 요셉 이야기에서 요셉 이야기로 이어져서는 아니되는 걸까요? 그것은 언역 달성에 두 영역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영역은 복을 받을 영역이요 다른 하나는 저주받을 영역입니다. 저주받을 영역이나 복받을 영역이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외부인물의 등장으로 그러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38장은 야곱의 아들 유다집안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안은 야곱에게 내린 언약의 복을 받을 대상이 되는 집안입니다.

유다는 철저하게 자기 집안을 단속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자식 둘을 죽였지만 남아 있는 막내는 어떻게든 아버지로 지켜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어이 복의 후손을 이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내 가정 지키기’에 지장에 되는 인물이 있다고 유다는 믿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며느리 다말입니다.

그래서 재수없는 며느리를 친정에 보냅니다. 이런 조치는 곧 내 가정을 내가 지킨다는 일념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친정에 보낸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소식을 듣고 그 불륜성을 유다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처벌을 내리려 합니다. 자기 집안의 수치요 먹칠한 짓을 며느리가 했다고 본 겁니다.

죄에 대한 처벌을 아주 단호하고 가혹하게 내리므로 서 상대적으로 죄를 용서치 않는 자기 집안의 거룩성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때 유다는 자신이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의롭게 자기 집안을 지키고자 하는 그 집념과 열심히 도리어 언약적으로 집안을 살리고자 하는 며느리를 죄인으로 몰아넣게 만들었습니다.

즉 의가 곧 죄였고, 죄가 곧 의였던 겁니다. 이는 외부에서 온 며느리가 자기 안에 들어오는 일이요, 유다 자신은 며느리의 세계에 편입되어야 될 일이었습니다. 즉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이 외부인인 다말에 의해서 침공받아 거덜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에 의한 ‘교체’입니다.

복이란 ‘교체’가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것을 파괴해서 접수하시고 나는 그 하나님 안으로 이전하는 겁니다. 나가 너 되고 네가 나 되는 겁니다. 내 것을 그냥 갖고 있는 참공하시는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오지 않는 바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다말의 강제성 있는 희생은 유다 집안으로 하여금, 진정 무엇이 의이며 무엇이 복인가를 새삼스럽게 알려주게 된 겁니다.

신약에 와서 구원의 최종성은 담 타넘고 오신 주님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즉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격당해야 구원받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악마의 개노릇을 하기에 자기 것 상처나면 신이고 예수고 상관없이 발악하면서 달려들어 항변하고 원망합니다. 죄 사함이란 그저 ‘내 것’ 위에 묻은 먼지만 털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부까지 거덜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킬 만한 내 것이 하나도 없게 만듭니다.

반면에 저주의 영역은 여전히 지킬 만한 내 것이 잘된다는 의식에서 신바람납니다. 역시 외부에서 넘어온 인물은 소년 요셉은 보디발의 집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복잔치를 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디발은 자기 집안에 굴러 들어온 복덩어리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계속 함께 하기를 원했는데 이는 요셉에 의해서 자기 것이 다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에게 다음과 같은 진정한 복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즉 주님 안에 죽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킬만한 것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151강-창 39장 1-6절(두 영역)1808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9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60페이지입니다.

창 39:1-6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성경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하늘에서 누군가 오셔서 자기 사람을 구원해 간다는 그 내용이 성경의 내용이고, 그게 복음이고, 그게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일종의 방문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방문으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왔을 때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게 점점 더 심화되고 신약까지 넘어가게 되면 하나님은 노골적으로 세상을 침노합니다.

침노하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침노하고 침공한다, 라고 했을 때 우리는 상당히 의아해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성경대로 그렇게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용한 현실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조용한 것이 더 무서워요.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아기 예수로 왔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고요한 밤’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나 막상 아기 예수의 출생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사태는 그다지 고요하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의 두 살 밑의 애들 다 죽었어요. 요란스럽습니다. 분란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이 비상 걸렸습니다.

