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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38:24-26 / 원초적 기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8:24-26 / 원초적 기억

정인순 2018. 8. 1. 22:36

 음성         동영상

 

 원초적 기억

 

이근호
2018년 8월 1 일          

 

 

본문 말씀: 창세기 38:24-26

(38:24)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 내어 불사르라

(38:25)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식으로 지상에 구체화되느냐 하는 것은 유다 가정을 통해 정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약이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실내용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천력으로 하나님 앞에 책임지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것들을 챙기고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소위 ‘복받은 형편’을 구성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에 대한 안목의 출발점이 수상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좋게 보고 긍정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완전하지는 않기만 선과 악에 관한 지식으로 자신을 훌륭한 존재를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발휘는 필히 악한 것을 구별하여 냉혹하게 정죄하고 판정 내리게 됩니다. 그런 평가를 내릴 정도로 자기는 옳은 정신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건전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유다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 집안에 흠잡을 일은 단호하게 용납하지 않을 자세입니다.

자신이 내리는 ‘옳고’, ‘그름’의 구분은 명확하게 정확하다고 자부합니다. 이런 자기 주관으로 자기 가정도 그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런 유다 가정에 수절하고 있던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고 소식이 들려옵니다. 필히 간음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집안의 수치를 떠나서 하나님의 언약적 복을 훼손시킬 요소라고 유다는 단정합니다.

언약 집안의 강력한 의로움 성질을 단호하게 내세우기 위해서라도 부정한 임신한 며느리 다말에 대한 처벌 또한 강력하게 내리지게 됩니다. 부정한 임신을 한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지의 판결은 “불 살라버려라”입니다. 일말의 동정도 없는 엄중한 심판입니다. 하늘의 복을 받은 특별한 가정의 엄중한 가훈을 유감없이 실천에 옮기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며느리 다말은, 자신의 임신이 이 남자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 남자는 바로 엄중한 판결을 내리는 시아버지였습니다. 다말이 내놓은 끈과 도장과 지팡이의 주인은 바로 시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지상에 구현하려는 언약의 진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을 말하는 자들의 눈에 ‘싫어버린 바’ 된 모습입니다. 너무나도 악하고 비도덕적이라서 엮기기 싫어하는 모습으로 언약이 구현됩니다. 소위 정의로움을 강변하는   자세가 언약 앞에서 역겨운 짓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조심스럽게 사는 것은 그 결과를 얻은 것은 자기 구원에 유리하게 써먹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내가 죽었던 유다는 결코 안 조심스럽게 인생을 산 것이 아닙니다. 함부로 인생을 보내는 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창녀 복장을 여인을 만나는 순간,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명분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됩니다. 만약에 유다가 자기 아내가 죽지 않았다면 딤나에 내려갈 일도 없고 창녀를 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결정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봤자, 그 조심스럽게 살았다는 그 결과로 모아 ‘자기 의’로 뭉쳐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결코 하늘의 언약이 지상에 성취되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은 창세기 3장 이후에, 선과 악에 입각한 태도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그 생활자세가 아닙니다. 인간은 범죄하기 전의 창세기 2장의 심정으로 못 돌아갑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창세기 1장 위치에서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 받는 하나님’입니다. ‘서러움 받고 버림받는 하나님상’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선과 악의 사상에 준해서 ‘망가지는 인생’이기보다는 ‘지키려는 인생’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질 대상체입니다. 언약이 이 지상에 등장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버림받아야 함’을 아는 만이 천국백성이라는 자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망가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기억을 갖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안 엮기려고 합니다. 자기 집안에서, 자기 호적에서 빼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이것입니다. ‘자기 잡아먹은 여자, 아들 잡아먹은 여자’라고 간주하고 유다는 자신의 막내 아들을 다말에게 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치성과 훌륭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집안의 웃음거리가 되고 불길한 요소가 되는 다말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서 외로운 시아버지를 맞이하려 합니다. 언약이란 이런 겁니다. 상대방이 극구 혐오하는 그 일이 바로 그렇게 밀쳐내는 자의 본질이라는 점을 알립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로부터 싫어버림바 됩니다.(사 53:3) 소위 정의로움에 철저하다는 그런 모범적 인간들로부터 사형을 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경우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유다 가정에서 먼저 벌어진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본질을 아는 자리로 건너와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다말이 창녀복장으로 창녀짓을 해야만 하는 그 자리입니다. 구원은 자신이 훌륭하다고 해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훌륭하고 한평생을 참으로 반듯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자로부터 밀침과 버려짐을 당한 그 자리에서 구원이 일어납니다. 구원이 번집니다.

