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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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8월 16일 본문 말씀: 창세기 25:19-23
(25: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5: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5: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5: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늘의 별같이 자손이 많아지겠다고 약속을 받은 그 당사자들이 아예 첫 아기조차 임신하지 못합니다. 천만 인의 어미가 되겠다고 복을 받은 여인이 ‘천만 인’은커녕 단 하나의 아기의 엄마도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는 인간이 기대하는 식의 자식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문제는 ‘인간이 어떤 식의 자식을 원하는지’ 자체를 차후에 어떤 자식이 태어나야 비로소 파악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나는 이런 자식을 원합니다”에 본심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자식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는 식으로 자신의 본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가정으로 하여금 원활하게 자식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부모가 기대하는 식의 자식을 애시당초 고려의 대상이 아님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부모들은 자식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도 파악 가능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김 마음의 자세가 잘 되어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자식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겁니다. 즉 ‘하나님에 의한 자식’을 원했던 겁니다.
이는 곧 자식을 출생에 담기게 되는 그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자신들이 충분히 수용가능하다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주신 자식은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쌍둥이입니다. 그리고 태중에서부터 상호 싸웁니다. 리브가의 입에서 “어찌할꼬”가 절로 나옵니다. 쌍둥이가 태어날 때는 사이좋게 태어났다고 출산 후에 싸우게 되면, 부모의 양육의 대상이 되지만, 이미 태어나기 이전부터 싸우게 되면 이는 ‘싸움’ 자체가 출산 후에 본격화됨을 나타나는 겁니다.
즉 속성상 둘 사이에서는 안 싸워서는 아니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모 입장에서 하나님께 담긴 뜻을 쌍둥이의 싸움을 통해서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로 최종 단일 의미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두 아이가 상호 싸우게 됩니다. 여기에 네 가지 경우가 생겨납니다.
첫째는, 부모 둘 다 첫째 아이인 에서를 대표자식으로 인정해주는 겁니다. 둘째로, 부모 둘 다 둘째 아이인 야곱을 대표자식으로 밀어주는 겁니다.
그러나 이 경우, 다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싸움’ 자체에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끝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에서, 계속 싸워야 할 그 이유 안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어느 한쪽이 하나님의 대표자식이라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필요한 자식을 태어나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셋째의 경우, 아버지는 에서를, 엄마 리브가는 야곱을 미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넷째로, 아버지는 야곱을, 엄마 리브가는 에서를 미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이삭의 가정을 필연적으로 두 패로 나뉘어져 영원히 갈라지는 가정의 원조가 됩니다. 이 쌍둥이의 출산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왜 인간 세상은 두 패로 나뉘어져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본질로 확정됩니다. 즉 왜 인간 사회에 안 싸우면 안되는 운명인가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뭔가 행한다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알아서 자꾸만 실천에 나서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 난해한 논리에 대해서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뜻, 의로움은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하게 되면 이러합니다. 그렇다면 ‘행하지 않고 믿으면 돼잖아’입니다. 문제는 행함이냐 믿음이냐를 따지기 전에 이미 인간들은 계속 뭔가 실천에 나서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게 행함에 해당되는 실천인지 아니면 믿음에 해당되는 실천인지는, 인간이 정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법과 규정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에게는 더 이상 ‘실천’이 되지 않는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즉 법과 연관되지 아니하면 실천이지만 법과 연관되면 필연적으로 그것이 ‘법의 판당 대상으로서 행함’이 되고 맙니다. 인간이 그렇게 생각한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규정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율법을 제시하신 겁니다.
‘싸운다’는 필히 ‘의를 위하여’라는 명분이 그 현장에 발생하게 됩니다. 즉 “나의 싸움은 의를 드러내기 위한 명분 있는 싸움이다”고 서로가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행함을 믿는 것이기에 하나님에게 의를 나타내는 가능성을 보이는 셈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아기를 갖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경우와 꼭같습니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불가능한 일이 벌써 인간 세상에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겁니다. ‘일어나기 불가능’이다 는 점이 취지가 아니라 ‘일어난 불가능이다’가 약속의 취지에 부합됩니다.
