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창세기 26:8-11 / 이삭과 아비멜렉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6:8-11 / 이삭과 아비멜렉

정인순 2017. 8. 30. 21:42

 

 

이삭과 아비멜렉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창세기 26:8-11

(26:8)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26:10)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26: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아브라함 가정에 ‘아들’로서 태어난 이삭은 이제 본인의 가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아브라함에게 제공된 언약이 어떻게 이삭 가정까지 전이될 수 있느냐를 관심 있게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관심사에서 주의할 것은, 결코 개인적인 이삭이나 이삭 가정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26:1에 보면 나옵니다. “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 즉 언약은 패턴식으로 반복이 되며 그 패턴과 더불어 대자연의 변동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언약이 단순히 개인 가정이나 개인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대자연 운영의 핵심적인 원리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17:20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이 이해하는데 있어 인간들의 사적인 믿음은 참으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납니다.

왜냐하면 “산을 옮겨라”는 그 명령에 대해서 앞산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면 아예 ‘겨자씨만한 믿음’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그야말로 ‘전혀 믿음이 아닌 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믿음 속에 머물러 있다면 산과 들과 풍랑까지 그 믿음을 알아보고 스스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 ‘예수님 믿음 안’이라는 것은 이미 개인적인 믿음을 비롯해서 개인적인 미래까지 모두 자신에 국한된 사항들은 모두 부정되어버린 후입니다. 따라서 나만의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 믿음’ 안에서는 한데 섞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유일한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변화와 추이를 오늘 본문이 말해주게 됩니다. 보통 가정에서 아빠 엄마와 그리고 아들과 딸 있으면서 아빠는 성실하고 엄마는 가정을 잘 돌보고, 아들은 듬직하고 공부잘하고 딸은 예쁘면 우리는 보통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 ‘행복한 가정’이 과연 이 대자연의 핵심적 비밀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자연의 핵심은 ‘장자(맏이)’에 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서 서열상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지만 나중에 태어난 이삭에서 주저없이 밀려버렸습니다. 즉 ‘맏이’라는 것이 단순히 이 세상에 인간들 사회에서의 상식처럼 먼저 태어났다고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아브라함 때에 나타난 사실입니다.

이제부터 알아야 될 것은, 왜 먼저 된 자가 곧 맏이가 안 되어야 하는데 있습니다. 이 원리를 담고 언약이 이 세상이 제시된 것입니다. 이삭은 따로 자신만의 가정을 갖게 되면, 그 언약적 비밀은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쟁투 형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같은 크기의 풍선이라도 바람불기 여부에 따라 더 세세함이 확대되고 확실히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이동 중입니다. 과연 누가 이 장자라는 캐릭터(성격, 역할)에 부합되는지를 찾아가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의 소유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적인 소유용으로 ‘언약적 맏이’가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장자원리’로 인하여 모든 인간들은 근원적으로 비-정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개인성들이 상실되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각자의 개인성 속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아비멜렉 추장의 만남에서 이삭은 아비멜렉에서 하나의 ‘장애요소’가 됩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 언약의 구체화에서 반복되는 패턴이기도 합니다.

아예 이삭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름대로 자기만의 개인성을 부여잡고 살아가야 하는 이 아비멜렉 가정은, 이삭 부부의 만남으로 그들은 내면적 공포를 노출시킵니다. 무섭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놓은 자기 것이 날아가는 경우를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있어 ‘장애 유발요소’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의 원리가 최종 공개되는 날에 이 세상이 파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유지하기 위해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가 최종 밝혀지면, 즉 대우주를 관장하는 그 개인이 등장하면, 더 이상 우주는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삭이 품고 있었던 겁니다.

이삭의 개인적인 자질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장자이기에 장자의 캐릭터를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본의 아니게 이삭은 모든 이에게 장애유발요소로서 살아가게 되는데 심지어 이삭 본인에게도 그러합니다. 즉 이삭이 생각하는 이삭이 ‘장자로서의 이삭’에 대해서 장애유발요소입니다.

