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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26:34-27:4 / 이삭의 축복권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6:34-27:4 / 이삭의 축복권

정인순 2017. 9. 13. 21:39

 

 

이삭의 축복권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9월 13일                      

 

본문 말씀: 창세기 26:34-27:4

(26: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26: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7:2)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27:3)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꾸준히 이 세상을 관리하시는 형편에서 성도는 매일 새로워지게 됩니다.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구원받았다’는 자부심이 오늘에 오게 되면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그 교만한 자는 오늘 주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해내시는 구나’가 됩니다. 즉 구원이 나의 문제로 여겼던 것이 새로움으로 인하여 나의 할 일이 아니라 주님의 할 일임을 알게 합니다.

이 와중에서 우리 성도는 평소의 육적인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삭의에서 사랑은 거의 일방적입니다. 비록 에서가 이방여인과 혼인을 하던 말던 상관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에서에게 다 물러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에서에게 넘겨주려는 것은 곧 ‘자기됨’입니다.

과연 이 ‘자기됨’이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구약에서는 재산이 증식되고 몸이 건강하는 것이 복이라고 여겨지지만 신약에 오면, 천국가는 것이 복이요 지옥가는 것이 저주입니다. 따라서 이삭이 자식에게 주려는 축복이 단지 재산이 아니라 영생이 되려면, 이 이삭의 축복 행위에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야 합니다.

오류가 있는 인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께서 본래의 구원 작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신다면 결국 구원이란 인간의 개인적 일이 아니라 곧 하나님에 속한 일이 됩니다. 바로 이 인식 전환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보면서, 이삭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자세를 취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개인이 행동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삭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러합니다. 에서가 이방여인과 혼인하는 것도 에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따라서 에서나 이스마엘이 이삭이나 인간은 본성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이삭의 오류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행한 축복권을 하늘의 정당한 축복이라고 간주해주시는 그 근거에 관한 내용입니다. 즉 이삭이 위상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바치는 제사의 제물이 되어 모리아산까지 동행했습니다.

거기서 이삭은 ‘아브라함 언약’을 위해 아버지 아브라함이 사정없이 내리치는 칼을 코 끝에서 보아야했습니다. 즉 이삭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 제단 위가 이삭의 확정된 자기 자리입니다. 이삭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인간 세상을 봐야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가상세계’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상세계’란 ‘실재 세계’와 대립을 이룹니다. 실제로 있는 현실과 세계는, 인간들의 가상세계관으로 철벽으로 가리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8-39에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생존의 차원의 막’으로 온통 둘러쳐진 세계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생존의 막’이 걷어지면 그 배후에 ‘생명의 현실’이 나옵니다. 이 막을 움켜지고 찢어내려면, 언약의 사람이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늘 실패하고, 오류가 저질러야 합니다. 진정한 현실은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 ‘가상 세계’의 주도권은 ‘죽음’이 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쉬지 않고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생존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55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즉 성도에게는 사망의 표적이 되지 않는데 이는 구원이 성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친히 처리하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나 영생은 인간이 나설 문제가 아닌 겁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인류와 배후의 악마를 향해 뒤끝을 작렬시키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그 행위에 대한 저주의 처벌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악마를 사냥하고, 악마은 우는 사자와 같이 인간을 사냥합니다.

이 세상은 주고받는 세계입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이삭은 자신의 축복을 전부 넘겨줄 아들 에서에게 먼저 별미를 만들어가지고 오라고 시킵니다. 즉 타인은 희생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챙기겠다는 겁니다. 이 작업을 지시하면서 이삭은 자신의 전통과 활을 가지고 가게 합니다.

