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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들뢰즈 161108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80여명의 신학자들[부산강의]

들뢰즈 161108

정인순 2016. 11. 8.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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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61108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7-들뢰즈

(강의:이근호 목사)

 

 

들뢰즈 해봅시다. 들뢰즈란 이 사람이 요 근래 현대인들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철학자에요. 제가 말하는 현대는 자본주의사회거든요. 자본주의사회는 경쟁 사회잖아요. 경쟁 자체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계속 달리게 만들고, 비교하게 만들죠. 비교한다는 말은 네 것 따로, 내 것 따로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비교해서 이기는 자가 승자가 되고 진 자는 패자가 되어 자괴감을 갖게 됩니다.

 

분명히 옛날보다 잘 살고 오래 살고 풍족하다고 자부하는 현대인들에게 항상 딜레마처럼 불행, 이런 것처럼 다가오는 거예요. 자살도 많고. 성공했는데 자살한 사람 없잖아요. 그리고 내 것을 의식하지 않고 자살하는 사람 봤습니까? 내 것 망가졌다고 자살하죠. 내 것 아닌데 뭐. 이래서 자살하는 사람은 없어요. 자살하는 이유가 힘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살의 두 종류가 자기 명예, 자존심, 소유 재산 이런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 몸이 아파서 남한테 의지한다는 그것도 일종의 자존심인데, 남한테 의지한다는 게 꼴사납잖아요. 내가 용납하지 못하는, 적어도 이 정도인데 나보다 못한 인간에게 내 생을 맡긴다는 것이, 상대방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 내가 용납이 안 되니까 차라리 짐 되기보다는 사라져버리면 얼마나 짐을 덜겠느냐, 그래서 자살하는 경우.

 

내가 남한테 짐 되는 것이 내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와 본인이 본인에게 용납되지 않아서 예를 들어서 성공해야 되는데 그게 실패로 끝났을 때 자기에 대한 울분에 의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지요. 어쨌든 자살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현대사회가 사람들이 기대한 사회가 아니란 말이죠. 아니면 해결책을 내놔야 되잖아요. 철학자들이 뭐예요? 소위 진리를 안 다는 그들이 해결책을 내놔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해답이 없어요. 해답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 각자 자기 것이 있다 했지요. 내 것이라는 걸 인식하잖아요. 그러면 내 것 아닌 것은 남의 것이 되지요. 벌써 나 생기고 남 생기죠. 나를 의식한다는 것은 남을 의식한다는 말이고 둘 다 의식한다는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둘 사이에 반드시 차이 발견하고 비교 생기고, 경쟁 생기고.

 

그러면 차이, 비교 이것이 예를 들어서 2015년도를 기준으로 누가 더 센지 비교하자고 나옵니까? 지금은 2016년도잖아요. 과거에 네가 잘났고, 내가 못났다는 것으로 게임이 끝나는 게 아니에요. 2016년도 올해는 누가 잘났는데? 2016년으로 끝납니까? 내년 되면 2017년도 누가 잘났는지 해보자. 이런 식으로 가면 평생에 걸쳐서 비교와 경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비교, 경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습니까? 내 것이 있다고 했지요. 내 것을 분해해보자. 내 것은 힘이고, 힘을 사회적으로 표현할 때는 권력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것이니까 내 힘이 되고, 남의 것은 타인의 힘이 되겠죠. 타인의 힘과 비교하고 경쟁하는데 언제까지 한다? 언제까지도 없어요. 평생을 계속하는 거예요.

 

제게 라이벌 되는 고모가 둘이 있어요. 하나가 사대부중에 들어갔습니다. 동생도 지지 않겠다고 들어갔어요. 그 다음에 그 당시 대구에서 일류인 경북여고에 들어갔어요. 동생도 따라 들어갔어요. 언니가 그 당시 제일 세다는 효성대 약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동생은 실력이 안 돼서 못 들어갔어요. 언니가 좋은 남자와 결혼하니까 동생도 따라 하는 겁니다. 라이벌 의식이 계속해서 평생을 가는 거예요. 이게 자본주의사회 현대인의 삶입니다. 멈추질 않아요. 경쟁을, 시합을. 뭐 멀리 미국까지 경쟁할 것 없어요. 눈앞에 띠는 모든 게 경쟁 대상자입니다.

 

비교와 경쟁에서 긴장이 나오겠지요. 긴장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잖아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스트레스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뭔가 해결점을 제시해야 돼요. 기껏 해결점을 제시한 게 인문학강좌에서 나온 게 소통하라는 겁니다. 소통하는데 목적이 있어요. 어떻게 소통하느냐? 상대방을 이해해서 배려하고 양보하라는 거예요.

 

천주교는 이걸 네 자로 이야기했습니다. 내 탓이오. 차 뒤에도 붙여놨어요. 그동안 소통 못한 이유가 니 탓이라고 해서 못했다는 겁니다. 그럼 이걸 내 탓이라고 하면 양보가 되니까 소통이 된다는 겁니다. 자칫하면 내 탓의 경쟁이 붙을 판이에요. 누가 더 마음이 겸손한지. 세상사는 게 너무 각박하니까 배려와 양보를 해야 되고, 우선 남을 이해해야 되겠지요. 역지사지란 말이 있어요.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그런 걸 하기 위해서는 서로 먼저 말을 건네는 걸 소통이라고 합니다.

 

인문학강좌의 목적은 뭐냐? 소통해서 남을 이해해서 배려하고 양보하게 되면 경쟁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경쟁을 낮출 수 있고 살기 좋은 괜찮은 공동체가 된다고 이것을 해결점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에 문제가 있어요. 소통을 먼저 하겠다는 쪽이 힘에 있어서 안정감을 갖고 있어요. 안정감을 두 자로 이야기하면 여유가 있어요. 여유가 있을 때는 남을 배려할 수 있는데 만약에 여유가 없다면, 사는 게 빡빡하다면 남을 배려하겠습니까? 남을 이용하겠지요. 인간의 본성이 그러니까. 짐승의 본성이니까.

 

대한민국이란 공동체가 소통이 되려면 대한민국 전체가 경제적 여유를 누려야 되겠지요. 대한민국 전체가 여유를 누리고 거기서 여력을 갖추려면 대한민국은 중국과 일본과 다른 나라와 또 경쟁해야 되겠지요. 대한민국 스스로 아무리 똘똘 뭉쳐봐야 집단주체 자체가 벌써 다른 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다고. 물건 팔아먹고 달러 얻어서 우리끼리 배려하자. 그러면 이 원리가 다른 나라는 가만있어요? 마찬가지잖아요. 큰 덩치의 경쟁과 비교, 이걸 국수주의라 하잖아요. 자기 나라만 생각하는. 국수주의가 극대화되면 파시즘이 되고. 국수주의를 다른 말로 하면, 애국이죠. 우리나라 만세, 애국하는 것.

