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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38:27-30 / 베레스와 세라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8:27-30 / 베레스와 세라

정인순 2018. 8. 8. 22:26

 음성  동영상 Youtube

 

 베레스와 세라

 

이근호
2018년 8월 8일          

 

 

본문 말씀: 창세기 38:27-30

(38:27)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38: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38: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8:30)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본성대로 어쩔 수 없이 환경에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와중에서 인간은 쉴새없이 사태를 측정하고 예측하고 소실을 줄이고 실패에 이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무엇은 예상하고 있는지를 훤히 아십니다. 그리고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굴복한다는 사실을 아울러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예측과 무관한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말에서 먼저 해산한 자식이 누구인지를 목격케 해놓고서 그 목격담과는 전혀 상반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인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시려는 겁니까?

인간들의 행위는 나름대로 해결상황이나 해답을 기대하게 마련입니다. 즉 문제는 본인부터 시작해서 답은 하나님께서는 제공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난관에 봉착했다고 여길 때, 기도에 간절함을 실어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공한 해답은 이미 확정났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최후의 해답입니다. 다른 해답을 하나님에게 기대하지 마세요.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성한 문제와 이 확정된 해답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줄을 이어봐야 합니다. 즉 십자가 죽음이란 답이 필연적으로 나올 수 있는 문제를 본인이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돈이 필요하다는 자기의 문제 의식과 예수님의 피라는 해답이 맞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돈이 필요하다는 현재의 자기 고민이 그 자체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게 대신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된다는 점으로 정리되면 제대로 문제재구성이 수립된 겁니다. 이처럼 나의 죄됨을 도출하고 유발하려면 인간은 혼자서 도 닦듯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와의 만남과 마주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분해되고 해체되어야 합니다. 전에 ‘나’라고 여긴 본내용물이 몽땅 다 털려야 합니다. 이는 곧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된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구원은 ‘나’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 사건의 침투’로 인해 구원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따라서 언약 사건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예상이나 상식에 빗나가는 사태가 벌어져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집안을 이를 장자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언약에 의해서 제공되는 복의 수임자가 자기 집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과 상식을 통해서 유다는 자기 자신이 잘못된 문제를 만들고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해답이 유다 가정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며느리를 통해서 가진 쌍둥이 가운데서 둘째로 나온 자식이 앞에 나온 자식을 제치고 장자가 된 일입니다.

누가 장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순서 뒤바뀜 사태’가 꼭 일어나야지만 언약이 땅에 정착되는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즉 왜 장자가 될 자는 자연스럽게 먼저 태어나게 하지 않고 다른 장치를 만드셨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나라의 상식이 언약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동질성으로 탈피하지 못합니다. 즉 내가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얻은 진 결과로서의 나가 항상 동질적이라는 사실을 고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동질성을 이질성으로 바꿔버립니다. ‘같음’을 기대했는데 ‘다름’을 제공합니다. 즉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육의 동질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들이 아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런 동질성을 굳게 지켜주기를 원하면서 하나님께서 당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식은, 인간들의 동질성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의도는 첫째를 보여주시고 그 첫째를 둘째로 돌리시는 시도로 나타납니다.

곧 육은 영으로 지배당하고 추월당한다는 점을 쌍둥이 사이의 서열 바뀜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해답을 위하여 다말이라는 며느리는 자신의 몸을 빈 껍질로 해체당해야 합니다. 본디 자기 내용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의 기대에 충실하고자 자신이 창녀로 변장해야 하는 희생을 감행합니다.

곧 시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일치 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시아버지의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만큼 여성은 이 땅에서 남성의 폭력의 잠재적 희생물입니다. 하지만 그 약함이 도리어 남성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아버지 유다는 솔직하게 다말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합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 38:26) 이제는 유다 가정에 일하게 되는 언약의 실체는 시아버지 유다에서 다말로 옮겨가서 나타납니다. 진정 여자의 약함의 내막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요?  그것은 ‘밀침을 당하는 육적 장자’의 사태가 실내용으로 하여 채워집니다.