이는 곧 자신의 현 위신과 체면과 명예를 전부 에서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습니다. 즉 에서는 이삭에게 있어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에서를 부정하므로서 곧 이삭 자체에 대해서 부정해버리십니다. 이삭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이런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못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삭을 통해서 실시된 그 축복이 신약에 와서 ‘영생’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창세기 14:18-19에 보면,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이 세상이라는 ‘가상현실’은 구멍이 뚫려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브라함은 연결시키는 것은 ‘멜기세덱 제사장’입니다. 그의 존재는 땅에 있으면서도 전혀 ‘땅의 존재’가 아닌 것으로 설명해야 될 사람입니다. 곧 ‘땅에 있는 하늘 사람’입니다. 즉 하늘과 땅의 분리는 이로소 땅과 땅의 분리로 지상화됩니다.

언약이 성취성을 보이는 지점은 오늘 본문에 이삭이 행동하는 그곳입니다. 이삭은 오류를 범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이삭을 교정하십니다. 이는 이삭이 원래 자리인 제단의 자리와 수풀에 잡혀 있었던 수양의 만남을 통해서 ‘이삭 언약’을 조성하시려는 겁니다. 천국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조성되는 겁니다.

죄인과 주님의 십자가의 만남이 곧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윈도, 곧 천국의 창문이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 발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오류로 조성된 입장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5강-창 26장34절-27장4절(이삭의 축복권)

1709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6장 34절-27장 4절입니다. 구약성경 37페이지입니다.
 
창 26:34-27:4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이 자기 맏아들 에서에게 장자권을 넘겨주려는 이 행위에 대해서, 그 뒷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이삭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뒷내용을 모른다고 칩시다. 모른다고 칠 때 아버지가 자기가 미는,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에게 재산 전부를 남기는 것, 그게 뭐 그리 탓할 일이냐 이 말이지요. 그게 무슨 꾸중들을 일이겠어요?

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자기 좋아하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자기가 싫어하는 자식, 자기 말 안 듣는 자식은 좀 고생하기 바라는 우리 마음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성경에서 이삭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삭의 이 자연스러운 이 마음과 오늘날 우리 마음이 합치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나중에 보면 이삭이 잘못한 거지요. 잘못된 이삭의 행동과 지금 우리가 그냥 일상의 마음의 일치된다면 결국 구원이라는 이것은, 구원을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한테는 성립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어서 좋은데 가야지, 라는 그 발상자체가 어느 마음에서 나온 발상이냐?

전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마음은 그대로 유지한 채 죽어서 좋은데 가는것만 욕심을 내는 그런 심보를 가질 때 우리가 우리 서로에게는 그것을 탓할 수가 없어요. 왜? 똑같은 마음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탓하십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누굴 탓하느냐 하면 이삭을 탓하는 거예요.

자기 좋아하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 행동, 이 행동이 나중에 가서 반대로 뒤집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뒤집어지지 않고서는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겁니다. 그 뒤집어지는 이야기를 저는 이렇게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변신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어제만 해도, 나는 예수 피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상당히 정상적으로 보이고, 복음적으로 보이고 누가 봐도 거기에 대해서 ‘옳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간다는 것이 당연하지.’라는 마음이라고 생각되지요. 하지만 오늘 오게 되면 그 마음 뒤집어져야 됩니다. 어제는, ‘나는 예수 피 공로로 구원받는다. 누가 뭐래도 자신 있게 옳다고 생각한다.’ 했던 그 마음이 오늘 와서 뒤집어지면 오늘은 어떤 마음이 되는가?

‘역시 예수 피로만 구원받는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 3자가 보기에는 그 말을 문장으로, 글로 쓰면 어제 쓴 그 글이나 오늘 내가 뒤집어졌다고 여긴 그 글이나 동일해요. 남들 보면, 제 3자가 보면 동일한데 본인은 아니에요. 본인은 완전히 다릅니다. 본인은 알아요. 문장으로 보면 동일하고 글자로 써놓으면 다 똑같은 글씨지만 사람의 마음가짐이 완전하게 달라집니다.