전체적으로 드디어 상당히 긴장감이 돕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은 애굽으로 피신할 정도로 동방박사는 혼이 났지요. 그대로 갔다가는 애굽 군사들에 의해서 죽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인하여 고요한 이 나라에 죽음이 유발되는 사태, 사건이 개시가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겠지, 라고 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를 거쳐서, 사도행전을 거쳐서 사도바울의 편지, 그 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그 침노와 침략의 공격상황이 인간의 내부까지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정말 우리가 성도라면 내 내부에, 내가 원치 않는 분이 내 내부에 찾아와 줘야 돼요. 곱게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침공이고, 침노고, 침략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데려간다, 상당히 스무스하게 데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고, 부드럽게 데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고, 말썽 없이 데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은 내 일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우리 인생에 내가 초대하지도 않았고,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떤 사람이 와서 내 인생에 폭탄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매우 당황스러울 겁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오랜 동안 가꾸어놓은 아름다운 내 인생인데 이걸 완전히 호작질을 해서 쑥대밭을 만들기에요?”라고 반발할 거예요. 막상 성경에서는 우리 자신을 하늘에서 오신 분에게 내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고 내가 주님 쪽에 가는 거예요. 교체가 일어나게 되고 바꿔치기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체를 하든 바꿔치기를 하든 그 선택을 본인이 하려고 합니다. 바꿔치기를 해서 좀 상황이 나아진다 싶으면 우리는 바꿔치기를 허용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죽어서 천국 간다면 얼마든지 예수 믿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꿔치기가 아니에요. 이 몸 그대로 가겠다는 거예요. 주님은 나를 도와주면 되고 주님은 현재 내 인생 손대지 말아주세요, 하는 것이 은연중에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그것은 성경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주님을 믿든 예수를 믿든 현재의 내가 더 풍성하고, 융성하고, 뭔가 만사형통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만사형통하려면 우선 내 것이 안 다쳐야 돼요. 내 것이 그냥 건재해야 되고 곱게 유지되어야 된다는 조건하에 그것이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구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밀쳐냈을까요? 자기 판단에 볼 때에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그다지 도움을 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움을 준다, 안 준다, 의 그 근거가 뭐냐 하면, 현재 있는 내 것이 잘되면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내 것이 파괴되면 그것은 도움을 안 주는 것으로 이미 우리 자신이 그렇게 생각을 해요.

철저하게 우리는 내가 살아온 식대로, 관성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무리 봐도, 내 것 안 다치기, 내 것 손 안대기를 전제로 해서는 전혀 구원의 비밀, 원리를, 상투적인 용어, 교리, 그런 것이나 잔뜩 외우지 실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오늘 본문 39장에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라고 되어 있거든요.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갔다는 이 이야기를 창세기 37장 36절에 보면,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고 되어 있어요.

37장 마지막에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라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바로 38장이 있으면 안 되고, 38장은 없어야 되고, 그 다음에 39장,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이렇게 돼야 맞아요.

그런데 이렇게 되지 않고 38장의 유다이야기가 왜 들어가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 비밀은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요셉과 그리고 유다, 그리고 야곱, 그 모두의 조상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복의 근원이 된다고 했어요.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복을 줄게, 가 아니에요.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고 했습니다. 명칭은 복, 1인데 결과는 복과 저주, 2가 돼요. 하나가 둘이 된다 그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칼끝이 두 개로 갈라졌다, 그렇게 보면 돼요. 창의 대는 하나지만 창의 그 끝의 이빨이 두 개로 갈라진 거예요. 하늘에서는 그 언약이 복으로 내려오더라도 지상에 실제화 될 때는 언약으로 인하여 저주의 형태와 복의 형태의 두 갈래로, 두 가지의 양상으로 언약이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게 돼요.

그렇다면 창세기 12장 3절을 잘 이해하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복의 근원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움직임에 주목하겠지요. 12장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간다고 했을 때에 가나안 땅은 하나의 구역입니다.

하나의 구역, 약속의 땅을 통째로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아, 약속의 땅을 하나님이 주셔서 거기에 아브라함이 살면서 나중에 자식이나 영토가 창대하면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요.