갈라디아서 4:27에 보면,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육적 장자에게 서열상 밀려버린 둘째 자식, 그 둘째 자식이란 그 위상이 첫째 자식이 지니고 있는 예상과 상식을 뒤엎어버립니다.

이는 곧 해답은 첫째 자식에게 있지 않고 둘째 자식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장자됨에서 탈락되어 있는 처지가 도리어 하늘의 복을 받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동질성을 엎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도 알고 지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인생을 전복되고 있지 않고 여전히 상식의 동질성을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약 사건이 덮치면, 십자가 사건 자체에 함몰되어 자신을 순전히 주님의 일에 껍질로 제공된 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 그래서 홀로 사는 여자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예상 말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50강-창 38장 27-30절(베레스와 세라)

1808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8장 27-30절입니다. 구약성경 60페이지입니다.

창 38:27-30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며느리가 시아버지로 인하여 임신이 되었습니다. 나오는데 쌍둥이 나왔습니다. 둘이죠. 아들 둘이 나왔습니다. 해산할 때 옆에 간호사가 있었는데 쌍둥이니까 헷갈리지 말라고 먼저 나온 아이 손목에 붉은 끈을 매어줬습니다. 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먼저 나올 줄 알았던 거지요.

그런데 나중에 나올 아이가 새치기를 해서 앞에 나오던 아이를 제치고 나옵니다. 좀 봅시다, 하는 식으로, 혹은 갑니다, 해서 앞서가는 사람을 뒤로 빼돌리면서 먼저 나오고 먼저 나오던 것은 뒤로 처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간호사가 ‘참 기이하다’ 생각해서 거기에 의미를 두어서 이름을 짓지요.

나중된 자가 먼저 나왔는데 제키고 나왔다고, 터치고 나왔다고 해서 ‘베레스’라고 불렀고 나중에 나온 애는 잠시 먼저 나올 것 같이 해서 붉은 끈이 손목에 있는 애를 ‘세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옆에 있는 산파, 간호사지요, 이것은 엄마인 다말도 몰랐고 아버지, 시아버지 되는 그 유다도 몰랐지요.

인간들이 예상 못할 일을 하나님께서 저질러 버립니다. 이것은 뭐냐? 해답이에요. 해답입니다. 인간들은 어떤 일을 해놓고 거기에 대한 예상되는 답을 본인이 미리 기대를 은근히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했기에 여기에 필요한 답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기도한 보람도 있고, 교회 나온 보람, 하나님 섬긴 보람이 있다. 답을 얼추 짐작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문제가 있다고 문제를 자기가 규정을 해놓고, “하나님, 문제는 내가 아는데 답이 해결이 안 되네요. 그 답을 기도의 응답형식으로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이런 식인 거예요.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것을 문제로 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를 답으로 보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교회 나오고.

나는 여기에 사는 것이 힘드니까 죽어서 천국가고 싶습니다. 천국가고 싶다는 이것을 문제로 제시하고 답을, 천국 보내주세요, 천국 갔다고 이야기해주세요, 이렇게 억지를 부리면서 천국 가겠다고 예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답을 먼저 주고 그 답부터 출발해서 문제를 재구성하라는 겁니다. 답을 먼저 주고 처음에 시작했던 그 문제를 수정하라는 이야기지요.

신약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자기가 행복하고, 잘 먹고, 잘살고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답을 준 것은 뭐냐?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죽음이 굳이 하나님의 답이라면 그러면 그 십자가 피라는 답이 나오기까지 나는 그 답과 연결되기 위해서 어떤 문제를 나를 가지고 재구성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돼요.

그러면 내가 잘되어야 되고, 부자 되어야 된다는 이것이 바로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피를 흘린다는 답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골칫거리고 문제꺼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기대하는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는 해답을, 자기 아들 죽이는 것을 정답으로 제시한 거예요.