이것은 교육받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날마다 우리 자신에게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고 우리는 구닥다리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굉장히 강렬합니다. 옛것을 쥐고 더 이상 수정없이 이대로 죽 갑시다, 하는 고집들이 있어요. 가장 정확한 내용들만 꽉꽉 채웠기 때문에 이제는 수정하거나 손 안봐도 될 정도로 완벽한 진리성, 그것을 소유함으로서 이대로 구원받겠다는 성향이 광장히 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가졌던 그것, 그 인간들이 평소에 세세한 행동 하나 마음가짐 하나하나는 전혀 구원하고 상관없는 행동이 삐죽삐죽 튀어나옵니다. 그걸 누가 튀어나오게 했는가?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말과 이론이 다른 행동이 튀어나오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니 그래서 이삭은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삭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마태복음에 나오지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천국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다. 그랬던 이삭이 오늘 본문에서는 에서한테 자기의 축복권을 넘겨주려고 시도한 그 이삭이 신약에 오면 하늘나라 가 있습니다. 우리도 희망 있지요?

엉터리인데 갔어요. 그러면 그 가운데 주께서는 무슨 조치를 하셨는가? 그게 중요합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제 ‘예수 피 믿고 구원받는다. 이것은 복음이다. 이걸 마음에 간직하고 소지해야지.’ 하고 그 마음을 오늘도 유지하려고 했는데 오늘도 하나님이 작용해서 그 결론은 뭐냐? ‘역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천국간다.’ 하는 동일한 문장을 내놓았을 때 다른 점이 뭐냐?

어제는 내가 지식을 소유함으로서 간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주께서 그 원칙대로 일방적으로 퍼부음으로서 내가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되새겨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벌써 하루가 지난 오늘에 와서 어제를 생각할 때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는데 막상 오늘이 오니까 내가 유지하고자 하는 그 유지책은 완전히 무효 시켜 버리고 주님께서 그 날 필요한 새로운 은혜를 주실 때에 결론적으로는 같지만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바뀐 거예요.

‘아,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이게 주님의 소원이구나.’ 내 소원이 아니었고 주님의 소원이었다 그 말이지요. 주님의 소원을 어제는 어떻게 생각했다? 내 욕심이 가려버린 거예요. “주님 저 천국 갈래요.” 오늘 와서는 “그거 나 너에게 허락한 적 없다. 네가 천국가고 싶어서 가는 그 나라가 천국이 아니야. 그런데 나는 너를 천국에 집어넣고 싶다.” 그것이 더 세야 돼요.

그 힘이 더 세야 돼요. 내가 가고 싶다는 그 힘보다 주께서 반드시 너를 넣어주고 싶다는 것이 더 강렬하게 나올 때에 우리는 내가 가고 싶다는 그 생각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생각인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뒤에 교회 와서 예수 믿는다 하고 세상에 나오면 여러 모양으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럴 때 다시 교회 오게 되면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망이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묻지요.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성도한테 사망은 드디어 사망의 화살을 쏠 수 없는 대상이 돼요. 사망은 누구에게 공포가 되고 위협이 되고 두려움이 되지만 성도한테는 사망이 쏠 데가 없어요.

성도는 사망을 이긴 겁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그런 말씀이 나온 이것은 뭐냐? 네가 지금 죽을까 두려워하고 있지, 그것을 그 말씀 가지고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너 지금 뭐하고 있어?” “밥하고 이런 저런 것 합니다.” “밥 할 때 네 마음가짐이 어때?” “밥해서 먹고 살려고 합니다.” “바로 그러니까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는 밥을 하든 빨래를 하든 뭘 하면서 ‘죽으면 안돼. 더 살아야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돼. 죽음이 나에게는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 아, 조금도 살아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뿜어내면서 우리는 행동 하나하나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남들이 보면 그냥 설거지고 그냥 빨래에요. 티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걸 알아요. 하나님은 그걸 아신다고요.

