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과 브엘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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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9월 6일 본문 말씀: 창세기 26:26-33
(26: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6: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6:28)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6: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26: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26:3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26: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26: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언약’이란 인간이 창안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종교 아이디어와 경쟁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순결함을 근거로 천국에 입성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입니다. 이런 방식에 대해서 사람들은 수월하게 동의합니다. 심지어 성경을 보기도 전에 이런 견해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 합니다.
하지만 막상 창세기만 보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으로 성사됩니다. 창세기 4장에서 나오는 아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아벨의 예물’의 특이성에 주목해보라는 겁니다. 그 예물이 예수님과 관련성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기름’부위를 몸통과 따로 분리시켜 부각시킨 예물이었던 겁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인간들의 다가섬이 아니라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만 성사됩니다. 그 찾아든 사람은 이 낯선 방문으로 인하여 자신이 살던 곳에서 위험에 노출됩니다.
주위 사람들도 하나님의 언약이 삽입된 사람을 위험인물로 취급합니다. 자신들이 일반적 사고방식으로 다루거나 통제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긴장하게 됩니다. 저는 이처럼 언약을 받은 자는 ‘뇌종양 환자’라는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외형적으로 다른 사람과 차이나지 않고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 내부에 있는 종양이 그 사람으로부터 이상징후에 보이는 삶이 되게 합니다. 이처럼 이삭 주변에도 이상징후가 포착됩니다. 창세기 26:12-14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늘에서 만들어진 언약이 지상에 나타날 때, 어떤 식으로 정착되는지 그 과정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상은 변화의 조짐을 보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삭 가족이 흉년으로 인하여 그날 땅으로 내려온 것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언약이 대자연 변화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삭의 가축이 100배 불어난 것은 인간의 수완이 아닙니다.
언약의 효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효과로 인하여 이삭은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쫓기는 바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고 ‘생존’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네들의 생존에 위협이 되니, 같은 생존차원에서 이삭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이해하고서는 주시하고 있는 겁니다.
즉 생존차원에서 경쟁 대상자가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따라서 시기가 난 지역민들은 이삭의 가축이 증식하지 못하도록 물이 나오는 우물을 막아버립니다. 이것은 곧 ‘다툼’입니다. 언약과 비-언약 사이의 다툼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따라오면서 계속 우물을 막습니다. 전에 창세기 21장에서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까지 덮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언약이 이 죽음의 세계인 지상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절차입니다. 다투고 싸울 때마다 언약을 마주했다는 증거로서 지명 하나씩 붙여집니다. ‘에섹’이라는 지명은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싯나’라는 지명은 ‘대적함’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지명인 ‘르호봇’이라는 지명은 장소가 넓혀졌다는 말입니다.
즉 언약과 비-언약의 다툼의 결과로서 언약은 이 지상에 고유한 땅에 마련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언약이 없는 지상에 언약이 자기 자리를 장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지역으로 국한 될 사항일까요? 아닙니다. 나중에 주어진 언약에 전에 주어진 언약의 내용과 본질을 더욱 심화시키고 확대시키고 구체화 시키게 됩니다.
내용이 정밀하게 뚜렷해지는 겁니다. 따라서 언약 안에 들어 있는 ‘다툼’과 ‘대적’이라는 요소는 보다 그 범위가 커지게 된 것입니다. 이 ‘대적’적 요소에 언약을 품고 있다는 말은 곧, 언약이 최종 완성하는 날, 언약 바깥의 모든 것에 대해 정당한 저주권과 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저주권 행사가 바로 이삭이 자식들에게 축복와 저주를 선포할 때 그 내용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즉 이삭이 품고 있는 언약이 단순히 이삭 가정 내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범 세계적이고 범 우주적인 운명을 결정짓는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흔한 일상의 일들이 언약을 만나므로서 모든 것들은 하잖은 일들이 됩니다.