 

그러면 소통이란 것이 결국 거대한 이기주의가 되겠지요. 우리끼리는 굉장히 착한데, 원래 조폭도 조폭끼리는 의리가 있어요. 그 의리가 뭘 희생으로 한 의리입니까? 약한 자를 약탈한 그 힘 위에 자기들끼리 만의 의리잖아요. 그래서 철학자들이 아무리 윤리를 펼쳐도 우리끼리만, 우리교회, 우리교단, 우리기독교란 우리끼리란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제안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나 어떤 윤리학자도 자본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등장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들뢰즈에요. 그럼 들뢰즈가 뭘 공격하겠습니까? 내 것, 네 것 이라는 그 자체를 공격한 거예요.

 

내 것이라는 것을 들뢰즈는 주체로 바꿉니다. 내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겁니다. 내 것을 파고 들어가니까 내 것이란 주체가 그냥 2015년도의 내 것,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다는 그 그거가 어디 있을까요? 어제와 오늘의 내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을까요? 이걸 칸트나 피히테, 셸링 등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언급했어요. 자기 반성적 사고라 합니다. 자기를 늘 돌아보고 늘 확인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누구를? 나를. 이것은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에요. 어린아이 때는 엄마를 돌아보면서 항상 어디 있는지 확인합니다. 놀다가도 엄마 어디 있는지 돌아봐요. 아무리 재미난 게 있어도 엄마 없으면 울면서 엄마 찾아 가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늘 확인하는 것, 이걸 자기 반성적이다. 이것을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아닌 것은 짐승이 되겠지요. 짐승은 자기 반성적 사고가 없는 겁니다. 짐승을 나무란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개나 원숭이는 그런 게 혹시 있겠지만 일반 짐승을 나무라면 반성하겠습니까? 반성 없는 인간을 짐승이라고 하잖아요.

 

문제는 이 반성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겁니다. 내가 뭔가 자꾸 확인하는 것. 그래서 앞에 ‘전’자를 붙여요. 내가 나 있기 이전에 반성적인 것, 전반성적인 것. 자기가 없는 힘들의 질주, 내가 되기 전에 어떤 힘, 그것을 들뢰즈는 주목합니다. 그걸 순수한 힘이라 합니다. 순수한 힘은 인간이란 신체에 자아가 있으니까 인간이 인간되기 위해서 많은 힘들이 우연히 부딪히고 만났다는 거예요.

 

서양 사람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난해하지만 동양 사람한테는 난해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불교가 이 이야기거든요. 우리의 만남은 인연이죠. 어떻게 네가 나를 만나? 다 인연이다. 수많은 가능성과 선택성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딱 만났기 때문에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에 지금까지 초점이 모아졌다면 하나가 되기 전의 원형적인, 원 물질들의 힘들의 마구잡이식의 충돌과 마주침과 흩어짐부터 들뢰즈의 철학은 출발합니다.

 

거기에는 우연적이기 때문에 목적이 있겠어요? 목적이 없고 내 것이 있기 전이기 때문에 목적도 없을뿐더러 순수한 힘이라 했는데, 다른 말로 순수한 힘들의 차이만 있는 겁니다. 목적이 없고 차이뿐이에요. 지금부터 들뢰즈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 전에 어떤 사람이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꽃씨를 보게 되면 뭘 연상하게 되죠? 꽃봉오리를 연상하게 되지요. 도토리를 심으면 참나무 나오지요. 도토리 안에 참나무 들어있는 거죠. 옛날 무식한 할머니라도 꽃씨를 보면 꽃봉오리 생각나잖아요. 도토리 보면 참나무 생각나죠. 안에 잠재돼있는 거예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 힘들의 운동은 그 자체적으로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목적이 있다고 이야기할 때 이 목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있어요.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원형과 환영, 진짜 있는 것과 나타난 것으로 구분했어요. 진짜 원형은 이데아 세계고 나타난 모든 것은 형상이라는 겁니다. 형상은 이데아가 아니니까 가짜일 가능성이 많지요.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삼각형이죠. 이것도 삼각형이고, 이것도 삼각형이라면 삼각형의 원형은 어디 있어요? 이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인은 모르지만 원형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겁니다.

 

삼각형이 삐뚤삐뚤하고 어설프더라도 딱 보면 삼각형이라고 대충 알아먹잖아요. 그러면 삼각형의 원형은 어디 있겠어요? 죽어 봐야 안다는 겁니다. 인간이 육체를 떠나서 영혼이 되면 죽어봐야 알지만 이 땅에선 모든 게 비슷하지만 어설퍼. 그래서 플라톤 종교는 어서 이 땅의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혼만 빠져 가는 그곳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플라톤 천국은 진리의 세계, 원형의 세계, 가짜가 전혀 없는 반대로 이 땅은 모조리 가짜밖에 없는.

 

피타고라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가 힘드니까 이걸 벗어나서 욕심 없는 세계에 들어가자, 라고 진리를 추구하는 이유가,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 아픔이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그러려니 하면 좋겠는데 이론상 허풍떨지만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큰소리치지만 세월호에 학생들 빠져죽어도 지금도 교통사고 일어나는데 뭐, 큰소리치지만 막상 자기 남편이 자기 아내가, 애지중지한 자기 자식이 죽었다고 할 때 충격 정도가 아니에요. 실성합니다. 사람이 미쳐버려요.

 

교인 열 명 되는 교회에 아홉 명은 천 원 내고 가는 교인이고 그것도 한 달에 한두 번 오는데 한 여자 집사님은 부자임에도 작은 교회에 와서 교회재정, 목사 월급, 관리비 다 담당하고 헌금만 해도 이백만 원씩하고 하니까 그 한 사람으로 교회 운영이 다 돼요. 그러면 목사가 그 사람을 귀히 안 여길 수가 있겠어요? 그 사람 놓치면 교회가 문을 닫을 판인데 그래서 늘 심방하고 기도해주고 그렇게 했는데 어느 날 그 집사가 죽으면 목사는 하늘이 무너집니다. 교회가 유력한 자가 여러 명 되면 하나 없어도 괜찮은데 개척교회 비애가 그것 아닙니까. 하나가 너무 기둥 같아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완전 천지가 무너진 것 같지요.

 

따라서 아무리 인간이 돈을 벌고 건강해도 죽음이란 이것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약점인 거예요. 까짓 것 나 죽는 거야 눈 감으면 그만이에요.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괜찮은데 내가 공들였던 대상,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사는 보람과 기쁨을 거의 백 퍼센트 충족시키는 어떤 고귀한 존재가 사라지면 따라 죽을 수밖에 없어요. 따라 죽고 싶은 마음, 살고 싶지가 않지요. 항상 죽음이 우리 옆에 지뢰밭처럼 테두리 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모든 철학의 근거가 뭐냐 하면, 사람이 죽어도 버틸 수 있는 방안을 살아생전에 만들어내야 돼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죽음이라는 마지막 위험요소를 두고서도 인간은 영웅처럼 다시 일어서고 불행을 앞두고서도 행복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방안을 강구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의 발달과 관련돼있습니다. 이성의 발달이 곧 종교의 발달이에요. 거기서 죽어도 괜찮은 아이디어, 죽어도 또 사는 아이디어, 죽어도 다시 재생, 부활하는 아이디어, 그 아이디어가 종교 내에 들어와서 그 종교 힘으로 죽음과 실패의 아픔을 견뎌보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종교 가졌다고 소중한 것의 잃음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겠어요? 못 그래요. 종교는 종교고 아픔은 아픔이고.