“너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잖아.” 이 말은 뭐냐? 네가 살고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망과 생명의 싸움인데 너는 네 개인적인, 사적인 싸움으로 그걸 가져온 거예요.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드리는 겁니다. 지금 성경전체는 주님이 와서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그러면 우리 소관이 아니고 우리가 감당할 업무가 아니에요.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 손을 떠나버린 일인데 우리는 평소에 습관이, 내가 어떻게 해서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 평소 생활 습관이 되다 보니까 예수님이 주신 영생가지고 내 힘으로 내게서 일어나는, 내게서 뿜어내는 죽음을 한 번 이겨볼까 해서 내 개인용도로 그것을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의 뜻과 완전히 배치되는 겁니다. 인생에서 내가 손을 떼면 되는데 주님의 영생이라니까 그 영생을 들고 와서 나는 이제 안죽고 살겠다고 개인용도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도대체 신앙생활도 아닌 것을 억지를 부린 거예요. 전혀 신앙생활 한 적도 없고 할줄도 모르는데 자기 장래에 어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성경구절 괜찮은 것 뽑아서 다 집어넣어놨어요. 어떤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이삭이 에서한테 축복을 밀어줄 때 제가 왜 창세기 26장 34절을 읽었느냐 하면,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라고 했는데 이게 약속의 땅이 아니고 그 헷족속의 여인과 혼인을 했다고 되어 있어요. 혼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이삭이 알아요.

이삭이 나이가 많아요. 137세가 되었는데 이삭의 나이가 137세가 된 것, 그리고 창세기 25장 17절에 보면 이스마엘이 언제 죽었는가 하면 137세에 죽어요. 14살이 이스마엘이 많으니까 137세에 죽고 그 뒤 14년 뒤에 이삭이 나이 많아서 축복권을 넘겨줄 그 시점이 온 겁니다. 둘 다 전혀 주님의 뜻은 고려 없이 이삭이나 이스마엘이나 똑같아요.

이스마엘의 경우 평소 그의 행동 그대로를 방치하고 그냥 놔둬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지옥으로 죽 미끄러져 가는 거예요.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서가 그렇게 비약속으로 나왔으면 맏이라 해도 그걸 내쳐야 되는데 그럴 맘이 없어요. 에서한테 축복을 준다는 말은 뭐냐? 이삭의 모든 마음가짐을 누구한테 전환시키느냐 하면 에서에게 모두 다 이전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에서가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거든요. 부정당하는 그 말은 이삭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부정당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축복권은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삭은 자기 아들에게 개인적, 사적으로 넘겨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마엘과 사고방식이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이삭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겁니다. 이삭을 어디로 돌려오느냐? 이삭이 원래 세상을 제대로 봐야 될 시점은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산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이삭은 이미 제단에서 죽은 인간이에요. 이삭은 이미 죽은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그 제단에서 죽었던 지점, 그 포지션, 그 지점으로 이삭은 자기 인생을 봐야 되는 겁니다.

이삭의 인생은 이미 고정적이고 확정난 거예요. 마치 성도의 인생이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릴 때 고정되고 확정된 거예요. 성도의 모든 안목, 세상보기는 그 십자가위에 있는 예수님과 공히 세상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세상을 볼 때에 비로소 아까 말한 고린도전서 15장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로 인하여 이겼다, 가 아닙니다.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긴 거예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일 뿐이에요. 시다바리, 예수 그리스도의 시다바리입니다. 가게에서 종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영업이익이나 그런데 신경 쓰면 안돼요. 교인 수 몇 명이 오고 헌금이 얼마 들어오고, 그런 것은 종이 할 생각이 아닙니다. 종은 그 따위 생각을 하면 안돼요.

다윗이 좀 사람들 좀 불었다 싶을 때 사탄 보내서 인구 세다가 하나님께서 전염병 가지고 그 인구 다 날렸습니다. 헤아리던 그 인구 다 날렸어요. 7만 명, 많이 죽었어요. 다시 말해서 인구 많아서 구원받는다, 가 아니라 어쨌거나 저쨌거나 네가 구원되고 안 되고는 네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 소관이 아닌데 왜 자꾸 네 소관으로 보느냐 그 말입니다, 네 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그래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랬잖아요. 믿음의 정조를 지키고 신조를 시킨다고요? 언제 믿었어요? 언제 주님 믿은 적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자기자신을 믿었지 언제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남들이 믿는다 하니까 자기도 그런 줄 알고 교회 와서 믿는 척 했지요. 찬송하면 같이 찬송하고. 언제 믿었습니까? 돌아서면 나만 챙기는데. 그게 무슨 믿음이에요.