무심한 것들의 일반화가 이루어지고 그런 것이 세계사는 진행될 것입니다. 모든 변화들은 언약 주변에서 정렬되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집합들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소하고 심각하지 않는 작은 물결들이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소중한가에 대해서 이미 언약 완성으로 결판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언약을 만나지 못한 자들은 일상 속에서 생존에 자신들의 목숨을 겁니다. 이 지상에, 이 땅에 이미 “다 이루었다”가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존이 다급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여겨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들은 언약과 다투는 자들이 되고 그들에 대한 영원한 징벌은 언약 완성에 준해서 처벌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십자가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겁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에,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바로 언약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뇌 속의 종양처럼 바로 언약, 그것을 귀하여 여겨서 그것이 들어 있는 자들은 세상을 징벌하는 기준으로 활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6:9-10)
세상 모두를 언약과 비-언약으로 구분지어 평준화하는 안목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처해 있는 바로 이 생존의 환경이 곧 생명의 환경인 것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4강-창 26장 26—33절(이삭과 브엘세바)1709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6장 26-33절입니다. 구약성경 37페이지입니다. 창 26:26-33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성경 창세기만 봐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창세기를 통해서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자기가 얻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다는 생각, 모든 인간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거지요. 그것이 엉터리라는 겁니다. 성경 창세기만 봐도 그게 나오는데,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바친다고 해서 주께서 받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받지를 않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복음의 기본입니다. 인간이 뭘 바친다 할 때는 노림수가 있고 음흉함이 있어요. 바쳐서 그 바친 것을 밑천으로 투자해놓고 정작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신과 거래하겠다는 그런 마음이 들어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들이 먼저 나서서 바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그들을 쪼개버리지요. 네 내부에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마치 성도는 뇌종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뇌종양이 있어서 머리가 좀 띵하고 아프다. 그런데 뇌종양이라는 것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뇌종양 환자나 갖고 있는 현상인데 뇌종양을 누구나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구원받기로 작정한 자에게는 겉으로 보면 다른 사람하고 똑같은데 내부에서 어떤 시그널, 신호 같은 것이 나와요. 이것은 두뇌를 쪼개봐야 아는 뇌종양처럼 뭔가 하나님 쪽에서 와서 하나님이 심어준 그것이 그 사람의 일대기로 낯선 인생을 펼치도록 유도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심어놓고 심어놓은 그것의 영향 때문에, 그게 원인이 되어서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어도 그렇게 함부로 살지 못하는 운명을 보여주고, 그런 인생여정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뇌종양이라는 것으로 안좋은 쪽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언약이 담겨 있는 인간은 복 받은 겁니다.
복 받은 인간인데 심지어 언약을 받고 언약이 심겨진 그 언약의 사람조차도 인생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그걸 지난 시간에,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이야기했지요. 이삭이 언약의 사람이 되고부터 가는 곳마다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지난시간에 한 거예요. 위험에 노출돼요. 난데없는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하늘에만 있던 그 언약이 지상에 이식되는, 심기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이미 표준적 모델, 공식, 원칙으로서 그들 개인을 다루시는 겁니다. 언약이 내려오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되는데 쳐들어오는 그 방식은 우리가 상상할 필요도 없어요.
창세기에 보면 언약이라는 것을 앞장세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일종의 빨대를 꽂아놓았다고 보면 돼요. 빨대 꽂고 그 속에 언약을 쏙쏙 집어넣게 되면 하늘에 있던 창세전부터의 영원한 복음, 영원한 언약이 지상에 심겨지는 작업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 심겨지는 작업에 부름 받은, 소명이죠, 거기에 초대된 언약사람들은 마치 원치 않는 뇌종양이 안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굉장히 힘든 인생을 살아가지요.
“왜 저들과 다른,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왜 살게 하십니까? 하필이면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본인도 본인이 이런 인생을 구태여 살아야 될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의 고백이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것이 뭐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온 것이 없으니 허전하잖아요.
그러면 하늘과 자기 자신과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정성을 다하여 다가설 수밖에 없지요. 성경공부 이만큼 오래하면 됩니까, 십일조는 이만큼 바치면 되겠습니까, 기도는 이렇게 오래 하면 되겠습니까, 신앙생활 이렇게 하고, 교회직분 받아서 봉사하면 하나님이 봐주시고 인정해주시겠습니까, 자꾸 내 쪽에서 다가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뇌종양, 구원의 종양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다가선다는 이것은 애초부터 없고 주께서 자기 자신을 쪼개버려요. 해부해버립니다. 수술 칼 들고 자기를 난도질해버리지요. 하나님이 집어넣어놓고, 그 집어넣은 것을 수색하고, 탐색하고, 점검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집어넣은 그것이 언약인데 그 언약이 이 지상에서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는가를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은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운영된다는 이 땅속에 너희들이 감히 감당 못할, 관리하지 못할 이질적이 것이 거기에 이미 개입되어 있고 삽입되어 있는 거지요. 그런 이야기의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4장에 아벨이야기잖아요. 가인은 바쳤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아벨이 바친 제사에서는 이미 뇌종양 같은 것이 있어요.