따라서 ‘약속의 땅 이야기만 하시겠지’라고 하는데 갑자기 그 약속의 땅에 가뭄이 들어요. 가뭄이 드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 땅만 주셨다고 여기는 우리의 상식에서 이탈됩니다. 뭐냐 하면, 애굽으로 내려가요. 애굽이라는 구역이 여기 등장합니다.

자, 다시 이야기할게요. 언약이 이 땅에 오게 되면 축복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복 받았다, 복 받았다, 복 받았다, 이것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언약 때문에 저주받았다, 저주받았다, 저주받았다, 도 같이 동반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동반해서 등장한다는 말은, 하나가 2가 된다는 말은, 언약의 실제화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역이 하나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두 개가 필요해요. 하나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필요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애굽 땅이 필요한 겁니다.

애굽 땅에 복의 근원 아브라함이 이동을 해요. 움직여서 애굽의 누굴 만나느냐, 바로 왕을 만나요. 바로왕을 만나는 그 날 밤에 바로왕의 집안에 저주가 일어납니다. 자, 그러면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의 구역 가지고는 설명이 다 안 되고 언약에 의해서 저주받는 구역, 영역과 병행해서 언약이 설명돼야 언약의 모든 것이 구현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애굽의 바로왕이 그날 밤에 저주받았다. 그렇다면 야곱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자식들인 유다와 요셉도 야곱의 자식인 동시에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근원은 축복과 저주 두 가지의 양상을 보여주는 기능을 해야 돼요.

따라서 이 언약이 제공 될 때에 누가 언약의 축복을 받을 대상자가 되느냐, 하는 그 이야기를 위해서 창세기 37장과 39장 사이에서 38장의 유다 이야기가 삽입되는 겁니다. 지금껏 유다 이야기를 몇 주 했는데 유다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유다나 야곱이나 보통 일반화된 아담의 자손이에요. 아담의 자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것 내가 지킨다는 겁니다. “더 주시면 고맙겠지만 주신다는 빌미로 내 것 파괴 안하시면 좋겠습니다.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빼앗아 가는 것은 싫습니다.”가 인간의 기본본성이에요.

38장 이야기하기 전에 39장 먼저 봅시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가고 난 뒤에 보디발의 집이 난리도 아니에요. 나쁜 의미의 난리가 아니라 아주 좋은 의미로 난리도 아닙니다. 여기 보면 형통이라는 말이 나와요.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그래서 보디발이 요셉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현재 지키고 싶은 것을 요셉이 들어와서 더 확산시키고, 확대시키고, 번창케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분 좋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런 복을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요셉을 칭찬하고 자기 음식 먹는 것 빼놓고는, 자칫하면 독을 넣을지도 모르니까, 자기가 직접 먹는 음식을 빼놓고는 전부 다 요셉에게 다 일임할 정도로 보디발은 아주 기분이 업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좋아요.

왜냐하면 자기 것이 다치지 않았기 때문에. 깨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언약의 복이냐,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저주인 거예요. 왜냐하면, 아까 처음에 설교할 때 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침노와 침략, 침공의 양상을 띠고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내 것이 파괴되지 아니하면 주의 것이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내 것은 그대로 가지고 주의 것은 더 추가해서 받고, 이런 축복을 하나님이 창세전에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박살내고 박살낸 현장에다가 주님께서 축복을 얹어줄 때 비로소 주님에 의해서 박살난 그 사람에게 주님에 의해서 영원한 영생과 천국과 축복이 거기에 덧입혀지는 거예요.

그러나 자진해서 자기 것을 내놓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침공이라는 말은, 쳐들어온다는 말은, 외부적인 것이 내 내부적인 것을 관여하고……, 지금 내 것은 내가 꽉 잡고 있거든요. 내가 내 주인이잖아요. 내 인생 내가 지키지 누가 지키겠습니까?

