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47강-창 38장 12-19절(다말의 희생)1807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8장 12-19절입니다. 구약성경 59페이지입니다.
창 38:12-19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 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웠음으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다말이 자기 남편 엘이 죽고 난 뒤에, 그리고 시동생 오난도 죽고 난 뒤에 시동생 가운데 셀라만 남아 있는데 시아버지가 셀라를 다말에게 줄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친정에 가라고 다말을 내보냈습니다. 약속은 했지요. 나중에 셀라가 장성하게 되면 남편 삼게 해준다고 약속은 했지만 사실은 다말을 자기 집에서 그냥 나가라고 한 것은 자기 아들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려보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시기만 넘어가려고,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이 자기 막내아들마저 죽이기 싫어서, 다말은 이방여자니까 그냥 내쫓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2절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그 딸이 데려온 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죽고 난 뒤에 위로를 받은 후에 친구하고 딤나에 올라갔는데 딤나에는 유다의 양털을 깎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며느리 다말이 변장을 하고 창녀처럼 길가에 있었습니다. 창녀처럼 길가에 있으니까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겼어요. 창녀로 여겼으면 창녀로 여기고 그냥 지나가면 되지 ‘동침하자’ 하는 식으로 할 때 그냥 손님 하나 받으면 될 것을 기어이 동침의 당사자임을 증명하는 증표를 받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염소새끼를 반드시 챙기려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유다가 관계 갖고 나서 염소새끼는 안줄까 싶어 약조를 단단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 그 세 가지를 달라고 해서 나중에 염소새끼하고 바꿔치기 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 유다는 모르지요. 다말과 이것을 읽는 사람은 다말이 의도적으로 시아버지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꼭 이렇게 해야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지금 시아버지 유다를 탓하는 것이 아니고 며느리가 좀 별나다는 생각, 시댁에 뭔가 노리고 있다는 감을 받습니다.
집요하다 할까요? 유다는, 시아버지 입장에서는 대충 며느리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고 떨어지게 하려고 했는데 다말은 되게 뭔가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집착을 하면서 결국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을 해서 잉태해서 자식까지 낳게 되는데 왜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의 언약계통에 있는 야곱가문, 야곱의 족보에 삽입되는지, 야곱언약,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이 일이 왜 중요한 점을 차지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얼른 와 닿지가 않지요.
간단하고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다말입장은 어떤 입장이냐 하면, 다말이 시가에서 남편 동생하고 동침해서 자식을 낳겠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시동생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아들을 낳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식은 누구 자식이냐 하면, 죽은 남편의 자식이 돼요.
남편은 이미 죽었지만 그 죽은 남편의 자식을 자기가 키우고 있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뜻이 작렬하고 적용되고 있는 이 가정에서 죽은 남편이 비록 하나님의 처벌에 의해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남편을 용서하셔서 남편의 핏줄을 계속 축복으로 이어준다는 보증을, 그러한 확증을 이 아내가 확보하게 되는 겁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아내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내가 언약가정의 아내로서 족보에 들어 있으려면 죽은 남편을 살려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창세기부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모든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져서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듯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없는데서 있는 것은 가능한데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되돌릴 수 있는 솜씨가 하나님에게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미 발생된 것을 하나님께서 없앨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예수님 중심으로 영광 돌리기 위해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면 비록 만들어진 그것이 하자가 있고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담겨 있는 이상은 그 있음을 없음으로 완전히 환원시킬 수는 없어요. 무효화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고 난 뒤에도 무덤에서 다시 예수님이 불러내지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냐 하는데 그것은 있음을 없음으로, 창조를 무로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배후에 뭐가 먼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있어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약속, 그것을 이 지상에 오게 되면 언약이라고 하고, 지상에 오기 전에는 그것을 약속이라 합니다. 약속이 구체화된 것이 언약이에요.
그리고 그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언약을 던져놓고 그 언약을 완성시키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 외 다른 하나님은 다 우상이고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모든 있음이 늙으면 흙이 되고 죽으면 없어지잖아, 하는데 그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슨 용도로 쓰이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용도로 활용이 되는 겁니다.