기름부위를 따로 추출해서 바친다는 것은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이 예수님이 주신 믿음에서 나왔다고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기름에 대해서 부각시키고 있어요. 기름을 돋보이게 만들어서 장차 올 메시아가 기름 부은 자라는 사실, 그리고 장차 성도는 성령의 기름 부은 자들이 성도가 된다는 것, 벌써 창세기 4장부터 기름부음의 낌새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게 되면, 지상이라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지상에 인간들만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들은 그 좋다는 천국에 복귀하기 위해서 그저 자기 것을 내놓고, 바치고, 정성들이고, 순종하고, 순수하고, 경건하면 되는 줄로 알았지요. 실제로 하늘에서 이 지상에까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것은 그들은 없다고 생각하지요.
본인들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구원되고 안 되고가 결정된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으로 퍼져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기 전까지는 으레 구원받는 사람은 이렇게 착하면 구원받는지 알았지요. 그러나 성경을 펼치고 보면, 백날 펼쳐도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펼치고 보게 되면 하나님 쪽에서 다가와서 일 시킨 사람, 특별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뇌종양처럼 갖고……, 자기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몰라요.
자기도 뭔가는 이상해. 인간은 자기내부를 모르니까요. 언약사람의 주변에 뭔가 새로운 현상들이 포진해서 정비가 되고 정렬이 되어 있습니다. 등산중에 사탕을 먹다가 툭 뱉어놓고 다시 내려올 때 보면 뱉어놓은 사탕주변에 개미들이 포진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뭔가 지남철처럼 철을 당기는 요소가 이 사람에게 있어요.
창세기 26장 12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주입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땅에 어떤 변화가 발생되는 겁니다.
백배나 얻었다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지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가뭄이 들지 않았다면, 기근이 없었다면 이삭은 이렇게 그랄 땅으로 내려가지를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성도 속에 있는 무슨 요소와 자연과 뭔가 결탁되어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러나 불신자는 안에 아무것도 없기에 자연현상에 대해서 결탁된 것이 없어요.
지난 시간에 한 것 다 잊어버렸지요. 벌써 한 주 지났으니까. 더구나 비도 오고.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믿음과 산을 옮기는 것이 연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기믿음을 스스로 키우려고 하는데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지금 답답하고 다급한 거예요. 백날 믿음을 키워봤자 조그마한 야산하나 옮기지 못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 그것은 가짜인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믿음을 키웁니까?”라고 질문을 저에게 한다면 그게 내 쪽에서 뭘 준비해야 천국 간다는 잘못된 생각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믿음의 사람들, 요셉도 마찬가지고요, 요셉은 자기가 꿈꾸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오신 겁니다.
그것을 저는 기습이라고 표현했는데 갑자기 준비도 안 되었는데 쳐들어와서 그 쳐들어온 것 때문에 예상밖에 아브라함이 있고 이삭이 있고 야곱이 있는 그 자리에 어떤 변화가 생겨버려요. 이삭과 야곱과 아브라함은 “내가 한 것이 아니야.”라고 아무리 손사래를 치고, 내가 노력해서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주변사람들은 사탕주변에 개미가 달려드는 것처럼 “여기 뭐 있다. 뭐가 있어.”라고 몰려드는데 그것이 위험에 노출된 거예요.
왜 위험이 노출될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 하나님의 언약, 아까부터 제가 뇌종양이라고 했는데 뇌종양이라고 그냥 합시다. 왜냐하면 뇌종양 걸리면 머리는 좀 띵 한데 바깥에서 보면 멀쩡해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뇌종양이라는 비유가 적절하다고 보거든요. 뇌종양 걸린 이삭은 백배를 받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어떤 원인제공, 어떻게 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알지를 못해요.