언약 인(人)에 있어 본인은 주인공이 아니었던 겁니다. 본인의 개인성을 자꾸만 박탈당하게끔하는 것은 함께 있는 언약입니다. 곧 장차 오실 ‘장자되시는 분’이십니다. 마술사가 주머니를 부시럭거리면서 주물이다가 하얀 비둘기 하는 끄집어내듯이, 이 대자연의 세계는 예수님의 장자됨을 끄집어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도는, 마치 성악가자 정확한 제 음정 자리를 찾아 소리를 내어야 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원리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 부부 앞에서 나름대로 저주를 찾아들지 않고자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리브가와 동침하지 않으므로서 죄의 징벌이 자기 가문에 들이닥치지 않도록 대비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방식이 곧 악이요 죄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구원은 그런 식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  안’ 그 자체로 완료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자신의 사적인 구원을 성사시킬 방식같은 것은 우주의 원리인 이 언약 안에서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끝까지 사수하고 지켜보려고 하다는 심각한 공포심에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인간들의 모든 육적인 면은 십자가라는 하나님이 제시한 최종 사건 앞에서 죄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키려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점을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로서 아무리 외롭고 서러워도 십자가 앞에서 우리들의 원망이나 불평을 멈추고 감사로 바꾸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3강-창 26장 8—11절(이삭과 아비멜렉)

1708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6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35페이지입니다.

 

창 26:8-11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그전까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삭의 가정 내에 야곱과 형 에서가 장난처럼 여겨지는 ‘장자따먹기게임’ 먼저 태어났다는 그 확정된 사실을 가지고 야곱은 대체 어떤 발상을 했는지, 구매가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하나의 상품처럼 팥죽과 떡을 가지고 구매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야곱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미 형 자체가 장자에 대해서 자기가 장자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것은 에서가 크게 잘못 생각했는데요. 장자됨의 어떤 기능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에 의해서 정말 에서가 장자라면 그 장자됨의 기능의 모습으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약간 어려운 말로 ‘캐릭터는 행동이다’라고 합니다. 어떤 배우가 하는 역할 또는 성격은 그 사람의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배우가 역할을 맡아 놓고, 어떤 캐릭터를 맡아 놓고 행동은 엉뚱한 행동을 하면 감독에 의해서 당장 교체되겠지요. 야곱이 본 것은 그겁니다. 세상적으로는 먼저 태어났다, 나중 태어났다고 그렇게 보지만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부터 해서 이삭까지 내려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생각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볼 때, 우리 집안의 장자라는 것은 일반집안의 장자하고 성격이, 캐릭터가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그것을 야곱은 이미 캐치를 했으니까 서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구매를 시도한 것이지요. 그렇게 하게 된 것은 에서가 알고 있는 장자 말고 다른 식으로 장자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과연 아브라함과 이삭사이에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이삭이 밀어나고 장자가 되었잖아요. 그러한 것이 일회성으로 끝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언약이,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예언이 단순히 구라, 빈말, 할아버지가 착각을 해서 자기 혼자 그런 생각을 해놓고 이것은 신의 계시, 예언이라고 할 수가 있잖아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언이라면 이 패턴이 반복돼야 되는 거지요. 과자를 찍어낼 때 같은 틀에서 찍어내면 똑같은 과자가 만들어지잖아요.

 

이스마엘을 밀어내고 이삭이 장자로 들어섰던 그 패턴이 장자라는 캐릭터, 성격을 따라서 계속 후대에 이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본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무엇까지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해놓고 그냥 방치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천지창조 한 어떤 원칙, 비밀을 분명히 일률적으로 계속해서 여기에 전수시킬 수 있다는 식으로 야곱은 보았고 그것이 장자기능에 있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에서는 장자기능을 소홀히 해서 장자에서 잘렸다고 되어 있어요.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요.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한 일로 봅니다.

 

하나님이 빼앗아서 동생한테 준 것으로 봐요.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그걸 자기 야망으로 빼앗은 것으로 보지만. 그 말은 뭐냐 하면, 장자캐릭터의 이동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 얘가 맞을까, 아니면 얘가 맞을까, 얘가 맞을까? 어? 아니네? 얘(야곱)이 맞네.’ 그렇다면 장자의 이동의 경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장자에 합당한 부류의 인간들과 장자에 합당하지 않은 부류가 하나님께서 장자를 이동시키면서 확연하게 드러나지요.