따라서 그 정답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딴 정답 필요 없어, 그러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하나님 나라와 어긋나고 있는 거예요. 노선이 엉뚱한 노선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십자가복음을 전할 이유가, 그 사람을 천당으로 유인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사고방식 속에 십자가피에서 유도된 문제가 있어야 되는데 십자가 피가 없다 보니까 문제구성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정말 답답할 때는 도끼로 둘로 잘랐으면 좋겠어요. 그게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 나오면 십자가 피가 거기에 매칭이 안 됩니다, 라고 진짜 알려주고 싶어요. 드라마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드라마를 보면 되도 않는 교양 있는 척 하는 것 있잖아요. 도끼로 이마 까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교양 있는 척, “우리 은태는……” 이런 식으로. <같이 살래요>를 안보니 모르겠지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손해 요만큼도 안 보려고 하고, 혼자 교양은 다 떨고 있고.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만, 다른 교회는 소위 예수 믿고 교양 쌓는 것을 사는 보람으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 교양, 예의, 공손함, 이런 것을 하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이 주신 해답은 지저분합니다. 예수님은 고상하게 돌아가신 것이 아니에요. 처참하게 망가졌고 지저분하게 망가졌습니다. 누가 이 지저분함에 같이 동참할래, 지금 이걸 요청하는 거예요. 지저분할대로 지저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 나와 보라는 그 이야기에요.

모든 인간이 잘난 체를 하고, 점잖은 체를 하고, 훌륭한 체하고, 나는 평생에 교도소는 커녕 파출소도 한 번 가본 일이 없다, 길을 물어도 파출소는 안 들어간다는 식으로 살아왔던 사람. 그렇게 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잘남 가지고 평생을 버티고 있어요.

이것은 엄마인 다말도 예상 못했어요. 쌍둥이 나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어요. 이상하다. 시아버지와 동침을 해서 임신을 했는데, 하나만 낳아도 되는데 쌍태라, 쌍둥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쌍둥이인지 그 의미를 몰랐지요. 우리는 알지요. 다말도 알게 되었어요.

단독적으로 하나가 나오면, 이것은 언약백성, 천국백성, 딱 결정이 되는데 쌍둥이가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이 너에게 있나? 줄게”가 아니라 언약자체에서 “너는 구제불능이야”라고 해놓고 구제불능인데, 천국 못 가는데, 하나님의 특별배려로 간다, 이런 언약적인 두 가지의 양상을 쌍둥이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지요. 그러면 쉽게 하겠습니다. 쌍둥이가 태어나되 먼저 태어난 자식은 맏이, 둘째는 차자, 이렇게 하게 되면 다말이나 산파나 시아버지나, 우리 예상대로 되었구먼,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분명히 나올 것을 알고 빨간 끈 가지고 손에 표시로 다 묶었어요.

묶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요. “먼저 나온 애가 장자처럼 보이지?” “우리 육적인 세계에서는 먼저 나온 애가 장자 맞습니다. 이것은 틀림이 없어요. 이것은 상식 중에 상식입니다.” “그러냐?” “예, 그렇습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바꾼 거지.”

영이 육을 이기는 거예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 그 말이지요. 상식에서 나온 것은 상식이고 상식은 결국 육의 범위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상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지옥 가는 겁니다. 언약의 혜택을 못 받아요. 여러분, 혼자 도 닦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나와 만나야 될 어떤 짝을 통해서 나의 분수를 알고 나의 정체가 밝혀져야 돼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생각해 보세요. 구원이란 어떻게 받는가? 내가 예수를 믿는 것. 이게 구원되는 겁니까? 내가 예수 믿는 것, 그게 1번이고요. 2번은, 언약사건에 의해서 믿어지는 것. 어느 쪽이냐는 말이지요.

보통 정답은 두 번째잖아요. 내가 믿는 것을 터치고, 내가 믿는 것은 상식이고.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기 계세요.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제가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저를 구원하시겠지요? 구원해주겠지요? 이렇게 정성이 많으니까,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니까 저를 내치지는 않겠지요?”라고 하는 것이 육에서 나온 인간들의 일반상식이에요.

그렇게 되면 문제도 내가 구성하고, 답도 얼추 나에게 예상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진짜 하나님이 와버렸는데 인간에게 쫓겨났거든요. 추방되었다 그 말이지요. 짓밟혔어요. 이것은 뭘 의미합니까? 문제구성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누구야? 그런 식으로 문제를 구성한 것이 누구야?”