가능한 일은 항상 행함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마저 행함의 대상이 됩니다. 이는 곧 인간의 몸이 있는 한 인간은 행함이 나오고 그 행함을 불가능마저 가능한 일에 간주하면서 실천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결국 인간 몸에서 나오는 행함은 결코 하나님께서 제시한 계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이삭과 리브가가 두 명의 자식들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한다할지라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바가 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쌍둥이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 리브가에게 주신 것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아야 할 뜻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행함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기에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믿음은 오로지 인간의 행함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왜냐하면 그 행함은 믿음에 대해서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두 자식들을 놓고 그 어떤 선택을 해도 그것은 ‘믿음으로 의’에 부합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죄된 행함만 시도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두 국민’이 나옵니다. 결국 모든 인류의 두 갈래작업은 쌍둥이를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들은 결코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진행되어 두 인민군집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를 위하여 성도 내부는 끊임없이 행함이냐 믿음이냐를 놓고 투쟁하게 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들어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미 일어난 불가능이 성도의 마음을 무대로 삼아 끊임없이 투쟁적 활동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 오늘 계시의 내용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저주받은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에 주님의 일이 점차 짙어지고 윤곽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1강-창 25장 19—23절(쌍둥이의 탄생)1708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5장 19-23절입니다. 구약성경 34페이지입니다.
창 25:19-23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삭의 부인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기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그 육이라는 것, 아브라함과 이삭, 하나님의 사람에게 네가 지니고 있는 육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육은 다른 말로 하면 몸이지요. 네 몸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켜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인간에게 지시 명령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친히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왔고 육신이 죄 된 몸을 가지고 오신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 몸과 육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몸과 육에 대해서 자꾸 긍정하려고 해요. 내 것이니까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 반대입니다. 주님이 가지신 그 몸 가지고 주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저주라는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아야 될 몸을 예수님께서 입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다 그런 몸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다만 자기 몸이 치명적이고 저주의 요소가 들끓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의 몸 배후에, “네가 가진 몸은 긍정적이야. 괜찮은 거야. 그 몸 가지고 천국까지 가야지.”라고 부추기는 적대적인 영적 세력이 예수님 오시기전에 모든 인간을 장악하고 있다고 봐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건지라면 필히 여기서 싸움이 벌어져야 되는 거예요. 평화로운 거래가 아닙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게 아니고, 말로 하면 들어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필히 싸움이 벌어져야 돼요.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리브가가 나름 고민한 것이 있어요.
22절에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하는 이것이 고민이 되는 겁니다. 싸운다는 것은 의미가 하나로 통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통합이 되지 않으면 어느 쪽의 의미가 진짜 하나님이 주신 의미인지가 확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 불분명하다는 겁니다. 비록 내 자식이지만 한쪽을 내쳐야 되는 미래가 훤히 보이는 거예요.
서로 싸우니까, 생각이 통합이 안 되어 있으니까 둘 다를 수용할 수가 없거든요. 둘 다 하나님의 뜻대로 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이미 같이 태어날 때는 평화롭게, 사이좋게 태어났다가 세상 살아가면서 자기 이익 얻겠다고 싸운 것이 아니고 이것은 원초적으로 태생자체가 태중에서 싸워요.
태생 자체라는 이것은 변경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싸운다는 말은 깊은 의미가 있는데 그들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원리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명령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명령대로 실천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사실은 그것이 아니에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실천이 없고, 명령이 없을 때는 실천을 하게 되어 있어요. 아주 오묘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일 잘하고 있는데……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휘파람 불면서 오늘도 아내를 위해서 아내의 짐을 덜어주는 이 자랑스런 나를 생각할 때 혼자 기분이 업되어 있는데, 그러면 남편이 설거지를 하게 놔두고, 남편이 즐겁도록 놔두면 되는데 슥 옵니다.
“이 봐라. 그릇에 고춧가루 그대로 묻은 것 봐라.” 갑자기 명령이 와요. 명령이 오게 되면 “에이 안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법이 오게 되면 실천이 중지가 되고 날라가 버려요. 법이 없을 때만 실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처음부터 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법이 누구에게 주어졌느냐 하면 다른 이방민족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졌는데 그것도 아브라함에게 이미 정답이 주어졌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정답이 주어진 그 이후 430년 후에 새삼스럽게 법이 투입되었거든요.