주님은 날마다 우리를 믿음 없는 존재로 밀어놓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가 모리아산 제단에 누워있는 나 자신에서 한발자국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십자가침대 하나 사가지고 거기에 누워있었으면 좋겠어요. 십자가침대에 누워서 “주여, 저는 한발자국도 이 십자가에서 떠난 적이 없나이다. 이대로 부르시면 이대로 가겠나이다.”

왜 우리가 설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왜 이삭으로 하여금 이렇게 오류를 하게 합니까?” 그게 오늘날 우리 이야기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뭘 알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오류와 실수투성이를 가지고 주께서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 “너는 불가능하지. 맞아. 하지만 내가 가능케 해.” 해서 온전히 주님이 공로만 높이는 겁니다.

주님의 공로만 드러내기 위해서 못난 놈, 이 순재가 말한 “못난 놈!” 그 못난 놈을 주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이삭처럼. 이삭이 얼굴이 못나서가 아닙니다. 행동 보세요. 에서가 이방 여자하고 결혼해도 관심 없어요. 내가 일단 밀어주는 자식은 끝까지 밀어주는 거예요. 일방적입니다. 차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3절에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아버지의 위신과 체면을 몽땅 다 아들에게 전수합니다. 내가 곧 너라는 말입니다. “너는 곧 나야. 네가 있음에 나는 즐거워.” 에서는 이삭의 코스프레에요. 그냥 꾸민 인형이에요. 제 2의 자아입니다. 전통과 활, 그게 아버지 본인 거예요. 본인 기구를 줬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에서야, 이 아버지의 명예와 위신과 체면을 손상시키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물을 테니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우리가 지금 죽는 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원통하고 심각하고 그런 겁니까? 질문 다시 할게요. 내가 지금 몸이 아파 죽는 것이 정말 이게 심각한 일입니까? 이게 1번이고요. 2번, 지금 몸은 멀쩡하게 안죽고 살아 있는데 내 명예와 위신과 체면이 온 동네방네 손상되는 이것이 비참한 일입니까? 3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비참한 일입니까?

셋 중 어느 것이 비참한 일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삭의 축복이라 하는 것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 아버지의 유산을 받는 것이 축복인데 신약성경의 축복이라는 것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고 신약성경에서 저주라 하는 것은 지옥 가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이삭이 저주할 때 “너는 지옥가라.” 그런 이야기 안했거든요.

이삭이 야곱한테 나중에 축복할 때 “너는 천국가라.” 그런 이야기 안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빠진 절차를 다 알아야 돼요. 구약에서 유산 넘겨주는 것이 축복이고 빌어먹는 것이 종인데 왜 신약에서는 천국 지옥으로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는가? 양과 염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왜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의 작전이 뭐냐 하면 생존의 차원을 하나의 막으로 보는 거예요. 생존의 막으로 세상을 꾸미도록 허용을 해요. 그리고 그 막을 우두둑 뜯어버립니다.

뜯어버리면 그 배후에 뭐가 나타나는가? 생존의 차원을 현실이라고 보는데 생존이라는 현실을 뜯어버리면 그 뒤에 생명이라는 차원의 현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뜯기는 역할을 이 에서와 야곱과 이삭이 해야 돼요. 이게 구약해석입니다. 싸움장면 나오는 영화 보게 되면 하여튼 주인공은 총알을 열댓 방 맞아도 안 죽고 범인들은 막 쓰러지잖아요.