 

한쪽은 천국이고 한쪽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어가지고 하나님, 하나님, 찾지만 실은 굉장히 외롭잖아요. 말 해봐야 들어 먹히지도 않고. 계란 가지고 바위치기 마찬가지로 아무런 영향력도 못 입히고 어떤 결과를 기대했지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얼마나 실망스럽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실망스러울 때 우리가 성경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원리를 알고 장자였던 사람이 그다지 환대받지 못했어요. 심지어 예수님마저 싫어버린 바 되었잖아요. 누가 그를 믿었으리오.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었으면 정말 외로울 뻔 했어요. 제자들마저 배신했으니까. 목자를 치니 양이란 양은 다 도망갔으니까.

 

자, 내 편이 없고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는 이 천지창조의 원리를 포기해야 될까요? 내가 괜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것을 버려야 될까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정말 어렵습니다. 어려운 이유가, 장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점점 더 세밀해지고 내용이 확대되거든요. 확대되는 이유가 있어요.

 

쉽게 하겠습니다. 한 가정에서 아빠 엄마 있었고 아들 딸 있어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면 그 가정이 구원받습니까? 아빠 엄마 있었고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러면 그것이 구원받는 가정이 되느냐 그 말입니다. 구원이란 말이 뭐냐 하면, 구출이에요. “아이고, 빠져나왔네. 큰일 날 뻔 했네. 잘못하면 발목 잡힐 뻔 했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이지요.

 

아빠 돈 잘 벌고, 엄마는 살림 잘하고, 아들 공부 잘하고, 딸 예쁘고, 다들 건강하고, 하하하 웃고, 아버지 일찍 들어오고, 엄마는 집안 인테리어 너무 잘 해놓고, 애들은 “백점 맞았어요.”하고 전교 1등해서 들어오고, 그게 행복한 것은 맞는데 행복은 하지만 그것이 이 우주의 원리, 장자의 원리냐 그 말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안보는 이유가 에서같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나는 맏이기 때문에 빼앗길 것이 없고 잃을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장자라는 것은 움직이는 거예요. 장자는 움직인다는 말이지요. 장자는 이동하고 있어요. 부합되는지 아닌지. 꼭 신데렐라동화 같아요. 신발 가지고 발 재보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지요.

 

그 벗어놓은 신발과 딱 맞을 때 하나님의 이 세상 운영하는 원리가 그 현장에 나타난다 이 말이지요. 오페라 가수가 노래할 때 음정이 그 자리에 딱 올라가서야 돼요. 늙은 성악가가 힘이 없어서 음정 억지로 올리게 되면 듣는 사람 괴롭거든요. 젊은 성악가는 음정이 딱 그 자리에 있습니다. 개인독창 할 때 음정 안 맞으면 못 들어요.

 

소위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하고 성도라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늘 확신 있게 움직여야 돼요. 진짜 못 먹어도 고, 하는 것처럼. 천지가 개벽이 된다 해도 “이거였어.”라고 확신이 있어야 돼요. 확신이 없는 소리 하면 안 됩니다. 이거 해볼까, 저거해볼까, 미끄러지면서 ‘이게 아닌가?’ 이렇게 하면 안돼요. 확신에 거하라고 했잖아요.

 

딱 그 자리에. 딱 그 자리를 잡는 것이 뭐냐? 내가 행복 하는 방법, 그런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운영하는 핵심정보, 그거라는 말이지요. 그게 딱 캐치가 되어야 돼요. 그것에 대해서 지난번 이야기한 것은, 이삭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이삭가정의 이야기를 했으면 그 다음에 중요한 것, 이삭가정에서 야곱과 에서가 장자문제를 거론했으면 스토리가 이렇게 전개되어야 돼요.