그 사실을 다른 가정 말고 유다가정을 통해서 보여줘요. 큰 아들 엘이 자식도 없이 죽었습니다. 자식도 없이 죽었다. 여기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세상에 태어났다가 죄지어서 죽었구나. 네 인생 끝났다. 엉망이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을 죽이더라도 그 죽는 취지가 뭐냐? 언약을 언약되게 드러내기 위해서 죽이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인간 죽이고 그 빈자리에 언약 등장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원칙을 적용시키는 겁니다. 엘이 죽었을 때 쉽게 엘이 하나님께 악을 행해서 죽었다고 단순하게 보지 마시고 죽을 때에도 그 악이라 하는 것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악이냐가 그 다음에 하나님이 주신 조치 내에서, 그 죽는 이유에 대해서 나와야 죽을 때 죽더라도 언약대로 내막은 펼쳐질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갖고 있는, 언약의 성취역할을 해야 될 이 야곱의 가정에서 어떤 아들이 악을 저질러서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죽었다면 죽고 끝,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시형제결혼법’이라는 것이 가동되도록, 거기에 투입되도록 한다는 것은 그 ‘시형제결혼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 인간이 왜 죽었으며 그리고 비록 악을 저지르고 죽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악마저 용서할 수 있고 그 악마저 구원할 수 있는 장치가 그 죽음과 동반해서 등장된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시형제결혼법’, 맏이가 아들 없이 죽거든 시동생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게 그 아들은 시동생 아들이 아니고 죽은 맏이 아들이 되게 하는 그 원칙 자체가 가정에 아들이 귀해서 아들을 낳겠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는 것도 이유가 있고 그 죽는 이유가 흔히 죄 지어서 죽지만 그 죄를 용서하는 가운데서 그 죄라는 것이 어떤 취지를 가지고, 어떤 기준에 준해서 죄라고 할 수 있는가를 규정할 수 있는 원칙이 ‘시형제결혼법’, 하나님의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율법 안에는, 하나님의 법칙 안에는 죄지어서 죽는 것 조차도 언약 이루는데 다 쓸모 있는, 일어날 사건중의 하나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해서 없는데서 있게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있게 된 그 있음은 다시 없음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냐? 없음이 될 수가 없는 이유는 있는 것도 우리 눈에는 마치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없음의 자리에서 우리가 몰랐던 언약의 본 실내용이 없음이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다시 등장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없앴다고 했을 때 그게 없앤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잠시 사라진 거지요. 그러면 언약은 뭐냐? 죽을 때 왜 죽으며 그 죽은 자마저 용서할 때는 새롭게 등장한 언약이 완성될 때 죽은 자도 다시 구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겁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다말이 알아요. 다말은 야곱가정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야곱가정은 야곱가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야곱언약을 위해서 친히 만들어낸 야곱가정이에요.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나는 어떤 사람 만나서 결혼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가정행복하기, 그게 우리가정을 꾸미는 이유가 아니에요.
낯선 사람들이 서로 반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룰 때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것은 가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남편은 이렇게 하고 아내는 이렇게 하고, 이것이 너희들 가정행복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줄로 아느냐? 아니다. 교회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신비라고 이야기해요. 숨겨진 것, 성령 받지 않으면 인간이 알 수 없는 그것, 창세부터 마련된 것, 감추어졌는데 공개된 그 것, 그게 신비거든요. 복음의 신비.
이런 것이 성경에 나오는데 세상이 그렇게 악마의 지배를 받다 보니까, 평소에 총각으로 있을 때 내 행복 취하다가 결혼하면 새 가정 내 행복. 이것은 내가 왜 있느냐를, 내가 없는데 내가 여기 왜 있지, 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전혀 깜깜한 거예요.
그래서 엘이 죽고 난 뒤에 다말이 시동생과 결혼하기를 시도했다고 순서상 그렇게 되어 있는데 순서를 바꿔봅시다. 다말은 이미 ‘시형제결혼법’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요. 이 미 알고 그 다음에 자기 남편이 죽었다고 칩시다.
다말은 자기 남편이 비록 죽은 남편이지만, 그것도 하나님께 죄짓고 벌 받아 죽은 남편이지만 ‘시형제결혼법’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있는 이상은 그 죽은 남편도 살 수가 있고 남편이 살아나게 되면 누가 사느냐? 자기가 그 남편의 아내로서 다시 살게 되는 거예요.