자기 잘남을 버리고 자기 못남의 자리로 건너가야 합니다. 십자가 속으로 삶의 터전을 이동시켜야 합니다. 자기 잘남의 자리를 따로 갖고 있으면 아니됩니다. 자신이 무시하고 욕하고 비웃은 그 자리와 현 자신의 자리를 바꿔야 합니다.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는 겁니다.  

바로 사람에게 버림받은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가 이런 겁니다. 창조 전에 계획했던 그 원래의 자리에서 주어지는 공동의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즉 참된 성도는 죽기 위해 태어난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기 위한 출생인 것을 기억하는 그 기억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럽다고 무시한 그 심성이 곧 우리 자신의 심성인 것을 자인하고 그것을 까발려주시는 주님의 조치에 탐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9강-창 38장 24-26절(원초적 기억)

1808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8장 24-26절입니다. 구약성경 60페이지입니다.

창 38:24-26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며느리를 수절하게 하려고 친정에 보냈는데 소문으로 듣기에 자기 며느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시아버지 유다에게 들려왔습니다. 유다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 쉽게 말해서 천국가야 될 사람입니다. 천국 가야될 가정에 혼자 사는 며느리가 임신을 했으니까 이것은 집안우세도 이런 우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그리고 이 범죄한 하나님 믿는 이 가정에 이렇게 바람피워서 임신까지 한 며느리를 그냥 놔두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고 단호하게 그런 며느리를 처단해서 자신의 가정을 하나님께 구원받는 거룩한 가정으로 세우기 위해서 유다는 격분을 하면서 그 며느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보고, 네가 남편이 없음에도 임신을 했으니까 이것은 필연코 간음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여자를 불태워 죽여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그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이야기하기를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 물건을 가진 그 남자로 인하여 동침해서 임신을 했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시아버지는 재판관이고 죄지은 여인은 피고가 되지요. 시아버지가 그 물건의 남자가 누구냐 보니까 25절에 보니까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며느리와 동침해서 임신케 했던 그 남자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시아버지 입장에서는 그 남자하고 그 며느리하고 둘 다를 불살라 버려야 돼요. 그래서 그 물건을 보니까 그 물건은 누구 물건이냐 하면 시아버지 본인의 물건이에요. 그렇다면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창세기 38장에 보면 그 전에 시아버지 유다가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마음이 괴로워서 딤나로 내려가다가 거기서 창녀를 하나 만났어요.

창녀를 만나서 동침을 했습니다. 그럴 때 그 창녀가 자기 몸을 샀던 그 남자한테 값을 치르라 하니까 염소새끼를 주겠다, 했는데 지금당장 염소새끼가 없으니까 나중에 염소새끼를 반드시 가져온다는 약속물을 나에게 주세요, 해서 받아놓은 것이 도장과 끈과 그 사람의 지팡이를 받아놓은 겁니다.

그 때 유다는 그 창녀의 복장을 한 그 여자가 자기 며느리인줄 모르고 그냥 그 동네에서 영업하는 사창가의 창녀로 알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염소새끼를 값으로 들고 가서 창녀를 찾으니까, 우리 동네는 창녀가 아예 없는데요, 하는 거예요.

“있는데?” “없어요.” ‘이상하다.’라고 한 뒤에 자기 며느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서, “우리 집안 우세다. 용서 못한다. 시아버지로서 용서 못하다. 불사르라.” 하고 명령했는데 며느리가, “나는 이 남자와 붙어서 이렇게 임신했습니다.” “그 남자가 누군데?” “당신이잖아요.”