 

그래서 드디어 야곱은 본격적으로 장자를 쟁탈해서 자기에게 인수하는 작업을 유지해나갔다는 이런 것이 있어야 되는데 오늘 본문 25장에 팥죽 팔아서 장자되었다과 해놓고 26장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왜 다른 이야기가 여기에 끼어드느냐 그 말입니다. 이것부터 해결해 봅시다.

 

이삭이 아브라함과 있을 때 그 가정은 이삭가정이 아니고 아브라함가정이었어요. 이삭은 아브라함가정의 아들인 거예요. 이삭은 수동적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과 관계했고요. 이삭은 그저 제물로 바치라고 하니 제물로 바쳐지고, 아버지가 신붓감까지 마련해주니까 결혼도 하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이삭이 새로운 가정을 꾸몄습니다. 가정을 꾸몄다는 말은 이삭 개인이 알고 있던 것이 그 범주가 확장된 거예요. 풍선이 그냥 있으면 작지만 같은 풍선이라도 훅 불면 크기가 부풀어진 풍선이 되겠지요. 부풀려진 풍선이 되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과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어떤 예언과 어떤 약속을,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이지요, 창조의 원리를 어떤 식으로 그 이삭의 인생 속에 담았을까, 그것이 점점 더 확대되면서 뚜렷해지고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된 자식이다. 끝.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없는데서 생겼다. 그 말은 맞는데 그 말은 아브라함 있을 때 한 이야기거든요. 죽었다가 살아났고 없다가 있다는 그것이 단지 그 때 일회성으로 아브라함가정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삭 개인이 가정을 꾸몄을 때 그 가정 내부에 그 원리가 어떤 식으로, 다른 변형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느냐를 우리는 살펴야 돼요. 상당히 어렵지요.

 

그래서 이 어려운 것을 쉽게 하기 위해서 미리 창세기 26장을 보겠습니다. 패턴을 보세요.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거예요.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또 흉년이 들었어요. 패턴이 같지요. 흉년, 기근이 들었다 그 말이지요.

 

여기서 제가 마태복음 17장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변화산 이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지금 잘못 들은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금 다른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에요. 겨자씨 하나의 믿음이 있으면 “산아 옮겨라” 해서 옮겼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산이 안 옮겨지는 믿음은 믿음의 선에 들어섰다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산을 옮길 정도라면, 내가 “산아 옮겨라.”하면 갑자기 저 팔공산이 안 움직인다면 내 쪽의 믿음은 믿음 축에도 안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 믿음의 기준가지고 2천년 기독교 역사, 우리교회도 그렇고 저부터 해서 모든 사람의 믿음을 여기에 다 집어넣어보세요. 그것도 겨자씨만한 믿음, 큰 믿음도 바라지도 않아요. 겨자씨만한 믿음 있는 사람 혹시 있다면 불러내서 테스트 해보는 거예요. 팔공산, 팔공산이 좀 무리다 싶으면 작은 산도 있잖아요. 작은 산도 무리다 싶으면 흙무더기 해놓고 이걸 옮겨보라고 하는 거예요.

 

안되지요. 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은 로마서에서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전부 다 지나 개나 예수 믿는다고 덤벼드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들이 왜 그런 문제성을 지녔는가? 오늘 본문이 설명을 해줘요. 믿음이 있는 곳에 자연이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주객을 바꿔보세요. 이삭이 가는 곳에 기근이 생긴 거예요.

 

이삭이 “자, 비오는 데 비 그만 오고 이제부터 기근이고 풍년 되지말고 이제부터 흉년 돼.”이러면 갑자기 예, 하고 흉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삭자체가 자기가 뭘 갖고 있는지를 몰라요. 신약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제가 하는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시키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 11장 내용이잖아요.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장자입니다. 장자가 있는 곳에 이 대자연은 똘마니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풍랑이 일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풍랑아 잠잠하라, 했지요. 잔잔했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의 믿음은 뭐예요? 제자들은 믿음으로 바가지로 물 푸는 것 밖에 더 했어요?