그런데 악인 역 하는 엑스트라들이 그냥 넘어지면 재미없잖아요. 감독이 뭘 넣어요. 그냥 쓰러지지 말고 커튼을 붙잡으면서 쓰러지는 장면을 넣거든요. 커튼 붙잡고 죽어버리면 함께 커튼도 우두둑 뜯어지지요. 주님은 뒤 끝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으로 악마에게 넘겨서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어쨌든 밥 먹고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으로 완전히 세상을 하나의 막으로 인테리어 해 놨어요. 꼭 이 뒤 같이. 이 커튼 젖히면 유리창이 나오거든요. 완전히 생존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어요. 축복이라는 것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고, 건강한 것이 복이고, 거기서 태어나게 만듭니다.

태어나서 내 두뇌 속으로, 머릿속으로, 지각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와 사고방식은 뭐냐? 살아남는 것, 밥 먹고 잘 사는 그것이 남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스펀지 적시는 것처럼 푹 젖게 만들어요. 그런데 마태복음 24장 37절에 보면, 예수님 하신 말씀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인간이 할 게 그것 말고 할 게 또 뭐가 있습니까? 교회 와서 기도하는 목적이 뭡니까? 기도가 목적이겠어요? 잘 먹고 잘 살고, 좋은데 취직하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기업 키우고, 그것 말고 다른 인간의 할 일이 없다고 여겨요. 그런데 그 커튼요, 하나님은 악마를 사냥하거든요. 악마를 사냥하고 악마는 인간을 사냥한다고요. 우는 사자와 같이.

이게 먹이사슬이에요.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잡아먹게 만들어요. 인간을 잡아먹은 악마를 주님께서 추적해서 사냥을 한다고요. 그러면 악마가 무너지는 그 순간 천국이 잠간 눈으로 보이는 그 순간은 우리가 철벽처럼 ‘나에게는 먹고 사는 그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고 그것보다 더 소중한 문제는 없어.’라는 그 커튼을 우두둑 뜯어서 “세상에, 이런 세계가. 그렇다면 나는 죽으라면 죽을게요. 이런 세계가 있었네!”

먹구름 걷히고 태양 비추는 것처럼, “그동안 난 뭐 했어? 난 그동안 누구에게 속아 넘어간 거야? 눈에 보이는 이것이 다가 아니었는데.” 아아, 문제는 이 세상에 나의 전부를 바친 거예요. 나의 청춘과 순정을 다 바쳤어요. 내가 이 세상에 다 바친 그것이 나 대신해서 잘되면 나는 내가 잘되는 것으로 여기고 눈 감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이삭의 행위에요.

그 행위에 대해서 누가 여기에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죄 없는자가 돌로 치라고 했는데 누가 돌을 던집니까?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합니다. 이삭이 자신에게 줘야 될, 나중에는 야곱에게 주지만 야곱에게 줘야 될 축복은 창세기 14장에 보면 그 원형이 나옵니다. 18절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은 가상세계라는 겁니다. 가상세계. 우리는 철석같이 오직 이것만, 오직 이것만 있는 세계, 이것뿐인 세계가 이 세계인 줄 알았는데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은 이 땅에 아비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등장한 사람, 그 멜기세덱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거룩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 취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유일하게 연결하는 구멍을 뚫는데 그 구멍을 언약이라고 하고 그 언약이 실제로 이 땅에 일부나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뭐냐?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기적 같은 자식이 이삭입니다. 이삭의 자기 자리는 뭐냐? 제단의 자리에요. 하늘과 땅, 가상세계와 진짜 있는 세계의 이 땅에서의 차이를 보라는 말이지요.