이 이야기가 거룩한 성경에 왜 나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저것은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경험과 교체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천국으로 건너갈 수가 없어요. 저 인간은 내가 보기에 너무 나빠,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말도 안 돼, 저것은 돌로 쳐죽어야 돼, 라는 사람이 본인이 되고 내가 욕하는 사람에게 내가 건너가서 그 사람과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천국에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되 구원할 때 하늘에서 두레박처럼 내려오는 것이 있어요. 그 내려오는 것을 가지고 약속이라 하고 그것을 언약이라, 언약, 약속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두레박이 오면 올라타면 되고 약속이라면 믿으면 되는데 하나님의 천국가기 위한 약속은 내가 그걸 인지합니다, 믿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올라타라는 말이지요.

내려오는 그 약속의 내용물이 차마 이 깨끗하고 잘나고 훌륭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가 나의 고상함을 지키고, 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저리가! 더러운 너 같은 것은 우리 집안의 사람이 아니야. 죽여 버리겠어.”라고 내칠만한 그 내용이 하늘의 두레박에서 내려온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이 누구를 내칠 때는, 나는 착하고 너는 못났기 때문에 내치는 거예요. 나는 의롭고 너는 지저분하기 때문에 내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며느리가 그렇게 지저분한 창녀, 물론 한번이지만 창녀 복장을 하고 창녀의 짓을 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시아버지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천국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며느리가 그렇게 했었어야 했다 그 말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는 우리 본인을 아주 훌륭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간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냐? 우리의 구세주는 어떤 메시아냐 하면, 내가 고상한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완벽하게 고상하고, 내가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이상으로 더 조심스럽게 살아가서 착함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그런 분이 메시아로 오게 되면, 나는 좋은 분과 나쁜 분을 가릴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좋은 분인 줄을 믿습니다, 이렇게 해서 좋은 관계를 가지고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 속마음이에요.

다시 말해서 나를 더욱더 지금보다 더 지저분한 인간으로 고발하는 사람과 엮이기 싫은 거예요. 창녀하고 하룻밤 지내는 것은 좋지만 그 창녀하고 앞으로 계속해서 좋은 우정관계를 나눈다든지 친밀하게 지낸다는 것은 우리 정서에 안 맞는 거예요. 때려죽이고 싶지요. 특히 자기 집안의 며느리가 그렇다면 그것은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바람을 피워? 죽여 버리련다.”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며느리가 창녀 짓을 해서 시아버지를 만나는 이 대목이 왜 성경에 나와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것을 구원의 기본모델로 삼으시는 그 이유가 뭐냐?

유다의 태도가 뭐냐 하면,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게 되면 그 조심스럽게, 조심에 조심을 더하고, 자기관리에 관리를 더하는 그것이 나중에 모아져서 천국 가는데 상당히 보탬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거예요. 내가 괜찮다는 것을 지켜서, 지킨 것을 모아서 이것 하나님 앞에 들이밀면 하나님께서 “참 네가 주의깊게 살았구나. 네가 함부로 안 살았구나. 그렇다면 너는 천국 합격이야.” 이런 하나님을 기대하고 유다는 조심스럽게 살았던 겁니다.

하지만 그 조심스럽게 산 유다가 왜 철저하게 조심스럽지 못하고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창녀를 만나서 창녀하고 동침을 했느냐? 이것은 유다가 뭘 모르느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조심스럽게 살아도 망가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그는 몰랐던 겁니다.