기도 빡세게 해서 백배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기도 난처해요. 그런데 그것이 왜 위험스러우냐 하면, 언약사람의 외양을 보고 찾아온 사람들은 관점이 어떤 관점이냐? 생명의 관점이 아니고 생명의 관점이에요. 언약이 지상에 왔다는 것은 이 죽음밖에 없는 지상에 과연 생명이 형성될 수 있느냐, 그 인간이 할 수 없는 작업인데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언약을 줬고 그 언약을 받은 사람 주변에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생명이 정착되고 삽입되느냐를 보여주는 거거든요.
생명에 관한 거예요. 영원한 천국, 하늘나라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로 말미암아 저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이 살기 좋은 땅에 와서 너만 왜 부자 되었느냐? 당신 때문에 우리 생존활동에 지장이 있으니까 당신 한 번 당해봐라.”라는 식의 입장, 생각을 가지고 드디어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니 위험에 노출되지요. 어떻게 노출되는지를 창세기 26장 19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양과 소가 많으니까 물이 많이 필요해서 셈을 팠다는 말이지요. 그 전에 18절에 보게 되면 전에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렸어요. 물이 좋아서 소와 양이 많은 줄로 알고. 그리고 그렇게 잘 되면 자기 땅에서 자기가 왜소해지고 생존에 위협을 느끼잖아요. 그래서 공격이 들어오는 겁니다.
19절부터 또 보면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에섹이란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우물 이름이 에섹이에요. 그러면 이 지상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야기된 새로운 사건에 의한 지명 하나가 없는데서 새로 발생된 거예요.
이게 언약이 지상에 정착하는 절차가 돼요. 계속 하나님께서는 사건주고 사건을 도장 새기듯이 새겨버립니다. 우물 때문에 다투었거든요. 그래서 에섹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 21절에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싯나는 대적했다. 에섹, 다투었다, 그리고 싯나, 대적했다. 적대적관계지요.
블레셋추장 아비멜렉에 속한 종들이나 아비멜렉의 사고방식은 뭐냐? 어디까지나 그들은 생존하는 것이 생명이라는 그것이 그들의 전부입니다. 그들의 한계에요. 마치 요새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 자기 돈벌이 좋아지고 밥벌이 좋아지라고, 여유로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그게 바로 비언약, 언약에 속하지 않는, 이 땅에서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와요.
그들이 아는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자기생존을 유리하게 해주는 그 분이 좋으신 하나님이지 만약에 자기생존을 불리하게 몰아넣으면 그것은 악마지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왜? 기준자체가 생존이기 때문에, 출발점 자체가 생존이기 때문에, 내 생존에 얼마나 유리하냐, 아니면 불리하냐 하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이삭이 다투었다는 말은, 이삭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이삭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찾아드는, 정말 언약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들이 공히 다 동의하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신의 축복이라는 것과 정 대척관계에 있어요. 대비되는, 충돌되는 입장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고, 여유 있는 부자가 되고 싶고, 건강하고 싶고, 이런 인간이 사적인 욕구와 욕망과 싸우는 그 현장에 그들에게 핍박받는 모양새로 영생의 나라 천국은 약속이라는 이름,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을 언급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에섹, 싯나, 또 있어요. 22절에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르호봇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는 장소가 넓어졌다는 겁니다. 장소가 넓어졌는데 있는 장소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고 같은 장소라도 하나님의 언약이 없었으면 이런 사건의 의미가 깔려있지 않을 땅이에요.
그런데 언약 때문에 지명이 새롭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없는 땅인데 하나님의 뜻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때문에 새롭게 발생된 장소라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 장소는 뭐냐? 이미 언약에 속하지 않는 사람과 싸움을 벌여서 얻어낸 장소가 르호봇, 장소가 넓게 되었다, 특별히 언약을 받은 이삭의 장소, 터전이 넓게 되었다는 결과가 주어진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23절에 보면,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간다고 되어 있어요. 브엘이라는 말은 웅덩이, 우물이라는 뜻이고 세바라는 말은 맹세라는 뜻이에요. 맹세의 우물, 이 이름은 창세기 21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전 아비멜렉과 화친의 계약을 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같은 이름이 또 다시 등장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나중에 나온 언약은 앞에 나온 언약의 내용을 더 심화시키고 더 확대시킨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에는 브엘세바라는 그 땅이 하나의 아비멜렉종족에만 관련되었다가 이제는 그것이 대대로까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사이에 맺은 그 계약이 당대에 그 효력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후대까지 이어지면서 그 언약에 의해서 얻어진 영향력이 지상의 전체를 덮을 정도로 확대되는 조짐을 보이는 겁니다.