 

그래서 지난 시간에 라캉이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종교를 뒤집어써도 자기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과도한 아픔을 이겨낼 수 없다. 그걸 소문자 a라 했지요. 알 수 없는 협박을 인간은 늘 받고 있습니다. 행복 속에도 이게 사라지지 않아요. 성공함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이 라캉에 대해서 공격합니다. 그건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이 들었다는 것은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고 이차적인 문제다. 기표와 기의를 합치면 기호가 돼요. 이게 기호 문제에 있을 때는 완전한 진리 값을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는데서 오는 딜레마가 나의 허전함을 유발하기 때문에 인간은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결핍 때문에 불행을 느낀다는 거예요.

 

그럼 들뢰즈 철학은 그 결핍을 갖는다는 자체가 내 것이 있기 때문에 생긴 잘못된 부대현상이라는 거예요. 내 것을 아예 없애면 그런 아픔과 결핍도 없고 과도한 것도 같이 사라진다는 것이 들뢰즈의 아이디어입니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을 굉장히 공격해요.

 

프로이트는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아이를 너무 조져서 그게 아이의 주체가 되어서 자식은 항상 아버지의 눈치 봐야 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 자리는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아버지 자리에 친구나 교사나 목사나 대통령이나 왕이나 자기보다 더 뛰어나고 영웅적인 것을 계속 거기에 교체시키면서 대입해서 나보다 월등한 존재를 교회에 가면 신이지요. 신, 예수, 삼위일체를 자기 아버지로 여겨서 거기에 눈치 보면서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주체를 가공시키려는 다듬어 나가려는.

 

무의식을 그렇게 해석하는데, 들뢰즈는 무의식은 그게 아니야. 무의식은 나쁜 게 아니야. 억압이거든요.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특징은 억압된 게 있어서 정신병을 유발하니까 억압에 적절한 기호, 단어만 찾아서 이게 내 말이라고 풀면 풀린다는 겁니다.

 

정신분석의 치료방법은 말로 하죠. 당신의 전생은 뭡니까? 당신은 어릴 때 뭐했습니까? 그것을 본인 말로 표현케 함으로써 그렇게 표현하는 순간 억압에서 풀려 정상인으로 돌아온다는 것. 정상에 선다는 것은 바로 상징계 속의 일원으로 살 수 있다는 것, 눈에 보이는 현실에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들뢰즈는 말하기를 억압은 조작됐다는 거예요. 억압 안 받으면 될 것 아니냐는 거예요. 억압받기 때문에 결핍이 생기고 아버지의 지시와 명령과 따라줘야 될 자기가 못 메우니까 모든 인생의 비극과 슬픔과 공포와 실패는 진리 값을 채우지 못하는 나의 허접함과 모자람에서 나오는 나를 버리는 것으로 징계 받는 것으로 저주받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에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무의식에서는 억눌린 힘이 아니고 그냥 힘이란 말이죠. 그 중에 하나 강(밀)도, 밀도가 강하게 응축이 되면 자아가 되고, 그게 아버지가 되고, 그게 하나의 개념이 되고, 개념이 표현되면 기호가 되는 거죠.

 

그러면 힘들은 어떻게 되나? 힘들은 말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억압을 받게 되면 목적이 생겨버려요. 목적이 사람 잡아요. 여러분, 한 번 삶이 왜 힘들다고 생각합니까? 달성해야 될 목표와 숙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에요? 오늘 이것 해야지, 성적을 높여야지, 지난달은 수입이 180인데 이번 달엔 190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거예요.

 

오늘 8일이잖아요. 3일 뒤 11일은 빼빼로데이. 그 날 내가 상대방에게 프러포즈를 하는데 차이는 어떻게 하느냐? 튕기면 어떻게 할까? 이런 자체가 목적이 되죠. 목적은 목표 때문에 생겨요. 목표와 목적이 있다는 것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반드시 결핍이에요. 모자람이에요. 모자람이 있는 이상은 행복은 물 건너간 겁니다. 지금 충족되지 않는데 무슨 행복이에요.

 

결혼하려고 하니까 만족합니까? 결혼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 목적에 도달한 순간 새로운 결핍이, 지금까지는 좋았는데 앞으로 저 색시가 원하는 걸 충족하려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려면 고무장갑 하나 사줘, 말아? 이러한 아이디어가, 전에는 나만 생각하면 됐는데 눈치 본다고 설치게 되면 그럼 내 취미생활은 그동안 행복했던 주체적인 패턴은 깨져버려요. 그러면 결혼이라는 것이 내 것 양보할만한 가치 있는 것인가? 혼인신고하지 말고 그냥 동거해? 나이 많은 사람은 혼인신고 할 필요 없어요. 뒤늦게 혼인신고해서 자식들한테 욕먹지 말고.

 

꽃씨 볼 때 꽃봉오리 나온다고 보는 그 시선, 인간 속에 이미 자기 목적,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 목적대로 살기 때문에 자기뿐만 아니고 꽃씨 보면서 꽃봉오리를 예상하는 거예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렇게 해서 인류는 힘과 힘으로 계속 모아지는 겁니다. 플라톤은 목적이 이데아 세계, 죽고 난 뒤의 세계에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게 아니다. 살아 있으면서 얼마든지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변화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귀가 왜 있느냐? 듣기 위해서. 눈은 왜 있느냐? 보기 위해서. 이런 사고방식이 지금껏 계속 되고 있어요.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스피노자입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사상과 라이프니치, 두 사람을 표현주의 철학자라 해요. 이 세상의 실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신이다. 그런데 신은 어디 있느냐? 신이 어떻게 생겼느냐,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은, 평소에 본인이 자기 반성적인 것, 인간은 자기반성이 없으면 짐승이라고 했지요. 인간이기에 늘 자기 확인해야 돼요.

 

자기 확인 안 하면 차에 치어 죽습니다. 차가 온다. 내가 건너갈까, 말까? 이것 자기 확인입니다. 자기 확인이 되지 아니하면 보호자가 필요해요. 자기 확인이 안 되는 사람이 치매 환자. 어린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말은 자기반성, 자기 확인이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한테 지시할 수 있는 역량이 내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 설 수 있는 겁니다. 이거 찬 건지 더운 건지 매운 건지 짠 건지 분간도 못하고 무조건 입에 다 넣어요. 한 10개월 쯤 되면. 그때는 엄마가 도와줘야 돼요. 해로운 게 들어가면 안 되니까.

 

자기 지시, 자기반성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왜 이런 현상이 있다고 했습니까? 창세기 2장과 3장의 인간이 다르지요.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의 일부였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에덴동산이 대상이 돼버렸단 말이죠. 생명나무처럼 일부가 아니고 이제는 생명나무를 따먹어야 될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된 거예요. 나 빼놓고 타인이니까 그래서 부부사이도 창세기 2장에서는 둘이 있으나 하나가 되었지만 3장에 넘어오면 저 여자가 따먹으라 해서 따먹었다고 해서 타인의식이 생기지요. 타인이 있다는 말은 나로부터 자의식부터 출발한 거예요.