창녀 짓까지 하는 그 며느리가, 자기 시아버지 유다가 구원받기 위해서 건너가야 될 그 다리, 매개라 하는데, 또는 중보, 그 매개의 자리를 그 며느리가 창녀 짓을 해서 시아버지가 본래 갖춰야 될 진짜 인간이 뭔가를 창녀 짓을 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 생각은 이래요. 시아버지가 그렇게 창녀를 찾지 않았더라면 며느리가 임신을 안했을 것인데, 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사람이 조심한다고 해서 조심스러운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며느리가 임신을 했을 때 우리가 제 3자나 다른 사람이 볼 때 유다가 창녀를 보더라도 그냥 지나갔으면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하는데 유다는 본인 마음도 본인이 정한 게 아니에요.

그저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유다가 딤나로 내려간 것도 아내가 죽었으니까 내려갔는데 아내가 안 죽었으면 안내려갔을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데 아내가 죽고 안 죽고는 유다가 지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네 인생은 내가 마음먹는다고 진행되는 인생이 아니에요. 그리고 뭔 일을 저질러놓고 ‘조심할 걸’ 하는데 인간은 조심한다고 해서 더 나은 결과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유다에게 가르치는 것은 뭐냐 하면, 너라는 인간은 결코 너 나은 결과라는 것은 애초부터 생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 괜찮은 인생은, 그것은 네가 있으니까 네가 그냥 상상할 뿐이지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은 인생이라 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는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망가졌어요. 처음부터 망가졌다는 것을 아예 망가진 채로 나타내주는 것이 다말이라는 이 며느리입니다.

다말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시아버지가 자기가 잃어버렸던 자기의 본래모습을 찾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어요. 그 본래의 모습은 뭐냐? 바로 창녀 짓을 하고 있는 그 여인을 임신시킨 그 요소가 시아버지 속에 이미 들어있었던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다. 따라서 거룩한 분이 우리에게 어떤 법을 준다면 그것은 거룩한 법일 것이다. 따라서 그 거룩한 법은 내가 따내기 위한, 내가 거룩하고자 하는 그 거룩의 목표와 하나님이 주신 거룩의 목표가 아마 같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다는 구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 괜찮은 인간, 훌륭한 인간, 남에게 욕 얻어먹지 않는 인간, 자기 집안은 우수한 집안, 그런 것을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런 집안에 다말이라는 이방여자가 들어왔는데 이 여자가 어떤가 하면, 남편 잡아먹는 여자에요. 자식 잡아먹는 여자에요.

이 여자 가만 두었다가는 집안 거덜 나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재수 없는 여자 들어와서 온 집안 다 귀신 만들고 유령 만들어 놨으니까 적어도 이 가정은 하나님의 거룩한 가정이라면 하나님의 거룩답게 내가 지켜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세 번째 아들 셀라하고는 며느리와 떼어놓기 위해서 너는 친정으로 가라, 사실은 퇴출이지요, 그렇게 친정으로 가라고 한 겁니다. ‘아이고, 자칫 잘못했으면 너까지 죽었다’ 하고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적적해서 딤나로 갔다가 창녀를 보니까 마음의 원욕이 생겨서 동침을 한 거예요. 그러니 이런 일련의 문제하고,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가정, 하나님을 모시는 가정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구원되지 못할 인간의 전형적인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크게 잘못된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조심스럽게 산다는 것, 조심스럽게 살아서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나의 의로 간주한다는 것은 조심스럽게 살아야 될 내가 누구냐 하는 그 기억에서 조심스럽게 살았던 것만 소복이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기껏 해봐야 이미 인간이 범죄 한 창세기 3장의,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본성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본래 만든 인간은 창세기 3장이 아니고 창세기 2장이라고 이번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창세기 2장으로 건너가야 되는데 창세기 2장에서는 거저주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나 창세기 2장 간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가야 돼요. 창세기 2장에서 아예 창세기 1장 이전의, 창조 전의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가졌느냐, 그 기억에 맞춰야 돼요. 그 통합된 기억이 공유되어야 되고 합류되어야 되는 겁니다.