 

산을 옮기기는커녕 물 푸는 것 밖에 못했어요. 이게 행함이거든요. 그러면 제자들은 지옥 갔습니까? 여기서 제자들의 개인성은 포기되어야 되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 이삭은 자기 있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고 개인과 개인관계라고 본 거예요. 이삭 눈에 아브라함을 하나의 개인으로 본 거예요. 나랑 똑같이 하나의 존재로 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는 인간의 개인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 구원받아요, 사적구원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구원 없어요. 개인구원이 있으면 본인의 믿음 가지고 팔공산을 옮겨보라고요. 제가 지금 헛소리 하는 겁니까? 팔공산 옮기는 것이 심하면 양동이에 물 퍼놓고 한 번 걸어보라고 하지요.

 

베드로가 바닷물 위를 걸었어요. 갈릴리호수위를 걸었잖아요. 또 해보라고 하세요. 못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는 베드로가 뭘 쳐다봤느냐 하면 예수님만 봤어요. 예수님만 보니까 물이 베드로보고 반응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 믿음 보고 반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의 관련성을 보고 물이 베드로로 하여금 안 빠지도록 조치를 한 거예요.

 

이정도 돼야 구출이에요. 이게 구원이라는 말이지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야. 나는 구원 못 받아.”라는 식으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나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해, 라는 것을 되뇌면서 구원을 받고 있어요. 세상은 나에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반응하지 내 기도에 반응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어떤 때는 기도가 되는가?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삭이 자기 아들 에서하고 야곱하고 둘이 싸웠는지 아닌지 몰라요. 나중에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삭은 개인문제라고 생각한 거예요. 개인문제로 생각해서 이상하게 아버지 때도 흉년이 들었었는데 자기한테도 흉년이 들었다는 말이지요.

 

아브라함 아버지가 아비멜렉에게 간 적이 있어요. 그 때 아비멜렉 가정의 여자들이 유산되고 난리가 났잖아요. 임신이 안 되도록 태가 다 닫혀서. 그래서 아비멜렉이 싹싹 빌었지요. “당신이 괜히 거짓말해서 우리 저주받았잖아. 당신이 기도해줘. 당신은 보통 사람 아니잖아.”그래서 기도해서 태가 열리니까 아브라함이 갑자기 졸부가 되었지요.

 

갑자기 많은 재산을 얻은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이니 보통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졸부가 된 겁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때 단회적인 것으로 끝났으면 몰라도 또 다시 그 패턴이 반복이 되니까 이삭은 여기서 눈치를 챘어야 되지요. 이것은 이삭이라는 내가 이삭이라는 나 자신을 포기를 해야 되고 나에게서 나를 떼 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장자가 아니고 내 안에 장자가 들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챘어야 돼요. 야곱도 사실은 그것을 나중에 눈치 채지요. 야곱이 장자가 아니고 내속에 있는 이스라엘, 그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자가 얍복강가에서 천사가 왔을 때 비로소 아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릴까요? 산이 옮겨지는 것을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자연의 반응은 나하고 상대 안하고 내 안에 계시는 분과 상대함으로서 동시에 나는 나 개인성을 주님 앞에 박탈당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했고, 나는 이렇게 했고, 나는 이렇게 기도했고, 이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겁니다. 박탈당하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고, 주께서 이렇게 인도하셨고, 주께서는 내 인생을 이렇게 몰아넣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셨습니다, 주객이 주님으로 바뀌는 겁니다. 아직 이삭은 정신 못 차렸어요. 이삭이 정신을 못 차렸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한 분인지 누굴 만나게 하느냐 하면, 전에 아브라함처럼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만나게 됩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블레셋에서는 흔하디흔한 이름이죠. 대대로 아비멜렉이니까 일종의 추장이라고 보면 돼요. 추장을 만났는데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뒷조사를 다 한 모양이지요. 뒷조사를 당해서 누이가 아니고 아내였다는 것이 들통 났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했다는 말이지요.

 

아비멜렉이 이삭을 만나면서 무엇을 겪느냐하면, 내부적인 공포를 느낍니다. 내재적 공포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삭이 흉년이 들어서 피신을 했습니다. 이삭이 있는 곳에서 약간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면 아비멜렉이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다음시간에 할 브엘세바가 나와요. 그렇게 이동을 하면서 이삭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어요.