누구긴요, 마귀가 그렇게 했지요. 네 정성만 다하고,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십일조 내고, 바치고, 봉사하고, 선교하면 하나님께서 네기도 응답해 주신다. 마귀가 교회에 그런 거짓정보를 다 날린 거예요. 찌라시도 그런 찌라시가 없어요. 2천년 교회역사가 그런 식으로 가르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말지.’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그런 상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것은 나도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그 말이지요. 내가 잘해서 천당하고, 내가 열심히 해서 복 받고,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다. 성경에서 그런 구절 찾아내면 수백개 찾아낼 수 있어요.

믿으라. 믿으면 의인된다. 전부 다 내가 하는 걸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바로 구약이스라엘의 실패에요. 대표적으로 실패한 거예요. 인간은 어떤 말씀도 못 지킨다는 것, 그걸 이스라엘이 왕창 망함으로 말미암아, 아, 인간이 문자대로 지키겠다는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결국 그 한계의 끝은 구원 못 받음으로 마감되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 뒤의 사도바울의 편지도 마찬가지에요. 어느 누구도 잘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교회 오면 목사님들이 술 끊고 담배 끊으라고 하지요. 그러면 술 끊었다 칩시다. 천당 갑니까? 술은 끊었는데 천당은 못가요. 담배는 끊었는데 천국은 못가요. 그 목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이미 목사가 그런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에게 있어요.

나는 과하게 술을 먹는 것이 문제고 음주운전이 좀 문제인데 원판은 괜찮으니까 괜찮은 원판이 되기 위해서 어떤 점을 수리하고 고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문제 자체를 본인이 이미 결정했다는 것이 문제에요. 십자가 피가 주께서 주신 최후의 해답이라면 그 피 앞에서 내가 어떻게 고쳐도 그 고친 것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감을 잡아야지요.

아하,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받는구나. 그리고 그 대신 죽으심을 믿는다는 것도, 대신 죽으심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 죽으심이, 그분이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그분이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그걸 언약사건이라 하는데, 그 언약사건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내가 다 이루었다, 가 담겨있어요.

더 빼거나 보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선, 거룩, 의, 예수님이 다 이뤘다는 거예요. 너희에게 필요한 거룩함과 경건함과 선함과 의는 이미 내가 다 대신해서 이뤘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해답에 준해서 너 자신을 새롭게 문제를 구성해보면 돼요.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인간이구나, 라고 구성이 된다면 해답의 효과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제기 때문에 그 문제는 해답과 짝을 이루어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말이나 시아버지, 그리고 산파간호사, 이 사람들은 본인들이 주어진 사태에 대해서 그냥 감당을 할 뿐이에요.

애는 나오고 있지요. 조산원이나 누구 도와줘야 되지요. 둘이 나오니 서열은 정해야 되니까 먼저 나온 애한테 붉은 끈으로 표시해서 너는 맏이다. 그리고 너는 둘째다. 뭔가 해요. 부지런히 주어진 사태에 대해서 방치하지 않고 뭔가를 열심히 한다고요.

하면서도 뭘 느끼느냐 하면, 이렇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그냥 그걸로 받고 싶은데, 그 주어진 일에 대해서 순하게 인정하고 싶은데, 그 주어진 일이 그 사태를 쳐다보고 있는 나 자신의 선입관을 전복시켜요. 바꿔주는 거예요.

만약에 젊을 때 교회 나와서 십자가 믿으라고 하면, 십자가 믿자, 여자 목걸이가 십자가고, 차 안에도 십자가, 교회지붕에도 십자가, 그 십자가 믿지. 아무 생각 없이 믿지, 믿지, 하다가 나중에 좀 더 커서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네가 아느냐, 는 내면의 음성이 들릴 때 ‘아, 나는 십자가를 이용했구나. 내가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내가 왜 몰랐지? 나 따로 십자가 따로였구나.’

이제는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극받고, 교정 받고, 수정이 감행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신앙생활은 혼자 못한다. 혼자 할 수 없다. 신앙생활은 짝을 이뤄야 되는데 그 짝은 쌍둥이부터 거꾸로 가는 거예요.