아주 당당하기 짝이 없어요. 아주 확고하게 나만의 성채에요. cathle, 나만의 성이라는 말이지요. 그 안에서 내가 영광 받고. 그런데 38장의 유다 이야기를 해보게 되면, 유다도 자기 자식을 지키고, 자식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자식을 지키고, 자기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요. 심지어 며느리까지 내쫓을 정도로.

며느리가 중요합니까? 내 자식이 중요하지요. 셋째 아들이 중요하지요. 셋째 아들을 며느리와 결혼시켰다가는 또 그 애까지 죽으니까, 며느리야 뒷전이니까 친정으로 쫓아버리고 자기 아들을 지키는 그 정도로 유다는 철저하게 자기를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유다에게 쫓겨난 외부인, 이방 여인 다말이 유다가 지키려고 하는 그 지킴, 내가 이 가정을 지켜야지, 하는 그것 때문에 창녀가 되는 피해자의 모습을 띠고 유다 앞에 등장합니다. 어느 정도 그 다말이라는 며느리가 피해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시아버지가 화가 나서, 네가 우리 집안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고상하고 거룩한 집안인지를 너를 처벌함으로써 내보이겠다는 식으로 ‘불살라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며느리는 시아버지에 의해서 불살라져버린 대상자가 돼요. 만약 유다가 계속 자기 것을 고수하려면 그 집안의 며느리 다말은 불살라져서 재가 된 채로 그 유다집안에 같이 결합될 때 유다의 자존심과 유다 본인의 가치는 그대로 유지가 돼요. 불살라버릴 때.

그런데 불살라버리겠다고 한 그 다말, 내가 불살라야겠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죄를 지은 그 죄의 유발자가 누구냐? 내 것을 지키고, 거룩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복을 따내겠다고 내 것에다 하나님의 축복까지 보태서 하나님의 가정답게 지키겠다는 그 모든 사고방식 자체가 다말을 불살라버리겠다는 지경까지 몰아넣었다면 누가 의로우냐? 누가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의냐, 그 말이지요. 누가 진정한 복이냐 그 말입니다.

유다는 말합니다. 살아야 될 자는 너고 네 앞에서, 하나님께서 추가적으로 새롭게 등장시킨 그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기는 그 의를 훼방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네가 옳도다.”하는 그 짧은 한마디. 나보다 네가 더 옳다, 그 말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너를 처벌하겠다는 것은 너에게 일어나는 그 의를 내가 몰라본 거예요. 왜 몰라봤을까요? 딱 이유는 한 가지. 내 가치, 내 자존심, 내 고귀한 것을 내가 스스로 지키겠다는 것, 어느 누구도 내 것을 침공하면 안 되고 침략하면 안 된다는 그 고집이 하나님의 복을 주려고 주신 외부인을 오히려 드디어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유다가정에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리고 유다의 그 귀한 복의 자손은 다말이 강탈했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다말과 시아버지가 계속 부부로 사는 것은 아니에요. 그걸로 끝이에요. 다말이 그 언약의 자식, 유다에서 흘러나온 그 약속하신 언약의 대를 이을 언약의 자식은 다말의 주도하에 베레스와 세라라는 그 자식을 갖게 되는 겁니다.

외부에서 침범한 그 외부인이 언약의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그 모든 언약을 다 가져가버리고 유다는 빈터만 남았어요. 빈껍데기만 남았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보고 누이동생이라고 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바로왕은 저주받고 아주 식겁했지요.

바로 왕이, 네가 보통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했느냐, 해서 나가라고 하면서도 애굽의 각양 보화를 덤으로 주면서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갔다가 갑자기 복을 받게 되었어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혼자서 움직이잖아요. 복과 저주를 혼자서 움직이면서 저주도 제공하고 복은 복대로 자기가 받고.

그런데 야곱의 자손에 와서는 아브라함 하나가 움직여서 복과 저주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유다와 요셉, 투톱이라 하는데, 유다와 요셉을 통해서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저주인가를 두 자식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유다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복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복을 받는 사람의 특징은 거덜 나는 거예요. 유다는 다말을 자기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요.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더 잘 될 경우에는 내 사람으로 인정하지만 자식이 셋인데 그중 둘을 다말이 죽였잖아요. 유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다말과 결혼하는 족족 둘 다 죽었어요.