 

그저 개인적으로 생존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이 대자연의 기근과 자신과 관련성이 있다는 추론을 속 시원하게 확정적으로, 논리적으로 잇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아비멜렉이 등장하면서 이삭이 감을 잡게 되는 겁니다. 나는 이 세상의 장애유발요인으로 침투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이 세상의 장애요인으로.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면서 천지창조 속에서……, 마술사가 보자기를 벗겨내면 비둘기가 나오잖아요.

 

그 보자기역할이 대자연이라면 그 보자기는 벗겨지도록 되어 있고 파괴되도록 되어 있고 그 안에서 비둘기가 나오듯이 이 천지를 창조하신 장자,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대자연을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그 역할을 지금 이삭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파괴되려면 자기가 거기에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장애요소를 느껴야 돼요.

 

일종이 거부하고 싶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두려움을 야기 시키는 존재에요. 이삭이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이 세상은 완전히 멸망되어 버립니다. 완전히 불로 타버려요. 지금 새로 장관 임명된 사람이 창조과학회 이사라고 하거든요. 방송에서 창조론인가, 진화론인가, 하는데 창조론도 아니고 진화론도 아니에요. 멸망론이에요.

 

그 사람은 멸망론 이사로 바뀌어야 돼요. 창조에 관심두면 안됩니다. 멸망에 관심을 둬야 도 돼요. 왜? 예수 그리스도 오심으로서 이 세상은 지금 자기의 역할이 다 끝났어요. 장자의 캐릭터가 그 캐릭터에요. 그 일반적인 것, 부모가 되어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더라, 그 행복한 가정 앞에 등장한 하나님의 낯선 언약인, 장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장애요소로서 의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장애요소를 의식하면서 벌벌 떠는 그 모습……, 이삭은 필히 아비멜렉을 만나야 되는데 왜 그런가 하면, 만나야 그 자가 바로 이삭 본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저렇게 벌벌 떨고 떨면서 뭐라고 대책을 세우느냐 하면, 이 여자는 남의 여자기 때문에 건드리면 벌 받는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죄책감이 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악이고 죄가 되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 어떤 죄책을 느낀다는 것, 왜 죄책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줄곧 나는 행복했을 것이라는 거예요. 아비멜렉이 주장하는 그 주장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행복해도 마땅한 존재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것은 이스마엘이에요. 이삭이 아니고 이스마엘 모습입니다. 개인성이에요. 자기만 행복하면 돼요. 개인성유지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것을 수리로 계산하는 거예요. 측정하는 겁니다. 교단 바꾸고, 교회 바꾸고, 하고 난 뒤에 잘 바꿨는지를 뭘로 측정합니까? 나 개인적으로 행운이 얼마나 더 찾아오고 앞으로 미래가 얼마나 더 피는가, 라고 생각하고 뭔가 안좋은 일이 벌어지면 거기에 대해서 어디서 실수했는지를 찾는 거예요.

 

이래놓고 그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면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믿음이란 뭐와 관련되어 있다? 개인과 관련 없고 이 우주의 요동, 이 우주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사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믿음이 아니에요. 산더러 저쪽으로 가라고 하면 산이 옮겨져야 돼요.

 

중요한 겁니다. 왜 에서와 야곱이 다툰 것을 이야기하다가 왜 이삭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과 왜 만나게 하는가? 스토리상 누가 최종승리 했는지 바로 가면 될 것인데요. 바로 이삭이 자기가 만들어진 그 가정, 에서가 있고 야곱 리브가의 그 가정이 아비멜렉같은 일상적인 가정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성도의 가정은 일상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곤란한 대목은 후딱 지나가는 경향들이 있는데요. 후딱 가는 것 내가 꼭 찍어서 그냥 못 지나가도록 만들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전토와 자기가족이나 처자식을 버린 자는 영생을 얻고 하늘나라에서 백배를 얻는다고 했어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재산부터 해서 가족이고 뭐고 모든 것이 해체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파괴입니다. 내가 파괴되면 안 되잖아요, 하는데 너 자신을 쥐포 찢듯이 찢는다는말이 아니라 네가 갖고 있는 너 개인, 나 위주, 예수 믿고 난 뒤에 나 어떻게 되지, 나 천국 갈지 싶다는 그 개인성이 있잖아요. 그 개인성 자체가 화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언약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에요. 만약에 그 개인성을 유지하게 되면 예수님의 개인성이 가려지고 오히려 방해받게 돼요. 우리 자신에 의해서. 열 두 제자가 예수님 앞에서 도망을 쳤을 때 왜 도망을 쳤습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잖아요. 누가 누굴 살리는 겁니까? 본인이 본인을 살리는 겁니다. 그 살리겠다는 대상이 뭐예요? 나의 개인성이에요. ‘오늘 교회 왔으니 내일쯤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이것도 개인성이잖아요.