창세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는 이런 인간만 천국 가는 인간으로 삼겠다, 하고 이미 정해놓은 뜻이 있습니다.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그 뜻이 창세기 3장의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창세기 1장의 그 이미지, 그 생각이 창세기 3장 이후의 범죄 한 가운데 만날 때는 누구나 싫어하는 창녀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모든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된 모습이에요. 격분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집 며느리가 나 없는 사이에 어떤 남자하고 바람나서 임신을 했다니 이것은 구원받는 집안에서는 도저히……,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자식 둘 잡아먹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집안을 완전히 바람난 며느리가 있는 집안이라고 아주 욕 얻어먹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고, 그렇게 격분해서 자기며느리를 불사르도록 내주잖아요. 이런 여자는 없애버려라.

더 보탠다면, “누구야? 이런 없애버릴 여자와 동침한 인간은? 그것도 같이 없애버려라.” 며느리가 “당신인데? 니야 니. 니 잘났어? 니 대단한 거야? 뭐 조심스럽게 살았다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바르게 살만큼 최선을 다한다고?” 그게 바로 구원받지 못할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지옥 갈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착실하게 살고, 조심스럽게 사는 그것을 집합해 보세요. 그게 자기의가 됩니다. 그 자기 의가 결국 낳는 결과가 뭘까요? 우리 집안에서는 너 같은 여자는 용납 못한다, 이런 손가락질.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 하신 말씀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기백성을 건지러 왔어요. 건질 때 그 때 간통한 여자를 돌로 치러 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거룩,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바르게 살고, 평생 동안 남에게 욕 얻어먹을 짓을 안 한 거예요.

자기 일에 철저하게 책임지고, 자기인생이 자신만만하고 내세울만한 하다고 자부하는 그 인간들이 이제는 곧 천국 가리라는 자신감으로 자기보다 덜 떨어진, 이것은 인간도 아니야, 하는 여자를 질질 끌고 와가지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할 그 때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천국도 모르고, 천국 가는 길도 모르고, 천국 가는 방식도 모르는 거예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렇게 된 겁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 말은, 돌 던지고 난 뒤에 너도 다른 사람에게 네가 돌 던진 저 사람 못지않게 너도 돌 맞을 짓을 한 것을 내가 안다는 거예요. 주님이 알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던지지 왜 안 던졌을까요? 돌 내려놓고 다 갔습니다. 다 가버렸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뭔가 자기에게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들켰으면 이게 구원의 시작이거든요. 이런 문제가 있으면, 나 이거밖에 안됩니다, 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얼마나 좋아. 이건 구원의 찬스를 받은 거잖아요.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지요. 주님이 의사라면 병든 사람 나오세요, 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식당을 차렸다면, 여기 배고픈 사람 오세요, 라고 식당을 차린 거예요. 나한테 결핍이 있고 이 결핍은 내가 스스로 조심스럽게 산다고 해서 고쳐질 문제가 아닌 것을 아는 사람, 근본적인 자기의 기억, 원초적 기억은 뭐냐 하면, 이래도 나는 인간 안 되고 저래도 나는 인간 안 되는 것을 자기의 가장 밑바닥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람.

유다는 그게 안돼요. 유다가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며느리를 보낸 거예요. 며느리를 보내서 돌로 쳐야 될 그 여자와 돌로 쳐야 될 그 남자가 바로 엮이게 만든 겁니다. 처음에 그 유다가 자기 며느리를 칠 때는요, 너 같은 며느리와 내가 엮인 것 자체가 내 일생에 실수다, 그렇게 나온 거예요. ‘으이그, 내 팔자야. 저런 여자와 내 인생이 어떻게 엮였느냐.’ 하거든요.

여러분, 지금 누구하고 엮이고 싶습니까? 나보다 훌륭하고, 점잖고, 방에서 잠을 같이 자도 고함 안 지르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성질 죽이고, 성질 또 죽이고, 사람 너무 괜찮다, 언제 저런 레벨까지 거룩, 거룩하게 살아가나? 우리는 그 사람과 엮여가지고 ……, 왜냐하면, 사람이 착하면 뭔가 복이 올 걸, 반대로 나쁜 짓을 하면 저주가 올 걸, 이런 창세기 3장, 선악과는 마귀의 마음이거든요.