죽은 자의 아내가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난 자, 다시 말해서 죄지었는데 주께 용서받은 자의 아내, 따라서 이 가정은 용서받은 가정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부산물로 애는 자기 남편 애는 아니지만, 시동생 애지만.
만약에 시아버지와 동침 안했다면. 제일 막내와 다시 혼인했다면 막내아들의 아들이 되겠지만 상상은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막내아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렸잖아요. 아버지 유다는 거기에 관심도 없지만.
그러니까 가정의 행복 문제가 아니고 참으로 이 가정이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뜻이 이 가정에 머무르고 있다면 이 ‘시형제결혼법’이라는 것, 이 속에 비밀이 있다. 하나님의 복을 영원히 받을 수밖에 없는, 복을 안 받을 수 없는, 필이 복이 오는 원리원칙이 이 가정 안에 담겨 있다고 다말은 믿은 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냥 한 가정이 아니라 그 언약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가정, 따라서 그 가정을 위해서 기존의 세상사람, 언약이 없는 가정에서는 그게 재편되어야 되겠지요. 그 가정을 뚫어내야 됩니다. 혈육적인 가정, 언약이 없는 가정이 살아가는 식의 가정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없기 때문에 며느리 입장에서 그냥 가만있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뤄야 되니까. 아버지의 뜻은 뭐냐 하면, 전혀 셋째 아들을 줄 의사가 없어요. 아버지의 가정에서 셋째 아들은 못주겠다. 남은 남자는 뭐밖에 없느냐? 시아버지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시아버지가 어느 자리를 대체해야 되느냐? 맏이의 자리에 대체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근원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보통 축복한 가정 같으면 죄를 안 지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서 큰 아들인 자기 남편 엘이 죄를 지어서 죽고, 그 다음에 큰 시동생 오난도 죽고, 왜 이렇게 죄라는 것이 이 가정에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은 근원적인 죄를 파헤치는 것, 근원적인 죄를 파헤치는 이 작업, 유다가정에 하나님의 언약을 부여받을 자리, 접점의 자리, 하나님의 외부에서 오는 완성된 축복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의 자리를 유다가정에서 죄를 파헤치는 방식으로 마련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공된 축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요셉을 통해서 오는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투톱이라고 했잖아요. 열 두 아들 가운데 유독 주목받는 축복을 받는 가정이 두 가정이에요. 하나는 요셉의 가정이고 또 하나는 유다가정입니다.
투톱, 두 개가 모든 것을 설명해요. 요셉은 복의 성공을 가시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유다는 그 복이 장착될 수 있도록, 도킹될 수 있도록, 유다가정이 완전히 개판되었지요, 근원적인 죄를 폭로시키는 현장을 장만해야 될 일이 벌어져야 되는 겁니다.
흔히 말합니다. 육에서 영, 영에서 육으로 갈 수 없다. 맞는 이야기에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 가지 못한다고.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구약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육으로 영의 세계에 갈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요. 자기가 노력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이미 이 유다가정에 투입된 하나님의 언약이 멀쩡해 보이고 남들 가정처럼 내 가정 지키겠다는 그런 상식적으로 흘러가는 가정을 언약이라는 삽으로 파헤쳐 버립니다.
복의 가정에서 벌 받아서 죽은 아들이 두 명이나 돼요. 아버지 입장에서 큰 아들이 죽었다는 말은 그 가정 깨졌다는 뜻이에요. 아들이 벌 받아서 죽었다는 것, 자식은 아버지의 죄가 그대로 흘러가잖아요, 아들이 벌 받아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유다를 정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왕 정상으로 보지 않는 것 화끈하게 어느 정도로 죄의 깊이가 있는지를 다 들춰내는 작업에 하나님께서는 유다가정을 가지고 설명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근원적으로 죄 된 모습을 볼 때에 더 이상 유다가정은 ‘내 가정 건전하다, 훌륭하다. 내 가정 온전하다. 내 가정은 하나님의 바른 가정이다.’라고 할 건더기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 겁니다.