법이 투입되었다는 그 말은, 법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것을 실천하는데 있어서의 장애되는 요소를 제거할 목적으로 법이 주어졌어요. 말 자체가 어려운데 또 예를 들어야 되겠지요. 부모가 아픈데 부모를 늘 돌봤던 아들이 있다 합시다. 둘째아들이 돌본다 칩시다. 예를 드는 겁니다.
둘째 아들이 엄마가 평소에 뭘 좋아하는지 알아요. 호박죽을 좋아한다. 평소에 호박죽을 하니까 엄마가 굉장히 흡족해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날도 둘째 아들이 어머니가 좋아하는 호박죽을 하는데 그 때 마침 큰 아들이 예고 없이 와서 “엄마! 내가 멀리 인천에서 왔다. 어머니 생신인데 호박죽이 이게 뭐냐? 오늘 뷔페 갑시다.” 할 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전혀 호박죽 끓이는 것처럼 굉장히 시답지 않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왕 의로울 것 같으면 다들 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그것 말고 뭔가 법 지켰다, 호사스럽게, 아주 요란스럽게 정당한 법을 정당하게 지켜서 의롭다, 이것이 폼 나지 않느냐는 거지요. “어머니! 내가 오랜만에 왔는데 뷔페 갑시다.” 죽 그릇 탁 치우면서 “호박죽 이것가지고 되나? 귀한 어머니 생신인데. 치워라! 나하고 같이 갑시다.”
이게 어머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율법으로 의롭다 하는 그것이 도리어 어머니로 하여금 숨겨진 증오와 분노를 유발하는 겁니다. “이러려면 내려오지 마라.” 이렇게 되지요. 주님의 증오의 현실성은 율법 아래 저주받게 함으로서 실제화되고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문제에요. 왜 이 본문이 어려우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가 갖추고 있는 것,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해야 나에게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따로 제공하는데 따로 제공하는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내가 못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이렇게 되겠는데 내가 나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구원받는 방법이 다 납득이 되고 인식이 되는 이런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 있잖아요. 그걸 마다하니까 인간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거예요.
더 어렵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가능성이 있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고 우리를 구원할 때,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네 최선을 다해라, 이런 식으로 요구할 걸’ 라고 백이면 백 다 선입감이 그런 쪽으로 가요.
‘정성들여서 최선을 다하면 그 정성 봐서 구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구원의 법을 줘도 별게 있겠어? 우리가 익히 알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주셨겠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줘버리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앞뒤 안 맞는 조치를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불가능한 조치를 줘버리면 하나님의 조치에 가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하늘나라가 텅텅 비게 된다는 이것은 어린애도 아는 이야기에요. 하늘나라에 자기백성을 채우려면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만 집합시켜서 그곳에 가게 하는 것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고 상식에 합당한 것이라는 것은 뻔히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뭐가 어려워요? 불가능을 줘가지고 아무도 하지 못하는 것을 제시해서 구원받으라고 한다면 이것은 애초부터 구원자체가 성사되지 않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그렇게 이삭도 아기를 못 낳아요. 그런데 분명히 약속은 뭐냐 하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자손들이 천국 간다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천국 가는 그 모양새가 하늘의 별같이 많다는 겁니다. 많으면 첫 시작부터 순풍순풍 애를 많이 낳아야 하는데 이것은 애가 생기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성경말씀이 어려운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적질을 하려해도 “내가 자식 줬지? 자식교육 어떻게 시켰어? 봐라. 내가 말씀대로 교육시키라 했는데 교육이 안 되어 있잖아. 율법 줘도 못 지키네. 나는 탈락!” ‘할 수 없었네. 우리가 게을렀어.’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아기를 아예 주지를 않는데요. 애를 줘놓고 제대로 뭘 하라고 해야 이야기가 주고받는 것이 되는데 처음부터 애가 없어요. 애가 생기지를 않아요. ‘야, 정말 하나님나라 가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불가능하구나. 그러면 더욱더 우리가 노력해야지.’ 하나님 뜻은 이 뜻이 아니에요.