 

제가 어제 대전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은 성경에서 너는 죄인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실제로 생활하는 것을 보게 되면 기어이 우리는 의미 있는 양 여기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모든 행동에 나서요. 주님은 분명히 죄인이라 했는데 그 말을 안 들어요. 고집이 보통 센 고집이 아니에요.

 

분명히 죄인이기에 인생이 어떻게 망가져도 합당해, 라는 조로 주께서 이야기하신다면 우리는 “너무 그렇게 세게 나오시면 저는 예수 못 믿어요.” 하는 식으로 자꾸 겁을 내는 거예요. 그게 죄책감이에요. 이게 내면의 공포라는 겁니다. 신화론에 보면 인큐버스와 서큐버스라는 단어가 나와요. 아주 어려운 단어인데요.

 

신화에 보면 여자한테는 꿈에 악몽을 꿀 때 덮치는 것을 주특기로 하는 남자 유령이 나타나는데 그걸 인큐버스라 하고, 반대로 남자쪽에서는 여자유령이 나타나는데 그걸 서큐버스라 해요. 여자귀신이 서큐버스고 남자귀신이 인큐버스인데 이게 뭘 뜻하느냐? 인간 속에 내재하는 공포와 욕망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개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미 비정상이에요. 비정상이면서도 극구 비정상이지만 그래도 내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기어이 그걸 지켜내려고 하는 거예요. 이삭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기근을 만들어서 자기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아비멜렉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인간아! 죄는 그런 식으로 없어지고 의인되는 것이 아니야.”

 

언약자체로, 그 관계성으로 이미 우리는 구원이 완료가 되고 구출이 된 겁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자기개인적인 주특기, 개인적인 윤리도덕으로 조심할 것은 조심하고 절제할 것은 절제해서 자기개인성을 지킬 요량으로 하나님앞에 계속 행복하고 벌 받지 않는 개인적인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할 때 이게 바로 언약을 알기 전의 이삭의 본 모습을 이삭에게 목격하게 하는 거예요.

 

“저게 바로 네 모습이야. 이제 네 가정은 내가 해체할 거야.” 언약이 와서 해체해 버리지요. 그러면 이삭의 개인적인 것이 상실될 때 남는 것은 뭐냐? 남는 것은 언약만 남아요. 이제는 언약이 주도권을 쥐고 언약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맺는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삭을 통해서 알다시피 이삭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의 이삭에 대해서 육적인 이삭이 장애요소를 유발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구원하고자 잡아당기는 주님을 내 욕심이 그 발목을 잡고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장애요소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분명한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여, 제가 입을 닫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 하리요.”

 

십자가에서 우리가 분명히 죄인이라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나는 나에게 미련이 있어서 계속 나를……, 주님을 드러내야 되는데 자꾸 나 자신이 살고자 하는 꼼수를 쓰고 있는 이 못된 성품, 참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지만 감사한 것은 이 세상, 이 대자연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인생의 변화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주께서 변화를 일으켜서, 때로는 기근, 흉년, 때로는 풍년, 이렇게 하면서 네 인생 이미 내가 접수했다는 것을 알려주니 이것보다 더 큰 복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예수 믿는다 하지만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그게 헛소리인지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겠습니까? 이제는 믿음 없다는 그 이야기가,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