이 가정을 대신해서 외부의 축복의 효과가 이 가정을 덮지 아니하면 이 가정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언약적으로 복 받을 가능성이 전무한 겁니다. 나무를 심더라도 흙을 파야 되지 않습니까? 나무를 잘 자라게 하는 것은 요셉이 해야 될 몫이고 나무를 심을 장소는 죄가 있는 곳에 구원이 있기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거든요, 죄는 죄다 드러나야 되거든요. 죄를 들춰내는 작업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시형제결혼법’에 의해서 실시가 되는 겁니다. 물론 인간의 행함으로 죄가 들춰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와서 우리의 바탕을 파내는 거지요.
여러분 알다시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나의 구원이 되려면 그 십자가 끝의 뾰족한 것이 우리의 마음 밭을 마구 헤집고 파헤쳐야 돼요. 어디까지 파헤치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있다,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을 정도까지 파헤쳐야 돼요.
내가 어떻게 삽니까, 하는 말이 안 나오도록. “이 나를 어디에 버리면 좋습니까? 나를 버릴 장소를 허락해 주옵소서.” “아나, 여기 십자가 있다. 십자가에 갖다 버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는 내 것으로 살기 싫으니까 내 것을 버리고 싶은데 버릴 장소, 주께서 언약을 통해서 버릴 쓰레기통 하나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이곳이다.”라고 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게 로마서 6장에 나오지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거할 수 없다는 말은 뭐냐?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가 거할 수 없을 정도로 죄가 거하는 나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거예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쓰레기통이 있어야 쓰레기를 버리지요. 쓰레기통이 날아가 버려서 쓰레기 버릴 데가 없는 거예요. 죽은 자로 활용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앞장세울 때는 죽은 우리를 십자가복음을 위해서 활용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더 죄를 지어야 되지요. 왜? 어차피 주님의 활용차원에서, 주께서 우리를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 이해가 되고 있겠지만 안 된다고 치고요.
실험실에서 하얀 생쥐를 사용한다 합시다. 생쥐를 잡아서 버둥거리면 안 되니까 주사를 놓아서 안락사 시켜버렸어요.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앞 다리를 잘라볼까? 눈을 쑤셔볼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이미 죽은 인간을 팔을 자르든 눈을 사용하든 그것은 주께서 필요한대로 쓰시는 거예요. 이 성도를 가지고 도둑질 하는데 사용해볼까, 살인하는데 사용해볼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 것을 깨닫게 해볼까, 주세요, 주세요, 하는 것이 얼마나 이방인의 기도인 것을 알게 하는 식으로 해볼까, 라고 쓰시는 것은, 그렇게 해서 우리 죄를 자꾸 더 키우는 것은 주님이 하실 몫이지 내가 ‘저는 의인되고 싶어요. 너무 이렇게 심하게 다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럴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평생 강도해서 구원받았잖아요. 그 날 밤에 낙원에 갔잖아요. 천국 갔다고요. 주님이 충분히 실험쥐로 사용했기 때문에. 거지 나사로도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12년 동안 귀신들린 여인도 12년 동안 귀신 들리게 하셔서 12년 동안 허리 못 펴게 했습니다.
고관절정도가 아니에요. 12년 동안 허리를 못 펴게 했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얼마나 주님을 원망했겠습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뭐예요? “개입니다.” 개니까 주께서 마음대로 이 개를 활용해주옵소서, 복날에 어떻게 하든지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쓰시옵소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세상에 이만한 믿음은 처음 봤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방여자가 이정도 믿음이 있다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뭘 믿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라는 인간을 버릴 쓰레기통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이 내 옆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말은 지금 쓰레기통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쓰레기 사용하는 겁니다. 그까짓 거 창녀가 그 뭐 대수라고요. 어차피 막가는 집안인데.
세상 사람들 보기에 점잖은 며느리가 창녀 노릇을 했다는 것은 다말의 자기 남편 엘이 죽을 때 다말은 하나님의 폭력을 느꼈어요. 하나님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말은 지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폭력을 행사하셔서라도 ‘시형제결혼법’이라는 이 언약을 내포한 축복을 이루겠다면 주님의 폭력이 남편으로 그치면 안 되겠지요.
어디까지 미쳐야 되느냐 하면, 그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기 때문에 이 아내에게 폭력이 들어오는 것을 다말은 주저하지 않습니다. ‘시형제결혼법’을 이룰 수 있다면, 이 가정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면, 그깟 창녀가 무슨 대수입니까?
시건머리 없는 시아버지 탓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 다말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적으로 조마조마한 것은 뭐냐 하면, 시아버지하고 동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안 생기는 경우, 이런 경우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경우지요.