불가능한 것을 알고 들어가서는 은혜인 줄 알아라, 그런 뜻이 아니고……, 제가 말을 잘해야 돼요. ‘역시 하늘나라 가기가 힘들구나. 사람의 힘으로 안 되고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구나. 그 정도로 어렵구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불가능한 일이 뭐냐 하면, 이미 일어난 그 자체, 일어나기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일어난 불가능이에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이미 벌어진 불가능이에요.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하면 애쓸 수 있는 여지는 있거든요. 불가능해도 열심히 하게 되면 봐줄 수 있겠지, 이렇게 되는데 이미 확정적 불가능이 일어나버리면 이것은 싸움이 벌어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과 내가 하고자 하는 것 사이에 감정문제가 발생됩니다.
우리가 삐지는 거예요. 아기를 안주려면 처음부터 “그래. 너희는 안 되겠다. 아기 없으니까 할 수 없네.” 이런 것도 아니고 아기 안 줄 것같이 하다가 아기를 줘버렸다는 그 말이지요. 그 다음에 또 문제가 뭐냐? 이왕 주시는 것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자식을 주면 아무 문제없었겠지요.
혹은 “애가 처음에 나올 때 사이좋게 나왔는데 나중에 싸웠더라.” 이러면 부모책임이 있어요. “우리가 애들 교육을 처음부터 잘못시켰구나. 하나님, 죄송합니다.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처음부터 싸웠어요.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태중에서부터 싸웠다는 말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어느 한쪽은 맞을 가능성이 있고 둘 다 안 맞을 가능성이 있고 둘 다 맞을 가능성이 있어요. 싸운다는 것은 서로 적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적이 되어 있을 때에 그 적이 되어 있는 상황은 인간 쪽에서, 이삭과 리브가가 원했던 것이 아니에요.
원했던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가정에 제시된 거예요.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딱 제시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제시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접촉관계에서 어느 한쪽은 마음 둘 수밖에 없어요. “나는 에서를 원한다.” “당신은 에서를 원해요? 나는 야곱.”
하나님께서 이질적인 두 개를 싸움을 벌이게 만들어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희망과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둘이, 당신과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 거예요. 너 천당 가면 나 지옥가고 내가 지옥가면 네가 천당 가고. 부부사이 좋~겠다!
둘 다 마음 합해서 둘 다 맏이인 에서를 좋아하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둘 다 맏이를 좋아하게 되면 자기들 쪽에서 하나님의 뜻을 통합하는데 있어서 야곱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벌써 장애가 돼요. 그러면 이것을 뺄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뺐을 때,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한쪽을 잘라버리고 나머지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거예요.
싸우는데 통합이 되어야 되고 ……, 내가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모순’이라고 했습니다. 싸우고 있는데 통합은 해야 되겠고, 안 싸우면 둘 다 내 자식이라고 하면 되는데 싸우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그것도 태중에서 싸우기 때문에. 이 문제 속에서 ‘아, 맞아. 이게 하나님 뜻이다.’라고 하려면 어떤 논리를 끄집어내야 되고 어떤 결론을 맺어야 싸우는 이런 정황까지라도 다 포함이 된 정확한 진리를 제시할 수 있느냐?
너무나 난해한 문제라서 정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과 에서, 그 둘 다 몸을 지녔어요. 그 두 개의 몸에서 나온 모든 실천성과 생각과 그 가정의 이삭, 리브가 그 네식구가 뿜어내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 대적이 되는 겁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네 명의 인간들이 뿜어내는 모든 생각과 행위와 실천이 정작 그 계시 안에 담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뜻과는 반대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과 에서하고 싸우니까 둘 중 하나는 진리일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둘 다 진리가 아닙니다. 둘 다 진리가 아닌데 둘 다 싸우고 있으니까 진리가 아니라면 그들이 싸울 이유가 없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진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적하는 모양새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싸운다는 것은 그 싸움에 나머지 복의 자손이라는 이 사람들, 나중에 구원받아야 될 이 사람들, 그 난장판에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고 거기에 얽히고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만들어버립니다.
일이 그렇게 풀려야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도 나옵니다. 믿음은 행함에 대척관계, 행함으로 사는 사람과 적의 관계에서 비로소 믿음은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어요.
행함 하는 자로부터 심한 핍박과 모멸과 무시와 죽임을 당하는 모양새로서 믿음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에 보면. 그러면 우리는 상식으로 생각합니다. 말을 제가 하고 있는데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했잖아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에 주님께서 “오케이. 그래 믿음으로 의롭다 해.”