이래서는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겠지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아비멜렉의 종들의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가 가장 기본적인 문제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땅이라는 것이 인간들 생존하기 위한 땅일까, 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딛고 사는 이 대구지역, 또는 모든 지역을 하나님께서 관리하고 오늘도 비를 이렇게 주시는데 이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땅이냐, 아니면 생명을 위한 땅이냐를 한 번 보라는 겁니다.
너 밥 먹고 살기 위한 땅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드러내기 위한 땅인가를 보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은 어느 동네에 왔습니까? 지묘동에 왔습니까? 어느 동네에 왔는지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하지요. 오늘 본문식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이 땅에 목숨을 걸고 땅에서의 생존이 전부라고여기는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하면 이것은 총괄적으로 저주하고 심판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해버린 거예요.
이 땅에서 밥 먹고 살려고 하는 인간은 다 죽어라, 그 말입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사적인 행복과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 다 지옥가거라, 그런 이야기에요. 왜? 비언약이니까. 내 쪽에서 정성을 다하고, 내 쪽에서 순수해서 그 순수함을 하나님께 바쳐서 구원받겠다는 사람은 다 지옥가라, 그렇게 선언할 수 있는 정당성이 이미 주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 지심으로서 확보된 거예요.
브엘세바같은 경우에는 영향력이 얼마 안 되지만 나중에 신약까지 오면 주님의 그 새언약의 완성,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가 돼버리면 이게 브엘세바적인 효과를 내요. 그러면 그 브엘세바언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너희들과 다툰 적이 있음, 따라서 너희들은 내 쪽에서 심판하면 군말 없이 심판당해야 됨, 라는 것이 언약이 담고 이 땅에서 정착하는 내용물이 되는 겁니다. 본질이 되는 거지요.
이 언약의 심판의 본질을 위해서 세상은 무상한 것들, 하찮은 것들의 일반화입니다. 무상이라는 말 아시지요? 이 세상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무 별 볼일 없는 것들, 그 사소하고 심각하지 않은 것들의 보편화, 일반화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그 말이에요. 도토리 키 재기지.
북한의 수수폭탄 핵실험이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맞아 죽으면 돼지. 사드배치 한다고 성주 군민들 데모하는 것 보세요. 다 하찮고 의미 없는 무상한 일들이거든요. 그런 것들의 집합이에요. 그들은 몰라요. 자기들한테는 굉장히 중요한데 십자가 꽂아놓고 전부 다 “이리 와, 이리와! 와서 정렬해. 열중 쉬어, 차렷! 열중 쉬어.” 한번 정렬해 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소위 중차대한 일들 다 죽 한번 세워보자는 말이지요. 중차대한 일들이 있는지. 무엇이 소중한지. <곡성> 영화에 나오잖아요. “뭣이 중헌디!” 무엇이 중한데요, 무엇이 소중한데요? 이삭이 소떼와 양떼를 백배 얻으니까 그들은 생존차원에서 어떻게 해서 저렇게 백배를 얻었나 하는데 어떻게 하기는요? 쳐들어왔지요. 주님이 기습한 거예요.
뭘 유도하기 위해서? 소위 양이나 소가 백배나 많은 그것을 탐을 내서 시기나게 만들어서 이삭빼놓고, 언약을 아는 사람 빼놓고 일반사람들이 뭘 소중하게 여기고, 어디에 관심을 두고, 시덥지 않는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걸고 있다는, 저주받아도 할말 없는 그런 식으로 이 땅은 평준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삭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언약 주변에, 십자가 앞에 불려나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 자신이 정말 예수님하고 비교할 때 당장 죽어도 할 말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이 브엘세바, 르호봇, 싯나, 에섹, 이것이 이삭을 압박합니다. 이삭은 사실은 언약을 갖고 있지만 언약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지를 본인은 몰랐어요.
그저 양떼 소떼 늘어나면 기분 좋았지요. 하지만 자기 속에 자기조차 모르는 언약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은 앞으로 에서와 야곱, 두 자식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서 내 속에 담겨 있는 비밀이 실제로 지상에 어떤 식으로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지를 이제 보이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과 에서가 팥죽이야기를 하면서 바로 27장으로 넘어가지 않고 26장이 있어가지고, 이삭이 품고 있는 언약의 내용이 이삭 개인적인 취향이나 성향에 의해서 성취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삭조차도 야곱과 에서조차도 그저 다른 사람과 같이 일상의 문제, 생존의 차원의 일부에 불과한 그런 인간들이에요.