하늘과 땅은 분리되어 있잖아요. 그 분리됨이 언약을 통해서 그 하늘의 내용이 지상에 쏟아지게 되면 땅은 같은 땅인데 같은 땅이 아니고 어떤 분리된 지점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것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그 몫을 해내게 되는 거예요. 특수한 지점이 생겨요. 특수한 장소, 그게 뭐냐? 일반사람들은 남이 희생해서 자기가 잘되는 것을 원해요.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에서야. 나를 위해서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라. 사냥해라. 네가 열심히 고생해서 나 먹고 싶은 것 먹자. 나는 그만한 권한이 있어. 그래야 네가 복을 받을 수 있는 권한자가 되는 거야. 그냥 먹을라고? 그러지 마. 내가 원하는 것을 고생해서 가져오게 되면 내가 마음껏 줄게.” 남이 희생한 것을 자기가 얻겠다는 겁니다. 이게 생존의 세계입니다.

사람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고생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에요. 고생 덜하기 위해서 돈을 벌지요. 이게 얼마나 모순됩니까? 고생 덜하기 위해서 실컷 고생하잖아요. 희한해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편하게 살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특수한 지점은 어떤 지점이냐 하면, 고생 덜하고 복 받겠다는 인간이 희생해야 돼요.

“희생 네가 해라. 네가 희생 해.” 이것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늘의 세계의 질(quality)은 지상의 질과 달라요. 지상은 나 위주기 때문에 남은 나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고, 고생해야 되고, 울어야 되고, 그 덕으로 나는 웃어야 되고, 성공해야 되고, 기뻐해야 된다는 주의에요. 왜? 나는 소중하니까.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에.

이것을 어느 인간이 고칩니까? 못 고칩니다. 못 고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이야기 나오지요. 선악과 의미가 뭐냐고 누가 여러분에게 물으시거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선악과의 의미는 에덴동산은 갇혀 있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면 정답입니다. 선악과의 의미는 뭐냐, 너는 이것뿐이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여기서 벗어나지 마. 너는 여기 갇혀 있는 여기가 네 자리야.” 그런 뜻이에요.

어렵게 말씀 드릴까요? 선악과라는 것은 인간이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거예요. 인간이 금지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악한 짓이니 이것은 안해야지. 이것은 착한 일이니 이것은 해야지. 하나님 앞에 칭찬받아야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금지한 것이 있어요. 그 금지하는 법 자체를 금지시키는 거예요. 선악을 알지 말라. 악을 알지 말라, 가 아닙니다. 선악을 알지 말라고 했어요.

선악을 알지 말라는 말이지요. 법의 금지가 아니라 법 자체에 대한 금지에요. 금지에 대한 금지라고요.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나름대로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다는 것이 만약에 나왔다면 그것은 이미 너는 저주받을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선악과 전으로 돌린다는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지요. 이거 안 되면 저주입니다. 축복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철없는 이삭을 통해서 아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선악과 저 너머의 것이에요. 하나님의 영생의 것입니다. 선악과 너머의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참 어려운 것이에요. 이삭이 에서에게 “내게 별미를 가져오게 되면 내가 복을 주고 네 동생에게는 내가 복을 못 주겠다.”라는 자체가 이미 이삭의 사적으로 내려진 금지인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 안에서 금지의 메커니즘이 작동중이라는 말이지요. 사람이 나쁜 사람 있고 좋은 사람 있고, 싫은 사람 있고 좋은 사람 있지 그걸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못해요. 어떻게 못하는데 어쨌든 간에 그것은 영생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못하는데.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되지를 못한 채 그냥 세상생존의 차원에서 내 위신과 명예만 잘되면 만사형통이라 생각하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어디로 돌리느냐 하면 이삭을 아버지가 바쳤던 그 제단위치로 다시 되돌려주는 겁니다. 그 제단의 위치에 갔을 때 거기서는 아브라함은 빠져야 돼요. 빠지고 누구와 만나야 되느냐 하면 멜기세덱을 만나야 되는 겁니다.

그 멜기세덱의 모습의 실물이 뭐냐? 수풀에 갇혀 있는 수양이었습니다. 여호와이레지요. 이스마엘이 “난 이방여자가 좋아.” “그래 해.” 좋든 말든 관계없어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이지요. 이삭도 “나는 누가 뭐래도 큰 아들 좋아하기 때문에 큰아들한테 내 재산 다 물려줄 거야.”