마귀의 마음은 뭐냐? 착한 일 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는 것. 갓바위 불교가 그 사상 아닙니까? 그런 사상으로 어쨌든 간에 조심조심 살아서 나쁜 것은 멀리하고 착함에 따라 붙이려는 이것이 불교뿐만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유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천국 가기로 확정된 자에요. 작정된 자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요. 천하에 옳고 그름을 나보다 더 완벽하고 깔끔하게 알고 그것을 행동에,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런 식이에요.

나는 어느 정도로 거룩을 표방하느냐 하면, 심지어 내 며느리라 할지라도, 내 며느리가 바람 피웠다면 나는 사정없이, 그것도 그냥 내쫓는 것이 아니라 불살라 버려라, 할 그 정도로 오직 정의맨,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그렇게 자부하는 거예요.

며느리가, “정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나하고 붙었잖아. 왜 이래?” “누구야? 어떤 나쁜 남자가 너를 꾀어서 이렇게 임신까지 시켰어? 그 놈 나와 보라고 해.” 하니까 “이게 그놈 겁니다. 이 끈과 도장과 지팡이가 그 놈 겁니다. 내가 치료 받아야 될 사람이 아니고 당신이 치료받아야 돼, 당신이!”

당신이 치료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로 창녀로 변장하고 당신에게 창녀 짓을 하게 하신 거예요. 전부 다 역겨워 못하는 짓을, 아무도 안하려고 하는 짓을, 너무나 나쁜 짓이라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짓이라는 그 짓을 언약을 위하여 다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창녀 짓을 했습니다. 시아버지 사이에 임신까지 했어요.

다말은 자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통해서 구현되고 적용되고 효과를 드러내는 그 일에 대해서 자기 것을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시아버지와 달라요.

시아버지는 자기자존심 챙기고, 자기가 거룩한 것 뽐내고, 자기가 이뤄놓은 그 집안 지키고, 하나님 쳐다보면서, ‘하나님, 내가 이정도 하면 바르게 살고 참 조심스럽게 살지요, 그렇지요?’라고 자기에 대한 연민과 자기배려와 자기찬양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기에 비해서 며느리, 진짜 언약대로 사는 사람과 얼마나 대조적이고 얼마나 극대극으로 반대입니까? 반대로 갔거든요. 바로 이 다말에게 일어난 언약적인 이 작용은 나중에, 미래에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성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이사야 53장에 예언한대로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두고 저주받을 사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판정을 내려버렸어요.

저주받을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이 바로 저주받을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저주받을 사람으로 손가락질 당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정해졌어요. 예수님만 하나님편이고 나머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은 저쪽 지옥 편에 서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주실 때는, 정말 지옥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매개로, 다리로 해서, 다리, 브릿지, 다리로 해서 건너오지 아니하면 주님나라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건너오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님이 좋아요, 이렇게 건너오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오히려, 오늘 본문의 다말처럼 주님이 오히려 다가갑니다. 다가가게 되면 구원받을 인간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한 그 예수님의 성도를 보고 도리어 격분해요. ‘이게 어디서 행색도 더럽고 말도 함부로 하는 게 어디 나한테 엮이려고? 내가 너한테 엮이면 내 인생의 실수야.’라고 하지만 주님께서 그 여인을 통해서, 내가 뭔가 나에 대해서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이 착각을 품고 천국을 가다니 말도 안 되는, 평생을 통해서 오류를 낳는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좋은 사람만 사귀고, 착한 사람만 사귀고, 성질 좋은 사람만 사귀고, 성경공부 많이 한 사람 사귀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사람만 사귀면 자기 구원에 유리합니까? 어드벤티지를 얻는 거예요? 그게 망하는 길 아니에요? 그게 스스로 위장하고 변장하는 짓 아닙니까? 자기분수 모르는 짓이거든요.

설교할 때 완벽하게 설교하고, 행동 하나도 남에게 욕 안 얻어먹게 조심스런 행동하는 것,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주님하고 멀어진다는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착하게 살려고 할까요?