쌍둥이는 누가 낳았다? 다말이 낳았다. 누가 며느리 다말을 임신케 했는가? 시아버지가 임신케 했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를 만나서 천당 가야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약사건, 구원사건이지요, 구원사건에 우리가 휘말리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느냐를 위하여 우리가 거기에 끌림 받은 거예요.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죄인역할 하라고 주님 십자가 그 작업에 우리가 휘말린 거예요. 죄인역할만 하시면 되는 거예요. 잘난 체 안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일은 언약사건을 통해서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면 이겁니다. 해체당하고 분해당하는 거예요. 다말이라는 여자는 그냥 여자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임신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임신의 본체는 누구냐? 다말이라는 여성의 몸이 되고, 거기서 언약의 실내용은, 마치 밤송이 안에 까보면 쌍둥이 밤, 밤송이가 두 개 나올 수가 있잖아요, 몸은 다말이 제공하고 거기서 언약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쌍둥이가 나와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다말은 껍데기만 될 뿐이에요.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우리가 남하고 왜 싸웁니까? 우리가 껍데기인 것을 모르고 알맹이까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는 껍데기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알맹이는 내가 예상 못한, 하나님이 찾아왔기 때문에 기이하고 이질적인 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나는 쌍둥이를 원하지 않았는데 쌍둥이 나왔지요. 쌍둥이가 나와도 좋다. 그러면 두 애를 가지지. 그런데 맏이가 둘째가 되고 둘째가 첫째가 되고. 그 기이한 현상이 이 껍데기 나마저 뭔가 언약사건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감 잡게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내 구원의 주인공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다말이라 합시다. 저와 여러분이 다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왜 유다 집에 시집을 가서 그렇게 안달 났고, 애를 썼고, 시아버지 온다는 소식 듣고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왜 그렇게 내가 나댔고 왜 그렇게 설치느냐?

그것은, 시아버지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된 자식을 자기가 기어이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아버지는 남자가 돼요. 남자에 대해서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제대로 일을 안 하니까 자기가 나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다말이라는 며느리가 느끼는 것은 이 세상의 폭력성이에요.

여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폭력으로 느끼는 존재입니다. 남자는 그걸 몰라요. 모든 것이 폭력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여자는 약해요. 약한 정도가 아니고 모든 일어나는 일을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일로, 약하기 때문에 나보다 강한 자가 나를 깨부수는 일
로 간주하는 겁니다.

시아버지의 고집이 폭력성 있게 다말에게 다가왔고 그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폭력의 폭풍에 희생물로 창녀가 되기로 맘먹었고, 그 시아버지의 폭력성에 자신을 희생물로 아낌없이 제공해서 기어이 시아버지의 수원대로 이 집안에 복음의 자식, 언약의 자식을 낳고자 한 겁니다.

이 사실은,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폭력 있는 자의 세계 속에, 폭력 있는 자가 주인이 된다는 이런 상식이 통하는 세계에서, 그게 맏이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세상에서 터치고 나오는, 뒤에 예상도 못하도록 맏이 될 수도 없는 자가 소위 장자가 될 자를 터치고 나오는 이것이 해답이거든요.

이 해답을 신호로 해서 세상을 거꾸로 이 해답에 맞추어서 재배치하고 재정리를 해보는 거예요. 정리를 하게 되면 갈라디아서 4장 26, 27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쌍둥이를 낳았을 때 그 두 사람의 대표자는 맏이, 홍사, 붉은 끈을 가진 사람이 대표가 된다는 것은 쌍둥이를 낳는 중에 산파간호사가 보고 있을 때 당연지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나 우리 뜻이나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이 빠져나올 수 없는 동질성이라는 것, 네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같다, 우리 생각이 같으니 하늘의 뜻도 같을 것이라는 그 동질성속에 이질성을 갖고 있는 사건을 유발시켜요. 그게 바로 언약사건입니다.

십자가, 여러분 잘 아시지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그러나 아무리 십자가 믿어도 그 십자가는 내가 나는 십자가와 진짜 십자가가 동질성이 돼버려요. 시시해져요. 식상해요. 별로 새롭지도 않아요. 십자가, 십자가, 찬송가도 부르면서 한두 번 이야기했습니까?