야곱이 똑똑하고 에서가 바보가 아니라 모두 다 그저 아비멜렉과 같은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에요. 자기 몸 편하면 좋고, 자기 부자 되면 좋고, 아버지 유산 많이 따내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그냥 그렇고 그런 인간인데 언약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다니까, 언약이! 뇌종양이, 나는 남들처럼 살고 싶어도 뇌종양이 나로 하여금 침대에 눕혀버리잖아요.
뇌종양이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내 안에 언약이라는 뇌종양이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인도하는가를 한번 보세요. 로또 당첨되는 그것이 그렇게 부럽던가요? 김 중배의 다이아몬드가 …… 물론 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좋아 보이던가요? 갈수록 성도의 인생에 ……, 이것은 모방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요. 주께서 친히 다루실 문제인데.
생존이 중요합니까, 생명이 중요합니까? 육의 가족이 중요해요, 영의 가족이 중요해요? 아, 이거 부담 주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만. 이삭도 우리와 똑같아요. 그저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저벅저벅 다가오는 사건이 이삭을 압박한다니까요. 이삭자체를 압박해요. 이삭 내부에 언약을 갖고 있지만 언약을 가진 이삭 내부가 이미 비언약으로 꽉 차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새로운 사건을 일으켜서 이삭으로 하여금 언약적 사람으로 바꾸는데는 이러한 주변의 낯선 상황들이 들이닥쳐야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창세기 26장 12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이삭이 이렇게 되었지요. 아까 분명히 이게 땅의 변화라 했습니다. 땅의 변화에서 이제 뭐로 바뀌느냐? 땅의 변화라 하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많다, 거부니까, 부자니까, 내가 가진 것이 복이라고 하던 그 사고방식을 뭘 로 바꾸는가 하면, 나 자신이 복의 사람이라는 것으로 바꿔지는 작업이 되면서 언약이 자연의 변화와 땅의 변화보다 더 깊숙이 나가면 인간자체의 변화로 언약이 최종마감이 됩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허접함입니다. 물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를 행하신 주님이 죽을 때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비천하게 돌아가셨잖아요. 그 비천한 모습이 가장 최종적인 복이에요. 그 비천한 십자가가.
소유의 증가가 복이 아니라 주님 주신 십자가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 내가 살인강도가 되어도 오늘 밤에 낙원에 간다면 나는 복된 사람이라는 인식의 변화, 내가 거지나사로가 되어도 죽으면 아브라함 품에 안긴다는 인식의 변화,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소유나 재물에서 인간자체가 달라지는 변화까지 언약이 완성을 향하여 그 모습을 보이게 될 때 우리는 주 예수 십자가보다 더 귀한 것은 없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노라. 사건이지요. 예수님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노라.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노라. 아무것도 없으나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고, 남들 보기에 내가 곧 죽은 것 같지만 나는 산자요, 고생하는 것 같지만 나는 지금 복을 받고 있고, 저주받은 자 같지만 복을 받고 있고, 남들 보기에 불쌍한 것 같으나 나는 세상을 이긴 강한자고, 그게 바로 언약의 최종적인 혜택입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3-10)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하면, 후딱후딱 이 땅에 머물지 마시고 쭉쭉 빠져나가세요. 어떤 일 터지면 그거 붙들고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하지 말고 후딱후딱 지나가라 그 말입니다. 히딩크 이야기하는 것 같이 “빨리빨리” 이제 잊어버리고 후딱 지나가버리라는 말이지요. 과거의 실수에 발목 잡히지 말고. 그것 사소하고 하찮은 거예요. 무심한 거예요. 아무 무가치한 거예요.
심지어 내 목숨까지라도 후딱후딱 버릴 때 되면 버리세요. 그거 하찮은 겁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게 우리의 생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낯선 사건을 유발시키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뭔가 많이 가지고 나 잘되고 인기 얻고 성공하면 그게 복인 줄 알았는데 주여, 십자가만으로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길 수 있는 그것이 복인 것을 이제는 알았사오니 이 십자가만 자랑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