오히려 다말은 내 것을 거덜 내는 여자에요. 집안 말아먹는 여자라 그 말이지요. 집안 말아먹는 여자가 진짜 예상 밖의, 외부에 있는 여자가 내 내부에 쳐들어와서, 침략이지요, 쳐들어와서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다 거덜 내고 자식마저 자기가 낳은 자식으로 소유가 되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이 교체, 바꿔치기, 이게 바로 진정한 언약이 보여주는 축복의 양상이에요.

그래서 38장을 통해서 축복이 뭐라는 것을 먼저 제공하는 겁니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가 뭡니까?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예요. 지킬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안 지켜주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유다는 우리하고 똑같아요. 끝까지 자기 것을 지키고 싶고 자식이 잘못해서 하나님께 벌 받아 죽었는데 그 탓을, 그 덤터기를 며느리 다말에게 다 뒤집어 씌워요.

그러면서도 끝까지 시아버지 자기는 옳다는 거예요. 며느리는 나쁘고. 그런데 그 자기가 지킬 것이 ……, 담을 넘는 것을 월경이라 하거든요. 담을 넘어온 다말이 담을 타넘고 와서 내 실상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완전히 집안을 거덜 낸 거예요. 이거보다 더 큰 축복은 없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12장 28절, 29절을 가만히 들어보세요. 가만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는 각자 귀신 하나씩 키운다는 겁니다. 하나만 있으면 다행이에요. 몇 만 마리. 하여튼 우리는 악마를 하나씩 다 키우는 거예요. 우리가 악마를 하나씩 키운다는 그 티가 어디서 나느냐 하면, 교회 와서 기도를 하나, 헌금을 하나, 전도를 하나, 성경공부를 하나, 뭘 하나 “주여, 내 것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내 것 더 확장시켜 주옵소서.”라는 것, “내 것은 다치지 않게 해주시고, 이 몸 건강케 해주시고, 자식 잘되게 해주시고, 어쨌든지 저쨌든지 간에 네 것 흠집 안 나게, 스크래치 좀 안 나게 해주세요.”라는 그것이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아니고 집에 귀신을 키우는 겁니다.

그거 스크래치 나고 상처가 나게 되면 왁, 하고 분노하지요. “이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제가 언제 예를 들었는데 풍선에 훅훅 바람을 불지요. 분명히 바람은 많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풍선 안에 어떤 벌레가 들었다면 그 벌레는 시원해할까요, 답답해할까요?

이상하게 바람은 많이 들어오는데 바람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답답하지요. 왜냐하면 그 벌레는 월경을 못해요. 선을 넘을 수가 없어요. 풍선이라는 고무막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벌레를 시원하게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바늘로 그 풍선의 고무막을 터트려줘야 돼요.

우리 쪽에서는 그 고무막을 아무리 쑤셔도, 아무리 창으로 찔러도, 내 것은 내가 지키고 내 인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이 고무막, 이 풍선을 내 쪽에서 찢을 수가 없어요. 그럴 재주가 없어요. 머리 깎고 중 돼도 안돼요. 아무리 인간이 밀어내도 그 고무막은 밀려날 뿐이지 오히려 잘되면 잘될수록 점점 더 불안해요. 이 잘된 것 하루아침에 와장창 다 내려가면 어떻게 하나.

목사가 개척교회 하면서 교인 5명이 되어도 불안하고, 10명이면 10명대로 불안하고, 100명이 되면 100명이 되어도 불안하고 5천명이 되어도 불안해요. 5천명에서 4999명 될까봐서. 자식이 승진해도 불안해요. 과장 되면 부장이 되어야 할 텐데, 부장 되면 차장 되어야 할 텐데, 그 다음에는 임원 되어야 되고.