 

그래서 무화과나무로 가서 내 것 지킨다고 치마를 입은 거예요. 상대방의 눈을 가린 게 아니에요. 자기 몸 하체를 가렸다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지만 내 것 가리면 부끄러움이 없는 쪽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그 시도를 내가 시도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내가 수치스럽지 않고 살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인간은 말하고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우병우라는 전 민정수석이란 사람이 기자가 물으니까 째려봤잖아요. 그런데 국민들이 원하는 건 뭡니까? 그냥 안 보는 거죠. 누가 째려본다는 것은 내 것을 지키는 거고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남한테 노출시키는 거예요. 무화과나무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앞에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따먹어서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과 말 상대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타인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겠어요? 본인이 자기반성이 되니까 내가 반성하는 도구, 그 수단을 신에게 그대로 던지는 거예요. 어디 계십니까? 키는 얼마고, 몸무게은 얼마 나오고 예수님 얼굴은 누굴 닮았어요? 이런 걸 묻지요. 신은 어디 있느냐고 했는데 스피노자는 그걸 문제 삼습니다.

 

이 안에 물 들어있지요. 제가 뚜껑을 열고 물 부으면 축축하게 젖겠지요. 스피노자는 인간처럼 상대자가 되는 개체로 돼있는 신을 온 우주에 부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신은 없는 곳이 없지요. 자연세계 전체가 신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신의 속성에서 나온 거예요. 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게 스피노자의 철학이에요. 그걸 신의 내재성이라 하지요.

 

실체를 신 하나로 봤기 때문에 범신론은 아니에요. 신을 인정하되 신이 모든 세계에 다 있는 겁니다. 이걸 신의 내재성이라. 신의 내재성이 되면 실체, 쉬운 말로 개체, 개체는 없고 표현주의니까 모든 것은 신의 표현이에요. 신이 움직이는 속성을 보여주는 양태, 또는 신의 양상으로 보는 것이 스피노자에요.

 

어떻습니까, 믿음이 좋은 거예요? 믿음 좋지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 같지요. 네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 참새를 누가 키운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개체를 보니까 참새라는 개체는 알아서 자생적으로 큰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 안에 형상과 본질이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참새가 알아서 크고 알아서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키우지요. 들풀도 하나님이 키우지요. 하물며 염려한다고 키가 자랄 수 있어요? 못 자라지요. 하나님이 키우시지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공중에 나는 새도 주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아요. 떨어져도 시장에서 팔릴 때 주의 뜻 없이 사고팔 수 없어요. 모든 것이 주님의 세계고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거지요. 스피노자의 생각이 신앙 댁길이에요. 멋지지 않습니까?

 

개체는 없다. 다 신의 모습에 불과하다. 신의 모습이라 한다면 부부 사이에도 개체로 보지 말고 상대방을 하나님의 모습, 양상으로 보자는 말이죠. 내가 주례한다면, 지혜로운 아내는 여호와께서 보내심이다. 잠언서의 말씀입니다. 너는 여자로 보이느냐?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배후에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 그게 여자에요. 신의 모습이에요.

 

개체로 보는 도시가 불 심판받는다고 어제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나타나니까 깡패들이 자기와 동일한 개체로 봤잖아요. 그런데 롯은 이 사람들은 우리와 동일한 그런 분이 아니라고 보호하잖아요. 그래서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낯선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했어요.

 

스피노자는 우리가 생각한 개체는 없지만 개체로 보고 하나하나가 귀하다는 거예요. 라이프니치는 이 세상의 모든 개체는 전부 다 환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스피노자는 귀한 것들이다. 차이 나지요. 라이프니치에서 중요한 것은 예정조화라고 하는데 신의 뜻에 의해서 우연한 만남에 의해서 그렇게 돼야 했던 것이 바로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들이다. 라이프니치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죽고 사는 것에 너무 기죽거나 힘들어 하거나 불행하다고 여기지 마라. 어차피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있다가 없어지더라도 귀한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알아서 하세요.

 

들뢰즈는 둘 가운데 스피노자를 취해서 경험적 초월성이라는 것을 자기의 철학으로 제시하게 돼요. 초월적 경험론이라고도 하고. 이게 뭐냐 하면 둘로 나누는 겁니다. 잠재성과 현실성으로.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올 때는 강밀도 또는 우연한 강도에 의해서 현실이 등장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은 어떤 목적 같은 것은 없어요. 그리고 의미라는 것도 없어요.

 

한 가지 예를 들게 되면, 난초와 벌이 있는데 이건 현실성에 속합니다. 사람은 난초를 난초로, 벌은 벌로 보는데 난초의 씨앗을 벌이 이동시켜줘요. 그러면 난초 입장에서 벌은 생식기관이 되는 겁니다. 벌 때문에 난초가 점점 퍼지기 때문에. 난초는 현실성을 갖고 있는데 들뢰즈는 이걸 자기 나름대로 영토를 갖고 있다고 해요. 영토를 갖고 있는데 벌이 끼어듦으로써 난초 본연의 영토에서 벌까지 합류하니까 이것은 탈영토화가 되고, 다시 벌까지 합쳐서 난초를 생각한다면, 재영토화 된다. 이 과정이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되풀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들뢰즈가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 것과 네 것, 이런 식으로 사는 자체가 원래 현실이 아니라는 것, 현실은 내 것이고 싶어도 어제와 오늘이 또 달라요. 어제 나와 오늘의 나는 어제 나에서 탈영토화 되어서 재영토화 된 겁니다. 그런데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마주치는 잠재돼있는 어떤 힘에 의해서 환경에 의해서 오늘의 지금이 내가 새로운 강도를 가지기 때문에 내가 된다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봐야 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철학입니다.

 

 

10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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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8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7-들뢰즈

(강의:이근호 목사)

 

 

들뢰즈에 있어서 기존에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내 것, 네 것을 해체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을 인간을 인간으로 보면 자기 뜻의 설명이 곤란하니까 인간이란 것을 아예 없애버려요. 인간을 기계라고. 기계로 보면 사람들은 상당히 당황스럽지요. 인간이 기계다? 인간이 어떻게 기계지? 인간을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로 봐요. 들뢰즈가 이런 단어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기존에 네 것, 내 것이란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체하는 방법에 있어서 기존의 개념으론 안 되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인간 자체를 욕망의 기계로 만들면 힘들의 반복적인 차이라 했잖아요. 그렇다면 욕망의 기계가 어떻게 현재 보고 있는 인간으로 될 수 있느냐?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반복해보면, 우연에 의해서 힘들이 연결되겠지요. 연결되다가 그게 계열이 되고, 이쪽 계열과 다른 계열이 되는 것을 연접이라 하고, 엉뚱한 것이 치고 들어와서 연결되는 것을 이접이라 해요. 인간이란 해체해보면 이질적인 계열이 보여주는 공명현상이라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만나서 공명현상을 보여주다가 그것이 어제라면, 또 오늘 되면 또 이질적인 것이 들어와서 새로운 공명현상을 나타내면 오늘의 인간이고 또 내일 되면 도 이질적인 계열이 모여서 공명현상을 보이게 되면 내일의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 현재라는 것은 남아있지 않아요. 항상 현재로 왔다하면 다시 과거로 가버리고 미래를 예상하게 되고 또 내일 되면 현재를 미끄러지고 과거, 미래로 갈라지는 현재 자체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그러한 시간관을 갖게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 있고 난 뒤에 인간이 목적을 추구하니까 여기에 시간적인 간격을 생각하겠지요. 그 간격은 우리에게 결핍을 낳고 결핍은 우리에게 초조와 불안을 유발하고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로 연결되는 거예요.