그런데 진짜 십자가가 왔을 때는 평생 내가 나답다고, 내가 옳다고, 이게 진리라고,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자부했던 그걸 완전히 다 작살내고 분해하고 해체시키는 그 사건의 유발,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이질성이에요. 동질성속에 자리 잡는 이질성의 침투고 공격입니다.

지난 시간에, 시아버지가 며느리보고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그 대목을 보게 되면, 창세기 38장 26절에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며느리야, 네가 나보다 옳다. 이런 이야기였어요.

평생을 두고 유다 시아버지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인 남자로서의 할 일이고. 남자로서는 그래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남자의 어떠함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하고 언약을 맺은 언약당사자로서 취할 태도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저 이방 여인,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 여인 며느리가 뭘 알겠느냐는 말이지요. 필리핀에서 시집온 것이 뭘 알겠느냐 하는 식과 똑같은 거예요. 저게 뭘 알겠느냐? 필리핀 사람들 들으면 기분 나쁘겠습니다만. 저 철딱서니 없는 것이 뭘 알겠느냐? 하나님을 알아도 내가 알지 저게 뭘 알겠어?

그런데 그저 아버지 밑에서 복종해야 될 여자에게 유다는 아주 주저 없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질성을 깨닫고, 나보다 네가 옳다. 나보다 창녀 짓을 한 네가 옳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집안, 거룩한 집안으로 지키려고 하는 나보다도 창녀가 되어서 나와 관계를 맺은 네가 정말 옳은 행동을 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라는 해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문제재구성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닌 사람은 어릴 때부터 십자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야기 좀 하면, 복음 나도 안다는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이 다 해요. 그러면서도 자기 잘난 맛에, 나는 그릇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나는 항상 상식에 맞는 행동을 했고, 그리고 이런 나의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점수를 줬고 인정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의 평생을 구축한 이 대단하게 훌륭한 나의 인생관이 그야말로 쓸데없고 쓰레기 같은, 치매환자가 집구석에 온 동네 쓰레기란 쓰레기는 다 모아놓은 것처럼 온 동네 쓰레기는 내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래놓고도 자기가 어딜 가? 구원을 받아요? 천국을 가요?

뒤집어짐이 없어요, 뒤집어짐이. 왜 뒤집어짐이 없을까요?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보다 복음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훌륭하기 위해서 복음 준 것이 아닙니다. 또 복음을 안다고 해서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복음 알고 만만한 사람들과 상대했습니다. 못난 사람들과 상대했고, 시시한 사람들과 상대했어요. 내 힘으로도 이기는 사람들. 내 말 빨에 못 따라오는 사람들만 우리는 상대해서, ‘주여, 이정도 하면 해답 알았지요?’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해답을 원치 않습니다. 구원은 언약사건으로, 다시 말해서 주님이 쥐고 있지 정보를 꿰뚫고 있는 내가 내 구원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하라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바르게 산다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 손에 붉은 끈이 있다고 끝까지 나는 맏이라고 우기는 고집 같은 거예요.

두 번째 태어난 아이가 나를 터치고 간다는 말은 나를 밟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밟을 자를 염두에 두고 뒤차로 오시는 겁니다. 누구도 주님 앞에 안 밟힐 사람 아무도 없다고. 그러면 여러분은 밟혔습니까? 저는 밟혔습니까?

밟히는 재미, 주님한테 꼬박꼬박 매일같이 밟히는 재미로 살아야 돼요. 이게 뭐냐? 꼬박꼬박 내 예상대로 안돌아가는 하루하루를 맞이하는 재미로 살아야 돼요. 재미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 주제파악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유다는 자식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맏이 자식이 없는 것은 자식이 없는 거거든요. “맏이가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언약은 진행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어쨌든 훌륭한 아들 하나 주옵소서. 장자를 하나 주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일 거예요.

그것 때문에 시아버지 유다도 며느리 다말도 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거기에 쌍둥이를 낳는다는 예상은 전혀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쌍둥이를 줬어요. 쌍둥이를 주니까 또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 하나를 주는데 또 하나를 주는 것은 스페어타이어처럼 주는 모양이다. 하나 혹시 다치거든 남아 있는 하나로 대치하라고.’