인간은 사업을 하든지 뭘 해도 그 악마가 쳐놓은 막, 마태복음 12장에서는 담이에요, 담. 그 담 안에는 누구 구역, 누구 나와바리냐 하면, 악마의 나와바리에요. 악마는 자신만만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인간도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날 인간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만만해요. 바깥에서 담타고 넘어와서 악마의 내 사람을 예수님이 도둑질 할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리고 그 도둑질을 누가 싫어하느냐? 줄곧 평생토록 악마에 길들여진, 악마로 세뇌 받아서, 네가 잘되는 것이 복이라는 세뇌를 받았던 이 교인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와서 자기 인생 거덜 내는 것을 악마를 대신해서 주님 앞에 원망과 불평과 화를 마구 쏟아냅니다.

홍해 건너올 때 홍해 바닷가에 애굽의 군사들의 병기와 갑옷의 조각들이 떨어졌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났어요. 모세 누나 미리암이 선창해서 찬양대까지 조직해서 굉장히 기뻐했어요. 거기 건너자마자 약속의 땅인 줄로 알았습니다.

건너자마자 광야입니다. 이제 찬양은 간 데가 없고, 모세 원망하고 하나님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불 뱀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애굽에서 살던 그 마음씨 그대로 천국 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알기는 얼마나 잘 아는지, ‘이 죄 지은 죄 다 사하시고 보내주시겠지요?’ 물론 죄 다 사해주고 보내줘요.

그러니까 사람들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내 것은 있는데 이 내 것에 먼지가 묻었다는 거예요. 이 먼지만 톡톡 털어주게 되면 내 것을 그대로 가지고 천당까지 갈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내 것 지킨다는 그것이 죄거든요. 그러면 죄를 사해준다는 그것은 뭐냐 하면, 내 것 지키겠다는 사고방식을 거덜 내겠다는 뜻이에요.

거덜을 내려면 우선 그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자기 것을 사랑하는지 티가 나는 환경조성이 필요하지요. 그 환경조성이 광야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입니다. 오늘날 애굽이에요. 얼마나 내 것 안 빼앗기고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내 것 빼앗지 말라고, 내 자식 데려가지 말라는 거예요. 아, 그 집착은 대단합니다.

여러분, 누가 갑자기 새벽에 찾아와 보세요. 기가 막힐 거 아닙니까? 그것도 실내복만 입고 있는데 갑자기 쳐들어와 보세요. ‘저거 죽여 버릴까?’ 자기의 허점, 숨기고 싶은 것이 그대로 노출 될 때 살 맛 나겠어요? 자기 가치가 훼손 되었잖아요. 이거 못 참습니다. 어느 인간이 참아요? 이것은 침략이고 침공이고. 경찰서 신고해야지요. 새벽에 자고 있는데 난데 없이 쳐들어왔다고.

재미 삼아 심방 새벽 3시 반에 한 번 해 볼까요? 잠 못 바람으로 있는데 가 볼까요? 목사고 뭐고 죽여 버리고 싶어요. 내 나와바리에 왜 들어오냐, 그 말이지요. 지금 인간들은 하나의 영역을 생각해요. 언약 하면, 내 것, 내 집에 찾아와서 내가 잘되는 것, 복, “아멘, 믿습니다.” 그렇게 돼요.

내 영역이 파탄 나야 될 애굽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한 겁니다. 심지어 이 유다의 영역은 어떤 영역이냐 하면, 꿈을 꿨다는 이유 때문에 막내 동생, 정확히는 막내에서 두 번째 지만 거의 막내 가까운 요셉을 추방했던 영역이 그 영역이에요.

그러면 유다가 지키고자 할 때는 거기에 뭐가 없느냐? 유다가 지키겠다는 그 마음씨중 하나가 뭐냐 하면, 꿈 꿨던 요셉은 마땅히 쫓아내야 합당하다는 마음이 포함된 그 영역이 유다의 영역이에요. 그렇다면 그 유다의 영역은, 내 것 건드리면 예수님도 죽어 마땅하다 하는 그것이 타일처럼 깔려있는 그 영역이 내 영역이에요.