 

내 님은 누굴까? 초조하게 기다리면 계속 내가 힘들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진짜 내 님을 만났다. 그러면 기쁘지요. 기쁘면서도 아까 그걸 대입해보면, 기쁨은 현재잖아요.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나눠진다 했지요. 내가 이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었을까? 이게 다야? 이 여자와 평생을 살아야 돼? 이보다 분명히 더 예쁜 여자가 있을 텐데 그 여자를 내가 정녕 포기해야 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또 드는 거예요. 이러면 비윤리적이야.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해. 이러면 안 돼, 라고 하면 아버지의 이름의 윤리도덕이 또 작동하게 돼요. 너는 절대로 그런 인간되면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짐승이야, 라는 어릴 때부터 날아온 윤리도덕이 또 나를 힘들게 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런 것도 미래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로 완료된 것으로 보자는 거예요. 그걸 아이온이라 하는데 시작과 끝을 임의로 내가 정하면 여기서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그 의미는 내가 의미를 잡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내 밑을 받치고 있는 차이의 힘들에 의해서 나오는 의미기 때문에 의미의 효과, 또는 효과로서의 의미라고 하는 겁니다. 의미는 그때그때마다 내가 여기에 처해 있는 힘들의 마주침에 의해서 내가 저항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수용될 수밖에 없는 의미를 내가 잠시 누리고 있을 뿐이다. 내일 되면 그 의미는 무의미하게 날아가 버립니다.

 

그렇다면 의미에 대해서 이걸 표현 층이라 해요. 표현 층에서 의미가 나오는데 의미가 기호의 세계에요. 기호, 단어, 말, 문장에 의해서 계속 표현되는 층이 따로 있어요. 그 밑에 이걸 유지하는 물질적인 내용 층이 따로 있어요. 물질적인 내용 층은 의미를 보여주기 전에 기반이 되는 기초가 되는 근원이 되는 따로 있어요.

 

예를 들어서 머리와 얼굴의 차이점이 뭘까요? 머리는 몸통에서 솟구쳐 나오는 이 부분이죠. 머리는 내용 층에서 머리지만 표현 층에선 머리라 하지 않습니다. 사진 찍을 때 머리 찍을 때 머리 찍습니까, 얼굴 찍습니까? 머리를 찍는 것은 개, 돼지한테나 하는 소리죠. 사람한테는 머리를 찍는 게 아니고 얼굴을 찍습니다. 표정을 찍어요. 그런데 이 표정은 바로 표현 층에서 이 세상 상징세계에서 많은 사회적인 경험과 부딪침 이런 것이 얼굴 안에 다 표현돼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몸을 두고 이야기하지 말고 그건 내용 층에서 하는 것이고, 표현 층은 얼굴이 그 사람을 대표한다고 보고 있어요.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그림을 설명하면서 들뢰즈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얼굴이 인간의 표현이라면 그 속에 내용 층이 있고, 내용 층은 각종 여러 가지의 힘들이 부딪치고 만나고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정확하게 얼굴을 통해서 사람이라 하지 않고 들뢰즈는 이걸 ‘사람 되기’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되기가 달라요. 사람이라 하면 한 번 사람은 영원한 사람이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 되기란 그때그때마다 사람이기도 하고 개가 되기도 하고, 소가 되기도 하고. 한 순간은 사람이지만 다른 순간은 개가 될 수 있지요. 술 처먹을 때. 또 나쁜 짓하면 귀신 되지요. 만약에 나는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사람이란 말이 성사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따로 있고 사람이 맞추려고 하는데 나라는 자체가 기호, 하여튼 효과에 불과한 건데 효과는 원인이 아니고 결과에요. 어떻게 결과에 불과한 것을 주어 자리에 놓을 수 있느냐 말이죠. 마치 예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어떻게 가짜로 행세할 수 있느냐 말이죠.

 

우리 집은 부자다, 하고 나는 지금 벤츠란 차를 가졌다는 말이 같은 말이 아니에요. 나는 부자란 말은 옛날부터 부자기 때문에 벤츠를 가질 자격이 나한테 있단 뜻으로 벤츠를 자랑한 게 아니고 나를 자랑한 게 돼요. 나는 벤츠를 샀다는 말은, 나 같은 인간이 벤츠 같은 차를 탈 자격이 돼? 나는 벤츠를 타다가 망가져도 할 말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런 뉘앙스가 강해요.

 

여러분, 어느 쪽이 자본주의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요? 한 번 부자는 영원한 부자다. 이게 자본주의에서 행복하게 살겠습니까? 아니면 돈이야 있다가도 없는 거지. 어느 쪽이 행복하겠어요? 돈이란 돌고 도는 거지. 만약에 내가 돈을 붙잡으려고 하면 돈의 노예가 되잖아요. 돈을 손님처럼 지나가는 과객처럼 느끼며 살아야지요. 때로는 내 팔자에 부자가 되다니 이건 염치없는 짓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그나마 자본주의사회에서 다소 숨 쉴 만한 행복이잖아요.

 

결혼 앞두고 있는 사람한테 이런 소리하면 안 되지만. 왔다가도 헤어지만 할 수 없지 나 같은 팔자에 무슨 결혼이고. 이런 생각으로 결혼하시란 말입니다. 너는 내가 점령했으니까 내 거야. 이렇게 마치 소유대상으로 삼아선 안 된단 말이죠. 내가 그녀의 소유물 돼서도 안 되죠. 왜? 들뢰즈의 철학에 의하면 모든 것은 그때 만남에 대한 의미효과, 효과로서의 의미에 불과한 거예요.

 

여기 시계가 있는데 이 시계가 처음 가질 때 기쁨과 지금 몇 년 지난 후와 같을까요? 다르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욕망하는 기계거든요. 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와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를 표현 층에서 뿜어낼지 우린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걸 장담할 수 없지요.