그러고 난 뒤에 그 뒤에 전개되는 모든 일들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나오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는 그것을 위해서 그 믿음이 절대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조교로서, 모델로서 아브라함의 행위란 행위는 죄다 동원시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조차도 그것이 어디에 해당되느냐? 아브라함의 행위에 속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그 행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받기 전에도 행동을 했어요. 밥 먹고 오줌 싸고 다 했잖아요. 그 행위가 추후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버리면 그 행위의 성질이 부각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그냥 실천할 때는 실천이지만 갑자기 여기서 지시와 명령, 어떤 규격, 형식이 주어져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그 모든 자연스러운 실천이 율법에 맞나보자, 하는 식으로 규격화되어서 평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판단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할 때 그 믿음으로 의롭다는 하나님이 던져놓은 최후의 선언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왜 인간세계에서는 이 믿음이 나올 수 없는가를 하나님이 스스로 확인해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내린 계시 안에 하나님본인의 행위로서 인간의 행위와 대적관계를 이루는 겁니다.
리브가가 아기 못 낳아요. 그 후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하나 태어날 줄 알았는데 둘 태어났어요. 한꺼번에 애 둘 가지니 기분 좋아 보이지요. 그런데 임신한 배 안의 상태에 대해서 리브가가 알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해요. 태 안에서 K1, 격투기를 하고 레슬링을 하고 싸우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누구냐? 자신의 자식입니다.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것은 자기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내 자식이거든요. 나를 닮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의 속성을 빼다 박은 자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싸우는 자식을 보면서 이삭과 리브가는 뭘 간파해야 되느냐 하면, 약속의 백성이라는 것, 약속을 받지 않은 백성 말고, 지옥 가는 사람 말고 천국 가는 사람은, 부지런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과 마음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하나님 자기 싸움, 하나님 자신의 원래의 마귀와의 그 싸움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자신의 무대화시킨다는 것, 하나의 가설무대로 우리 허락도 없이 사용한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돼요.
구원이 우리 가정의 문제, 내 자식의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그 자식, 그 아들을 지상적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그걸 드러내는데 리브가의 가정, 이삭의 가정을 허락도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가정을 사용했듯이 똑같은 운명을 반복시키는 거예요.
한마디로 엉망진창입니다. 내 가정이라고 자부할 건더기가 전혀 없게 만들어버려요. 내 인생이라는 것을 조금도 허락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삭과 리브가가 금방은 몰라요. 금방은 모르고 어쨌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은 애 둘 생겼고 네 식구니까 어떻게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육의 본성이고 당연한 거잖아요.
육의 본성으로 살아가면서 뭔가 자기들의 속사정을 그 두 아들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아빠, 엄마, 두 아들, 네 명의 마음이 완전히 다 산산조각 찢어져서 개판되어버리는 겁니다. 엉망진창 되었어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하나로 통일도 되지 않습니다.
흔히들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들 합니다. 목사님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해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 하면 주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신앙생활 잘 못하면 주님과 점점 멀어집니다.” 공간상의 표현을 쓰면서 그렇게 하는데 그거 잘못된 겁니다.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복음을 알면 알수록 우리 안에서 짙어지지요.
그리스도의 희생이 어느 정도로 짙어야 되는가가 점점 짙어지고 윤곽이 드러나요. 지금도 하와이에서 윤곽 막 드러내고 있습니다. 짙어지고 있어요. 나는 내 인생이라고 여겼던 것이 그 범위가 점차 누구한테 잠식당해요. 내 인생 같으면 내 개성이 드러나야 되는데 내 인생이 아니고 내 개성 말고 주님이 이 땅의 악마와 싸우는 그 전투의 모습이 개성 있게 드러나는 겁니다. 시끄러워요 뭐가. 우당탕탕, 우당탕탕,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우리 안은 난리가 났어요. 우리 속은 내 스스로 조정이 안돼요.
에서와 야곱이 싸운다. ‘둘 다 내 자식인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맞습니다. 둘 다 자기자식 맞아요. 둘 다 자기자식이기 때문에 야곱은 엄마 리브가편에 먹고 맏이는 아빠 편먹고, 이제는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고 새로 난데없이 생겨난 그 자식이 아버지 엄마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겨버립니다.