쉽게 갑시다. 내 것 건드리면 신이고 뭐고 다 싫다는 거예요. 키워주면 아낌없이 예수 믿어주고, 피 믿어주고, 십자가 믿어주고, 믿으라고 하면 뭐든지 다 믿어줄 용의가 있다. 다만 내 것은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유다가 복을 받은 것은 이런 자기의 정체가 죄로서 탄로 난 그것이 바로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다와 다른 형제들에 의해서 쫓겨난 그 요셉은 어디로 가느냐? 이제 애굽으로 갑니다. 두 개의 영역이 필요해요. 하나의 영역은, 외부인이, 다말이 와서 유다집안을 거덜 냈는데 그 때부터 유다집안은 완전히 빈 터, 빈껍데기가 되었지요.

자기는 빈터 되고 싶지 않았는데 다말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서 자기는 졸지에 빈터 되고, 자기 자식도 없고, 자식도 다말 자식이고, 자기는 죄인으로 노출되고. 그런데 그게 준비단계에요. 복을 받는 빈 그릇이 되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유다와 그 형제들이 쫓아낸 요셉은 어디로 가느냐? 애굽으로 가요. 애굽으로 가게 되면 애굽의 보디발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 하면, 세상에 이런 복이 굴러왔구나,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내 것 안 깨져도 되는 영역이에요.

내 것 안 깨지고 요셉만 함께 있다면……, 요셉에게는 얼마나 잘해줬는지 최저임금도 올려주고, 하여튼 요셉에게 전권을 다 위임합니다. 그저 내 것만 안 다치고 너 때문에 복이 굴러왔으니 우리 손잡고 네가 믿는 하나님 덕 보자는 이게 바로 저주의 양상이에요. 이게 저주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사람들이 창세기를 보면서 복을 저주로 이해하고, 저주를 복으로 거꾸로 해석하면서 주석을 그렇게 달고 있습니다. 기독교 2천년동안. 교회사에서. 모든 교회가 그런 식으로 설교한다고 보면 되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마 거의 없을걸요.

뭐가 복인지를 몰라요. 교회 수십 년 다녀도 복이 뭔지를 몰라요. 그들은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을 모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복입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되다.

자, 주 안에서 죽는다는 말은 내 것 있었는데 내 것은 주님에게로 가고 주님이 내 것에 들어온 상태, 그래서 주 안에서 주님은 살아있고 나는 주 안에서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 이게 최종적인 복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땅은 애굽인데 요한계시록에서 뭘 애굽이라 하느냐?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보면,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두 증인이 죽었다 이 말이지요.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장착될 수 있는 장소가 제공되게 되면 그게 복의 관계에요. 주님과의 구원의 관계고 영생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39장에서 요셉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보디발의 가정에서는 전혀 십자가죽음이라는 흔적은 없어요.

잘되고 또 잘되고, 또 잘되고, 또 잘되고……. 이것은 교회 다니고 난 뒤에 뭔 일이든 만사형통하는 것, 저주입니다. 내 것 거덜 날 필요 없고, 예수님 덕분에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헌금만 계속 교회에 내기만 하면 되는 거지요. 안일하게. 내 인생 작살내는 요소가 없어요.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주님의 것과 내 것이 교체되는 일이 안 일어나게 되면 죄송합니다만 그 사람은 계속 마귀의 포로로 잡혀있고 질식할 풍선 안에서 그대로 못 빠져나와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일도 복, 모레도 복, 복 달라고, 복에 미쳐서, 복에 갈증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아직도 저주 안에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건드리면 분노합니다. 분노하면서 자기의 죄는 죄다 노출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풍선 찢는 기회가 찾아온 거예요. 내 것 작살날 때 도리어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복이 왔을 때 우리는 오해했습니다. 나 잘되는 줄 알았습니다. 주여, 내 것을 찢어주시고 주의 것으로 교체되면서 주와 함께 살아 있다면 죽는 것도 감사한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