 

그래서 들뢰즈는 자기 이론으로 모든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상체계에 대해서 여지없이 공격에 나섭니다. 벗어나라. 노마디즘이라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유목주의. 유목주의의 특징이 뭐예요?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늘 쉴 새 없이 떠나는 겁니다. 기존의 권력체가 어떤 영토를 갖고 있다면 유목주의는 영토를 떠나는 겁니다. 그러면 탈영토화 되겠지요. 탈영토화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자기 고유의 새로운 영토를 만들 때 재영토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자놀이거든요. 처음에 자본주의가 발생할 때 금융권에서 시작했고 금융권의 이자놀이에서 자본주의가 생겼어요.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건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어요. 돈 빌려주시면 한 달 뒤에 이자 쳐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건 자본주의 아니에요. 자본주의는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빌려줘서 이자 받는 겁니다. 돈이 없는데 빌려줄 돈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돈 줍니까? 남의 돈 빌려서 하지요. 그게 금융기관이잖아요. 자기 돈 빌려주는 게 아니고 남의 돈 빌려서 그 돈을 주고 시간차 공격하는 거예요. 이쪽 이자는 한 달 뒤에 갚고 갚은 것은 두 달 후에 갚는다면 한 달 동안은 돈이 거저 생기는 거잖아요. 그게 자본주의에요.

 

기업가들이 물건 팔아서 이윤 얻는 것보다 기업이 갖고 있던 부동산이나 그것의 이자로 얻는 이익이 더 커요. 수출해서 얻는 이익보다도 기업가가 번 돈을 부동산이라든지 채권 같은 것을 사는 거예요. 그 이자가 기업을 더 키운다니까요. 대재벌의 오너가 지분을 얼마나 갖고 있습니까? 2~3% 갖고 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주주 돈이죠. 그 돈을 오너가 쓰는 거예요. 마치 내 돈처럼 쓰는 거예요. 오너는 그 주주에게 은행이자보다 더 벌게 해주면 되잖아, 딱 그 한 마디로 계속 돈을 끌어 모으는 겁니다.

 

그러니까 노동해서 대가 얻는다는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은 날아가 버리고 돈이 돈을 버는 거예요.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 자본주의가 분출하는 욕망의 화신이라고 보는데 자본주의 자체가 숱한 욕망, 힘들의 모음입니다. 따라서 들뢰즈가 이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난다고 본 거예요. 못 벗어난다는 것이 해결책이 되는 겁니다. 참 희한하죠. 기존의 생각은 자본주의 자체가 그 안에 들어가면 내 것, 네 것이 들어 있잖아요. 자본주의를 벗어나느냐, 못 벗어나느냐, 라고 질문하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관건이에요.

 

그런데 들뢰즈는 자본주의를 벗어나라고 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이 생각이 바로 자본주의에 말리지 않는 사고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자본주의가 테두리라면 여기서 못 벗어나면 어떻게 하느냐? 돌아다니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힘들이 나를 몰아넣는 대로 가면 돼요. 전에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내 것이 있잖아요. 내 것이 손해나면 나는 실패로 보고 내 것이 내 돈이 증가하면 성공으로 봤지요. 이게 기존의 자본주의 아닙니까.

 

그런데 들뢰즈는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나요. 자본주의를 힘들의 욕망의 차이들의 반복으로 보기 때문에 벗어날 순 없지만 돌아다닐 순 있잖아요. 옛날엔 돌아다니면 실패로 봤다니까. 고정된 내 자리가 있기 때문에. 내 것을 버리면 우리는 인생 조졌다, 실패했다, 자살한다고 나왔잖아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돌아다니면 성공, 실패란 게 아예 없는 거예요. 마음껏 자본주의를 누리면 되는 겁니다. 돈을 모으란 게 아니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괜찮고 있으면 쓰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거예요.

 

도대체 자본주의에 속한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자본주의 하에서 힘들어 못 살겠다, 불행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누구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을 안 놓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살다 보면 내 것일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내 것이라도 내 것 없다고 여기고 내가 변신, 변신, 변신을 거듭하면 되거든요. 그게 차이들의 반복이니까. 그게 존재가 아니고 생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이에요. 생성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늘 새로운 사건들이 오게 돼있어요. 사건들이 내용 층에서 오게 되면 표현 층에서 효과로써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인간 세계가 이처럼 돼버리면 나를 들뢰즈는 유기체라 하는데 유기체를 없애버립니다. 나를 유기체라 하지 말고 기관 없는 신체. 기관 없는 신체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아요. 늘 부단하게 움직입니다. 마치 세포가 마주쳐서 정자와 난자가 마주쳐서 배가 되죠. 배에서 귀도 코도 나오잖아요. 배가 어디로 튈지 모르잖아요.

 

그처럼 유기체를 나라고 하지 말고 나를 그 안에 녹여버리잔 말이죠. 그 배도 움직이는 그 자체를 나라는 의미를 만들면 되는 거예요. 아까 스피노자에서 어떻게 하든 신의 양태다. 신의 모습으로 보자.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를 누리게 되면, 새로운 의미를 맛보는 일종에 떠돌이 되죠. 떠돌이 되고 재영토화. 재영토화 될 때는 재코드화란 말을 하는데 코드 알지요. 법칙. 그것이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해체되면 또 새로운 삶을 하면 돼요.

 

결국 들뢰즈의 철학의 특징은 그냥 인생을 즐길 때까지 계속해서 즐기는 겁니다. 자극에 의해서 즐기는 게 아니고 즐기는 걸 쟁취해서 즐기는 게 아니고 지금 형편 자체를 나한테 적합한 즐거움으로 인식을 해버리는 거예요. 기존의 즐거움은 결핍에서 온 즐거움이에요. 배가 고픈데 밥 먹어야 되는데, 밥 먹으면 얼마나 즐겁겠나. 하지만 들뢰즈는 밥이 없으면 안 먹는 것도 즐거움이야. 그 자체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란 말입니다. 그게 생성이니까.

 

그런 나는 지금 이러한 힘들, 기관 없는 신체죠. 힘들이 서로 약간의 강도를 이뤄서 지금의 내 모습을 이뤘고 내일 되면 다른 힘들을 만나게 되면 강도가 옅어지던 강하게 되던 그때 가서 보고. 항상 강도가 제로가 된 상태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예요. 물의 온도가 0일 때는 얼음이 될지 물로 그대로 있을지 모호하잖아요. 모호한 경계선상에 있잖아요. 늘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고 사람 되기. 사람 되기란 사람으로 언제 갈지 몰라요.

 

술 먹으면 개가 될 수 있고 착하면 천사될 수 있고 언제든지 유동적인 모습으로 항상 유목, 떠나는 생활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는 철학이라고 들뢰즈는 말하고 있습니다. 대자연은 늘 가변적이고 끊임없이 개조되고 구성되고 또 구성되고. 거기서 내가 무엇을 할까, 라고 말하지 마라. 무엇을 할까를 말하는 순간 또 결핍을 낳고 모자람 때문에 자기 스스로 탓 할 수가 있어요.

 

이제부터 남은 시간에 제가 할 것은 들뢰즈 철학이 무엇을 노리고 이런 주장을 하는지 근원적인 의도가 있어요. 공무원 승진할 때 주위 사람들이 옛날에는 난을 주잖아요. 난을 주는 것과 부케를 주는 것과 차이점이 뭘까요? 난은 한 종류에요. 대장이 있고 수직적인 체계를 이루지요. 부케는 한 종류의 꽃이 아니죠. 여러 종류의 꽃을 꺾어서 하죠. 그걸 리좀이라고 하는데 이건 풀처럼 옆으로 퍼지는 우연히 마주침, 우연한 만남이죠. 우연히 사건의 다발로서 살아가는 것.