혹시 있을 불상사를 대비해서 주는 것으로 알고, 그래도 먼저 난 자가 장자니까 후딱 붉은 끈을 묶었지요. 그것까지는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두 번째가 앞을 제치고 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한 거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제치고 나오는가?

그냥 베레스가 먼저 나오면 안 됩니까? 그래서 아무 말썽 없이 나와도 되는데 꼭 순서상 먼저 나오는 것이 해놓고 둘째가 앞질러 가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신약성경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거예요. 이거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드릴까요?

천국 가는 사람이 지옥가고 지옥 가는 사람이 천국 간다는 그 말입니다. 이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 이야기에요.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믿게 해서 먼저 천국 간다고 자리 잡은 사람들 다 쫓아내고 그 빈자리에 천국 못 간다고 여겼던 이방인을 그 자리에 채운다, 라고 마태복음 8장에서 이야기해요. 아브라함자손은 쫓겨나고 이를 갊이 있으리라, 되어 있어요.

원통 분통한 거예요. 그 자리에 예수 믿는 이방인이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이스라엘 택하지 말고 이방인을 택하지 왜 그렇게 했느냐? 이방인을 택해도 이번에는 이방인이 못가고 이스라엘이 들어갈 거예요. 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 구원받는다 생각하지 말고 구원 안 될 네가 어떻게 구원이 되었느냐, 그 과정에 보면 너 말고 너를 위해서 다른 분이 개입한 그 다른 분의 공로를 네가 생각해야 되고, 그 분의 영광만을 네가 돌려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그래서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겁니다. 교회 나왔다. 목사님이, 예수 믿으세요, 해서 예수 믿었다. 나는 이제 천당 간다. 이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교회 나와서 뭘 아는 것이 아니고 실생활에서 내가 알던 인생, 나는 반듯하게 살고자 하는 요구사항, 그게 내가 완전히 쓰레기라는 것으로 바꿔지는 사건을 만나야 돼요. 누굴 만나든지.

내가 아는 것이 나의 구원을 방해했다는 그런 것을 절감해야 됩니다. 내가 복음 안다는 그 복음 아는 것이. 첫째가 첫째 되고자 하는 그 수단에 불과하거든요. 왜냐하면, 나는 아니까, 그리고 저 사람은 모르니까 주께서 나를 통해서 알려줄 것이다. 그런데 뒤차가 와서 나를 밟아버리는데요?

모른다고 여겼던 사람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앞서가던 나를 밟아버리는데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데요? 세리와 창기가 나를 밟아버리는데요?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짓은 안했는데?’ 나쁜 짓 안했다는 그것 때문에 밟히는 거예요.

왜 동질성, 동질성을 왜 자꾸 고집하느냐는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비참함을 우리가 요구한 적 없어요. 제발 내 인생 안 비참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그동안 얼마나 예수님이 주신 그 은혜를 떠밀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아예 떠민 그것이 문제를 재구성해야 되고 그런 기회를 줬잖아요.

십자가가 해답이라. 십자가 앞에서 나는 어느 정도 엉망진창이냐. 그런 문제를 조성해야 될 텐데, 나는 십자가 아는 그만큼 더 고상해지고, 훌륭해지고, 더 착해지고, 십자가 모르는 사람보다 더 거룩하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이런 쓰레기를 밟아버리는 겁니다.

밟아줄 때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사건이 나를 덮쳐서 다말처럼 나를 껍데기로 만들고 그 안에 예수님이라는 알맹이가 들어와서, 그 알맹이가 쌍둥이가 되어서, 너는 이런 육이었는데 영이 너를 밟아서 너는 구원되었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평생 지니고 있어야 언약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세상사람 보고 나무랄 것 없어요.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쓰레기였는데 주님의 십자가 증거 하라고 우리는 죄를 알게 된 사람이 된 거예요. 구원은 주님에 의해서 죄인의 괴수인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천국 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잘난 맛에 살면서 주님을 이용했든, 이용 안 했든, 은근히 우리는 노렸습니다. 나의 동질성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던 우리를 매일 같이 내가 아닌 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