다말은 믿었습니다. 지금 상대가 시아버지냐 시동생이냐, 그것은 문제꺼리도 안돼요. 내가 창녀인지 성녀인지 혼자 도 닦는 그런 것은 관심조차 없어요.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관여하는 그 장, 그 필드, 그 영역에서 다말 입장에서 내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일체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만 있으면 돼요.
주님의 폭력, 죽은 남편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폭력, 유다집안에서 누가 그 폭력을 회수할 희생물로 나서겠느냐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다말은 알았습니다. 그걸 다말이 어떻게 아는가?
그것을 가지고 일찌감치 온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온 미래, 벌써 온 미래. 그걸 오래된 미래라고 하는데 장차 예수님께서 희생물이 되시는 것만이 죄를 의로 바꾸는 유일한, 하나님과 예수님이 창세전에 약조한 것입니다. 그 약속의 취지가 퍼져 나간 것이 전 우주고 이 피조세계에요.
피조세계의 중심점은 뭐냐? 하나님의 폭력과 거기에서 자신을 제물을 바치는 예수님의 뜻이에요. 그 뜻이 오늘 본문 입장에서는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그 미래의 이야기가 다말의 마음속에, 심성 속에 담겨있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보장하는가?
마태복음 1장 3절에서 그걸 보장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방금 읽었던 마태복음 1장 3절의 말씀은 1장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족보는 동일한 것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폭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있음을 증명할 때 그것은 곧 이 세상에 죄악된 세상이라는 뜻이고 그 뜻을 유일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는 그 폭력에 대해서 대신희생자로 나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큰 아들이 죽음으로서 그 자체가 붕괴된 유다가정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없어진데서 다시 생성되는 제 2의 창조, 제 2의 유다가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이게 거듭남이에요. 이게 바로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그 원리에요. 요한복음 3장 8절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나는 죽고 주께 쓰임을 받으면서 주께서 희생된 그 현장에 우리는 죄인으로서, 쓰레기로서 쓰임 받는 그 관계 속에서 주님 앞에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유다가정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의 언약을 이루는 방식에 대해서 누가 방해하느냐? 유다가, 시아버지가 방해하고 있습니다.
시아버지의 세상보기, 생각하는 것은 그저 간음수준, 도덕적인 수준, 창녀하고는 자도 되지만 근친상간, 어떻게 자기 며느리와 동침할 수 있는가, 그런 인간은 때려죽여야 된다고 하는 일반적인 사고방식, 언약과 상관없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수준의 윤리도덕이 도리어 하나님의 언약중심에 있는 사람의 희생의 아픔을 더욱더 가중시키는 겁니다.
소위 착해진다는 그것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악마 짓이 되는 겁니다. 착해지는데 왜 악마짓이냐? 그 안에 착한 나가 살아 있기에 그렇습니다. 착한 나, 괜찮은 나, 훌륭한 나, 그것을 자기 의라 하는데 자기를 꽁꽁 쥐고 있는 나, 이게 악마의 모습이에요.
그런 것은 절대로 영적세계를 갈 수가 없습니다. 영적세계는 신의 폭력 앞에서 희생물로 결합이 된 사람만 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자살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언약범위 안에서, 언약성취 안에서 그렇게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다말은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아버지가 부끄러워하지요. 요셉과 동시대에 쌍둥이처럼, 요셉은 지금 국무총리가 되어가는 과정에 잇습니다. 서로 무관한 이야기가 나중에 서로 상관있게 창세기 말미에 결합이 됩니다.
요셉에 의해서 잘된 그 축복이 유다가정의 복으로, 용서로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럴 때 요셉의 훌륭함이 아니고, 유다의 훌륭함이 아니고 이방여인 다말의 위대함, 다말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그 안에 언약의 핵심부분, 십자가복음의 핵심부분이 미리 일찍이 이 다말을 통해서 드러난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뭡니까? 우리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분주하게 작동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적으로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하는 것, 남한테 웃음거리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자기관리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마귀 짓인 것을, 그것이 나를 더욱더 살리고자 하는 비복음적인 사실을 저희는 알았사오니 차라리 날마다 십자가 앞에 자기를 던져서 주님에게 쓰이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