 

들뢰즈가 왜 이런 철학을 주장하느냐 하면, 그동안 모든 것이 신 밑으로 서열화, 계급화 된 이 사회가 인간의 철학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신이 있고 신보다 못한 건 천사고 천사 밑에 인간 있고 인간 나름대로 서열이 있었는데 그 서열이 결국 수직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설치해놓은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착하게 산다는 목표가 있지요. 신처럼, 천사처럼 신의 형상을 본받아서 점점 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자체로 결핍이 되잖아요. 자기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결핍, 욕망만 더 강렬해지죠. 타인과의 차이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돈 있어도 교양 없으면 열등감을 느끼잖아요. 어떤 중국 사람이 돈은 많이 가졌는데 교양은 모자라서 영국의 신사도를 배우기 위해서 월 이천만 원을 소비한다는 거예요. 스테이크 써는 법, 숙녀에게 자리를 내미는 법 등을 배워요. 교양까지 겸비하겠다는 이 말이거든요. 세상에서 돈만 알고 살다가 죽을 때가 되니까 천국 가야 되잖아요. 자기 생각에 천국은 천사 같은 착한 사람만 간다고 생각하니까 막판에 육십 넘어서 교회 와서 성화론으로 말씀대로 살아서 천당 가겠다는 사고방식과 똑같은 거예요.

 

들뢰즈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있다는 거예요. 신의 심판. 그래서 들뢰즈 철학은 신의 심판에 대들어라, 반발하라, 반항하라. 이게 밑바탕에 깔려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의도적으로 신의 심판에 대해서 빗나가라, 어긋난 짓을 해봐라. 그래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신에게 불복하는 거예요.

 

그러면 신은 그동안 어떤 짓을 했는가? 이 세상에 많은 변화가 있는 변화 중에서 신은 율법을 줘서 많은 변화 중에서 율법에 합치 된 것만 따로 골라서 서열화 시킨 거예요. 이 세상에 많은 변화가 있는데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신의 법에 의해서 임의로 구분지은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천국과 지옥이잖아요. 왜 고만고만한 똑같은 인간인데 인간의 갈 길은 서로 다른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무덤에 있는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 다음에 무슨 말이에요? 부활은 다 되는데 선한 자는 선한 부활로, 악한 자는 악한 부활로 나오지요. 같은 인간인데 마지막엔 두 종류가 되잖아요. 그렇다면 두 종류가 됐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미리 온 신의 법을 보니까 사람에게 죽는 것은 정한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있으리라. 신의 심판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게 말이 아니란 말이죠. 힘들어 죽겠단 말이죠. 뭔가 하고 싶어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어떤 아가씨와 사귀는데 그 아가씨가 내게 너무 과분한 여자가 아닐까? 내가 감당이 안 되는데 이쯤해서 헤어지자고 말할까, 말까? 이런 것. 왜 자꾸 주춤주춤하느냐 말이죠. 그냥 사태가 몰아가는 대로 일을 해치우면 되는데 누가 너로 인생을 주저하게 만드느냐 말이죠. 그게 따지고 보면 전부 다 신의 법이란 거예요. 하나님의 법은 법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심판으로 이어지니까 그 심판에 불복하는 반항의 모습을 보이자. 그게 들뢰즈에 깔려있는 본모습이에요.

 

그게 일리가 있는 것이 서양의 모든 철학의 근거가 선한 것은 신의 법이 요약돼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선한 것이 신의 법이 요약된 게 아니고 신의 법에 의해서 탈락되고 배제되고 구분되어진 쓰레기라고 여기진 그 속에서 얼마든지 선한 것이 있다. 왜? 우리는 그 쓰레기 출신이니까. 우리는 쓰레기들의 조합이니까. 그 쓰레기에 의해서 통합된 존재니까.

 

내가 그걸 통합한 게 아니고 그 쓰레기들이 우연히 만나고 흩어지는 가운데서 만나고 연결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탈영토화 됐다가 재영토화 되는 그 과정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내가 나라고 종잡을 수 없는 새로운 나로 창조되는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사는 기쁨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그걸 희열로 봐요. 어떤 희열? 새로움이 주는 희열, 매일 창조될 수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신의 법에 주눅이 들어 사느냐 말이죠. 율법에 주눅 들어 살 필요가 뭐 있느냐 말이죠.

 

심판 겁내지 마라. 어차피 우리는 심판의 대상으로 굳어지지 않고 우린 매일같이 해체된다. 뭔가 굳어져야 이놈, 이렇게 되는데 이놈이 없네. 내일 되면 이놈이 딴 놈이 돼요. 다른 사건에 이접, 서로 접합했으니까. 이 사건, 저 사건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이놈 할 대상, 주체가 없어요. 그냥 매일같이 내가 생산될 뿐이니까. 욕망하는 기계들의 우연한 접합에 의해서 생산된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들이니까.

 

신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고정됐을 때만 신을 믿어요. 내가 고정되지 않는다면 신은 없지요. 없는 게 아니고 신은 재영토화 되겠지요. 그래서 이런 공식이 나와요. 들뢰즈에 의하면, ‘나의 변화=하나님의 변화’에요. 내가 달라지면 내가 믿는 하나님도 병행해서 달라지게 마련이란 겁니다. 20대 하나님과 30대 하나님이 다르지요. 용어야 성경에 나오는 용어지요. 여호와가 어떻고,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그 예수를 보는 인식이 20대, 30대, 40대, 50대에 달라요.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잃을 때 다르고.

 

부자 됐을 때 하나님과 가난할 때 하나님이 달라요. 가난할 때는 박근혜 하야하라, 하지만 갑자기 재벌 되면 최순실이 문제지 박근혜가 뭐가 문제야. 다르지요. 여유 있는 자와 생존이 간당산당한 자는 달라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요. 에이, 더러운 세상 같이 망하자. 한 달에 연금 천만 원씩 받아 크루즈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과 세상 보는 눈이 달라요. 한쪽은 지옥 같은 세상, 한쪽은 Oh, beautiful world! 완전히 다르다니까요.

 

내가 달라지면 세상도 같이 달라지고 세상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달라져요.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도 달라질 것 같으면, 그걸 객관적으로 볼 때 결국 어차피 달라질 것, 뭘 고민하느냐 말이죠.

 

이 들뢰즈의 철학은 니체의 철학에서 나옵니다. 니체의 철학은 움직이는 철학이에요. 하나로 고정할 수 없고 계속 움직여 나가는 겁니다. 그 움직임을 니체는 권력의 의지다.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를 빼세요. 강물 같이 흐르는 권력 자체의 의지가 되는 겁니다. 니체에서 바라볼 때 현대사 모든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5.16쿠데타, 그래야만 했었어. 6.25전쟁 그래야만 했었어요. 그때 그 농밀한 밀도 있던 이슈화 된 사건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잊어버릴 거예요.