자신의 그 기억을, 나는 괜찮다, 라는 그것부터 상상해놓고 나는 괜찮으니까 괜찮은 행동을 해야 돼,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창세전의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만 아는 기억, 창세전에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죽어야 된다는 그 죽음부터, 십자가 죽음부터 출발해야 돼요.

왜 하나님이 죽어야 되는가? 못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주의 피와 살이 찢기지 않으면 천국에 못갈 정도로 못났기 때문에. 하등 잘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 잘난 것이 없다는 표시가 뭐냐? 잘난 것이 없는 표시가 잘난 체 하는 것이 표시가 되는 거예요.

오늘도 우리 곁에 주께서 보내신 많은 성령 받은 사람들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판단해 보기에 자기 인생에 누가 되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스크래치가 나고 흠 잡히는 그런 사람 같으면 엮이기 싫어하는 거예요. ‘내가 너와 엮여서 같이 욕 얻어먹을 그런 바보 같은 손해 보는 짓은 안한다.’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들.

하지만 주께서 그 사람이 택한 백성이라면 자기가 저주하고, 어떻게 세상에 그런 망측한 짓을, 할 때 그 망측한 짓의 원인제공자로서 주께서 본인을 끌어당기면서 그 현장이 바로 십자가 현장이에요. 그렇게 믿는다고, 십자가 피 믿습니다, 피 믿습니다, 하는 그 문장을 누가 못 외워요. 피 믿습니다, 피 믿습니다, 몇 자 되지도 않는 것 누가 못 외워요?

그러나 그 피가 인생을 통해서 현장에서 실제로 투입되게 되면 주님이 저분 통해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내가 착함 속에 빠져가지고 나는 천생 착한 줄 알고, 천생이 그지없이 착한 인물이라고 오해하면서 지옥 갈 뻔 했다는 것을 수시로 깨닫는 사건, 사건이 우리 주변에 밀려옵니다.

내가 마구마구 무시했던 그 분이 주님이 보내신 매개체, 구원의 작대기, 사랑의 작대기가 그런 거예요, 구원의 작대기, 잡아라 그 말이지요. “잡아라. 너 그다지 내가 보기에 훌륭한 사람 아니거든. 이거 잡아! 나하고 엮여. 네가 꼴 보기 싫은 나하고 엮여. 너도 만만치 않아. 너 내 꼴 보기 싫지? 너도 만만치 않거든.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착각은 바로 예수님이 처참하게 죽었다는 것, 그 처참하게 죽은 예수님 앞에서 내가 어느 정도로 정말 지저분하고 쓰레기였으면 저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지고 희생해야 내가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제 처참하게 망가져서 주님께서 욕 얻어먹은 그 욕의 체험과 그 기억이 이제는 우리 속에 들어와야 돼요. 나도 이제는 주저 없이 망가질 수 있는 사람, 이제는 내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훌륭하게 사는 것, 조심스럽게 사는 것을 지켜서 내 것으로 미는 것이 아니라, 그게 망가지는 과정, 내가 나를 분명히 착하다고 여겼던 것이 어떻게 주님께서 내가 천하의 죄인중의 죄인이라는 사실로, 그렇게 다 부서져버린 그 조각조각을 귀한 보석으로, 보물로 주워 모아야 돼요.

나 이렇게 한평생 망가진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잘난 체 하다가 얻어터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아까도 기도할 때 했습니다만, 그렇게 살 때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사소한 일입니다. 사소한 일.

여러분이 사소하지 않고 심각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거든 분명히 여러분이 그만큼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에 거기에 여러분이 자존심을 걸었습니다. 그 자존심을 주께서 짓밟아서 찢을 때 여러분은 주님이 제시한 천국 가는 다리 위에, 선죽교 다리 위에 지금 폼 잡고 가고 있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못 알았습니다.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가 훌륭하다고 착각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사정없이 깨진 자가 천국 가는 자라는 것을 저희들이 다말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