이삭이나 이스마엘 같으면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겠는데 주께서는 그렇게 방치하는척 하지만 원래 이삭의 자리가 내 기준 가지고 결정짓는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묶어 놓았던 그 제단의 자리기 때문에 그 제단에서 누굴 만나는가? 수풀에 갇혀 있는 양을 만나야 될 자리거든요. 수풀에 있는 양과 그리고 죽어 마땅한 이삭과의 만남에서, 죄인과 그리고 그 죄인을 위해 희생하신 분의 만남에서 언약은 계속 미래로, 미래로 이어져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삭언약이. 거기에 실려서, 못난 놈의 못난 행동에 실려서 언약이 이동하는 거예요. 이동하게 되면 인간은 들러리에 불과한 겁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내가 사적으로 받을 것이 아니고, 나한테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이 우리한테 이야기하고, 주님이 악마보고 이야기하고, 주님이 세상을 향해서 쏟아내는 고함소리입니다.

그 고함소리를, 어제는 철딱서니 없어서 ‘나는 십자가 믿고 구원받는다.’ 하다가 오늘은 철이 나서 이제는 내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이야기를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새롭게 느껴지는 새로운 은혜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일 되면, 내일이 되면 “나 어제 새롭게 은혜 받았어.” 그것을 또 가지고 가요. 또 소유한다고요.

주님이 주체가 되지 않고 하룻밤 잤다고 해서 갑자기 내가 또 주인공 돼버려요.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자기 일을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어요. 선교고 헌금이고 전도고 예배고 구원이고 일체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맡긴 적이 없다는 말은, 나는 항상 오류지요. 오류가 나오는 것을 기뻐해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 실망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해서 굉장히 하나님에게 고맙고 감사해야 됩니다.

주께서 관여하시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아직 야곱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은 잘못했지만 야곱은 제대로 했다, 라는 성급한 결론은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할, 다음 시간에 내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음 시간에 할 5절, 6절, 이 말씀은 그 이삭의 오류를 그대로 리브가와 야곱이 똑같은 짓거리로 하게 돼요. 똑같은 짓거리를!

속여서라도, 그게 뭐라고 그게, 그 소유가 뭐라고. 왜 소유가 아무것도 아니냐 하면 그 소유의 도착지점이 나가 돼 버려요. 그러면 나는 새로운 재산의 증식으로 인하여 쉽게 나를 부정하고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가난하면 한강철교에서 뛰어내리지요. 다 말아먹고, 사업 망하고, 채권도 들러붙고, 이러면 이참에 잘되었다 하고 뛰어내릴 수 있는데 갑자기 복권이 당첨되어서 유명인사 되어버리면 한강다리 가도 못 뛰어내려요.

아까워서. 이게 오류라니까요 이게. 내가 못난 놈 되는 것도 오류고 내가 잘나도 오류고, 이래도 오류고 저래도 오류고 구원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고. 구원은 주의 일이에요. 놀라운 것은, 감사하고 기적적인 것은 주께서 다른 사람도 사용할 수 있는데 나를 사용하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하면, 너는 맨날 “주님은 희생하세요. 저는 놀렵니다. 남은 희생하고 나는 그냥 배부를 겁니다.” 이런 못 돼먹은 사고방식이 바로 나라는 것을 날마다 들춰내어서 멜기세덱같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천국을 조성하는 겁니다.

천국은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지금 하나님께서 창문 새로 열듯이 여기에 만들어지는 겁니다. 컴퓨터 켤 때마다 윈도우 열잖아요. 안 켜면 윈도우가 안 열리잖아요. 주께서 은혜줄 때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모를 때는 얼마나 자기구원에 매진하고 열중하고 이거 하나 챙기려고, 영생 챙기려고 얼마나 달음질 했습니까? 그러나 막상 주님 찾아오고부터 이게 내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너무나 감사하고 이제는 당당하게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제는 사망에도 얽매이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