 

니체는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들뢰즈는 공명의 효과,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데 공명하게 되고 공명한 것이 모이고 그 다음에 그것이 운동을 낳는다. 강요된 운동이라 했는데 강요된 운동이니까 우리는 수동적 존재로 보는 거예요. 이 세상에 그냥 떠밀려가는 나란 것은 없고 떠밀린 채 그런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시간에 들뢰즈 철학을 복음의 입장에서 제가 평을 해드리겠습니다. 들뢰즈 철학의 문제점이 뭐냐? 동일성이 자아를 낳거든요. 자아란 동일성을 깨버리고 차이, 어떤 차이? 이질적인 힘들의 다발로 보는 차이, 이 차이가 반복되면서 세상의 모든 현상이 일어난다고 봤는데 복음으로 봤을 때 이질적이라는 게 문제에요. 들뢰즈 철학을 복음으로 꼬집을 수 있는 것은, 들뢰즈는 이질적인 것이 뭔지 몰라요.

 

들뢰즈 철학이 한계는 어제와 오늘 내가 동일하다는 동일성을 근거로 해서 그게 아니라고 한 거예요.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앞에 동일성이 이미 전제돼있지요. 그런데 성경에서의 이질성은 이 세상에 갇혀있는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죄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죄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들은 선을 알아요. 나름대로, 온전한 선은 아니고.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이라고 했지요. 그들이 선을 아는 것은 선과 악의 차이를 안다는 거예요. 선과 악을 아는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돼야 될 이유였습니다. 선악과를 안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런데 그들은 이미 선과 악을 알아버렸지요.

 

여기서 좀 생각해봅시다. 선과 악을 아는 것 외에 다른 윤리적 길이 있을까요? 중간 과정은 없어요. 선과 악을 알면 전부를 알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전부를 알기 때문에 전부 아는 그 바깥을 자연적으로 모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전부를 알기 때문에 추가적인 전부가 필요치 않아요.

 

예수님이 한 마디 하게 되면 이렇게 이해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저건 예수님의 선한 말이다. 예수님의 말이 선한 말이 아니에요. 이질적인 말이지 낯선 말이지 선한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부자 청년은 말하기를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한 태도는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오는 태도와 마찬가지잖아요. “주님이여, 말씀 주셨는데 이 말씀 지키면 선한 사람 되겠지요?” 그렇게 한 것이 잘못됐지요.

 

들뢰즈가 공격한 건 다 맞아요. 기존에 중세부터 내려온 서양의 모든 기독교 역사가 하나님 말씀을 보는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선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해요. 플라톤 철학이니까. 플라톤 철학은 이 세상 모든 것은 꿈같은 것으로 사라지고 진짜배기는 천국 가면 있다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면 거기에 진리의 세계가 펼쳐져있다는 거예요. 이데아 세계, 관념의 세계 정도가 아니라 진짜 세계. 참된 형상이고 이 지상은 다 질료, 물질적인 재료가 되고, 그런 세계를 들뢰즈가 잘 공격했어요. 맞아요. 현대양자물리학이나 현대생물학으로 봐서 다 맞는 이야기에요.

 

인간의 얼굴이란 내가 노동한 얼굴이 아니라 만나고 헤어지고, 얼마나 많은 자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스쳐지나가고 그러한 경험들이 누적되어 인간의 얼굴을 구성합니다. 얼굴도 하나의 기계고 기계에서 나온 표현 층이니까. 그래서 얼굴은 그 사람의 얼굴 되기에요. 지금은 이 얼굴이지만 내일 어떤 사람을 만나면 얼굴 표정이 달라질 수 있어요. 그 사람 얼굴 안에 평생의 경험과 모든 여정이 다 담겨있어요. 그래서 태진아가 불렀던 <옥경이>란 노래에 보면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얼굴을 못 들잖아요.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 여자는 얼굴을 못 들고 눈물만 뚝뚝 흘리지요.

 

그래서 동창생 만나서 얼굴 삭았다고 하면 기분 나빠 합니다. 살아온 과거가 힘들었구나. 참 아슬아슬하게 왔구나. 등산복은 등산할 때 입는 거죠. 그런데 평소에 등산복 입으면 문제 있는 거죠. 그 사람 얼굴이 돼버려요. 얼마나 옷이 없으면 평소에 등산복 입고 돌아다닙니까. 그래서 좋은 옷 입고 신발도 70만 원짜리 프라다로 신고. 그게 자기 얼굴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부자고 권력 있다는 자기 얼굴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얼굴이 교도소란 새로운 이벤트, 새로운 사건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다른 얼굴이 될지 알 수 없어요.

 

그게 들뢰즈 철학의 공헌입니다. 들뢰즈 철학은 내 것이라고 동질성을 유지 마라. 모든 것은 상황 따라 그때그때마다 달라진다. 그걸 들뢰즈는 동질성 주장하지 마라. 이 땅에는 하나님의 신의 율법에 의해서 제거된 이질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진정한 이질성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이질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 죄에 갇혀있던 이 세상에 의인이 침투하거든요. 침투할 때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에 의해서 말씀대로 침투합니다. 이것이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이죠. 이 비밀을 복음의 비밀이라 합니다. 복음의 비밀이 사람들 눈에 띠었지요.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전부 보고 있잖아요. 본다고 해서 비밀이 비밀로 노출되겠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못 본다고 하니까 네가 눈을 떴구나.

 

진정한 이질성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그들이 선악으로 이미 현실 자체를 틈새 없이 내부를 선악으로 완전히 페인트칠을 해버렸거든요. 막힘이 없이 막아버렸어요. 니체는 이 답답함을 이렇게 합니다. 니체 책에 [선악을 넘어서]라고 있어요. 선악을 넘으면 뭐가 있느냐? 선악 너머에 신들의 자유분방함이 있어요. 거기는 감각이에요. 감각이 이성보다 더 우선돼야 된다.

 

그걸 따랐던 사람이 이번에 노벨문학상 받은 밥 딜런. 히피족이에요. 히피족의 우상입니다. 국가가 행하는 모든 수직적인 절차, 명령을 벗어나서 탈영토화 해서 유목처럼 떠나는 거예요. 젊은 사람끼리 갖고 있는 숨 막힌 이성에 억눌린 디오니소스적인 니체가 이야기한 충동에 따라서 살아보자. 그걸 주장한 사람이 밥 딜런이에요.

 

그것을 지금 들뢰즈는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라. 다른 대안이 없다. 그것이 날마다 오는 새로운 창조지요. 들뢰즈는 라캉이나 프로이트를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래서 [안티 오이디푸스]란 책을 냈어요. 아버지 이름이 아니고 알 수 없는 욕망들의 기계의 마주침으로써 이 세상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들뢰즈가 복음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면 들뢰즈한테 맞아죽어요.

 

이러한 현상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이미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됐는데 그 심판의 양상 중에 하나를 우리가 들뢰즈를 통해서 오늘 배운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다녀간 세상, 하지만 지옥 같은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설계하고 행복을 노래하는 그러한 마귀적인 모습을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거기에 편승하고 있지 않은지를 돌이킬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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