아빠 엄마 사이에 구차 없이 전쟁이 벌어지게 만들었어요. 자식들 때문에, 자식의 싸움에 아버지와 엄마가 같이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어느 누구 편을 같이 들 수가 없어요. 누구 한쪽을 골라야 됩니다. 이 싸움에 어느 누구도, “나는 그냥 구경꾼 할래.” 이렇게 예외조치 당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오늘 본문에 보니 두 국민이거든요. 23절에 보면 “두 국민” 두 국민이 있다는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그 계시가 점점 더 짙어지는 겁니다. 점점 더 그 내막이 이 세상에서 구체화되는 거예요. 이 세상을 두 개의 국민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만듭니다. 살충제 넣는 달걀과 살충제 없는 달걀, 둘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살충제 있는 달걀과 없는 달걀, 그 말을 들은 당사자 이삭과 리브가는 서로 자기가 있는 자리가 좋은 쪽 국민이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결론을 보게 되면 둘 다 착각을 했어요. 둘 다 그리스도의 적이에요. 야곱, 에서, 리브가, 이삭, 그 네 명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그 누구도 믿음으로 주께 영광 돌리는 작자들이 아닙니다. 왜? 인간의 육의 본성을 가지고 주님께서 작업에 나서기 때문에 주님의 작업의 그 손아귀 속에서 어느 누구도 육의 육 됨을 자발적으로 버리고 영으로 옮겨갈 수가 없어요. 육이 있어야 비로소 그 속에서 주님이 개입해서 비로소 영이 생기니까.
전부 다 죽어야 될 이유로 범벅이가 되어줘야 비로소 주님이 결과로만 영생을 얻게 되어 있어요. 애당초 인간은 생명을 넘볼 입장이 못 됩니다. 그래서 이 네 명의 식구는 절대로 자기 육으로 인한 죽음을 피할 생각을 하면 안돼요. 이 투쟁과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될 수밖에 없고 또 가담되어야 합당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구원의 원칙을 제시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철저하게 행함만을 제시하고 행함으로만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주께서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그 진리를 생산하는 재료가 됩니다. 우리가 알아서 믿고, 그런 쓸데없는 짓은, 그런 어설픈 짓은 하면 안돼요.
주님께서 하시는 작업에 우리가 행함으로만 구원된다는 이 죄인의 모습으로 가담되어야 돼요. 물론 주께서 가담되도록 호출하시는데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이제부터 너밖에 모르는 너를 하나님의 영생 얻는 내 무대로 사용할 테니까 군소리하지 마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 중에서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있습니다. 죽을 나이도 아닌데 일찍 죽습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은 금방 알지요. 그것은 금방 아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것은 금방 모르는 거예요. 출애굽기 32장 27절부터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같은 종이 같은 종을 죽였고, 같은 식구가 같은 식구를 죽였습니다. 같이 고생해서 애굽에서 건너온 사람을 같이 고생한 사람이 죽여 버렸습니다. 네 원수는 집안 식구니라. 이걸 자진해서 하면서까지 주를 믿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주께서 이러한 사태를 유발시킵니다.
왜? 주님의 자기활동을 위한 무대기 때문에. 본인이 남 죽이는 것이 취미가 아닙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게 하셨어요. 형제를 죽이는 자도 이 행동이 그렇게 자랑스럽지 않고 죽임을 받는 자도 전혀 기쁘지 않아요. 모든 우리의 인생은 전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오직 기쁘지 않기에, 오직 우리의 기쁨은 이런 죄인을 우리의 행동에 견주어서 대신 죽으시는 하나님의 메시아의 행위, 메시아의 행위만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이삭과 리브가가 이미 일찌감치 경험케 하는 겁니다.
가족이 엉망진창 되었습니다. 자식 달라고 간구, 열심히 중보기도 했는지 모르지만 주께서 “응, 줄게.” 하면서 어느 가족도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들추어내는 가족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구원받고 그 이스라엘 때문에 소급해서 아버지도 구원받고, 엄마도 구원받고.
아,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그 행함으로 구원받으니 이것을 가지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이 내가 다듬어가고, 착실하고, 그러면 영광된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얼마나 주님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고 대적하는 짓인지를 저희들이 분명히 깨닫게 하옵소서. 지금도 내 인생과 우리 가족의 모든 앞일을 그저 주께서 쓰시는, 활용하시는 무대로 저희들이 흔쾌히 내놓을 수 있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